직산현(稷山縣)
동쪽으로 鎭川縣 경계까지 33리이고, 경기도 安城郡경계까지 21리이다. 북쪽으로 같은 군(郡) 경계까지 25리이며, 남쪽으로 天安郡 경계까지 10리이며, 木川縣 경계까지 21리이다. 서쪽으로 平澤縣 경계까지 22리이고, 서울과의 거리는 1백 89리이다.
【건치연혁】 본래 위례성(慰禮城)으로 백제의 온조왕(溫祚王)이 졸본부여(卒本扶餘)로부터 남쪽으로 와서 나라를 열고, 여기에 도읍을 세웠다. 뒤에 고구려에서 이곳을 사산현(蛇山縣)으로 만들었고, 신라에서도 그대로 사산현(蛇山縣)으로 하고, 백성군(白城郡)의 영현(領縣)을 만들었다. 고려 초년에 지금의 이름으로 고쳤으며, 현종(顯宗) 9년에 天安府에 소속시켰고, 뒤에 감무(監務)를 두었다. 본조 태조 2년에 고을 사람 환자(宦者) 김연(金淵)이 명 나라에 들어가 황제를 모시고 있다가 사신이 되어 귀국하자, 이 고을을 知郡事로 승격시켰다. 太宗 원년에 다시 낮추어 감무를 두었고, 13년에 전례에 의해서 縣監으로 고쳤다.
【관원】 현감ㆍ훈도(訓導) 각 1인. 『신증』 연산군 을축년에 경기도로 옮겨서 소속시켰고, 금상(今上) 초년에 예전대로 회복시켰다.
【군명】 위례성(慰禮城). 사산(蛇山).
【성씨】 본현(本縣) 崔ㆍ兪ㆍ白ㆍ趙ㆍ全 모두 촌성(村姓)이다. 경양(慶陽) 김金ㆍ趙ㆍ白 모두 속성(續姓)이다.
【형승】 북쪽으로는 한강을 띄고, 동쪽으로는 높은 산에 웅거해 있으며, 남쪽으로는 기름진 들을 바라다 보며, 서쪽으로는 큰 바다에 막혀 있다. 《三國史》 〈百濟記〉 溫祚王의 옛터 이찬(李粢)의 제원루시(濟源樓詩)에, “온조 옛터에 한 누각 있으니, 여기 올라 사방으로 바라보면 뜻이 유유자적하네.” 하였다.
【산천】 사산(蛇山) 고을 서쪽 3리에 있는 진산(鎭山). 聖居山 고을 동쪽 21리에 있다. 고려 태조(太祖)가 일찍이 고을 서쪽 수헐원(愁歇院)에 거동했다가 동쪽을 바라보니, 산 위에 오색 구름이 있기에, 이는 신(神)이 있는 것이라 하여 제사지내고, 드디어 성거산이라 일컬었다. 우리 태조와 세종이 온천에 갈 적에 역시 여기에서 제사지냈다. 양전산(良田山) 고을 서쪽 22리에 있다. 휴류암(鵂鶹岩) 고을 남쪽 5리에 있다. 羊과 馬, 인물의 형상과 같다. 망해산(望海山) 경양현(慶陽縣)에 있다. 억적포(億賊浦) 고을 서쪽 60리에 있다. 경양포(慶陽浦) 경양현(慶陽縣)에 있는데, 해포(海浦)이다. 아주제천(牙州梯川) 고을 북쪽 23리, 홍경평(弘慶坪)에 있다. 물 근원은 경기도 安城郡 남쪽 靑龍山에서 나와서 진위현(振威縣) 동하포(冬河浦)로 흘러 들어간다.
【토산】 밴댕이[蘇魚]ㆍ숭어[秀魚]ㆍ웅어[葦魚]ㆍ준치[眞魚]ㆍ안식향(安息香)ㆍ산무애뱀[白花蛇]. 『신증』 참조기[黃石首魚], 붕어[鯽魚].
【봉수】 망해산(望海山) 봉수 남쪽으로 牙山縣 연암산(鷰巖山)에 호응하고, 북쪽으로 양성현(陽城縣) 괴태길곶(槐台吉串)에 호응한다.
【누정】 제원루(濟源樓) 객관 동북쪽에 있다. ○ 서거정(徐居正)의 시(詩) 서문에, “사신으로 영남(嶺南)에 갈 때, 직산을 지나게 되었었다. 직산 객관 동북쪽에 한 누각이 있기에 올라가서 조금 쉬다가 주인에게 묻기를, ‘이 누각 이름이 무엇인가.’ 하니, 주인은 알지 못하여 좌우 사람에게 물으니, 고을 사람이 ‘제원’이라 하였다. 그러나 그 자리에 앉아 있는 객들은 제원이란 뜻을 알지 못하였다. 이에 서거정이 말하기를, ‘이 고을은 백제의 옛 도읍이니, 이 누각을 제원(濟源)이라 한 것은 백제의 근원이 여기에서 시작했다는 말이 아니겠는가.’ 대개 백제의 시조 온조란 분은 본래 고구려 동명왕 주몽의 아들로서 난을 피하여 남쪽으로 도망했던 것인데, 역사서에 쓰기를 ‘온조가 부아악(負兒岳)에 올라가서 살 만한 곳을 살피다가 하남(河南) 위례성(慰禮城)에 도읍을 했으니, 이곳을 세상에서 직산이라 한다.’ 하였다. 서거정은 일찍이 생각하기를 부아악이란 여기서 2백리나 떨어진 곳이니 어찌 살 만한 곳을 잡을 수 있으리오. 또 이른바 하남(河南)이라는 하(河)는 어느 물을 말한 것인가. 서거정이 이곳을 지난 적이 한두 번이 아니었으나, 길이 급하여 한 번도 가보지는 못하고, 바라다만 보니, 지세가 편협해서 웅장한 기상이 없으니, 도읍을 세울 곳이 못 되어 맘속으로 깊이 의심하였다. 지난해에 《삼국사절요(三國史節要)》를 편찬하면서 여러 가지 책을 상고해 보니, 직산이 백제의 첫 도읍이었던 것은 의심할 것이 없었다. 온조왕의 뒤에 직산으로부터 남한산성으로 도읍을 옮겼으니, 이는 곧 지금의 광주(廣州)이고, 또 북한산성으로 옮겼으니 바로 지금의 한도(漢都)이다. 뒤에 금강(錦江)으로 옮겼으니 지금의 공주요, 또 사비하(泗沘河)로 옮겼으니 지금의 부여다.
백제는 한(漢)나라 성제(成帝) 때로부터 당(唐)나라 고종(高宗)때를 거쳐 대개 5백여 년이 걸린 터로서 온조왕은 도망하여 파천(播遷)한 중에 나라를 세우고 도읍을 설치해서 신라 고구려와 더불어 서로 솔밭처럼 버티어 삼국을 이루었으니, 호걸스럽고 영특하고 위대한 재주가 아니라면 그럴 수 있었겠는가. 그 뒷세대에 와서는 여러 번 그 나라를 옮겨 강한 것을 믿고 군사 쓰기를 좋아하여 순치(脣齒)와 보거(輔車)의 형세를 알지 못하고, 강한 적과 싸움을 얽어 세력이 날로 줄어드는 데다가 더욱이 의자왕(義慈王)은 어둡고 음탕해서 아첨하는 자의 말만 받아들이고, 성충(成忠)의 간언을 거절하다가 당 나라 군사가 바다를 건너오자 나라가 곧 망했으니, 아, 슬픈 일이로다. 이에 이 누(樓)에 오르니 감개를 이기지 못하여 시(詩)를 지어 조상한다.
시(詩)에, ‘백제 옛터에 풀이 절로 우거졌는데, 내 여기 오니 감개하여 마음이 상하네. 다섯 용(龍) 天安府에서 싸워 끝나고, 한쌍 鳳凰 위례성(慰禮城)에서 울었네. 始祖의 사당이 깊은데 단풍나무 가리웠고, 성거산이 옹위했는데 푸른 구름 비꼈어라. 누(樓)에 올라 가을 바람에 나는 생각, 어느 곳에서 철적(鐵笛) 소리 들려오는가.’ 하였다.” 했다.
★사가시집보유 제3권 / 시류(詩類) > 徐居正
직산제원루시(稷山濟源樓詩) 서(序)
내가 사명을 받들고 영남(嶺南)에 갈 적에 稷山을 지나게 되었다. 직산의 객관(客館) 동북쪽에 한 누각이 있기에 올라가 잠깐 쉬면서 주인에게 “이 누각의 이름이 무엇인가?”라고 물었으나, 주인이 알지 못하므로, 左右에 물으니, 고을 사람이 ‘제원(濟源)’이라 하였다. 그러나 그 자리에 앉은 손들은 제원의 뜻을 알지 못하였다. 그래서 거정(居正)이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이 고을은 백제의 옛 도읍이니, 이 누각을 제원이라 한 것은 바로 백제의 근원이 여기에서 시작했다는 뜻이 아니겠는가. 대체로 백제의 시조 온조(溫祚)란 분은 본래 고구려 東明王 주몽(朱蒙)의 아들로, 난을 피하여 남쪽으로 도망했던 것인데, 사서(史書)에 이르기를 “온조가 부아악에 올라가서 살 만한 곳을 살펴보아 하남의 위례성에 도읍을 했으니, 세상에서 이곳을 직산이라 한다.[溫祚登負兒岳 相其可居之地 而都于河南之慰禮城 世傳爲稷山]”라고 하였다. 그래서 거정은 항상, 부아악은 여기서 200리나 떨어진 곳인데 어찌 그곳을 살 만한 곳이라고 여길 수 있었겠느냐고 생각했었다. 또 이른바 하남(河南)의 하(河)는 어느 물을 가리킨 것일까? 거정이 이곳을 지난 적이 한두 번이 아니지만, 갈 길이 바빠서 한 번도 들어가 볼 겨를이 없었다. 다만 바라보건대, 지세(地勢)가 편협해서 웅장한 기상이 없어 도읍을 세울 만한 곳이 아니기에 마음속으로 의심했었다. 그러다가 지난해에 《삼국사절요(三國史節要)》를 편찬하면서 여러 가지 서책을 상고해 보니, 직산이 백제의 처음 도읍지였음을 의심할 여지가 없었다. 溫祚王 이후에 직산으로부터 남한산성으로 도읍을 옮겼으니 이곳이 바로 지금의 廣州이고, ①또 뒤에 북한산성으로 도읍을 옮겼으니 이곳이 바로 지금의 한도(漢都)이며, 또 뒤에 금강(錦江)으로 옮겼으니 이곳이 바로 지금의 公州이고, 또 뒤에 사자하(泗泚河)로 옮겼으니 이곳이 바로 지금의 扶餘인 것이다.
백제는 한 성제(漢成帝) 때부터 시작하여 당 고종(唐高宗) 때를 지나도록 시종 500여 년을 지탱해 온 나라로서, 특히 온조왕은 이리저리 떠돌아 파천(播遷)하는 중에도 나라를 세우고 도읍을 설치하여 신라, 고구려와 더불어 솥발처럼 삼국의 형세를 이루었으니, 호걸스럽고 위대한 인물이 아니면 능히 그렇게 할 수 있었겠는가.
후대(後代)에 이르러서는 누차 그 나라를 옮겨 다니면서 강함을 믿고 전쟁하기를 좋아하여 ②순치보거(脣齒輔車)의 형세를 알지 못하고 강한 적과 전쟁을 하다가 國勢가 날로 쭈그러들었고, 게다가 의자왕은 혼암하고 음탕하여 아첨하는 자의 말만 받아들이고, 成忠의 간하는 말은 거절했다가, 당나라 군대가 바다를 건너자마자 나라가 곧 멸망하였으니, 아, 슬프다. 이에 이 누각에 오르니, 감개(感慨)함을 감당할 수 없어 시로써 위문하노라.
백제의 옛터에 잡초만 절로 우거졌어라 / 百濟遺墟草自平
내 와서 보니 감개하여 마음이 상하누나 / 我來感慨一傷情
③오룡은 천안부에서 다툼을 그쳤는데 / 五龍爭罷天安府
쌍봉은 위례성에서 울며 사라졌네 / 雙鳳鳴殘慰禮城
시조 사당 깊은 곳엔 단풍나무 어우러졌고 / 始祖祠深紅樹合
성거산이 둘러싼 곳엔 푸른 구름 비꼈구나 / 聖居山擁碧雲橫
누에 오르니 추풍에 슬픈 생각 하 많은데 / 登樓多少秋風思
어드메서 부는지 철적 소리가 들려오누나 / 何處吹殘鐵笛聲
① 또 뒤에 …… 한도(漢都)이며 : 이 부분은 《동국여지승람(東國輿地勝覽)》에 의거하여 ‘又遷北漢山城卽今漢都也’ 11자를 보충하여 번역한 것이다.
② 순치보거(脣齒輔車)의 형세 : 순치는 입술과 이를 말하고, 보거는 광대뼈와 잇몸을 말한 것으로, 전하여 피차의 관계가 아주 밀접하여 서로서로 의지하는 사물에 비유한다. 또 일설에 의하면, 보거는 수레의 덧방나무와 수레의 몸통을 가리킨다고 한다. 《춘추좌씨전(春秋左氏傳)》 희공(僖公) 5년 조에 “광대뼈와 잇몸이 서로 의지하고, 입술이 없어지면 이가 시리게 된다.[輔車相依 脣亡齒寒]”라고 하였다.
③ 오룡은 …… 사라졌네 : 오룡은 《세종실록》 〈지리지 천안군〉조에 “고려 태조(太祖) 13년 경인에 동ㆍ서도솔(東西兜率)을 합하여 천안부로 삼았다”고 하였는데 그 주석에 “전설에 의하면, 술사(術師) 예방(藝邦)이 태조에게 아뢰기를, ‘삼국(三國)의 중심(中心)으로서 오룡(五龍)이 구슬을 다투는 형세이오니[五龍爭珠之勢], 만일 이곳에 큰 고을[大官]을 두면, 백제(百濟)가 스스로 와서 항복하오리다.’ 하므로 태조가 산(山)에 올라 두루 살펴보고 비로소 천안부를 설치하였다고 한다.”고 하여 왕건이 천안도독부를 설치하고 후삼국을 통일한 것을 비유한 표현이고 쌍룡은 동명왕의 두 아들로, 백제의 건국시조인 비류와 온조를 가리키는 것으로 앞구와 대구를 이루어 삼국을 통일한 왕건과 대비를 이루는 표현이다.
ⓒ 한국고전번역원 | 임정기 (역) | 2008
【학교】 鄕校 고을 서쪽 1리에 있다. 成歡驛 현의 북쪽 8리에 있다. ○ 찰방(察訪)하는 본도의 속역(屬驛)이 11이니, 신은(新恩)ㆍ김제(金蹄)ㆍ광정(廣程)ㆍ일신(日新)ㆍ경천(敬天)ㆍ평천(平天)ㆍ단평(丹平)ㆍ유구(維鳩)ㆍ김사(金沙)ㆍ장명(長命)ㆍ영춘(迎春)이다. ○ 찰방(察訪) 1인. 통수원(通水院) 성환역 옆에 있다. 말원(末院) 고을 남쪽 8리에 있다. 수헐원(愁歇院) 고을 서쪽 7리에 있다. ○ 고려 김지대(金之岱)의 시(詩)에, “꽃은 지고 새 울어 봄 졸음 무거운데, 연기 깊고 들 넓어 말 가기 더디어라. 푸른 산 만리에 옛날 노님 멀어졌는데, 긴 피리 한 곡조 어디서 부는가.” 했다. 홍경원(弘慶院) 고을 북쪽 15리에 있다.
○ 고려 현종(顯宗)은, 이곳이 갈래길의 요충(要衝)인 데다가 사람 사는 곳이 멀리 떨어져 있고, 무성한 갈대숲이 들판에 가득해서 행인이 자주 약탈하는 强盜를 만나기 때문에, 중 형긍(逈兢)에게 명하여 절을 세우게 하고, 兵部尙書 강민첨(姜民瞻) 등이 일을 감독해서 병진년부터 신유년에 와서 집 2백여 칸을 세우고, 봉선홍경사(奉先弘慶寺)라는 이름을 하사하였다. 또 절 서쪽에 객관 도합 80칸을 세우고 광연통화원(廣緣通化院)이라 하고, 양식을 쌓고 마초(馬草)를 저장해서 행인들에게 제공했다. 이에 비석을 세우고 ①한림학사(翰林學士) 최충(崔冲)에게 명하여 비문을 짓도록 하였는데, 지금은 절은 없어지고 원(院)과 비석만 남아 있으므로 드디어 절 이름을 따서 홍경원(弘慶院)이라고 불렀다.
① 봉선 홍경사기(奉先弘慶寺記) 최충(崔冲)
신이 삼가 생각건대 불경에 이르기를, “초제(招提)라는 것은 여러 곳의 우수한 사람들을 불러들여 서로 이끌며 널리 불법을 천명하기 위하여 거처하는 곳이다.” 하였으며, 또《장자(莊子)》에는, “여관(旅館)을 설치하여 인의(仁義)를 보인다.” 하였으며, 《진서(晉書)》에는, “여관을 만들어서 공무로 다니는 사람이나 사사로 다니는 사람을 구제한다.” 하였다. 지금 직산현(稷山縣)의 성환역(成歡驛)에서 북쪽으로 1마장쯤 되는 곳에 새로 절을 세운 것은 곧 그러한 종류에 속한다. 이 땅에는 전연 객주집이 없어서 사람의 집이라고는 볼 수 없으며, 그런데다가 갈대가 우거진 늪이 있어서 강도가 상당히 많으므로, 비록 갈래길로서 요충지이지만 사실은 왕래하기가 매우 불편하였으므로, 태평성대에 이곳을 그대로 둘 수가 없는 곳이었다. 생각건대 우리 임금이 인(仁)으로서 왕위를 지키며 문화의 덕을 베풀어 무기의 종류들은 모두 버려두었으며, 예악형정(禮樂刑政)이 모두 밝혀졌으며, 특히 희사(喜捨)하는 인연과 선대의 업적을 계승하는 일은 옛날 임금에게서 찾아보아도 나은 분이 없다. 일찍이 좌우양가 도승록 통진광교원 제홍도대사(左右兩街都僧錄通光敎圓濟弘道大師)인 신하 형긍(逈兢)에게 이르기를, “옛적에 황고(皇考)이신 안종 헌경효의영문대왕(女宗憲景孝懿英文大王)께옵서 왕자로 계실 적에 불법에 마음을 돌리시어 항상 《법화경(法華經)》의 오묘한 학설을 보시고, 깊이 中道에서 城을 만들었다는 말에 감동하시어 이대로 실천하려 하시다가 마침내 공을 이루지 못하셨다. 朕은 곧 그 뜻을 잘 계승하여 영원히 그 성공을 보아야 할 터인데, 한 가지는 곧 길가는 사람을 구제하는 데에 있어서 험난한 땅보다 걱정스러운 곳이 없으며, 한 가지는 곧 승려를 모아들여서 불법을 공부하게 하는 것이니, 대사는 마땅히 노력하여 그 뜻에 협조하여 직접 터를 보아서 내가 부탁하는 명령에 부합되게 하며 그 일을 처리하는 권한을 맡으라.” 하시어 삼가 왕의 명령을 받고 지도를 펼쳐 보았다. 비록 9번을 돌아다녀도 게으른 줄을 몰랐지만 반드시 많은 협력자가 있어야만 일이 성취되는 것이다. 가장 중요한 것은 마음을 같이할 사람이었으므로 곧 우수한 사람을 불러들였다. 마침내 광리 증현대사 사자사문(廣利證玄大師賜紫沙門)인 신하 득총(得聰)과 정려수진전리대덕 사자사문(靜慮修眞理大德賜紫沙門)인 신하 장림(藏琳) 등이 다투어 넘어지는 수레를 부축하며 모두 중요한 길목을 점령하였다. 열의를 다하고 모여들어서 이 공사에 참여하였다. 임금께서는 계속하여 추성치리익대공신 금자흥록대부 병부상서 지중추원사 겸태자태부 상주국 천수현 개국남 식읍 이백호(推誠致理翊戴功臣金紫興祿大夫兵部尙書知中樞院事兼太子太傅上柱國天水縣開國男食邑二百戶)인 강민첨(姜民瞻)과 중추부사 중대부 비서감 겸태자빈객 주국 의춘현 개국남 식읍삼백호 사금자어대(中樞副使中大夫秘書監兼太子賓客柱國宜春縣開國男食邑三百戶賜金紫魚袋)인 김맹(金猛)등에게 명하여 별감사(別監使)로 삼았다. 그리하여 일을 함께 관리하도록 하였는데 모두들 공치사나 교만한 마음을 두지 않았다. 인부를 사역하는 데도 농사철을 피하였으며 물자도 국가의 창고에서 꺼내지 아니하였다. 기와장이는 기와를 대고 나무꾼은 목재를 공급하였다. 톱질과 자귀질은 일 없는 목수들을 모아서 시키고 괭이질과 삽질에는 놀고 있는 사람들이 달려와서 일하였다. 병진년 가을에 시작하여 신요년까지 법당ㆍ불전ㆍ대문ㆍ행랑등 모두 2백여 간을 세웠고, 그곳에 안치할 소상(塑像)ㆍ화상 등 여러 功德의 像과 종경(鍾磬)ㆍ번개(幡蓋)들은 모두 현재 있는 대로이니, 그 수가 사실 많았다. 마침내 절 이름을 봉선홍경사(奉先弘慶寺)라고 내렸다. 공사는 여러 사람의 힘을 합쳐서 이룬 것인데, 외모는 어디서 날라온 듯이 보였다. 불상을 모신 불전, 불경을 봉안한 경루(經樓)는 화려하고 기이하여 완연히 도솔궁(兜率官)인 듯 의심스럽고 鍾과 塔은 장엄하여 멀리서도 절임을 알 수 있다. 이미 불도가 크게 진흥되는 때를 만났으니, 실로 영원한 불법의 계통이 서로 계승되리로다. 또한 절의 서편에 여관[客館]을 마주하여 세웠는데, 한 구역이 80간쯤 되었다. 이름을 광연통화원(廣緣通化院)이라 하였다. 이곳도 겨울에 사용될 따뜻한 온돌방과 여름에 사용할 널찍하고 시원한 방이 마련되었고, 식량을 저축하며 말먹이도 저장하였다. 빈궁한 사람을 구제함은 옹백(雍伯)이 설치한 의장(義漿)의 제도와 같으며 도둑을 방비함은 진류현(陳留縣)에서 누고(樓鼓)를 세운 것과 같다. 이렇게 되고 보니, 법복을 입은 무리가 맨 손으로 왔다가 실속을 얻어서 돌아갈 뿐 아니라, 길을 가던 나그네가 밤에 헤매다가 낮에는 휴식할 수 있게 되었다. 드디어는 진리를 증명하는 지역이 되었으며, 불한당이 나올 우려가 없게 되었다. 지난번에 만일 옛것을 참작하고 현재를 감안하여 先王의 염원을 이루며 기회를 따라서 가르침을 실시하여 부처님의 오묘한 법문을 높이지 아니하였다면, 곧 모든 사람을 구제해야 할 인자한 정책이 하마터면 없어질 뻔하였다. 아아, 출발함에 깊은 의의가 있으니, 영원토록 계승해야 할 것이다. 창건한 공로는 이미 이루었으니, 받들어 시행하는 길도 또한 범위가 넓다. 최선을 다하며 언제나 여기에 마음을 두어야 할 것이다. 곧 儒生에게 명하여 이 거룩한 사실을 기록하라 하셨는데, 신은 생각이 부족하며 학식이 얕아서 사마장경(司馬長卿)처럼 모방하는 문장을 쓸 수는 없사오나, 서생으로서 문채 나는 작품을 감히 흉내내 보고자 한다. 대략 전말을 기록하여 역사 자료로서의 도움이 되게 하였다. 임금께서 왕위에 오르신 지 18년 되는 해, 태평(太平) 연호(年號) 제 6년(辛巳(981) 景宗 6년)여름 4월 일에 삼가 기(記)를 씀.ⓒ 한국고전번역원 | 임창순 (역) | 1968
○ 이색(李穡)의 시에, “큰 들 넓고 넓어 손바닥처럼 평평한데, 뭇 산이 사면에 멀리 뾰족뾰족 푸르네. 중도에 푸른 기와 큰 길에 비치는데, 큰 비석 우뚝 서서 높다랗게 솟았네. 우는 새 바람 따라 위아래로 나는데, 말 가까이 잠자리들이 나는 것 보겠네. 평생에 멀리 놀아 안계(眼界)가 넓고, 운몽택(雲蒙澤) 가슴속이 시원히 트였네. 학야(鶴野)로부터 달리는 말을 몰았고, 동산(東山)에 올라 노(魯) 나라를 작게 여겨 孔子의 上達을 배웠네. 고향으로 돌아올지로다. 살 만한 남은 땅 있으니, 어찌 이불 가지고 들어가며 종알종알하리. 나는 구름 갑자기 오니, 빗방울 가는데[微], 平澤에 한 점 저녁 햇빛 비치네. 내 말 王字城 앞을 달리니, 맑은 바람 솔솔 손의 옷에 부네. 흥이 일어 글 읊으며 억지로 꿰맞추니, 다른 날 남의 비방 듣는 것 근심하지 않네.” 하였다.
★ 목은시고 제3권 / 시(詩)
홍경원(弘慶院)
아득한 큰 들판이 손바닥처럼 편평한데 / 大野微茫如掌平
사면의 뭇 산들이 멀리 뾰족뾰족 푸르네 / 群山四面遙攢靑
중도에 큰 기와집이 큰길에 비치는데 / 中途碧瓦照大道
그 앞엔 큰 비석이 높다랗게 우뚝 섰네 / 豐碑突立高亭亭
우는 새는 바람 따라 절로 오르내리는데 / 啼禽迎風自上下
말 곁엔 잠자리 나는 걸 또 보겠구나 / 近馬又見飛蜻蜓
평생에 멀리 노닐어 안계가 넓어져서 / 平生遠遊眼界闊
①운몽택 가슴속이 시원하게 트이었는데 / 雲夢胸中甚軒豁
마침 요동 벌에서 말을 달리다가 / 適從②鶴野飛征驂
③동산서 노나라 작게 여긴 상달을 배웠네 / 東山小魯師上達
고향에 돌아가면 살 만한 땅이 있거니 / 歸去來兮有餘地
④이불 갖고 가면서 어찌 여러 말을 하리요 / 携被何曾語剌剌
갑자기 구름 일어 가는 빗방울 내리는데 / 飛雲忽來雨滴微
평택에는 한 점의 석양빛이 선명하네 / 平澤一點明斜暉
내 말이 한창 왕자성 앞을 달리노라니 / 我馬正馳王字城
맑은 바람이 손의 옷에 솔솔 불어오누나 / 淸風習習吹征衣
흥이 나서 시 읊조려 억지로 꿰맞추어라 / 興來吟哦強排比
후일 남의 조롱 들을까는 걱정 않는다오 / 不愁異日遭人譏
① 운몽택(雲夢澤) 가슴속 : 흉금이 매우 큼을 뜻한다. 한(漢)나라 사마상여(司馬相如)의 〈상림부(上林賦)〉에, 초(楚)나라에 사방이 900리나 되는 운몽택(雲夢澤)이 있는데, 운몽택 같은 것 8, 9개를 삼켜도 가슴속에 조금의 장애도 느끼지 않는다고 한 데서 온 말이다.
② 학야(鶴野) : 정령위(丁令威)가 학(鶴)이 되어 돌아왔다는 전설 때문에 요동(遼東) 들판을 학야(鶴野)라 한다.
③ 동산(東山)서 …… 배웠네 : 맹자(孟子)가 이르기를, “공자(孔子)가 동산에 올라서는 노(魯)나라를 작게 여기셨고, 태산(泰山)에 올라서는 천하(天下)를 작게 여기셨다.” 하였고, 공자가 이르기를, “나는 아래로부터 배워서 위로 달했다.[下學而上達]” 한 데서 온 말이다. 《論語 憲問》 《孟子 盡心上》
④ 이불 …… 하리요 : 한유(韓愈)의 〈송은원외서(送殷員外序)〉에, “지금 사람들은 수백 리 밖에만 나가려 해도 허둥지둥 문을 나서면서 헤어지기를 아쉬워하는 기색이 있고, 이불을 갖고 삼성(三省)에 들어가 입직(入直)할 때는 가사(家事)를 못 잊어서 비자(婢子)에게 끝없이 여러 말을 이르곤 한다.”고 한 데서 온 말이다.
ⓒ 한국고전번역원 | 임정기 (역) | 2000
○ 이첨(李詹)의 시(詩)에, “말[馬]을 홍경사(弘慶寺)에 쉬게 하고, 다시 옛 비문을 읽네. 글자가 지워진 것은 들 중이 때린 것이요, 이끼가 남은 것은 봄에 들 불탄 흔적일세. 현산(峴山)에는 장차 떨어지는 해요, 진령(秦嶺)에는 정히 뜬구름일세. 현묘(顯廟)께서 효도를 극진히 하여 규모를 후손들에게 남겨 주었네.” 하였다.『신증』 신원(新院) 고을 동쪽 20리에 있다.
【교량】 아주천교(牙州川橋)ㆍ대천교(大川橋).
【불우】 龜菴寺ㆍ萬日寺ㆍ新菴寺 모두 聖居山에 있다. 미라사(彌羅寺) 양전산(良田山)에 있다.
【사묘】 社稷壇고을 서쪽에 있다. 문묘 향교에 있다. 온조왕묘(溫祚王廟) 고을 동북쪽 3리에 있다. 우리 世祖 11년에 비로소 세웠고, 봄과 가을에 향(香)과 축(祝)을 내려서 제사 지내게 했다. 성황사 고을 서쪽에 있다. 여단(厲壇) 고을 북쪽에 있다.
【고적】 위례성 성거산에 있다. 흙으로 쌓았는데, 둘레가 1천 6백 90척이요, 높이가 8척이며, 성안에 우물 하나가 있다. 지금은 반쯤 무너져 있다. ○ 溫祚王은 고구려 동명왕의 셋째 아들이다. 동명왕이 훙(薨)하자 온조왕은 그 형 비류왕(沸流王)과 함께 琉璃王을 피해서 한수(漢水)를 건너 남쪽으로 와서, 비류왕은 미추홀(彌雛忽)에 도읍하고, 온조왕은 위례성에 도읍했다. 온조왕은 오간(烏干)ㆍ마려(馬黎) 등 10명의 신하로 보좌를 삼아 처음에 십제(十濟)라고 일컬었으니, 이때가 전한(前漢) 성제(成帝)의 홍가(鴻嘉) 3년이었다. 뒤에 자기가 여기 올 적에 백성들이 즐겨 추종하였다 하여 나라 이름을 백제라고 고쳤다. 天興寺 聖居山 아래에 있었는데, 지금은 없어졌고, 당 나라 때 세운 구리로 만든 기둥만 있다. 경양폐현(慶陽廢縣) 고을 서쪽 44리에 있다. 본래 고려의 하양창(河陽倉)인데, 뒤에 지금 이름으로 고쳤다. 영(令)을 두고 염장관(鹽場官)을 겸임했으며, 본조 태조 5년에 와서 직산에 예속시켰다. 구실향(救實鄕) 고을 동남쪽 13리에 있다. 사산성(蛇山城) 흙으로 쌓았는데 둘레가 2천 9백 48척이요, 높이가 13척이며, 안에 우물 하나가 있었는데, 지금은 폐쇄되었다.
【명환】 본조 ①이영구(李英耈) 맑고 근신해서 정사를 잘 한다는 이름이 있었다.
① 이영구 : 1432년(세종 14) 식년문과에 동진사(同進士)로 급제하여 사헌부지평(司憲府持平)을 지냈으며, 지방관으로서 광주판관(廣州判官), 청주·공주·광주(光州)의 목사 등을 역임하였다. 특히, 광주목사 시절에는 나이가 많다고 사직하려 하자, 주(州)에서 상소하여 유임해 주기를 청하였으므로 가선대부(嘉善大夫)로 승진되기도 하였다. 1455년(세조 1)의 원종공신(原從功臣) 3등에 녹훈되었다.【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인물】 신라 심나(沈那) 힘이 보통 사람보다 뛰어났다. 백제와 싸울 때, 가는 곳마다 부서지지 않는 진(陣)이 없었으니, 백제 사람들이 비장(飛將)이라고 일렀다. 소나(素那) 심나(沈那)의 아들. 웅걸(雄傑)하여 아버지의 풍모가 있었다. 일찍이 아달성(阿達城)을 지킬 적에 말갈(靺鞨)이 비밀리 군사를 몰아 갑자기 쳐들어와서 늙은이와 어린이를 노략질하니 소나가 칼을 빼들고 크게 외치기를, “너희는 新羅에 심나(沈那)의 아들 소나가 있다는 걸 아느냐. 싸우고 싶은 자는 어서 오너라.” 하고, 드디어 힘껏 쳐서 적을 무찌르니, 적은 감히 가까이 오지 못하고 다만 소나를 향해서 활을 솔 뿐이었다. 진시(辰時)부터 유시(酉時)까지 화살이 소나의 몸에 마치 고슴도치처럼 모여 드디어는 죽고 말았다. 그 아내가 울면서 말하기를, “죽은 사람이 항상 말하기를, ‘대장부가 마땅히 나라 일에 죽어야 하니 어찌 침상 위에 누워서 부인의 손에 죽는단 말이냐.’ 하더니 이제 죽은 것은 그 뜻이로다.” 했다. 임금이 듣고 눈물을 흘리면서 말하기를, “소나(素那)의 부자는 참으로 대대로 忠義를 이었도다.” 하고, 잡찬(匝飡)으로 추증하였다.
고려 ①백문보(白文寶) 자는 화보(和父)로, 호는 담암(淡庵)인데, 성격이 청렴하고 개끗하며 정직했다. 공민왕 초년에 전리판서(典理判書)가 되었을 때, 십과(十科)를 설치해서 선비를 뽑아 쓰자고 청하였다. 신우(辛禑)가 대군(大君)이 되자 임금이 문보(文寶)를 스승으로 삼았다. 벼슬이 정당문학(政堂文學)에 이르고, 稷山君을 봉했으며, 시호를 충간(忠簡)이라 한다.
① 백문보 : 본관은 稷山, 자는 화보(和父), 호는 동재(動齋) 또는 담암(淡庵), 시호는 충간(忠簡)이다. 아버지는 승평 부사를 지낸 백견(白堅)이고, 어머니는 영해 박씨(寧海朴氏)이다. 부인은 황서(黃瑞)의 딸 평해 황씨(平海黃氏)이다. 슬하에 백선(白瑄)·백진(白晋)·백수(白需)·백환(白渙)·백항(白恒)의 다섯 아들을 두었다. [활동 사항] 1320년(충숙왕 7) 과거에 급제해 춘추검열(春秋檢閱)을 거쳐 우상시(右常侍)에 이르렀다. 공민왕(恭愍王) 초에 전리판서(典理判書)로 있으면서 과거에 10과를 둘 것을 주청하였다. 뒤에 밀직제학(密直提學)이 되었고, 1363년(공민왕 12) 청주에 머물러 있던 공민왕이 곽추(郭樞)에게 홍건적의 난 때 훼손되고 남은 사초(史草)와 실록을 해인사(海印寺)에 옮기도록 명하자, 개경에 있던 백문보는 김희조(金希祖)와 더불어 난리가 겨우 수습된 마당에 국사(國史)를 옮기면 민심이 동요될 것이라며 곽추를 만류하고 뒤의 명령을 기다리게 하였다. 백문보는 또한 신라 시대의 숭불(崇佛)이 나라에 미친 폐단을 시정할 것을 상소하였고, 공민왕의 환도(還都) 후 환안도감(還安都監)이 설치되어 김경직(金敬直)과 함께 그 일을 주관하게 되자 해인사의 『삼례도(三禮圖)』와 『두우통전(杜佑通典)』을 가져오게 하여 『두우통전』을 본뜨고 박충(朴忠)의 말을 추려서 의제(儀制)를 만들었다. 1373년 우왕(禑王)이 대군이 되자 전녹생(田祿生)·정추(鄭樞)와 함께 사부가 되었고, 정당문학(政堂文學)에 이르러 직산군(稷山君)에 봉해졌다. 【한국학중앙연구원 - 향토문화전자대전】
【효자】 본조 봉유지 효행으로 정문(旌門)을 내렸으며, 벼슬이 지군사(知郡事)에 이르렀다.
★ 봉유지(奉由智) : 본관은 하음(河陰)이다. 고조할아버지는 봉공윤(奉公胤), 증조할아버지는 봉군필(奉君弼), 할아버지는 봉천우(奉天祐)이다. 아버지는 판도판서(版圖判書)를 지낸 봉문(奉文)이며, 어머니는 덕양군(德陽君) 기원(奇轅)의 딸 행주 기씨(幸州奇氏)이다.
봉유지[?~?]는 둘째 형인 봉유례(奉由禮)가 고려 공민왕 때 태어나 태종 때 이조 판서를 역임했다고 기록되어 있으므로, 봉유지 또한 고려 후기에 출생하여 세종 때 출사한 것으로 추정된다. 하음 봉씨(河陰奉氏) 족보에는 군수를 지냈다는 기록이 있고, 『동국여지승람』에 이름이 재어(載於)라고 되어 있다.
세종 때 출사하여 지부사(知府事)에 이르렀으며, 지극한 효행으로 소문이 나서 마을에 정문을 세웠다고 전한다. 그러나 그곳이 어디인지 확인할 수는 없다.
한편 하음 봉씨 족보에 따르면 봉유지의 후손은 5대를 내려와 봉원충(奉元忠)을 끝으로 절손되어 후손이 없다.【한국향토문화전자대전】
【제영】 ★할계언시희(割鷄言是戲) 성석린(成石璘)의 시(詩)에, “직산(稷山)이 비록 조그만 고을이지만 그래도 충분히 나의 인덕(仁德)을 시험해 볼 만하네. 사랑하고 돌보는 것은 불쌍한 외로운 이부터 시작하고, 세(稅)를 받는 데는 부자인지 가난한지를 묻는다. ①닭을 잡는다는 것은 희롱의 말이요,②송아지 머물러 둔다는 말 지킬 만하네. 어려서 배운 것, 마침내 어디다 쓰리, 모름지기 혜택을 백성에게 미치게 함이로세.” 하였다. 아조고허유(鴉噪古墟幽) 안숭선(安崇善)의 시에, “소나무 소리 깊은 동산이 고요하고, 가마귀 울어대니 옛터 그윽하도다.” 하였다.
① 닭을……말이요 : 공자의 제자 자유(子游)가 무성(武城) 원이 되었는데, 공자가 그 고을에 들어가서 학생들의 현가(絃歌)하는 소리를 듣고 웃으며, 자유에게 “닭을 잡으면서 소 잡는 큰 칼을 쓸 필요가 있느냐.” 하였다. 그것은 작은 고을에 천하를 다스리는 예악(禮樂)을 가르친다는 말이었다. 조금 뒤에 공자는, “나의 말은 희롱이었다.” 하였다.
② 송아지 머물러 둔다 : 진(晉)나라 양편(羊篇)은 청렴한 관원이었다. 자기의 소[牛]를 관사(官舍)에서 길렀는데 송아지를 낳았다. 그 뒤 옮겨 갈 때에 그 송아지는 관사에 두고 갔다.
ⓒ 한국고전번역원 | 이민수 (역) | 1969
★ 독곡집 > 獨谷先生集卷上 > 詩 > 成石璘
送金汾舍人赴稷山 김분이 직산에 부임하는 것을 전송하며
稷山雖十室 亦足試吾仁/직산이 비록 10 가구의 작은 고을이지만 또한 나의 인을 시험하기엔 넉넉하지.
撫字先惸獨 差科問富貧/어린 이 위무(慰撫)하길 고아로부터 하고 세금 부과【차과(差科): 차역(差役)과 과세(科稅)의 준말이다.】하길 부유함과 빈천함에 물어야 하네.
割鷄言是戲 留犢事堪遵/닭을 벤다【할계(割雞): 자신의 재능을 조금이나마 발휘할 수 있는 기회를 갖는 것을 말한다. 공자의 제자 자유(子游)가 무성(武城)의 수령으로 있을 때, 조그마한 고을에서 예악(禮樂)의 정사를 펼치는 것을 보고는, 공자가 웃으면서 “닭을 잡는 데에 어찌 소 잡는 칼을 쓰랴.[割雞焉用牛刀]”라고 말했던 고사가 있다.】는 말이 장난이지만 송아지를 남겨둔 청렴한 일【류독(留犢): 삼국시대 상림(常林)이 부임지에서 낳은 송아지는 공적 재산이라며 부임지에 놓고 간 일을 말함】이 준수될 수 있어야 하리.
幼學終何用 須令澤及民/어려서 배운들 끝내 무에 쓰려는가? 반드시 은택이 백성에게 미쳐야 하는 것을.
해설
이 시는 그의 문생(門生)인 김분이 직산에 수령으로 내려가는 것을 전송하면서 지은 것으로, 백성을 어루만져 은택이 백성에게 미치기를 당부하고 있다.
직산이 십실(十室)밖에 안 되는 작은 고을이지만, 관인(官人)으로서 배운 인(仁)을 시험해 볼 만은 하다. 백성을 어루만지고 사랑하는 것은 맹자(孟子)의 말처럼 힘없는 환과고독(鰥寡孤獨)으로부터 행해야 하고 빈부에 따라 차등 있게 천역(賤役)과 세금(稅金)을 매겨야 한다. 작은 고을에서 너무 큰일을 시행한다고 말하지만, 부임지에서 낳은 송아지를 두고 간 상림(常林)의 청렴함은 따라야 한다. 젊은 시절 열심히 배운 학문은 결국 은택이 백성에게 미치게 하는 데에서 효용을 발휘하는 것이다.
이 시 외에도 성석린이 지방관으로 가는 사람에게 준 시에는 대부분 백성에 대한 관심을 많이 표출하고 있어 그의 관인상(官人像)을 잘 보여주고 있다고 하겠다.
【원주용, 『조선시대 한시 읽기』, 이담, 2010년, 19쪽】
★ 성석린 : 본관은 昌寧. 자는 자수(自修), 호는 독곡(獨谷). 할아버지는 판도총랑(版圖摠郞) 성군미(成君美)이고, 아버지는 부원군 성여완(成汝完)이다. 어머니는 밀직사지신사(密直司知申事) 나천부(羅天富)의 딸이다.
1341년 동정직(同正職)으로 사온서승(司醞署丞)을 받고, 1355년에는 사마시에 제3등으로 합격하였다. 1357년(공민왕 6) 과거에 급제, 국자학유(國子學諭)의 벼슬을 받았다.
승진하여 사관(史官)으로 있을 때, 李齊賢이 국사를 편수하면서 재능을 인정하여 성석린에게 항상 글을 짓게 하였다. 이어 藝文館의 공봉(供奉), 三司의 都事, 典儀寺의 주부(注簿) 등을 지냈다.
공민왕도 성석린을 중용하여, 차자방(箚子房: 뒤의 상서원)의 필도치(閟闍赤)로 등용하였다. 다시 전교시부령(典校寺副令)·지인상서(知印尙書)·예부총랑(禮部摠郎) 등을 역임했는데, 신돈(辛旽)의 미움을 사서 외관으로 해주목사가 되었다. 그러나 이내 내직으로 성균관사성(成均館司成)·삼사좌윤(三司左尹)·밀직사좌부대언(密直司左副代言)·지신사(知申事)·제학(提學) 등을 지냈다.
1380년(우왕 6) 여름 왜구가 승천부(昇天府)에 침입하자 원나라 장수 양백연(楊伯淵)이 원수(元帥)가 되고, 성석린은 부장(副將)이 되어 맞아 싸웠다. 여러 장수가 왜적의 기세에 눌려 후퇴하려 하자 성석린이 죽음을 각오하고 싸울 것을 주장하여, 여러 장수가 이에 따라 적을 무찔렀다. 그 해 가을 양백연의 옥사에 연루되어 함안에 유배되었다.
다시 부름을 받아 창원군(昌原君)에 봉해지고 바로 정당문학(政堂文學)에 올랐다. 외직으로 양광도도관찰사(楊廣道都觀察使)가 되어 주·군에 의창(義倉)의 설치를 건의했는데, 조정에서 이를 채택하여 모든 도에서 행하도록 하였다. 다시 내직으로 문하부평리(門下府評理)와 대사헌이 되었다. 1390년 지공거(知貢擧)로서 이조(李朝) 등 33인을 선발하였다.
이성계의 역성혁명에 참여하여 단성보절찬화공신(端誠保節贊化功臣)의 녹권(錄券)이 내려지고 창성군 충의군(昌成郡忠義君)에 봉해졌다. 태조가 즉위하자 문하시랑찬성사(門下侍郎贊成事)가 되었고, 1393년(태조 2) 개성부판사(開城府判事)를 거쳤다. 이듬해 한성부판사를 지냈으며, 원종공신이 되어 노비 3인, 토지 30결을 하사받았다.
1398년 문하시랑찬성사·판호조사 등을 역임하였다. 정종이 즉위하자 외직으로 서북면도순찰사(西北面都巡察使)·도절제사(都節制使)·평양부윤을 지내고, 내직으로 문하시랑찬성사가 되었다. 이어서 문하우정승(門下右政丞)에 올랐다가 곧 좌정승이 되었다.
태종이 즉위한 후 좌명공신(佐命功臣)이 되고 창녕부원군(昌寧府院君)에 봉해졌다. 1402년(태종 2) 영의정부사를 거쳐, 이듬해 우의정이 되었다.
그 뒤 1407년에 좌의정을 지냈고, 1411년 사직을 원했으나 허락되지 않아 1414년 부원군으로 휴직하였다. 1415년 영의정이 되었으나 다시 부원군으로 물러나서 쉬니 궤장(几杖)이 하사되었다.
제1차 왕자의 난이 있은 뒤 태조가 함흥으로 행차하여 머물었는데, 태종이 여러 사자를 보냈으나 감히 문안을 전달하지 못하였다. 이에 성석린이 태조의 옛 친구로서 조용히 인륜의 변고를 처리하는 도리를 진술, 비로소 태조와 태종이 화합하게 되었다.
검소한 생활을 즐겼으며, 초서를 잘 쓰고 시를 잘 지었다. 말년에 관직에서 물러나 한가롭게 지내면서, 쉬는 곳에는 항상 나무궤를 놓아두고 앉아 ‘양화(養和)’라고 이름하였다. 시호는 문경(文景)이다.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