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97년 1월 한보철강의 부도로부터 싹이 튼 IMF는 그야말로 지옥이었다. 많은 기업들이 죽었고, 많은 가정들이 박살 났고, 많은 사람들이 거리로 나가 앉았 다. 진짜 개같은 일이었다. 그 개같은 일을 자처한 돌대가리들 욕부터 일단 하고 넘 어가자. 그해 11월 21일 IMF에 구제금융을 신청하기까지 정부가 한 일을 보면 참으로 가 관이 아닐 수 없었다. 사태의 심각성을 알고도 정부 관련부처들이 늑장대처함으로 써 호미로 막을 것을 가래로 막아야 했다. 큰 문제는 구제금융 신청이었다. 당시 재경원 등에서는 외환 위기를 해소하자면 구 제금융 외에는 대안이 없다는 결론을 내렸다. 환율 급등도 문제지만 만기가 돌아온 외채를 갚으려면 당장 외국에서 돈을 꾸어와야 하고, 그 유일한 방안이 IMF행이라 는데 이견이 없었다. 11월 6일께 강경식 경제부총리와 김인호 청와대 경제수석, 이경식 한은 총재가 모 여 IMF 구제금융을 신청해야 한다는 쪽으로 가닥을 잡았다. 김수석은 이같은 내용 을 담은 보고서를 김영삼대통령에게 보고했다. 대통령이 외환위기를 인지한 시점이 이때부터라니 한나라의 대통령이라는 사람도 대가리 나쁜 족속이지만, 그 아래 정 치 하는 것들도 대가리 나쁘기로 둘째 가라면 짜증 낼 놈들이다. 외환위기 조짐이 보이기 시작한 것은 10월 말이었으니 늑장보고가 얼마나 심했는 지 알만 하다. 강경식 부총리는 이보다 일주일 뒤인 14일이 되어서야 대통령에게 보고했다는 점은 나라 망해 먹으려고 아예 단단히 작정을 하지 않고서야 어찌 그랬 겠나 싶다. 김영삼 당시 대통령도 11월 6일 경제수석이 보고한 이후에야 외환위기 의 심각성을 알았다니 팔짝뛰고 환장 할 일이다. 게다가 이전부터 언론에서 그토록 외환위기를 경고했으며, 각종 경제지표가 그 사실을 입증하고 있었지만 대가리 나 뿐 족속이 그걸 알았을리 없었으니 누굴 탓하랴. 급기야 외환위기의 인지와 사태보고를 두고 재경원과 한국은행 사이에 책임론이 나 왔다. 재경원은 한국 은행이 위기상황을 자신들에게 정확히 알리지 않았다고 발광 했고 반면 한국은행은 위기 상황을 매일 보고했지만 재경원이 이를 소홀히 다루었 지 않았냐고 방방 떴다. 어느쪽이 대가리 깨지고 깨갱 거리며 꼬리를 내렸는지 아 직도 모른다. 청와대와 재경원, 그리고 한국은행 가운데 어느 한쪽 만이라도 사태의 심각성을 알 고 대처방안을 적극 모색했더라면 파국까지 치닫지는 않을 수도 있었다. 하지만 대 가리 나쁜 족속들은 모두가 책임만 떠넘길 뿐 전면에 나서려고 하지 않았고 그 고 통은 고스란히 국민의 몫으로 돌아 왔다. 그 고통은 실로 엄청났다. 시시콜콜 얘기 하자면야 밤을 새 가면서 열을 올려야 할 것 같으니, 그냥 IMF를 자처한 대가리 나 쁜 족속들에게 딱 한마디만 하고 다른 얘기로 넘어가자. 그래, 그 딱 한마디는 바로 이거다. 개쒜이들~! 물론 김영삼대통령 잘한 일도 있었다. 그 중에서 베스트 5만 추려 보자. 첫 번째, 교통문제 해결이다. 기름값을 엄청나게 올려서 도로에 차들이 안다니게 해 주었다. 참 고마울 따름이다. 그리고 두 번 째는 남북간 소득격차 해소이다. IMF 시작과 함께 남한소득도 북한과 별 차이 없어져 버렸으니 뭐. 그리고 세 번 째는 도시인구증가 해소이다. 많은 실직자가 곧장 고향 앞으로 가! 를 외치며 귀농하는 바람에 가능했다. 그리고 네 번째로 잘한 일은 빈익빈 부익부 해소다. 수많은 대기 업이 망해 거지가 되도록 만들어 주었다. 참 고맙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국위선양에 단단히 한몫을 했다는 것이다. IMF로부터 엄청나게 많은 돈을 빌려 우리나라를 세 계적으로 유명해지게 만들어 주었다. 진짜 고마워 죽겠다, 시팍. 어쨌거나 그 시절, I.M.F 세 알파벳을 사용하여 시대상황을 풍자하는 것이 유행하 였다. 환란을 미처 막지 못한 돌대가리들을 I'm F (나는 역시 F학점이야) 혹은 I'm Fool (나는 바보야)등으로 해석시켰고, 기업에서 본격적인 정리해고가 시작되자 I'm Fire! (나는 해고) I'm Fly! (나는 파리목숨) I'm Finish! (나는 끝)로 서서히 그 해 석이 거칠어지기 시작 했다. 또 감원바람을 피하기 위해 I'm fixed (나 바닥에 딱 붙었어)를 외치더니 다행히 해고 바람에서 견딘 일부는 I'm fine (나는 괜찮아)하며 안도하기도 했다. 기업인들은 꽁꽁 얼어붙은 자금난 탓에 I'm freezing(나 얼어붙고 있어)을 외칠 수밖에 없었다. 신세대들은 'IMF'를 영문으로 뜻풀이하면서 International Money Festival(국제적 인 돈자랑 축제)이라고 표현, 은근히 IMF에 대한 반감과 경제주권을 상실당한 심정 을 우회적으로 담았다. 또 It’s monetary fight(이건 돈싸움)로 국가간의 국경없는 경제전쟁에서 승리하기 위해서 풍부한 외화확보가 얼마나 중요한지를 나타내 보였다. 신세대들은 아르바이트 자리를 잃게 되자 I'm fighting(pocket money) 즉, 용돈과 의 싸움을 벌이고 있다고 절규하기도 하고, Idle my father(실직당해 빈둥거리는 우리 아버지)의 축 늘어진 어깨를 보고 안타까워 하기도 했다. 이밖에 실직자의 마음을 한마디로 정의한 I am free(나 한가해요)도 씁쓸함을 담고 있다. IMF로 인해 고통이 예상되는 미래에 대한 불확실성을 담은 It’s mournful future (슬픈 미래)는 우울한 마음을 표현하고 있다. 경제국치를 당한데 대한 실망감으로 I(아이고)M(미치고) F(환장하겠네)로 풀이하기도 한다. US 뉴스 앤드 월드 리포트 지는 한국 경제가 IMF관리체제로 들어가면서 한국인들 사이에 자조적인 농담으로 퍼지던 IMF신조어들이 시간이 흐르면서 점차 다른 양상 을 보이고 있다고 제 마음대로 떠들었다. 그 주간지는 한국에서 맨 처음 구제금융 지원과 함께 대량 해고가 예상되자 I'm Fired(난 해고야)로 시작됐던 이 세 글자가 김대중 정부가 들어서자 I'm Fine(괜찮 아)로 바뀌었다고 말하고, 최근 경제 사정이 조금 나아지자 I'm Forgetting(잊어버 렸어) 증세를 보이고 있다면서 한국인들은 이 모든 현상에 I'm Fed-up(지겨워)을 내밷고 있다고 보도했다. 남의나라 일에 왈가왈부하는 그놈들이 내가 보기엔 일단은 더 웃기는 일이지만 필 자가 생각 하기로는 IMF를 한번 겪어 본 우리에겐 I'm Fighting의 정신이 더욱 필 요한게 아닌가 하는 생각이다. 또한 지성의 요람이라는 대학가에서도 그 풍속도가 바뀌어 'IMF 시대의 캠퍼스 생 활신조'까지 등장 했는데 그 내용을 잠시 들여다 보면 이렇다. 아르바이트는 뭐든지 한다, 내기가 걸린 운동경기나 게임은 목숨걸고 이긴다, 선배 는 무조건 아는 척하고 후배근처엔 얼씬거리지 않는다, 영화대신 비디오를 빌려보 고 영화를 볼땐 초대권을 이용한다, 점심은 도시락으로 해결하고 가능하면 여럿이 모여 반찬을 나누어 먹는다, 친구들과는 만나서 얘기하고 전화는 가급적 쓰지 않는 다, 휴대폰은 받는데만 사용하고 타인에게 노출시키지 않는다 라는 항목들이 포함 되어 있다. IMF 때 각 기업의 입사원서에 첨부된 자기 소개서엔 이런 구절들도 있었다고 한다. 참치를 잡아 가공해서 파는 회사에 취직을 하기 위한 한 지원자는 '오리발과 물안 경만주십시오. 태평양에서 참치를 몰아오겠습니다. 만약상어에게 봉변을 당해도, 보 험금은 일체없는 걸로 하겠습니다.'라고 했으며, 타이어 회사의 지원자는 '모든 타이 어는 본인의 입으로 바람을 불어 넣어 불량을 잡아 내겠습니다' 라고 했으며, 자동 차 회사 지원자는 '자동차 충돌실험을 할 때 제가 직접 타고 실험후 보고서를 제출 하겠습니다. 물론 구급차는필요 없습니다. 안 좋은 상황이 생기면 제가 직접 걸어서 병원으로 가겠습니다.'라며 어떻게든 직장을 가지려고 애를 썼다. 또한 '수중작업할 때 산소통은 필요없습니다. 용접봉도 주지마십시오. 라이터로용접 하겠습니다.' 라며 조선소를 상대로 한 지원자도 있었으며, '독도 기지국 건설할 때 송신탑을 들고 서 있겠습니다. 부식은 절대 사양합니다. 갈매기로 대신하겠습니다.' 라며 통신회사 지원자는 이를 악물기도 했다. 물론 믿거나 말거나다. 또한 IMF 직장인 백태도 나타났는데, 살길을 찾아 떠나는 사람을 철새파라 비유했 으며, 눈치만 살피며 악착같이 버티는 사람을 낙지파로, 겉으로는 태연하나 물밑에 서 부업을 찾는 사람을 일컬어 문어발 파라고 지칭하기도 했다. 그리고 식사 문화도 바뀌어 더치페이가 증가하고, 아니 그것이 당연하다고 믿게 되 는 지경까지 이르렀고 지금 회고 하건대 그 당시엔 그 누구에도 밥한번 얻어 먹기 가 하늘의 별따기였다. 하지만 더치페이에 익숙해지지 못하는 소심한 직장인들은 아예 도시락을 지참하고 회사에 나타났고, 한달에 한번 씩 하던 회사 회식은 일년 이 지나도 말도 꺼내지 못할 지경에 이르렀다. 또한 사회 풍속도를 살펴보면 IMF 한파로 여름 휴가철 풍속도가 크게 달라지면서 여름들어 각 백화점에 휴가인파가 몰려드는 기현상이 나타났다. 원인은 바로 카우 치 포테이토(Couch Potato)족이었다.카우치 포테이토족이란 휴가때나 쉬는날 아 무데도 가지않고 집에서 비디오나 TV를 보면서 감자칩을 먹는 사람들을 이르는 신 조어였다.그같은 카우치 포테이토족의 증가는 상품 매출에도 영향을 미쳐 추동절 기에 비해 떨어지기 마련인 과자류 매출이 오히려 증가하는 현상까지 나타냈다. 8 월에는 매출이 크게 떨어진다는 8월 망통이란 말이 무색하게 휴가철 들어 도심 백 화점보다는 지역밀착형 백화점을 중심으로 고객이 증가하는 기현상을 보였다. 그리고 실직자들이 생활방편으로 노점상으로 몰리면서 단속기관인 시가 생계보호 차원에서 노점상들을 최대한 보호해주는 현상까지 초래했다. 전에는 시경찰의 눈치 를 보며, 그리고 한편으로는 폭력배들의 금품 갈취에 시달렸으나 오히려 경찰이 자 주 순찰을 돌며 보호해 주는 지경에까지 이르렀다. 행정당국과 경찰이 종전에 단속 대상 1호로 삼았던 포장마차도 은근히 눈감아 주었다. 그러나 IMF형 사기도 한몫을 차지했다. 가입비 1백 50달러를 내면 무담보로 5천달러를 대출받을 수 있는 신용카드를 발급 해주고 회원을 모집해 오면 그 수에 따라 최고 3만달러의 수당도 받을 수 있다는 말에 가입비와 업무대행료를 받아 가로채는 싸가지들도 있었고, 부동산 거래 촉진 을 위해 광고를 하라고 부추겨 광고비를 받아 처 먹고 튄 개놈들도 있었고, '리조트 공사대금 대신 받은 스키+콘도 회원권을 90만원에 급매합니다' 라는 지나치게 시 세보다 싼 문구를 내 걸어 놓고 등처먹는 놈들도 있었고, 사회적 불안한 심리를 이 용한 신종판매 수법으로 '영어공부를 하면 앞날이 열리겠으므로 교재를 구입하고 학원에 등록하라'고 하며 접근하여 학원비 등처 먹은 그래도 조금은 인간적인 싸가 지들도 있었다. 고속도로나 지방국도로 빠지는 서울 외곽의 주요소에는 '기름도둑' 들 때문에 골치가 아팠다. 기름을 가득 채운 뒤 주유구를 닫는 순간 부리나케 도망 치거나 호스를 제자리에 놓는 사이에 토꼈다. 그리고 어떤 경우에는 손님이 건네준 카드를 확인하는 동안 차가 떠나버렸고 그 카드는 신용카드가 아닌 직불카드였다. 또 이런 일도 있었다. 서울 강남의 K고교 근처에서 중국집을 경영하고 있는 B씨는 교사를 자처한 40대 중반의 신사가 탕수육과 자장면 3그릇을 주문하면서 대금은 학교에서 수표로 주겠다며 거스름돈을 요구하길래 설마 선생니이 거짓말까지 시키 겠냐고 별 의심없이 음식값을 빼고 잔돈 7만4천원을 건네주었다. 그런데, 막상 음 식을 들고 학교에 찾아 가 보니 그러한 선생은 존재하지 않는 것은 당연지사. 또한 IMF 꼴불견들도 나타났다. IMF 시작 한달간 달러는 물론 원화마저 기근 현상이 일어났고, 돈을 꾸려는 기업과 자기자본 비율을 맞추려는 은행간의 줄다리기 속에 부도기업이 속출했다. 그 와중 에 일부 부유층은 환투기에 가세, 큰 돈을 만진 처 죽일 인간들도 있었으며, 무려 150만달러를 손에 든 달러부인이 은행에 나타나 모두를 놀라게도 했다. 생필품 사 재기가 시작돼 설탕 등 일부 품목은 아예 매장에서 볼 수 없는 지경이 되었고 서민 들은 먼 발치에서 그같은 형태를 지켜볼 수밖에 없었다. 돈은 아래에서 위로 흐르 고 고통은 위에서 밑으로 흐른다는 말이 더욱 실감난 시대였다. 또 IMF 얌체들도 나타났다. IMF 시작된 그해 년말, 돈 좀 있는 일부 부류는 나라야 망하든 말든 여전히 호화생 활을 즐겼다. 나라가 부도위기에서 아슬아슬하게 벗어나고 환율이 하락세로 돌아서 자 때를 놓칠세라 서울 강남의 한 은행창구에 20만 달러를 들고 나타나 팔겠다고 나타난 놈도 있었으며, 그런가 하면 강남 일대 카페 골목에는 부유층 2세들이 타고 온 외제 승용차가 줄을 서고 고급 양주 송년회가 한창이었다. 또한 일부 매장에서 는 1억원짜리 밍크코트가 없어서 못팔 지경에 이르는 등 부유층의 호화와 사치는 사라지지 않았다. 서민들 가계가 어렵고 어린이들까지 1달러 모으기에 나서고 있는 마당에 그런 부류가 있다는 것은 그 의식수준이 망국적이라고 할수 있었다. 물론 내돈 내가 쓰는데 왜 네가 지랄이냐고 한다면 할말이 없다. 그래 무슨 말을 할 수 있겠는가. 그래도 한마디는 하고 싶다. 시팍, 똥꾸녕을 찢어 버릴까 보다! 라 고. 그래도 대다수의 국민들은 허리띠를 졸라 맸다. IMF에서 벗어나기 위해 장롱 속 금모으기 운동이 전국을 휩쓸었다. 10돈짜리 별을 내놓은 장군이 있는가 하면 5천만원 상당의 가게의 금덩이를 들고 온 금은방 주인 도 있었다. 자식들 돌선물로 받은 금반지는 수집 창구마다 그득했다. 그러한 사항들 이 모두 외채를 갚는 수단이 되고 국민들의 자발적인 호응으로 이루어지고 있다는 점에서 적어도 서민들은 최선을 다 했다. 하지만 서민들만 금모으기에 호응할 뿐 정작 나와야 될 부유층 놈들의 금덩어리나 금송아지는 안나와서 씁쓰레한 기분을 들게 했다. 하지만 국민들이 허리띠 졸라매던 당시 정책당국은 어떠 했는가를 생각하면 닝기리 시팍 조또 욕 나온다 진짜. 우리 경제가 IMF 관리를 받기시작하면서, 정책당국자라는 짜증나는 인간들은 우리 의 필요에 의해 정책을 결정하는 것이 아니라 IMF의 눈치를 보는데 급급했다. 정책 당국자들은 IMF의 심기를 건드릴까 노심초사, 심지어 언론에까지 '협상내용을 자꾸 보도하면 저쪽에서 불쾌해한다'며 자제를 요청하는 지랄병을 떨었다. 그저 IMF 의 말한마디에 벌벌 떠는 모습을 보면서 나는 정책당국자들의 바지를 까내리고 확인하 고 싶었다, 고추가 있나 없나. 어쨌거나 1997년 말 외환위기 발생으로 IMF 체제가 시작된 후 2년쯤 지나자 주요 경제지표가 말해주듯 그야말로 괄목할만한 회복세를 보였다. 금리는 30%에서 9-10% 선으로 떨어졌고 환율은 1,700원대에서 1,200원대에서 안정되었고 바닥이 났던 외환보유고는 700억 달러 수준을 돌파하였다. 실업률은 7%까지 올랐다가 4% 대로 떨어졌고 경제 성장률도 마이너스 5.8%에서 약 9%의 고성장으로 돌아섰 다. 그러한 추세에 고무되어 1998년 12월 3일 서울에서 개최된 '한국의 경제위기와 구 조개혁을 위한 국제포럼'에 참석한 미셀 캉드쉬 IMF 전무이사는 그 동안 IMF가 '위기를 맞아 추진 했던 정책들이 옳았다는 증거들을 확인 할 수 있었다.'고 자화자 찬 했고, 그에 질세라 김대중 대통령도 '금융, 노동, 공공, 기업 등 4대 부문의 개혁 을 추진한 결과 1년 반만에 외환위기에서 탈출하였다'고 선언하였다. 물론 그 동안 IMF와 정부가 외환위기 극복을 위해 보여준 노력과 성과를 높이 평 가하지 않는다는 것은 아니나 필자는 그러나 캉드쉬의 말과 김 대통령의 선언에 대 해서는 지랄 육갑떤다고 생각했다. 그러면 필자가 왜 IMF의 위기관리 방식이 옳았다고 하는 캉드쉬의 말이 지랄 육갑 떤다고 판단하는지에 대해서 짚고 넘어가 보자. 먼저 나는 당시의 한국사태의 핵심 은 유동성 부족에 있었다고 본다. 경제의 fundamentals에는 큰 문제가 없었고 이것 이 태국이나 인도네시아의 사정과는 다른 점이었다. 물론 외환 위기는 한국 경제의 구조적 취약점과 무관 하지는 않았다. 그러나 그 사실은 외환위기 이전에 이미 국 제 사회에 널리 알려져 있었고 국내에서도 그를 극복하기 위한 노력이 없었던 것도 아니었다. IMF 이전에 이미 13개의 금융개혁 법안이 국회에 계류 중에 있었다는 것이 그것을 극명하게 말해 준다. 다만 문제는 인도네시아, 태국에서 외환 위기가 발생하자 외국 투자가들은 외환 위기가 타국으로 파급되지 않을까 신경을 쓰게 되 었고 그러한 시각에서 한국의 구조적 취약점을 다시 보게 되어 불안감이 가중되었 다는 것뿐이다. 어쨌거나 주변국에서 외환위기가 발생하면 한국에 투자한 외국 투 자가들은 불안해 질 수밖에 없다. 고금의 경제사가 말해 주듯이 금융위기에는 언제 나 심리적 요인이 결정적 역할을 한다. 가령 어떠한 은행의 지불능력이 의문시된다 는 풍문이 돌면 예금주가 은행에 몰려와서 예금 환불을 요구하게 되고 이러한 경우 지불 불능에 직면하지 않는 은행은 많지 않을 것이다. 이때에 고객들의 심리적 불 안을 진정시키는 길은 오직 하나 밖에 없다. 즉 충분한 유동성을 마련하여 고객들 이 원하면 언제라도 돈을 내줄 수 있는 상태를 만드는 외에는 다른 방법이 없는 것 이다. 그래서 한국 정부는 긴급히 IMF에 긴급 융자를 요청했다. 그러한 구원 요청은 IMF 회원국의 당연한 권리이고 바로 그 목적을 위해 IMF가 존재하는 것이다. 만약 그 당시 IMF가 즉각적으로 3-400억 불 정도를 한국에 융자할 수 있었다면 한국은 외 환위기를 회피하고 비교적 평온한 가운데 필요한 거시정책의 조정 (환율, 금리 조정 등)을 할 수 있었으리라고 본다. 그러나 IMF는 이러한 즉각적인 대응에 실패했다. 실패한 이유는 IMF는 흔히 세계의 중앙은행으로 지목되지만 그에 상응하는 자원을 지니고 있지 않았다. 한마디로 말하자면 개코도 없으면서 소리만 요란한 빈깡통 이 라는 것이다. IMF 당국도 이점을 인식하고 있었고 그러기에 가용자원의 부족을 완 화하기 위하여 회원국의 증자계획을 추진 중에 있었고 특히 선진국 회원들에게 협 조를 요청하고 있었다. 그러나 미국은 의회의 반대로 180억 달러의 증자 쿼터를 이 행하지 못하는 형편이었다. 그러므로 IMF는 자기자금 이외에 각국 정부와 교섭하여 이곳 저곳에서 출연금을 긁어 모으는 한편 민간 금융기관에 협조를 호소할 수밖에 없었다. 그러자니 시간이 걸렸고 동시에 한국 정부와 융자조건을 협상하는 데에 많 은 시간을 소비하였으니 외환위기에 대한 신속하고 효과적인 대응이 불가능했다. 융자조건의 핵심은 한국에 대한 외국 투자가들의 신임을 회복하는 데에 두어졌고 그를 위하여 한국 정부에게 IMF의 전가보도(傳家寶刀)인 안정화 시책의 실시를 요 구하였다. 즉 금리와 환율의 완전 유동화, 금융 재정의 긴축, 8%의 BIS 자본 비율 기준에 의한 부실 금융기관의 퇴출 등이 그것이다. 그러나 그 결과로 외환 위기는 금융위기로 확대되고 금융위기는 마침내 경제위기로 치달았다는 것은 주지의 사실 이니 긴 설명이 필요치 않을 것이다. 필자가 보기에는 이러한 한국의 경험은 IMF 헌장 제1조에 명기한 설립목적을 무색 케 하는 것이다. IMF 헌장 제 1조에 의하면 회원국이 국제수지 불균형에 봉착했을 때 '자국경제 및 국제경제에 악영향을 미칠 파괴적인 조치를 취함이 없이 불균형을 시정할 수 있는 기회를 부여하기 위하여' 일정한 조건하에 일시적으로 자금을 대여 하는 것을 목적으로 한다고 명기 되어있다. 그러나 IMF가 과연 정부가 '파괴적 조 치'를 회피할 수 있도록 한국을 도와 주었는지 아니면 오히려 파괴적인 조치를 강 요하여 일시적이나마 한국경제를 파국으로 몰아넣지 않았는지 이 점은 앞으로 학계 에서 논쟁거리가 될 것이다. 어쨌든 현재의 국제통화체제와 IMF는 오늘의 금융시장 의 세계화에 적절히 적응할 수 없게 되었고 따라서 전면적 개편이 불가피하다는 것 이 우리의 생각이다. 그러한 의미에서 캉드쉬가 그 동안 IMF가 '위기를 맞아 추진 했던 정책들이 옳았다 는 증거들을 확인 할 수 있었다.' 라고 한 말은 귀신 씨나락 까먹는 소리에 불과하 다는 것이다. 아마도 한국의 경제회복이 지금이 아니라 2년이나 3년 후에 왔더라도 IMF는 똑 같 은 말을 지껄였을 것이다. 그들은 긍정적 측면만 보고 그 배후에 깔린 대가를 생각 하지 않는 단순한 종족에 불과하다. 내가 보기에는 IMF의 거시적 정책 처방은 비현 실적이고 필요 이상의 대가를 강요했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IMF의 거시 정책 처방은 그렇다 하더라도 IMF는 다른 의미에서 한국 경제 에 큰 공헌을 했다. 왜냐하면 만약 IMF의 개입이 없었더라면 지금과 같은 강도 높 은 구조개혁은 있을 수 없었다고 생각되기 때문이다. 자고로 한국은 외압이 없으면 해야 할 일을 하지 못하는 나라이다. 이번만 하더라도 IMF를 불러 들일 때, 당시의 대통령 출마자는 자기가 당선되면 IMF의 융자 조건을 재검토 하겠다고 선언했었다. 그러나 당선이 되자 IMF의 강경한 요구에 따라 금융 및 기업 개혁 프로그램을 전 적으로 받아들이게 된 것이다. 그러니 김대중 대통령 역시 캉드쉬가 귀신 씨나락 까먹는 소리를 하는 것을 보고 아, 저러면 되겠구나 싶어서 그냥 내 뱉어 본 말에 불과하다는 것이다. 캉드쉬야 우리 민족이 아니라서 영어로 지껄였을것이고 다행이 내가 못 알아 들었 으니 딴지를 걸 필요는 없다고 치더라도 나는 당시 김대중 대통령만큼은 그런말을 앞세울게 아니라 다르게 말해야 했다고 생각한다. 내가 대통령이었다면 이리 말했지 않았을까? '에, 국민 여러분. 우리는 1년 6개월여만에 IMF에서 벗어 났습니다. 에, 이는 세계 어느 국가와 민족들에게도 없었던 일이며, 나아가서는 우리 민족이기에 가능 했다 고 본인은 생각해 부러요. 안 그라요?' 라고. 어쨌거나 그 당시 IMF는 생활습관조차 쫀쫀하게 바꾸어 버렸다. 재밌는 비디오가 나오면 즉각 빌려다 봤지만 그 당시에는 포스터만 한참 들여다보 고 집으로 돌아와 내용을 가늠해 보는 것으로 대신 했고, 중국집에 짜장면 한그릇 시키기 미안해 군만두도 같이 시켰으나 IMF때는 아예 중국집 전화를 잊어 먹어 버 렸다. 또한 바쁘고 시간없을 때는 택시를 타던 것도 IMF때는 그냥 뛰어 다녔다, 바 쁜일도 없었으므로. 화이트데이 때는 멋진 선물세트 준비하던 것도 그냥 누룽지맛 사탕 한 봉지로 때우 게 만들었고, 하늘을 바라보며 씩씩하게 걷던 걸음도 어느샌가 땅을 보며 걷게 되 었다, 혹시라도 동전이라도 주울까 해서. 식사는 어머니가 안 차려주면 거절해왔지만 국수라도 삶아서 다시다 가루 뿌려 먹 는것도 감사하게 여기게 만들었으며, 만화 가게에 갔을 때 만화 보면서 당연히 라 면도 시켜 먹었지만, IMF 때는 침 질질 흘리며 라면 먹는 사람 구경만 하게 되었 다. 당구장에 가면 항상 내기 당구를 쳤으나, 쵸크라도 훔쳐서 팔아볼까 생각하게 만들 었으며 여자한테서 전화가오면 당장 데이트 약속을 했으나 동생 목소리 내면서 형 없다고 하기 일쑤였다. 그리고 강아지에겐 항상 제일 비싼 사료를 먹였지만 IMF 때엔 제일 싸구려를 사다 가 그것도 물에 퉁퉁 불려 먹였다. 가끔 바퀴벌레도 잡아 먹였다. 책사는 것이 취미이다가 헌책방 돌아 다니면서 책 파는일이 취미로 바뀌었고, 가지 고 싶은 음악신보가 나오면 즉각 구입 했으나 IMF 때는 친구에게서 빌려와서 그 이후로 연락을 딱 끊었다. 또한 YS가 별로 밉지 않았는데 IMF 때엔 Y자만 봐도 발광했다. 종로 YMCA 건물 앞에서는 항상 노상 방뇨를 해야 직성이 풀렸다. 어디 그 뿐이랴, IMF 때 바뀐 생활 습관들은 짚어 보면 수도 없을 정도다. 어쨌거나 IMF라는 거대한 장애물을 불과 이년도 지나지 않아 간단하게 극복해버린 세계에서 유일한 종족, 그러나 IMF에서 벗어나자마자 언제 그랬느냐는 듯이 간단하 게 잊어 버리는 종족, 그 종족이 바로 미스테리 한국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