그들이 말하지 않은 진실, 그들이 말한 거짓(04)
● 팩션(faction)형 사모펀드 투쟁기
● 6조8천억은 어디로 증발했나
○ 이게 사모펀드 였어요? 누가 우리와 함께 할까
4월의 오후 사당역 주변은 언제나 사람들이 붐빈다. 밤이 되면, 온갖 화려한 네온사인 불빛들이 낮 동안 쌓인 애환과 피로를 풀고 가라고 사람들을 유혹하지만, 코로나 19 확산 이후 도시 소음도 잦아들고, 거리 두기 방역시스템으로 한풀 꺾였다. 상점마다 빈자리가 많고, 음울한 기운이 가득하다.
빌딩 숲속 사이 기울어가는 봄 햇살이 마지막 남은 한 뼘의 빛을 처연하게 뿜어내고 풀이 죽자, ‘With You’ 카페의 조명은 조금씩 밝아진다. 작지만 차분한 분위기의 카페, 테이블에 놓인 작은 화분에서 라벤더 허브향이 은은하게 퍼지고 야오시팅(Yao siting)의 ‘How did I fall in love with you‘ 팝송이, 카페 대표 음악인 듯 감미롭게 흘러나온다. 원곡은 Backstreet Boys가 불렀지만, 야오시팅의 솜사탕 같은 목소리가 더 호소력 짙게 느껴진다.
What did I say, what did you do (내가 뭐라고 했어, 무슨 짓을 한 거야)
How did I fall in love with you(내가 어떻게 너와 사랑에 빠졌는지?)
한쪽 구석에서 커피를 마시며, 최창석 위원장은 유독 한 대목의 가사가 마음에 꽂힌다. 내가 지금 무엇을 하고 있는 거지, 내가 왜 기업은행을 그렇게 믿었던가, 요즘 기업은행과 상대하면서 스트레스를 많이 받았나 싶다. 노래와 다른 억울한 감정이 마음을 짓누른다.
처남이자 부하직원인 김학서 이사는 김창희 위원장을 맞으러 카페 문밖에서 서성이고 가끔 카페 안쪽에 시선을 보낸다. 아내를 만나 결혼할 즈음 처남은 고등학생이었다. 늘 나이 어린 동생처럼 생각했는데, 이젠 회사에서 중책을 맡아서 일손을 덜어주어 믿음직스럽다. 가족이라고 늘 꾸짖기만 하고 엄하게 대해도 말 없이 잘 따라주어 고맙다.
대학 시절 학생운동 한다고, 이리저리 시국사건 때마다 쫓겨 다니고, 가끔 만나 용돈을 쥐어 주었지만, 졸업 후에도 자리를 잡지 못하고 방황하고 있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2006년 남양주시의원에 당선되어 의정활동 하는 모습을 눈여겨보고 처남이 참 대단한 일을 하는 사람이란 걸 알고 내심 대견하게 생각했었다. 선거 사무소에서 만났던 김창희 위원장이라는 분을 이런 일로 다시 만나게 될 줄이야.
며칠 전 김학서 이사가 대뜸 사무실에 찾아와 “대표님, 기업은행에 거래하다 돈 뜯기신 거 있어요?”
“어, 그걸 김 이사가 어떻게 알고. 내가 얘기하지 말라고 했건만….” 이경희 대리에게 차갑게 눈길을 주자, 쳐다보지도 않고, “이사님 커피 드릴까요” 하며 눈길을 피한다.
“이경희 대리하고 집회도 다녀오셨다면서요”
“음…. 그랬지..”
“사무실 직원들이 눈치가 얼마나 빠른데요. 요즘 대표님 표정도 어두우신 게 그것 때문이지요”
그렇게 이왕 알게 되었으니 사연 보따리를 풀어 놓는다고, 김학서 이사와 그간 있었던 사정을 두루두루 나누었다.
“제가 이 분야에 대해서 잘 모르겠지만, 이건 간단한 문제 같아 보이지 않네요. 그래도 이런 일은 제가 대표님보다 경험이 있으니, 일단 자료 좀 주시면, 김창희 위원장 아시죠? 그분하고 제가 상의 좀 해볼게요” 김 이사는 가족 모임 때는 매형이라고 하지만, 공개석상이나 둘이 있을 때는 항상 대표님 대표님하고 호칭을 구분하려고 한다.
“김창희 위원장? 누구….”
“저 남양주 시의원 시절 지역위원장 있잖아요. 그분이 민주노총 사무금융 전국생명보험노조 위원장 출신이라 이런 일은 저보다 더 잘 알 거예요. 그리고 도움을 줄 전문가들도 많이 아실 거고요”
그렇게 해서, 만들어진 자리이다. 김창희 위원장은 딱 한 번 봤다. 왜소하지만 강한 이미지 강단 있는 모습이 기억난다. 혹시나 하는 기대감이 밀려온다.
“쪽팔리잖아요. 대표라는 사람이 투자피해 사실을 직원한테 말하는 것도 그렇고, 그때만 해도 기업은행이 잘 해결해 줄 거라고 믿었지요” 투쟁이 중반에 이르렀을 때 '왜, 김학서 이사와 먼저 얘기를 나누지 않았느냐?'고 물었더니 나온 답변이다.
펀드에 문제가 생기고, 환매가 중단된 후 1년간 기업은행은 그렇게 고객들을 안심시키고 마치 피해원금 반환에는 문제없다면서, 시간을 벌다가 결국 자기들 전략과 계획을 다 마련해 놓고 1년 유예기간이 도래하자, 펀드에서 80% 이상 대규모 손실이 발생한다고 애써 간접피해인 듯이 말을 돌려서 알려주었다.
김 위원장을 기다리는 동안 앞 좌석 젊은 여성들이 갑자기 까르르 왁자지껄하고 카페 안 분위기가 소란해진다. 코로나 19 팬데믹 거리 두기 방역으로 마스크 착용을 하라고 강제했건만 여럿이 밀착해서 마스크도 벗고 대화를 나누는 모습이 눈살을 찌푸리게 한다. 반도체 부품 생산공장에서 24시간 기계를 돌리다 보니 코로나에 민감할 수밖에 없다. 직원 중 한 명이라도 감염이 되면, 원청인 명신전자 뿐 아니라, 같은 건물 내에 입점해 있는 하도급 협력업체 10여 곳이 한꺼번에 올스톱 되어야 한다. 한창 바쁜 시기에 막대한 타격이다. 협력업체 때문에 가동이 중단되면 눈치를 보는 것 뿐만 아니라 그에 따른 손실 배상책임을 져야 하기 때문에, 유독 직원들의 감염위험을 철저히 관리할 수밖에 없다. 외부 일정을 보면서도 항상 마스크를 쓰고 집에서도 잠자는 시간 이외에는 마스크를 착용하고 지낸다. 커피를 마시는 순간에만 마스크를 살짝 올리는 진풍경이 평소 같으면 코믹하겠지만 지금은 부자연스럽지 않다. 앞 좌석에 마스크를 벗은 사람들의 비밀 때문에 감염이 될까, 우려하는 눈빛을 보내고, 자리를 옮기고 나서, 벽시계를 쳐다본다. 시간은 어느덧 5시가 지나고 있다.
마스크를 쓴 채 카페 안으로 들어오는 김창희 위원장과 가볍게 눈인사를 한 후,
“어서 오셔요. 어려운 발걸음 해주셨습니다, 감사합니다”
“별말씀을, 오랜만입니다.” 간결한 사투리 말투가 익숙하다. 밀양 사투리는 대구 사투리 다음으로 억세고 투박해서 쉽게 알아듣기가 어렵다. 더구나 말이 빠르면 더욱 신경을 곤두세워야 한다. 김창희 위원장은 토종 밀양 출신이다.
자리를 잡고 주문한 커피가 나오는 동안 잡다한 신변 얘기를 나눈 후,
“이거 제가 학서한테 자료를 받아서 살펴보고, 내 아는 고등학교 절친 중 투자자문사라고 있지요. 그 투자자문사 대표하는 친구와 잠깐 얘기 좀 나누고 왔습니다.”
“그 정성환 선배님이요”
“그래 맞다 니도 한번 봤지? 갸가 턱 보드만 이거 문제 많은 사모펀드구먼 하드라. 소상공인은커녕 신용등급도 낮은 쬐그만 장사치들에게 대출하고 뜯겼겠군 하고~”
“공모 펀드가 아니구요. 이게 사모펀드였어요?”
“맞다, 니도 몰랐나?”
“잠깐 위원장님 이게 제가 가입한 상품 맞습니까? 사모펀드라구요”
“네 맞습니다.”
“전 이게 기업은행에서 판매했으니 공모 펀드인 줄 알고 있었습니다. 정말 확실합니까?”
“네 저도 처음 학서한테 자료 받아보고 바로 알았는데 아직 모르셨습니까.”
“아니, 펀드인 거는 알았죠. 하지만, 은행에서 파는 거니까 공모 펀드로 알고 있었죠”
“여기 상품명칭을 보시면 디스커버리유에스핀테크 글로벌선순위채권 전문투자형 사모투자신탁이라고 되어 있죠, 이 '사모투자'이게 사모펀드라는 의미입니다. 이름도 더럽게 기네요. 법적으로는 50명 이상 팔면 안 되는 거구요”
최창석은 사모펀드라는 소리에 망치로 뒤통수를 한 대 맞은 듯 쿵 하고 가슴이 내려앉는다. 과거에도 사모펀드 때문에 간접적으로 피해를 보았기 때문이다. 사실 내놓고 얘기하지 않았지만 2015년의 아픈 상처가 주마등처럼 스친다.
2014년까지 최창석은 반도체 회로기판 부품 제조사 세영테크(주)를 운영하면서 매년 안정적인 성장을 하고 있었다. 세영테크는 반도체 부품 관련 독자적인 기술을 보유하고 있었기 때문에 다른 회사와의 경쟁에서 밀리지 않고 안정적인 매출을 올릴 수 있었다. 회사의 외형이 성장하면서 거래 회사를 다변화할 필요가 있고, 회사 내부직원들의 인사 적체가 심해서, 투자환경 변화에 맞게 대응책을 찾던 중 그린테크놀로지라는 삼성전자 2차 협력업체로부터 3차 협력업체로 자사의 사내 입점업체 제안을 받고, 별도의 법인, 세창전자를 설립했었다.
그러나 2015. 5 세창전자 설립 1년 만에 그린테크놀로지가 부도를 내는 바람에 최창석을 포함한 3차 4차 협력업체들이 연쇄 부도를 맞았다. 당시 협력업체 전체 피해 규모만 약 800억 이상 추산되며, 100여 개의 견실했던 안산 시화 반월 공단 내 중소기업들이 연쇄 부도로 무너졌다.
삼성 갤럭시 에스(S)와 노트 시리즈에 들어가는 연성 인쇄회로기판(FPCB)을 생산하는 그린테크놀로지의 대주주는 재일동포 출신 손정의(손 마사요시·58) 씨의 소프트뱅크가 한국에 세운 SBI 인베스트먼트의 사모펀드였다.
당시 안산지역에서는 ‘손정의 펀드가 투자하는 회사’라고 소문이 날 정도로, 그린테크의 사업전망을 밝게 내다 보았고, 실제 에스비아이의 그린테크 지분은 70%가 넘었다. 당시 국민연금이 SBI 투자 전문회사에 2,000억 원 넘는 돈을 투자하고 있었고, 그린테크는 이러한 사실을 십분 활용하여 피해기업과 피해 규모를 키웠다. 그린테크가 부도를 내자, 그린테크와 연계된 어음(외상매출채권) 담보대출을 받은 회사들은 기업은행과 우리은행의 대출 상환 압박을 심하게 받다가 파산하는 회사가 속출하였고, 심지어 사업주 몇 명이 자살하는 사건도 있었다. 그린테크의 부도 사태는 안산 바닥을 뒤집어 놓을 정도로 후유증이 심각했고 지역의 상공인들과 가족들도 마음의 상처를 많이 받았다.
최창석과 세창전자도 그 사태의 여파로 비싼 기계를 헐값 처분했지만, 남은 부채를 갚지 못해 기업회생으로 상당 기간 고통을 겪어야 했다. 당시 대출을 갚지 못하자 세창전자의 모기업 세영테크 법인의 비상장 주식 상당 부분을 액면가로 기업은행 등 여러 기관에 넘겨주고, 회생을 끝낸 후 다시 되사들여야 했다. 그때 당시 다른 기관은 '기업회생이 쉽지 않은데 회생에 성공해서 고맙다'라는 표시로 시세반영을 고려해서 할인 재매각방식으로 주식을 양도해 줬다. 어려울 때 우산을 받쳐준 곳도 있는데, 기업은행은 끝까지 액면가로 재매입을 요구했었다.
그 사건으로 최창석은 깊은 트라우마를 감당했고, 아픈 교훈을 얻어서, ‘사모펀드’란 말만 들어도 이가 갈렸다. 최창석은 약 20억 이상 피해를 입고 회생을 하느라 갖은 고생을 다 했는데, 이번에 또다시 기업은행이 판매한 사모펀드 때문에 손해를 입은 것이다. 그린테크의 외상매출채권 담보대출을 주거래 형식으로 취급했던 기업은행이 위험징후를 예측하고 사전에 3차 협력업체들에게 귀띔이라도 해줬다면 피해를 최소화할 수 있었다. 최창석은 투자 당시부터 그린테크의 대출과 재무정보를 알만한 기업은행 측에, 투자해도 괜찮은지, 재무상태는 어떤지 여러 차례 묻고, 자문을 구했으나, 기업은행은 전혀 도움을 주지 않았다. 이번에는 그때보다 피해 규모가 크지 않으나 두 번씩이나 기업은행과 연관되어 피해를 보고 나니 이래저래 화가 날 수밖에 없다.
"이게 그 조국 사모펀드 같은 건가요?"
"같은 이름이기는 한데, 이건 헤지펀드의 종류인데요. 주식 채권 그리고 부동산 원유, p2p 대출채권 그런데 투자하는 펀드이고요, 조국 펀드는 쉽게 얘기하면 기업 인수 합병, M&A라고 하지요, 주로 그런데 투자하는 펀드라고 보시면 됩니다. 이 펀드는 사실 굉장히 위험한 펀드였던 거지요" 그 뒤로 이어진 설명을 듣고 최창석 위원장은 한숨이 푹 내쉰 후 “저희가 앞으로 어떻게 해야 할까요?”
“제 친구 얘기로는 요즘 시끄러운 라임 펀드 사건 들어보셨지요? 그런데 라임 펀드뿐 아니라 앞으로 다른 펀드에서도 비슷한 사고가 줄줄이 터질 거라 카데요. 기업은행은 만만한 곳이 아닙니다. 그동안 어떻게 피해자 관리를 했는지 몰라도, 갸들은 이럴 때 대비해서 매뉴얼을 만들었을 것이고, 고객을 어떻게든 자기들 방식대로 끌고 가려고 할 겁니다. 꼴 때리는 놈들입니다.”
“그러니까요. 사실 거래할 때야 좋은 은행이라고 믿었지만, 막상 피해를 보자, 언제 봤느냐 싶게 사무적이고 숨기는 게 많다고 느꼈어요”
“제가 보니까, 피해자분들이 갖고 있는 자료를 모아서, 분석해보고, 전문가와 상의하고 대책을 만들어야 할 거 같네요..”
“위원장님, 그런데 우리가 사업하는 사람들이라 여기에만 집중하고 신경 쓰기가 만만치가 않네요. 피해자들이 점점 많아지면 회원 관리도 해야 하고. 피해도 보고 돈 돌려달라고 집회 한번 하기에도 시간 낭비가 큽니다.”
“그러실 겁니다. 피해자들도 상처받은 분들이니 하고 싶은 말, 억울한 사연이 많을 겁니다. 그런 것 다 들어주고 힘을 모으려면 누군가 대책위에서 그런 역할을 감당하셔야죠. 위원장님이든 임원들이 하실 수밖에 없을 겁니다.”
“우리가 대책위를 만들었는데, 이런 일에 경험도 없고 난감합니다. 상시적으로 우리 일을 좀 자문해주고, 봐줄 분이 없을까요? 우선 안산에서 자문해줄 변호사를 알아보고는 있는데, 이런 일을 경험하지 못해서 어떻게 해야 할지 난감합니다.”
“그 정도 일을 하려면, 변호사 한 명으로 될 일이 아니고, 변호사를 써도 법무법인이라고 로펌아시죠, 로펌의 도움이 필요할 겁니다. 쟤네들은 대형로펌으로 대응할 텐데, 감당할 수 있겠습니까? 그리고 투쟁을 하려면, 조직을 관리하고 전반적으로 상황을 관리할 실무자가 있어야 합니다. 대책위 임원들이 회사직원 중 한 명을 파견해서 맡겨도 되지만 이런 일은 필드 경험이 필요해서….”
“형님, 이건 우리 중에 아는 활동가를 찾아야 하지 않을까요? 저는 회사 일도 바쁘고 계속 업무에 매여 있어야 하고, 시민단체나, 민생운동에 경험 있는 동지 중 한 사람을 찾아야 할 거 같은데.....”
시민단체나 노동조합 활동을 한 사람 중에는 보험이나 은행권에서 노동조합 투쟁경험이 있는 사람은 많이 있지만. 이렇게 사모펀드 같은 금융상품 피해자 민원처리를 위해 현장에서 대신 싸워줄 사람 찾기란 쉽지 않은 일이다. 신자유주의 자본주의 체제에서 화폐 금융 자본이 일으키는 주기적인 문제에 비판적인 목소리를 내는 활동가를 찾기도 힘들고, 특히 주식투자나 펀드 투자를 투기성이라고 비판하고 극도로 혐오하는 사람들이 많은데, 피해자 문제에 직접 관여하고 투쟁을 해달라고 해도 거절할 것은 뻔하다. 그래도 상황에 맞는 사람 찾기가 가장 중요한 문제이다.
한동안 침묵이 흐르고, 말없이 커피를 마시던 김창희 위원장은 잠시 생각에 잠기더니 흐릿한 미소를 띠면서, “그래, 생각났다. 여기 이 일에 딱 맞는 선수 한 명이 있다, 학서 니도 알 낀데...”
“네? 누구요.”
★★★
○ 인생은 늘 끝나지 않은 시작이다.
2020년 4월 중순 평온한 오후 새로운 삶터에서 소박한 일상을 즐기며, 혼자만의 명상에 취해 있는데, 휴대전화의 벨이 울린다. 김학서의 번호가 뜬다. 1년 여 만에 웬일인가, 반가운 마음에 오른손 엄지를 좌에서 우로 클릭한다.
“어이구, 김학서 동지 오랜만이네. 살아 있었구먼”
그렇게 간단한 안부 인사를 나눈 후 “주말에 한 번 만났으면 좋겠는데요” 전후 맥락 없이 다짜고짜 만나자고 하면 누구나 불안이 먼저 엄습해 오기 마련이다.
“어? 어쩐일로” 일단 한 박자 호흡을 늦추고 질문을 차분히 던져 본다.
“저~어 다름이 아니라 창희 형님이랑 어제 만났었는데, 형님이 이의환 동지가 제격이라고 하시고, 나도 이름을 듣는 순간 맞다. 이 일은 이의환 동지가 해야 한다 생각했어요”
김창희 위원장 이름이 나오면 일단 뭔가 끌려 들어가는 느낌부터 앞선다. 언제나 사람을 잘 찾아내고, 순발력이 좋아 비상한 전략가라고 생각했다. 전투병과 소대장 출신이라 그런지 치밀한 듯 늘 비상해서, 함부로 대하기 어렵지만, 속 깊이 들어가 함께 호흡하고 나오면 대략 난감하지 않다.
“어떤 일인데요?” 이럴 땐 무슨 일이냐고 묻기보다 본론으로 쑥 들어가야 더 쉽게 얘기가 풀린다. 뭔가 자기들이 결정한 판에 내가 들어오라고, 절반 이상 결정해 놓은 상황이 분명하니, 신뢰가 쌓여 있는 관계에서는 본론으로 바로 들어갈 수밖에 없다.
“저기 디스커버리라고 들어봤어요? 사모펀드인데~”
“사모펀드? 그거 뭐 조국 장관 때문에 들어보았지만, 관심 영역이 아닌데”
“저 아무튼 전화로 길게 얘기할 수는 없고, 나도 사실 잘 모르는 분야이긴 한데, 기업은행이 고객들에게 뭘 사기 친 거 같아요”
“에이 정부가 만든 은행인데, 그런데 나 보고 어쩌라고?”
“일단 한번 갖고 있는 자료 몇 개 보내 드릴 테니 읽어 보시고 주말에 남양주에서 봐요. 오랜만에 술도 한잔하고, 창희 형님은 형수님께서 술을 드시게 하지 말라고 신신당부하니 우리끼리....”
요즘 김창희 위원장 몸이 안 좋아서 술 마시면 안된다는 것을 아는 사람은 다 안다. 몇 년 사이 술이 많이 약해졌다. 형수님의 신신당부가 알만하다. 그렇게 약속 시각을 잡고 짧은 통화가 끝났다. 잠시 후 카톡으로 딸깍딸깍, 기사 링크 몇 개를 보내주고 읽어 보란다.
한창 재미있게 읽고 있던 에드먼드 버크와 토머스 페인의 ‘위대한 논쟁’을 잠시 덮고 나서, 웬 영어반 한글반 들어있는 문서를 카톡으로 확인한다. 에이 참나, ‘디스커버리(discovery) 펀드 ’이게 뭐라고 생뚱맞게 이런 걸 보냈나 싶다. 기사를 찾아 대충 읽어 보고 그렇게 다시 페인과 버크의 자연과 역사, 정의와 질서, 선택과 의무, 이성과 처방에 대한 뜨거운 지면 논쟁을 흥미롭게 읽었다. 요즘 소위 보수라고 하는 작자들, 진보라고 사칭하는 인간들이 나름 신랄하게 논쟁하는 듯하지만, 페인과 버크처럼 철학과 이념으로 대척점을 이루면서 다투고, 대중을 납득시킬 줄 아는 화법을 배워야 하지 않을까 싶다. 지금 우리 정치는 너무 극단적이고 부러질듯싶다. 이념의 부재, 상상력의 빈곤이 극명하다. 조국 사태 이후 중립지대에 있는 사람들마저 내편 네편이 아니면 억지로 편 가르고 적대적으로 죽일 듯 대접하는 모습이 안타까울 따름이다.
다음번에는 에드먼드 버크의 <숭고와 미의 근원을 찾아서> 페인의 <상식, 인권>을 읽어야겠다고 책을 주문하고, 느긋하게 기다리고 있었는데, 난데없이 나의 평온한 삶에 새로운 돌을 던지고, 끝날 줄 모르는 긴 투쟁이 시작될 줄이야. 그렇게 자의 반 타의 반 수렁 속에 빠져들어 갔다.
사모펀드라는 단어는 내 인생에서 낯설고 관심 영역도 아니다. 자본주의 체제는 늘 불안정하고 주기적인 침체와 호황을 순환 반복하였고, 금융문제는 거시적인 사태로 늘 나의 인생 중요한 분깃 점을 만들어 낸 원흉이었다. 약 10년 주기로 닥치는 금융위기는 삶을 송두리째 드러내고 고통스럽게 했을 뿐이다.
보험영업으로 한창 수입이 늘어날 즈음 IMF를 맞이해서 어려움을 겪었고, 신용카드 한도의 갑작스러운 상향으로 급한 돈을 쓰다가 결국 카드 돌려막기 신세를 면치 못했었다. 분양받은 아파트가 2005년까지 계속 가격하락하고 깡통이 되어, 은행 대출 부담을 털기 위해 처분하고 나자, 2016년 말 갑자기 부동산값이 폭등해 다시 내 집 마련의 꿈이 어려워졌다. 아파트값이 올랐다며 돈 벌었다고 은근한 자랑질을 하는 동지들을 보면서 투기든 투자든 구분하지 못하는 모습을 보면서, 부럽기는커녕 저게 진보 운동하는 인간들의 이중성이구나 싶어 씁쓸했다. 그 뒤로 이래저래 전세살이 인생을 벗어나지 못했지만, 후회도 기대도 없다. 마음을 내려놓으니 탐욕을 버리는 연습이 필요하다는 것을 배우는 과정이었다.
2008년 리먼브러더스 사태가 발발하고 미친 듯이 거시경제학 공부를 시작했다.
이 모든 원인은 신자유주의 세계화가 초래한 금융주도 경제구조 때문이란 것을 알게 되었다. 칼 폴라니의 저서 <거대한 전환>과 맑스의 <자본론>을 비롯해 각종 경제학 서적은 닥치는 대로 틈틈이 읽어 보았다. 자본주의는 풍요로운 인간 세상을 위한 것이 아니라 머지않은 미래에 닥칠 위기를 재촉하는 불안정한 체제라는 것, 엔트로피의 증가로 자연과 환경을 갉아 먹는 불확실성의 증폭 그래서 결국 종말을 맞게 될 것이다. 남들은 주식이나 부동산 특히 각종 파생상품과 블록체인에 가입하고 선진기법의 금융 투자라고 불렀지만, 도덕성 덮고 포장해서 누군가에게 폭탄을 돌려 씌우는 투기행위일 뿐이다. 특히 사모펀드는 헤지펀드의 교란 영역이다. 고민의 깊이는 여기부터 시작되었다.
그래서 잠시 망설였지만, 후일 투쟁을 위해 자료를 조사 분석하면서 이 사태는 시스템 작동의 위기, 투기자본과 금융 모피아 관료들이 만든 거대한 도박판이라고 확신이 들었다. 진보 운동하는 사람들이 이 분야에 대한 준비를 소홀히 하면 다가올 미래에, 세상을 바꾸자는 구호는 기만이 될 것이고 대중들과 교감하는데 보수정당의 환각성 논리에 취해 뒤처지고 말 것이다. 이 사태에도 억울한 피해자들 선량하고 건강한 사람들이 있었다. 그분들을 보고 달려가야 한다고 판단이 들었다.
김학서 동지와 남양주 뱅이 마을 앞 식당에서 김창희 위원장과 만나서 오랜만에 해후하고 나자, 김 위원장은 대뜸 “이 싸움은 쉽게 결판나지 않을 거야, 기업은행은 공기업인데 나름 자기들 피해를 최소화할 방안까지 다 만들어 놓고 추진할 테니 가볍게 해결되지 않을 거야”
“전 무슨 소리인지 잘 모르겠네요”
“지난주에 저희 매형하고 위원장님하고 서울에서 만났어요”
“그래서 어떻게 하기로 했는데요”
“일단 이의환 동지가 실무적으로 이 투쟁에 결합해서 도와줬으면 해요”
동지라는 말은 같은 생각, 같은 이념을 갖고 활동하는 동료에게 친밀함의 호칭으로 쓰는 용어다. 일상에서 자주 듣지 못하니, 평범한 시민들에게 낯설고 거부감이 있을지 모르나, 함께 노동운동 또는 정당 활동하는 사람들 사이에는 즐겨 쓰는 표현이다. 동지라는 말을 남발하면서 뒤통수치는 인간들도 여럿 보았지만, 나이와 지위 고하를 따지지 않고 부르곤 한다. 물론 연하의 사람들에게 유리한 호칭이기는 하다.
김학서와 알고 지낸지 벌써 20년이 다 되어 가는 사이, 남양주에서 쓰레기 매립장 투쟁을 하고 그 결과 남양주 시의원으로 당선되어 활동했던 김학서는 사고가 늘 젊고 문제를 풀어가는데 탁월한 감각과 지혜가 돋보인다.
당시 나는 의정부 장암 소각장 투쟁경험이 있었고, 전국적으로 임대아파트 주거운동과 민생운동본부와 함께 의정부에서 개인파산 회생 지원사업(나 홀로 파산학교)을 돕고 있었다. 김학서는 청학리 주공아파트에 거주하면서 분양전환, 원가공개 투쟁이 나와 겹치고 있었고 쓰레기 매립장 투쟁에 전념하고 있었다. 민주노동당 남양주시 지구당 위원장이었던 김창희 위원장과 김학서가 함께 투쟁하고, 내가 의정부에서 임대아파트 주거운동을 하면서 시작된 인연이 지금껏 중요한 순간마다, 질기게 이어지고 있다.
소주잔이 서너 순배 돌자, 맥주 한잔으로 버티던 김 위원장이 “니, 금융 관련 법률에 능통한 변호사 좀 아나? ”
“저야 뭐, 주거운동 중심으로, 임대주택 관련 변호사나, 뉴타운 재개발 투쟁할 때 인연이 닿는 변호사, 동네 친한 변호사하고는 .....그런데 요즘 김정진 변호사가 좀 한가하다는 말을 듣긴 했는데요” 김정진 변호사는 내로라하는 인플루언서로 우리끼리는 다 알고 있는 강단 있고 진정성 있는 사람이다.
“그냥 소장이나 끄적거리는 동네 변호사로 될 것 같지는 않고, 현장 감각도 있어야 할낀데...김정진 변호사가 맡아 줄까? 함께하면 좋긴 하겠다만...”
“요즘 다스뵈이다 보니까, 신장식 변호사가 나오던데요? 금융 전문 지식도 풍부하고 그 분야에 관한 공부를 꽤 많이 한 것 같은데, 이런 사건에 신 변호사 같은 분이 도와주면 굉장한 우군이 될 텐데 말이죠”
“하긴 신장식 위원장 정도면 정무 감각도 뛰어나고, 우리한테는 큰 도움이 되겠지요” 김학서 동지도 신장식 변호사의 능력을 익히 아는지라 표정이 갑자기 밝아진다.
“그래, 신장식 동지가 사모펀드를 잘 안다 고오?”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김창희 위원장은 전화번호를 돌린다.
신장식 변호사는 민주노동당 관악지역에서 지역위원장을 하면서, 진보정당 운동에 젊음을 바친 헌신적 활동가였다. 민주노동당 진보신당 내에서도 똑똑하기로 이름나 있었고, 현장 실무감각은 물론 정책 브레인으로 팔방 미인격 유능한 인재임을 모두가 알고 있다. 진즉에 여의도에 있어야 할 사람이 진보정당이 지리멸렬하고 있을 때 고생만 하다가, 소식이 잠잠했는데 어느새 로스쿨을 졸업하고 변호사 자격까지 취득하여 다시 왕성하게 활동하고 있었다. 박용진 의원 못지않게 능력 있고 소신 있다는 건 알만한 사람은 다 알고 있다.
노회찬 의원 보좌관, 당 대표 비서실장, 정의당 사무총장 등 당내에서 막중한 역할을 수행하더니, 여기저기 방송국에 인터뷰어로 활동하고 있었다. 김창희 위원장과는 오랜 시간 같이 활동하면서 친분이 쌓인 사이다. 김 위원장이 권영길 대선후보의 비서실장 시절 민주노동당에서 함께 했었다. 평소에 김창희 위원장은 특유의 친화력 덕에 여야에 걸쳐 두루 발이 넓다. 위원장의 전화 목록 안에 얼마나 많은 전 현직 인사들이 있을까? 궁금하다. 아마 어지간하면 다 담겨있을 것이다.
“신장식 동지, 오랜만이네”
전화가 연결되자마자 김 위원장은 바로 약속을 잡는다. 간단하게 디스커버리 펀드 피해자 문제라고 얘기하자 신장식도 바로 판단을 한 듯, 김창희 위원장과 약속을 잡는다.
“그래, 그래 그럼 다음 주 화요일 상암동 MBC? 그래 알았다. 그래 거기서 보자 내 하고 김학서 알지, 민주노동당 남양주 시의원 했던, 그래 그래~ 그 김학서 맞다. 김학서랑 학서 매형하고, 이의환 동지하고 같이 만나서 얘기하자, 자료는 바로 보내줄 게 자세한 건 만나서 얘기하자”
그날 나는 선택의 여지도 없이, 다음 일정에 합류해야 했다. 디스커버리펀드 아니 사모펀드 투쟁의 외곽 지원 드림팀은 이렇게 꾸려지고 있었다. 거기에 또 한 사람의 도움이 아니었다면 드림팀의 아귀는 다 맞추지 못했을 것이다. 벌써 DLF 펀드 피해자 문제 해결을 위해 동분서주하고 있던 또 한 사람 그도 곧 만날 수밖에 없는 운명이었다. 각자의 삶을 살면서 우리는 언제나 그렇게 소통하게 되는가 보다.
다음 회에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