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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통신사 스크랩 부산 해안 7백리 원도심 1. 자성대~자갈치
양효성 추천 0 조회 521 16.08.23 22:39 댓글 0
게시글 본문내용

 

 해안 7백리 남부권의 종점으로 설정한 자성대에서  원도심으로 첫발을 내딛는 곳이 영가대(永嘉臺)입니다.  조선후기 일본으로 가는 통신사가 해로에 무사귀환을 비는 해신제가 열리는 장소이자 통신사가 출발하는 곳이자 도착지입니다.  원래 터는 성남 초등학교 근처인데  마땅히 복원할 공간이 없어 2003년 9월 자성대 서문과 동문 사이에 복원했습니다.  하지만 건축사에 정통한 사람들이나 이곳에 관심두고 있는 분들은 졸속복원이라며 가차없는 비판을 때리는 서글픈 건축물입니다.  

 1905년 간행된 '한국의 사진첩'에 실린 영가대의 모습입니다. 영가대 건물 일부는 그 후 일제 강점기 '부산삼대부자' 오이케 타다스케(大池忠助)의 별장 능풍장으로 옮겨졌습니다. 뒤에 보이는 산은 황령산입니다. 아마도 부산장(진시장)이 좌측에 있었지 않나 싶습니다.  영가대는 한일교류의 상징건물입니다. 오늘날처럼 자유로운 출입이 엄격히 제한되던 시절 임란 전에는 부산, 진해, 울산을 통해서만 가능했고, 임란 후에는 부산을 통하는 길 밖에 없었습니다.  일본과의 교류는 통신사를 통해 이루어 졌습니다.  통신사는 조선국왕이 일본국왕인 막부(幕府) 장군에게 보낸 외교사절로서 믿음을 통한다는 뜻이 담겨 있습니다.

이 통신사제도는 1375년 (고려 우왕1) 나흥유가 처음 이었고, 조선시대 들어서는 보빙사, 회례사라는 이름으로 파견되었습니다.  이후 1413년(태종13) 박분 때 처음으로 통신사 라는 명칭을 사용하였고 100~200명을 기본구성으로 하여 두 세척의 배를 타고 교토(京都)까지 갔는데 많을때는 450~500명 정도가 가기도 하였다고 합니다.  이같은 사절단 파견은 1592년(선조25) 임진왜란으로 단절되었다 1604년(선조37) 사명대사와 손문욱을 탐적사(探賊史)로 보내면서 광해군과 인조를 거치며 1636년(인조14) 임광 때에 이르러 통신사라는 이름으로 가게 되었습니다.  이후 1643년(인조21)부터 1811년(순조11)까지 모두 8차례의 사절을 통신사로 갔습니다.

 

 

통신사는 창덕궁 인정전에서 삼사(정사, 부사, 종사관)임명식을 가진 후 서울을 출발 영남대로로 하여 부산에서 쓰시마-시모노세키-오사카까지 갔다가 거기서 일본배를 타고 교토부근 육지에서 내려 야쓰에서 히코네까지 약 40km 조선인가도를 따라 나고야, 시즈오카  등을 거쳐 에도에 도착하는 왕복 6개월에서 12개월에 달하는 일정이었습니다.  통신사에 대한 일본측의 대우는 최고 VIP로서 일본열도를 열광시켰는데, 에나 통신사들은 당시 일본의 경제나 도시발전을 눈여겨 보지 않았습니다.

이러한 통신사들을 맞이하고 보낸 영가대는 1614년(광해군 6) 경상도 순찰사 권반이 자상대 아래선착장을 만들었고, 이때 파올린 흙이 조그만 동산을 이루자 그 위에 정자를 짓게 됨으로서 만들어지게 되었습니다. 영가라는 이름은 1624년(인조2) 부산에 온 선위사 이민구가 권반의 본관 안동의 옛 이름 永嘉를 따서 '영가대'라 지었는데 주변 풍광이 아름다워 많은 사람들이 이곳에서 풍류를 즐겼고, 통신사들도 떠나기전 영가대에 올라 경관을 즐기며 시를 남기기도 했습니다.  

 사실 동천하구에서 북항수역은 접근성이 좋지 않습니다.. 거기다 북항 재개발사업으로  그 연결은 잠시 보류하는 편이 좋을 듯하여 여백으로 남겨두고 에나 그렇다면 산복도로와 옛 해안선을 따라 코스를 잡아보는 것이 해안7백리의 또 다른 맛이겠다 싶어 영가대와 자성대 부산진성을 거쳐 산복도로에서 북항을 조망하고 옛 영주고개길을 밟아 보았습니다. 영가대에서 자성대 동문으로 하여 일주하다 보면 정상부 못 미쳐  남아있는  왜성의 흔적입니다.  성의 이력이 기구합니다.  원래 부산진성의  지성으로 존재하다 임진왜란으로 부산성이 무너지자 왜성(일본군 선봉장 고시니: 小西行長가 주둔했다 하여 소서성)이 되었고,  왜군이 물러간 뒤 진주했던 명나라 군사의 주둔지(萬公臺)로서  이름 하다가 명의 군사가 떠나자 부산진 첨사영으로 모성(母城)을 대신하여 지성이 본성으로 자리매김되는 이력을 가지고 있습니다.  생각컨데 전후 많은 비용이 드는 성의 복구가 여의치 못해 그나마 쓸만한 상태의 성이 자성대다 보니 그대로 눌러 앉지 않았겠냐는 추론을 세워 봅니다.  

 동쪽문은 건춘문이라 하고 서문을 금루문으로 하고 있습니다.  건춘문의 원 이름은 진동문이었습니다.  그리고 서문 또한 원 자리는 성남초등학교 교정이었는데 지금의 자리로 옮겨와 개축했다고 전합니다. 남쪽은 진남(鎭南)문으로 현재 대의 정상부에 서 있는 겹처마 팔각지붕의 진남대를 말합니다.그리고 북문은 구장루라 하였으며 기록에 의하면 자성대는 동서의 산을 따라 성벽으로 성곽을 두루고 바닷물을 끌어 들여 참호를 만들고 배가 바로 성벽에 닿도록 되어있었다고 합니다.

 사적의 관리가 형편없습니다.  역사와 문화에 대한 인식 부족이 야기한 현상이라고 말해야 할 것 같습니다. 그게 편할 것 같습니다.  부끄러운 노릇입니다.

 육교를 건너면 진시장이 있습니다. 조선시대 5일장이 섰던 부산진성 서문 밖에 있던 시장에서 비롯되었는데, 성문 앞이 시장이 형성될 수 밖에 없는 이유가 사람들이 출입이 잦기 때문일 것이라 봅니다.  진시장은 부산장으로 불렸는데 우암동 장고개에서 부터 거제리 햇바지와 영도아리랑 고개를 넘어서 까지  사람들이 모인 영남의 큰 장 중에 한 곳 입니다.

 

 1951년에 세웠다는 영가대 비를 찾으로 성남초등학교 뒤 골목을 한참이나 헤메었습니다.

 철도부지와 연해 있는 가정집 골목안으로 들어가 담벼락에 세워 둔 사다리를 타고 그 위치를 확인합니다.

 어처구니 없습니다.  이 정도 밖에 안됩니다.  꽁꽁 언 날씨만큼이나 마음이 상했습니다.

 진시장 뒷편 일신병원과 정공단으로 향하며 본 증산입니다.  부산진성으로 추정(?)되는 곳입니다. 

 철길 위 육교를 이용합니다.  100년 전 진시장 터를 가늠합니다. 

 지금은 주택가와 빌딩으로 변했지만  좌측 10시 방향에 봉우리 세개로 솟아있는 황령산을 기준하여 일대가 그 시절 시장통이지 않을 까  짐작해봅니다.

 우측 2시 방향 초가지붕 위 갈미봉과 그 사이 바람고개, 그리고  나무 가지 위 사자봉과 황령산 능선이 여기일 것이란 생각을 하게 합니다.  

 기독병원 가는 길은 철길 육교와 지하철 좌천동역 가구거리  육교 두번을 건넌 다음

 재)한.호기독선교회 일신기독병원  정인규 원목입니다. 불쑥 방문했음에도 불구하고 맥켄지가의 사람들과 일신기독병원의 유래에 대해 상세히 전해주셨습니다.  일신병원과 일대의 부산진교회의 설립자로서 맥켄지(한국명 매견시 1865~1956)목사와 매혜란(매견시 목사의 큰 딸 1913~2009) 초대원장과 매혜영(1915~2005) 자매의 삶은 미쳐 몰랐던 호주 선교사들의  헌신과 생명사랑이었음을 알 수 있었습니다.  2002년 12월 KBS는 '멕켄지가의 사람들'이란 제목으로 크리스마스 특집 다큐멘터리를 제작하여 방송하기도 했습니다.   

일신기독병원은 그들의 부모인 James Noble Mackenzie 매견시 목사와 호주 선교사 메리 켈리 전도사로부터 시작되었습니다.  사진은 1930년 한센병 환자들과 교회가 매목사 한국사역 20주년 되던 해 좌천동에 세운 메켄시 기념비 건립 기념촬영으로 소실되어 2001년 정공단과 일신기독병원 사이 골목에 재건되어 졌습니다.

                              

일신기독병원 뒷뜰로 가면 멘켄지기념공원이 있습니다.   

 매견시 목사와 그의 두 딸입니다. 딸들은 일신기독병원의 설립자이기도 합니다.  그들이 걸었던 길을 공유하고자 합니다.  설직히 잘 몰랐던 이야기입니다. 하지만 대단히 감동적인 삶이었습니다. 그들은 부산에서 나고(1913) 부산에서 성장(1931년 평양 외국인 고등학교를 졸업 ) 한 다음 호주로 가서 의사와 간호사로서의 힉위를 받고 약속이라도 한듯 한국으로 돌아 왔습니다.  일신기독병원의 원래 이름은 일신병원이었고, 초대원장을 역임한 큰딸 매혜란 선교사가 조산교육과 산부인과의사 수련을 하면서 일신부인병원으로 알려져 있었습니다.   병원 이름을 왜 기독병원이라 붙이지 않았느냐는 질문에 그녀는 '약속을 지킬 수있을 지 자신감이 없었기 때문이라고" 한 바 있습니다. 그 정신은  호주로 돌아갈 때 까지 지켜졌습니다.  개인적인 생각이지만 그 정신이 계승되었더라면 해봅니다. 다시말해 굳이 기독병원이라고 타이틀을 달지 않고,  일신부인병원이라 했다면 더 많은 사람들이 기억했을 지도 모른다는 ...

                            

 일신기독병원은 이땅에 살아 있는 또 다른 생명사랑의 기록입니다.  아버지 매견시 목사가 용호농장과 상애원의 핵심 인물이었단 것도 이번에 일게 되었습니다.  

 매견시박사는 한국 한센병자의 친구였습니다.  그들은 부산을 천국이라 불렀습니다.

 

 

 

故 매혜란 원장은 내한 당시 30대의 처녀였으며 결혼도 하지 않고 오직 일신병원과 한국 모자보건 사업을 위해서 일했다고 합니다.  한국 사역 24년 동안, 한번도 치료비가 없어서 돌려보낸 환자가 없다고 퇴임 고별사에서 고백한 만큼 사랑을 몸소 실천했던 선교사입니다.

 그들은 아무 것도 없느ㅜㄴ 상태에서 UN에서 침상을 얻어 일을 시작했습니다.  출산이 있을 때는 가리개를 쳐 놓고 애기를 낳았다고 합니다.

 영상 화면을 캡쳐한 것인데 첫 진료일자가 우측 상단에 보이듯 1952년 7월17일 입니다.  좌측은 임 버부리라고 이름을 적어 두었는데, 주소 없이 초량  역전으로  기록되어 있는데, 그런 환자들이 많았고,  그런 사람들일수록 돈이 없는 가난한 사람들이었습니다. 메혜란 원장은 그들에게 아무 것도 원하지 않았다 합니다. 

 매원장은 호주 귀국을 앞두고 무료진료를 위해 호주 ABC방송을 통해 다큐를 제작하였고, 호주 주요도시를 돌며 모금활동을 벌였다고 합니다. 열흘간 밤낮없이 순회하며 모았던 돈아 당시 한국돈으로 10억원이었습니다.  그녀는 이돈을 메켄지기금을 만든뒤 빈손으로 호주로 귀국했습니다. 귀국 할 때 그녀가 가지고 간 것은 가방하나 였다고 합니다.

 일신병원의 경우 다른 병원과 달리 태어난 아기와 산모가 같이있게 했고, 모유 먹이기 운동을 가장 모범적으로 실천하여 1993년 유니세프 지정   '아기에게 친근한 병원'으로 선정되기도  했습니다.  한국에서는 처음이었습니다.  아기에게 산모에게 좋은 병원은 오래도록 기억되고 입소문을 타고 번져 갔습니다.  그러나 여기에서도 매혜란 원장이 지킨 원칙이 있었습니다.  환자를 대 함에 있어 빈부는 없다. 지인을 통해 들어오는 우선적 진찰이나 시술도 용납하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매혜란(Dr. Helen P. Mackenzie) 선교사는  향년 97세로 지난 2009년 9월 18일 오후 6시 호주 멜번 Karana 양로원에서 별세했습니다.  참으로 고마운 분입니다. 그리고 아름다운 분입니다.                                                                                                                                                                                       

 병원을 나와 정공단 가는 골목에 매견시 목사의 기념비가 있습니다.  그옆 정공단 그 뒷편 일신여학교와 부산진교회가 보입니다. 근대부산의 상징입니다. 문득 일대를 근대역사문화지구로 만들면 어떻겠나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부산에는 임진왜란과 관련하여 3단(壇)이 있습니다.  첫째 동래부사 송상현과 수하 군민을 모신 송공단(宋公壇)과 둘째, 다대첨사 윤흥신과 그 수하를 군민을 모신 윤공단(尹公壇)과 함께 좌천동 일신기독병원 옆 정발 장군을 모신 정공단(鄭公壇)을 일러 3단이라 부르고 있습니다.     

 정공단(鄭公壇) 외삼문입니다. 정공단은 부산광역시 기념물 제10호로서   입구에  안내하는 글에 의하면 ...이단은 1766년(영조42) 부산첨사 이광국이 세운 추념 제단이다.  임진왜란 때 나라의 관문을 지키기 위해 군민을 이끌고 궐기하여 장렬히 싸우다 성의 함락과 운명을 같이 한 부산첨사 정발(鄭撥)이 순사한 부산진성의 남문자리에 설치한 단인데, 정발과 그를 따라  함께 전사한 여러 사람을 모시고 있다.

단 앞에 정공단이라 쓰여진 비가 있다. 단의 서쪽에는 정발의 막료였던 이정헌(李庭憲)을 모시고, 단의 동쪽에는 정발의 열녀 애향(愛香)을 모시고 남쪽에는 여러 군민을 모시고 있다. 남쪽 층계 밑에는 충직한 노복이었던 용월(龍月)의 단이 마련되어 있다.

역대 부산첨사에 의해 음력 4월14일에 제향을 계속 봉행해 왔다. 그러나 1895년 첨절제사(僉節制使) 제도가 폐지되자, 그 후에는 지방민의 성심으로 모은 향사계(享祀契)에서 제사를 지냈다. 1907년 순종이 남쪽지방을 순시할 때 지방민들이 제사를 지내는 것을 보고 하사금을 내려 단의 유지와 향사를 어어 나갔다. 그러나 일제시대에는 민족혼을 일깨운다 하여 제단을 폐쇄당하고, 유물과 비품도 몰수당했다. 광복 후 다시 향사계가 조직되고, 옛비석을 되찾게 되어 단 뒤에 별잔을 쌓아 안치하였다. ... 라고 합니다.   외삼문을 통해 안으로 들어가면 죄측 관리사무실과 우측 전망비가 있습니다.  

 충의공 정발 전망비입니다. 정발(鄭撥,1553(명종8)~1592(선조25))은 조선 중기의 무신으로 연천군 미산면 백석리에서 출생하였습니다.  자는 자고(子固), 호는 백운(白雲), 본관은 경주이며, 군수 명선(明善)의 아들로서, 선조 12년(1579) 무과에 급제하여 선전관이 되었으며 해남 현감, 거재 현령, 위원 군수, 훈련원 부정을 차례로 역임하고 임진왜란이 발발하기 전에 부산진첨절제사로 부임하였습니다. 1592년 4월13일 왜장 고니시(小西行長)가 이끄는 18,000명의 왜적 1진이 경상도 제1의 해상관문인 부산진으로 쳐들어 왔고 정발은 이에 맞서 싸우게 됩니다.  부산진성 전투는 임진왜란때 조선군과 일본군이 벌인 최초의 전투로 1,000명 규모의 군.관.민이 일심으로 끝까지 항전하였으나 중과부적(衆寡不敵)으로 다음날 성이 무너지고 정발장군도 41세의 나이로 순절하였다고 합니다. 

                                                                                                                                                               부산진순절도

이순신의 진중보고문 '임진장초'의 '사변에 대비하는 일을 아뢰는 계본 1'은 당시의 상황을 이렇게 기록하고 있습니다. 

"4월 14일에 발송되어 오늘 4월 15일 술시(戌時 ; 오후 7시에서 9시 사이)에 접수한 경상우도 수군절도사 원균의 공문입니다. '당일 사시(巳時 ; 9시에서 11시 사이)에 접수한 가덕진 첨절제사 전응린(田應隣)과 천성보 만호 황정 등의 긴급 보고에 의하면, 응봉의 봉수감고 이등과 연대감고 서건(徐巾 ; 전선에서는 建으로 표시) 등이 와서 고하기를 오늘 4월 13일 신시(申時 ; 오후 3시에서 5시 사이)에 대해선 몇 십 척인지 대략 보이는 것만도 90여 척이 본토(本土 : 일본)을 나와서 좌도(左島 : 경상좌도)의 추이도(지금 부산 사하구 살이섬)를 지나 부산포(釜山浦)로 향하는 바, 까마득하여 그 척수를 상세히 헤아려 볼 수는 없었으나, 계속해서 나오고 있다고 하므로 첨사로서는 방략에 의거하여 부산과 다대포의 유요격장으로 하여금 군사와 전선을 정비하여 바다로 나가 사변에 대비하게 하였다."

 

그러나  

1592년 4월 14일 새벽 6시에 일본군은 우암동 방면으로 상륙하여 부산진성에 접근했습니다. 왜군의 침략 사실은 곧 부산진 첨사인 정발에게도 보고되었고. 이 날 정발은 절영도에 사냥을 나갔다가 적의 침략 소식을 듣고 급히 성내로 돌아왔다고 합니다.  고니시는 쓰시마 태수 요시토시를 통하여 정발에게 자신들의 목적은 명나라를 치러 가는 길이니, 조선은 길만 빌려주면 어떤 해도 입히지 않을 테니 길을 열어 달라고 하였고. 첨사 정발은 조선 국왕 선조의 통과 명령이 없다며 불가하다고 대답하였습니다.  협상은 결국 결렬될 수밖에 없었고. 14일 왜군은 예측대로 부산포 우암에서 삼분하여 결전시키고 배를 부산포 안에 차례로 상륙한 다음 공격에 들었습니다.

전투는 처절한 항전에도 불구하고 중과부족에 조총이라는 신무기 앞에 함락되고 말았습니다.

부산진 전투가 끝나고 장군의 시신을 찾지 못하여 유품(옷과 갓)만 수습하여 의관장을 치렀으며 후에 무공이 알려져 좌찬성에 추증되었습니다. 시호는 충장(忠壯)으로 현재  충열사(안낙서원)에 제향되고 있습니다. 부산진성 전투는 소수 군민의 항전이었으나, 그 결의가 드 높아  성을 함락한 왜군은 그 분풀이로 군신(軍神)의 혈제(血祭)라 하여 개, 고양이까지도 죽였다고 합니다. 일본 내에서 활동했던 선교사 루이스 푸로이스는 임진왜란에 참전한 사람들의 증언을 토대로《일본사》에 당시의 참혹함을 기록했습니다. 그리고 난 후  왜인들이 남긴 기에 의하면 '우리는 부산에서 크게 좌절되었다', '흑의장군이 가장 두려웠다'고 말할 정도였다니 그 전투가 얼마나 치열했는지 가늠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한편 그 위급한 상황에서 동래 좌수영의 박홍은 모든 전투함을 스스로 부수고 군량 창고에 불을 지른 후 수영을 버리고 퇴각하였다고 합니다.  그는 멀리서 부산진성에 불길이 치솟는 광경을 보고 이날 아침에 조정에 '부산진성이 함락됐다'고 장계를 올렸는데 조정에서 왜군의 침략을 알게 된 것은 4월17일이었습니다. 이 후 박홍은 언양을 거쳐 경주로 도주했다고 합니다. 정발의 결사항전이 돋보이는 이유가 이런데 있습니다.

전망비에는 이런 시가 적혀 있습니다.    산악이 우? 솟은 것 높다할 것 없고/ 해와달이 빛나는 것 밝다할 것 없네/ 오직 공의절개 만이 세상의 기둥이 되니/ 고립된 성의 일편단심 만공의 모범일세/ 노복과 첩의 충직함도 한 집안에 우뚝하고/ 막료인 이공도 낭나라 남팔처럼 늠름하였으니/ 짧은 비석에 적기 어려워도 깊은 바다처런 다하지 않으리   

 충절을 뜻하는 오죽이 단으로 오르는 계단 옆에 심겨져 있습니다. 

 내삼문에서 바라본 단의 모습입니다. 단 중앙에 충장공정발장군비가 세워져 있고  서쪽에 막료으로 전사한 이정헌을 모시고 있습니다.  그리고 우측에는 이름없는 무명용사이자 군민이 모셔져 있습니다. 이정헌은 당시 부산진성이 임지가 아니었기 때문에 그의 순절은 뒤늦게 알려지게 되었는데, 영조 때 동래부사 홍명한이 부임해 오자 말자  성안의 못을 파 임란때 전사한 유골들을 수습하여 합장?는데,  그 무렵 주위의 어떤 사람의 꿈에 팔척 장신의 사나이가 큰 칼을 차고 나타나서 말하기를 " 나는 임란때 정첨서를 도와 성을 지키다 순절한 이사맹 정헌인데 아직까지 찬밥제사조차 받아 본일이 없다 " 함으로 날을 받아 못가에 단을 베풀고 제를 지내주었음을 부산진위안제문은 전하고 있습니다. 

 훗날 이정헌장군은 통정대부 승정원 좌승지로 추종되었습니다.  

 충노 용월과 애첩 애향의 비는 보다 다르게 와 닿았습니다.  노복 용월의 경우 1948년에  비가 새로이 만들어 졌다고합니다.  문득 신분사회를 뛰어 넘어 오늘에 그 죽음을 기려 봅니다.  최후의 순간이었을 것입니다.  어차피 목숨을 건졌다 하더라도 욕된 삶이었을 것입니다.  그렇다고 하더라도 살면서 이런 심복이나  애첩(?)이 있다면 ...   

 정공단을 나서며 선망비며 공덕비를 살펴 봅니다. 군민이 추앙하고 고마움을 느끼며 세운 비가 몇 개나 있을까?  정공단을 나와 조금 오르막길로 일신여학교와 부산진교회를 찾아갑니다.

황령산을 배경으로 들어선 이 한장의 사진이 오늘따라 새롭게 보입니다. 역시 아는 만큼 보이나 봅니다.  

 

 

 

  

 

산복도로가 시작됩니다.  그 생성 배경은 일본이 대륙침략을 위해 인구 40만 정도로 계획하였던 부산은 8·15해방과 함께 국외에서 귀향하던 중 정착한 사람들,6·25전쟁 피난민으로 뿌리를 내린 사람들,그야말로 각양각색의 이방인과 외래인이 모여들어 1965년에는 인구 100만을 훌쩍 넘어서는 대도시가 되었습니다.
주거지는 급속히 불어나는 인구를 감당하지 못하고,그로 인해 서민들은 부산항이 내려다보이는 산 중턱에 모여 살기 시작하였습니다. 고향을 떠나온 이들은 생활터전이 내려다보이는 경사지에 판잣집을 짓고 동네를 이루었습니다. 하루 일을 마치고 산비탈 보금자리로 돌아가는 오르막길은 힘들었지만 발 아래로 펼쳐지는 부산항의 야경은 현실의 시름을 잊게 했습니다 .

실향민들이 제2의 삶의 터전으로 자리잡았던 영주동,수정동,좌천동,범일동 등 대부분의 주거지는 어디에서나 부산항이 한 눈에 들어옵니다. 서민들의 주거지를 연결하고 있는 망양로는 지형상 특징으로 인하여 구비구비 특유의 조망권을 가지고 있는데. 산등성이를 따라 시시각각 변하는 망양로의 풍경은 때로는 마을의 골목길처럼,때로는 시원하게 뻗어있는 신작로처럼 보이기도 하고,대청공원 인근에 이르면 부산항의 전경을 펼쳐보이기도 합니다. 때문에 이 길은 재일한국인 모국 방문단이 왔을 때 지난날을 회상하면서 꼭 찾았다고 합니다. 부산항까지 멀리 트인 망양로의 시야와 풍경은 망향의 아픔을 달래기에 최적의 장소였기 때문입니다.

 

 

 

 

 

 

 1481년 간행된 동국여지승람에는 "부산(釜山)이란 지명은 '가마'꼴을 닮은 산'에서 유래했다"고 쓰여져 있습니다. 가마꼴을 닮은 산은 동구 좌천동 금성중학교  뒷산인 증산(甑山)을 지칭하는 것이란 설이 유력한데, 떡을 찌는시루(甑)와 가마(釜) 둘 다 '불을 때는 그릇',  취기(炊器)로 야트막한 산의 모양을 비유하고 있다고 본 것입니다. 1402년 태종실록에 부산(釜山)은 '부산(富山)'으로 처음 등장합니다.  여기서 부(富)는 '풍부하다, 재산이 많다, 크다'는 뜻의 '가멸다'에서 온 말인데,  몇 해 전  이근열 부산대 국어교육과 강사가 쓴 '부산 땅이름의 말밑

연구'에 의하면 부산이란 지명이 수정산에서 유래했다고 합니다.                                                                                                                                                                                                        

통설에 대한 새로운 주장인데 예의  부(富)라는 뜻이 '가멸다'라는 것과 관련하여 인근 수정산의 옛 이름이 '감산', '가마메' 아니면 '머리산'이었을 것으로  보는 한편   수정동에서 산을 넘어 부산진구 가야동으로 넘어가는 고개를  가모령, 가마고개라 했다는 것에서 유래를 찻고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어찌된 까닭인지 부산(富山)과 부산(釜山)이 한동안 혼용돼다가 1481년 동국여지승람 이후부터 부산(釜山)으로 정착했습니다.  왜 부산(富山)이 부산(釜山)이 됐는지 ...                                                                                                                            

증산공원 입구입니다. 아주오래전에 잠시 동물원이 머물다 간 터이기도 합니다.  그 흔적들이 아직도 남아 있습니다. 그러니까 금강공원 한 쪽에 있던 동물원의 전신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전하는 말로는 화덕 구덩이에 동물이 있는 형상이라 하여 풍수상으로 문제가 있었다고 합니다.  

동구 도서관입니다.  늘 이해 안되는 일이 왜 도서관을 산꼭대기나 외진데 세우는 것이냐 입니다.  이렇게 높다란 데 있으면 아무래도 이용율이 떨어질 것이라 보기 때문입니다. 접근성이 좋아야 책을 읽는 시민이 많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마을마다 있어야 하는데 터무니 없습니다.  한 지역 한 도시의 문화적 척도요 수준을 가늠하는 지표가 도서관입니다.  어쨌뜬 이 도서관 옥상에서 바라보는 조망이 과연 부산진성을 여기에 설치할 법만 했구나 하는것을 알 수 있는 곳이었습니다.  특히 해상의 움직임을 한눈에 조망할 수 있었습니다.                                       

수정산과   가야동으로 넘어가는 고개를  가모령, 가마고개으로 추정되는 곳입니다.  백양산과 금정산이 얼핏 걸려 있습니다. 

황령산과 자성대, 우암포 일대가 보이는 곳입니다.  

그리고 영도와 왜관 일대가 한눈에 들어 옵니다.   

구봉과 엄광산 뒤에 보입니다.   

왜성의 흔적입니다.  마땅히 설명하는 안내판이 없습니다.  

 

 증산공원을 나와 본격적으로 산복도로를 타기 위해 상아약국으로 이동합니다.

  

   수정산은 1960년대까지만 해도 정상부에서  수정(水晶 : 투명한 무색의 석영 결정)이 발견되었다고 합니다.  수정산 터널 공사현장에서도 수정이 쉽게 나온 것으로 미루어 수정산의이름 자체가 수정에서 유래된 것은 아닌가 여겨집니다.  

부경대 박맹언(환경지질학과)교수에 의하면 "수정산의 수정은 7천만년 전 마그마가 식어 화강암이 될 때 함께 만들어진 것으로 비슷한 지질조건을 갖는 백양산 기슭에서도 수정을 볼 수 있었다. 10여년 전 백양산 중턱의 산복도로 공사 때에 크고 작은 수정굴이 파헤쳐져 비가 오면 빗물에 씻겨 반짝거리는 수정이 사방에 널려 있어 수집가들이 몰려들었으나 지금은 산의 중턱까지 집이 들어서 찾기가 쉽지 않다.

수정은 지하의 뜨거운 물속에 녹아 있던 규소성분이 결정화된 것으로,얼음이라는 뜻의 그리스어 크루스탈로즈(krustallos)에서 유래되었다. 고대 그리스인들이 올림포스산 동굴에서 아름다운 석영 결정을 발견,이 광물이 신이 맑고 투명한 물을 영원히 보존하기 위하여 얼려 놓은 것이라 여겨 얼음이라는 뜻의 이름을 붙였다고 전해진다." 고 합니다.  

이곳 산복도로를 연작시로 쓴 사람이있습니다.  강영환시인입니다.  경찰공무원이던 아버지를 따라 전남에서 부산에서 이사를 와 영주동, 수정동, 초량동에서 살았고 지금도 살고 있습니다. 83년 첫 시집 '칼잠'에 '산복도로' 연작을 실었는데 다른 지방의 문우들이 "산복도로가 뭐냐"라고 고개를 갸우뚱했다고 합니다. 사전에도 없는 말입니다. 그러나  시인은 이곳을  가장 정직하게 그리고 있습니다.     '밟을수록 솟아오르는 길이 있다/ (중략) 눈물겨운 피난살이 오르막길 범냇골에서 성북고개를 넘어 범일,좌천,수정동을 지나 한숨 돌리는 곳,초량 조그만 산동네 나는 거기에 산다'

 

화가들 역시 산복도로를 많이 담았는데 좌측 그림이 화가 구해인의 도시라는 작품이고 우측은 얼마전 작고한 화가 고 방병제의 '하늘을 보다'입니다. 그리고 아래는 화가 설종보의 '수정동-산복도로의 일상'입니다.   박화뱍의 경우 달동네의 가파른 골목길, 산자락 아래 다닥다닥 붙어 있는 지붕들 등 산동네의 일상을 즐겨 그렸는데 따뜻하고 정겨운게 특징입니다.  "(…)어둡고 험한 산자락 사이로 꼬불꼬불 실날 같은 길이(…) 아득한 산등성이 너머로 사라진다. (…)그 눈부신 하늘 아래 낮게 자리잡은 조그만 마을이 보인다. 그곳은 '희망'이라는 이름의 마을이다." 고 이동석 미술평론가는 박 화백의 그림을 '따뜻한 비관주의'라고도 하였습니다.

 

 

 

 

 


소설가 조갑상 씨가  2007년 7월26일 -'바다가 보이는 골목길' 이란 제목으로 부산일보에 실었던 글의 전문입니다.    

 "아버지들은 언제부터 도시로 나와 자식들을 도회지 아이들로 키웠을까. 1950년대 중반, 수정동 언덕의 그 거미줄같이 이어진 골목길에서 뛰놀며 나는 도시 아이로 자랐다. 전차와 버스가 다니는 고관입구 큰 길을 제외하고 그 동네는 모두 골목으로 통했다.

골목은 막다르게 막힐 듯하면서 다른 골목으로 연결되어 '우리 동네'를 좌천동과 초량으로 이어주면서 구봉산과 수정산으로도 쉬 오를 수 있었다. 그리고 여름에는 철길을 건너 동아제분 옆 바다로 갔다. 그 바다에는 보르네오인지 인도네시아에서 수입해 온다는 원목들이 학교 운동장보다 더 넓게 떠 있었다. 그 위를 건너뛸 때마다 둥근 원목들은 빙그르르 돌았고 등을 태우는 뜨거운 태양까지 같이 물속에 빠지는 듯해서 아찔아찔하면서도 신이 났다.

당시 놀이는 거칠었다. 조금이라도 평평하고 넓다 싶은 골목에서 하던 딱지치기, 죽말타기, 깡통차기. 그리고 철길에서 주워온 석필로 누구 집 형하고 누나하고 연애한다는 낙서하기. 무엇보다 제 맛이 나는 놀이는 어스름밤의 도둑놈잡기였다. 낮에는 눈 감고도 찾아갈 수 있던 길이지만 순경이 된 아이들은 어둠이 아가리를 벌리고 있는 캄캄한 골목 입구에서 친구의 이름을 부르면서 '야 임마, 니 그 안에 숨었제!'라고 고함만 칠 뿐이었다.

그렇게 고단하게 뛰놀다 잠자리에 든 날에는 이상하게도 새벽 일찍 일터로 나가는 아버지들의 발자국 소리에 잠이 깨곤 했다. 지금도 피곤하고 힘든 날이면 내가 그 골목길 길 가 집에 누워 있는 착각에 빠지고는 한다. 어른이 되어서도 나는 여전히 그 동네에 속해 있는 것이다.

일본식 저택과 배집처럼 길게 이어진 철도관사가 남아있던 그 동네에서는 철도와 부두가 가까웠다. 시골에서 도시로 갓 나온 아버지들은 주로 거기서 선로반원이나 가대기 일을 했다. 그리고 범일동 미군 제 5보급창에 노무자로 나가는 아버지를 둔 아이는 어쩌다 통조림이며 초콜릿을 가져와 우리들의 입맛을 다시게 했다.

아버지들은 단순하고 거칠었다. 매일같이 술을 마시고 골목이 시끄럽게 고함을 질렀으며 복날에는 뒷산에 올라가 개를 잡아먹었다. 어머니나 누나들 중에는 분을 바르지 않아도 얼굴이 하얀 이들이 있었는데 고무공장에서 고무 가루를 많이 마셔 그렇다고 아이들은 쉬쉬거렸다. 이웃들은 누구 집 큰아들이 언제 배를 타고 나갔는지, 또 누구 집에 언제 시골에서 쌀을 부쳐왔는지를 다 알면서 아이들 싸움이 어른 싸움이 되거나, 빌려간 돈이나 물건 때문에 아웅다웅 다투기도 했다.

그렇지만 수도 사정이 나빴을 때 유일한 동네 급수원이었던 우물을 두고는 신기하게도 모두들 '우리 동네' 사람이 되었다.

"누구 집에 세든 여편네 못쓰겠더라 라는 입방아도 근본 원인은 우물에 있었다. 위생관념이니 그런 것 하고는 관계가 먼 동네 어른들의 우물에 대한 태도는 참으로 이상할 정도였다. 간섭 없이 내놓고 키우는 아이들이지만 우물가에서 뛰놀거나 더럽히는 것을 어머니들 중 누군가가 보면 당장 불호령이 떨어졌다('은경동 86번지'중에서)." 그 우물은 물 좋다고 소문이 난 것도 아니고 여름에 별나게 시원하지도 않았다. 동네의 자질구레한 일에는 이해관계가 엇갈렸지만 우물 관리에 대해서는 하나같이 의견이 맞았다. 아버지들은 술 마시고 싸우다가도 '우물물 마시고 술 깨고 와서 이야기해라'라는 소리를 했으며, 아이들은 '니는 우리 동네 우물물 안 마시나?'라는 말로 같은 동네 산다는 걸 단박에 일깨웠다.

어제까지만 해도 촌사람들이었던 어른들에게 개천 옆 암벽 아래에 자리한 그 우물은 삭막한 도시에 살면서도 고향의 두레공동체 의식을 되살려 주는 유일한 마음의 안식처였다. 남남으로 모여들어 약삭빠르게 살 수밖에 없다는 걸 알면서도 아버지들은 본래의 자신들을 회복시킬 무엇인가가 필요했던 것이다.

언제쯤부터인가 동네가 변하기 시작했다. '서울내기 다마내기 맛좋은 고래고기'라고 놀려먹던 전쟁 때 피란 내려온 서울 아이들이 하나 둘 제 고향으로 돌아가기 시작한 얼마 뒤였다. 동네로 오르는 흙길에 시멘트 포장을 하고 냄새나는 '또랑'이 복개된 것은 시작에 불과했다. 자동차 유리창 너머로 보아도 머리가 아주 하얗던 이승만 대통령이 지나간 중앙초등학교 길 건너 철길가 동네가 먼저 철거되고 곧이어 산동네 판자들도 철거되었다.

물론 그 전후로 몇몇 죽음들도 있었다. 흔들리던 원목더미 위에서 꼬시래기를 낚고 헤엄도 치던 그 바다에서 새로 산 수경을 쓰고 잠수 자랑을 하던 용구가 다시는 물 위로 떠오르지 못했다. 철길에서 석탄이나 쇠붙이를 훔쳐 팔던 민수 형이 기차에 대해서는 그렇게 빠삭하게 잘 알면서도 달리는 기차에 치여 죽고, 이승만 대통령 물러나라는 데모가 일어났을 때는 구두를 닦던 철만이 형이 총에 맞아 죽었다('가는 봄 오는 봄' 중에서).

그리고 얼마 후 군인 출신 시장이 대대적인 도시정비라는 걸 했던 것이다. 산복도로라는 낯선 이름의 길이 나고 아파트가 들어서면서 '우리동네'의 개념에 혼란이 왔다. 어떤 아이들은 반송동이나 용호동으로 떠나고 남은 친구들은 이제 중학생이 되고 고등학생이 되어 맨발의 청춘을 부르면서 중앙극장, 미성극장을 기웃거렸다.

그 동네에서 우리들의 성인식은 어느 지점에서 시작되었을까. 원목 더미 밑에서 용구가 끝내 헤엄쳐 나오지 못했을 때. 아니면 우물이 공식적으로 폐쇄되어 시멘트 뚜껑이 덮이던 날? 또 아니면 전차 레일 위에 대못을 얹어 그 뜨거움을 참아가며 예쁜 단검을 만들었던 그 레일이 철거될 무렵?

그 시절에는 시간이 참으로 느리게 흘렀다.

바다로 가기 위해 건너던 철도 건널목을 한정없이 가로 막고 서 있던 꼬리 긴 화물열차처럼. 아니면 끊어질 듯 이어져 어디로든 통하던 그 나른하던 골목길처럼 시간은 지루하게만 흘러 어서 어서 어른이 되고만 싶었다. 동네 형들처럼 원양어선을 타고 나가거나 직업군인이 되어도 좋았고, 중장비 기술을 배워도 좋았다. 지겨운 아버지들을 벗어나 새로운 땅을 찾고 싶었다.

그리고 어른이 되었다. 고단한 노동을 막소주 한잔으로 달래면서 시골 인심을 마지막으로 간직했던 아버지들은 떠나고 자식들은 정신없이 지나가는 시간에 허둥대다 이제 그 아버지들보다 더 나이를 먹었다. 단순하고 거칠었던 아버지들과는 달리 다들 세련되고 싹싹하게, 그러면서 이해타산에 밝은 옹졸한 중산층이 되었을까. 설령 그렇게들 되었다 해도 그건 우리 탓이 아닐지도 모른다. 제 가슴마다의 우물 하나씩을 잃어버린 세대로서는 그렇게 살 수밖에 없었던 게 아닐까.

얼마 전에 그 동네 골목길을 다시 가 보았다. 푸른 이끼 앉은 담장을 따라 걸으며 어느 친구가 살던 집이라는 걸 가늠하다 시멘트 포장 위에 찍힌 성급한 발자국이 그대로 남아있는 걸 보았다.

세월은 비바람처럼 그냥 지나갈 뿐 추억은 생생하게 살아 있었다. 그리고 빌딩에 조금씩 가려지고 컨테이너 하치장 너머로 보이는 바다는 여전히 내 가슴을 설레게 하며 나를 소년으로 만들었다. 사십 년 시간을 단숨에 이어주는 마법 같은 공간에 내가 서 있었다.

옛 교통부, 범곡사거리에서 시작되는 망양로에 서면 야경이 좋다. 동구에서 중구까지 도로의 길이도 만만찮은 데다 경사와 굴곡이 있어 보는 위치에 따라 시가지와 북항의 풍경도 달라진다. 가슴 답답한 일이 있거나 옹졸한 마음에 부대낄 때 나는 내 유년의 순수했던 바다가 있는 망양로로 간다.

산복도로는 수많은 사람들에게 향수를 불러 일어키는 곳입니다.  특히 산복도로 망양로에서 바라다 보는 부산항의 조망은 또 다른 부산보기의 매력입니다.  이곳에서는 부산의 역사와 도시발달사를 읽을 수 있습니다.  산복도로와 관련 시인 최영철은  "산복도로는 부산이 만든 길 중 가장 상부에 위치한 길이다. 위치로는 높은 길이지만 경제 가치로는 낮은 길이다. 낮은 길이어서 가장 나중의 길인 듯 하지만 가장 처음의 길이다. 오륙십년대 부산에 정착한 사람들이 가장 먼저 둥지를 틀었던 처음의 길이다. 고향산천 일가붙이를 떠나 빈손으로 배수진을 친 곳이다. 그런 점에서 산복도로는 가장 막다른 길이다. 더 이상 선택의 여지가 없었던 가장 나중의 길이다.

그런 산복도로는 높지도 낮지도 않은 중심에 있다. 산의 복부,산의 허리,산의 중간을 관통하는 도로다. 이쪽저쪽 위아래에 사람들의 마을을 옆구리에 끼고 있다. 오늘의 부산을 땀 흘려 일군 주역들이 살고 있다. 돈 모아 일찌감치 저 아래 동네로 내려간 사람도 있고,산동네 달동네의 인정이 좋아,저 아래 탁 트인 넓은 시야가 좋아,그대로 눌러 사는 사람도 있다. 어서 부지런히 돈 모아 반듯한 제 집을 가지려고 땀 흘려 가파른 비탈길을 오르내리는 사람들이 있다.(중략)구비치는 2차선으로 부산의 허리를 질끈 동여매고 달린다. 산복도로는 부지런했으나 가난했다 가난했지만 쉽게 낙담하지 않았다. 무슨 술수를 부리지도 않았고 널뛰기를 해 공과를 부풀리지도 않았다. 저 아래 평지의 삶을 부러워하지도 않았다. 아픈 허리를 곧추세우며 이마에 흐르는 땀을 닦으며 저 아래 평지를 아우르며 살았다. 산복도로의 그런 넓은 아우름은 무등을 타고 바라보는 세상과 같다. 산복도로에 산다는 것은 아래의 시처럼 무등을 탄 높고 넓은 시야를 가진다는 것이다.

부산종합사회복지관을 돌아 나오다 양지바른 곳에서  할머니 한분을  만났습니다.  목욕갔다 오시는 길이었습니다.  그길도 만만찮았던지 잠시 다리쉼하고 계시길레  몇 마디 말씀을 들었습니다.  78세로서 김해에서 난 이후 16살인가 17살에 시집와서 고생만 잔뜩했다고 푸념이십니다.    

5층 높이의 수정아파트 어느 집에서 물이 새는지 고드럼이 주렁주렁 열렸습니다.     보기에사 신기하지만 정작 사는 사람은 이런 동네를 벗어나고자 하는 욕구가 강합니다.  그래서 재개발되기를 희망합니다.  하지만 이곳이 종래의 재개발 방식이라면 곤란하다고 봅니다. 그렇지만 고민되는 지점입니다. 그렇다면 어떤 식의 개발이어야 하고 디자인이어야 하는가.  산복도로는 부산의 상징입니다.  고급화를 지향하면서 원형을 보전하는 방식을 생각합니다.      

 한 블륵 아래 망양로가 휘어집니다.

 

천명사를 비롯하여 다보사, 무명사 등 서로 다른 종파의 절집이 한 라인에 다닥다닥 붙어있습니다.  공간이 부족하다 보니 축대 위로 건축물이 삐져 나와 있습니다.  나름 공간을 최대한 활용한다고 한 생활의 산물입니다.  산복도로 건축의 한 특징입니다.  

수정도시아파트와 만나는  지점입니다.  입지가 불쾌한 건물입니다. 주변을 고려하지않고 그냥 들어 섰습니다.  일종의 폭력입니다.  순순히 들어서도록 해주었던 주민들이 참 착하신 분들 같습니다.  하지만 이 또한 이 지역의 재개발에 대한 상징건물로서 기억되어야 할 것입니다.  몇 해전 아마 2003년 쯤인데 그때 친구인 가가건축소의 안용대 소장 등과 이 길을 걸었던 적이 있는데, 그때 안소장이 했던 말이 생각났습니다.   '아파트를 공동주택이라 부르는데,과연 그 속에 함께 살아간다는 '공동'의 의미가 남아 있을지 의문이다. 오히려 단독주택이 '공동'의 이념을 실현하고 있다.' 고층아파트엔 저만 양껏 즐기려는 이기주의가 숨어 있다는 얘기였습니다. '경관은 두가지 얼굴을 갖고 있다. '보이는 경관'과 '보는 경관'이 그것인데 우리 모두가 즐기는 남항의 시원한 펼쳐짐이 전자라면,내 아파트 베란다에서 바다를 만끽하는 건 후자인 셈이다. ' 고층아파트 뒤편 그늘에 덮인 수많은 단독주택 풍경이  씁쓸하게 보이는 이유가 이 때문입니다.

이제 망양로를 따라 초량동으로 이동합니다.  망양로 대신 제일 윗길로 선택했던 것은 안전 때문이었지만  에나 망양로가 더 낫다는 판단입니다.  조망점도 훨씬 많고, 안전할 것이라 생각했던 보행 조건도 망양로가 더 좋기 때문입니다.    부산고등학교의 운동장과  부산역 일대, 그리고 신선대로부터 영도 봉래산 아래의 북항 수역이 한눈에 들어 옵니다.  많은 수의 시민들이 산아래서 일하고 산위에서 쉼니다. 그게 부산의 삶입니다. 

산복도로의 토지이용을 단적으로 보여주는 옥상 주차장입니다.  전망도 좋습니다. 그리고 집집 마다 옥상에 세워둔 물통이 이 도시의 물 사정을 대변합니다.  고지대라 물공급이 원할하지 못했던 시절, 비상시기를 대비한 생활의 선택입니다.   

컴퓨터 과학고를 지나   금수사 방면으로 이동합니다. 

도로표지판에도 정권의 이해가 반영됩니다.  김대중, 노무현 정권 때는 중앙공원 대신 민주공원이었습니다.

금수사 앞 삼거리 옹벽에 벽화작업이 진행중입니다.  회색 벽면이 생명을 얻고 있는 순간입니다.  이곳을 오르내리는 주민들도 좋아들 합니다.  변화란 이런 것이라 봅니다. 거대한 것이 아니라 방치되거나 버려진 공간에 대한 관심과 배려입니다.    

금수사 앞에서 명태고방길로 향합니다.   구봉우편취급소에서 초량성당쪽으로 내리 걷다  민생약국을 기점으로 초량시장통으로  흘러 들었습니다.  배가 출출하기에 이전에 잘 가던 시장통 순대집에 들러 막걸리 한잔을 새참겸 나누었습니다.

  남선창고입니다.  결국 헐리고 말았습니다.

허물기전 미리 찍어 둔 사진이 있어 비교해 봅니다.  부산에는 보존가치가 있다고 여겨지는 근대건축물이 50여 곳에 달하지만 소유자의 의향에 따라 언제든지 철거될 운명에 처해 있습니다. 그 상징적 사건(?)이 백제병원 바로 옆에 있던 남선창고입니다.  초량객주 사람들이 원산에서 온 명태며 수산물을 부려 삼남지방 일대에까지 공급하던 물류창고로서. 1900년대에 지어진 부산에서 가장 오래된 근대식 창고건물이었으나, 대형마트를 짓기 위해 얼마 전 철거됐습니다.  이런 문제를 해소하기 위해 조례 제정 움직임이있었지만 무산되어 버렸습니다.

근대건축물은 전통과 현대를 잇는 가교이자 기억의 공간이며, 지역의 이야깃거리이기도 합니다. 근대에 개항해 비로소 도시의 기틀을 마련한 부산에 근대가 지워진다는 것은 지역의 정체성을 잃는 것과 같은 것입니다. 

2008년12월1일 촬영  

이곳은 한국전쟁이 낳은 부산의 이방인지대였습니다. 한때는 '텍사스촌'이라 불리웠던 곳 입니다. 전쟁으로 중앙동 뒷골목에 미군 상대 홍등가가 생기고, 권총을 차고 몰려드는 미군들은 서부 활극을 연상시키는 장면을 연출하기도 하여 언제부터인가 텍사스촌 또는 리로 불리게 되었다고 합니다. 원래는 중국 조계지가 있어서 청관(淸館)으로 불렸던 곳입니다. 텍사스촌은 원래 중구 중앙동에 있었으나 옛  부산역전 대화재로 인해 청관이 있던 자리로 옮겨 졌습니다. 1980년대 이후에는 러시아 선원과 상인이 즐겨 찾는 것으로 변모했습니다만  한번씩 미군함정이 입항할 때면 곳곳에 그들을 환영하는 현수막이 나붙기도 합니다.  

 

부산항의 역사를 간직한 도심 속의 옛길-영선고개와 관련하여 이 구간과 관련 가장 정통한 사람 중의 한분인 김한근 (부산불교역사연구소) 소장의 글로서 대신합니다. 김소장과 저는 왜관연구회 회원입니다.   

 

중구 영주동 영주시장에서 대청동 인쇄골목에 이르는 불과 1.14km 남짓한 영선고갯길. 하지만 행정도로명의 영선고갯길은 보수동 책방골목 입구에서 영주터널에 이르는 길을 지칭하고 있다. 역사를 제대로 기억하지 못한 누군가에 의해 바뀌게 된 도로명으로 인해 그 역사 현장도 바뀌는 중대한 실수를 범한 것이 되고 말았다. (최근 관련 기관에서는 중구청 앞을 관통하는 영선고갯길 명칭을 바꾸기로 하였다. 하지만 원래 영선고갯길 명칭은 동광로로 하기로 결정하였다 한다.)

1910년까지만 하여도 지금의 초량지역에서 옛 초량(오늘날 용두산 일대) 지역 사이에 해안 쪽으로 돌출된 해발 40미터 남짓한 쌍산①이라 불리우던 두 개의 산으로 인해 이들 지역으로 연결하는 유일한 고갯길이 영선고갯길이었다. 쉬엄쉬엄 걸어도 7~8분 남짓이면 걸을 수 있는 길이지만 걷다보면 고갯길이라는 느낌이 크게 다가오지 않는다. 게다가 이 길에서의 느낌은 그저 조용히 뒤로 물러난 초로(初老)의 뒷모습처럼 도심의 쇄락한 뒷길에 불과한 모습이다. 하지만 이 길의 역사성은 1678년 수정시장 일대의 두모포왜관이 용두산 일대 초량왜관으로 이건되면서 역사의 무대에 나타나기 시작하는데 조선후기 동래부의 역사 뿐 아니라 조일(朝日)간의 무역과 외교의 중요한 역사의 현장이었다. 길 이름이 영선고개가 된 것도 왜관(倭館) 건물의 수리〔영선(營繕)〕를 위해 다니던 길이라는 의미에서 생겨났다.

 

영선고갯길의 시작은 영주동 새영주시장에서 150여미터쯤 떨어진 초량 상해문 안쪽에서 시작점을 잡는다. 상해문 안 골목 네거리에 자리한 홍성방이라는 중국요리집은 옛 설문(設門)터 였다. 설문은 그 문 안쪽인 옛 초량지역(용두산 일대)에 거주하는 왜관의 왜인(倭人)들의 조선인 부락으로의 무단출입을 막기 위해 동래부에서 마련한 군관들의 기찰(譏察)터였다. 설문 위로 산 정상까지 돌담을 쌓았는데 이 담은 설문 바로 아래 해안까지 연결되어 있었다. 지금은 요리를 시켜놓고 희희낙락 소주잔을 기울이는 유흥장이 되었지만 그 옛날 설문을 지키던 수문장들의 위세는 삼엄하기 짝이 없었을 것이다. 더욱이 이 문을 통하여 공무를 보던 사람들 이외 왜관에서의 무역을 위해 드나들던 무수한 사람들의 수많은 사연들도 떠올려 본다.

 

설문터에서 영주터널 방향으로 150여 미터쯤에 새영주시장이 있다. 이 시장은 건너편 영주시장과 함께 한국전쟁으로 인해 영주동지역에 판자촌을 형성하고 살았던 수많은 피난민들의 애환이 서려있는 곳이다. 새영주시장에서 길을 따라 위로 오르다 봉래초등학교⑤ 뒤편 육교로 오른다. 이 육교 위에서 봉래초등학교와 영주터널 방향 도로 일대를 살펴본다. 옛 초량객사(草梁客舍)터를 가늠해 보기 위해서이다.

  

임진왜란 이후 조선과 일본의 양국관계는 전쟁 전과 다른 새로운 국면을 맞게 되었다. 특히, 일본사절의 활동은 철저히 통제되어 서울에 있던 일본 사신이 머물던 동평관(東平館)은 폐쇄되고, 부산의 왜관 만이 대일교섭의 유일한 창구로 자리 잡게 되었다. 왜(倭)의 사절은 이곳 초량객사(草梁客舍)에 마련된 조선국왕의 전패(殿牌)에 숙배(肅拜)를 올리고 예물을 증정하는 숙배식을 올렸다.

초량객사의 규모는 정청(正廳 : 국왕의 전패를 모신 곳), 동서헌(東西軒) 44칸, 중문(中門) 3칸, 좌우익랑(左右翼廊) 2칸, 외삼문(外三門) 3칸으로 1676년 동래부사 이복(李馥)이 처음 세웠다. 그 후 1734년 동래부사 최명상(崔命相)이 중창하고, 1825년 동래부사 이항(李沆)이 외삼문을 개건, 1873년 동래부사 정현덕(鄭顯德)이 중수하였는데 하는데 지금은 흔적조차 가늠하기 힘들다. 개항 이후 일제강점기를 거쳐 해방되기까지 70년 역사 속에서 도대체 어떻게 살았기에 이렇게 우리의 정신적 역사 현장을 송두리째 흔적을 지워버린 그들은 누구인가 자문해 본다.

 

봉래초등학교는 1895년 당시 선각자였던 박기종선생에 의해 사립 개성학교로 설립되었다가 1909년 한국정부에 헌납되어 최초의 공립학교인 부산공립보통학교로 개명된 부산에서 가장 오랜 역사를 지닌 학교이다.

 

 

봉래초등학교를 지나 심당요양병원을 바라보며 왼쪽 주성약국 옆으로 난 작은 길을 오른다. 영선고갯길의 시작이다.

                              

                             

여기서부터 길은 다소 가파른 오르막을 형성하고 있다. 30여미터 오르면 동남장여관 옆 돌축대 위에 붉은 벽돌담을 쌓은 낡은 한옥이 보인다. 전형적인 口자형 한옥으로 가운데 마당을 둔 이 집은 1924년 경남도청이 진주에서 부산으로 이전한 뒤 당시 공무로 도청을 찾은 많은 고위 관리들이 묶어가던 집으로 유명세를 탓던 옛 장춘여관이다. 아마 조선인이 운영하는 조선식 여관이 그들의 마음을 사로잡았으리라 여겨진다.

 

 

여기서 70여 미터쯤 오르면 해안 쪽으로 토요코 인 호텔이 가로막고 서있는 뒤 힐사이드호텔로 오르는 작은 골목 계단길이 나타난다. 이 골목을 경계로 아래쪽은 영주동 위는 동광동으로 나뉘어지는 동 경계지점인데 동광동 쪽에 지저분한 빈터가 있다. 이곳은 1934년 준공된 영도대교 가설공사 때 희생된 17명의 조선인 인부들을 위한 위령탑이 서 있던 곳이다. 이 위령탑은 1953년 11월 27일 밤에 발생한 소위 역전대화재로 인해 소실되고 말았다. 위령탑이 있었던 곳에 누군가 집을 짓고 살았던 흔적이 있으나 아마 원혼들의 위령터를 깔고 살았던 그들의 삶이 그리 순탄치 못했으리라는 생각도 해 본다. 위령탑 터 위로 낡은 3층집 축대 돌담에 위령탑 기단부에 사용되었던 사각돌이 군데군데 박혀있는데 그 모습이 마치 영도대교의 역사에 그들의 희생을 기억해달라는 고혼들의 아우성처럼 느껴진다

 

 

다시 고개를 오른다. 염광교회가 있는 일대 주변은 일제강점기 조선 최대의 수산자본을 장악하였던 카시이(香椎源太郞)의 별장 저택이 있었던 곳이다. 부산항이 바라다 보이는 이 언덕 수 천평 부지에 각종 관상용 수목을 심은 마당에 산책로까지 두고 자신의 동상도 세웠다. 해방이 되자 별도의 배를 이용해 몰래 밀항하듯 도망을 갈 수 밖에 없었고 그의 별장은 역전대화재로 흔적도 없이 사라지고 말았다.

해안 쪽으로 부원맨션이 거대한 벽체처럼 부산항을 가로막고 있다. 영선고개가 제 아무리 역사성을 지니고 있어도 이처럼 해안을 가로 막고 선 거대 빌딩군으로 인하여 도심의 쇄락한 뒷길로 전락될 수밖에 없는 운명을 지니고 있다. 옛길의 정취는 회복불능 상태에 이르고 만 것이다. 부원맨션이 자리한 곳에 쌍산의 한 봉우리가 있었던 1910년 이전, 이곳에 관해루(觀海樓)라는 누정(樓亭)이 있었다. 하지만 1909년부터 시작된 지금의 중앙동 해안 매축을 위한 쌍산착평공사로 바로 앞 지금의 석기시대 만두집 밑 골목 뒤로 옮겼으나 역전대화재로 인해 소실되고 말았다. 관해루와 관련한 역사는 전혀 전해지지 않고 있다. 다만 일제강점기 징병과 징용으로 끌려가던 가족들을 지금의 국제여객부두가 있는 당시 제1잔교부두에서 눈물의 작별을 하고는 다시 이곳으로 올라 태평양으로 사라지는 배를 향해 무사귀환을 바라는 염원을 바라던 곳이었다 한다. 풍류로 상징되는 누정이 관해루에서는 눈물과 회한의 장소가 되었던 것이다

 

 

논치길이라는 도로표지판 앞에 선다. 길따라 바로 가면 40계단 문화관과 40계단이 있지만 여기서 방향을 잠시 옆으로 틀어본다. 영선고갯길 주변의 무수한 역사 흔적 가운데서도 특기할 만한 장소들이 길을 벗어난 주변에 몇몇 더 있기 때문이다. 유신음악학원 간판이 보이는 건물을 왼쪽으로 하여 오르면 대동아파트 단지이다. 이 아파트 후문을 통해 정문 쪽으로 오르면 경비실 오른쪽 위 언덕에 서있는 양옥주택이 있는 곳은 옛 해관장(세관장) 관사터이다. 원래 대동아파트 단지를 비롯한 주변 일대가 해관(세관) 관사 부지였다고 하는데 해방 후 어떤 사유로 이렇게 사유지가 되었는지 알 수 없다.

 

 

대동아파트 정문 앞 한성각 중국집 일대는 ‘조선키네마주식회사’라는 우리나라 최초의 영화사가 탄생한 곳이다. 원래 이곳은 러시아영사관이 자리하고 있었는데 1904년 러일전쟁에서 러시아가 패한 이후 일본관헌들의 등쌀에 못이겨 영사관이 철수하게 되고 이후 일본인 부호의 집이었던 곳에 조선키네마가 탄생한 것이다. 조선키네마의 역사는 불과 2년 남짓이었지만 우리나라 최초의 영화사가 탄생한 곳이라는 역사적 의미가 깊은 곳이다. 바로 위 남성여자고등학교 정문을 통하면 복병산체육공원으로 연결된다.

 

 

학교 정문 안쪽에 있는 주차장은 1935년 9월 최초의 지방방송국인 한국방송 부산방송국이 탄생한 곳이다. 하지만 그 역사를 증언해 줄 아무런 흔적도 없다. 모두들 문화도시 부산을 말하지만 문화의 원천이 되는 역사가 이렇듯 철저히 외면하고 있는 마당에 문화의 열매는 무엇으로 완성하려는지 의문이 든다. 복병산은 도심 속 구민 체육공원으로 잘 단장되어 있다. 초량왜관시절 이 산 남쪽 자락에 왜인(倭人)들의 난출을 감시하는 복병막(伏兵幕)이 있은데 유래한 산 이름이다. 원래 보수동 뒷산인 사병산, 용두산과 구릉으로 연결되어 있었지만 대청로와 지금의 영선고갯길로 인해 각각 독립된 산이 되고 말았다. 복병산 서쪽 자락 건너편 가톨릭센터 주변은 일제강점기 부산의 4대 거부(巨富)의 한 사람이었던 하자마〔福田]의 별장이 자리했던 곳이다. 당시 조선총독이 부산에 오면 이곳에서 숙박을 하였다하니 그 규모나 꾸밈새가 가히 짐작된다. 중구청 바로 뒤에 있는 복병산 배수지는 1910년 준공된 부산의 상수도 역사에 중요한 유적의 하나이다.

 

복병산 남쪽으로 돌아서면 부산지방기상청 대청동관측소가 있다. 본관 건물은 1934년 준공되었는데 건축 형태는 항해하는 배의 모습을 하고 있다. 원래 기상관측소는 보수동 부산포호텔 옆 주차장 자리에 있었는데 1934년 당시 부산시내가 한 눈에 조망되는 이곳에 건물을 지어 옮겨온 것이다.

 

 

 

 

남성초등학교 앞을 지나 인쇄골목으로 빠져 나오면 40계단이 맞이한다.

 

 

 

40계단은 1945년 해방과 한국전쟁기를 겪은 근대사의 상징적 공간이 되어 있다. 당시 부산역은 지금의 세관 맞은편 교보생명 주변에 있었고, 역 광장을 건너면 40계단으로 바로 연결되는 비스듬히 놓인 도로가 있어 수많은 귀환동포나 피난민들이 이 계단을 통하여 산복도로나 대청동, 보수동 방면으로 지나던 길이었다. 당시만하여도 3층 이상의 건물이 드물었던 시절이어서 계단 위에 앉으면 부산역과 영도대교가 한 눈에 조망되던 곳이었다. 가족과 떨어져 피난을 왔던 그들은 이 계단 난간에 걸터앉거나 기대어 헤어진 가족의 안부를 생각하는 상념에 젖어들었던 곳이다. 원래의 40계단은 지금의 자리에서 50미터쯤 북쪽에 있었다. 1953년 발생한 역전대화재로 이 일대는 불바다가 되고 이후 이 일대 도로가 화재 이전과 다르게 변하면서 계단의 위치도 지금의 자리로 옮기게 되었다. 40계단 일대는 정부의 지원을 받아 2004년 거리특화를 하고 이를 기념하는 40계단문화관도 설립하였다. 계단 하나를 문화적으로 해석하고 주변을 특화하고 어려웠던 옛 시절을 돌아볼 수 있는 전시문화공간까지 마련한 당시 중구청 관계자들의 발상과 노고는 두고두고 칭찬해 주어야 한다.

 

                                                                                                   조선신지도 부산항 1918 <출처: 김한근소장>

지금의 40계단 아래에서 대청로로 나가는 길은 옛 해안선이다. 제일은행 옆으로 난 길에서 건너편 한국산업은행 위 골목을 통해 부산데파트 뒤로 나오는 골목길이 옛 해안선임을 아는 사람은 드물다. 그러다 보니 흉물스럽고 지저분한 뒷골목으로 남아 일부러 찾지 않으면 발길이 선뜻 나서지 않는 길이다. 영선고갯길의 마감은 제일은행 부산지점 옆길에서 끝이 난다. 여기서 건널목을 건너면 옛 초량왜관 터가 된다. 이곳은 용두산공원을 중심에 두고 동서로 약 11만평 부지에 200년 가까운 세월동안 조선 속의 일본인 마을이었던 것이다. 초량왜관에서 이루어졌던 조선과 일본 양국 간의 무역과 문화, 그리고 외교의 역사는 근대 일본을 일으키는데 큰 공헌을 이룬 역사이다. 하지만 아무도 이를 중요시 하지 않고 있다. 한때 국권을 강탈해갔던 그들에 대한 미움에 앞서 200년간 평화와 우정을 나눈 선린우호의 현장에 스며있는 역사를 역사 문화적으로 발굴하지 못하는 우리 스스로 바보가 되어가는 것이 아닌가 하고 자문해 본다.

더욱이 영선고개길 주변에 전해오는 역사 문화 유적은 부산 원도심 역사의 백미라 해도 과언 아니지만 아무도 이 길이 간직한 역사와 문화에 눈길을 주지 않는 슬픈(?) 현실이 오늘의 부산의 역사와 문화 현주소인 것 같아 마음이 저려온다.

우측이 백산기념관입니다.  특이한 공존이 있는 동네입니다. 선린우호 속에 탄생한 왜관과 일제강점기 수탈과 해방을 위해 말로서는 표현하지못할 독립운동의 거점이 한 지역에 고스란히 남아 있습니다.   이 거리 골목은 특히 일본인 관광객들이 많이 방문하는 곳이기도 합니다.  한때 불쾌한 기억도 많았던 곳입니다. 시방도 더러 목격하곤 합니다. 하지만 자본주의 세상 어디서나 마찮가지인 현상임을 고려한다면 우리가 지향해야 할 본질적인 것의 정체를 이제는 뜨겁게 달구는 논의가 필요하다 할 것입니다.  그것은 근대사에 대한 우리의 시선이자 역사적 터전의 복원입니다.  한가지 에피소드를 말하지면 40계단에서 영화' 인정사정 볼 것 없다'를 찍을 때 였습니다. 그때 촬영스탭들이 타고온 대형버스가 중앙동 우체국 뒷편에 서 있었는데, 당시 영화를 찍는다는 것은 알고 있었지만 제목은 모르던 터에 버스에 큼지막한 글씨로 써 둔 것이 '인정사정 볼 것 없다' 였습니다. 성이 났지요. 이놈들이  영화 촬영이면 다야. 어디서 이 좁은 차로에서 길을 막고 ㅈ ㄹ 이야 책임자 나와보라고 해!  정말 웃기지도 않는 일이었습니다.   사실 영화를 찍는다면서 길에 뿌려 둔 낙엽을 보고 철저하지 못한 준비를 탓하고 있던 터 였습니다.  예컨데 그 거리에는 플라타너스 가로수인데, 이디서 ?어 왔는지 상수리나뭇잎이며 , 갈참나무 잎을 뿌려 놓았더라고요. 똑바로 하란 소리였습니다.   

 

 

중앙동 부산우체국에서 동아대 부민캠퍼스로 이어지면서 중구와 서구를 연결하는 도로인 대청로는 초량왜관 시절(1678~1876) 이 일대에 연향대청(宴享大廳)이 자리했던 것에서 길이름이 유래되었습니다, 연향대청(연향청)은 일본(왜)로부터 사신이 오면 접대를 하던 곳이었습니다. 이곳에 연향청이 자리하게 된 속사정이 있으니 임진왜란 후 조정에서는 일본 사신들의 한양의 조선 왕에 대한 알현을 원천적으로 금했기 때문이었습니다. 사신들의 사행로가 임진왜란 때 한양으로 습격하는 침투로가 되었던데 대한 응징(?)이었던 것이지요. 다만 그들의 자치행정 구역이었던 왜관주변에서 모든 공저인 업무를 처리토록 하였다고 합니다. 그래서 임란 후 국교는 재개되었지만 부산에 도착한 일본 사신들은 영주동 영주터널 입구 언저리에 자리했던 초량객사에 마련된 임금의 전패에 소향배례(燒香拜禮)를 하는 것으로 이 땅의 국왕 알현을 대신하였던 것입니다. 이후 그들을 위한 하선연(下船宴)과 다례의(茶禮儀)를 베풀었으니 그 장소가 초량왜관 북문 바로 앞 지금의 광일초등학교 자리에 있었던 곳이 연향대청입니다. 일본 사신들을 위해 연향을 베푼 곳이 있었으니 개항 후 이 땅을 강점한 일본 측에서도 그 장소가 양국간의 선린우호 자리로서 매우 의미깊은 곳임을 감안하였던지 도로명을 부여할 때 연향대청이 있었던 곳임을 상기하는 대청정통라는 명칭을 부여했다고 합니다.

대청로의 양쪽 지역은 부산의 여늬 길과 달리 시대적 흐름에 따른 부산의 역사와 문화를 요소요소마다 잘 간직하고 있는 그야말로 조선후기 이후 부산역사의 축소판을 안고 있는 길이라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대청로의 남쪽인 용두산공원 일대 1678년 개설된 조선 속의 유일한 일본인 마을인 초량왜관이 자리하였고, 북쪽에 연향대청이 자리하면서 조선중기 이후 개항될 때까지 무려 200년 가까운 세월을 한일간 무역과 외교의 주요거점지였습니다. 비록 강제된 개항이었지만 근대개항(1876년) 이후 초량왜관 일대는 일본인 전관거류지가 되면서 해방될 때까지 70년 세월 동안 이 땅을 식민지화하는 전초기지로서의 서막을 여는 곳이 되었습니다. 개항이후 무역을 핑계로 조선정부에 일정 대금을 주고 조차한 곳이지만 이 땅을 식민지화하고 대륙을 침탈한 야망을 키웠던 곳이지요. 청일전쟁에서 승리하고, 노일전쟁 마저 이기게 되자 거침없는 그들의 야망은 경부철로와 관부연락선이라는 교통수단을 통해  일본 본토와 가장 가까운 부산을 발판으로 일본의 중심지인 동경에서 만주까지 직행할 수 있도록 한 것입니다.

1905년 을사늑약으로 조선왕조의 붕괴와 식민지 통치의 기반을 마련한 그들은 경부선을 개통(1905년 1월 1일)했고, 이어 그해 9월 11일 관부연락선 일기환(壹岐丸, 이끼마루)을 취항시킴으써 일본인들이 한반도를 제집 안방 드나들 듯 할 수 있는 수단을 만든 것입니다. 이후 한일합방이라는 미명하에 본격적인 식민통치를 이루던 1910년부터 대청로 일원은 그들의 원대한 꿈을 실현하는 주요 건물들로 자리매김하게 되는데 . 1910년 3월 30일 지금의 부산경남본부세관 맞은편 무역회관 자리에 부산역을 세우고, 그해 부산세관과 조선은행지점(현 한국은행 부산지점)도 세웠습니다. 이어 1911년 부산우체국을 세우면서(현 우체국 뒷 블록자리) 서양식기법의 건축기술을 마음껏 발휘하기도 하는데. 1910년 부평동에 우리나라 최초의 상설 시장(현 부평맨션 자리)인 부평정시장을 공설시장으로 개설하기도 하였습니다.

 

원래 대청로는 용두산과 복병산을 잇는 작은 구릉으로 형성되어 있어서 지금의 근대역사관 쪽에서 이 구릉을 건너면 바로 바닷가였습니다. 그리고 옛 서라벌호텔 뒤편은 복병산 중턱까지 초량왜관 시절부터 왜관거주 일본인들의 공동묘지였고 복병산 묘지에는 일본인 묘지 외 구한말 부산지역의 외국인 선교사 묘지도 7기가 있었다고 합니다. 이들 묘지는 1905년경 아미동 대학병원 뒤편으로 이전하면서 묘지 주변은 서서히 주거지화 되었고. 개항 후 처음 광복로를 중심으로 형성되었던 일본인 전관거류지에 이 땅을 신천지로 꿈꾸는 일본인들의 부산으로의 정착이 늘어나게 되자 거류지 협소로 난감해 하던 그들은 1898년 대청로 개설공사를 시작하였습니다. 대청로 개설은 난공사 중의 난공사로 도로개통을 한달 저도 앞둔 어느날 복병산 자락에서 무너져 내린 암반 절개 토석에 조선인 인부 다섯 사람이 압사하는 대형사고도 발생하게 되는데. 무려 1년에 걸친 난공사 끝에 1999년 12월에 대청로가 개설되었습니다. 이후 1902년에 이 일대에 대청정(大廳町)이라는 지명이 부여되면서 길 이름을 대청정통(大廳町通)이라 한 것이 오늘에 이르고 있습니다.

 

용두산 타워에서 원도심을 비롯한 왜관 근처를 살핍니다.  

식민지 근대도시의 표상이라 할 수 있는 용두산공원은 1916년 조성되었습니다, 1915년 조선 총독부 총독부 령으로 '神社寺院規則'에 근거한 법령으로 애초, 천황즉위를 기념하는 어대전기념사업의 일환으로 당시 부산상업회의소에서 제기하면서 시작되었다고 합니다. 이후 일제강점기 내내 신사 예제의 신행식(神幸式)과 천황즉위 기념일을 축하하는 어대전행사가 열렸습니다.  이런 행사를 통해 재부일본인들은 자신들만의 문화적 일체감을 과시하는 한편, 한국인들에게 제국의 국민으로서 단결을 유도했던 이데올로기의 상징이기도 했습니다.  일본인 관광객들이 유독 용두산을 즐겨 찾는 이유가 그들에게 내재한 향수 때문인지도 모릅니다.  개항이래 일본인들이 부산에 적을 두기 시작한 것은 1876년 82명에서 1905년 13,364명, 1910년 25,252명, 1920년 33,085명 1933년 51,032명으로 증가일로 였던 인구추이에서 읽을 수 있습니다.  

제2롯데 월드가  광복점 개점 한 이후 107층 초고층을 세우기 위해 다양한 로비를 벌이고 있다 합니다. 독과 약의 구분이 모호합니다. 개인적으론 그 입지를 반대햅니다만 사람들의 생각은 다른 것 같습니다. 화려한 조명이 그다지 반갑지 않은 이유는 암처럼 느껴지기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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