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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4] 2. 유럽의 중세와 영국 고대역사 (AD500-1500) 문화를 가지고 있었고, 그들에게 획기적인 사건은 로마의 침입이다. 두 번이나 원정하여 AD80년대 스코틀랜드까지 진격하였으며, 로마가 5세기까지 지배했다. 랭커스터, 맨체스터, 윈체스터, 체스터 등은 로마 병영지인 라틴어의 성에서 유래했고, 이로서 라틴문명이 영국에 들어가게 되었으며, 런던(London)은 라틴어로 '소 택지의 성'의 뜻인 '론디니움(Londinium)'이 어원이고, 영국을 그레이트 브라이튼(Great Britain)이라고 하는데 이것은 3가지 설이 있다. 브리튼인은 BC7-1세기 영국과 북프랑스 지방에 이주하여 프랑스는 '브루타뉴'지명이 되었다. (Pretanikai)'라고 한 것이 브레타니아(Britania)으로 변화되었고, 또 이것이 브리튼(Bretain)으로 변화한 것이라고 하는 사람도 있는데 1768년 스코틀랜드 에든버러에서 초판이 발행되기 시작한 브리태니커 (Britannica) 백과사전의 이름을 보아도 이해 할 수가 있다.
영국의 섬들과 유럽의 대서양 해안을 돌아보고 기술하였다. 폴리비오스(BC 200경-118경)를 통해 전하여지고 있다. 벌리리엄(콘월)까지 걸어서 탐험한 것으로 보이며, 그는 그 거리를 정확히 6,400㎞로 측정하였다. 그는 북유럽의 발트 해와 아이슬란드와 노르웨이까지 가본 것으로 보인다. 관심을 보여주는 것이고, 그는 또한 북극성이 정극(正極)의 위치에 있지 않으며, 달이 조류(潮流)에 영향을 미친다는 사실을 관찰하였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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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세기 중반부터는 앵글로색슨인이 잉글랜드지방에 침입하여 선 주민 브리튼을 쫓아내고, 829년까지 7왕국시대가 되었으며, 7왕국 시대에 기독교도 전파하여 농촌으로 옮겨가게 되었다. 교회사를 통하여 역사를 가늠할 뿐이다.
이좃속은 현재 영국을 이루고 있는 민족으로 앵글로인, 색슨인, 유트인이 주류를 이룬다. 작센 지방에 이웃에 있는 민족으로 둘다 성질이 거칠고 사나운 야만족이다. 이들에게 평야와 남쪽을 내어주고 켈트의 스콧족은 스코틀랜드, 웨일즈, 아일랜드, 산지나 북쪽으로 쫓겨 났으며, 잉글랜드는 '앵글인의 땅'이라는 뜻이고, 앨프레드(871-899) 대왕은 잉글랜드가 데인족의 침략을 막고 학문과 교육을 장려하였으며, '앵글로색슨 연대기' 편찬은 그의 재위중인 890년경 시작되었다. [데인족은 덴마크에서 온 민족으로 셰익스피어의 햄릿은 데인족의 전설적 왕자를 소재로 하였다.] 1014년 덴마크 왕의 동생 크누트가 영국을 점령하여 1016년에 잉글랜드 왕이 되었고, 덴마크 왕인 형이 죽자 1019년 덴마크왕도 겸하였으며, 노르웨이도 점령하였다. 1028년 왕위에 올라 3개국을 1035년까지 다스렸고, 서자 해럴드가 잉글랜드를 이어 받았으나 아무도 그의 자질을 이어 받지 못해 1042년 다시 옛날 왕통으로 돌아갔으며, 1066년부터는 노르만왕조가 시작되었다. 오르고, 웨스트민스트 대성당을 건설하여 '참회의 왕'이라는 별명을 얻었다. 해롤드왕을 격파하고, 즉위하니 윌리엄1세로 노르만 왕조를 열었다. 프랑스 문화가 영국에 건너가게 되었으며, 귀족은 색슨계에서 노르만으로 옮겨졌다. 이 왕조는 중앙집권적 봉건제도를 확립하였고, 유럽대륙과 문화교류를 하면서 영국성립의 기초를 닦았고, 프랑스어를 쓰는 귀족과 영어를 쓰는 평민으로 나뉘게 되었다. 인구는 800만으로 인구열세 때문이었으나 헨리 2세는 프랑스 안의 영토를 프랑스보다 더 많이 가졌다. 이 때문에 백년전쟁의 한 원인이 되기도 하였으며, 윌리엄1세의 아들 헨리1세는 아들이 없었고, 윌리엄 1세의 딸 애덜라와 블루아 샤르트르 백작 에티엔 사이에 태어난 셋째 아들인 스티븐은 많은 대 귀족들과 함께 이종 4촌인 *헨리 1세의 딸인 마틸다를 왕위 계승자로 지지할 것을 서약하였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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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노르망디의 영주들은 마틸다가 앙주 백작 가문으로 시집간 것에 분개하여 잉글랜드 귀족들과 차지하기 위해 영국해협을 건너오자 대 귀족들과 주교들은 그를 환영하였다. 그를 후계자로 지정하였고, 스티븐이 죽어 노르만왕조는 끝나고 플란타지네트의 혼혈 왕조가 열렸다. 1 feet(약 30cm)는 발뒤꿈치에서 발톱 끝까지의 길이(foot)에서 탄생한 단위인데 헨리 1세의 발 크기라는 속설도 있으며, 1피트는 1야드의 3분의 1 이다. 계승하여 헨리2세(1154-1189)라고 하였rh, 이것이 프란타지네트(앙주)왕가의 시초이다. 헨리 2세는 19세 때 프랑스 루이 7세의 왕비 엘리노아(29세)와 사랑하게 되어 루이와 이혼하고 엘리노아와 결혼하면서 지참금으로 프랑스 남쪽의 큰 영토를 가지고 오게되었다. 더 큰 영토를 다스렸고, 영국 내에도 정치를 안정시키고 법과 재판제도 마련하여 현군으로 존경받았다.
하자 반란을 일으켜 아버지를 몰아냈는데 그가 십자군 3차 원정 시 사자왕으로 이름 날렸다. 무수한 낭만적 전설의 주인공이 되어 영화나 소설에 자주 등장하는 리처드1세로 예루살렘근교에서 살라딘과 싸워 물리치고, 그의 용맹성이 별명이 되었으며, 살라딘이 그의 용맹성에 탄복하였다. 살라딘은 3년간 휴전협정(1192)을 맺고, 돌아오다가 폭풍을 만나 베네치아 부근 해변에 상륙했는데 그에게 적개심을 품고 있던 오스트리아의 레오폴트 공작에게 체포되었다. 필리프(필립스)2세와 싸우다가 1199년 사망하였고, 동성연애자였던 그는 자식이 없었다. 사람들의 충성심을 불러일으키는 능력이 있었다. 1216)이 아서 1세를 살해하고 왕위를 계승하였으나 형들이 아버지를 배반하여 반란을 일으켰을 때에 강한 형님들 편을 들어 자기를 사랑한 아버지를 배반한 불효자로 낙인찍히어 백성은 비겁한자로 여겼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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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의 실정과 무거운 세금은 귀족들이 1215년 49개조로 된 마그나카르타 대헌장에 서명하게 했는데 존왕은 자신의 이름조차 쓸 수 없을 정도로 무식하여 대헌장의 서명을 할 수 없어 대신 도장을 찍었다. 이것이 민주주의 뿌리로 획기적인 사건으로 봉건제후들의 권력확인이 목적이었지만 런던과 자유도시의 시민의 특권을 인정하고 생명과 재산을 보호하는 조항이 포함되어 자유주의 기원으로 삼고 있다. 많은 대룩의 영토를 프랑스 왕 필리프 2세에게 넘겨 주었다.
포로가 되었으나 탈출하여 시몽을 패사(敗死)시키고 부왕의 지배를 회복하여 나라를 다스렸다. 헨리 3세가 죽은 후 에드워드 1세로 즉위하여 하였고, 그는 입법, 사법, 행정의 기능이 분명하지는 못했지만 분리되기 시작하였으며, 국왕재판소가 형태를 갖추기 시작하여 1295년 시민대표도 포함시키는 모범의회를 열었는데 이것이 후에 영국의 의회의 기원으로 이 때부터 왕과 국회라는 두 세력이 갈리게 되었다. 승려와 귀족은 상원이 되었고, 농민과 상인 또는 평민의 대표는 하원이 되었으며, 에드워드 2세(1307-27)는 동성연애자로 부인 이자벨라는 1325년 외교사절로 파리에 갔다. 함께 잉글랜드로 쳐들어와 에드워드를 폐위한 뒤 아들을 에드워드 3세로 왕위에 오르게 하였다. 구실로 백년전쟁(1337-1453, 116년간)을 일으켰고, 1341영국의회가 상하의원으로 나누었다. 백년전쟁 때 입은 갑옷이 흑색인 것에서 별명을 얻은 에드워드이다. 결혼하였고, 리처드가 1399년 죽어 그녀는 11세에 과부가 되었다. 16세에 다시 2살 적은 앙굴렘의 샤를에게 재혼하였으나 20세에 아이를 낳다가 죽었는데 그녀의 짧은 생애에 많이 기구했는데 2살 때에 아량송 백작의 아들 존과 약혼도 했으나 리처드와 결혼하면서 성사되지 못했다. 손자이며, 리처드 2세의 4촌 동생으로 1397년 헤리퍼드 공작에 봉작되었다. 2세가 랭커스터 공령(公領)을 몰수하였기에 급히 귀국하여 거병을 일으켜 왕군을 무찌렸다. 그리고 리처드 2세를 체포하여 퇴위시킨 뒤 의회의 추대를 받아 즉위하였고, 프랑스와 전쟁을 계속하면서 의회발전에 공헌했으며, 노르만족이 점령하여 300년 동안 공식언어로 프랑스어를 사용하였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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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99년 왕궁에서 쓰지 않았던 영어를 헨리4세가 부활시켰고, 헨리 5세(1413-22)는 프랑스 샤를 6세와 싸워 이긴 뒤 체결한 트루아조약에 따라 프랑스 왕의 계승자로 선포됐으며, 샤를 6세 딸 카드린과 결혼했다. 카드린 아들로 재위는 1422-1461과 1470-71이며, 1461-70은 요크가의 에드워드 4세가 재위하였다. 백년전쟁 말기로 프랑스는 잔다르크 출현으로 열세를 만회하여 샤를 7세가 프랑스 왕으로 즉위했다. 이에 자극 받은 9살인 헨리 6세도 파리에서 대관식을 가졌고, 1445년 프랑스 왕비 조카인 앙주의 마거릿과 결혼했으며, 1453년 헨리 6세는 대륙에서 쫓기어 칼레만 남게 되었고, 백년전쟁은 막을 내렸다. 그녀의 통치는 지지를 받지 못해 의회는 헨리 6세의 4촌인 요크공 리처드를 왕국의 섭정으로 임명하였다. 복귀시켰고, 1455년 5월 요크공 리처드는 *장미전쟁을 일으켰으며, 서머싯은 이 전쟁에서 전사했다. 헨리 6세가 죽으면 아들 에드워드 대신 요크공 리처드가 왕위를 계승한다는 협상이 이루어졌다. 에드워드 4세가 런던에서 왕위에 올랐으며, 헨리는 가족들과 함께 스코틀랜드로 도망갔다. 피신했던 에드워드 4세가 돌아와 워릭 백작 리처드 네빌을 죽이고 왕비 마거릿의 군대를 전멸시켰으며, 헨리 6세는 얼마 후 런던 탑에서 살해됐는데 헨리 6세와 에드워드 4세 관게는 복잡하여 에드워드 4세에서 좀더 자세히 설명한다.
투쟁으로 10만 정도의 귀족들이 자멸하여 절반으로 줄어들게 되었다. 학자, 큰 땅을 가진 부농들로 이들은 자기 노력으로 되었다. 속하는 사람을 젠틀맨(Gentleman)이라고 했으며, 평민도 노력하면 출세 할 길이 열리게 되었다. 왕도 세력 있는 귀족을 두려워하여 젠틀맨이나 요맨에게 관직을 주었고, 이것이 프랑스처럼 피 흘리지 않고도 민주주의를 이룩할 수 있었는데 문장 이름에서 유래한 것이 장미전쟁이다. 문장은 귀족들이 자기가계의 표현으로 대문이나 상징되는 곳에 조각이나 그림으로 표현한 것을 말하며, 장미 외에도 바이올린이나 인장 또는 꽃 등을 표현하였는데 목이 짤 린 동상들이 있다. 이것들은 대개는 문장으로 받침으로 사용하였는데 이사갈 때에 두상만 가지고가서 동상 위에 두상만 올려 놓으면 되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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딸로 워릭 백작과는 이종 4촌이었고, 그는 워릭 백작의 도움으로 왕위에 올랐다. 많은 동료를 얻게되자 막강한 권력을 가진 위릭 백작에게서 독립하려고 하였고, 1464년 위릭이 프랑스 공주와 결혼시키려고 했으나 젊은 미망인 엘리자베스와 몰래 결혼하여 워릭 백작 및 요크가 귀족들의 분노를 샀다. 프랑스로 도망갔으며, 1470년 위릭은 프랑스 루이 11세와 손잡고 영국으로 쳐들어 왔다. 되찾고 위릭을 죽었으며, 왕비 마거릿의 군대를 전멸시켜 다시 왕위를 찾아 요크 왕조를 열게 되었다. 3세(1484-1485)로 즉위했으며, 이 때 대륙에 망명했던 랭커스터가의 리치먼드 백작(헨리튜더)이 웨일스에 상륙하여 리처드 3세를 죽이고, 30년 동안의 장미전쟁을 끝냈다. 화해 하기 위해 요크가의 엘리자베스와 결혼하여 튜터왕조를 열었다. 왕실의 휘장이 되었으며, 의회는 귀족이 모두 죽어 100년 동안 아무 힘도 발휘하지 못하였다. <1486년 헨리 7세와 결혼한 엘리자베스가 '튜더 장미'를 들고 있고, 우측은 튜터 장미이다.>
프랑스 지배하에 있는 네덜란드의 플랑드르(플란더스)는 견직물이 발달해 많은 이익금이 양모를 수출하고 견직물을 수입하는 영국으로 들어갔는데 이것을 탐낸 프랑스는 중과세를 하였다. 이것이 네덜란드와 영국의 불만을 가지게 되었고, 네덜란드는 영국의 침략을 부추겼으며, 정치적으로는 샤를4세가 죽고 후계자가 없어 필립6세가 3부회에서 왕으로 추대하였다. 이것을 영국왕 에드워드3세는 그의 모친이 샤를4세의 누이라는 명목으로 자신이 후계자라고 주장하면서 기회로 프랑스는 '기엔'지방의 몰수를 선언하였으며, 이것이 실제적 전쟁의 원인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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함락했으나 *페스트의 만연으로 전쟁은 잠시 중단되었다가 1355년에 흑태자가 남프랑스를 공격하였다. 위험한 무기라고 금했으나 영국 보병은 석궁을 사용했다. 석궁은 일반화살이 뚫을 수 없는 갑옷을 뚫을 수 있었고, 거리도 활보다 2-3배나 길었으며, 석궁 앞에 프랑스 기사들이 맥을 못쓰고 패하여 국왕 존(장)2세는 포로로 잡혔다. 주었으며, 네덜란드의 부르고뉴 공국이 영국을 도왔다. 세운 조각물을 만나게 되는데 페스트를 흑사병이라고 한다. 그 이유는 이 병에 걸리는 사람이 검게되어 죽게 되는데서 연유하며, 페스트는 쥐에서 사는 벼룩에 의하여 전염되는 병으로 쥐와 사람이 함께 걸리는 병인데 공기나 환자에 의해 전염됨으로 법전염병이다. 이 병에 걸리면 격리시키게 되며, 쥐가 페스트로 감소하면 쥐벼룩이 갈 곳이 없어 인간을 공격하기 때문에 인간에게 전염되는데 유럽 인구의 1/3인 2,500만 명 정도가 흑사병으로 사망했다고 한다. 수그려 들었다고 하며, 학교는 페스트를 예방하기 위해 조회시간에 단체로 흡연하기도 하였다. 명이 죽었고, 중국과 남 아시아 내륙에서 유래한 흑사병은 1347년 몽골의 킵차크 군대가 크림의 한 성을 포위하고 페스트 환자 시체들을 도시를 향해 쏘아보낸 것이 세계 최초의 세균전쟁이다. 등의 지역 전염병이 무역으로 전세계에 퍼지는 결과를 가져왔다. 속죄양으로 유대인을 대량 학살하였고, 그 수가 5천명이 넘었다고 한다.
보는 학자도 있으며, 페스트를 주제로 한 소설이 나왔는데 그 중 2개만 소개한다. 1349-51년 이탈리아 작가 조반니 보카치오가 쓴 10일간 이야기란 뜻인 '데카메론'으로 피렌체의 세 청년과 일곱 숙녀가 페스트 병을 피해 교외 별장에 있으면서 10일에 걸쳐 순번대로 익살, 외설, 비극 등 다양한 이야기 100개를 수록한 것으로 등장인물은 왕후, 귀족, 악한, 가난뱅이까지 모든 계층을 망라되었다. 페스트가 만연했다는 가정 하에 페스트가 상징한 악과 억압에 대해 집단적으로 반항을 하면 인간 사이의 진정한 연대가 이룩되어 행복을 얻는다는 것을 말하였다.
잃었던 영토의 대부분을 되찾았고, 1375-1399년까지는 양국 사정으로 전쟁이 없었으나 영국의 헨리4세가 즉위하면서 전쟁을 재개하였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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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악했으며, 샤를 6세는 자신의 아들 샤를 7세를 사생아라고 여겨 왕위계승을 반대하였다. 인정받았고, 1422년 영국의 헨리 5세와 프랑스의 샤를 6세가 연이어 죽었다. 10개월 된 아기가 영국과 프랑스의 2왕국의 국왕이 되었는데 이 사람이 헨리6세이며, 따라서 샤를 6세의 아들 샤를7세도 프랑스왕위를 올랐다고 선언하여 프랑스는 2왕이 존재하게 되었다. 적은 수의 군사로 영국군을 격파하였는데 그는 항상 선두에 서서 영국군을 무찔렀다. 체포되어 영국으로 넘겨져 마녀재판을 받고 다음해 화형 당하였다. 군대를 동원하여 프랑스내의 영국영토를 공격하여 칼레만 남기고 모두 점령하였다. 프랑스 승리의 원인은 영국이 지배하는 동안 가혹한 지배와 약탈를 했다. 이로서 시민과 농민이 영국에 대하여 분노의 감정이 고조되었기 때문이며, 또 프랑스의 국왕 군대가 보병과 포병을 강화 한 것도 승리의 원인이 되었다. 영국 왕 헨리 5세는 샤를 6세가 죽으면 프랑스 왕위를 물려받게 되어 있었다. 헨리 5세가 죽어도 그의 아들이 프랑스 왕위를 받게 되어 있어 샤를7세 황태자는 프랑스 왕위 계승에서 제외 된 이유는 그의 어머니 이사보가 바람 둥이어서 사생아라고 단정하여 샤를6세가 왕위 계승을 반대했다. 잔다르크는 샤를 6세와 오레이트 사이에 태어난 것으로 추측된다. 선두에 흰 옷과 흰 갑옷을 입은 그녀를 보기만 하여도 영국군은 도망을 하였다고 한다. 영국군의 포로가 되게 하였으며, 그녀가 포로가 되어도 누구하나 구출하려는 자가 없었다. 고문 받을 때도 얼굴빛하나 변하지 않았다고 한다. 샤를7세는 그녀의 명예를 회복하여 주었으며, 1920년 천주교에서 성녀로 시성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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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작되었고, 대대적인 마녀사냥은 1484년 교황 이노센트 8세의 교서로부터 시작됐다. 불능으로 만들어 아내를 불임하게 하여 재난과 고통의 원인이 되고 있다. 명한다'는 교서로 300년 동안 마녀로 처벌된 사람은 30만 내지 수백만이라고 주장하는 학자도 있다. 영주, 주교, 심판관이 나누어 가졌기에 그들은 재산증식을 위해 마녀사냥에 혈안이 될 수밖에 없었다. 뒤지고 고문하면서 사디즘을 즐겼으며, 마녀의 대상자는 남다른 특성을 가진 사회적 이탈자이다. 미인, 추녀, 과부, 못된 성품, 신체적 결함, 병을 잘 고치거나 뛰어난 재주를 가진 자르 대상자로 삼았고, 마녀는 기독신앙을 버리고 악마와 교접하고 악마의 마력을 행사하며, 마녀 집회에 참석하는 자를 마녀로 정의 했다. 자백이나 감별 법으로 마녀를 만들었으며, 고문은 지독하여 강제로 허위자백을 만들어 내었다. 감별 법은 너무 많은데 예로 바늘로 찔러 피가 나지 않으면 마녀인데, 바늘은 뒤로 밀리는 바늘을 사용하여 모두가 마녀가 되었으며, 12-17세기에 행해지고, 합리주의와 휴머니즘시대인 16-17세기 절정에 달한 것을 아이러니(반대 현상)하다고 하며, 마녀사냥은 소도시나 시골에서 많이 일어났다고 한다. 대도시는 문예부흥으로 구질서가 무너지고 새질서가 형성됐으나 소도시나 시골은 구질서(교황통치)을 지키기 위한 발악으로 마녀사냥이라는 폭력을 자행하여 유지하려고 하였다. 마녀는 교수형에 처하고 시체는 불태웠다.
내전으로 봉건귀족이 몰락하였는데 이것은 양국 국왕권력이 신장하였다. 중앙집권제를 추진하여 다음왕조의 절대왕권을 이루는 기초가 되었고, 영국은 대륙의 영토를 상실하여 대륙의 복잡한 문제에 휩쓸 이지 않게 되어 독자적 국가를 형성하였다. 발전되어 영국이 후에 세계적인 견직물 수출국이 되는 기초가 되었다. 프랑스어만 사용한 것이 300년 동안 영국 귀족들은 언어이었으나 반프랑스 감정이 고조되었다. 1339년 헨리4세가 영어를 부활시켰고, 영국 귀족은 프랑스 대학에 유학하였으나 전쟁 중에 대학생을 철수시켜 옥스퍼드(oxford)에 대학을 유치하여 지금과 같은 학술 도시가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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봉건제도 대 제후아래 소 제후가 있으며, 소 제후는 기사들이 받들고 있었다. 해도 제후의 모임에 불과하여 제후의 다툼으로 질서의 유지가 어려웠다. 등의 일을 하고 세금을 영주나 교회에 받쳤고, 농민은 이직이나 다른 곳으로 이사, 농토의 소유도 허락되지 않아 이를 농민노예라고 하는데 다만 노예만큼 학대받지는 않았다. 포함되며 이상적이 규범으로 환영받는 기사도가 생겼고,지혜와 인자한마음, 두터운 신앙, 여성과 노약자를 돕고, 용기와 무술의 찬양을 덕목으로 여기며, 일정한 수양과 엄숙한 의식을 거쳐야했다. 기사 옷을 입으면 왕과 군중의 축복을 받고 무예를 보여주었다. 혈투여서 목숨을 잃기도 하였으며, 승자에게는 잔치와 명예로운 자리가 마련되었다. 숭배할 여인을 골라 여인에게 선택되면 여인으로부터 선물을 받고 그의 남편이 되었다. 여인을 걸고 시합에 이기면 부인을 하사 받기도 하였으며, 십자군기사단과 독일기사단이 유명하였다. 기사도와 공통점이 많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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더 불안했는데 독일의 기사 도적 떼가 유명하여 라인강을 따라 상선이나 가축을 약탈하였다. 30~50Kg로 줄었다고 하지만 갑옷이 체중에 비해서 부담이 켰다고 한다. 갑옷 형태로 인해 호흡까지 제약을 받았다고 하며, 혼자 입을 수도 없고 혼자 말을 탈수도 없었으며, 목과 가랑이가 가장 취약했는데 학자들은 백년 전쟁 중 유명한 1415년 '아쟁쿠르 전투'에서 프랑스는 수적으로 압도했고, 갑옷으로 중무장 했으나 기동성이 뛰어난 영국군을 이길 수 없었다고 하였다. 그리고 한번 낙마하면 일어나지 못하였고, 포로가 되어도 수치가 아니었으며, 포로는 몸값 때문에 죽이지도 않았다고 하는데 프랑스 존(장)2세(1350-1364)의 몸값은 300만 크라운이었다고 한다. 이것을 마련하기 위해 롬바르드 여왕과 결혼하여도 턱없이 부족해ㅔ 다시 영국으로가 포로생활을 했는데, 그는 국왕의 대접을 받고, 호화로운 생활로 생을 마쳤다고 한다.
한 것에서 유래하며, 성안에 사는 사람은 귀족, 부호상인, 은행가 등으로 이들을 부르조아 계급이라고 한다. 착취하는 악질 원수로 취급했으며, 부르조아는 봉건사회경제체제를 붕괴시킨 자본주의 경제체제를 말한다. 등으로 그들이 프롤레타리아의 혁명이 들어와 실패하였다. 칼 마르크스가 처음 사용하였고, 자본주의 사회에서 노동력밖에 없는 사람을 말한다. 3원칙은 생산, 분배, 소비이며, 생산의 3원칙은 자본, 물자(토지), 노동이다. 노동력(근로자)을 착취하여 소비자(근로자)가 빈곤하여 소비가 일어나지 못하므로 결국에는 망한다는 이론을 주장 하여 공동생산, 공동분배, 공동소비를 주장 한 것이 공산주의 이론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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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중세의 문명과 항로 개척 건축은 장중하고 엄숙한 로마네크 방식이 발달하였고, 후에 날카로운 고딕식(쾰른 성당, 노트르담 사원)이 나타났으며, 12-13세기에 걸쳐 '원탁의 기사'와 같은 기사들의 이야기가 소설화하였다. 원동력이 되었고 1440년 구텐베르크의 인쇄술이 발명되어 대량으로 책이 나오게 되었다. 발견했으며, 1498년 포르투갈의 바스코다가마는 희망 봉을 돌아 인도항로를 개척하여 도착했다. 지리를 발견한 것을 말하지만 이것은 항해사에서 3차 대(大) 항해사에 해당 할 뿐이다. 지나 양자강 하구의 양주에 이르러 그곳에 거류지가 형성되면서 한반도의 신라와도 교류가 이루어졌다. 다닌 배가 '다우'선(船)으로 이를 '다우 교역권'이고, 이들이 아프리카 동해안, 인도까지 무역을 했다. 이들 중 도자기 무역으로 중국으로 향하다가 풍랑을 만나 길을 잘 못 들거나 파선하여 말레이시아, 인도네시아, 필리핀의 민다나오 섬 등에 상륙하여 회교를 전파하게된 동기가 되었다. 함대가 인도양에 진출한 것은 바스코 다 가마가 인도양에 도달한 것보다 80-90년 앞섰다. <정크(junk)선, 중국에서 독자적으로 발달한 정범선, 돛에 대나무의 살을 넣어 돛을 펴는 것이 특징이다.>
'동방견문록'은 마르크 폴로(1254-1324)가 1271-1295년 동방을 여행한 체험담을 루스티첼로가 기록한 여행기로 마르코 폴로는 아버지 니콜로 폴로, 삼촌 마테오 폴로와 함께 서아시아와 중앙아시아를 거쳐 원나라에 이르러 쿠빌라이에게 알현하고 벼슬자리를 얻어 17년간 중국각지를 여행하였다. 도착하였고, 1295년 귀국하여 제노바의 전쟁에 참가하였다가 포로가 되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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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98-99년 제노바 감옥에서 루스티첼로에게 구술하여 필기하게 한 것이 '동방견문록'이며, 조금과장 되기도 했지만 정확하였고, 유럽인이 신기하여 믿지 않았으나 많은 사람이 아시아를 여행함으로 증명되었다. 서아시아, 중앙아시아, 중국, 남해에 관한 기사가 풍부하고 정확하여 역사적 가치가 크다. 스페인어 콜론(Colon)이며, 탐험가이자 항해자이다. 포르투갈의 주앙 2세에게 권하였으나 허락하지 않아 에스파냐 이사벨 1세를 만났다. 지원을 계속 미루어 실질적인 항해까지 걸린 시간은 6년이나 되었다. Fe) 조약‘을 맺었는데 산타페는 스페인어로 ‘신성한 아버지(Holy Faith)’ 즉 '신성한 믿음'을 뜻한다. 그래서 이 조약을 ‘신성한 조약(계약)’이라고도 부르며, 제 1차 항해는 1492년 8월3일 핀타호와 니냐호 그리고 부유한 선장 핀손이 소유한 산타마리아호와 함께 3척의 배에 120명 승무원이 스페인 세비야의 팔로스 델라프론테라 항구를 출발하여 10월 바하마제도의 쿠바와 아이티에 도착하였다. 가지고 온 금제품이 전 유럽에 대단한 반응 얻어 17척의 대 선단 구성되었다. 콜럼버스의 선전에 따라 1,500명 정도의 많은 인구가 금을 찾아 나섰으나 금의 양이 적어 혈안이 된 항해자들은 원주민을 학대, 살육, 노예화하였으며, 귀항 때 금 대신 노예를 싫고와 문책 당했다. (1502-1504) 항해에는 온두라스와 파나마 해협 발견하였고, 가장 힘든 항해를 하였다. 믿어 아메리카 이름을 아메리고 베스픗치에게 빼앗겼다. 지금의 원주민 명칭이지만 남쪽의 원주민은 '인디오', 북쪽 원주민은 '인디언'으로 구별하여 부른다. 콜럼버스 선원들이 하이티에서 매독을 옮겨와 유럽에 퍼트렸다. 러시아에 옮겨지고, 1505년 인도에서 중국으로 옮겨지게 되었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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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 있으며, 세계 최초의 대학은 이탈리아의 볼로냐 대학(법률-로마법의 연구)이다. 옥스퍼드(1167), 켐임브리지(1209) 대학은 귀족들의 자제에게 신사도를 가르쳤고, 근대 대학은 베를린대학 (1810)이 효시라고 하며, 서구 대학은 대학 이름보다는 어느 교수의 문하생인가를 더 알아준다고 한다. 수가 늘어나면 큰 건물을 빌려 하게 되었으며, 유명한 교수들이 학생들의 교통의 편리를 위해 가까운 곳에 서로 모이게 된 것이 종합대학의 성격을 띄게 되었다고 한다. 학생들이 교수를 채용 감독하고 봉급을 주었기에 모든 권한은 학생조합장이 쥐고 있었다고 한다. 학생들이 학비도 잘 내지 않았다고 하며, 학생조합을 우니베르시타스(Universitas)가 종합대학의 유니버시티 (University)의 어원이고, 교수조합의 콜레지아(Collegia)가 단과대학의 칼리지(College)의 어원이다. 기념하기 위하여 아들의 이름으로 세운 대학이라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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