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3권『프로이센 프리드리히 대왕 7년전사』(普魯士國厚禮斗益大王七年戰史, 1908)
이에 대한 이 대한 연구논문입니다
시부에 다모쓰(渋江保)와 유길준(俞吉濬)의7년전쟁사 저술에 나타난 국민 창출론 Harmony among People around the North Star – Shibue Tamotsu and Yu Giljun on the Prussian Nation-building Process during the Seven Years War – PDF icon
2018, vol., no.35, pp. 303-337 (35 pages)
DOI : 10.30615/kajt.2018.35.12
발행기관 : 한국일본사상사학회
최정훈 (단독)1 소장처 : 1공군사관학교
KCI등재
초록close 이 글은 유길준(俞吉濬)의 전쟁사 저술 『프로이센 프리드리히 대왕 7년전사』(普魯士國厚禮斗益大王七年戰史, 1908)에 드러난 정치사상을 분석한다. 『7년전사』는 메이지 일본의 저술가 시부에 다모쓰(渋江保)의 『프리드리히 대왕 7년전사』(フレデリック大王七年戰史)의 번역에 기초하지만, 유길준의 독창적인 재해석을 포함한다.
이 글은 『7년전사』에 드러난 유길준의 사유를 다음의 세 가지로 요약한다.
첫째, 유길준은 권력정치의 세계에서 국가를 적절히 운영한 사례로 7년전쟁을 취급하였다. 유길준에게 7년전쟁은 강대국에게 포위되어 있는 소국이 생존할 수 있는 방법을 보여준 모범적 사례였다.
둘째, 유길준은 프로이센이 생존한 비결의 핵심이 독일 지역에 거주하는 구성원의 애착을 획득하여 국민을 창출했다는 사실에 있다고 주장하고, 『맹자』에서 논한 인화(人和) 개념을 원용하였다.
셋째, 유길준은 프리드리히 2세가 물리적 강압을 가하지 않고도 독일 지역에서 민심을 얻었다는 점에 착안하여, 그를 『논어』에서 말하는 북극성으로, 그를 따르는 신민을 뭇 별로 표상하였다.
유길준이 『7년전사』에서 제시한 주요 논지는 서양 역사가들과 시부에 다모쓰의 저작에서 끌어온 것이지만, 동아시아의 담론 공간에 다음과 같은 새로운 아이디어를 제공했다는 점에서 독창적이었다.
첫째, 『7년전사』에서 유길준은 후쿠자와 유키치(福澤諭吉)가 『통속국권론』(通俗國權論)에서 제기한 현실주의적 국제정치관을 전제로서 공유하되, 그러한 전제 하에서 국가의 바람직한 행동에 대한 대답을 새롭게 제시하였다.
둘째, 유길준은 『맹자』의 인화라는 전통적 개념을 활용하면서도 이를 국민 창출(nation-building)과의 연관 속에서 재정의하였다. 셋째, 유길준은 시부에 다모쓰를 따라 『논어』 속 북극성의 비유를 원용하여 군주를 표상하였으나, 이때 북극성이 덕정(德政)의 중심에 있는 무위(無爲)의 군주가 아니라, 군사령관으로서 싸우는 군주를 가리킨다는 점에서, 그는 조선의 담론 공간에 낯선 방식으로 고전을 전유하였다.
끝으로, 『7년전사』에서 국민 창출 모델은 권력정치적 세계에서 군주의 군사적 유능함이 신민에게 동일한 정체성을 부여하는 과정으로서 표상된다. 이러한 국민 창출론은, 교육의 개도(開導)와 제도에 의한 권리 수호에 따른 국민창출론을 주장한 『서유견문』(西遊見聞)의 사유와 단절되는 것이었다. |
첫댓글 제3권의 『프로이센 프리드리히 대왕 7년전사』(普魯士國厚禮斗益大王七年戰史)는
1980년 아세아문화사(亞細亞文化社)에서
간행한 <역사와 전기소설歷史.傳記小說(한국학문헌연구소)>의
한국새화문학총서(韓國開化期文學叢書)에도 실려있는 역작입니다.
어렵네요.,.제 수준이 볼 책이 아닙니다만..그래도 보겠습니다.
결론부분의 문장이 가슴에 와 닿네요
그러나 유길준이 1908년 [7년전사]를 출판했을 때, 대한제국은 러일전쟁 이후 일본의 압력에 의해 군대마저 이미 해산당한 상황이었다.
시모에가 출판한 것이 1896년 이고 유길준 선생이 출판한 것이 1908년이니 12년의 시차가 있지만 그 12년은 오늘날의 코로나 전후의 상황과 비견될 수도 있을 것 같습니다. 2년후인 1910년에 한일합방이 일어났으니... 단순한 내용의 비교는 무의미해 보이기까지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