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자연 개관
삼기면(三箕面)은 본래 金馬面(益山郡)에 속했던 곳이다.
1914년 행적구역 개편에 따라 서두리(西豆里-前 栗村面), 간촌리(間村里-前 巳梯面(龍梯面)), 용연리(龍淵里-前 巳梯面(龍梯面)), 기산리(箕山里-前 九文川面), 오룡리(五龍里-前 九文川面), 연동리(蓮洞里-前 九文川面) 등 6개 리로 구성되었다. 면명(面名)은 주산(主山)인 삼기산(三箕山)에서 취해진 것이다.
지금도 삼기면은 이상의 6개 리로 구성된다.
현재 삼기면의 행정구역은 6개 리(里), 27개 분리(分里), 42개 반(班)으로 조직되어 있다. 면적은 23.03㎢(익산시의 4.6%), 인구는 4,516명(남-2,289명, 여-2,227명), 가구 수는 1,296세대인데 그 중 농가(農家)가 842세대, 비농가(非農家)가 454세대이다.
검지마을은 오룡리에 속한다. 오룡리(五龍里)는 1916년에 오룡리, 구정리(九政里), 제내리(堤內里), 검지리(檢知里), 옥실리(玉實里)의 전 지역과 사오랑리(沙五郞里), 사제면(巳梯面)의 원촌리(院村里) 각 일부로 구성되었다. 리명(里名)은 풍수설에 오룡쟁주형(五龍爭珠形)이라 하여 취해졌다 한다. 1972년에는 검지와 옥실을 합쳐 하나의 분리(分里)가 되었다.
현지 조사에서 검지마을 주민들은 오룡리가 제네, 도마, 검지, 옥실, 구정, 사오랑 등 6개 자연 마을로 구성된다고 했다.
그런데 사실은 오룡리의 자연 마을 구성에 관한 앞의『익산군지』내용과 검지 마을 현지민들의 제보에는 조금씩 오류가 발견되었다. 확인 결과, 현재 오룡리는 검지, 옥실, 도마, 구정, 사오랑 등 다섯 개의 자연 마을로 구성되어 있었다. 결국 다섯 개의 자연 마을이 오룡(五龍)을 이루고 있는 것이다.
검지(檢池, 檢知)의 부분명은 제내(堤內), 북간도, 서당터로 나뉜다. 제내는 방죽의 안쪽 마을이므로 일컫는 명칭이며, 북간도는 북향(北向)한 마을로 '북간도(北間道)와 같이 춥다'하여 생긴 이름이다. 서당터는 서당이 있던 자리이기 때문에 생긴 이름이다. 검지마을은 세 동네로 이루어지기 때문에 '삼동(三洞)마을' 혹은 '삼 동네'라고도 부른다.
현재 검지마을의 가구수는 64세대, 인구수는 243명이다. 남자가 114명, 여자는 129명이다.
검지마을은 논농사, 그리고 밭작물로 고구마를 많이 재배한다. 그 밖에 깨, 땅콩, 고추도 조금씩 재배한다. 전국적으로 황등의 밤고구마가 유명하나 사실은 삼기, 그 중에서도 검지의 고구마를 으뜸으로 쳤다. 야트막한 구릉이 많고 황토땅이었던 검지마을의 야산은 고구마 재배의 적지였다. 이곳에서 빨간 밤고구마가 많이 생산되었다. 교통이 발달하지 못했을 때 우마차로 운반하여 황등역을 통해 전국 각지로 고구마가 유통되었기 때문에 황등 고구마라는 이름이 널리 알려졌다고 한다.
원래 이 일대는 논바닥에서 생수가 솟는 수렁논이 대부분이었다. 지금으로부터 20여년전 농업용수 공급을 위한 관개수로 개통으로 금강물을 끌어오기 전까지는 수렁논이 상답(上畓)으로 대접을 받았다. 하늘에서 내리는 비에만 의존할 수밖에 없었던 천수답(天水畓) 일색이었던 사정을 생각하면 당연한 일이었다. 수렁논은 항상 물이 차 올라 관리하기도 힘들고 일하기도 불편하다. 따라서 이제는 수렁논이 계답(階畓)보다 대접을 못 받는다고 한다.
2. 전라북도 무형문화재 제1호 익산목발노래와 기능보유자 박갑근
1973년 6월 30일 전라북도는 '익산목발노래'를 전라북도 무형문화재 제1호로 지정하고, 1984년 9월 20일에는 박갑근(朴甲根, 남, 1923.3.7생, 당75세. 益山市 三箕面 五龍里 498번지)을 전라북도 무형문화재 제1호 익산목발노래의 보유자로 인정, 동년 9월 20일에 그 인정서를 교부했다. 그러나 박갑근의 실제 나이는 올해(1997년) 76세이다. 1922년 10월 5일(음력)에 전라북도 익산시 삼기면 오룡리 검지마을 498번지에서 부친 박해명(朴海明)과 모친 양해인(梁海仁) 사이의 3남 중 장남으로 태어 났다. 호적에는 실제 나이보다 일년 늦게 등재되었다. 박갑근은 슬하에 4남 1녀를 두었고, 이 중 여식(女息)은 출가(出嫁) 후에 사망하였다.
검지마을은 원래 남양 홍씨(南陽 洪氏), 기계 유씨(杞溪 兪氏)가 마을의 터를 닦았으나, 이씨(李氏)와 박씨(朴氏)가 그 뒤를 이어 들어와 지금까지도 이(李)·박(朴) 두 성씨에 의한 집성촌을 이루고 있다. 박갑근의 가계는 박갑근의 12대조 할아버지가 이 마을에 들어 온 이후 지금까지 마을을 지키고 있는 것이다.
박갑근의 부친은 유학자였는데 시조를 잘 불렀다. 부친의 영향으로 박갑근도 어렸을 때부터 시조를 잘 불렀다. 어렸을 때부터 "검지의 박갑근이가 시조를 잘한다"는 얘기가 인근에 퍼져 종종 어른들 앞에서 시조를 불러 칭찬을 듣곤 했다. 박갑근은 어렸을 때부터 천성적으로 음율에 밝고 소리를 좋아했다. 그러나 완고한 유학자였던 부친은 아들에게 들노래나 풍장은 막일꾼들이나 하는 것이라며 그 근처에 얼씬도 못하게 했다.
그런 중에서도 동네 정자나무 밑이나 어른들의 사랑방에서 들려 오던 단가나 토막 소리가 좋아 몰래 따라 부르곤 했다. 부친이 작고한 후 1970년 박갑근은 49세라는 나이가 되어서야 비로소 어렸을 때부터 부르고 싶던 소리에 흠뻑 빠질 수 있게 되었다. 박갑근의 부친이 운영하던 서당에서 동문수학했던 고 이강오교수(전 전북대교수, 전 전북향토문화연구회장)가 적극적으로 권유했다.
3. 익산목발노래와 삼기농요의 유래
농요를 발굴하던 박갑근은 이것을 체계적으로 보존하고 계승시키기 위해 1971년과 1972년에 두 개의 율계(律契)를 차례로 조직한다. 익산민속예술농요회(회장:박갑근, 부회장:이병렬)와 익산목발노래회(회장:박갑근, 부회장:최석희)가 그것이다.
이들 율계에는 삼기면, 금마면, 낭산면, 함열읍 등 4개 읍면에 사는 30여명의 회원들이 참가했다. 물론 검지마을 사람이 반 넘게 차지했다. 박갑근은 낮에는 농요를 발굴하고 저녁에는 그것을 회원들에게 지도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1974년에는 익산부녀민요단을 출범시켰다.
박갑근은 1970년 당시 전주에서 열렸던 제12회 전국민속예술경연대회에 '익산농요'로 출전, 전라북도지사상을 수상했다. 1972년에는 대전에서 열렸던 제13회 전국민속예술경연대회에 '익산목발노래'로 출전, 문화공보부장관상을 수상했다. 1977년에는 제18회 전국민속예술경연대회에 '익산삼기농요'로 출전, 국무총리상을 수상했다.
1975년 사회단체로 등록한 익산농요회는 1983년 군비의 지원 등에 힘입어 검지마을에 익산농요회 전수회관(대지 370평, 건평 25평)을 짓고, 이듬해인 1984년 9월 20일 박갑근은 전라북도 무형문화재 제1호 익산목발노래 기능보유자(속칭 인간문화재)로 인정된 것이다. 1986년 8월에는 박갑근이 지도한 김제농고 민속반이 제15년차 한국 영농학생전진대회에서 최우수상을 수상하기도 했다. 1988년에는 전수회관 마당에 「益山農謠·목발노래 會 建立紀功碑」를 세웠다. 기공비의 전면에는 郡守 金鳳先 외에 29명의 지방 유지와 독지가 명단이 새겨져 있고, 후면에는 회장 박갑근 외에 33명의 회원 명록(名錄)이 새겨져 있다. 또한 1997년 11월 24일에는 익산시 북부에 위치한 성당면, 웅포면, 함라면, 함열읍, 낭산면의 젊은이들이 힘을 모아 익산시 성당면 회성리에 익산목발노래·농요 성당면 전수회관을 건립하였다.
"일을 허는데 다 한계가 있어. 열 명이면 '너그가 하루 이 놈을 해라' 하는 한계가 있거든. 그러믄 그날 해 내야 혀, 죄다. 그러면 부지런히 서둘러서 해 놓고, 쪼그만치 냉겨 놓고 서서 흥청거리는 것이지. 그때는 노는 거여. 만날 먹고 일만 허닝게, 무슨 취미가 있고 엇따가 의지할 데가 있어? 근게 지금 말로, 그 스트레스를 그저 노래로 가서 푸는 것이여" (1997. 3. 15. 박갑근)
4. 조사 방법과 조사 과정
"그 전에는 이 노래를 부르게 돼 있어. 농사짓는 사람들이 일을 허면 그 일허는 과정마다 이 노래를 부르거든. 아, 이제는 세상이 발달되서 좋은 세상이 돌아온 게, 이것을 부를 데가 없어. 노는 디 가서 해당토 않고. 천상, 모심는 노래는 모심어 감서 불러야 이유가 있지. 어디가 논인 줄 알고 모심는 노래해야 어울리지도 않고" (1997. 3. 15일. 박갑근)
금번 조사에서 중점을 둔 사항은 노동과 그에 해당하는 시기를 일치시켜 조사해보자는 것이었다. 이에 따라 조사에만 꼬박 1년이 소요되었다. 절기와 한해 농사의 진행에 따라 불리는 소리를 해당 시기에 채집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그 결과, 노동과 일의 실체 그리고 그것과 소리의 연관성을 훨씬 생생하게 파악할 수 있었다. 또한 이미 조사한 사안일지라도 다른 조사가 거듭되는 동안 더 명료해지기도 하고 다른 사안과의 관련성이 보다 선명히 드러나기도 했다.
검지마을의 농요는 여타의 전라도 평야 지역과 마찬가지로 온 마을 주민들이 합심하고 단결하지 않으면 불가능한 공동 노작 형태에서 발생한 산물이다. 조사가 진행되던 일년 동안, 절기에 따라 농사짓는 것을 예전 방식 그대로 재현하면서 박갑근과 마을 사람들은 끈끈한 이웃애가 더욱 되살아나는 듯 했다. 이것은 이번 조사에서 얻은 부수적인 소득이었다.
조사 방법은 목발노래, 농요는 물론이고 부녀요까지 모든 대상과 전 과정이 비디오 촬영, 오디오 녹음, 그리고 사진 촬영을 병행하는 방식으로 진행되었다.
이제 그 동안의 주요한 조사 과정을 정리하면 다음과 같다.
가. 제1차 조사 : 1997. 3. 15, 익산농요회관. 농요·부녀요
나. 제2차 조사 : 1997. 4. 29, 미륵산 산록. 지게목발노래 전 과정(새타령, 육자백이
자진육자백이, 흥타령, 등짐노래, 목발노래(콩꺾자), 작대기타령, 둥당게타령(꿩타령),
상사소리)
다. 제3차 조사 : 1997. 5. 15, 검지마을 제내 앞 논. 논파기 작업(1,2차)
라. 제4차 조사 : 1997. 6. 9, 검지마을 독도리 방죽 근처에 있는 이승식의 논. 모심기 작업
마. 제5차 조사 : 1997. 8. 2, 검지마을 앞 방죽 밑의 진용섭의 논. 김매기(진방아타령,
자진방아타령, 만물산야) 전 과정
바. 제6차 조사 : 1997. 9. 6, 익산농요회관. 부녀요 연행 전 과정
사. 제7차 조사 ; 1997. 10. 23, 오룡리 도마마을 푸다리(草橋) 이수만의 논. 벼베기 작업
아. 제8차 조사 : 1997. 11. 11, 푸다리 이수만의 논·익산농요회관. 등짐, 타작, 방아찧기,
질꼬냉이 전 과정
자. 제1차 보충조사 : 1998. 1. 14, 익산농요회관. 자료 정리, 향후 일정 협의
차. 제2차 보충조사 : 1998. 1. 3, 도립국악원 연구단. 검지마을 유래 등 대담
카. 제3차 보충조사 : 1998. 2. 2, 도립국악원 연구단. 익산목발노래, 농요, 부녀요 발굴 경위 및
제보자 파악
타. 제4차 보충조사 : 1998. 2. 8, 익산농요회관. 노래 재녹음(지게목발노래 전곡, 부녀요 전곡,
질꼬냉이)
이때 가창했던 창자들의 명단은 다음과 같다.
박갑근(76세, 전라북도 무형문화재 제1호 익산목발노래 기능보유자)
남궁홍(66세, 삼기농요보존회 회장)
남궁전(74세, 삼기농요보존회 부회장)
이완식(72세, 삼기농요보존회 회원)
박노천(70세, 삼기농요보존회 회원)
오재곤(68세, 삼기농요보존회 회원)
진용섭(60세, 삼기농요보존회 회원)
조남악(60세, 삼기농요보존회 회원)
이후, 남궁홍은 1997년 4. 19일(화) 미륵 산록에서의 목발노래 조사와 촬영 이후 실시된 총회에서 사의를 표명하였다. 현재는 박갑근이 익산농요회장을 맡고 있다.
5. 검지의 전통농경과 농요
예나 지금이나 농사일은 절기(節氣)와 밀접하다. 이미 기계화영농이 정착되었다지만 경작시기는 아직도 철저하게 절기에 준해서 결정한다. 그 만큼 절기와 농사일과는 불가분의 관계에 놓여 있음을 말한다.
현재 민요연구에 있어서 가장 심각한 문제는 민요전승 자체의 기반이 이미 붕괴되었다는 점이다. 즉 전통적인 농경방식에서 생성되고 전승되던 민요가 이제는 기계화 영농방식이 도입되면서 그 기반이 달라지게 되고, 결과적으로 민요의 존립기반이 상실되고 말았다.
따라서 본고에서는 민요를 보다 더 총체적이고 통합적으로 이해하기 위한 방법으로 전통시대의 농경방식이 어느 절기에 어떤 관행과 농법으로 시행되었는지를 살펴봄으로써 전통농경사회의 노동과 삶, 그리고 풍속을 이해하고자 한다.
뿐만아니라 그 분야에 대한 조사가 궁극적으로는 민요의 본질을 좀더 충실하게 파악할 수 있는 수단이 아닐까 생각한다.
진정한 민요학의 수립은 민요의 민속적 기반을 검토해야 가능하다고 생각하며, 따라서 민요를 둘러싸고 있는 현장과, 역사적 층위, 사회적 기반들을 검토함으로써 민요에 대한 포괄적 이해를 꾀하고자 한다.
본고에 기술된 내용은 마을 주민들과의 면담을 통해서 그들이 기억하고 구술한 그대로를 충실히 기록한다는 차원에서 재구성하였을 뿐이다. 면담한 주민들의 평균 연령이 70세가량이므로, '옛날' 또는 '과거'라고 표현하는 주민들의 진술내용은 시기적으로 대개 1940년대 전후, 즉 일제 말기의 농경관행이 아닌가 한다.
기나긴 겨울이 지나고 삼사월이 돌아오면 들판의 아지랑이처럼 힘도 뻗쳐 오른다. 바야흐로 일년 농사가 시작되는 철이다.
본격적인 일년 농사의 시작은 논갈이부터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논갈이를 시작하기 전에 일년 농사의 풍흉을 좌우할 거름주기를 잊지 않는다. 거름은 화학비료가 없거나, 또는 귀하던 시절이라 인분이나 재, 퇴비, 가축 배설물, 생풀 등으로 만든다. 논갈이 직전에 거름을 뿌려 놓으면 모심을 무렵에 맞추어 적당히 썩는다.
한편 겨울을 지내는 동안 논두렁은 얼었다 녹았다 하기를 반복하면서 부실해지고 곳곳이 허물어지기도 한다. 특히 검지마을의 '고라실' 천수답은 계단식이라서 논두렁이 축대처럼 높다. 그렇기 때문에 온갖 들짐승들이 구멍을 뚫어놓기 일쑤다. 그런 상태에서 논에 물가두기를 한다는 것은 밑빠진 독에 물붓기와 마찬가지이다. 따라서 물이 유실되지 않도록 논두렁과 축대를 정비해야 하는데 이것을 '바리떼 붙이기'라고 한다. 이를테면 논두렁 복구공사인 셈이다.
논갈이는 축력을 이용해서 쟁기로 하는 경우가 보통이다. 그러나 검지마을은 수렁논(현지에서는 '수랑논'이라고 부른다)이 대부분이라서 도저히 생기를 사용하지 못하고 쇠스랑으로 직접 논파기를 해야만 했다.
검지마을의 논은 대부분이 수렁논이다. 수렁논이란 생수가 끊임없이 땅 위로 솟아나 논의 일부가 항상 물에 잠겨있는 논을 말한다. 주민들에 의하면 검지마을이 왼쪽으로는 미륵산 오른쪽으로는 함라산을 사이에 둔 계곡에 자리하고 있는, 이른바 '고라실'이라서 수렁이 많다고 한다. 수렁논도 그 정도에 따라서 다양하다. 생수가 솟아나는 구멍이 하나면 '외다리수렁'이라고 하며, 구멍이 여럿이면 '뻘수렁'이라고 한다. 또한 생수 구멍도 많을 뿐더러 유출된 지하수의 양도 많아서 마치 늪처럼 넓고 깊게 괴어있는 수렁을 '마당수렁'이라고 한다. 넓은 곳은 논 전체의 반을 차지하기도 하고, 심한 곳은 어른의 허리 깊이까지 빠지기도 한다.
그런데 문제는 수렁논은 이렇듯 논의 일부가 항상 물에 잠겨 있어서 쟁기로 논갈이를 할 수 없다는 데에 있다. 특히 당시에는 소가 귀했을 뿐만아니라 소 주인의 입장에서도 소가 지친다는 이유로 논갈이를 기피하기 일쑤였다. 특히 영리한 소는 수렁이 있는 곳을 미리 알고서 그곳을 피해다니기 때문에 쟁기질을 제대로 할 수가 없다. 따라서 쇠스랑을 이용하여 직접 사람이 파는 방법 외에는 도리가 없다.
논파기용 쇠스랑은 일반적인 쇠스랑과는 그 모양과 크기가 다르다. 발이 세 개라는 숫자는 같지만 날의 길이가 약 45㎝가 될 정도로 길며 날의 폭도 보통의 것보다 훨씬 넓다.
논파기는 두 번에 걸쳐 시행하는데 첫 번째 논파기를 '아시파기'라고 하며, 두 번째 논파기를 '두벌파기'라고 한다.
아시파기는 곡우 전으로 대개 4월 하순에서 5월 초순 사이에 행해진다. 주민들의 표현에 의하면 "땅은 4월이 넘어가면 되살아난다"고 한다. 즉 "겨울이 막 지나면 땅이 버근버근"한 반면에 "4월이 지나면서 부터는 땅이 가라앉아서" 단단하게 다져진다는 것이다. 땅이 다져지면 땅파기가 힘들어지기 때문에 "땅을 죽일때는 죽여야 되는 것"이라고 한다.
초봄에 땅이 녹아서 해동이 되면 논에 거름을 뿌린다. 그런 후에 어느 정도 물을 확보하여 논을 파기 시작한다. 논파기는 논에 물이 "짜작짜작허니" 있어야 한다. 그래야 쇠스랑에 흙이 달라붙지 않을 뿐더러 흙덩이를 들어 올리는 순간 그 밑의 빈 공간으로 물이 채워져서 힘이 한결 덜 든다. 수렁논은 물코만 막아 놓으면 어느 정도의 물은 항상 확보할 수가 있다.
아시파기는 여럿이 함께 작업하지만 일 자체는 상호간의 호흡에 신경쓰지 않고 각자 알아서 해나간다. 즉 각자 형편대로 위치해서 깊은 수렁에서부터 마치 쟁기가 골을 파 넘기듯이 줄줄이 파 넘기는 것이다. 아시파기는 일 자체가 매우 힘들어서 <논파는 소리>를 부를 겨를이 없다.
두벌파기는 아시파고 한달 쯤 후인 5월 하순이나 6월 초순, 즉 모심기 직전에 한다. 두벌파는 방법은 초벌 때 파서 밭두렁 처럼 쌓여진 곳을 다시 파서 뒤집는다. 그러면 초벌 때 파서 뒤집혀 올라간 흙 뿐만아니라 그 밑의 생흙까지 다시 파여 넘어오게 된다. 이때 넘어오는 흙덩이를 좀 과장하면 집채만하다고 한다.
두벌파기는 아시파기와 달리 2인 1조가 되어서 작업을 한다. 두 사람이 나란히 서서 쌍으로 쇠스랑질을 하면 두개의 쇠스랑이 동시에 파 넘기는 흙덩이는 하나인 셈이다. 그렇기 때문에 넘어오는 흙덩이가 클 수밖에 없다.
따라서 두벌파기의 관건은 두사람이 발을 여하이 잘 맞추느냐에 달려있다. 이 대목에서 동작과 호흡의 일치를 꾀하기 위한 박자가 필요하게 됨은 두말할 필요가 없다. 그래서 농요, 즉 노동요가 등장하는 것이다. 노동요는 노동의 동작에 따라 그에 적합한 장단과 사설을 붙여 일의 효율성을 높여 주고, 동시에 노동의 피로를 풀어주는 역할을 한다.
검지마을의 <논파기 노래>는 두벌파기 때 불려진다. 왜냐하면 두벌파기가 아시팔 때 보다 비교적 힘이 덜 들기 때문이다. 반면에 이 과정에서는 두사람의 발 맞추는 것이 생명이다. "이리도 쌍쌍 저리도 쌍쌍 / 쌍쌍으로 잘도나 파세"라고 노래 부르며 바삐 옆걸음치다 보면 때로는 소보다 빨리 갈 정도라고 한다.
검지마을의 농경에서 이렇게 쇠스랑으로 팔 수밖에 없던 시절은 비교적 최근까지 계속되었다. 그러다가 지하에서 솟아나는 유출수의 외부 배출장치가 설치됨과 함께 금강수계를 끌어들여 농업용수를 확보하고, 비교적 최근인 90년 이후에 경지정리사업이 시행되면서 논파는 일이 거의 사라지게 되었다.
그런데 재미있는 것은 당시에는 농사짓기가 몇배나 힘들었던 수렁논이 그래도 상답(上畓)으로 대접 받았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당시는 하늘만 바라보던 천수답 시절인데 다행히 수렁논은 일년 농사의 가장 큰 관건인 물이 항상 유출되어서 적어도 논이 마르는 일은 없기 때문이다. 주민들에 따르면 그래서 "어헤야 상사디야 허면서 논파는 논이 상답이다"는 것이다.
논갈이는 마소(馬牛)와 같은 축력(畜力)과 쟁기를 이용하여 논가는 경우이다. 그런데 논갈이는 '물갈이'와 '태운갈이'를 번갈아 하는 것이 좋다고 한다. 물갈이는 물을 가두어 놓은 채 하는 논갈이를 말하고, 태운갈이는 논을 햇볕에 바싹 말린 후에 하는 건답갈이를 말한다. 그러나 주민들에 의하면 "지금은 논 태울 것도 읎고 썩쿨 것도 읎어, 비료만 넣으면 되닝게"라고 한다.
소와 쟁기를 이용하여 논갈이를 하는 경우에도 '아시갈이'(초벌갈이)와 '두벌갈이'를 한다. 그런데 초벌을 '물갈이'로 하고나서 두벌갈이 할 때가 되었는데도 비가 오지 않아 논이 바싹 말라있으면 사태가 심각해진다.
물갈이 한 상태에서 논이 마르면 "땅이 억셔져서 감이 나쁘고 흙덩이가 워낙 커서 안 넘어가기 때문에" 두벌갈이 때는 소가 힘들어서 못걸어 갈뿐더러 심지어 소 발톱이 다 닳을 정도라고 한다. 사태가 그쯤되면 도리없이 '메갱이'(메)로 덩어리진 흙을 "때려 바숴야 소로 갈 수 있다"고 하는데, 이와 같이 물갈이도 아니고 태운갈이도 아닌 메갱이질을 '짝갈이'라고 한다.
당시에는 거름이 매우 귀했던 시절이다. 그러나 거름이 없다는 핑계로 아무 일도 하지 않을 수는 없는 노릇이다. 지력을 북돋아서 소출증대를 위해서는 하다못해 '논 태우기'라도 하여야 했다. 논 태우기는 흙을 태양에 바짝 말리는 일종의 일광소독이다. 물론 논태우기는 논갈이를 한 이후에 쟁기밥을 햇빛에 말리는 일이다. 따라서 논 태우기는 거의 전적으로 날씨에 달려있다. 심지어 햇볕이 좋은 날이면 수렁의 흙을 소쿠리에 담아서 마른 곳에서 말린 후 다시 그 자리에 붓기도 한다. 그렇게나마 태운 논의 농사가 확실히 잘되었다고 한다. 이때는 흙속에 있던 풀씨들을 새들이 쪼아먹기 때문에 제초의 효과도 부수적으로 따른다.
곡우무렵이면 '씻나락'(볍씨)을 담근다. 옛날의 싹틔우기는 커다란 옹기항아리에 볍씨를 채우고 물을 부어 불리는 방식이었다. 이때 부잣집에서는 소금물에 담그는 경우도 있었지만 대개는 맹물에 담궜다. 항아리에 담은 채 매일매일 물을 갈아 주면 일주일쯤 되어 나락에서 눈이 "뽈록뽈록" 틔인다. 그러면 항아리의 물을 모두 퍼내고 그 안을 짚으로 채워서 항아리를 뒤집는다. 그렇게 뒤집은 상태에서 3-4일 지나면 물이 모두 빠지고 볍씨 자체의 열로 인해서 "싹이 빵긋빵긋하니" 하얗게 나온다.
당시 전라북도의 벼 품종으로는 '다마금' '은방조' '공양도' 등이 주류를 이루었다. 특히 그 중에서 "너도나도 심었던" 품종은 '은방조'였다. 은방조는 "툭 터졌다 은방조"라는 말이 있을 만큼 '나락 등이 터져서 쌀이 하얗게 보일 정도'로 획기적인 다수확 신품종이었다. 그러나 검지마을은 특이하게도 '임보수'라는 품종을 가장 많이 심었다고 한다. 임보수는 다른 이름으로 '어름벼' '서리벼'라고도 했는데 '일정때 수십년을 재배한 품종'이라고 한다.
당시의 전라북도 수도품종 연구에 따르면 조선의 전통적인 재래품종 작부율은 1912년 89.4%에서 1940년 3.1%로 급속히 감소하여 일본의 우량품종 작부율이 무려 96.9%를 차지하였다.
참고로 소출을 알아보았다. 당시에 검지마을은 150평이 한마지기였는데, 우순풍조(雨順風調)해서 대풍년이 들면 90㎏ 기준으로 쌀 '양석'(두가마니)을 수확했지만 보통은 '마석'(한가마니)을 먹었다고 한다. 지금은 80㎏ 기준으로 마지기당(200평) 쌀로 4가마니 정도 수확한다.
못자리는 5월 중순경, 즉 입하무렵에 만든다. 이때 비록 논 전체에 거름을 넣지 못한다 할지라도 못자리 만큼은 필히 거름을 넣는다. 이때 못자리 골을 만든 후에 거름풀을 흩뿌리는데, 거름은 동네 주변에서 채취한 "호맹이풀을 삐들삐들하게 말려 뒀다가 못자리에 넣고 발로 밟으면" 흙에 묻혀서 거름이 된다.
그런 후에 모판을 고른다. 모판면적은 대개 전체 모내기할 논면적의 10분의 1정도로 하며 물관리가 용이한 위치에 만든다. 모판고르기를 검지마을에서는 '판자질'이라고 한다. 모판고르기는 일반적으로는 나무토막 4-5개를 연달아 묶은 '풀발'이라는 농기구를 사용하는데, 검지마을에서는 4-5자쯤 되는 널판지 양쪽에 끈을 달아 목에 걸고 한쪽발을 판자에 올려서 모판을 평평하게 고르는 방식을 말한다. 옛날의 모판은 "석자반에서 넉자" 정도로 지금보다 넓었다고 한다. 볍씨뿌리기도 지금처럼 드문드문 뿌리는 것이 아니라 '바늘끝 만치로(마냥) 퍼다 붓어서 당연히 모가 약했다'고 한다.
논뀌미기는 써레질하는 과정을 말한다. 써레질의 목적은 두 가지이다. 하나는 흙덩이를 바수어서 모심기에 적합하게 논바닥을 다지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잡초가 자라지 못하게 써레를 이리저리 끌고다녀 초근을 없애는 것이다. 즉 논뀌미기는 논에 물을 "짤박짤박하게" 가두어 놓고 쇠스랑을 이용하여 흙덩이를 잘게 부수고 논바닥을 평평하게 골라서 모심기에 알맞게 다듬는 과정을 말하는데 시기는 모심기 3일 전쯤에 한다. 논뀌미는 일은 대개 한 필지당 두명 정도가 하는데, 논뀌미기에서는 "흙이 말랑말랑하게 잘 썩고 곯아서 감이 좋아야" 한다.
못자리에서 모가 자라는 기간은 45일 가량이다. 모찌기와 모심기는 연속적으로 이루어지는 작업이다. 이른 아침부터 그날 심을 모를 못자리에서 찌기 시작하면 대개 오전 10시경에 끝난다. 그리고 이어서 모찌기에 동원된 전원이 모심기를 하는 것이다. 모를 다 찌고 나면 점심밥을 기다리는 잠깐의 틈이 있다. 이 틈새 시간에 부지런히 모심기를 해 두면 그날 모심을 분량이 일찍 끝나지만, 그렇지 않고 "허평대평"하면 늦은 밤까지 모심는 일이 허다하다.
모찌기는 한 사람이 한판(한도랑)씩 쪄 나간다. 한쪽 무릎은 꿇고 다른쪽 무릎은 세운 자세에서 양손으로 모를 쪄 나간다. 때로는 판자를 사각의 의자모양으로 짜맞추어 앉아서도 하고, 때로는 비료푸대에 왕겨를 넣어 의자대용으로 사용하기도 한다. 모춤은 대개 두 주먹 분을 합해 짚으로 묶는데 이를 '한탄'(단)이라고 한다.
그런데 천수답 논이 다 그렇듯이 적기에 모심기를 하는 경우가 많지 않다. 모심을 철에 비가 내리지 않으면 최소한의 비가 내릴 때 까지 마냥 기다려야 하고, 그러는 동안에 못자리의 모는 계속 웃자라게 된다. 다행히 뒤늦게라도 비가 와서 늦모찌기를 할양이면 이번에는 모찌기가 무척 고되다. 모가 이미 억세진데다가 새뿌리가 자라면서 뿌리끼리 엉켜 있어서 잘 뽑히지도 않을 뿐더러 뚝뚝 끊어지기 일쑤기 때문이다. 이럴 때 모를 찌다보면 억센 모에 손바닥이 온통 씻기는 통에 여기저기 빨갛게 붉혀서 여간 고통스럽지가 않다. 거머리도 골칫거리이다. 온 다리에 달라 붙어서 피를 빨아대지만 일일이 떼어내는 수밖에 도리가 없다. 생석회를 뿌리면 거머리가 없어지기도 한다지만 그럴만한 여유가 없다.
모심는 적기를 흔히 "하지 전삼일 후삼일"이라고 하며, 대개는 망종에서 하지 사이의 약 보름간을 적기로 간주한다. 그러나 검지마을과 같은 천수답에서는 적기를 따질 겨를이 없다. 논물의 사정에 따라 빠른 경우에는 볍씨 뿌린지 20일 만에도 심고, 늦어지면 소서(小署)에 심을 경우도 있다. 소서(7월 초순)무렵에 모를 찌면 모가 이미 자라서 같이 일하는 상대가 보이지 않을 정도라고 한다. 그러나 이 시기마저 놓혀버리면 못자리에서 모가 이미 출수(出穗)해서, 비록 이앙을 한다해도 수확은 거의 할 수 없게 된다. 따라서 이때가 넘어가면 메밀밖에 심을게 없다. 이와 같이 모심을 제때에 비가 내리지 않으면 어려움은 이만저만이 아니다. 먼저, 하지를 넘기고도 비가 오지 않으면 서종(鋤種)을 한다. 서종은 말 그대로 호미로 밭작물을 심듯이 모를 심는 방법이다. 그래도 서종은 나은 편이다. 그 이후로도 비가 오지 않으면 '말뚝모'를 심는다. 말뚝모란 작대기로 구멍을 뚫고 그 구멍에 심는 모를 말한다.
가뭄이 지속되는 동안 모심어도 되는 시기를 마지막까지 기다려보는 다음과 같은 방법이 있다. 밤송이를 겨드랑이에 끼워서 아직 아프지 않거나, 또는 대추를 콧구멍에 넣어봐서 들랑날랑하면 모를 심어도 된다는 것이다. 즉 적어도 이때 까지는 이앙 후 수확할 수 있다는 것이다. 현재의 주민들이 젊었을 때는 모심기를 '흐튼모'로 심었다. 줄모는 일제 말기에 보급되었다고 기억하고 있다. 비록 흐튼모라고 할지라도 줄만 없다 뿐이지 실제로는 눈짐작으로 줄맞춰 나가듯이 심었다고 한다.
모심는 적정인원은 대개 1명이 하루에 심는 분량을 한마지기 정도로 계산하여 충당한다. 즉 오늘 모심을 논이 열마지기라고 한다면 10명의 인원을 충당하는 것이다. 물론 모심는 중에 모를 나르고 분배하고 논바닥을 골라주는 '뒷모쟁이'는 별도이다.
모심을 때는 모심는 노래인 <농부가>를 부른다. 그리고 간혹 '못방구'도 친다. 못방구는 농부가에 맞춰 장구만으로 치는 장단을 말한다. 못방구를 늘상 치지는 않지만, 그래도 못방구소리를 들을 수 있는 기회는 주로 부잣집에서 모심을 경우이다. 부잣집은 아무래도 일꾼도 많고 술도 충분해서 새참 후에 술이 얼근해지면 못방구 치며 부르는 <농부가>를 들을 수 있는 것이다.
모심을 때도 수렁논이 문제이다. 설령 줄모를 심는다 해도 수렁부근에 다다르면 흐튼모를 심어야 한다. 그리고 수렁논에 모심기가 힘이 두배는 더 들기 때문에 젊고 힘센 장정들 위주로 편성한다. 그렇지만 무심코 뒷걸음질 치며 모심기를 하다 보면 발을 잘못디뎌 수렁구멍에 빠지는 일이 종종 발생하여 웃음거리가 되기도 한다. 그래서 수렁논은 서로 기피하는 논이었다.
모심기 때 노동력 동원형태는 '품앗이'와 '놉'이다. 품앗이는 현물 또는 현금을 보수로 지불하는 머슴노동이나 품팔이 노동과는 달리, 자기가 이용하는 다른 사람의 노동에 대하여 직접 자기의 노동으로 보상하는 제도이다. 품앗이는 공동작업을 수행하는 가장 전통적인 방법이며 한국농촌에서는 이러한 공동작업을 위하여 자주 품앗이를 하고 있다. 품앗이는 주로 모심기에 동원되지만 이 밖에도 밭매기, 타작, 파종, 지붕이기 등 잡다한 일에 빈번하게 동원된다.
반면에 놉(삯군)은 일종의 품팔이 노동이다. 즉 교환조건이 아닌 임노동이라고 할 수 있다. 이러한 품팔이 노동력은 自家의 경작지에 비하여 노동력이 과다한 영세농이나 소농층에서, 또는 경작지가 없거나, 소규모 면적의 밭을 경작하고 있는 無畓作層으로부터 공급받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모심기는 특히 짧은 기간에 집중적인 노동력을 투입해야 하는 집약성을 띠기 때문에 품앗이와 놉을 통한 노동력동원이 일찍부터 이루어졌던 것이다.
검지마을의 주민들에 의하면 일제 말기에 놉을 얻기 위한 품삯은 '사흘 일하면 쌀 한말' 받았던 것으로 기억하고 있다. 한편 '고지'라는 관행도 있다. 고지는 지금도 계속되고 있는 경작관행이다. 검지마을에서는 '5고지' 또는 '6고지'라는 관행이 있었다고 한다. 검지에서의 고지는 겨울이나 춘궁기, 즉 보릿고개 때 부잣집에서 미리 쌀 한말을 빌렸다고 한다면, 5고지일 경우에는 일년 농사 중에 5일에 걸쳐 그 집 농사일을 해주는 것이고, 6고지는 6일에 걸쳐 일을 해줌으로써 빚을 갚는 관행이다. 예컨대 5고지일 경우에는 '모심기' '아시(초벌)지심' '두벌지심' '만두레(손질)' '벼베기' 일을 각각 하루씩 일을 해준다. 이때는 모든 일을 제쳐놓고 고지먹은 집 농사일을 먼저 해주어야지, 그렇지 않으면 신용이 떨어져서 다음해에 고지먹기가 힘들어진다고 한다. 고지에서 파생된 '몽둥이 고지'라는 관행도 있는데, 이는 일정한 토지에 대해서 일년 내내 농작 전체를 맡아서 짓는 경우를 말한다.
여자들은 본래 밭일과 가사노동에 종사했지 논농사일은 하지 않았다. 심지어 여자가 논일하는 것을 흉으로까지 알았다고 한다. 그러나 일제 말기에 남자들이 징용으로, 또는 군대로 끌려가기 시작하면서 노동력의 절대적인 부족이 초래되었다. 그래서 이때를 기화로 일제국주의의 간교한 식민통치자들은 '몸빼'라고 하는 일본식 여성 작업복을 대대적으로 보급하여 논농사에 투입하기 시작하였다. 그 뒤로 한국전쟁을 거치고, 60년대부터 시작된 산업화와 도시화에 따른 이농현상으로 인해서 이제는 여성들의 노동력 없이는 농촌의 존립이 힘들 정도로 이제 농촌의 여성들은 노동인력 측면에서 절대적인 위치에 놓이게 되었다.
농경생활을 일컬어 흔히 '잡초와의 싸움'이라고 하는데 김매기, 또는 지심매기 과정이 바로 그 순간이다. 지심은 논에 난 풀을 말한다. 일년 농사의 대장정에서 어느 한 순간 힘들지 않은 과정이 있겠느냐마는 그 중에서도 특히 힘들고 고달픈 일이 김매기과정이다. 김매기기가 힘든 까닭은 가장 무더운 혹서기에 하는 작업인데다 잡초의 생육이 대단히 왕성해서 여러번 거듭해야 하고, 논매기 방식 자체가 허리를 최대한 숙여 호미나 손으로 흙을 파 엎는 일이기 때문이다.
검지마을은 지심을 모두 세 번에 걸쳐 맨다. 초벌을 '아시매기'라 하고, 그 다음을 '두벌매기' 세 번째를 '만물'(만두레) 또는 '손질'이라고 한다.
아시매기는 모심은 20일쯤 후에 '호무'(호미)로 파 엎는 과정을 말한다. 물론 이때 사용하는 호미는 밭호미가 아니라 논호미를 말한다. 호미로 흙을 파 엎는 까닭은 첫째가 풀을 파묻는 제초를 위함이지만, 그것 못지않게 모의 원뿌리를 찢어주고 잘라줌으로써 새뿌리의 성장과 활착력을 촉진케하기 위함이다. 지심매는 방법은 '호무를 오른손에 들고 허리를 잔뜩 숙이고 모를 3-4줄 잡고 앞으로 파 나가는' 것이다. 김매는 호미와 작업의 관계를 좀더 자세히 설명하면 다음과 같다. 논호미 날의 面은 왼쪽 뒤로 젖혀져 있는데(오른손잽이를 기준함), 이것은 바로 土壓을 적게 받으면서 마치 쟁기로 논을 갈 때처럼 호미밥을 왼쪽으로 넘어가도록 한 이치를 적용한 결과이다. 이때 왼쪽으로 길게 넘어오는 호미밥을 왼손으로 받아서 뒤집어 놓으면 일의 속도를 가속화할 수 있다.
김매기를 하다 보면 흙에 눌리거나 쓰러지는 모포기가 많다. 이를 그대로 방치하면 모포기가 쓰러진채 썩는 것은 자명한 일이다. 그래서 '모추기'를 해주어야 한다. 모추기는 힘이 모자라서 지심매기를 할 수 없는 노약자나 어린애들이 주로 담당하는데, 지심매는 일꾼들 뒤를 따르면서 쓰러진 모를 일으켜 세우는 일을 한다.
두벌매기는 초벌(아시)맨 지 15일쯤 후에 역시 호무로 맨다. 두벌매기가 초벌매기 보다 조금은 수월하다. 왜냐하면 두벌매기가 초벌매기처럼 논흙을 깊게 파 엎는 일에 중점을 두기 보다는, 초벌매기 때 파 엎어 놓은 흙을 호미로 다시 되파서 평평하게 고르는 형식이기 때문이다. 물론 흙을 되파서 뒤집음으로써 보름 동안에 새롭게 자란 지심을 파묻기 위함은 두말할 나위 없다.
이렇듯 두벌매기는 초벌매기에 비해서 힘이 덜 든다. 따라서 논맬 때 부르는 <진방아타령>도 이때 부른다. 주민들에 의하면 "아시는 흙을 짚이 파서 뒤집응게 힘들고 논바닥도 울퉁불퉁하지만, 두벌은 흙을 짚이 안파고 평평하게 허니께 슬슬헐 수 있어. 힘이 덜 들어. 장난허니라고 흙덩이를 발로 허쳐버리고 가기도 허고, 꾸정물만 내기도 혀"라며 두벌매기의 특성과 여유로움을 설명한다. 후술하겠지만 농촌 공동체의식의 대표적인 표상이었던 두레노동 관행도 두벌매기 때 시행한다.
만물은 '만두레' 또는 '손질'이라고 한다. 만물은 세 번째이자 마지막 김매기 과정이며, 두벌매고 10∼15일이 경과한 후에 마지막으로 매지만 그 기간은 지심이 자란 상태에 따라 유동적이다.
만물을 하기 위해서는 논의 물코를 열어 놓고 물을 완전히 뺀다. 본래 벼 이삭이 패기 전에 논을 말려야 하기 때문이다. 그런데 물코를 열어 놓는다고 해도 지형상 논물이 완전히 빠지지 않는 경우가 허다하다. 그럴때는 논 가장자리를 디귿자(ㄷ字)모양으로 골을 판다. 이것을 '도구친다'(도랑치기)라고 한다. 특히 논의 가장자리를 도구치는 이유는 고라실 논은 논두렁이 언덕 처럼 높아서 그 밑에 괴인 물은 잘 빠지지 않는다. 따라서 언덕 밑을 도구치면 물이 그 골로 모이기 때문에 논을 잘 말릴 수가 있다. 번거롭더라도 도구치기를 해서 논을 잘 말려야 뿌리 활착이 잘되고 특히 가을에 비바람이 쳐도 모가 잘 쓰러지지 않는다고 한다. 이와 같은 도구치기는 벼베기 직전에도 논을 말리기 위해서 똑같은 방법으로 한차례 더 실시하는데 이때가 실은 만물 때 보다 더 중요하다.
도구치기가 끝나면 "손으로 논의 잡초를 훔쳐서 땅에 묻고 논바닥을 장판방처럼 판판하게" 만들어 놓는다. 이 과정이 이른바 만두레인데, 처량하기 이를 데 없는 <만물산야>도 이때 부른다. 만물을 끝내고 말리기 시작한 논은 벼의 이삭이 패기 시작하는 출수기(出穗期)가 되면 다시 물가두기를 해야 한다.
당시에는 농약을 비롯한 오염물질이 없던 시절이라 자연생태계가 잘 보존되었다. 따라서 논바닥에는 붕어, 게, 개구리, 가물치 등이 공생하면서 나방은 개구리가 잡아 먹어서 이화명충이 없고, 게와 가물치는 풀을 뜯어 먹어서 제초효과를 보는 등 그야말로 자연농법 그 자체였다. 그러나 비료가 대량으로 보급되면서부터 '조아순'이라는 명칭의 병충해가 발생하였다고 한다. 조아순이란 후에 '도열병'이라고 붙여진 이름인데, 벼가 이 병에 걸리면 폭삭 주저 앉는다고 해서 유래된 명칭이다. 조아순은 "퇴비나 비료가 많이 들어가면 무더기로 썩어버리는 병이었다"고 한다.
당시의 농경연구에 따르면 40년대에도 문고병, 도열병, 멸구, 깜부기 등이 조금씩 나타났지만 농약이 없었기 때문에 특별한 방제작업도 있을 수 없었다. 다만 천둥소리가 나고 소나기가 오면 문고병이 낫거나, 제비가 똥을 싸면 잎마름병이 없어진다고 생각하여 삼을 꺽어 논에 꽂아 놓고 제비가 앉아 똥싸기를 기다리는 일도 있었다고 한다. 50년대에는 멸구가 발생하면 석유를 모래와 섞어서 벼에 뿌린 뒤 벼를 흔들어 모래를 떨어뜨리면 멸구도 같이 떨어져 물위의 석유에 싸여 죽게하는 법을 사용했다. 50년대말 멸구약이 약간 사용되었고 60년대 초에 도열병, 이화명충이나 멸구약 등이 도입되었다.
두레는 과거 한국 농촌사회에서 오랫동안 존속되어 온 대표적인 공동노동조직이었다. 두레는 노동을 위한 농민들의 조직체라는 점에서 뿐만아니라, 그 노동과정 중에 풍물의 연행을 수반하는 놀이집단으로써 농민문화 형성에 중요한 역할을 했다는 점에서 많은 학자들의 관심을 끌어 왔다. 검지마을의 주민들도 '두레라는 것은 부락의 공동작업이여'라고 말한다. 두레노동조직이 결성되고 작업이 이루어 지는 날이면 마을의 모든 가가호호에서 한명씩 나온다. 조경만의 조사에 의하면 두레 성원은 농경활동에 종사하는 마을 주민 전원으로 구성되는데, 성원의 연령 분포를 볼 때 하한선은 보통 15∼16세이며, 상한선은 55∼56세라고 한다. 그러나 검지마을은 연령에 상관없이 모두 참여한다. 힘이 있는 사람은 당연히 두레 성원에 포함시키고, 성원에 포함되지 않는 노인네나 아이들에게는 모추기 역할을 부여함으로써 전주민이 참여하는 명실상부한 두레노동 공동체를 이루는 것이다.
두레노동이 주로 지심매기때 이루어지는 이유는 강우(降雨)와 관련이 깊다. 즉 전술했듯이 "옛날에는 물이 귀하니까 낙종(落種)한 지 20일 만에도 물이 있으면 모를 심고, 늦으면 못자리에서 모가 너무 자라서 한주먹씩 끊어내고도 심었다"고 한다. 다시 말하면 모심기는 강우와 관련이 있어서 날자를 정확히 정하기가 어려운 관계로, 미리 날을 받아서 시행하는 두레노동에는 적합하지 않다. 반면에 지심매기는 벼뿌리와 잡초와의 관계 때문에 적기에 노동력이 집중되어야 하며, 강우와 관계없이 오직 논의 형편에 따라 미리 결정할 수가 있어서 두레공동노동이 가능했던 것이다.
두레의 대표는 '좌상(座上)'이다. 좌상은 두레의 결성에서부터 '술멕이'까지 전과정을 통솔하는 책임이 주어진다. 즉 두레의 총지휘자인 셈이다. 좌상은 마을의 연로한 분 중에서 농사경험이 많은 사람을 뽑았으며, 일단 좌상으로 결정되면 절대적인 권한과 위엄을 부여 하였다. 좌상으로 추대되기 위해서 특별한 선출과정을 거치지는 않지만 농사경험이 풍부하고, 사리분별이 정확하고 분명해야 하며, 총기가 좋아야 하고, 원만한 성격과 통솔력이 인정되어야 한다. 마땅한 적임자가 추천되면 구두로 합의과정을 거쳐 좌상으로 모시는 것이 관례이다. 좌상은 한 번 선출되면 특별한 일이 없는 한 연장되기 때문에 두레의 조직적 체계는 해마다 그대로 이어지는 방식이 된다.
두레가 동원되는 날은 동네 일촌이 마을의 넓은 공터 - 주로 모정 -로 다 모인다. 두레 성원이 마을기를 앞세우고 모정에 모이면 좌상이 오늘 지심맬 논의 위치와 작업분량, 작업순서 등을 지시한다. 좌상의 지시가 끝나면 '풍장'을 울리면서 마을기를 앞세우고 작업할 논으로 향한다. 이른바 두레풍장이다. 뙤약볕에서 일시에 많은 논을 맨다는 것은 고통스런 일이었다. 일과 놀이는 노동의 고통을 더는 농사 방식이 요구되었다. 두레풍장의 농사관행은 일의 고통을 경감하는 결정적 방식이 되었다. 풍장은 꽹과리와 장구, 그리고 징이 전부이다.
작업할 논에 도착하면 마을기는 마을에서 잘 보일수 있도록 근처의 넓은 공터-새참도 먹고 휴식도 취할만 한 공간-에 꽂아둔다. 그리고 좌상의 지시에 따라 지심매기를 시작한다. 그렇다고 마냥 일만 하는 것은 아니다. 적당히 때를 보아서 풍장꾼이 논두렁이나 지심매는 논 속에서 풍장을 울리면 농군들은 논매기 소리인 <진방아타령>을 부른다. 풍물과 농요는 그 자체가 지니는 놀이성과 함께 동작의 통일, 호흡조절 등의 기능을 통하여 작업의 신속한 진행을 독려하는 역할을 수행한다.
두레노동 방식으로 지심매는 논은 주로 부잣집 소유의 경작지이다. 그것은 두벌매기의 특성과 관련이 있다. 즉 앞에서도 언급했듯이 두벌매기는 강도 높은 노동력과 세심한 정성을 필요로하는 초벌매기 때와는 달리 작업의 신속한 해결, 즉 시급성에 달려 있다. 그렇기 때문에 일시에 대단위의 노동력을 동원하는 방법으로는 두레방식이 최적이라고 할 수 있다.
이렇게 두레조직을 이용함으로써 경작규모가 큰 농가일수록 여러 날 걸려야 할 작업을 두레에 의뢰하여 단기간 내에 해결함으로서, 실기(失期)의 위험이 없이 무사히 그 해의 농번기를 넘길 수 있는 것이다.
두레노동이 시행되는 또 다른 이유로는 마을의 공동자금 마련이다. 앞에서 언급한 두레결성 동인(動因)도 결과적으로는 마을의 공동자금 마련에 있지만, 두레노동의 원인행위는 부잣집의 필요에 의해서 발생하였음이 우선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마을에서 풍물을 새로 구입해야 한다거나, 모정을 다시 짓는다거나 등등 마을의 공적인 일에 사용할 자금의 필요에 의해서도 두레노동 조직이 가동되는 것이다.
두레노동으로 마련된 자금은 일단 마을자금으로 확보하였다가 논매기가 완전히 끝난 칠월 백중에 '술멕이'자금으로 사용된다.
농촌의 공동작업을 위한 관행으로써, 그리고 공동체정신에 기초하여 농경문화의 꽃을 피운 원동력으로써 기능했던 '두레'는 일제를 거치면서 여러 가지 이유로 차츰 약화되면서 60년대 초에 완전히 소멸되고 말았다. 그 주요한 이유로 촌락내의 계층분화가 두레의 상호부조적 성격을 약화시킨 점, 화폐경제의 침투가 두레의 소멸과 변질에 작용한 점, 토지소유 규모의 불평등성과 임노농의 발생, 일제에 의한 강제적인 해산 등이 직접적인 원인으로 작용했음을 학계에서는 보고하고 있으며, 그러한 많은 이유는 결국 마을 공동체의식의 약화와 이해타산적 의식의 지배라는 풍조를 낳게 되면서, 변화된 가치관도 결국 두레 소멸의 간접적인 원인으로 작용하였다고 생각한다.
'술멕이'는 더운 여름날에 동네 주민들(남자들)이 모두 모종에 모여 농사일에 고생한 서로를 위로하고, 장기간의 노동으로 쌓인 피로를 풀고, 두레를 공식적으로 해산하기 위해서 정산과 함께 잔치를 베푸는 농경의례(農耕儀禮)의 일종이다. 검지에서는 이날을 '술멕이'라고 부르지만, 전라도 일대에서는 '술멕이'라는 명칭과 함께 '호미씻이'라는 명칭도 두루 사용되고 있다.
'호미씻이'는 호미를 수단으로 하는 논매기의 마지막인 '세벌논매기'(3차 논매기)를 마친 농부들이 마을 단위로 모여 작업의 종료를 축하하며 집단적으로 놀던 의례로서 洗鋤宴, 洗鋤會 등으로 표기되고, 지방에 따라 '농사장원' '호미걸이' '풋굿' '백중놀이' 등으로 불리기도 한다. 이것은 두레꾼이 논매기의 종료를 계기로 그해 두레 공동작업을 모두 마무리지음으로써 두레를 해체하는 의식이기도 하다.
검지마을의 술멕이는 '공동시암치기'부터 시작한다. 시암치기란 '시암제'(우물제)를 말한다. 검지에서는 춘추로 마을 공동시암을 쳤다. 봄에 못자리 설치를 끝낸 직후에 첫 번째 '시암제'를 지내고, 다시 칠월에 지심매기 끝내고 술멕이때 시암제를 지내는 의식(儀式)이 그것이다. '시암제'는 온 주민의 식수로 사용되는 우물물을 퍼내고 다시 새롭게 물을 받는 일종의 정화의식이다. 시암제는 주변을 말끔히 청소하여 청결과 위생을 유지한 상태에서 시작한다. 청소를 마치면 왼새끼로 꼰 금줄을 치고 고사상을 차린다. 고사상은 떡과 밥을 비롯해서 간단한 나물과 과일 포(脯)를 준비하여 차린다. 상차림이 끝나면 풍물패가 '시암굿'을 친다. 시암제는 기제사와 같이 술 석잔을 올리고 축문도 읽고 소지(燒紙)도 한다. 축문은 주로 우순풍조(雨順風調)와 풍년농사를 기원하는 내용이었다고 한다. 봄철의 시암제는 동네의 '있는 집'에서 음식과 술을 기부하여 비교적 간단하게 치뤘다고 한다. 반면에 칠월에 시행하는 시암제(술멕이)는 대대적인 축제의 일환이었다.
시암제는 그 의미를 크게 두가지로 나누어 생각할 수 있다. 마을 공동식수원에 대한 청결유지는 앞에서 언급한 바 그대로이고, 두 번째는 용사신앙(龍巳信仰)이라는 의식(意識)이 시암제에 내포되어 있다는 점이다. 용사신앙은 말 그대로 용이나 뱀을 숭상하는 민간신앙의 일종인데, 특히 농경문화권에서는 용에 대한 절대적 신앙심을 가지고 있는데 그 이유는 간단하다. 용은 자고로 물을 다스리는 수신(水神)으로 섬겨져 왔다. 그리고 농사일에 있어서 물은 가장 중요하면서 절대적인 요소이다. 그래서 농민들은 용을 섬기고 받드는 의식을 통하여 행여 있을지도 모를 물부족에 대한 걱정을 해결하고자 하였다. 그리고 그 용이 살고 있는 곳이 우물이라는 믿음을 그들은 가지고 있었다. 따라서 '우물제'(시암굿)를 행하는 본질적이면서도 보다 간절한 이유는 우물에 사는 용을 섬기는 의식을 수행함으로써 물에 대한 걱정으로부터 해방되고 싶은 욕구에서이다. 결론적으로 시암제에는 용신께 받치는 의식을 통하여 풍년 농사에 대한 마을 주민들의 간절한 기원을 엿볼 수 있는 의식이라고 할 수 있다.
칠월 '술멕이'는 그때그때의 형편에 따라 칠석날이나 백중날 중에 좋은 날을 택해서 시행한다. 이 날은 두벌 지심매기 때 두레노동으로 이미 확보한 마을 공동자금으로 돼지부터 잡는다. 돼지는 자금의 규모에 따라 한마리나 두마리가 결정된다. 술은 부잣집에서 마을을 위해서 기꺼이 쾌척한다. 이때 제공된 술의 양에 따라서 술멕이가 2∼3일 동안 지속되기도 한다.
술멕이 날이 당도하면 봄철과 마찬가지로 먼저 '시암제'를 지낸다. 그리고 남자들 일부는 돼지를 잡는다. 점심무렵이 되면 모든 주민들이 모정에 모이기 시작하고, 시암제를 지낸 풍물패의 농악은 끊임없이 울려댄다.
참으로 가난했던 시절, 부잣집으로 품팔러 가면 자식들 밥얻어 먹일 요량으로 모두 데리고 다니는가 하면, 홑옷만 입고 엄동설한을 견디던 일이 다반사였다. 절대가난이 지배하던 시절에는 고기국 먹을 기회가 일년에 고작 명절날이 전부였다. 그러나 예외가 있다면 바로 술멕이 날이다. 심지어 옛말에 "명절에는 괴기국 못먹어도 술멕이날에는 먹는다"는 말이 있다고 한다. 다시 말하면 명절은 가정에서 각자 치르는 가가례(家家禮)이기 때문에 누구누구네 집이 고기국을 먹는지 그렇지 못한 지 알 수 없지만, 술멕이날은 동네 잔치이기 때문에 예외없이 고기맛을 볼 수 있다는 것이다. 옛날을 추억하는 주민들은 한결같이 "없이는 살었어도 그때가 좋았지"라고 회상한다.
술이 얼큰해지면 이유도 뜻도 없이 서로 멱살을 잡고 싸움질도 많이 했다. 묵은 감정이 있어서도 아니고, 특별한 사연이 있어서도 아닌데 괜한 시비와 싸움이 빈번하다. 그러다가도 풍장소리에 신명이 나면 언제 싸웠더냐 하고 풍물패를 앞세우고 부잣집으로 쳐들어 간다. 그러면 부잣집에서는 또다시 술동우를 내놓거나 닭을 잡아야 했다. 신명좋은 사람들에 의해서 이렇게 몇일이고 계속되는 술멕이를 '뒷술멕이'라고 한다.
술멕이날 치뤄지는 또 하나의 행사가 '진서술내기'이다. 진서술은 나이가 17∼18살 무렵의 청소년들이 두레의 성원으로 가입하기 위해서 동네 두레꾼들을 비롯해서 어른들에게 술대접하는 의식이다.
육체적으로 이미 성인이 되고, 농사일 방법을 터득하고, 충분한 힘이 길러지면 품앗이 노동에서 '왼품'을 받고자 한다. 즉 지금까지는 '반품' 취급을 받아왔지만 이제부터는 적어도 노동에 대한 댓가에 관해서는 어른들과 동등하게 1:1의 대접을 받고자 하는데, 술멕이날 어른들의 허락이 떨어지면 비로소 1:1 교환노동이 성립되는 것이다.
그러나 허락을 받아내는 과정은 만만치 않다. 허락이 생각만큼 쉽사리 떨어지지 않는 것이다. 여기에 관해서 주강현의 『두레 연구』에서는 다음과 같이 기술하고 있다.
"미성년자들은 평소에 두레를 따라다니면서 일을 배워나간다. 지역에 따라서 小童, 꽁배 따위로 불리운다. 젊은층의 지도자인 總角大方의 지휘를 받아 화롯불나르기, 소 돌보기, 각따귀 쫓기 같은 잡일을 하다 新入禮로 두레에 참여한다.
新入禮는 청소년층이 장정 대접을 받게 되는 통과의례다. 半품앗이로 노동력의 절반 이하만 인정받다가 두레에 가입함으로써 온전하게 1:1의 장정품을 인정받는다. 통과의례를 거친 청소년은 두레는 물론이고 마을에서 벌어지는 모든 노동에서 장정품을 인정받게 된다. 따라서 청소년을 대신한 그의 집안이나 고용주 쪽에서는 인사치레로 두레 성원 전체에게 술을 낸다."
검지마을에서도 마찬가지이다. 특히 두레 성원이 되고자 하는 청소년들은 술멕이날에 갖은 심부름을 다해야 한다. 예컨대 돼지를 잡게되면 거동이 불편해서 참석하지 못한 어른들, 또는 상중(喪中)이라서 나오지 못한 어른 등 술멕이에 참여하지 못한 집에 호박잎으로 돼지고기를 싸고, 바가지에 술을 담아 일일이 돌리면서 대접해야 한다. 뿐만아니라 모정에 모인 어른들의 술 심부름, 안주 심부름, 담배 심부름 등을 도맡아서 해결해야 한다.
그렇게 하루 종일 심부름을 하고 나면 어느 순간에 "야들아, 너들도 심부름 인자 끝내고 술먹어라"라는 명이 떨어진다. 그때서야 비로소 술과 고기를 챙겨서 어른들이 보이지 않는 한쪽으로 달아나서 한숨 돌린다. 모정은 위엄과 공경의 상징이다. 따라서 모정에 어른들이 올라가 계시면 젊은이나 청소년들은 언감생심 올라갈 수가 없다. 만약 규율을 지키지 않으면 가혹한 동벌(洞罰)이 따른다.
전통사회에서 마을은 여러 가지 기능을 합목적적으로 수행하는 기초 단위이다. 즉 마을은 기초 생산공동체라는 역할과 함께 정치, 경제, 사회, 문화, 종교 등 다양한 기능이 병존하고, 수행되는 민주적이고 자치적인 최소단위라고 할 수 있다.
그렇기 때문에 통치나 자치에 따른 암묵적인 규율, 또는 위계가 있어야 한다. 그런 차원에서 문중에서는 종중벌(宗中罰)이 있듯이, 마을에서는 동벌(洞罰)이 있어서 유교적 질서를 유지하기 위해서 공적인 처벌을 가할 수 있었다. 마을 위계질서 확립은 곧 두레노동조직의 효율적인 관리하고도 직결된다고 할 수 있다. 검지마을의 경우 위계질서를 위한 동벌 중에 '조루돌리기'라는 풍속이 있었다.
조루돌리기는 북(鼓)을 끈 달아서 벌 받을 사람의 등에 매달아 놓고, 한 사람이 그 북을 치면서 동네 고샅을 한바퀴 도는 벌이다. 그러면 동네 꼬마들이 뒤따르면서 '어이샤 어이샤!'라는 구호를 외친다. 이러한 방법의 동벌은 체벌 등으로 일시적인 신체적 고통을 주기 보다는, 온 동네에 잘못을 알림으로써 심리적인 수치심을 유발해서 근원적으로 반성케 하는 벌이라고 생각된다.
조루돌리기라는 동벌의 대상자에 오르는 사람의 죄목은 주로 부모에게 불효하는 자, 동네 어른들께 불경하는 자, 노름하는 자 등이다. 이때는 동네 어른들이 회의를 소집해서 동벌에 처할 사람을 결정한다. 비교적 가벼운 잘못을 저지르는 경우에는 모종에 불러 놓고 동네 어른들이 회초리 매질을 함으로써 동벌을 끝내지만, 보다 중한 벌에 처해야된다고 판단이 내려지면 조루돌리기는 하는 것이다.
김매기가 끝나면 농촌은 농한기에 접어든다. 이제 여름이 다할 때까지 남은 일은 논두렁의 풀베기와 새쫓는 일 정도이다. 풀베기는 '보리풀'이라고 하는데 가을일이 끝나고 보리밭에 퇴비로 넣기 위해서 장만하는 것이다. 그리고 잡초가 우거지면 논두렁 옆의 벼가 밀리고, 논에 통풍이 잘 되지 않아서 벼가 성장하는데 지장을 주기 때문에 풀베기를 게을리 하지 않는다. 그렇게 보리풀을 하면서 추수를 기다릴 뿐이다.
이때의 한가한 농촌풍경을 주민들은 '어정칠월 고시랑팔월 동동구월'이라고 표현한다. 어정칠월은 농군들이 칠월 술멕이 끝내고 별다른 일 없어서 어정어정거리는 한가한 모습을 말한다. 반면에 고시랑팔월은 이미 결판난 팔월의 농사를 보니, 다른 사람들의 농사는 잘되었는데 내 농사는 형편없는 것 같고, 추석은 다가오고, 자식들은 많고, 자식들 양말이라도 사줘야겠는데 돈은 없고, 그래서 혼자 한숨 쉬고 푸념하면서 '고시랑 고시랑'거린다는 뜻이다. 동동구월은 팔월 내내 고시랑거리면서 푸념만 하다가도 구월 농번기가 돌아오면 벼베기에 너도나도 바빠서 이논 저논으로 발을 동동거리면서 다니는 분주한 모습을 묘사하고 있다.
벼베기는 10월 보름경부터 시작한다. 이때면 출수(出穗) 후 45∼50일쯤 된다. 그러나 옛날에는 출수 후 60일이 넘고 서리가 내린 후에야 벼베기를 했다고 한다. 그래서 "얼음 속에서 나락비기가 다반사였다"는 것이다. 벼베기는 거의 품앗이로 이루어지는데, 한사람이 하루에 낫으로 베는 분량은 약 '150뭇'(다발)이라고 한다. 150뭇이면 한마지기 반(당시에 한마지기는 150평)에 해당되는 분량이다.
나락의 소출도 당시에는 '대백뭇'하면 많이 했다고 한다. 대백뭇이란 150평 한 마지기에서 100다발의 소출이 났을 경우를 말한다. 벼를 벨때는 벤 벼를 논바닥에 깔아서 말리고, 어느 정도 마른 후에 다발로 묶어서 줄가리를 한다. 그러나 수렁논이 많은 검지마을에서는 논바닥에서 직접 말릴수가 없기 때문에 나락 두 포기를 베어서 매끼를 만드는데 이를 '재매끼'라고 한다. 이렇게 만든 재매끼로 볏단을 묶어서 세워 놓는 것이다.
벼베기를 마치면 그날 베어낸 볏단을 논두렁에 세워 놓는다. 물론 볏단을 잘 말리기 위해서지만, 논두렁에 볏단을 세우는 과정에서 자동적으로 그날 벤 볏단의 숫자도 파악이 된다. 볏단을 세우는 사람이 음률에 맞추어 -마치 천자문을 읽거나 구구단을 외우듯이- 볏단의 숫자를 읊조리면서 세워나가기 때문이다. 나머지 사람들은 볏단을 계속해서 운반한다. 이와같이 논두렁에 일렬로 세워 놓는 것을 '줄갈이 친다'라고 한다. 줄갈이 친 몇일 후에는 '되갈이'를 해주어야 한다. 되갈이는 반대쪽의 볏단을 말리기 위해서 뒤집어 되세우는 과정을 말한다.
볏단의 '대궁'(줄기)이 다 마르면 이어서 꽁지를 말려야 한다. 그러기 위해서 볏단을 옆으로 뉘여서 열십자로 쌓는데 이를 '세빌갈이'라고 한다. 세빌갈이를 하는 이유도 볏단의 꽁지를 말리기 위함이 첫 번째 목적이지만 열다발씩 쌓아서 '세빌갈이'해 놓은 한 무더기가 등짐할 때 지게의 한짐이 되기 때문에 결과적으로는 등짐의 용이함을 꾀하고 있다.
논두렁에서 충분히 말린 볏단은 주인집으로 운반해야 한다. 농촌의 전통적인 운반 수단은 지게이다. 농로가 전혀 닦아지지 않은 좁은 길에서 지게만큼 용이한 개인 운반 도구는 없을 것이다. 지게는 곡식을 나르는 것 외에도 짐을 운반하는 가장 대표적인 도구로서, 역사적으로는 마한 때부터 쓰였다고 한다. 지게를 이용하여 논에서 집으로 볏단을 운반하는 작업을 '등짐'이라고 한다.
등짐에는 '한짐'과 '미짐'이라는 두가지 방법이 있다. 한짐이란 열 다발씩 쌓아서 '세빌갈이'해 놓은 한 무더기의 볏단을 지게로 한 번에 운반하는 방법을 말하고, 미짐이란 세빌갈이 해 놓은 두 개의 무더기, 즉 스무다발을 한 번에 운반하는 방법을 말한다. 한짐은 보통의 일꾼들이 하는 방법인 반면에, 미짐은 힘센 장정들이 남들 두 번에 걸쳐 운반할 분량을 한 번에 끝내고 한 번은 쉬어가는 방법이다. 그 만큼 개인의 형편에 따라 분량을 조절하면서 일을 빨리 끝내기도 하고, 천천히 여유있게 하기도 했던 것이다.
<등짐소리>는 등짐을 하면서 부르지만 시간상으로는 대개 해질녘에 부른다. 아침부터 시작한 등짐이라 이때 쯤이면 무척 힘도 들지만 다행히 남은 분량이 얼마 되지 않으면 피곤함도 잠시 물리칠 수 있다. 얼추 등짐이 끝나가고, 술기운도 올라오는 해질녘 '파방' 무렵이면 드디어 등짐소리가 울려 퍼진다. 앞소리를 메기는 사람은 등짐을 가볍게 하기 위해서 지게에 볏단 '서너뭇'만 올려 놓는다. 그리고 지게작대기를 뒷목에 끼워 양손을 걸치고 앞소리를 메긴다. 그러면 나머지 등짐꾼들은 앞소리꾼을 줄줄이 따르면서 뒷소리를 받는다. 해질녘에 먼데서 <등짐소리>가 울려 퍼지면 그렇게 처량할 수가 없었다고 한다. 논임자 안주인은 멀리서 들려오는 등짐소리를 신호로 저녁밥을 준비하기도 한다.
등짐을 할 때 중요한 것은 지게에 볏단을 쌓는 것이다. 이때 볏단을 높이 쌓기 위해서 지줏대를 세우는데 이를 '꼬작'이라고 한다. 꼬작은 보통 3미터쯤 되는 가벼운 대나무인데 지게 앞부분에 엑스(X)자 모양으로 묶는다. 볏단을 지게에 균형이 맞게 기술적으로 잘 쌓으면 지게를 지고 뛰어도 볏단이 떨어지지 않을 정도이다.
'볏갈이'는 등짐으로 마당에 옮겨진 볏단을 쌓아나가는 벼눌을 말한다. 등짐꾼들은 지게에 실린 볏단을 볏갈이 하는 벼눌에 부린다. 그러면 벼눌을 쌓는 사람이 차근차근 모양을 갖춰가면서 볏갈이를 만든다. 볏갈이는 비가 와도 스며들지 않도록 짚 끝 쪽을 벼이삭 쪽보다 낮게 쌓아야 하는 특별한 기술이 요구된다. 볏갈이의 모양은 둥그런 원형이 대부분인데 그 모양에 따라서 '말볏갈이' '요강볏갈이'라고 부르기도 하였다. 볏갈이가 다 쌓아지면 맨 위에 마치 뚜껑을 덮듯이 볏단 하나를 세운다. 이는 빗물이 들어가지 않도록 하기 위함인데 마지막으로 세우는 볏단을 '유주지'라고 부른다. "벼눌이 천개라도 유주지가 제일"이라는 말도 여기에서 비롯되었다.
타작이란 이삭에 달린 곡식의 낟알을 터는 작업을 말한다. 과거의 한국 농경에 있어서 일반적인 타작 방법에 대하여 경기대 박물관에서 나온 연구자료에 의하면 다음과 같다.
재래식 탈곡방법을 보면 우선 이삭을 훑어서 낟알을 터는 것과, 두드려서 터는 두 가지의 형태로 구분할 수 있다. 여기서 벼를 훑는 데는 벼훑이와 그네, 두드리는 데에는 개상과 도리깨가 사용되었다.
이 중에서 벼훑이는 가장 간편한 것으로서 나무가지 두 개를 붙여서 한쪽을 끈으로 동여매고 다른 쪽이 벌어지게 만들었는데, 벼이삭을 한 두 개씩 사이에 끼워서 잡아당기면 낟알이 떨어진다. 이 방법은 일이 더디어서 소량의 풋바심이나 종자를 장만할 때 주로 행해졌다. (...중략...) 따라서 가장 일반적인 탈곡방법은 개상이나 도리깨로 두드려서 터는 것이다.
타작은 주로 품앗이로 이루어진다. 홀태가 보급되기 전에는 '개상'이라는 방법으로 타작이 이루어졌다. 개상질이란 절구통을 옆으로 뉘여 놓고 볏단을 그 절구통에 내려쳐서 벼 낟알을 떨구는 방식이다. 절구통이 없을 때에는 주로 통나무를 이용하는 재래식 탈곡방식이다. <타작노래>에서 '둘이 맞서 잘도 친다'라는 사설은 절구통을 사이에 두고 두 사람이 마주 서서 번갈아 가면서 내려치는 모습을 연상하기에 충분하다. 절구통에 칠때는 볏다발을 돌려 가면서 쳐야 낟알이 잘 떨어진다. 이때 볏다발을 돌리기 용이하도록 새끼를 볏단에 감는다. 그리고 새끼줄을 돌려가면서 내려침으로써 타작의 효과를 높이기도 한다.
홀태는 일제시대에 일본인에 의해서 보급되었다고 해서 '왜홀태'라고도 부른다. 이것은 벼훑이 처럼 한 두개씩이 아니라, 한 줌씩 넣어서 훑을 수 있는 보다 능률적인 연장으로써 농촌의 전역에 보급되었다. 검지마을에서는 홀태가 보급된 이후에도 밀과 호밀을 타작할 때에는 계속해서 개상질을 했다고 한다. 그리고 벼를 기계식으로 탈곡하기 시작한 것은 '호롱기'(足踏式脫穀機)가 보급되면서 부터였다고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