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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평 : 생태적 경제기적
나의 지구에 대해 늘 생각한다. 내가 떠올린 지구는, 어깨에 차분히 내려앉는 햇살, 해마다 먼저 피는 작은 꽃, 등을 살짝 미는 더운 계절의 미풍, 그리고 그저 그런 경박한 감상으로 이 곳에 대한 애정을 표현하는, 소박한 나의 집이다. 나는 내게서 등을 돌려 뛰어가는 사슴과 휘적휘적 거침없는 타조와 반짝이는 물길아래 돌고래가 좋다. 그들의 영리하고 우아한 모습을 보면 인간이 주기 힘든 다정한 감동을 느낄 때도 있다. 나는 부드럽고 따스한 이 곳의 길을 느긋이 산책하는 것도 좋아한다. 이를테면, 모든 생은 연결자로서 짧게 빛나는 것뿐 곧 지나가기 마련이고, 그 한적한 찰나를 선량하게 지내는 것이 생물의 삶이라 생각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100년이 지나면, 나와 내 애인과 복잡한 길 위를 채운 이 모든 사람들이 사라진다고 상상할 때, 숨막히게 먹먹해지는 건 어쩔 수 없다. 물론 우리와 닮은 새로운 그들이 다시 도시를 꽉꽉 채우고, 휴일에 해변을 거닐고, 오지를 다니며 멸종동물을 취재할 것이 틀림없다. 어쩌면, 해마다 치마 길이의 유행이 바뀌고, 달마다 핸드폰 기종이 변하고, 얼토당토않은 책들이 서점에 널린 채로 엔트로피의 증가를 더욱더 가속화시키는 바보 같은 짓을 반복하고 있을지도 모르겠다.
나는 사라짐에 대한 단순한 두려움 이상으로 이 곳의 변화에 대한 막연한 불안감을 가지고 있다. 조용하고 온순한 사람들이 일상을 침범하는 것들에 대해서는 강박적으로 반응하는 것처럼, 몽상가로 아무 튼튼한 바닥에나 누워 구름을 세는 주제에, 나는 내가 지나간 뒤조차 평온한 어느 들판이 함락되는 걸 견딜 수 없다. 그 많은 시간이 지나고 여전히 하얀 눈이 내릴까. 봄이면 꽃들이 하늘하늘 결혼을 하고, 고래가 떼를 지어 해류를 타고 해안선까지 방문해올까. 이 곳은 어떤 식으로 남아있게 될까. 과연 내가 생각하는 연결자로서의 삶, 정신없이 바쁜 척 하는 많은 나의 동시대인들 각자 나름의 삶은 어떤 가치를 가지고 이 곳을 지킬 것인가. 가끔 어떤 인간들은 지구와 어울리지 못하고 방황하는데, 그들은 눈뜨고도 무엇이 더 중요한지 알지 못하고 평생 금고 속의 돈을 센다. 나는 스무 살 이후부터 가끔씩, 그 점에 대해 낭만적인 방관자로 남는 대신 현명한 연결자로서 무언가를 해야한다는 의무감에 시달려왔다. 물론 꽤나 어줍잖은 공명심이라고 스스로도 늘 미심쩍어하면서 말이다.
처음 내가 그 것, 이 곳의 나중에 대해 관심을 가진 것은 멸종동물에 관한 에세이를 봤을 때였다. 어떤 인간들은 틈만 나면 무언가를 가지지 못해 안달이고 공격성을 내보이며 뻔뻔하게 우쭐대고 돌아다닌다. 춥다는 핑계로 남의 가죽을 벗겨 옷을 해 입고, 자랑하기 위해서 남의 머리를 잘라 벽에 걸어놓는가 하면, 예쁘다는 이유로 식물을 꺾어 하루 저녁 식탁을 장식한다. 물론 재미를 위해 가끔 수렵생활을 즐기는 것도 잊지 않는다. 나는 여객선의 프로펠러에 몸을 베여 죽는 양쯔강의 바이지 돌고래 이야기를 읽다 속상해서 거의 기절할 뻔했다. 정신 나간 인간이 휘두른 곤봉에 맞아죽은 마지막 도도새라니, 멋진 뿔 때문에 사냥되는 코뿔소도. 혹시 시간이 지나고 또 지나고 나면, 내가 사랑하는 타조들은 알까지 전부 먹히고 사슴들은 뿔과 피를 뺏긴 채 죽고, 내가 사라질 때쯤 아무 것도 남지 않게 되는 건 아닐까.
내셔널 트러스트에 대해 알게 된 것도 그와 비슷한 시기였다. 나는 자본주의사회와 어울리는 방식으로 한 집단이 무언가를 지키려 한다는 걸 상당히 영리하다고 인식했다. 후원금을 모아 훼손될 가능성이 있고, 그래서는 안 되는 가치를 지닌 땅과 들과 건물을 내셔널 트러스트의 이름으로 사는 것. 큰 숲과 오래된 나무와 다정한 음악을 남겨준 음악가의 집과 강 옆의 작은 마을들. 저 쪽이 무례한 인간들의 영역이라면 이 쪽은 무언가를 남겨주고자 하는 다른 인간들의 영역인 것이다. 다정한 시선으로 차갑게 깨어 내일을 생각하는 인간들 말이다. 누군가 깨어있다는 그 사실은 확실히 얼마간 나를 다소 안심시켰던 것 같다. 그러나 그 것이 다일까, 라는 의심을 지울 수 없었다. 내셔널 트러스트에 후원을 하고 종이를 아끼고 물을 아끼고 일주일에 한번은 재활용을 하면서 유기농 야채를 사다 가족들끼리 저녁식탁에서 우적우적 씹어먹는 일이 정말 다란 말인가?
사회생활을 몇 년째 하면서 느끼는 점은, 대학생활을 하면서 책을 읽고 토론을 하고 이상을 말하던 그 때와는 정말 다르다는 거다. 졸업하고 취직을 하고 여유가 생기면 생각도 더 깊게 하고 시민운동도 하고 좀 더 어른다운 자세로 이 곳을 위해 내가 행동하게 될 것이다, 라고 생각했지만 실제로는 일상에 겨워하며 주어진 것들을 즐기는데 바쁜 인간으로, 상황에 맞춰가며 살자는 명목 하에 이전이라면 용납하지 않을 일을 웃어가며 타협하는 것이다. 나는 지구를 떠올리지만 그것은 나아질 거라는 소망 뿐으로, 기본 방향으로 삼아야 할 올바른 어떤 것에 대해 전무한 상태로 나는 그저 텅 비어 있었다. 모르는 것에 대해 죄책감을 느끼는 사람들은 많지 않은 모양이고, 또 모르고 행동하는 실수에 대해서 관대한 사람들도 많은 모양이다. 나 역시 멍청한 인간들 중 하나로, 가끔 이 곳에 대해 고민한다는 사실만으로 스스로가 지구에 대해 큰 애정이라도 품은 듯 착각해온 것이다.
서론은 접어두고, 나는 생태적 경제기적, 이라는 책의 제목을 보았을 때 뭔가 내가 찾던 그 것, 이라는 생각이 강하게 들었다. 생태라는 단어는 브라질에 있다던 도시 꾸리찌바를 떠오르게 했고, 경제라는 단어는 성장에 대한 메타포를 느끼게 했으며 기적이라는 단어는 뭔가 해결해 주려나보다, 라는 기대를 품게 했다. 재생지로 만들어진 듯한 디자인도 마음에 들었고 모든 설명에 본보기를 들어 꼼꼼히 서술한 저자의 성실함도 좋았다. 다 읽고 난 다음에는 이 저자는 혜안을 가지고 있구나, 라는 생각이 들었고, 스스로도 방향감각을 찾은 기분이 들어 뿌듯했다.
저자는 노동에 대해 먼저 의문을 제기한다. 우리는 무엇을 위해 노동하는가. 우리가 노동을 통해 추구하는 가치는 무엇인가. 여기서 우리는 물론 현대인이다. 과거에는 노동에 대한 의문을 제기하면서 골똘히 고민할 필요가 없었다. 노동은 곧 생존방식이었고 영성의 발현이었다. 밭을 갈고 포도나무를 심고 밀가루를 반죽해 그날 한 가족이 먹을 빵을 굽고 매일 밤 기도를 드리는 그런 삶은 퍽 단순하고 명쾌하다. 지금은 누구나 돈을 더 벌고 더 성공하고 더 많은 권력을 가지기 위해 일한다. 때문에 사람들이 시간을 들여 하는 일의 대부분은 임금노동에 치중해있다. 또한 임금노동이 개개인에 상당히 편중되어있어서, 한쪽에서는 과중한 업무로 스트레스를 받고 괴로워하고 다른 한쪽에서는 실업자라는 이름으로 수년 째 고통받는다. 이런 상황은 유연한 사고방식으로 처리하지 않으면 영원히 해결되지 않을 문제라고 저자는 말한다. 부부간 맞벌이가 보편화된 사회인만큼, 임금노동시간을 줄여 가사노동을 나누어 해야하고, 아이를 돌보거나 노약자를 돌보는 것, 스스로나 가족을 위해 봉사하는 일에 대하여 사회적으로 그 가지를 인정하고 책임져주어야 하며, 현재의 한정된 에너지자원으로 더 이상의 경제성장을 기대하는 것은 어리석다고 말한다. 또한 이 책에서 저자가 말하고자하는 핵심인 낡은 에너지의 시대는 가라, 새로운 에너지가 완전고용을 가져오며, 노동의 가치를 되찾아줄 것이다, 라고 선언하는 것이다.
나는 사실, 굉장하다, 라고 생각했다. 태양열 에너지나 풍력발전이나 바이오매스에 대해 처음 들어본 것은 아니지만, 그들과 노동을 연계시켜 생각해본 적은 없기 때문이다. 스스로가 하는 일이 저 멀리 나중을 위하여 노력하는 일이라는 확신이 든다면, 사람들은 참 꿋꿋해지지 않을까. 현대인의 대부분이 우울증을 겪는다. 명제는 늘 비슷하다. 왜 사는가, 다. 그런데 저자가 이렇게 말한다. 더 나은 지구를 위해 지금이 노력할 때고, 그대들 하나 하나가 그 주역이 될 것이다, 라고. 이 것이 바로 우리에게 주어진 일이며 우리가 세상에 있어야 하는 이유도 그렇다는 거다. 얼마나 멋진 일인가.
지금껏 나는 태양에너지는 굉장히 비싸며, 정부에서 정책적으로 시행해야 하는 일들 중 하나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다르다. 비싸다는 개념은 에너지 사용 후 처리비용을 고려하면 전혀 옳지 않다. 석유나 석탄에너지는 공기오염의 주범이고, 원자력에너지의 폐기물은 자그마치 24,000년 동안 지구에 영향을 미친다. 태양에너지나 풍력에너지는 시설비를 제외하면 거의 돈이 들지 않는다. 그것들은 자연이 우리에게 그저 제공해주는 것이다. 자연이 우리에게 뭔가 주려고 할 때 여러 가지 핑계를 대며 모른척한다면, 얼마나 어리석은 인간들인가. 우리는 그저 감사히 받아 최대한 현명하게 사용하고, 후손들에게 본보기가 되어주어야 하는 것이다. 하지만 그런 과정이 그렇게 순조롭지는 않다. 낡은 에너지들에 책정된 가격은 너무 싸고 그들을 소유한 집단들은 지금까지 구축해온 권력을 잃고 싶어하지 않는다. 그들은 정치가와 연계하여 자신들의 권력을 더욱더 확고히 하기 위해 마지막 발버둥을 친다. 그들을 저자는 에너지 공룡이라 칭하고 가장 마지막에 자신들의 멸망을 깨달을 것이라고 한다. 또한 그들은 생태 친화 적인 에너지 나비들의 비상을 방해할 수는 있지만, 꺾을 수 없다고 말한다. 무엇이 옳은지 분명히 알고 노력하는 사람들이 있는 한, 방향을 제시하는 사람들이 있는 한, 자연스럽게 세대교체가 일어날 수밖에 없는 것이다.
최근 웰빙이라는 개념이 유행처럼 번지고 있다. 그런데 매스미디어를 통해 세련되게 포장된 웰빙은 상당히 왜곡되어 있다. 그 단어를 초창기에 접한 사람으로서, 나는 웰빙의 본질은 스스로를 건강하게 지켜내는 것 외에, 이 곳을 가꾸고 지켜내는 지혜라고 생각해왔는데, 한 잡지에서 이른 아침마다 자가용을 100킬로미터씩 운전해가며 집과 헬스클럽과 직장을 오간다는 사람을 들먹이며 웰빙 운운하는 것을 보고 정말 어이가 없어서 참을 수가 없었다. 그 정도의 여유가 있다면, 오히려 집과 직장간 거리를 줄여서 자전거로 출퇴근하는 일이 훨씬 웰빙에 가깝지 않은가? 웰빙이라는 순수한 삶의 방식이 그렇게까지 상업화되어 왜곡될 수 있는 것인가?
저자의 입장은 그렇다. 서있는 물건을 억지로 이동시킨다는 것도 꽤나 무식한 일이지만, 그렇게 많은 자동차가 차고에서 잠자고 있다는 그 비효율성과, 그렇게 빠른 속도를 낼 수 있도록 차를 만들어 팔아 결국 도심에서는 지렁이처럼 기어가도록 하는 교통정책의 한심함, 자동차의 본질적 폭력성, 환경 파괴적 속성을 교정해야 한다고 말한다. 차 공동 이용, 자전거 타기, 철도개혁, 전기나 수소 등으로 움직이는 자동차 보급이 저자가 주장하는 핵심이다. 특히 자전거 타기에 대한 부분을 읽으며 이전에 읽은 책, 꿈의 도시 꾸리찌바가 떠올랐다. 단순히 운동으로서의 자전거 타기, 혹은 에너지 절약을 위한 자전거 타기, 깨끗한 공기를 위한 자전거 타기, 등 모두의 목적은 다를 수 있다. 하지만 분명히 모두는 자신들이 왜 무엇을 하고 있는지 인식해야 한다는 게 중요한 요점이다. 시민들 각자가 자발적으로 나와 이웃을 위해 교통수단을 조율하고, 정부에서는 정책적으로 그러한 깨인 시민들을 위해 뒷받침해준다면 지구의 그 어느 곳도 현명한 길들로 이어지지 않을까. 저자가 말하는 것은 단순히, 철도를 늘려라, 너희들 이제 자동차 타지 말아라, 이런 식이 아니라고 나는 확신한다. 그가 말하는 것은 모두가 스스로와 지구를 위해 어느 교통수단이 더 옳은지 판단하고 선택할 것, 이다.
무언가를 쓰고 버리는 일은 간단하지만, 유지하고 보수하고 지속시키는 일은 상당한 노력을 필요로 한다. 그것은 쉬운 일을 돌아서 하는 일이고, 시간을 들여 가치 있는 것을 지켜나가는 일이다. 권력과 맞잡은 정부가 뒤로 가는 정책을 발표하고, 언젠가 사라질 물질을 최고가치로 삼아 정신없이 부대끼며 소유를 중시하는 이런 시대에는 정말 비전이 필요하다. 누군가 앞장서서 깃발을 들고 말해야 하는 것이다. 어려운 일은 없다. 단지 관심이 부족할 뿐이다. 물론 각자는 사소한 생활습관부터 교정해야한다. 그렇지만 더 중요한 일은 우리가 변화의 시대에서 제 몫을 하며 살아야한다는 것을 인식하고, 옳은 방향에 대한 감각을 가지는 것이다.
약 2000년 전에 예수가 산상설교에서 창조는 모든 생명체의 욕구가 충족되도록 충분한 물자를 제공될 수 있도록 이루어졌다, 라고 말한 것이 지금 우리에게 비전으로 작용한다. 어느 때보다 풍요롭지만, 어느 때보다 부족함을 느끼는 나 자신, 나름대로 열심히 살았고 앞으로도 그럴 테지만, 조금 더 방향성을 가지고 조금 더 확신을 품고 살 수 있으리라고 믿는다. 이 곳은 아름답고 평생토록 지키기에 시간이 아깝지 않은 곳이다. 멋진 글이고 지혜로운 견해다. 이 책을 읽고 나는 조금 더 행복해진 것만 같다.
Ref. 토토로의 숲을 찾다/요코가와 세쯔코/이후/2000.7
마지막 기회/더글러스 애덤스/해나무/2002.9
꿈의 도시 꾸리찌바/박용남/이후/2000.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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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웰빙을 추구하는 분들께 '생태적 경제 기적'을 권합니다.
요즘 인왕산 자락에 위치한 사무실 가는 숲 길에 차들이 빼곡하다. 얼마 전에 근처에 생긴 명상센터를 찾는 방문객 차들이 늘었기 때문이다. 명상과 생태주의의 만남이 강조되는 분위기에서도 수련생들은 자동차에 의존하는 습관에서 자유롭지 못한 듯 했다.
요즘 유행하는 웰빙은 마음의 평안, 돈 잘 벌기, 날씬하고 건강한 몸, 해외 여행이라는 네가지 전략으로 구성된다고 한다. 그런데 영어로 포장을 해서 그렇지 어느 시대, 어느 곳에서나 사람들은 잘 살기를 갈망했다. 보수와 진보를 막론하고 정당들도 각자의 시각에서 국민들이 잘 사는 정치를 말한다.
그런데 자기 안에 집착하는 웰빙족이나 개혁을 부르짖는 기성 정치인이나 망상에 기초한다는 점에서는 별반 다르지 않다. 이들 대부분은 현 사회체제가 지속가능하지 않고 그래서 이대로 잘 사는 것도 불가능하다는 것을 간과하기 때문이다.
전세계적으로 매일 150종의 동식물이 멸종하고 2만 헥타르의 사막이 증가하며 8천6백만톤의 비옥한 토양이 유실되고 1억톤의 온실가스가 배출되고 있다. 석유를 둘러싼 전쟁과 테러는 끊이지 않고 일자리는 줄고 있으며 교통지옥은 심화되고 공기, 물, 음식은 더욱 오염되고 있다. 우리가 살아가는 세계는 미래가 없다. 빙산을 향해 가는 타이타닉호에서 순간적인 쾌락을 누릴 수 있겠지만 행복한 미래는 있을 수 없다.
프란츠 알트 박사는 생태적 경제 기적이 일어나야 행복한 미래가 있다고 주장한다. 라인강의 기적, 한강의 기적을 경험했듯이 그가 말하는 기적은 이상향인 유토피아가 아니라 실현가능한 비전이다.
태양에너지 전환을 통해 석유 전쟁과 기후변화라는 생태위기에서 벗어날 수 있다. 농경지에서 에너지 작물이 재배되면서 농촌도 에너지생산 기지 역할을 한다.
자동차 독재가 종식되고 쾌적한 대중교통 위주로 교통체계가 전환된다. 근거리엔 자전거, 도심에선 버스와 전차, 도시 사이에선 철도가 자리잡고 택시가 편리성을 높여준다. 자동차 독재를 유지하기 위해 도로를 넓히고, 기술 개발을 지원하던 비용이 교통체계의 전환에 투자된다. 자동차의 인명 살상이 크게 줄어들고 1.5톤의 기계를 움직여 70킬로그램을 자전거보다도 늦게 이동시키는 비효율, 공해 덩어리가 점차 사라진다. 대중 교통의 확대로 일자리는 더욱 늘어난다.
농업대전환으로 산업사회에서 계속 줄기만 하던 농부의 수가 늘어난다. 30년 내에 모든 농업은 유기농으로 전환된다. 자연을 약탈하던 농업은 토양과의 평화, 물과의 평화, 공기와의 평화, 동·식물과의 평화를 회복한다. 자연과의 평화를 복원하면서 완전고용이 실현된다.
세수 중립적인 생태적 세제개혁으로 에너지 가격이 오르면 해외 수송을 하는 농수산물 교역이 줄고 고기 비용이 올라가며 도로교통량이 감소한다. 대신 보험이나 연금 부담이 준 노동자는 소득이 늘거나 노동 시간이 줄어든다. 임금노동과 가사노동이 균형을 이루어 노동이 여성화되면서 고용이 크게 증대되고 가족 내 유대감은 증진된다.
웰빙의 철학적 기반이 에피쿠로스라고 한다. 그러나 문화평론가 고미숙씨는 '보리빵 하나로 주피터의 열락에 도전하겠노라’고 공언했던 에피쿠로스의 무소유와 몸에 이로운 것은 다 해야 비로소 획득되는 웰빙 사이에는 공통점이 없다고 잘라 말한다.
자연과의 평화, 인간 사이의 평화, 영성의 회복을 촉진하는 생태적 전환을 통해서만이 에피쿠로스의 쾌락주의에 뿌리를 둔 진정한 웰빙이 실현될 수 있다. 소유보다는 우정의 연대를 통해 주어진 삶을 최대한 향유하는 에피쿠로스적인 행복한 삶이 실현될 것이다. 함께 하는 웰빙을 추구한다면 현실에 발 딛고 선 프란츠 알트의 희망과 낙관의 메시지에서 동력을 얻기를 바란다.
글 : 이상훈 (에너지대안센터 사무국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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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간화제] 프란츠알츠의 생태적 경제기적
ː생태학은 미래의 경제학이다
대량실업과 생태위기, 이 두 문제는 선진국을 향해 가고 있거나 선진국에 도달한 나라들이 예외 없이 부딪히는 문제이다. 하지만 프란츠 알트는 대량실업과 생태위기 이 두 가지 ‘문제’ 혹은 ‘재난’을 기회로 삼을 수 있다고 말한다. 그리고 이 문제에 대한 해결책은 재생 가능한 에너지와 자원으로 경제과정을 쇄신하는 것이라고 역설한다.
이 책은 어떻게 태양에너지와 바람, 물, 바이오매스 등 무조건적으로 우리에게 주어지는 천연 에너지원을 이용할 것인가에 대한 비전을 제시한다. 사실 이런 에너지들은 이미 대부분 실용하고 있는데, 단지 정치적인 문제 때문에 널리 보급하지 못하고 있을 뿐이다.
이 책에서 제시하는 생태적 경제기적의 정치는 모든 선진국가의 시민들이 특히 중요하게 생각하는 두 개의 주요 목표를 추구한다. 하나는 일자리를 창출하는 것이고 또 다른 하나는 환경을 구하는 것이다. 이 목표는 인간을 위하고 자연을 위한 것이다.
저자는 오랜 경험과 그 간의 사례를 예로 들어 이 문제에 대한 총체적인 대안을 제시한다.
인간은 자연법칙을 존중해야 하고 <유전자 조작>처럼 어떤 대가를 치르더라도 성장을 계속하려는 노력을 포기해야 하며 현재의 경영학보다는 생태학을 우선해야 한다고 그는 말한다.
ː인간을 인간답게 하는 것은 무엇인가
“아직도 어떤 사람들은 경제를 이야기하고, 어떤 사람들은 생태를 이야기한다. 이 둘이 마치 다른 두 가지 방식으로 움직인다는 것처럼. 그러나 이런 식으로 개념을 구분해서 사용하는 것은 인간의 삶에 대한 원초적인 물음, 즉 ‘현재와 미래의 인간존재를 인간답게 하는 것이 무엇인가.’라는 물음에 대한 이해 부족을 드러낸다.”
독일 연방의회 의원이며 대안 노벨상 수상자인 헤르만 셰어(Hermann Scheer)의 말이다.
2003년 일본에서 이 책이 나왔을 때 이 책을 읽은 일본 경제인들이 방문단을 이끌고 독일로 프란츠 알트를 찾아갔을 정도로 일본 경제인들에게 충격을 주었다고 한다. 아마도 그의 주장을 아주 신선하고 실현가능한 대안으로 받아들였기 때문일 것이다. 그렇다면 이 책은 똑같은 경제적 난관에 부딪힌 우리에게도 신선한 충격일 것인가? 물론 우리도 일본처럼 방문단을 구성하여 독일에 가봐야 한다는 말은 아니다. 하지만 알고도 하지 않는 것과 아는 만큼 실천하는 것 사이에는 분명 커다란 차이가 있다. 이 책에서 프란츠 알트가 시종일관 주장하는 것도 바로 이 점이다. 우리는 자연에서 무한정 얻는 태양에너지나 바람, 물 등이 훌륭한 대체에너지라는 점을 이미 알고 있다. 다만 낡은 사유의 틀을 버리지 못하고 있을 뿐, 매장에너지 자원에 의존하여 기득권을 행사하는 자들 또한 자신들의 이익을 지키기에 급급하다. 이들은 연대하여 새로운 에너지 정책의 시행을 막고 있다. 주변 환경이 온갖 공해와 오염물질로 가득 찬 후에야 우리는 이들의 폭주를 제지할 것인가? 알트는 이 책에서 태양에너지 경제의 기적을 낮고 분명한 목소리로 우리에게 말한다. 공룡의 원칙을 고수하지 않고 이성적으로 문제를 보면 해결책은 너무나도 쉽게 드러난다고.
조재량 기자
첫댓글 감사합니다.. 유후~~
은희씨 넘 멋지다~ㅇ^^
감사합니다.. 이 책 너무 어려워서 과제물 할 일이 캄캄해요.
와~~ 정말 열씸히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