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애송시 100편' 을 매주 5편씩 해설과 함께 올리고자 합니다. 이 글을 통하여 우리의 실력이 향상되기를 기도드립니다.
해
박두진
해야 솟아라. 해야 솟아라. 말갛게 씻은 얼굴 고운 해야 솟아라. 산 넘어 산 넘어서 어둠을 살라 먹고, 산
넘어서 밤새도록 어둠을 살라 먹고, 이글이글 앳된 얼굴 고운 해야 솟아라.
달밤이 싫여, 달밤이 싫여, 눈물 같은 골짜기에 달밤이 싫여, 아무도 없는 뜰에 달밤이 나는 싫여……
해야, 고운 해야, 늬가 오면, 늬가사 오면, 나는 나는 청산이 좋아라. 훨훨훨 깃을 치는 청산이 좋아라, 청산
이 있으면 홀로래도 좋아라.
사슴을 따라 사슴을 따라, 양지로 양지로 사슴을 따라, 사슴을 만나면 사슴과 놀고,
칡범을 따라 칡범을 따라, 칡범을 만나면 칡범과 놀고……
해야, 고운 해야, 해야 솟아라, 꿈이 아니래도 너를 만나면, 꽃도 새도 짐승도 한자리 앉아, 워어이 워어이
모두 불러 한자리 앉아, 앳되고 고운 날을 누려 보리라.
'해' 하면 떠오르는 시, 그것도 '새해' 하면 떠오르는 시, 현대시에서 드물게
희망으로 충만한 시, 중학교 1학년 교과서에서 읽게 되는 시가 바로 박두진의「해」이다. 1946년에 발표된 이 「해」가, 해방을 염
원하던 해든 해방의 기쁨을 담은 해든, 솟지 않는 해를 향한 촉구든 솟고 있는 해를 향한 경이든 무슨 상관이랴. 그 해가 여전히,
지금-여기에서, 어둠과 고통을 살라 먹고 이글이글 솟구치고 훨훨훨 분방하고 워어이 워어이 불러 모으고 있다는 게 중요하다. 막
솟는 해처럼, 말의 되풀이는 힘차고 뜻의 개진은 꿋꿋하다. 언어가 어떻게 되풀이 되고, 그 되풀이가 어떻게 노래가 되고 주술에
가까워지는가를 보여주는 시다.
"씻고" "살라 먹는", 그 세례와 정화에 의해 날마다 생생(生生)하게 새로 뜨는 해. 그 "청산(靑山)의 해" 아래 시를 살[生]고, 사는
[生] 시를 꿈꿔 보는 새벽이다. 삶 속에서 이글이글 솟아나는 생생지락(生生之樂)과, 시 속에서 훨훨훨 깃을 치는 시시지락(詩詩
之樂)을 꿈꿔 보는 아침이다. 미움과 갈등의 시간을 버리고 강자와 약자가 워어이 워어이 더불어 상생하는 아름다운 세상을 꿈꿔
보는 새해다. 우리는 이제 달밤에 벌어진 상처, 눈물 같은 골짜기에서 일어난 죄악을 (불)살라 태우고 "앳된 얼굴"로 다시 태어날
것이니, 새해야 부디 '늬'도 그렇게 솟아라. 세상 모든 사람들이 꿈꾸는 세상의 모든 희망아, '늬'도 꼭 그렇게 고운 해처럼 오라. 삼
백예순 날의 삶아, "앳되고 고운 날"들아, '늬'들도 꼭 그렇게만 좋아라. 백 년의 백 년 내내 낙희낙희(樂喜樂喜)하고 럭키럭키
(Lucky Lucky)하게!
남해 근산
이성복
한 여자 돌 속에 묻혀 있었네
그 여자 사랑에 나도 돌 속에 들어갔네
어느 여름 비 많이 오고
그 여자 울면서 돌 속에서 떠나갔네
떠나가는 그 여자 해와 달이 끌어 주었네
남해 금산 푸른 하늘가에 나 혼자 있네
남해 금산 푸른 바닷물 속에 나 혼자 잠기네
돌속에 묻힌 한 여자의 사랑을 따라 한 남자가 돌 속에 들어간다면, 그들은
돌의 연인이고 돌의 사랑에 빠졌음에 틀림없다. 그 돌 속에는 불이 있고 목마름이 있고 소금이 있고 무심(無心)이 있고 산 같은 숙
명이 있었을 터. 팔다리가 하나로 엉킨 그 돌의 형상을 ‘사랑의 끔찍한 포옹’ 이라 부를 수 있을까?
그런데 왜 한 여자는 울면서 돌 속에서 떠났을까. 어쩌자고 해와 달은 그 여자를 끌어 주었을까. 남해 금산 푸른 하늘가에 한 남자
를 남긴채. 돌 속에 홀로 남은 그 남자는 푸른 바닷물 속에 잠기면서 부풀어 간다. 물의 깊이로 헤아릴 길 없는 사랑의 부재를 채우
며. 그러니 그 돌은 불타는 상상을 불러일으킬밖에. 그러니 그 돌은 매혹일 수밖에. 남해 금산에서 돌의 사랑은 영원이다. 시간은
대과거에서 과거로 다시 현재로 넘나들고, 공간은 물과 돌의 안팎을 자유롭게 드나든다. 과거도 아니고 현재도 아닌, 안(시작)도
없고 밖(끝)도 없는 그곳에서 시인은 도달할 수 없는 사랑의 심연으로 잠기고 있기 때문이다.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돌이 되고 바위가 되는지 남해의 금산(錦山)에 가 보면 안다. 남해 금산의 하늘가 상사암(相思巖)에 가 보면
얼마나 많은 사랑들이 얼굴과 얼굴을 마주한 채 돌이 되었는지 알 수 있다. 서로를 마주한 채 요지부동의 뿌리를 박고 있는지 남해
금산 푸른 바닷물 속을 들여다보면 알 수 있다.
모든 사랑은 위험하지만 사랑이 없는 삶은 더욱 치명적이라는 것을, 어긋난 사랑의 피난처이자 보루가 문득 돌이 되어 가라앉기도
한다는 것을, 어쩌면 한 번은 있을 법한 사랑의 깊은 슬픔이 저토록 아름답기도 하다는 것을 나는「남해 금산」에서 배웠다. 모든
문을 다 걸어 잠근, 남해 금산 돌의 풍경 속 1980년대 사랑법이었다.
1980년대 시단에 파란을 일으킨 이성복 시인의 첫 시집 『뒹구는 돌은 언제 잠깨는가』(1980)는 기존의 시 문법을 파괴하는 낯선
비유와 의식의 초현실적 해체를 통해 시대적 상처를 새롭게 조명했다. 「남해 금산」은 그러한 실험적 언어가 보다 정제된 서정의
언어로 변화하는 기점에 놓인 시다.
꽃
김춘수
내가 그의 이름을 불러 주기 전에는
그는 다만
하나의 몸짓에 지나지 않았다.
내가 그의 이름을 불러 주었을 때
그는 나에게로 와서
꽃이 되었다.
내가 그의 이름을 불러 준 것처럼
나의 이 빛깔과 향기에 알맞은
누가 나의 이름을 불러 다오.
그에게로 가서 나도
그의 꽃이 되고 싶다.
우리들은 모두
무엇이 되고 싶다.
너는 나에게 나는 너에게
잊혀지지 않는 하나의 눈짓이 되고 싶다.
김춘수 시인은 릴케와 꽃과 바다와 이중섭과 처용을 좋아했다. 그는 시에서
역사적이고 현실적인 의미의 두께를 벗겨내려는 ‘무의미 시론’을 주장하기도 했다. 교과서를 비롯해 여느 시 모음집에서도 빠지지
않는 시가「꽃」이며 사람들은 그를 ‘꽃의 시인’ 이라 부르기도 한다.
1952년에 발표된 「꽃」을 처음 읽은 건 사춘기 시절 꽃무늬 책받침에서였다. '그'가 '너'로 되기, ‘그’가 ‘너’로 관계 맺기, 서로에게
‘무엇’이 되기, 그것이 곧 이름을 불러 준다는 것이구나 했다. 그러니까 사랑한다는 것이구나 했다. 이름을 부른다는 게 존재의 의
미를 인식하는 것이며, 이름이야말로 인식의 근본 조건이라는 걸 알게 된 건 대학에 와서였다. 존재하는 것들에 꼭 맞는 이름을 붙
여주는 행위가 시 쓰기에 다름 아니라는 것도.
백 일 내내 핀다는 백일홍은 예외로 치자. 천 년에 한 번 핀다는 우담바라도 논외로 치자. 꽃이 피어 있는 날을 5일쯤이라 치면, 꽃
나무에게 꽃인 시간은 365일 중 고작 5일인 셈. 인간의 평균 수명을 70년으로 치면, 우리 생에서 꽃핀 기간은 단 1년? 꽃은 인생이
아름답되 짧고, 고독하기에 연대해야 한다는 걸 깨닫게 한다. 내가 그의 이름을 불러 주고 그가 나의 이름을 불러 주면, 서로에게
꽃으로 피면, 서로를 껴안게 되는 이유일 것이다.
그러나 늦게 부르는 이름도 있고 빨리 부르는 이름도 있다. 내 꽃임에도 내가 부르기 전에 불리기도 하고 네 꽃임에도 네가 부르지
않기도 한다. 빛깔과 향기에 알맞은 이름을 부르는 것의 운명적 호명(呼名)이여! “하나의 몸짓”에서, 잊혀지지 않는 “하나의 눈
짓”이 되는 것의 신비로움이여! 내가 본 가장 아름다운 꽃은 나를 보는 너의 눈부처 속 꽃이었으나, 내가 본 가장 무서운 꽃은 나를
등진 너의 눈부처 속 꽃이었다.
세계일화(世界一花)랬거니, 어제도 오늘도 내일도 세계는 한 꽃이다. 만화방창(萬化方暢)이랬거니, 어제도 오늘도 내일도 세계는
꽃 천지다. 꽃이 피기 전의 정적, 이제 곧 새로운 꽃이 필 것이다. 불러라, 꽃!
사평역에서
곽재구
막차는 좀처럼 오지 않았다
대합실 밖에는 밤새 송이눈이 쌓이고
흰 보라 수수꽃 눈 시린 유리창마다
톱밥 난로가 지펴지고 있었다
그믐처럼 몇은 졸고
몇은 감기에 쿨럭이고
그리웠던 순간들을 생각하며 나는
한 줌의 톱밥을 불빛 속에 던져 주었다
내면 깊숙이 할 말들은 가득해도
청색의 손바닥을 불빛 속에 적셔 두고
모두들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산다는 것이 때론 술에 취한 듯
한 두름의 굴비 한 광주리의 사과를
만지작거리며 귀향하는 기분으로
침묵해야 한다는 것을
모두들 알고 있었다
오래 앓은 기침 소리와
쓴 약 같은 입술 담배 연기 속에서
싸륵싸륵 눈꽃은 쌓이고
그래 지금은 모두들
눈꽃의 화음에 귀를 적신다
자정 넘으면
낯설음도 뼈아픔도 다 설원인데
단풍잎 같은 몇 잎의 차창을 달고
밤 열차는 또 어디로 흘러가는지
그리웠던 순간을 호명하며 나는
한 줌의 눈물을 불빛 속에 던져 주었다.
조그만 간이역에 눈은 푹푹 내려 쌓이고, 푹푹 내려 쌓이는 눈 때문에 막
차는 오지 않는다. 사람들은 대합실에서 오지 않는 막차를 기다리고 있다. 부려 둔 보따리나 꾸러미에 기대 누군가는 졸고, 누군가
는 담배를 피우고, 누군가는 웅크린 채 쿨럭이기도 한다. 털모자에 점퍼를 입은 사내는 간간이 난로에 톱밥을 던져 넣으며 깊은 생
각에 빠져 있다. 난로 위 주전자는 그렁그렁 끓는 소리를 내며 수증기를 내뿜고, 시계는 자정을 넘어서고…….
시대적 아픔을 아름다운 서정으로 그려 낸 곽재구 시인의 데뷔작 「사평역에서」(1981)를 읽을 때마다 나는 울컥한다. 아름다우
면서 서럽고, 힘들면서도 따뜻했던 그때 그 시절의 풍경을 소중한 흑백사진처럼 남기고 있기 때문이다. 사진에는 지난 시절의 희
망과 절망이 눈보라로 흩날리고 있다, 모래처럼 톱밥처럼. 그 울컥함이 소설(임철우「사평역에서」), 드라마(TV문학관「사평
역」,「길 위의 날들」), 노래(김현성「사평역에서」)로 장르를 달리하며 독자들의 공감을 얻게 했으리라.
이 시는 시인이 20대에 쓴 시답게 감각과 묘사가 풋풋하다. 깜깜한 유리창에 쌓였다 녹는 눈송이들은 흰 보라 수수꽃(라일락 꽃)
빛이다. 사람들이 그믐처럼 졸고 있다는 표현은 절묘하다. 확 타올랐다 사그라지는 난로 속 불빛은 톱밥을 던져 넣는 청색의 손바
닥과 대조를 이룬다. 간헐적으로 내뱉는 기침 소리는 “눈꽃의 화음”을 강조하고, 뿌옇게 피어올랐다 사라지는 담배 연기는 회억
(回憶)처럼 떠올랐다 가라앉곤 한다.
한 줌의 톱밥을 던지는 ‘나’는 무슨 사연을 간직한 걸까. 기다리는 막차는 올까. 모든 역들은 어디론가 흘러가기 위한 지나감이고
경계이다. 하여 모든 역들이 고향을 꿈꾸는 것이리라. 사평은 나주 근처에 있는 조그만 마을이다. 그 사평에 사평역이 없다니. 그
토록 울컥하게 했던 사평역이 어디에도 없다니. 그래서 우리를 더욱 울컥하게 하는 것이겠지만.
한 잎의 여자
오규원
나는 한 여자를 사랑했네. 물푸레나무 한 잎같이 쬐그만 여자, 그 한 잎의 여자를 사랑했네, 물푸레나무 그
한 잎의 솜털, 그 한 잎의 맑음, 그 한 잎의 영혼, 그 한 잎의 눈, 그리고 바람이 불면 보일 듯 보일 듯한 그
한 잎의 순결과 자유를 사랑했네.
정말로 나는 한 여자를 사랑했네. 여자만을 가진 여자, 여자 아닌 것은 아무것도 안 가진 여자, 여자 아니
면 아무 것도 아닌 여자, 눈물 같은 여자, 슬픔 같은 여자, 병신 같은 여자, 시집 같은 여자, 그러나 영원히
가질 수 없는 여자, 그래서 불행한 여자.
그러나 영원히 나 혼자 가지는 여자, 물푸레나무 그림자 같은 슬픈 여자
오규원 시인은 보통사람이 호흡하는 산소의 20퍼센트밖에 호흡하지 못하는
'만성폐쇄성폐질환'을 앓다 2007년 겨울에 타계했다. 임종 직전 "한적한 오후다/ 불타는 오후다/ 더 잃을 것이 없는 오후다/ 나는
나무속에서 자 본다"라는 마지막 문장을 손가락으로 제자 손바닥에 써서 남겼다.
나는 이 시를 대학교 1학년 때의 여름, 한 남학생이 보낸 대학 학보의 주소 띠지 속에서 처음 읽었다. 얼마나 많은 남자들이 얼마나
많은 여자에게 이 시를 옮겨 나르곤 했던가. 이 시는 시집 「왕자가 아닌 한 아이에게」(1978)에 실린 작품이다. 그러나 시집 「사
랑의 감옥」(1991)에 3편의 연작시 중 1편으로 다시 실렸다. "언어는 추억에 걸려 있는 18세기형 모자"라는 부제가 첨가되었고, 2
연의 끝 "영원히 가질 수 없는 여자"와 3연의 "영원히 나 혼자 가지는 여자"가 바뀌었다. 부제를 첨가하여 '여자'가 '언어'에 대한 은
유이기도 하다는 것을, '영원히 가질 수 없는 여자'를 뒤로 배치하여 여자나 언어 모두 소유할 수 없는 존재임을 강조하였다.
나무껍질을 벗겨 물에 담그면 물빛이 푸르스름해진다고 해서 붙여진 이름 물푸레. 이 시 덕분에 한동안 물푸레나무와 그 잎이 보
고 싶었던 때가 있었다. 커다란 나무에 비해 여릿하고 포릇하고 정말 '쬐그만' 둥근 잎이었다. 천생 '여자를' 닮은, 이를테면 눈물
하면 떠오르는 글썽임이라든가, 슬픔 하면 떠오르는 비릿함이라든가. 병신 하면 떠오르는 어리숙함이라든가, 시집 하면 떠오르는
아스라함이라든가……
그런 '여자'를 반복해 나열하면 할수록, 묘사하면 할수록 '여자'의 실체는 사라지고 '여자'는 신비의 옷을 입는다. 세상의 절반이
여자다. 물푸레나무에 달린 '쬐그만' 잎처럼 하고많은 여자와 '여자'라는 보통명사를 이토록 입에 척척 달라붙도록, 혀에 휘휘 휘
감기도록 구체화시켜 놓다니!
여자는 남자의 '여자'다. 남자의 엄마이고 누이이고 애인이고 아내이고 딸이다. 남자의 과거이고 미래이다. 남자의 부재이자 심연
이고, 선물이자 폭력이다. 그러니 시작이고 끝이다. 그런 여자를 어찌 정의할 수 있으랴. 모두 가지지만 결코 가질 수 없는 그런 한
'여자'를 누가 가졌다 하는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