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들레의 뜰
김 용 선
명주실 같은 햇살이 올올이 풀려나와 뜰 안으로 퍼져내리면, 섬돌 사이사이에 입을 꼭 다물고 맺혀 있던 민들레 봉우리들이 노란 이를 드러내고 배시시 웃는다. 수줍은 듯 하나씩 얼굴을 내밀기 시작하다 마당 가득 햇살이 채워지면 어느새 뜰은 민들레 화사한 얼굴로 노란 융단이 깔린다.
돌 계단 난간에서 흙 한입 머금을 수 있다면,
담벼락 아래 후미진 곳에서도 한 줌 햇살 업을 수만 있다면,
보도 블록 틈 사이 입술 축일 한 모금 물을 만날 수만 있다면,
민들레는 저 한 몸 머물 자리를 타박하지 않는다. 비좁고 척박한 땅일수록 굳고 단단히 더 깊이 뿌리를 내린다.
애써 씨 뿌리고 가꾸지 않아도 어떤 손길의 도움도 기다리지 않고, 뿌리를 내릴 수 있는 곳이면 어디고 자리를 잡아 "희망은 겸손히 불러야 온다"는 진리를 깨우쳐 주며 천진한 모습으로 앉아서 피고 앉아서 웃는 꽃!
가만히 다가가 쪼그린 채 마주해 본다. 송이 송이 노랗고 촘촘한 고갯짓이 작년보다 더 풍성하게 뜰을 채워 흐뭇하기 그지 없다.
예로부터 민들레를 문 가까이 심는다 하여 "문둘레", 키가 작다 하여 "안진 방이 꽃" 달리는 "지정(地丁)", "포공영(蒲公英)"이라 하여 서당의 뜰에 심고, 인간의 심성을 곧고 바르게 다스리는 덕목(德目)으로 "포공구덕(蒲公九德)의 꽃"이라 일컬어온 데는 그만한 이유가 있음이다.
아무리 비좁고 척박한 땅에서도 뿌리를 내려, 짓밟히고 뭉개지며 꺾이어도 다시 살아 남는 강한 생명력으로 인(忍)을 가르치며,
잎이 마르고 줄기가 잘려 나가도 그 상처위에 새싹이 돋아 어떤 역경에서도 딛고 일어서는 불굴의 굳센(剛) 의지를 가르침이다.
꽃잎의 개화에서도 한꺼번에 다 피지 않고 하나의 꽃대가 피고 져야 다음 꽃대에 꽃이 피니 예(禮)를 지켜 장유유서(長幼有序)의 덕을 가르침이며,
나물로, 김치로,술로,차로,약으로 이용되니(用) 쓸모있는 삶을 살라 이름이며,
지니고 있는 많은 꿀로 벌과 나비를 불러들여 서로 주고 받는 정(情)의 덕을 가르침이다.
또한 줄기에서 나오는 하얀 즙은 마치 모유를 연상시켜 어머니의 자(慈)애스러움을 가졌으며,
다리거나 우린 물에는 흰 머리를 검게하는 성분이 들어있어 효(孝)의 덕을 가졌고,
즙으로써 새살을 돋게 하고 열을 내리게 하여 아픈이를 보살피는 어짊(仁)의 덕을 가르치고 있다.
거기에 꽃이 지고 나면 씨앗은 바람을 타고 멀리 날아가 스스로 정착하여 번식하는 용(勇)의 모험심과 자수성가(自手成家)의 가르침을 지니고 있으니, 다만 풀 한포기의 칭찬이 아니라 찬사를 받아 마땅함이 아니겠는가?
민들레를 캐다 그의 뿌리를 본 사람은 다 안다. 이 강인한 생명력이 땅속 깊이 내려간 1미터는 족히 되는 뿌리의 저력이었음을.
파도 파도 끝이 보이지 않는 긴 뿌리의 든든한 힘이 밟히고,찢기고,잘리고 말라 비틀어져도 다시 싹을 틔우고 꽃을 피우고, 마침내 바람이 닿는 곳이면 어디든 꽃씨를 날려보내 또 다른 민들레 영토를 개척해나가는 것이다. 긴 뿌리에 쓰디 쓴 인내의 시간을 묻고, 달디 단 열매의 결실을 위해 묵묵히 주어진 환경을 순응하고 받아들인다.
"뿌리 깊은 나무는 바람에 흔들리지 않으므로 꽃이 좋고 열매가 많이 열리며,샘이 깊은 물은 가뭄에도 끊이지 아니하므로 내를 이루어 바다로 가느니라"는 용비어천가 제2장 조선왕조의 건국염원을 민들레 한 포기에서 본다.
왕조의 염원뿐 아니라 우리 인간의 삶에 있어서도 뿌리란 정신력이다. 그 정신의 뿌리가 얼마나 깊고 얉게 자리하고 있는가에 따라 우리가 추구하는 행복의 깊이도 좌우되는 것이 아닐까? 살아가는 동안 나에게 주어진 육체와 환경을 내 정신력이 얼마나 지배하고 다스릴 수 있는가에 따라 내 삶의 방향 또한 결정되며 그 성패 또한 달려 있다 하겠다.
강인한 정신, 올바른 정신,적극적인 정신이야말로 포기하고 싶은 좌절의 순간, 전화위복이요,기사회생의 기회로 삼을 수 있는 밑거름이 될 것이다. 내 정신력의 뿌리가 민들레 뿌리처럼 가슴 깊이 탄탄한 소신의 기둥으로 버티어 줄 때, 할 수 있다는 '자신'과 해내는 '패기'와 된다는 '긍정'의 힘이 우리의 삶을 밝게 비춰 앞으로 나아가게 해줄 것이다.
나는 여기 민들레의 구덕(九德)에 그의 "지혜(智)"로움 하나를 보태 민들레 십덕(十德)으로 칭송하고 싶다.
민들레 꽃잎을 자세히 살펴보면 가장자리는 화려한 빛깔과 모양으로 벌을 유혹하고, 안쪽 꽃잎으로는 꽃가루 받이를 하여 종자를 만드는 영리함을 가졌으며,꽃을 매단 꽃대가 작달만한 키로 있다가, 홀씨를 맺을 때쯤 줄기의 키를 훌쩍 높혀 세찬 바람을 타고 좀더 멀리 종자를 퍼트리기 위한 생존전략의 비상한 지혜(智慧)를 발휘하기 때문이다. 바람으로 부터 오랜 시간 꽃을 지키기 위해 낮은 자세로 있다가 낙하산 모양의 갓털에 씨를 달아 높이 서서 훨훨 날릴 줄을 어찌 알았을까. 참으로 가장 낮은 자세의 민들레 한 포기가 우리에게 주는 교훈에 머리가 숙여지며,오묘한 섭리와 신비로움이 경외스러울 따름이다.
모든 꽃들이 피었다 지면 그 뿐 씨를 맺으나, 민들레는 지는 꽃대 위에 다시 한번 희망의 솜털 꽃을 피워 땅에서 하늘에서 은색의 솜모자 물결을 이룬다.
여린 꽃잎이 모여 한송이 노오란 꽃, 여문 씨앗이 모여 한송이 은하의 꽃, 작은 것이 모여서 하나의 우주로 핀 꽃.
줄기 한대 뽑아올려 욕심없이 단 한송이 꽃을 피우고, 자신에게 주어진 단 한번의 생(生)을 알뜰히 마무리 하고 가는 꽃.
"보다 많은 것을 가지려는 것보다 보다 적게 희망하는 것을 선택하라"는 토마스 아퀴나스의 말처럼 가지고 태어난 것으로 아낌없이 살다가는 꽃.
나도 그를 닮고 싶다. 나도 그렇게 살고 싶다.
바람이 불면 날아 올라 바람에 몸을 맡긴 채 가보지 않은 미지의 땅에 저토록 기묘하고 우아한 모습으로 종족의 번식을 꿈꿀 수 있었을까?
때론 햇빛 없는 땅에 닿아 개미의 먹이가 되고, 물기 없는 바위에 닿아 싹을 틔우지 못할지라도 민들레 홀씨는 희망을 싣고 낙하산을 편다.
그리고 높이 뜬다.높이 나른다.
저 혼자 저 있을 자리를 찾아서 용감한 여행을 한다. 마지막 결실의 번식을 위해 키로도 몸집으로도 힘으로도 할 수 없을 때, 그는 좌절하지 않고 가장 가벼운 몸짓으로 가장 먼 곳으로 떠날 채비를 한다.
"모든 덕 가운데에서 가장 강하고 고결한 덕은 진정한 용기라고 했던가?" 누군가 무모하다 말할지라도 목적이 있으므로 두려움을 떨치고
분연히 떠날 수 있는 당찬 용단이 그에게는 있다.
땅바닥에 줄기 조차 세우지 않고 가장 낮게 엎드린 꽃. 그러나 가장 깊은 곳까지 뿌리를 내리고 가장 먼 곳까지 꽃씨를 날릴 수 있는 꽃.
유독 돌 틈에 끼어 촛불처럼 깜박이며 피어난 민들레가 내게 말한다.
"넓을 필요는 없어.이렇게 좁은 땅에서도 마음만 먹으면 뿌리는 얼마든지 내릴 수 있어.그리고 이렇게 웃을 수 있는걸. 아주 먼 곳까지 씨를 날려 보낼 수도 있고 말이야"
해가 서산으로 기운다.
초롱초롱한 눈망울로 눈웃음치던 뜨락의 민들레들이 지그시 눈을 감는다.
내일 해는 다시 떠오르고 나의 뜰엔 촛불처럼 민들레가 다시 피겠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