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생 뜻 봉화 처럼 타오르길” | |||||||||||||||||||||
10일 신현수 송공비 이전 제막식 진주문화사랑모임 2년간 사업 추진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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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성룡 기자 exupery@jinjunews.com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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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슨 공이 크다고 하겠는가/ 어리석음 깨우쳐 지식 갖추게 했네/ 아침에 일하고 저녁에 공부하는데/ 마음을 수고롭게 하고 힘을 다하니/ 천전마을 사람들/ 날로 문명 속으로 나아가네/ 여러 사람 뜻 모아 비 만들어/ 시를 기록하고 새기었네.”
형평운동 주역으로서 백정 해방 운동과 교육운동을 벌인 서해 신현수(1861~1961) 선생의 송공비가 진주정신이 깃든 망진상 봉수대 광장에 자리를 잡았다. 진주문화사랑모임(대표 리영달)은 비가 내린 10일 오후 3시 망진산 봉수대 앞에서 학계와 시의원, 망경동 주민이 모인 가운데, 신현수 선생 송공비 이전 건립 제막식을 가졌다. 이번에 이전 건립된 송공비는 1932년 천전리(현 망경동) 주민들이 선생의 공을 후세에 전하기 위해 섭천리 못 앞(현재 망경초등학교 운동장)에 세웠던 것이다. 하지만 1969년 망경초등학교가 들어서고, 못이 매립되면서 비석은 학교 근처 개인집으로 옮겨졌다가, 이후 주택가 하수도 공사로 다시 한번 총림사 입구 길가로 밀려나게 됐다. 문화사랑모임은 애초 비가 서있던 망경초등학교 운동장에 건립하려 했지만, 동창회의 반대로 망경동이 훤히 내려다 보이는 현재의 장소에 이전하기로 최종 결정을 내렸다. 이날 제막식에는 서울에 살고 있는 신현수 선생의 손자 신영진씨와 손녀사위 손원모씨, 조카 신장욱씨, 평산신씨 종친회가 참여해 더욱 뜻 깊은 자리가 되었다. 한편 1893년 아버지 신영균과 어머니 여산송 사이에 장자로 태어난 신현수는 31세의 나이로 형평사 조직에 참여했다. 김경현씨가 발간한 인명록에 따르면 선생은 1925년 사회운동가 간친회에 참석했다가 일본에 붙잡히기도 했으며, 1934년 9월에는 월간 ‘영남춘추’를 창간해 편집 겸 발행인·주간을 지냈다. 1931년 초대 진주군 진주읍회원에 당선됐고, 46년에는 진주부 명치정(남구) 회장을 지내면서 천전국민학교 설립 위원을 지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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