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개의 역사적 배경(背景)
아주 최근까지 개의 기원에 대해서는 견해가 갈라져 있었다. 현재 서식하고 있는 모든 개는 어느 단일한 선조의 종에 유래되는 것이라 주장하는 생각과 찰스 다윈도 주장했듯이 현대의 개의 품종이 매우 많은 변화를 가지고 있는 것은 2개 이상의 서로 다른 야생의 선조 종의 혼혈에 유래되었기 때문이라는 생각 등 두 가지이다.
화석에 나타난 최초의 가축은 개로 알려져 있다. 개를 최초로 순화시킨 사람들은 중근동 및 신대륙의 사람들일 것으로 추측되며, 그 연대는 최고 3만5천년 전에서 1만2천년 전 사이로 거슬러 올라간다. 가장 오래된 화석은 최근에 서독의 유적지에서 출토된 단일의 턱뼈이며 대략 1만 4000년 전의 것으로 생각되고 있다. 그 턱뼈는 이리의 턱뼈에 비해 훨씬 치수가 모자라며 그 결과 이빨과 이빨 사이의 간격도 좁아지고 있다. 이 두 가지 특징은 초기의 개에게서 전형적으로 볼 수 있었던 바이며 가축화된 개가 인간으로부터 배급받았던 먹이의 질과 양을 반영한 특징이리라 생각된다.
최초의 집개의 화석은 지금의 이스라엘의 원형 집 자리(Ain Mallaha)에서 발견된 1만2천년 전의 화석으로서 개를 안은 자세로 묻힌 여인의 유골과 함께 발굴되었다. |
| 또 이스라엘의 남부 도시인 아쉬겔론(Ashkelon)에서는 기원전 약 500여 년으로 추정되는 정성스럽게 매장된 천구의 개 무덤이 발견되었다. 이 지역은 과거 페키니아에 속해 있었고 페르시아제국의 식민 도시였던 땅으로서 페키니아인 들은 여러 여신의 상징으로서 개를 숭상했기 때문에 개를 극진히 대접했다. 과거 페키니아인들이 살았던 레바논과 이스라엘에서 많은 개 무덤이 발견되는 것도 이 때문이다. 북아메리카에서 출토된 1만 년 전의 화석 그리고 덴마크와 영국에서 발견된 9500년 전의 화석 등이 있다. 이러한 갖가지 발견을 통해 이리는 인간에 가축화한 최초의 동물이었으며 더욱이 그 시기는 농경이 시작되기 전이었음이 밝혀져 있다.
한편 미국 일리노이주 리버밸리의 한 선사 유적지에서도 기원전 8500년경에 정성스럽게 매장된 네 구의 개 유골이 발견되었다. 개들을 가지런히 묻은 것으로 보아 이곳에 살던 사람들은 아주 오래 전부터 개를 다정한 친구로서 소중하게 여겼던 것을 알 수 있다.
개가 가축화되기 시작된 시기는 사냥채집인 사회를 이루던 시대로서 그 역사가 매우 오래되었다. 오늘날에도 남아메리카, 아프리카, 동남아시아, 태평양 지역에서 석기시대와 유사한 생활을 보내고 있는 종족이 있으며 그들도 개를 사냥에 이용하여 결과적으로 사냥의 효과를 높이고 있음을 말해 주는 분명한 증거가 있다. 오스트레일리아 일부에서는 한 때 아보리지니(원주민)들이 야생의 딩고 새끼를 길들여 사냥에 사용한 적이 있었다. 이로 미루어 보아도 선사시대의 사냥꾼들이 이리를 포획하여 마찬가지로 사냥에 사용했으리라 짐작하기가 어렵지 않다. 사람들이 개를 사냥에 이용한데 대한 가장 오래된 증거는 지금으로부터 약 6000년 전의 남유럽이나 이집트 선 왕조시대의 벽화이며 거기에는 사냥의 광경을 그린 것 가운데 바센지와 비슷한 개도 포함되어 있다.
인류는 사냥을 하면서 회색늑대(이리)와 비슷한 모습을 하고 있는 개의 조상인 “카니스 루푸스팔리페스(Carnis Lupus pallipes)”와 자주 만나게 되었고 처음에는 이들에게 공격도 당했을 것이니 나중에는 오히려 인간에게 잡히게 되었을 것이다. 이 때 도망치지 못한 새끼들은 인간에 의해서 길러졌고 그들은 인간을 어미로 알고 따랐을 것이다. 포유동물의 새끼들은 젖먹이 때 길러준 인간 또는 다른 동물을 자신의 어미로 여기는 습성이 있다. 몽골지방에는 지금도 어린 늑대새끼를 몰래 가져와 키운 뒤 서커스 묘기를 시키는 사람들이 있는데 인간을 잘 따라 가축 개와 구별이 어려울 정도이다. 늑대는 개보다 지능이 높고 포유류 가운데는 이간 다음으로 사회성이 높은 동물로서 잘 보호한다면 몇 대 안에 인간사회에 완전히 적응시킬 수 있다. 윌트 디즈니사의 “늑대개” 그리고 “늑대와 춤을”이라는 영화는 늑대와 인간의 교감을 잘 묘사하고 있다. 개는 마지막 빙하기 동안에 늑대와 구별되기 시작한다. 에스키모개는 형태적으로 그의 조상인 회색늑대와 매우 닮아 있고 성질도 사나우며 종종 늑대와의 사이에 교배가 성공적으로 이루어진다. 어릴 때 모습이 특히 귀여운 강아지는 죽음으로부터 모면할 수 있었고 자연스럽게 인간사회에 정착할 수 있었을 것이다.
한편으로는 먹이가 부족한 개들이 인류의 거주지로 자주 나타나 먹다 남은 음식을 주워 먹음에 따라 자연스럽게 교류가 생겼을 수도 있다. 뿐만 아니라 개는 그 뛰어난 경계능력이 좋은 것으로 널리 알려져 있다. 이 습성은 기본적으로는 야생의 이리가 자신들의 행동권 또는 세력권으로는 야생의 이리가 자신들의 행동권 또는 세력권을 지키기 위해 발휘하는 능력과 동일한 것이다. 다만 개의 경우에는 세력권, 행동권에 포함되는 갖가지 요구가 인위도태에 의해 매우 과장되어 왔다. 예컨대 세력권을 지키기 위해 짖어대는 행동은 이리의 경우에는 많은 품종에 있어서 짖어대는 행동이 두드러진 특징이 된다. 적어도 6,000년 전부터 개들은 인간의 재산과 가축을 지켜야 하는 역할을 맡아왔다. 선사시대 사람들은 아마도 가축화된 이리는 밤에도 경계를 게을리 하지 않으며 위험에 대해 재빨리 경고하는 습성이 있음을 알고 그 점을 높이 평가하게 되었으리라 생각된다.
개가 인류 곁에서 생활하게 됨에 따라 주위에서 인기척이 나면 알려 주었고 사람들은 밤에 안심하고 잠을 잘 수가 있었다. 그 뒤부터 인류는 개의 소중함을 알게 되었고 어디든지 동반하게 된다. 비교적 성질이 온순한 이들은 쉽게 인간을 따랐고 가축이 되거나 이주하는 인간을 따라 남극을 제외한 전 지역으로 흩어지게 되고 각 지역마다 특징적인 품종으로 고정된다. 기원전 6000년경의 세워진 초기 도시인 터키의 샤탈 휘이크에서는 사냥꾼이 개의 도움을 받아 사슴을 사냥하는 벽화가 발견되었다. 터키계 또는 투르크계 민족들은 민족의 조상 또는 길 인도자로서 오랜 세월에 걸쳐 회색늑대를 숭배해 왔다. 개는 다른 가축과는 달리 식용을 위해서 기른 것은 아니었다. 만일 인류가 초기의 야생 견을 식용으로 했다면 그와 비슷한 늑대들도 식용으로 했어야 하는데 인류의 유적지에서는 늑대의 뼈가 나오지 않았다. 지역에 따라서는 화북인 들이나 호주 원주민들은 어려운 시기에는 개를 식용으로 하기도 했으며 화북인 들은 잡아먹기 위해 개를 사육해 왔다.
인간이 이리를 가축화한 것은 소, 양, 염소, 돼지 등과 마찬가지로 본래 식량으로 이용하기 위해서라는 주장도 있다. 분명히 개의 고기는 식용이 될 수 있으며 중국남부, 인도차이나, 폴리네시아, 중앙아메리카, 아프리카 등에서는 오늘날에도 그런 습관이 있다. 지금이야말로 유럽에서는 그러한 식습관 (食習慣)을 혐오스럽게 생각하고 있지만 신석기시대나 청동기시대(2500~8000년 전)에는 가끔 개를 잡아먹었다는 증거가 유럽에서도 발견되고 있다. 그러나 비록 그렇다하더라도 식량 원으로서 이리를 가축화했다는 설에는 커다란 문제가 있다. 이리라는 동물은 기본적으로는 육식성이며 다른 동물을 먹어야만 가장 잘 성장하고 번식한다. 따라서 식육공급원으로서는 상당히 비경제적이며 결코 바람직하다고는 할 수 없다. 인류의 선조는 때로 이리를 죽여 그 고기를 먹었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주로 식육을 취하려는 목적으로 인해 일부러 이를 가축화했다는 것은 결코 있음 직하지 않다. 개의 고기를 먹는 습관은 개를 가축으로 사육하게 된 뒤에 생긴 것으로 보인다. 예컨대 그 지역이 식량부족에 빠졌을 때라든가 종교적 의식에서 제물로 삼는 등의 형태로 시작되었으리라 생각된다.
호주 대륙에는 인류의 이주와 함께 “딩고(Canis Dingo)"라는 들개가 유입된다. 그 시기는 약 8000~4000년 전으로 추정되며 이들은 지역적으로 고립되어 개의 원형이 가장 많이 남아 있다고 볼 수 있다. 호주 원주민들도 딩고가 들어온 뒤부터 사냥을 좀 더 쉽게 할 수 있었고 어려운 계절에는 들판에 떠도는 딩고를 잡아 연명할 수 있었다. 인류가 다양한 인종을 가진 것과 마찬가지로 개들도 환경에 적응한 여러 가지 주요 품종이 생겨나며 오늘날 다양한 개의 품종은 이들의 까다롭지 않은 번식 습성과 인간의 인위적인 교배 그리고 부분적으로는 돌연변이에 의한 것이다.
개의 학명은 “카니스 파밀리아리스(Carnis Familiaris)"로서 ”친근한 동물“ 또는 ”가족“이라는 이름이 붙여질 만큼 지구상의 어떤 동물보다도 인간과 가까운 관계를 유지해 왔다. 러시아의 아동 문학가 ”미하일 일리언“은 개를 ”네 발 달린 친구“라는 말로 표현하고 있다. 개는 이집트, 그리스, 로마, 페르시아, 중세유럽, 타일랜드의 사원, 우리나라의 민화 등 시대와 나라에 관계없이 각종 장식물과 벽화에 등장했고 이에 대한 전설과 미담이 전해 내려오고 있다. 개는 거의 모든 민족에게서 “충성” “수호” “고귀“ ”조력“ ”안내“의 상징으로서 좋은 의미로 해석된다. 개는 인간보다 뛰어난 후각과 청각을 지니고 있으므로 예부터 경비용, 사냥용으로 이용되었으며 그 뒤 사역견(썰매견, 구조견, 가축몰이견), 애완견으로 발전되었다.
개는 다른 가축들처럼 잡종화가 심해 실제로 순종은 진화 및 개량 등으로 순종은 남아 있지 않지만 개의 여러 두드러진 특징과 형태만을 선발 육종해서 오늘날 같은 다양한 품종 군으로 고정시켰다. 현재도 상업적인 목적 또는 특수한 용도를 위해 품종이 개발되고 있으며 잡종견은 잡종견대로 환경 적응력이 강해 그런 대로 유지되어 가고 있다. 그러나 개는 인간과 가깝게 지내는 만큼 잡아먹히거나 제물로 바쳐지는 슬픈 운명에 처하기도 했는데 남아메리카의 잉카인 들은 개(코요테)를 “저승으로의 인도자”로 여겨 사람이 죽을 때 제물로 쓰기도 했는데 현대의 “10대의 불가사의” 가운데 하나인 “나스카 지상그림”에도 개가 등장한다. 영국인들은 개와 사자의 싸움을 즐기기 위해 동물원을 만들기도 했다.
* 인류가 개를 갖게 된 시초(始初)
선사시대의 야생견과 인류의 접촉은 구석기시대 후기로 추정된다. 아마도 중석기시대 내지 신석기시대에 들어서부터 라고 추측된다. 개를 최초로 가축화한 지역은 유럽에서는 덴마크의 발틱해 연안이며 중석기시대에 이곳에 정착한 금발의 미글레모제(Maglemose) 문화기의 인류가 처음으로 개를 가졌다고 말하고 있다. 또한 서아시아 사해의 북쪽 팔레스티나의 예리코나, 스코틀랜드의 스타카아에서 발굴된 유골은 반 야생적인 번견(番犬-도둑을 지키거나 집을 보는 개)의 시초라고 인정된다.
개와 사람의 친화관계는 공동생활 수렵생활이 밀접하게 됨에 따라 인류와 개의 공생관계가 장기간에 걸쳐 싹텄다고 생각된다. 약 1만4천년 전에 스페인 동부 아르페라 근처에서 발견된 구석기시대의 동굴벽화 에서는 이리와 비슷한 동물이 사냥하는 사람과 함께 그려져 있으며 라스코나 알타미라의 벽화에서도 보인다. 그러나 모두 개 같기는 하지만 단정할 수는 없다고 본다. 신석기시대에 접어들면서 북아프리카 사하라사막 타시리고원의 바위굴 벽면그림은 확 실한 수단으로 개와의 접촉이 시작된 것이라 할 수 있다.
* 가축개의 진화(進化)
개는 약 6천만년전 개, 늑대, 쟈칼 등 개과에 속하는 동물의 조상인 마이어서스(Miacis)에서 시작돼 3천만년 전 헤스타오션, 2천만년 전 사이노딕티스, 1천만년 전 토마크다스, 2백만년 전 늑대, 쟈칼, 하이에나, 여우 등의 초기형태로 진화하였다고 주장한다. 개의 조상에 관하여는 학자들에 따라 학설이 여러 가지로 분분하다. 개는 워낙 종류가 다양하기 때문에 늑대, 쟈칼, 코요테, 딩고 같은 개과 동물의 잡종일 것으로 여겨왔기도 했다. 처음으로 인간에 의해 사육되기 시작한 뒤 오늘날이 되기까지의 1만 4000년 정도 동안에 개는 폭발적인 <적응확산〉을 이루었다. 즉 가축동물이라는 완전히 새로운 생태적 지위로 갑자기 퍼져간 셈이며 그 과정에서 놀랍도록 많은 수의 품종과 계통, 지역적 변종으로 바뀌어 간 것이다. 그 변이의 폭은 다른 어느 가축동물보다도 크다.
초기에는 동물학자 로렌츠 박사가 개의 성격이나 행동이 쟈칼과 비슷하다는 쟈칼설을 주장했으나 부정적이고 또한 인도에 살고있는 세퍼트 만한 크기의 회색늑대가 조상일거라는 늑대 설이 있다. 그 다음으로 야생 개를 조상으로 삼는 경우이다. 이 야생 개는 오스트렐리아의 딩고나 아시아의 퍼라이어가 개와 유사한 조상이라는 설 등이 존재한다. 그러나 최근에 미국 캘리포니아 대학, 로스앤젤레스 캠퍼스(UCLA)와 브리검영 대학, 스웨덴 기술연구소 등의 동물진화 학자들은 개의 혈통을 과학적으로 추적 분석한 결과 개의 조상은 늑대 하나뿐인 것으로 나타났다고 미국의 과학저널 사이언스가 밝혔다. UCLA의 웨인박사와 연구팀은 북미, 유럽, 아시아, 아라비아 등에 서식하는 늑대 162마리, 개 140마리, 쟈칼 12마리, 코요테 5마리의 조직샘플을 채취해 비교 분석했다. DNA 유전자 분석 결과 모든 개의 유전서열이 늑대와 유사한 것으로 나타났다.
진화론적 입장으로 볼 때 이 다양화의 증가는 예외적일 만큼 급속한 것이었다. 여기에는 몇 가지 요인이 작용하고 있다. 첫째로 이리의 가축화에 이어지는 시기에 인류는 작고 고립된 부족사회로 분열되어 갔다는 사실이 있다. 인간들이 부족사회로 갈라지자 거기에 수발되어 이리들도 또한 매우 작은 동계교배(同系交配) 그룹으로 분담되었으며 근린 여러 부족에 의해 사육되고 있는 이리와 이계교배(異系交配)할 수 있는 기회는 아주 드물게 되었다. |
|
이와 같이 동물들이 많은 소집단으로 격리되고 서로 유전자 교류의 기회가 절단되어 있는 상황은 유전적인 변이가 급속하게 일어나는 데에 이상적인 조건이었다. 둘째 요인으로서는 유전적으로 이리는 매우 변이를 일으키기 쉬운 동물이라는 사실을 들 수 있다. 가축화라는 보호되는 환경에서 이리 고유의 높은 변이성(變異性)이 더욱 확대되어 새로운 형질을 갖춘 종류를 탄생시킬 수 있는 절호의 기회가 주어졌던 것이리라 생각된다.
가축화 초기의 개의 사육주 들도 개의 종류를 증가시키는데 크게 공헌했다. 인간들이 바람직하지 못한 특성을 가진 개를 죽이기도 하고 쫓아내기도 함으로써 그 번식을 방해했으며 반대로 바람직한 개들을 특별히 보호했고 생존을 도와주었음이 분명하다. 당시는 개들에게 줄 수 있는 식량도 소량이었을 것이므로 먹이가 적어도 되는 소형 개를 더 좋아했을 것이라 생각된다. 얌전한 개 또는 꼬리를 만진다든가, 귀가 늘어 졌다던가, 색다른 털빛 등 두드러진 특색을 가진 개를 또한 특별히 좋아했을 것이다. 그 결과 그러한 개들은 다른 개들보다도 양호한 건강상태를 유지할 수 있었으며 자신을 닮은 새끼를 많이 낳을 수가 있었을 것이다. 인간들이 좋아하는 개의 특성은 부족에 따라 약간씩 달랐다. 그리고 우연히 생기는 새로운 유전적 특징이 거기에 부가되어 지역마다 갖가지의 변종이 만들어지기에 이르렀다. 이들 변종은 그가 속하는 문화와 마찬가지로 각기 분명한 특색을 지니고 있었다. 이것들이 원형이 되어 그 뒤의 온갖 주요 품종이 만들어지기에 이르렀다. 유감스럽게도 오늘날의 우리에게는 초기 개의 진화에 대한 상세한 모습을 알 길이 거의 없다.
역사상 최초로 그려진 개의 그림은 남유럽과 북아프리카에서 발견된 약 6000년 전의 것이다. 억측에 따르면 이보다 이전 시기의 개는 전체 모습이 바센지와 딩고의 중간 정도였으리라 생각된다. 다만 그 시대의 화석을 보면, 몸의 크기나 아마도 다른 특징에 있어서 상당한 변이의 폭이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대부분의 화석이 그러하듯이 초기 개의 화석도 수가 매우 적으며 더욱이 거의가 단편적이다. 따라서 화석을 본다 하더라도 고대의 개에서 찾아볼 수 있었던 변이가 어느 정도였는가는 거의 알 수 없다. 석기시대의 개와 현대의 품종 사이에 유전적 계통의 연결이 중단되지 않고 이어져 있다는 증거도 없다. 따라서 화석 개와의 표면적인 유사성에 입각하여 현대의 품종의 계통을 소급해 보려는 갖가지 시도는 어디까지나 추측의 범위를 벗어나지 못한다.
고대의 미술에서 볼 수 있는 최초의 개는 바센지이거나 또는 적어도 외관이 바센지와 매우 유사한 개이다. 그 중에서도 가장 사실적인 것은 선 왕조시대의 이집트(약 6000년 전)에서 출토된 것으로 [쿠프]라 불리던 수렵용 개이다. 그보다 약간 늦게 몇 종류의 개 그림이 이집트의 벽화에 나타나게 된다. 그 중에는 한 눈에 알아볼 수 있는 마스티프 종(種) 이라던가 그레이하운드 그리고 그밖에 갖가지 종류의 [하운드 개]들 그리고 직립 귀에 얼룩이 있는 닥스훈트를 닮은 매우 작은 개까지 포함되어 있다. 이 그림들에서 볼 수 있는 마스티프는 현대의 마스티프 종과 매우 유사하며 당시에는 바빌리온이나 앗시리아인에게도 인기가 있었다. 이 시기(약 2500~4200년 전)의 얕은 부조(浮彫)에는 수렵(狩獵)이나 전투(戰鬪)에 종사하는 그 개의 그림이 자주 나온다. |
|
그러나 이 시대에도 그리고 그 보다 이전의 시대에도 개 및 개 사육에 대한 실용적인 문헌은 전혀 남아 있지 않다.
이 시기부터 중세에 이르기까지 유럽에서의 개의 역사는 매우 혼란 속으로 빠져 들어간다. 그리스-로마시대의 문학 속에는 주로 사냥개와 군용견으로 사용된 많은 개에 대한 기록이 있지만 개의 용도 이외에 대해서는 아무것도 언급되어 있지 않다. 개의 그림이 있다 하더라도 그 품종은 판별할 수가 없다. 갖가지 개의 종류는 대개 그 원산지별로 분류되어 있었다(예컨대 스파르탄, 로크리안, 크레탄, 켈트, 미이드, 신칸브리안, 알바니안, 브리톤 등). 이는 당시의 품종은 모두 지리적인 격리에 의해서만 유지되고 있었음을 시사해 준다. 이 시기의 그림에는 마스티프와 비슷한 몇 종의 개, 그레이하운드의 원형품종, 소형의 스피츠와 비슷한 애완견 또는[말티즈]개, 크고 작은 하운드 개 등을 볼 수 있다.
14세기가 끝날 무렵이 되어 프랑스의 귀족 가스톤 드 포아가 사냥에 대한 유명한 논문을 완성했다. 이로써 사실상 처음으로 그 시대의 개에 대한 품종 그림과 명칭이 기록되기에 이르렀다. 그 논문에서는 6품종이 거론되고 있다. 즉, Alan gentil(1종의 디어하운드), Alan vautre(초기의 블러드 하운드), Levrier(그레이하운드), Chien courant(폭스하운드의 원형), Chien oysel(푸들과 스파니엘의 동료이며 매사냥용 소형 개), 그리고 마스티프종(種)이다. 이때부터 19세기 중반 무렵까지 각기 품종에 대해 상당히 상세한 역사가 기록되어 있다. 개의 사육과 번식은 귀족 사이에서 유행하는 하나의 취미가 되고 있었다.
번식의 중점이 주로 사냥개에 두어지기는 했지만 새로운 종류라든가 색다른 종류도 많이 만들어졌다. 진귀한 품종에 대한 이러한 기호를 만족시켜 준 것은 외국에서 보기 드문 새로운 모습의 개를 데리고 돌아오는 탐험가들이었다. 그들 외국 종 일부는 새로운 변종을 만들어 내기 위해 유럽 종과 교배되었다. 다만 당시는 개의 번식에 있어서 혈통에 대해서는 거의 관심이 없었으며 그저 되는 대로 교배시키는 때가 많았다. 이러한 경향은 1859년에 찰스 다윈의 《종의 기원》이 출판되고 같은 해에 영국의 뉴카슬에서 최초의 도그 쇼가 열릴 때까지 계속되었다.
끝으로 극동이나 신대륙에서는 그러는 동안 여전히 별도로 개의 진화가 계속되고 있었음도 잊어서는 안 된다. 중국의 차우차우라던가 페키니즈, 그리고 멕시코의 치와와, 일본의 스피치 등 약간의 예외를 제외하고는 이들 지역원산의 개들은 이제 수입된 유럽종(種) 개와의 교배로 인해 소멸되어가고 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