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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라를 공격하는 것) 정책을 펴 한의 장악을 시작으로 10년(BC230~221) 만에 전부 장악하였다. 이로써 최초로 통일왕국을 이루었는데 이 사람의 이름은 정(政, 영정 또는 조나라에서 태어나 조정)으로 13세 등극하여 어머니가 섭정해 승상 여불위와 측근 노애가 전권을 쥐고 흔들었다. 정이 외지로 나간 틈을 타 노애는 반란을 일으켰으나 정은 반란을 평정해 노애를 죽이고 태후를 감금하였고, '진나라 황제의 시작'이라는 뜻이며, 왕의 뜻으로 쓰이는 '짐'이나 '폐하'의 용어도 만들었다. 군현의 장은 황제가 직접 임명하였으며 BC214년 남쪽으로 병력을 파견했다. 그런 후 4개(민중, 남해, 상군, 계림 )의 군을 증설하였고, 지방마다 다른 무게, 길이, 화폐 종류와 값어치를 통일하고 글자나 사상도 통일하려고 하였으나 학자들이 반대함으로 황제는 화가 났다. 약460명의 학자를 생매장하고, 의학, 농업 이외의 정치에 방해가 되는 책은 빼앗아 불태웠는데 이것을 '분서 갱유'라고 하여 언론탄압의 시초가 되었고, 황제는 수 없이 원정하여 베트남의 북쪽까지 점령했다. BC214 북방에서 노략질을 일삼는 흉노족을 몰아내고, 전국시대의 성들을 연결해 쌓은 것이 '만리장성'이며, 황제의 중앙집권적 전제정치는 역대 중국왕조의 기초가 되었다. <규모가 거대한 만리장성>
이때 내시 우두머리 중거부령인 *조고가 호해를 대신해 정권을 지고, 악행을 행하여 각지에서 반란이 일어나 통일한지 14년만에 멸망했는데 진시황제의 무덤은 높이가 75m이고, 둘레가 7.3Km나 된다.
여불위는 조(趙)나라의 큰 부자로 진시황제는 여불위의 계획된 음모아래 태어났는데 진나라 소왕에게는 자초라는 아들이있었으며, 자초는 본래 첩의 아들로 20명이 넘는 아들 중에 중간쯤 되었다. 기회로 삼았고, 진나라 왕위계승자인 황태자가 급사해 왕위 계승권은 안국군으로 넘어 갔다. 안국군은 초나라에서 시집온 본 부인에게 자식이 없는 점을 이용해 여불위는 많은 선물공세로 감동해 자초( 子楚)를 양자로 삼으면서 초나라 아들이라는 의미로 본부인이 이름을 지어주었다. 주었는데 진나라 소왕이 조나라를 포위하자 조나라는 자초를 죽이려 하였다. 이때 황금 600근을 뇌물로 주어 자초를 진나라로 도망시켰으며, 소왕은 죽고 안국군이 왕위에 오르고 1년 후죽음으로 자초가 왕위에 올라 장양왕이 되었으며, 여불위를 재상으로 삼았다. 장양왕도 2년 반만에 죽음으로 13세 어린 정이 왕이 되었는데 이가 진시황제(BC 259 ~ 210)이며, 태후위 섭정에서 20세(BC238) 친정하여 왕의 자리에 25년, 황제의 자리에 12년간 있었고, 49세 병으로 죽었다. 모친(선태후)와 여불위의 내통으로 진 시황제는 여불위를 강요하여 자결하게 하였다. 시켜 전국말기의 귀중한 역사자료인 '여씨 춘추'를 편찬하기도 했다. BC 210년 진시황제 37년 7월 황제는 천하를 평정한 국토를 순행을 하면서 전국에 대한 통치권을 더욱 강화해 蘇; ? - BC 210)를 함양성으로 돌아와 장례를 주관하고 대통을 잇어하라는 유조(유언)를 남기고 죽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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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제가 죽은 사실을 아는 사람은 천하통일에 가장 공이 컸고, 대신들 중 관직이 제일 높은 이사(李斯), 환관 중에 우두머리 중거부령(中車府令)이며, 황제의 옥새(玉璽)를 보관하고 있는 조고가 있었다. 또 왕자 중에 가장 황제의 총애를 받았지만 서열에서는 먼 20살의 성격이 온순하고 정신이 산만하며 결단력이 유약한 18번째 왕자인 호해, 그리고 그들 측근인 시종들이 있었다. 진시황이 병들자 선천과 신령께 기원의 제사를 하는 임무를 맡고 대열에서 먼저 떠났다. 난을 일으킬지 모른다고 생각하여 황제의 죽음을 잠시 비밀에 붙이자고 제안했다. 태자가 되지 못함을 비방과 원망한 불효를 물어 자진하도록 만들었다. 몽염은 부소를 보필하지 못하고 부화뇌동한 불충의 죄를 물어 자결하도록 하여 그들을 제거하였으며, 그들은 또 수레에 바닷고기를 가득실어 비린내와 황제의 시체 썩는 냄새를 구별하지 못하도록 하였다. 황제로 즉위하였으며, 조고는 호해를 주색에 빠지게 하여 정사를 돌보지 못하게 하였다. 음모로 승상 이사마저 제거하여 조고는 승상이 되었는데 이사는 뒷간의 마른 쥐와 곡간의 살진 쥐를 보고, 있는 자리에 따라 달라질 수 있다는 교훈을 얻어 승상에까지 된 인물이다. 그기 죽을 때 '죽음에 쫓기는 곡간 쥐보다 뒷간 쥐가 더 행복한지 모르겠다.'는 고사를 남겼고, 조고는 자신의 죄를 고하지 목하도록 호해를 격리시켜 황제 위에 군림하여 실권을 휘둘렀다. 농락하여 권세를 마음대로 휘두른다는 뜻으로 쓰이는 지록위마(指鹿爲馬)의 고사서어가 되었다. 국운이 다가오는데도 황제 호해는 정사에 참여하지 않아 전혀 알 수가 없었고, 호해 3년 BC 207년 봄 장한이 지휘하는 진나라 주력군을 거록에서 항우가 대파하자 장한은 군사 20여만 이끌고 항우에게 투항했다. 접한 호해는 조고에게 사태를 수습하라고 재촉하자 조고는 수양딸로 삼은 사위 염락에게 병사를 주었다. 그를 시켜 망이궁에 있는 호해를 자진시켰는데 그의 나이는 불과 23세였으며, 황제가 죽은 후 조고가 황제로 즉위하려 했으나 아들을 낳지 못해 대를 물려줄 수 없는 환관이 황제로 오를 수 없다며, 대신들이 목숨 걸고 반대하였고, 대신 유약하고 무능하여 왕실 중에서 드믈 게 살아남아 있던 사람이 있었다. 군들에게 옛날 7웅 시대의 진나로 남겠다는 뜻으로 황제를 포기하고 진왕(秦王)으로 즉위할 것을 재촉했다. 자영이 조고를 사살하고 즉위한지 46일 만에 유방이 함양성을 포위하자 성문을 열고 나가 항복했으며, 유방은 그 후 자영은 항우의 군중들에 의해 피살되었으며, 막강하던 진나라도 14년 만에 멸망했다. 일개의 조고라는 환관 때문에 일찍이 망했으나 그 이름은 유럽까지 알려져 China의 어원이 되었다. <큰 사진은 병마용갱의 1호 갱의 전경이고, 작은 사진의 야산 같이 보이는 것이 진시황제의 능이다.>
인간이 만든 조형물 중에 달에서 보이는 것은 만리장성뿐이라고 하는데 사실일까? 공으로 알렌 빈이라는 우주 비행사는 '지구는 대부분 하얗고(구름), 일부는 푸르며(바다), 군데군데 노란 덩어리가 있고(사막), 또 얼마간은 초록색(산야)으로 빛나는 아름다운 구'라고 하였다. 사람이 식별할 수 있는 것은 하얀 바탕에 두께 700m 이상으로 그려놓은 검은 직선 정도라고 한다. 만리장성의 폭은 4-12m을 넘지 않으므로 사실 만리장성은 달은 고사하고 지구로부터 몇 천㎞만 멀어져도 보이지 않으며, 만리장성이 보일 정도라면 고속도로 철도, 운하 같은 인공구조물도 모두 관측할 수 있다. 아마도 우주여행 초창기 우주비행사중 누군가 거짓말한 것이 와전된 것으로 NASA 사람들은 추측하고 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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운하를 파게 하여 경제와 힘을 낭비하게 만드는 것으로 운하의 기술자 정국이라는 사람을 첩자로 보냈다. 운하를 반쯤 파다가 그가 첩자임을 알고 죽이려 했으나 그는 운하는 큰 이익을 낼 것라고 설명하고 설득시켜 죽음을 면하여 운하를 완성하였고, 한은 계획 되로 당분간 위협은 면하였다. 그러나 운하는 싼시성의 넓은 들을 기름지게 하여 진은 부자나라가 되어 오히려 진나라가 전국을 통일하는 밑거름이 되었으나 뒤의 수나라는 운하를 파서 국력을 낭비하여 망하는 결과를 가져왔다. 다만 시의 하무저만 들고 있던 약봉지를 형가를 향해 던졌을 뿐이었으며, 긴칼을 뽑은 황제는 형가를 8차례 베어 위기를 면했지만 신하와 호위병들은 왜 구경만 하였을까? 이 궁에는 10,000개의 방에 13,000명의 아내가 있었다고 하며, 아방궁을 포함한 이 궁전군은 BC 207년 항우 (項羽)가 진나라를 멸망시켰을 때 불에 탔는데 불길이 3개월 동안 꺼지지 않고 계속되었다고 한다. 불로장생(不老長生)을 염원하여 불로장생 연구가인 방사 서복을 동남동녀(童男童女) 500명과 함께 동쪽 한반도로 보내 불로초를 구해 오도록 한 동남동녀 중에는 달성 서씨(徐氏)의 시조가 되었다. 이것이 사실로 확인되지는 못하였는데 그가 불로장생을 위해 복용한 것은 동충하초(冬蟲夏草)라고 하는데 양귀비와 등소평도 평생을 복용했다고 하며, 중국에서는 산삼, 녹용과 함께 3대 보약으로 알려져 있다.
차이나를 치나(China) 또는 한문표기로 지나(支那)라고도 하는데 중국본토만 지칭하기도 한다. 연해를 동지나해라도 하고, 일찍이 중국(China)을 통해 유럽에 알려진 도자기는 ‘China’라고 한다. 칠기는 일본을 통해 알려졌다고 ‘Japan’이라고 영어로 표기하지만 '본 차이나(bone china)'는 도자기는 중국자기를 말하는 것이 아니고 본(bone)은 뼈를 말하며, 영국의 대표적인 도자기이다. 세력이 가장 강하였으며, 유방(劉邦)이 재통일하여 도읍을 장안에 정하고 한나라를 열었다. 부귀영화는 같이 할 사람이 못 된다.'라는 말처럼 평정 후 대부분 유방의 칼에 죽었다. 흉노족의 조공에 참을 수 없어, 흉노족에 패하여 중앙아시아로 밀려 나갔던 투르크 계통인 대월지국과 동맹을 맺어 흉노족을 공격하려고 장건을 사신으로 보냈으나 장건은 도중에 흉노족에 잡혔다. 10년 후 도망하여 대월지국에 갔으나 대월지국은 평화를 누리고 있어 동맹에 실패하였고, BC 126년 13년에 걸친 긴 여행에서 돌아와 여행의 모든 것을 중국에 알리므로 동서 교역이 이루어졌다. 후세에 이 길을 '*실크로드'라고 하였고, 장건의 여행은 역사에 남을 큰 발자취가 되었다. 하였고 술과 여자에 빠져 *조비연과 조합덕을 총애하였다. AD9년 황제 친척 왕망의 반란으로 신(新) 나라를 세워 실제로는 한나라는 14대 약 200년만에 멸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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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량: 할아버지와 아버지는 한(韓)나라 소후(昭侯)와 선혜왕(宣惠王) 등의 5대에 걸쳐 승상을 지냈으나 진( 秦)이 한을 멸하자 그는 자객들과 사귀면서 한의 회복을 도모하여 진의 시황제 공격했으나 실패했다. 그는 방황다가 하비 지금의 장쑤성 쥐닝현에서 산책 중에 노인 황석공(黃石公, 황색바위)을 만나는데 노인은 집신을 다리 아래로 던지고 주워와 신기어 달라고 명령했으나 부당한 명령을 참고 행하였다. 노인은 ‘장래성이 있는 놈이라며, 5일 후 다리로 나오면 책 한권을 주겠다.’라고 약속했고, 5일 후에 가보니 노인이 먼저와 있었고, ‘노인과 약속한 놈이 되레 늦었다’고 호통만 당했다. 사정하여 다시 5일 후에 약속을 받고 아예 밤부터 기다려 받은 책이 ‘태공병법(太公兵法)’이라고 하며, 노인은 책을 준 뒤 ‘자네는 13년 후에 세상을 뒤흔드는 인물이 되어 있을 터이니 그때 다시 만나자. 곡성산 기슭의 황색바위가 나이니라’라고 말한 후 바람처럼 사라졌다고 하는데 이 이야기는 여행기 장가계의 황석채(黃石寨)가 황석공(黃石公)의 이름에서 유래되었다는 것을 짐작할 수 있다. ‘울타리’ 뜻의 채(寨)자를 사용한 것을 보면 이곳이 황색바위로 있다는 곡성산 기슭인지는 알 수가 없으나 장량의 곡성산 기슭에서 만난 황색바위를 가져와 모시다가 죽을 때 무덤에 같이 매장했다고 한다. 본 적이 있으며, 사마천이 사기에 황당한 장량의 이야기를 기록한 것은 겸손, 사람 보는 법, 감정절제, 인내 등이 천하를 경영할 덕목이라는 것을 말하려고 하는 것 같다. 크게 공헌하였지만 항상 몸을 낮추어 유방에게 숙청당하지 않고 일생을 마감한 사람이다. 인재등용과 처신에도 뛰어났는데 인재등용 면에서는 촉나라 승상 제갈공명보다 더 뛰어 났다고 한다. 그 때문에 제갈공명이 실패한 천하통일이 가능했다고 하며, 제갈공명은 이론에만 능하고 실전한 미숙한 마속을 중요요충지인 가정에 배치하여 패배함으로 모든 군사를 퇴각시켜 북벌에 실패했다. 제갈공명 확실치도 않은 관상만 믿고 ‘반골상’이라 하여 위연을 죽이려고까지 했다. 한나라 군대를 지휘하여 크게 공을 세워 제왕(齊王)에 이어 초왕(楚王)이 되었다. 독일의 지리학자 리히트호펜(1833-1905)이 처음으로 이 길을 답사하면서 비단길이라고 한데서 연유하며, 실크로드의 문물교환으로 문명로드(culture road)이기도 했고, 정복자의 군대가 지나간 길이기도 했다. 비단을 유럽에서는 옥, 보석, 직물, 악기, 술, 여자, 불교, 회교들이 들어왔다. 가로막아 텐산북로(서역북로, 西域北路)와 우루무치를 지나는 텐산남로(서역남로, 西域南路)로 나뉜다. 그리고 타클라마칸 사막에 가로막혀 남쪽으로 생긴 텐산남도(서역남도, 西域南道) 끝에 카슈가르가 있다. 길로 장건 이전에도 있었으며, 이 길을 일명 모피(毛皮)로드라고도 한다. (흉노족과 실크로드의 하서회랑) 없는 고비사막이 있는 이곳이 영하회족자치구로 하서회랑은 건조지대지만 눈 녹은 물로 농사가 가능하다. 이곳을 장악해야 실크로드를 장악할 수 있는데 당시 중국북방을 장악했던 흉노족은 대(大)장군이 선우가 좌현 왕과 우현 왕을 거느린 제국체제로 있었으며, 기마군이 강하여 월지국이 지배하던 이곳을 장악했다. 한 고조로부터 무제까지 조공을 받고 있었는데 BC129년 조공을 보내고 화친을 맺어든 한 무제(BC141-87)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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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역에서 구해온 천마로 흉노족과 전쟁을 시작하여 고비사막으로 몰아냈다. 그 위에 세운 하서4군(무위, 장액, 주천, 돈황)을 설치하여 실크로드를 열었으며, 시안(서안)에서 출발하는 실크로드의 하서회랑은 로마와 빈번히 교역하여 로마주화가 많이 발견되는 곳이라고 하다. 돈황은 사막의 모래 속에 천년을 유지한 막고분 벽화가 유명하며, 또 무위는 가장 비옥한 오아시스 도시로 흉노족이 차지했다가 무위군이 설치되었고, 5호16국 시대에는 5개 왕조가 이곳을 중심으로 있었다. 그녀는 성황제(漢成帝)의 총애를 받아 황후의 지위까지 오르게 되었고, 한번은 황제가 호수에서 선상연( 船上宴)을 베풀었는데 갑자기 강풍이 불자 춤을 추던 비연이 휘청 물로 떨어지려했다. 그 때 황제가 급히 그녀의 한쪽 발목을 붙잡았는데 그녀는 그 상태에서도 춤추기를 그치지 않아서 비연은 임금의 손바닥 위에서도 춤을 추었다는 비연작장중무(飛燕作掌中舞)라는 고사의 주인공이 되었다. 탄핵의 대상이 되었으며, 평인으로 걸식을 하다가 자살로 그 생을 끝맺고 말았다고 한다.
신나라를 왕망(王莽)은 젊은 시절을 황제의 외척으로 불우했으나 애제가 죽고, 원후가 왕망을 불러 의논 끝에 9살인 평제를 세워 평제 대신 원후가 조정의 일을 보았고, 대사마로서 왕망이 정치를 도맡았다. 왕망의 딸이 황후가 되자, 그의 권력은 나는 새도 떨어뜨릴 정도었으며, 평제를 14살에 독살하고 후계자로 2살인 자영(子嬰)이 옹립하였다가 AD9년 스스로 황제가 되어 신 나라를 세웠다. 이로서 한나라는 멸망했는데 이를 전한이라 하며, 신나라는 주나라의 이상적인 나라를 그리며 급격한 개혁을 하려다 호족이 반란을 일으켰고, 반란군은 장안을 함락했으며, 왕망은 그들로 부터 죽음을 당했다. 신나라는 겨우 15년만에 망하였고, AD25년 유수는 한나라를 부활시켜 황제가 된 것을 후한이라 한다.
광무제로 이 나라를 후한이라고 하였고, 수도를 장안에서 낙양으로 옮겼다. 다시 득세하여 혼란과 불안을 빚어 화북지방에 노략질을 일삼던 *황건적이 반란을 일으켰다. 이것을 진압한 조조 아들 조비가 후한을 AD220년 멸망시켰고, 이 때부터 '삼국지' 얘기처럼 삼국시대가 된다. 치유하여 태평세대가 도래한다고 설파하여 만든 종교가 태평교이다. 군사조직을 갖추어 봉기를 하려는 것이 사전에 발각되어 조정은 진압에 나섰다. 큰 영향을 끼쳤으며, 제지법은 비단길을 따라 서구로 갔고, 비단길로 불교가 들어왔다. 후한 말엽에 국력이 쇠하자 지방호족의 큰 세력이 나타났는데 그 중에 조조, 유비, 손권이었고, 조조의 아들 조비가 후한을 멸망시키고 화북에 위(AD225-265)나라를 세웠다. 위나라가 촉을 멸망시키고, 위나라는 사마염에 나라를 빼앗긴 것은 AD265년이다.
옹호하여 정치를 안정시켜 나갔고, 즉위 초에는 검소한 생활로 모범을 보였다. 점점 사치와 방탕에 빠지자 귀족들도 다투어 사치와 부를 마치 무슨 경쟁이라도 벌이듯 과시하였고, 석숭은 무역을 하여 막대한 돈을 벌었다고 하는데 석숭과 왕개(왕제)는 경쟁적으로 사치를 과시하였다. 구부러진 노송의 공이 구멍 속에 30년 간 빚은 와송주(술)를 마신다 하면, 석숭은 대나무 통속에 50년 간 묵었다는 죽통주를 마셨다는 식이었다. 일으켰으며, 이것을 '8 왕의 난'이라고 한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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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며, 384년 한반도 백제에 불교를 전하였다. 불교의 석굴사원, 석불이 만들어졌으며, 남조는 유교사상보다는 노장사상인 무위자연을 소중히 여겼다. 새로운 불교를 강조하였다. 왕자로 태어나 대승불교의 승려가 되어 선에 통달하였고, 520년경 중국에 들어옸다. 그는 소림사(少林寺)에서 9년간 면벽좌선(面壁坐禪)으로 이(理)를 깨달았다고 하며, 일설에는 페르시아의 왕자라고 하는데 중국 무술의 영화에서는 달마대사를 무술인의 원조격으로 묘사하고 있다. 그라 실제로 그러하였는지는 의문이 된다. 304년 '저' 계의 이웅이 사천에서 나라를 세워 이렇게 5호가 16국을 세운 것을 '5호(胡)16국(國)'이라 한다. 5호의 호(胡)는 야만이라는 뜻으로 1.흉노 2.갈(흉노의 별종) 3. 선비(터키계라는 설) 4.저(티베트 계) 5.강( 티베트 계)이며, 이들이 13개의 나라를 세우고, 한족이 3개의 나라를 세웠다. 모두 16개국이나 실제로는 더 많았다고 하며, 이들 이민족이 중국을 최초로 지배한 형태로 호족국들은 한족의 문화를 받아들이고, 사대부 예우하여 우호적이었으며, 불교발전에도 기여하였다. 390년 사이에 자연의 재해(추위와 가뭄)로 갑자기 중국무대에서 사라졌다. <삼국시대(위 촉, 오), 선비, 흉노, 고구려와 한반도>
반대세력을 누르고 581년 명제에게 왕위를 받아 수왕이라고 한데서 수나라가 되었다. 망한지 317년만에 남북을 통일하였고, 북쪽에 성을 축조하여 터키계의 돌궐의 침입에 대비했다. 돌궐과 내통하며 조공을 바치지 않는 고구려를 정벌하기 위하여 598년 30만 대군으로 진격했으나 태풍으로 수륙 양군이 자멸하여 전쟁도 해보지 못하고 퇴군하였고, 양제는 아버지를 살해하고 왕위에 올랐다. 그는 남북(베이징-화중)을 잇는 길이 1400Km 넓이 30m 대운하에 550만 명을 동원하여 250만이 죽었으며, 양제는 양주에 고립되었고, 617년 당을 세운 이연은 장안을 점령해 양제의 손자 유(정제)를 왕으로 세웠으며, 무리한 징발은 원정 중에 내란이 일어나 멸망의 결정적 요인이 되었다.
왕의 책봉을 받았고, 백제는 남조의 진나라와 관계가 깊어 진이 망한 후에 책봉을 받았다. 지략에 의한 살수대첩에서 대패하여 4개월만에 철수하였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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통일을 하는데에는 이세민의 공로인데 형제들이 그를 시기하여 형제를 모두 죽이고 왕위를 계승했다. 종족에게 조공을 바치게 하여 내치에 힘써 태평성대를 누린 이것을 '정관의 치'라고 한다. 만들었으며, '균전법'란 제도를 만들어 농토가 없는 농민에게 땅을 주었다. 또 '조, 용, 제'이라는 세금제도를 만들었으며, 징병제도도 마련하여 국력을 부강 시킨 것이 후세에 본보기가 되어 우리나라와 일본에까지 영향을 주었고, 엄격한 과거제도로 실력 있는 자를 중용하였다. 당나라의 300년 터전을 만들었으나 좋은 후계자가 없었고, 만년의 *고구려원정 실패 등으로 그가 죽은 뒤는 정권이 동요하였으나 태자인 셋째 아들 이치(李治)가 3대 황제로 즉위하여 고종(649-683)이 되었다. 고구려의 평양성의 함락시켰고, AD 670년 *토번왕국를 공격했다가 대패하였다. 고종을 꼭두각시로 황제로 만들었으며, 고종이 죽은 후 황제 중종(中宗)과 예종(睿宗)이 친아들이다. 이들을 꼭두각시 황제로 내세워 섭정하다가 AD 690년 정식으로 황제의 자리에 올라 중국역사상 유일한 여제 측천무후(생애 625-705 )로 황후 책봉을 반대한 대신과 두 아들 맏손주까지 죽여 국민의 사랑을 받지 못했다. 즉위 초는 정치는 잘하여 존경받았으나 재위16년 동안 악랄하고 잔혹한 탄압으로 공포의 정치를 하다가 반대 파에게 숙청 당하고 중종을 세웠으나, 중종의 왕후 여씨가 중종을 살해하고 실권을 쥐었다. 이융, 712-756)은 당을 정상으로 만들었으며 정치를 쇄신하여 내치 안정에 힘써 최성기를 이루었다. 그의 친척 양국충을 재상으로 삼아 그에게 국사를 위임하였다. 3개의 절도사를 겸하고 있는 안녹산과 양충국의 마찰로 안녹산이 양충국의 제거 명분으로 난을 일으켰는데 이 난을 '*안사의 난'이라 하며, 안녹산이 낙양과 장안을 점령할 때에 양귀비는 살해되었다. 강화되어 이것이 민중과 지주층에 고통을 주어 변란이 연속으로 일어 났다. 중에 재상파가 끌어들인 황소의 무장인 주온이 장안에 입성하여 소종을 살해하고 애종을 세웠다. 907년 애종을 폐위하고 후량국의 태조가 될 주온(주전충)이 즉위하므로 당나라는 20대 제왕 때 289년만에 망하였다. <당나라, 돌궐, 남조, 통일신라>
태종(이세민)은 645년 17만의 대군을 이끌고 고구려를 침입하여 고구려와 말갈 연합군대 15만을 무찌렸다. 그뒤 안시성을 공격하면서 당나라 군대는 60여 일 동안 매일 1.600 명 군대를 동원해 안시성보다 높은 토산을 구축하여 성안을 공격하였으나 안시성 성주 양만춘은 토산 공격에 나서 정상을 점령하였다. 3일 동안 계속된 당나라 군대의 총공세를 물리쳤는데 고구려 군을 지휘한 것은 연개소문이었는데 양만춘은 박지원의 열하일기 등 야사에만 나오며, 명사수인 양만춘의 화살이 태종의 눈을 맞혔다고도 한다. 퇴각하는 이세민에게 송별의 예를 하니 당나라 태종이 그에게 비단 100필을 주면서 성의 방어를 하례하고 왕에게 충성을 다하도록 격려했다고 하며, 그 후 4차례나 당나라는 고구랴를 침입했으나 모두 실패했다. 자치구)에서 일어났고, 티베트인은 '보에'라고 하며, 중국은 '토번'이란 명칭을 14세기까지 사용했다. AD633년 손챈강포(손첸캄포) 왕이 주위를 통일하고, 라싸에 노예제국가를 세웠으며, 왕은 당 이세민의 수양딸 문성(文成) 공주와 혼인하여 중국의 기술을 도입해 도량형제도를 통일했고, 제철 기술을 발전시켰다. 연연도대총관(燕然道大摠管)으로 있던 백제의 장군 흑치상지는 이 전쟁에서 500명의 군사로 단 한번 승리를 거두었고, 안사(安史)의 난이 끝난 AD 763년 치송 데첸 왕 때 장안을 점령하였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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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로써 실크로드를 장악하여 가장 강력한 왕조가 되었으며, 당나라에 조공을 받고 불교의 왕국으로 만들었고, 중국의 경제적와 문화적 교류를 활발히 하여 당의 군제를 모방하고 법률을 제정했다. 티베트 문자를 창제하여 불교를 장려했고, 당과 8차례 맺은 맹약 중 AD 823년 세운 당번회맹비(唐蕃會盟碑)가 현재 라싸에 있는 다지오 사(大昭寺) 앞에 남아 있다. 현종의 왕비가 죽어 왕비를 물색하는 중 18번째 왕자 수(모)왕과 16세에 결혼한 부인이 아름다움을 진언하는 자가 있었고, 현종이 온천궁에 있을 때 기회가 되어 황제의 총애를 받게 되었다. 61세 현종의 마음을 사로잡아, 그는 27세에 귀비로 정식 책봉되어 왕비와 같은 대우를 받았다. 그의 3자매는 한국, 괵국, 진국부인으로 봉해지고 친척오빠 양충국이는 재상이 되어 통치를 위임받아 많은 친척은 고관이 되었고, 황족과 통혼하였으나 안사의 난 때에 현종과 도망하였다. 마외역에 이르러 양씨들에게 불만을 품은 자가 양충국을 살해했고, 양귀비에게 나라를 이 지경을 만든 책임을 물어 불당에서 목매어 죽게 만들었는데 정사에 기록되기를 '그녀는 절세의 풍만한 미인이며 가무에 능했다. 그리고 남자의 마음을 사로잡는 총기를 겸비한 여인이다'라고 기록했고, 이백은 활짝 핀 모란에 비유했으며, 백거이는 비극의 애정을 '장한가'로 작곡하여 그녀를 중국의 역사상 가장 낭만적인 주인공으로 만들었다. 금수융단을 둘러놓고 30명의 소년들이 부르는 합창을 들으며, 목욕을 했는데 반란을 일으킨 안녹산이 먼저 옥련탕을 메워버린 것은 주민의 원성이 이 욕탕으로 쏠려 있었기 때문이다. 궁전에서 여름냉방 방법으로 여성을 요나 방석으로 이용했는데 수단 여성이 가장인기가 있었다고 한다. 미인과 양귀비처럼 살찌고 풍만한 미인으로 르네상스시대에도 양귀비와 같은 사람을 미인으로 여겼다. 풍만한 것이 미인이며, 영양이 좋은 현대는 뚱보가 많아 날씬한 것이 미인이다. 눈 큰 동네는 눈 작은 것이 미인인데 터키나 동유럽 여행 때 눈 작고 광대 뼈가 나온 우리 나라 여성이 인기가 있는 것을 보고 미인의 기준은 보기 힘든 것이 미인의 기준이라는 것이 아닐가? <현종의 총애를 받은 양귀비> <당나라 현종과 양귀비의 로맨스를 노래한 당나라 시인 백거이의 장한가의 무대 화청지>
'빛'을 의미하는 이란어 '로우샨'(rowshan)을 중국식으로 표기한 것이다. 무관으로 두각을 나타내었고, 부하에게 잘 관대하여 줌으로 많은 부하들이 그를 잘 따라주었다. 또 파견된 사자들에게 뇌물을 주어 현종과 양귀비의 신임을 받아 국경경비군의 1/3을 장악하였고, 양충국이 재상이 되어 안녹산의 많은 부하에 위협을 느껴 그를 현종과 이간을 획책하였다. 이에 위협을 느낀 안녹산은 난을 일으켰고, 양충국을 제거한다는 명목으로 낙양과 수도 장안을 점령해 자신이 대연황제라고 칭하였으나 그는 얼마 안되어 시력이 약해지고 악성종기에 시달리게 되었다. 있느냐'고 물었고, 안녹산이 즉시 '오직 충성심만 들어 있습니다'라고 대답했다고 한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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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제문화의 성격이며, 장안은 세계 제1의 도시로 인구가 200만이 넘어 다고 한다. 관리들과 부호들은 아름다운 공예와 얇은 옷을 입고 짙은 화장의 여인들과 눈이 파란 이란계 무희들이 따라 주는 서구에서 들어온 포도주로 환락을 즐겼다. 국제 인종 박람회와 같았다고 한다. 의자에 앉는 풍습이 유행하였고, 비파와 가죽신에 농산물 오이가 들어온 것도 이 때라고 한다. 영류왕 1년, 신라는 진평왕 40년, 백제는 무왕19년에 해당된다. 사이가 불편하므로 당을 경계하여 1,000리 장성을 쌓았다. 차단하려고 했기에 신라는 당에 구원을 요청했으나 수나라가 고구려에 패한 것을 감안해 신중을 기하였다. 645년 안시성 싸움에서 패하였고, 여러 차례의 전쟁에서 성공하지 못하였다. 젊은 사람은 중국의 외지로 이주시켰는데 이들 중 *고선지 아버지 고사계는 서역지방으로 이주되었다. 지배하려고 하였으나 신라 문무왕은 당과 영토 전쟁을 치르고, 안동도호부를 한반도 북쪽 만주로 쫓아냈다. 이로써 당은 아무소득 없이 옛날 영토로 되돌아갔고, 당의 전제왕국이 고려와 조선에 계승되었다. 교육은 신라 귀족자제가 최고학부인 국학에 유학하였고, 고려는 국학을 본떠 국자감을 만들어 당의 한반도에 많은 영향을 주었으며, 당이 망한 907년는 신라, 후백제, 마진의 시대로 후 삼국 시대에 해당한다. 후고구려를 '대 동방국' 뜻인 마진으로 바꾸었다가 911년 태봉(泰封)으로 또 바꾸었다. 건국하기까지 474년 동안 존재하였으며, 신라는 BC 57년 박 혁거세가 나라를 형성하여 AD 935년 경순왕이 고려에 스스로 항복하여 천년의 역사를 마감하였다. 참여하여 장군으로 복무하며, 747년 토번(吐蕃: 티벳)과 서역의 소발률국을 토벌하였다. 그 공적으로 안서부도호 2인자가 되었고, 1차 원정서 불름(동로마), 대식(大食: 아라비아) 제호(諸胡) 72개국의 항복을 받았으며, 사라센제국의 동진을 저지한 공으로 귀국해 특진겸좌금오대장군동정원이 되었다. 패하였고, 이 때 포로로 잡힌 부하 중에 이름은 알 수 없는 종이 만드는 장인(기술자)이 있었다. 그가 세계 최초의 섬유질 제지법을 유럽에 전파했다고 하며, 고선지는 많은 공적을 남겼으나 755년 안녹산의 난을 평정하는 도중에 모함을 받아 참수 당하였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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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라방) 하는데 주로 상인들이고, 승려는 많을 때 1,000명정도가 있었으며, 법화원이라는 신라절도 있었다. 남아있으며 그는 궁정에서 환대 받았고, 혜초가 선유사에서 측천무후의 명을 받아 기우제를 지내던 바위가 현재도 남아있으며, 원효와 자장은 당나라로 가다가 원효는 해골에서 깨달음을 얻고 돌아왔다. 석가모니가 신라와 관련이 있음을 과시하고자 석가모니의 사리를 봉안하는 탑을 도처에 건립하였다. 그 대표적인 조형물이 645년 세운 황룡사 9층 목탑과 양산의 통도사이며, 의상대사는 당에서 돌아와 낙산사와 부석사를 지었고, 최치원은 879년 황소의 난 토벌 중에 종사관으로 서기의 책임을 맡았다. 그는 반란자에게 항복을 권장한 문장을 썼는데 매우 뛰어난 문장이었다고 하며, 신라방에 거주하는 거류민을 다스리기 위해 자치적 행정기관인 신라소가 설치되었고, 신라의 장보고가 해상무역을 장악하였다. 장보고 때문에 신라방은 더욱 번창하였고, 충남의 당진은 당나라와 거래하던 항구에서 온 이름이다.
후량, 후당, 후진, 후한, 후주이며, 지방에는 전촉, 후촉, 남당, 오, 초 등 10개 나라가 일어났다. 이를 '5대 10국(五代十國)'이라 한다. (Siramuren) 유역에서 여러 부족으로 분열되어 거주하던 유목민이다. 자칭 황제로 즉위한 사람이 야율아보기로 상경일황부에 도읍하고 서쪽의 위구르를 제압하였다. 그리고 외몽골, 동투르키스탄을 지배하였고, 발해를 멸망시켜 만주전역을 장악하였으며, 2대 태종은 만리장성 이남의 땅을 받아 '요'라고 하였고, 후진을 멸망시키고 계속 하남성으로 진출하려다 실패해 철수했다. 중앙아시아에서 페르시아까지 지배했으나 여진족이 강하여 지면서 1115년 금나라를 건설하였다. 1125년 금은 요나라를 멸망시켰고, 황제 일족인 야율대석은 서쪽으로 도망가 서요를 세웠다. <서요, 위구르, 서하, 토번, 금, 남송, 안남(베트남), 해상무역로>
925년 12월말 야율아보기는 중원지방으로 진출하려 했고, 배후세력인 발해를 제거하기 위해 발해를 공격하여 보름만인 그 이듬해 1월 15일 멸망시켰는데 발해는 귀족간 권력투쟁이 극심해 거란를 방어할 수 없었다. 230년간 지속된 발해(698-926)의 역사는 끝이 났으며, 거란은 발해 땅에 동단국(東丹國)을 세우고 거란 황제 맏아들이 발해를 다스렸으며, 발해가 망한 뒤 유민은 약 200년 동안 부흥운동을 일으켰으나 실패했다. 발해유민 중 수만 명은 고려로 들어왔는데 발해는 고구려유민이 지배층의 주류이었고, 주민은 말갈족으로 구성된 나라인데 그러나 요사이 중국은 발해를 중국역사에 포함시키는 왜곡된 역사를 만들려고 하고 있다. 가운데 발해는 고구려를 계승했음을 공식적으로 주장하였고, 일본도 이를 인정했다는 기록이 전해진다. 죽이고 7대 목종을 폐위하여 8대 현종을 세웠으며, 거란 성종은 1011년 함부로 왕위를 갈라치운 죄를 물어 현종2년에 침입하여 강조를 죽이고 개성을 불태웠는데 이 때에 귀중한 자료들이 불타버렸다. 무기를 버리고, 겨우 수천 명만 거느리고 도망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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