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월에는 군터 뒤크가 쓴 『왜 우리는 집단에서 바보가 되었는가』를 같이 읽었습니다.
사실 이 책은 제가 2016년에 읽었던 책으로, 그 당시 신선한 충격과 함께 많은 깨달음을 주어 인상깊게 읽었던 기억이 남아 있습니다. 그럼에도 책 읽기 도서로 선정하는 것에는 조금은 망설여지기도 했습니다. 이 책을 읽다 보면 자칫 기업의 경영 및 조직 운영에 대한 비판서로 받아들여져 불편함이 느껴질 수 있기 때문입니다. 책의 제목 뿐만 아니라 ‘조직의 모든 어리석음에 대한 고찰’ 이라는 부제만 보더라도 알 수 있을 것입니다. 따라서 저자가 무엇을 말하고 전하려고 하는 지 주의깊게 잘 살펴서 읽을 필요가 있겠습니다.
이 책의 저자는 십수 년간 독일 빌레펠트 대학교 수학과 교수로 재직하다가 독일 IBM으로 자리를 옮겨 최고기술경영자를 지냈고, IBM 연구소의 수석엔지니어, 수석개발자로 활동하며 기업 혁신에 선도적 역할을 수행했습니다. 그 과정에서 자신이 겪은 경험담과 다양한 사례를 이 책에 담아냈습니다. 그래서 그런지 ‘독일에서 펴낸 책’임에도 우리에게 상당한 공감을 주고 있습니다. 아마도 글로벌 사회에서 일어나는 공통적인 일인지라 그런것 같기도 합니다.
책에서 저자는 구체적이고 실현 가능한 공통 목표의 부재, 오로지 수치로만 제시되는 성과 압박과 그로 인한 스트레스, 눈앞의 일부터 해치우고 보자는 직원들의 근시안적인 태도, 무조건 인력 활용도를 높이고 봐야 한다는 경영자들의 강박, 통제와 감시, 평가 시스템, 책임을 회피하기 위한 온갖 속임수와 꼼수, 엇갈리는 커뮤니케이션 등이 집단이 어리석어지는 이유라고 합니다. 그리고 집단의 어리석음에서 벗어나려면, 집단에 소속된 개인이 저마다 자신이 원하는 방식대로 주체적으로 일하며 구체적이고 분명한 공동의 목표를 향해 전진해 나갈 때 가능할 것이라고 강조합니다.
이 책을 통해 우리의 조직이, 우리의 사회가 ‘집단의 어리석음’이 아닌 ‘집단 지성’으로 나아갈 수 있는 계기가 되었으면 합니다. 또한 직장에서의 삶이 소모적인 일이 아닌, 가치지향적이고 발전적인 일로, 그리고 모두가 성장할 수 있는 일이 되었으면 합니다.
01 집단 어리석음의 실체
집단의 어리석음에 대해서는 네 가지로 그 실체를 알아볼 수 있습니다. 첫 번째는 ‘갈수록 복잡해지는 업무’와 관련 있습니다. 업무를 앞두고 “복잡하다”고 말하는 것이 습관이 되었을 정도여서 그저 눈앞의 일만 처리하기에도 급급해합니다. 그러다 보니 장밋빛 미래를 꿈꿀 시간도, 그럴 힘도 턱없이 부족하기만 합니다. 더구나 예측 불가능한 외부 기업환경의 변화는 너무나 빈번해서 우리는 여기에 제대로 적응할 여유도, 기회도 갖지 못합니다. 음울한 패배 분위기에 젖어, 또는 강요된 충성심으로 어쩔 수 없이 받아들여야만 하는 변화일 뿐입니다. 자연히 일의 즐거움은 줄어들고 그 어느 때보다 일은 타율적으로 이뤄집니다. 신경이 곤두설 대로 곤두서고, 할 일은 계속 쌓여서 이를 따라잡을 시간은 전무합니다. 급류에 휩쓸린 동료를 구할 엄두는 나지 않습니다. 나부터가 물에 빠져 허덕이고 있습니다. 늘 어디선가 발생하는 실수 역시 바로잡을 시간이 없습니다. 그래서 작은 사고에도 전체는 엉망이 됩니다. 우리는 카오스 한복판에서 살기 시작했습니다. 전체는 너무 복잡해지고 말았습니다. 이것이 문제의 본질입니다. 복잡함이 우리를 질식시키고 있는 것입니다. 이제 우리는 업무를 단순화해야 합니다. 이를 위해서는 두 가지 방법을 사용할 수 있습니다. 한 가지 방법은 복잡함을 확 줄여 ‘평범하게 만들’거나 ‘수준을 끌어내리’거나 ‘우둔하게 하는’ 것입니다. 다른 방법은 복잡함을 도식화하는 사례와 이미지 같이 누구나 한눈에 이해할 수 있게 ‘천재적으로 단순화하는 것’입니다.
다음으로 두 번째는 ‘전체가 아닌 부분에만 집착’하는 것입니다. 왜 기업은 고객의 말을 귀담아듣지 않을까? 왜 경영자는 직원의 말을 무시하기만 할까? 왜 직원은 상사의 말이라면 거부감부터 가질까? 모두가 전체를 보지 못하고 부분에만 집착하기 때문입니다. 저마다 다른 부분을 보는 탓에 협력 자체가 근본적으로 불가능합니다. 만약 모두가 거대한 전체를 바라본다면, 공동 접근이 가능할 것입니다. 그러면 함께 머리를 맞대고 스마트한 것, 심지어 천재적인 작품까지도 어렵지 않게 만들 수 있습니다. 오늘날 흔히 말하는 ‘집단 지성’의 기회가 주어지는 셈입니다. 그러나 모두가 전체를 보지 못하고 각자의 관점만 고집하며 싸우는 탓에 집단 어리석음이 생겨납니다.
세 번째는 ‘우물안 개구리 사고’입니다. 우리는 우물 안 개구리처럼 회사 안에서 서로 자신의 의견이 더 낫다고 다툴 뿐, 제3의 부서와 이야기 한 번 나누지 않습니다. 실제로 기업에서는 지극히 다양한 문제들을 늘 같은 환경 안에서만 해결하려 합니다. 매번 기존의 부서가 새로운 문제를 떠안습니다. 조직과 팀은 얽히고설킨 구성원의 이해관계로 변화를 이끌어낼 의지조차 갖지 못합니다. 늘 비슷한 소모적인 언쟁으로 회의에서는 지치기만 하는 집단 어리석음만이 있을 뿐입니다.
마지막으로 네 번째는 ‘애매한 전체의 모습’입니다. 팀이 전체를 명료하게 이해하지 못하고 공통의 합의를 도출하지 못할 때 바로 집단 어리석음이 생겨납니다. 또는 실현 가능성이 전무한 전체를 추구하거나, 전체에 이르는 길을 열어갈 수단과 능력이 부족할 때에도 집단 어리석음이 발생합니다. 전체를 그리는 상상력이 충분하지 않아 좌절하는 경우도 많습니다.
1990년에 마이크로소프트 사의 회장 빌 게이츠는 다음과 같이 말했습니다. “우리는 누구나 이용할 수 있는 컴퓨터 운영체제를 만들 것입니다. 그래서 사람들이 컴퓨터를 완전한 멀티미디어로 활용할 수 있도록 하겠습니다. 우리는 모든 사람들에게 슈퍼 오피스 시스템을 제공해 문서 및 프레젠테이션과 관련한 모든 욕구가 충족될 수 있는 환경을 구축할 것입니다.” 이 말을 들은 모든 직원과 고객은 향후 15년 동안 어떤 일이 일어날 것인지를 분명하게 깨달았습니다. 그때로서는 비록 먼 이야기였지만 누구나 전체를 명확하게 그릴 수 있었습니다. 그리고 이것은 현재 현실이 되었습니다.
하지만 대부분의 최고경영자가 자신이 원하는 전체의 모습을 매우 애매하게 그립니다. “우리 기업의 유일한 목표는 매년 수익률을 높이는 것입니다. 우리는 올해의 수익 증가율을 12%로 잡았습니다. 이것이 우리의 목표이자 비전입니다.” ‘비전'이라는 단어는 본래 ‘눈으로 본다'는 뜻입니다. 그러나 ‘12%’로는 아무것도 볼 수 없습니다. 물론 앞으로 어떤 고난과 질책이 있을지는 확실히 알 수 있습니다. ‘초과 실적 운운하면서 매주 얼마나 볶아댈까’하며 말입니다.
집단 어리석음을 줄이거나 막기 위해서는 누구나 직관적으로 이해할 수 있고 희망할 수 있는, 또 그 안에서 충분히 의미를 찾을 수 있는 ‘좋은 형태'가 반드시 필요합니다. 그럼에도 오늘날에는 대부분의 기업이 더 이상 좋은 형태를 갖지 못합니다. 무질서하고 복잡한 미완성의 혼돈일 뿐입니다.
좋은 형태를 가진 전체와 스마트함, 천재적인 단순함은 개인이 소모하는 에너지를 몇 배로 되돌려줍니다. 하지만 집단 어리석음은 에너지를 파괴합니다. 도처에서 같은 불평이 들려옵니다. “같은 자리를 계속 맴돌 뿐이야.” “힘을 합쳐 공동의 적과 싸우는 게 아니라, 우리끼리 서로를 잡아먹지 못해 안달이야.” “이럴 거면 차라리 쳇바퀴나 돌리는 게 나을 것 같아.”
시시포스처럼 이룰 수 없는 것을 헛되이 시도하거나 어디로도 이르지 못한 채 쳇바퀴만 돌린다면, 에너지는 쉽게 소진되고 맙니다. 계속 똑같은 방식으로 일하면서 다른 성과를 기대하는 것은 어리석은 일입니다.
02 불가능에 도전하라?
지나치게 높은 목표는 부담감만 안길 뿐, 더 나은 전략을 구상하거나 성취 가능성을 확인할 여유를 주지 않습니다. 모든 팀원의 업무와 기능에 과부하가 걸려 실수와 일정 지연을 피할 수 없게 됩니다. 업무량은 엄청나게 늘어나지만 더 성취되는 것은 없습니다. 이와 관련하여 ‘유토피아 증후군’이라는 것이 있습니다.
‘유토피아 증후군'은 원하는 정도의 성공이 불가능하다는 사실을 인정하려 하지 않거나 혹은 인정하지 못해 집요하게 높은 이상을 추구하는 유토피아주의자를 염두에 둔 표현입니다. 유토피아 증후군에 사로잡힌 사람은 타인뿐만 아니라 자기 자신에게도 적대적인 태도를 보이며, 계속해서 심한 비난을 퍼붓습니다. 이런 사람은 성과에 대한 구체적인 그림이 전혀 없습니다. 때문에 배우려는 태도로 전략을 바꾸지 못하고 유토피아 역시 포기하지 못합니다. 게다가 주변의 충고도 전혀 받아들이지 않습니다. 자신의 재능에는 의문을 갖지 않고 그저 집요하게 ‘세계 최고'만을 고집합니다.
기업에서도 이런 유사한 현상이 일어납니다. 모름지기 기업이라면 어떤 상품을 어떤 고객에게 판매하고자 하는지, 또는 어떤 서비스를 누구에게 제공하고자 하는지 구체적인 비전을 가져야 합니다. 명확한 비전이 있어야 고객이 만족하며, 기업이 성공할 수 있습니다. 이런 논리는 가능한 한 돈을 많이 벌어야 한다는 사실을 부차적인 문제로 간주합니다.
그러나 기업 경영진 대부분은 전혀 다른 논리를 펼칩니다. 경영진은 먼저 기업이 짜낼 수 있는 최대한의 수익이 얼마인지 계산합니다. 그리고 이 계산 결과를 “근사하게 꾸민” 다음 투자자에게 내보이며 수익을 보장해주겠다는 약속과 함께 투자를 유도합니다. 곧이어 경영진은 이렇게 계산된 수익을 ‘목표’라 선포하고, ‘도전 과제’라 부르며,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이를 실현하는 것을 ‘전략’이라고 말합니다. 경영진은 실현 가능성에 대해서는 조금도 따져보지 않고 유토피아적인 목표를 세우며 이렇게 말합니다. “시장 성장률보다 두 배 이상 빨라야 한다!” 또는 “최소한 경쟁사보다 빠르게 성장해야 한다!”. 저마다 자신의 가능성은 살피지 않고 자기가 최고라 선언합니다. 아무튼 경영진은 “우리가 최고다”라는 선포로 언론을 도배해놓고 직원들을 닦달하고 압박합니다. 실제로도 터무니없이 높게 설정된 목표를 성취하라는 강요가 거침없이 쏟아집니다.
거의 불가능한 것을 왜, 그리고 어떻게 해내야 하는지 대개는 세부적인 구상이 없기 때문에 ‘문제’는 고스란히 직원에게 돌아갑니다. 그래놓고 ‘도전 과제’라고 합니다. 직원들은 분통이 터지지만 언론에 이미 유토피아를 약속한 터라 달리 어쩔 방도가 없습니다.
대다수의 팀원은 조직의 목표를 자신의 목표로 인정하지 않습니다. 위에서는 아무런 정당성도 없이 불가능한 것만을 요구합니다. 물론 목표 달성으로 출세를 이루고자 하는 야심 가득한 팀원이 없지는 않습니다. 이들은 적극적으로 나서서 그 어떤 어려움이 있어도 목표를 달성하려 합니다. 위에서 지시한 유토피아적 목표를 바로 자신의 목표로 받아들입니다. 이제 팀은 파가 갈립니다. 첫 번째 그룹은 유토피아 자체를 인정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유토피아가 해를 불러와 결국 몰락하게 될 것이라고 믿습니다. 두 번째 그룹은 유토피아를 개인적인 도전 기회로 받아들입니다. 세 번째 그룹은 강제 노동이라도 하는 것처럼 괴로워합니다.
시간이 지나면서 목표를 개인적 도전 기회로 받아들인 그룹 역시 아무리 노력해도 목표를 이룰 수 없다는 위기의식에 사로잡힙니다. 목표가 애초부터 너무 높게 설정되었기 때문입니다. 그럼에도 야심가, 특히 팀장은 모든 팀원에게 열정과 야근을 요구합니다.
집단 지성은 팀원 각자가 스스로 선택한 하나의 공동 목표 아래 똘똘 뭉쳐 서로 부족한 점을 채워가며 결실을 거두려 노력할 때 생겨납니다. 외부로부터 강요된, 즉 개인의 것으로 만들지 못하거나 공동의 합의로 선택되지 못한 유토피아적 목표 아래서는 “기꺼이 협력하고자 하는 의지”가 “아무런 의미 없이 함께 일해야만 하는 의무”로 바뀝니다.
감당해내기 어려운 일을 맡게 되면 대개는 일단 야근이라도 해서 그것을 해결하려 듭니다. 하지만 이런 태도야말로 자진해서 지옥으로 걸어 들어가는 것과 같습니다. 갑자기 놀랄 정도로 많은 업무나 과제가 주어지면 물론 야근을 해야 합니다. 이상할 것이 전혀 없는 지극히 정상적인 이야기입니다. 그러나 야근으로 성취 불가능한 목표를 이루려 시도한다면, 문제는 전혀 해결되지 않습니다. 오히려 우리는 문제의 희생자가 될 뿐입니다.
03 중압감이 초래하는 집단의 기회주의
조지 애컬로프(George A. Akerlof)는 1970년 ‘레몬 시장(Market for Lemon)’ 이론을 다룬 유명한 논문을 발표해 2001년 노벨 경제학상을 수상했습니다. 미국에서 ‘레몬(Lemon)’은 과일 레몬뿐 아니라 ‘품질이 떨어지는 제품', 곧 ‘하자 상품'을 뜻하기도 합니다.
애컬로프는 구매자가 자신이 구입하는 상품의 품질을 제대로 파악할 수 없는 중고차 시장을 연구 대상으로 삼았습니다. 특히 그는 중고차 중개상이 레몬, 즉 사고 이력이 있는 중고차를 팔아 악평이 자자한 지역의 시장을 찾아다니며 연구를 진행했습니다.
교활한 중개상의 간계에 속아 넘어간 고객의 분노는 거의 폭발직전이었습니다. 고객은 시장을 불신의 눈길로만 바라보았습니다. 그 결과 해당 지역의 고객은 매물로 나온 중고차에 별다른 기대를 하지 않고, 평균 가격을 치르려 하지 않았습니다. 고객은 사고 차량으로 밝혀질 위험에 대비한다며 차량의 가격을 깍으려 들었습니다. 이러한 이유로 중고차의 가격은 상당히 떨어졌습니다. 가격의 낙폭이 너무 커서 질 좋은 매물을 중개하던 상인도 큰 손실을 입을 정도였습니다. 그렇게되자 양심적인 중개상은 계속해서 시장을 떠났습니다. 그 결과 이제 시장에서는 질 좋은 중고차를 거의 찾아볼 수 없게 되었습니다. 이내 이 사실을 알아차린 고객은 다시금 중고차의 품질에 기대를 접습니다. 시세는 더욱 낮아지고 말았습니다. 그나마 버티던 ‘차선'의 중개상마저 큰 손실을 입었고 끝내 영업을 중단하게 되었습니다. 이런 식으로 시작된 죽음의 소용돌이는 저 밑바닥까지 집어삼켰습니다. 이제 시장에 남은 것이라고는 그야말로 싸구려 고물뿐이었으며, 이마저도 서로 불신하는 탓에 덤핑의 대상이 되었습니다. 마침내 시장은 완전히 무너졌습니다.
구매자는 질 좋은 중고차를, 중개상은 높은 수익을 내는 거래를 원합니다. 그러나 결국 남은 것은 누구도 원하지 않았던 시장의 붕괴였습니다. 모두 어찌할 바를 모르고 곤욕스러운 표정만 지었습니다.
애컬로프의 중고차 시장 사례는 기회주의적인 중개상을 향한 소비자의 불신 증가가 상품의 가격 및 품질의 하락 모두를 야기한다는 사실을 분명하게 증명합니다. 장기적인 안목으로 소비자를 위해 정직하고 성실하게 질 좋은 상품을 제공하는 중개상은 단기적으로 교활한 기회주의자와 경쟁할 수 없는 탓에 시장에서 사라지고 맙니다. 이내 시장에 등을 돌리고 아예 전업하거나 아니면 기회주의적인 중개상으로 변하는 경향을 보입니다.
결론은 이렇습니다. 기업이 자신의 가치를 끌어올리려는 목적만 가지고 기회주의에 사로잡히게 되면, 모두 이 흐름을 따라갈 수밖에 없습니다. 이는 장기적으로 볼 때 함께 죽는 길입니다. 기회주의에 빠진 기업은 소비자로부터 가능한 모든 것을 쥐어짜내려 합니다. 그러면 소비자도 이를 눈치채고 빠르게 기회주의적인 태도로 반응합니다. 한때 높은 신뢰도를 자랑했던 관계는 냉철한 계산이 지배하는 적대적인 관계로 변하고 맙니다.
이렇게 되는데는 우리가 ‘북 스마트’에서 ‘스트리스 스마트’로 바뀌는 것에서 원인을 찾을 수 있습니다. 북 스마트Book Smart는 ‘책을 통해 터득한 스마트함’으로 어떤 세상이 좋은 세상이며 어떻게 하면 좋은 세상을 만들 수 있을지 고민합니다. 반면 스트리트 스마트Street Smart는 위기 순간에서도 정확한 판단을 내리는 생존 기술로 무장한 스마트함’으로 세계를 그저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고, 경쟁의 승리나 생존만을 외칩니다.
현실의 경제에서 인간은 서로 더 많은 이득을 차지하려 싸웁니다. 경기가 불황이냐 호황이냐에 따라 더 치열한 경쟁을 벌이는가 하면, 때로는 협력을 모색하기도 하는 것이 현실의 경제입니다. 그런데 오래전부터 컴퓨터와 최적화 소프트웨어로 무장한 싸움은 가격 경쟁과 임금 덤핑에만 집중해왔습니다. 노동자는 실직의 두려움과 인센티브의 압박으로 꼼짝없이 길들여졌습니다.
이런 식으로 생각과 행동은 점점 더 강하게 분열 양상을 띱니다. 스트리트 스마트의 행태는 무의미한 과부하를 초래했으며, 시장 참여자의 기회주의적인 태도를 묵인하게 만들었습니다. 이제 경제는 말 그대로 기회주의자들의 정글이 되어버렸습니다. 정보의 우위를 선점한 쪽은 이를 철저히 악용합니다. 이런 모든 스트리트 스마트 효과가 함께 어울려 악순환, 즉 애컬로프가 말하는 죽음의 소용돌이를 빚어냅니다. 갈수록 더 기회주의가 득세하며, 고객의 신뢰는 사라지고, 상품의 품질은 계속 나빠지기만 합니다.
이같은 잘못된 경영이 바로 집단 어리석음을 만든 주범입니다. 그리고 이 집단 어리석음은 계속해서 세계 경제를, 특히 대기업을 장악하고 있습니다. 집단 어리석음은 교양 있는 북 스마트에게 “거리라는 정글에서 살아남으려면” 스트리트 스마트가 되라고 강요합니다. 집단 어리석음이야말로 우리 모두를 억압하는 커다란 장애물입니다.
04 집단을 지배하는 상대적 관점
최고와 이류 사이에는 넘을 수 없는 높은 벽이 존재합니다. 최고는 천재적으로 단순하게 탁월한 것을 창조하려는 목표를 추구합니다. 그리고 그에 알맞은 방법을 찾습니다. 충분한 시간을 가지고 끈질기게 목표를 달성하려 노력합니다. 연습을 거듭하며 진땀을 흘립니다. 그러면서 보다 근원적인 질문을 던집니다.
소비자는 어떤 상품과 서비스를 천재적으로 단순한 것이라 생각할까? 우리는 미래에 어떤 주거 환경에서 살고 싶어 할까? 지식 사회에서 최고의 교육이란 무엇일까? 미래에 우리가 필요로 할 인물은 어떤 사람이며, 어떻게 그를 키워낼 수 있을까? 우리의 인생이 추구해야 할 의미는 무엇일까? 직업이라는 단순한 차원을 넘어 우리는 어떤 책임을 감당해야 마땅할까? 어떻게 하면 최고를 실현해낼 수 있을까?
이처럼 절대적인 기준으로 살펴야 할 수많은 질문을 제시합니다. 대부분의 생각, 그리고 행동은 이 질문을 푸는 데 집중합니다. 성공은 최고를 이루려는 생각과 행동의 실현입니다. 최고가 되려면 선구자와 기업가는 불타는 열정을 보여야만 합니다. 이것이 퍼스트 클래스의 관점입니다.
그러나 대다수 사람에게 최고란 비교에서 가장 높은 평가를 얻거나 ‘최고의 성적’을 얻는 것입니다. 스포츠에서는 평점이, 학교에서는 성적이, 기업에서는 실적과 직급과 연봉이 최고 기준입니다. 경영자는 기업이 올린 수익이나 맡은 부서의 실적에 따라 평가받습니다. 간단히 말해 순위표의 가장 위에 선 사람이 최고입니다. 이들은 대개 아는 척을 일삼는 북 스마트입니다. 능력은 갖추었으나, 퍼스트클래스로서의 태도는 한참 부족합니다. 어디까지나 세컨드클래스 가운데 최고일 뿐입니다. 전체적으로 기준과 지시 사항 목록에 따라 행동하여 칭찬받기에 필요한 의무만 다할 뿐이고, 그저 경쟁자보다 약간 더 앞서기만 하면 될 뿐입니다.
스트리트 스마트도 마찬가지입니다. 세컨드클래스로 그저 졸업장이나 최종적인 성공만 원합니다. 이들은 매우 목적 지향적이며 실용적입니다. 오로지 사안을 효율적으로 ‘장악’하는 데에만 관심을 가집니다. 그리고 뭔가 얻어낼 것이 있을 때에만 본격적으로 달려듭니다. 예를 들어 연봉 인상이라거나 승진이라거나 승리의 기회가 엿보일 때만 말입니다. 그래서 세컨드클래스는 어떻게 좋은 실적을 올릴지 많은 고민을 하며 늘 상대적으로만 생각할 뿐입니다. 이에 반해 퍼스트클래스는 비교를 허락하지 않는 절대적인 생각만 합니다. 상대적 평가는 아무런 의미가 없습니다. 절대적인 관점으로 자신을 바라보고 평가하는 것이 퍼스트클래스의 자세입니다. 이처럼 퍼스트클래스의 절대적인 관점과 세컨드클래스의 상대적인 관점 사이에는 엄청난 차이가 있습니다.
집단에서 이류가 다수를 차지하게 되면, 이류의 사고방식이 그 집단을 지배합니다. 이류는 공동의 목표를 생각하지 않으며, 그저 업무만 처리하려 듭니다. 최고가 이류를 막지 못해 집단 어리석음이 시작되는 순간입니다.
퍼스트클래스의 이상과 세컨드클래스의 현실을 조화시킬 수 있는 사람은 많지 않습니다. 바로 이러한 이유로 퍼스트클래스의 자질을 갖춘 많은 사람들이 좌절에 빠집니다. 혼자서 안간힘을 다해 절대적인 경지를 이루려 하는 것만으로 탁월함이 성취되지는 않습니다. 중요한 것은 탁월하고 절대적인 것을 창출하기 위해 북 스마트와 스트리트 스마트를 함께 묶어낼 줄 아는 능력입니다.
위대한 신전을 지을 탁월한 능력을 갖춘 수도사는 매우 많았습니다. 하지만 단 한 명의 성인이라는 기둥만으로 신전이 세워지지는 않습니다. 사람들의 마음을 사로잡고 움직이기 위해서는 탁월함이 카리스마의 빛을 발휘해야만 합니다. 즉 진정한 퍼스트클래스라면 그에 맞는 스트리트 스마트의 자질도 갖추어야 합니다.
그러나 이런 퍼스트클래스를 밀어내는 것이 있습니다. 바로 단기적으로 달성해야할 과도한 목표입니다. 지나치게 높은 목표가 주는 과중한 압박감은 직원의 시야를 극한으로 좁혀 오로지 목전의 업무에만 매달리게 만듭니다. 저마다 오직 자신의 목표에만 몰두합니다. 그때그때 발생하는 문제는 타인에게 미뤄버립니다. 저마다 입을 모아 ‘어리석은 시스템’에 불평을 쏟아냅니다. 이처럼 위에서 지시한 극단의 집중은 사람들로 하여금 전체의 극히 일부분만 보게 만듭니다. 직원들은 코끼리를 더듬는 맹인처럼 자신이 만지고 있는 부분이 전체 모습이라고 착각합니다. 그 결과 절대적인 퍼스트클래스의 안목은 누구도 갖지 못합니다. 그래서 목표의 독재는 사람들을 퍼스트클래스와 멀어지게 만듭니다.
이제 점수에 연연하고 이득에 중독된 사람만 득시글댑니다. 집단은 절대적 관점과 의미를 고민하는 태도와 작별하고, 미래를 내다보며 탁월함을 이룰 생각도 전혀 하지 않습니다. 집단은 갈수록 어리석음을 키웁니다. 상대적으로 경쟁에 뒤처지지 않는 한, 집단은 자기만족으로 흥겨워합니다. 그러나 세컨드클래스 집단이 어떤 다른 집단과 비교해 자신의 약점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는 상황에 이르면, 집단 구성원들은 화들짝 놀라 ‘본래 어땠어야 하는가’라는 고민에 사로잡힙니다.
직원은 자신이 다니는 회사에 자부심을 갖길 원합니다. 혁신을, 기꺼이 일하고 싶은 직장 분위기를, 열린 소통을, 전문성 향상을, 승진 가능성을, 의욕 넘치는 업무 처리로 만족을 표하는 고객을 절실하게 갈망하고 이들을 위해 노력합니다. 하지만 지나치게 높은 목표가 이들을 밀어내고 있습니다.
05 눈앞의 문제만 보는 근시안적 태도
일반적으로 기업은 매출이 급감하면 바로 영업에 문제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매출과 관련해 가장 먼저 떠오르는 것이 영업이기 때문입니다. 분기 실적 미달을 확인한 경영진은 당장 영업 부장의 엉덩이부터 걷어찹니다. 그리고 원인 분석과 함께 각종 질문을 퍼붓습니다.
영업 사원은 얼마나 자주 고객을 찾는가? 1회 고객 상담 시 소요시간은 얼마나 되는가? 고객이 묻는 것 이상으로 모든 상품을 골고루 보이며 충분히 설명했는가?
이제 영업부에는 청천벽력이 떨어집니다. 고객을 더 많이 찾고, 고객에게 더 많은 상품을 추천하고, 고객에게 더욱 스트레스를 주라고 몽둥이를 들고 위협합니다.
경영진은 영업부가 제대로 열정을 보이기만 한다면 모든 일이 순조로울 것이라는 고정관념에서 좀체 빠져나오지 못합니다. 그러나 그것이 문제의 원인이 아니라면? 상품이 좋지 않아서 팔리지 않는다면? 그러면 당연히 영업 사원의 열정과 부지런함은 시들해집니다. 경영진은 다시 부지런해져라! 열정을 발휘하라! 끊임없이 다그치지만, 상황은 좀처럼 나아지지 않습니다. 부지런함과 열정은 계속해서 시들해지고, 주가는 곤두박질칩니다. 욕설과 다그침은 더욱 커집니다.
애컬로프가 언급한 죽음의 소용돌이가 휘몰아칩니다. 소용돌이는 저 아래 바닥까지 모든 것을 집어삼킬 기세입니다. 소용돌이의 강도는 갈수록 심각해지고 전체가 죽을 지경에 이릅니다. 하지만 잘못된 편집증적 치료만 고집합니다. 병이 생겼는데, 엉뚱한 진단을 내려 잘못된 치료법을 고집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병세는 더욱 깊어집니다. 그럼에도 잘못된 치료법을 계속 강요합니다. 병은 갈수록 더 심해집니다.
“또 마을에 돼지를 풀어 난리를 만드는군.” 기업에서 산전수전을 모두 경험한 중년 직원들은 속으로 머리를 절레절레 흔듭니다. ‘돼지를 마을에 풀다’라는 관용구는 더는 통하지 않는 고정관념을 절대 진리인 양 윽박지르는 태도를 뜻합니다. 상품의 개선에 신경 쓰기보다 영업 실적에 목을 매는 경영진에게 딱 어울리는 말입니다.
경영진은 영업부의 동기를 자극하기 위해 온갖 요란한 프로그램을 제시하며 목표 달성을 다그칩니다. 이런 특별 프로그램은 대부분 진부한 아이디어를 새로 포장한 것에 불과하고, 주된 재료로 각종 세미나 혹은 강연에서 만병통치약처럼 추앙받는 미사여구가 쓰입니다. 문제는 이런 식으로 풀어놓는 돼지가 다른 기업의 그것과 똑같다는 점입니다. 뭔가 대단한 일을 벌이는 것 같지만 결국 경쟁자와 다를 것이 하나도 없는 수법에 고객은 식상함을 느낄 뿐입니다.
그럼에도 만병통치약은 사람들을 열광시킵니다. 이 열광의 힘은 너무 강해서 다른 모든 이성을 초라하게 만들어버립니다. 바로 이러한 이유로 경영진은 마을에 새 돼지를 풀어놓을 때마다 환상적인 열정을 요구합니다. 새로운 만병통치약은 기업에게 시간을 벌어주며, 비판에서 자유롭게 해줍니다. 가짜 약을 진짜라 믿고, ‘이제 모든 것이 좋아질 거야!’라고 느끼는 것이 플라세보 효과입니다. 고정관념에 사로잡힌 사람이 도취감에 빠지는 이 단계에서는 플라세보 효과가 오래가지 않고 효과 자체도 빠르게 감소합니다. 그러나 이 사실을 아무리 말해줘도 소용이 없습니다. 또한 이런 방법은 대개 팀 혹은 조직으로 함께 시도됩니다. 집단 최면 효과로 기쁨이 배가되도록 하기 위한 것입니다.
06 성공 공식에만 집착
문제적인 기업은 산처럼 쌓인 문제를 바라보며 그 가운데 하나만을 골라 해결하려 합니다. 그러나 그 문제는 지금 당장 처리하지 않으면 안 될 시급한 문제일 뿐입니다. 이후 만병통치와 같은 것이 구명튜브처럼 던져지면 그것에만 매달립니다. 앞뒤를 따져가며 고민할 시간이 없다는 핑계만 대면서 터널처럼 좁은 시각에 빠집니다. 때문에 방향을 바꿔야 한다는 주장을 무시합니다. 무조건 성공을 약속한다는, 최신 유행법이라면 무엇이든 가리지 않고 시도합니다.
전체적으로 무너진 균형은 단 하나의 해결책에 집중한다고 해서 절대 회복되지 않습니다. ‘생기 없음’에서 ‘넘치는 생동감’으로 넘어가기 위해서는 매우 근본적인, 전체를 포괄하는 전환을 해야 합니다. 즉 전체가 변화해야 합니다. 하지만 문제적인 기업은 대체로 전체에서 하나만 골라 그 문제에만 집중하며 국부적인 개선을 기대합니다.
은행을 예로 들어 보겠습니다. 오늘날의 은행은 각 지점의 작은 공간에 자동화기기를 설치해 과거 직원의 업무를 고객이 스스로 처리하게 만들었습니다. 이로써 은행은 엄청난 비용을 절약하게 되었지만 예상하지 못한 부작용을 얻었습니다. 이제 고객은 지점 안쪽으로 더 이상 들어오지 않습니다. 예전처럼 편안하게 고객과 대화를 나누기가 힘들어졌습니다.
결과적으로 은행은 자동화기기를 설치하면서 고객과 직접 접촉할 기회를 스스로 제거했습니다. 더이상 고객은 상담을 받기 위해 은행을 찾지 않습니다. 본래 은행은 통장을 들고온 고객과 ‘자연스레’ 대화를 나누었습니다. 그러나 현재 이 가능성은 깨끗이 사라졌습니다. 이제 고객에게 ‘의도적’으로 접근해야 합니다. 하지만, 고객은 이런 접근이 싫습니다. 둘의 관계는 계속해서 나빠집니다.
매출을 올리고 싶은 은행은 접촉 횟수를 강제로 끌어올리려 합니다. 물론 그런다고 문제가 해결되지 않습니다. 고객과의 관계를 근본적으로 개선하는 것이 핵심이기 때문입니다. 이를 위해서는 무엇인가 팔겠다는 의도가 없는, 자연스러운 대화가 가능한 상황을 만들어야 합니다.
하지만 은행은 고객과의 관계를 악화시키는 쪽으로 비용을 절감해왔습니다. 빠르게 대체되는 시간제 근로자를 투입해 고객을 소외시킴으로써 은행은 관계를 스스로 망가뜨렸습니다. 현재 상황에서 문제없는 관계를 재구축하려면 엄청난 비용을 투자해야 합니다. 은행은 고객과의 관계 개선을 시도하기는 커녕 어리석게도 콜센터로 상담 약속만 잡으려듭니다. 이런 은행의 태도에 고객은 넌더리를 냅니다.
정리하면 “고객 접촉 횟수 X를 끌어올리면 매출 Y도 올라간다!”는 식의 인과관계 해석은 아래로 곤두박질치는 애컬로프의 소용돌이를 초래합니다. 여기서 X는 ‘모노카우자Monocausa’, 즉 유일한 원인입니다. 결국 X만 해결되면 모든 것이 좋아지리라는 기대가 생기고 모든 ‘열정과 격정’을 X에만 쏟아붓게 됩니다. 이로써 잘못된 모노카우자는 모두의 고정관념으로 자리 잡아 노이로제 현상을 낳습니다. 엄청난 에너지와 집착을 요구하는 고정관념은 사람들의 신경을 곤두서게 만들어 정상적인 사람은 두 손을 들 수밖에 없게 하는 상황을 초래합니다. 결국 전체는 균형을 잃고 ‘만병통치약’과 같은 망상에 사로잡힙니다.
07 문제 상황을 만드는 계획과 목표
지나치게 높은 목표로 인해 모두가 일상 업무만 강요받는 상황에서는 두 가지 죄악이 발견됩니다. 첫 번째, 매우 강력한 처벌을 받는, 시스템에 ‘저항'하는 죄악. 두 번째, 시스템의 이름으로 시스템을 따르면서 자행되는 죄악.
이 두 죄악은 명확히 구분되어야 합니다. 예를 들어 출장비를 부풀려 사적인 이득을 취한 직원은 해고됩니다. 그는 시스템, 곧 기업을 속였습니다. 만약 이 직원이 고객을 속여 상품을 판매했다면, 시스템의 공식적인 윤리 규정을 위반하기는 했지만 이로써 기업은 더 나은 실적을 올리게 됩니다. 적어도 단기적인 관점에서는 말입니다. 이 경우 해고의 위험은 없습니다. 대개 처벌조차 받지 않습니다. 당장의 분기 실적을 끌어올려 수익 극대화라는 최종 목적에 이바지했다면 비록 다른 관점에서는 범죄라 할지라도 시스템은 묵인합니다. 어떤 식으로든 ‘실적을 올린 직원’은 기업의 보호를 받습니다. 물론 이런 죄악이 적발되어 외부에 알려지면 상황은 달라집니다. “유감스럽기는 하지만 개별 사례”일 뿐이라며 기업은 단호한 처벌을 내리는 모양새를 취합니다. 그러니까 발각되지 않는 한, 죄악은 시스템의 이름으로 용인됩니다. 이렇게 시스템은 안쪽부터 썩어 들어갑니다. 이것이 바로 집단 어리석음입니다.
현실의 사례를 들어보겠습니다. 대규모 부품 제조업체가 연말이 다 되었는데도 수익 목표를 달성하지 못해 곤경에 처했습니다. 업체 경영진은 꾀를 내어 거래 업체를 설득해 대형 기계가 고장 난 것처럼 조작하게 했습니다. 부품은 12월 31일에 화물차에 실려 자정 직전 고객에게 배달되었습니다. 적재 시점이 올해이므로 회계상으로 이 매출은 ‘올해 실적’으로 잡힙니다. 이튿날, 즉 1월 1일에 부품을 실은 화물차가 업체로 되돌아옵니다. 확인 결과, ‘다행스럽게도’ 고장은 없었으며 ‘유감스럽게도 직원의 조작 실수’였다는 사실이 밝혀집니다. 반품된 부품은 이듬해의 새 회계장부에 기록됩니다.
이런 꼼수로 부족한 실적이 채워집니다. 그러나 이듬해의 새 회계장부는 처음부터 손실로 시작될 수밖에 없는 참으로 기묘한 상황이 연출됩니다. 지난해 목표가 달성되었으므로 다들 기쁘게 보너스를 받았습니다. 주주와 사주 역시 배당금을 두둑히 받고 뛸 듯이 기뻐했습니다. 애초에 발생하지도 않은 수익으로 받은 보너스로 말입니다. 이듬해의 회계장부는 그만큼의 높은 손실을 떠안은 채 출발해야 합니다. 집단 어리석음에 사로잡힌 경영진은 그 손실을 올해에 만회할 수 있을 것이라 기대합니다. 거기다 심지어 이제까지와 마찬가지로 전년 대비 수익 상승을 기록할 수 있을 것이라는 바보 같은 엉터리 계산까지 합니다.
이제 매년 12월 31일에는 부품을 실은 트럭이 여기저기 산책을 다닙니다. 게다가 다른 꼼수와 속임수도 속속 등장합니다. 이로써 업무량은 엄청나게 늘어납니다. 부품의 판매 기록을 만들고, 싣고 내렸다가 다시 창고에 정리하고 판매 취소 기록을 하고, 이 모든 것을 세무서에 신고하는 등의 쓸데 없는 일이 생겨납니다. 이 기업의 상황은 매년 갈수록 더 나빠졌습니다. 애컬로프의 죽음 소용돌이에 사로잡히고 만 것입니다.
이후 시스템 혹은 기업은 대개 지도부를 교체함으로써 죽음의 소용돌이를 벗어나려 합니다. 첫 해의 손실을 깨끗이 인정하고 모든 꼼수와 속임수를 청소함으로써 기업의 생명력을 회복하려는 시도입니다. 정말 용감한 대기업만이 이런 행보를 보입니다. 대부분의 경우 이렇게 하면 악순환을 멈출 수는 있습니다. 그러나 새 지도부가 집단 어리석음에 사로잡힌 전체 시스템과 ‘분위기’를 집단 지성 쪽으로 돌릴 수 있을지는 미지수입니다.
08 오로지 효율화에만 몰입
기업이 추진하는 거의 모든 변화는 결국 비용 절감과 최적화를 목적으로 합니다. 이를 위해 경영학은 머리를 쥐어짜며 몇 가지 방법을 고안해냈습니다. 컨설턴트는 ‘절감 경영’과 ‘리엔지니어링’이라는 방법으로 기업을 가르치려 듭니다. 수십 년 동안 세계 도처에서 이 방법이 정비되고 정리되었으며 기업 규모가 비대하던 시절에는 이것이 잘 먹히기도 했습니다. 그러나 이 방법은 오로지 절감과 최적화만을 위해 고안되었을 뿐입니다. 다른 요소는 전혀 고려되지 않았습니다.
이제 문제가 불거지기 시작합니다. 많은 변화, 이를테면 대규모 혁신이 단행되는 경우, 얼마나 많은 이익이 발생할지는 누구도 예측할 수 없습니다. 수많은 변수가 존재하기 때문에 그런 계산은 불가능합니다. 결국 사업가의 감에 따라, 직감이나 본능에 따라 결정이 내려집니다. 너무나 오래 효율성 프로세스만을 연습해왔기 때문에 기업은 오로지 이런 방식으로밖에 생각할 수 없습니다.
개선을 위한 혁신에는 좀 더 비싸더라도 더 좋은 상품을 구입하고 싶어 하는 고객의 욕구를 발견하는 감각이 필요합니다. 이를 위해서는 반드시 실험이 수행되어야 합니다. 시험 모델을 제작해 시제품 시장이나 기자회견 등에서 선보이며 고객의 반응을 살펴야 합니다. 이처럼 혁신에 필요한 비용은 어느 정도 계산이 가능하지만 그 혁신을 도입함으로써 얻게 될 이득은 예측이 불가능합니다. 높은 비용을 들여 제작한 시험 모델을 통해 대략적으로 추정만 할 수 있을 뿐입니다. “그것이 당장 어떤 이득을 가져다줍니까?”라는 질문은 생각의 폭을 좁혀 혁신의 싹을 잘라버립니다. 하지만 혁신은 시장에서의 생존 여부를 결정짓는 매우 중요한 요인입니다.
반대로 그럭저럭 괜찮은 품질을 노리는 변화는 경영진의 입맛에 딱 맞습니다. “그것이 당장 어떤 이득을 가져다줍니까?”라는 질문에 바로 답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만하면 됐어!”라는 말은 당장에 비용을 절감시켜줍니다. 물론 고객은 이같은 얼렁뚱땅식 처리를 금세 알아차립니다. 결국 장기적으로는 고객의 신뢰를 잃는 것입니다. 이는 당연히 직원의 의욕에도 악영향을 끼칩니다. 직원들은 갈수록 ‘자부심’을 잃습니다. 자신과 기업을 동일시하던 직원의 자긍심은 빛바랜 지 오래입니다. 직원들은 곧 “그만하면 됐어!” 하는 눈길로 기업을 바라보며, 업무 역시 ‘대충 괜찮은 정도’로만 처리합니다.
진정한 변화를 일으키는 혁신 또는 새로운 기술이나 사업 모델로의 전환은 이제 거의 불가능한 일이 되었습니다. 틀에 박힌 생각 탓에 혁신은 좌초합니다. 혁신은 단계마다 정확한 이득 계산을 요구하는 결재 프로세스를 통과할 수 없습니다. ‘비용이 들어가는 모든 것’이 금지됩니다. 생각도 해서는 안 됩니다. 비용 절감이 최우선인 마당에 어찌 감히 그런 생각을 할 수 있겠습니까.
결과적으로 오늘날 분기 실적 회의에서 누군가 아주 근사한, 중장기적인 성공을 보장하는 아이디어를 내놓는다면, 아마 주변의 따가운 눈총을 받게 될 것입니다.
09 온도계의 온도만 높이면 여름이 온다?
기업은 어리석은 먹잇감을 발견하면, 성냥불로 온도계를 데우며 전국이 열기에 휩싸였다는 거짓을 퍼뜨립니다. 온도는 온도계로 측정할 것이라 생각하는 어리석은 이들은 이 거짓에 그대로 속아 넘어갑니다. 좋은 예가 페이스북입니다. ‘좋아요!’를 많이 받으면 우쭐해지는 기분은 이렇게 해서 생겨납니다. 온라인 서점 아마존에서 별점 다섯 개를 받은 책은 틀림없이 무언가 특별한 것이 있으리라는 믿음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이처럼 사람들은 평가를 내릴 때 무언가 기댈 구석을 찾고, 이 사실을 알고 있는 기업은 측정치를 위조하고 지표를 조작하기 시작합니다. 이런 속임수는 결국 모두에게 해악을 끼칩니다. 성냥불로 데운 온도계를 봐서는 정확한 외부 온도를 알 수 없는 것처럼 별점 다섯 개가 본래 무엇을 의미하는지 정확하게 아는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그러니까 핵심은 이런 속임수가 한동안 먹히는 탓에 결국 실제 측정 도구까지 신뢰를 잃고 만다는 것입니다. 결론적으로 모든 것이 속임수이기 때문에 우리는 아무것도 평가할 수 없게 됩니다. 다시금 집단 어리석음에 사로잡힌 애컬로프의 소용돌이가 휘몰아칩니다.
경영진이 지표를 버리는 순간, 지표는 무의미한 것이 됩니다. 왜 집단 어리석음은 이처럼 간단한 진리를 외면할까요? 원하는 성과가 나오지 않는 시스템을 고집하고 관리하는 것은 정말 무의미한 일입니다. 언제나 처음에는 장밋빛 미래를 전망하지만 나중에는 아무것도 남지 않게 됩니다.
지표는 상황을 대략적으로 가늠해볼 수 있는 매우 유용한 수단입니다. 하지만 지표를 자의적이고 악의적으로 조작해 변화를 시도하면서 자신에게 유리한 쪽으로 전체를 속이는 행위는 파국을 부르는 어리석음입니다. 속임수로 조작된 지표는 예측 능력을 전혀 갖지 못합니다. 앞을 내다보지 못하게 하는 지표로 우리는 눈이 멀고 맙니다. 결곡 기업은 지표를 조작함으로써 다른 기업과 똑같아지고 맙니다.
선입견에 비위를 맞추는 기회주의적인 행위와 지표 조작은 모든 것을 같아지게 만듭니다. 기업, 정당, 개인은 모두 천편일률적으로 같은 겉모습을 갖게 되고, 결국 정체성마저 잃어버립니다.
10 바벨탑을 쌓는 의사소통
메타 커뮤니케이션은 ‘커뮤니케이션을 내려다보는 커뮤니케이션’입니다. 사람들은 상대방을 어떻게 대하면 좋을지, 자신의 본래 동기가 무엇인지를 솔직하게 이야기할 때 메타 커뮤니케이션을 합니다.
인간 혹은 당파는 합의 정신을 중시하며 신뢰감을 키우는 쪽으로 대화를 나누면서 입장을 솔직하게 표현하고 그 차이를 조금씩 좁혀나갈 때 건강한 관계를 꾸릴 수 있습니다. 이를 위해서는 자신의 동기를 진솔하게 털어놓으며, 이해관계, 우선순위, 목표, 능력, 개인적 관심사 등 모두 놓고 대화를 나눠야 합니다. 자신의 세계관과 시각을 설명해가며 견해 차이를 좁혀나가면 공감 능력을 키울 수 있습니다. 서로 다른 언어를 쓰는 사람들일지라도 이런 상호 이해 과정을 거치면 바벨탑에서도 얼마든지 공존하며 함께 소통하고 일할 수 있습니다.
반면에 메사 커뮤니케이션은 오로지 자신의 생각에만 사로잡힌, 즉 집착이라는 감옥에 갇힌 커뮤니케이션입니다. 메사 커뮤니케이션은 두 명 이상의 대화 참여자 혹은 당파 사이에 발생하는 문제입니다. 양쪽은 각자의 입장에서 자신의 관점으로만 소통합니다. 그로 인해 진정한 소통은 이뤄지지 않습니다. 모든 대화에 갈등이 촉발됩니다. 싸움은 다시 싸움을 낳고 우격다짐이 끝없이 이어집니다.
이에 비해 메타 커뮤니케이션은 서로에게 이야기할 기회를 충분히 주고 항상 모두가 동의하는 합의를 도출할 수 있게 해줍니다. 메타 커뮤니케이션이 가능하다면 단 한 번의 회의로도 충분히 합의를 이끌어낼 수 있으며 때마다 벌어지는 다툼도 막을 수 있습니다.
하지만 메사 커뮤니케이션을 하게 되면 모든 개별 사안에서 각자가 자신의 이해관계만 따지는 상황이 벌어집니다. 사실 메사 커뮤니케이션이 그때그때 임시방편으로 찾는 해결책은 메타 커뮤니케이션이 이끌어내는 합의와 크게 다르지 않습니다. 하지만 메사 커뮤니케이션은 여러 차례의 회의로 시간을 낭비하게 하고 관련자들의 신경을 곤두서게 만듭니다. 메타 커뮤니케이션 능력을 가진 사람은 이 사실을 잘 알고 있기에 아예 싸움을 시작하지 않습니다.
오늘날 조직을 가장 비효율적으로 만드는 것은 메사 커뮤니케이션입니다. 이런 잘못된 소통 방식이야말로 집단 어리석음을 만드는 주범입니다. 이에 대해 기업에서 하는 전략회의를 예로 들어보겠습니다. 전략회의는 본래 전체 경영진이 일상 업무에서 벗어나 서로 대화를 나누기 위해 고안된 것입니다. 서로 거리를 좁히고 상대의 입장을 이해하며 메타 커뮤니케이션을 이룰 수 있다면 이런 회의를 마다할 이유가 없습니다. 경영진이 모두 모여 전체를 주제로 이야기를 나누는 것은 적극 권장해야 할 일입니다.
그러나 현실은 어떤가요? 전략회의 당일 오전 내내 간부들은 목표 대비 실적을 놓고 매번 똑같은 결론을 내립니다. 사장이 원하는 초과 실적을 반드시 달성하자는 말만 지루하게 반복합니다. 정말이지 실제 업무 현장과는 너무나 멀리 떨어진 논리이자 압박입니다.
그런 회의가 항상 나쁘다는 뜻이 아닙니다. 하지만 문제는 심각합니다. 이렇게 되면 각각의 부서를 책임지고 있는 중간 간부들이 좀처럼 자신의 입장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그 안에 갇혀버리고 맙니다. 말 그대로 모든 것이 ‘메사’로 남습니다.
그러면 처음부터 실적만 따질 것이 아니라 흉금을 털어놓고 허심탄회하게 의견을 나눠가며 ‘메타’가 되어야 하지 않을까요? 왜 매번 당장 눈앞에 결과를 내놓으라고 윽박지르면서 회의 분위기를 험악하게 만들까요? 적어도 한 달 전에는 토론 과제를 공유한 후에 회의를 한다면 생산적인 토론을 할 수 있을 텐데 말입니다.
입만 열었다 하면 실적 얘기만 하는 회의는 그저 시간 낭비에 불과합니다. 전체를 위한 메타 커뮤니케이션의 기회는 그렇게 물거품이 됩니다. “해내야 한다! 할 수 있다! 하자!” 이런 구호 이상의 것은 결코 나오지 않습니다. 전체는 전혀 정리되지 않습니다. 함께 힘을 모아 목표를 이루자는 공동 의지 역시 전혀 생겨나지 않습니다. 회의를 하면서 메타 커뮤니케이션을 염두에 두는 일도 거의 없습니다. 최고 경영진은 그저 중간 간부들에게 압력을 가하고 그들을 쥐어짤 뿐입니다. 결국 간부 역시 직원을 쥐어짜는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면 왜 메타 커뮤니케이션의 필요성을 알아차리지 못할까요? 집단 어리석음이 철저하게 ‘메사’에 사로잡혔기 때문입니다.
11 집단 어리석음은 모두를 미치게 한다
우리는 파놉티콘에서 끊임없이 감시당하며, 자극받고 평가받습니다. 모두가 기회주의에 빠져 최대 실적을 내기 위해 애씁니다. 다시 말해 우리는 집단 어리석음이라는 견디기 힘든 고통을 감내해야 합니다. 인간은 적응하는 존재입니다. 지성을 포기하고 적당한 신경증을 골라 그럭저럭 견디는 식으로 고통을 삭일 수 있는 존재가 바로 인간입니다. 어떤 신경증이 견딜 만한 것인지는 개인에 따라, 상황에 따라 다를 것입니다.
결국 집단 어리석음은 모두를 미치게 만듭니다. 어리석음은 더 깊게 뿌리를 내려 집단은 더 이상 손을 쓸 수 없는 지경에 이릅니다. 우리는 지나치게 공격적인 스트리트 스마트가 되거나 강박에 사로잡힌 채 자기도취에 빠지는 나르시시스트가 됩니다. 아니면 모든 것을 포기한 노예처럼 무기력하게 우울증을 앓습니다.
그렇게 집단은 어리석음을 키워 그 폐해를 고스란히 개인에게 떠넘깁니다. 개인은 집단처럼 어리석게 변하지는 않을지라도 신경증에 걸려 융통성이라고는 전혀 모르는 기회주의자로 전락하고 맙니다. 달성할 수 없는 목표에 짓눌려 전후좌우를 살피고 맥락을 파악할 감각을 잃고 맹목적으로 행동합니다. 집단 이기주의에 사로잡혀 다른 쪽의 이해관계는 완전히 무시해버립니다.
마침내 전체는 자질구레한 싸움으로 얼룩져 엉망진창으로 변합니다. 많은 사람들이 이런 상황을 ‘복잡성’이라는 단어로 표현합니다. 집단 어리석음은 항상 이런 복잡성에 뿌리를 내리고 싹을 틔웁니다. 복잡성을 슬기롭게 극복하는 집단 지성은 이제 찾아보기 힘든 예외가 되었습니다.
12 함께 스마트해질 수 있을까?
오늘날 우리가 안고 있는 문제는 모두 어리석음이 만들어낸 것입니다. 집단 어리석음은 경제 지상주의라는 명분으로 인생의 중요한 터전을 쑥대밭으로 만들어버렸습니다. 이런 어처구니없는 상황은 자연 상태가 절대 아닙니다. 어리석음이 비현실적인 목표를 강제하며 인간을 무의미하게 다그치고 독촉하는 바람에 빚어진 상황일 뿐입니다.
오늘날의 정치인은 압력과 스트레스에 시달리며 오로지 유권자의 표심만을 쫓아다닙니다. 경영자는 실적에만, 학생은 성적에만 목을 맵니다. 이런 태도는 권력이나 성공을 향한 탐욕 때문에 생긴 것이 아닙니다. 인위적으로 조작한 만인에 대한 만인의 투쟁, 즉 무한 경쟁이 진짜 원인입니다.
우리는 경쟁만이 살 길이라는 착각에 빠져, 허황된 목표를 세우고 배움이 아닌 시험공부에만 열중하며, 숫자로 ‘객관적인 실적 등급’을 매기고 그 점수로 인간을 속단했습니다. 스트레스만 가득한 무한 경쟁은 이렇게 인위적인 싸움을 강제합니다.
사람들은 이 싸움이 못마땅하면서도 낙오가 두려워 어쩔 수 없이 경쟁에 동참합니다. 단지 살아남기 위해 점수를 구걸할 뿐입니다. 그렇게 우리는 집단 어리석음의 포로가 되었습니다.
집단 어리석음은 즐거웠던 우리의 일을 생존 경쟁으로 내몰았습니다. 반면, 집단 지성은 공동의 목표를 추구함으로써 생겨납니다. 그런 팀은 불타는 의지를 자랑합니다. 의지를 불태우며 추진하는 일과 살아남기 위해 싸워야만 하는 의무는 완전히 다른 개념입니다. ‘선의의 경쟁’과 ‘무한 경쟁’으로 둘의 차이를 잘 나타낼 수 있습니다.
선의의 경쟁은 더 발전하기 위해 자신의 실력을 측정하고, 서로를 북돋워가며 아름다운 승부를 펼치며 퍼스트클래스의 갈망을 담아냅니다. 게다가 우리의 심장을 따뜻하게 채웁니다.
반면에 무한 경쟁에서는 무조건 이기려 하고, 수단과 방법을 가지지 않으며 현재 상황에만 초점을 맞춥니다. 지금 당장, 이번 분기만큼은 꼭 목표 실적을 달성해야만 합니다. 방법은 아무래도 좋습니다. 그렇게해서 상대방을 꺾고 우승컵을 차지해야만 직성이 풀립니다.
반드시 선의의 경쟁만을 해야 하며, 무한 경쟁은 무조건 나쁘다고 말하려는 것이 아닙니다. 양쪽 모두 긍정적인 측면이 있습니다. 처음부터 여기까지 되짚다 보면 선의의 경쟁이 점점 사라져간다는 사실을 확인할 수 있을 것입니다. 이와 동시에 최고를 향한 갈망도 점차 증발하고 말았습니다. 곧 ‘최고’라는 것도 사라질 것입니다. 무한 경쟁은 오로지 이기려고만 합니다. “승리면 충분해, 그거면 돼!” 이런 의미에서 선의의 경쟁이 사라지는 것은 그만큼 집단 어리석음이 커졌다는 방증입니다. 하지만 뒤집어 이야기하면, 선의의 경쟁이 다시 싹을 틔울 수 있다는 희망의 조짐이기도 합니다. 선의의 경쟁이 되살아나면 우리도 함께 스마트해질 기회를 얻을 수 있습니다.
현재 우리는 집단 어리석음이라는 애컬로프의 소용돌이에 완전히 갇혀버렸습니다. 집단 어리석음에서 집단 지성으로 방향을 돌리는 일은 정말이지 어렵고 힘든 과제입니다. 케네디 대통령은 의회에서 이렇게 연설했습니다. “우리는 1960년대가 끝나기 전에 인간을 달에 착륙시키고, 또 무사히 지구까지 귀환시키는 목표를 위해 헌신할 것입니다. 다른 어떠한 우주 탐사 프로젝트도 인류에게 이보다 강렬한 인상을 심어줄 수 없습니다. 이는 광활한 우주를 연구하는 데 가장 중요한 일입니다. 이것을 위해 온갖 어려움과 막대한 비용을 감수하겠습니다.”
이런 식의 구체적이고 명료한 발언은 집단 어리석음을 퇴치하는 데 큰 도움이 될 것입니다. 오늘날 사람들은 입만 열었다 하면 ‘클라우드 컴퓨팅’, ‘소셜미디어’, ‘빅 데이터’, ‘스마트 시티’, ‘산업 4.0’, ‘사이버 피지컬 시스템’, ‘사물 인터넷’, ‘모든 것의 인터넷’, ‘지식사회’ 등 의미를 파악할 수 없는 아리송한 말만 합니다. 모두 구체적인 것을 떠올리기 어렵게 하는 껍데기 같은 말입니다. 반면 “십 년 뒤에 우리는 달에 착륙할 겁니다!”는 얼마나 선명한가요!
새로운 도전을 향해 나아갈 때 인간은 함께 똑똑해집니다. 성공 비결은 집단 지성입니다. 이 집단 지성은 회의와 기회주의에 끄떡하지 않았습니다. 모두가 집단의 유능함을 보며 경탄을 아끼지 않았습니다.
자신의 일을 통해 생산적인 변화를 일으키려는 의지를 가진 직원을 상상해 보세요! 그저 유토피아적인 상상에 불과할까요? 아이들은 자신이 원하는 일이라면 신이 나서 합니다. 모든 것을 스스로 하고, 잘하려 하고, 하나도 놓치지 않고 배우려 합니다. 그럼에도 집단 어리석음은 어느 순간 아이를 집어삼키려 듭니다. 우리는 이 순간을 정확하게 포착해 미뤄야만, 아니 막아야만 합니다. 그러면 우리는 다시 똑똑해질 수 있습니다. 바로 지금, 그리고 미래에도 이런 노력이 끊이지 않아야 합니다.
더 많은 집단 지성을 회복하는 일은 분명 가능합니다. 다만 그 길이 멀고 험할 뿐입니다. 그럼에도 집단 어리석음이 만들어내는 소용돌이를 저지할 방법을 하루 빨리 찾아야만 합니다. 모두가 이해할 수 있는, 모두의 응원을 받아 용감하게 출발할 수 있는 비전이 필요합니다. 함께 지혜를 모아 비전을 찾아야 합니다!
저는 이 책을 읽으며 마지막에 언급한 다음의 문장이 가장 기억에 남습니다.
모두가 이해할 수 있는, 모두의 응원을 받아 용감하게 출발할 수 있는 비전이 필요하다. 함께 지혜를 모아 비전을 찾자.
이때의 비전은 “우리 기업의 유일한 목표는 매년 수익률을 높이는 것입니다.”, “우리는 올해의 수익 증가율을 12%로 잡았습니다.” 등과 같은 것이 아닙니다. 빌게이츠의 "누구나 이용할 수 있는 컴퓨터 운영체제를 만들어 사람들이 컴퓨터를 완전한 멀티미디어로 활용할 수 있도록 하겠습니다", 케네디 대통령의 "십 년 뒤 우리는 달에 착륙할 겁니다", 독일 교통부 장관이었던 게오르크 레버의 "독일 국민 누구도 아우토반 진입로에서 20km 이상 떨어져 살게 하지 않겠습니다" 등과 같은 선명하고 구체적인 비전입니다. 마치 머릿속에 하나의 그림이 그려지는 것과 같아야 합니다. 이렇게 구성원 전체가 공유할 수 있는 가치가 있다면 모두가 공통의 자부심을 갖고 목표를 향해 달려갈 수 있을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