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도퀸★단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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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
자신만만하게 자기만 믿으라며 녀석들을 안심시키고 집에 돌아오니 아리의 마음은 날아갈 듯 가볍고 편안했다. 이제야 제대로 할 일을 했다는 느낌이 들었다.
신나게 콧노래를 부르며 가방을 내려놓고, 교복을 훌훌 벗어 던지고 욕실로 들어가 시원하게 샤워를 했다. 아리의 노래소리는 샤워를 하는 내내 끊이지 않았다.
“이제부터가 진짜 시작이다!”
샤워를 마치고 긴 머리카락에서 뚝뚝 떨어지는 물기를 수건으로 닦아내며 욕실에서 나왔다.
뽀송뽀송해진 얼굴을 보며 입이 찢어져라 거울을 보고 있는데, 현관쪽에서 쿵당쿵당하는 소리가 들리더니 율아의 울음소리가 들려왔다.
“뭐야?”
순간 불안한 마음이 엄습해오고……
아리는 수건으로 머리를 틀어올리고 방을 나왔다.
거실에선 율아가 주저 앉아 엉엉 울고 있었다. 그리고 어쩔 줄 몰라하며 율아 옆에 주저 앉아있는 동생 강이도 보이고.
“율아야, 왜 울어? 강아, 왜 이래?”
강의 눈빛으로 봐선, 율아가 임신 했다는 걸 안 모양이었다. 율아가 그 사실을 알고 너무 놀란 나머지 마구 울기 시작한 것이었다. 다행히 아리의 엄마는 시장에 가셔서 집에 안 계셨다. 강은 그 틈에 이 일이 벌어진 것을 조금은 감사해야 했다. 아리는 침착하게 율아를 달래기 시작했다.
“왜 울어, 율아야. 응?”
“엉엉. 언니. 저 이제 어쩌면 좋아요?”
폭포수같은 눈물을 쫙쫙 흘리는 율아를 보며 아리는 머리카락을 감쌌던 수건을 풀어 율아의 눈물과 콧물을 박박 닦아주었다.
“울지마. 울어서 해결되는 문제 아니야. 강하게 마음 먹어.”
“으으.엉엉.”
여러 가지 감정이 겹치며 눈물이 되어 흐르고, 율아가 바닥을 치며 우는 걸 보고 아리는 마음이 착잡해졌다. 괜히 강에게 화가 돌아갔다.
“으이구! 최강!”
아리는 소파 위에 있던 쿠션으로 강을 때렸다.
“엉엉. 언니, 우리 강이 때리지 말아요.”
울면서도 강이 맞는 걸 보구 아리를 말리는 율아다. 둘은 이래서 떼어놓을래야 떼어놓을 수가 없다.
강이 가져온 물을 들이키고, 율아가 안정을 되찾았다.
“너무 놀래서…. 사실이 믿기지도 않구요. 갑자기 무서운 거예요. 그래서 눈물이 났어요.”
“응. 이해해. 나도 놀랐어. 너한테 미리 말하지 않았던 건, 몸도 안 좋은 상태에서 충격받고 또 쓰러질까봐 걱정되서, 조금 뒤에 말해주려고 했었어.”
“휴….”
강이 교복 타이를 풀며 그제야 한 숨을 돌렸다. 한쪽에 앉아 고개를 떨구고 있는 강의 모습에 아리도 율아도 함께 아팠지만, 이대로 풀이 죽어 있을 수만은 없는 법!
모두 기운을 낼 수 있도록 아리가 밝게 웃으며 말했다.
“축하해, 율아야. 강아.”
“누나….”
“언니….”
“조카 일찍 보는 것도 나쁘지 않지. 율아랑 강이 너희 지금이 힘들다고 나쁜 생각 가지면 절대 안돼. 생명은 소중한거야. 내 말 뜻 알아들어?”
아직 고등학생이고, 어리지만 이 둘은 서로를, 그리고 아기를 책임져야 할 의무가 있다. 한번에 실수로 생긴 아이지만, 이건 엄연한 하늘의 선물이었다. 아기 갖지 못해 울고 있는 여자들도 얼마나 많은데…….
“율아야, 너 혼자가 아니야. 이젠 정말 혼자가 아니야. 무서워하지도 말고, 두려워하지도 마. 너 옆엔 널 도와줄 우리들이 있으니까. 그리고 애기까지. 강이랑 나랑 부모님들한테는 기회봐서 잘 말씀드릴테니까, 걱정하지마. 응?”
토닥여주며 용기를 복돋아주는 아리 덕분에 율아는 울다가 웃음을 지었다.
“힘든 거 있으면 얼마든지 말하고.”
“언니, 고마워요….”
“고맙긴. 우리 강이 때문에 너가 고생이지.”
강과 율아, 아리도 지금 상황이 실감나지 않지만. 이겨내야 했다.
아리는 잠이 들기 전, 창문을 열어놓고 기도했다.
강이와 율아 예쁜 아기 주시라고. 그리고 사랑하는 두 사람에게 선물로 축복해주셔서 감사하다고…….
이렇게 된 이상, 감사가 먼저여야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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밤새 잠자리를 뒤척이다 새벽 일찍 학교에 나온 아리다. 이른 시간에도 명문고 학생들은 많다. 아리네 반에도 공부 잘하는 아이들이 일찍부터 나와 자리를 메꾸고 있었다.
“대단하다.”
아리도 자리에 앉아 책가방에서 책을 꺼내 책상서랍 안에 넣었다. 그리고 1교시 과목인 영어 교과서를 딱 펼쳐놓았다. 진도나갈 곳을 미리 보는데, 금세 눈꺼풀이 무거워졌다.
“아함. 오늘 너무 일찍 나왔나봐.”
책을 보니 졸린 것이겠지. 기지개를 한번 하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더 앉아있다가는 퍼질러 잘 것만 같아 교실을 나와 운동장으로 나왔다. 뒤운동장은 초록색 잔디가 깔려있고, 아주 오래되어 보이는 느티나무가 왼쪽 사이드에 자리를 잡고 있다.
오늘따라 시원한 공기에 아리가 양팔을 벌리고 서서는 산뜻한 기분을 맛보았다.
“기분 좋다!”
“나도 기분 좋다!”
갑자기 들리는 외침에 아리가 감고 있던 눈을 번쩍 떠서는 소리가 난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오른쪽 사이드에 붙어있는 화단에 쪼그리고 앉아있는 유신이 아리를 보며 한쪽 눈을 찡긋거렸다. 윙크다.
“뭐야. 너 왜 거기 있어?”
“나? 난 아침부터 애기들 밥주러 왔지!”
앙증맞은 말투에 손끝으로 애기들을 가리키는 유신의 손가락은 화단에 심어놓은 꽃들에게 향해있었다. 유신에게 이런 취미가 있을 줄은 상상도 못했던 아리가 놀라 ‘어머. 왠일이니.’를 연발했다.
“너가 이거 키우는 거야?”
“어. 예쁘지?”
“예쁘다~”
어릴 때부터 어머니가 집안에 화원을 만들어 꽃과 친한 유신이 학교 안에 따로 자신만의 정원을 만든 것이었다. 유신이 학교에서 알아주는 집안의 아들이니, 이것도 가능한 일이었다. 유신만이 손댈 수 있는 정원에 심어져있는 꽃들은, 거의 외국에서 수입해 온 모종으로 심은 꽃이었다.
“이런 취미가 있을 줄은 몰랐네!”
아리가 눈을 깜빡이며 꽃들을 쫙 훑어보았다. 유신이 심고 가꾸는 것이니 더 놀랄 수 밖에.
색색별로 맞추어있는 멋진 꽃밭은 유신의 꼼꼼하고 세심한 성격을 모두 보여주었다.
“정말 이걸 너가 다? 꽃 좋아해?”
“싫어하면 미쳤다고 이러고 있겠어. 엄마랑 누나들 영향이 커. 꽃을 엄청 좋아해. 나도 꽃이 좋아. 예쁘고, 키우면 키울수록 신비롭거든. 꽃도 생명이 있어서 인간이랑 똑같아. 아니, 인간보다 더 나을 때도 있어.”
유신이 심오한 말을 줄줄 늘어놓자 아리는 옆에서 고개를 끄덕이며 들었다.
“그리고 내 운명이 꽃이랑 살아야 명줄이 길다고 해. 그래서 좋은 것도 있구.”
“너가 진짜로 사랑하는 여자를 만나면 꽃은 필요없겠다.”
“왜?”
“너가 사랑하는 여자가 꽃이잖아. 진짜 좋아하는 여자랑 살면 그게 꽃이랑 사는 거지.”
유신은 아리의 말에 빈민주제에 대단하다는 듯한 표정을 지어보였다.
“우리 애기들을 봐서 그런가, 오늘 머리 좀 돌아가는데?”
“나, 원래 똑똑해!”
유신은 유신그룹 막내아들로 위로 누나들만 5명인 집안의 귀한 아들이었다.
남의 말이 금방 솔깃하는 귀도 얇고 어찌보면 순진하다고 할 수 있는 아이였다.
“배추나 무, 상추, 고추 이런 거 심으면 더 효과적이고 좋을텐데.”
“떽! 우리 애기들 앞에서 무슨 망발을 하는 거야! 상추, 고추라니! 그런 서민적인 걸 어디다 우리 애기들하고 비교해!”
“망발이라니? 서민적인 건 또 뭐야!”
아리가 발끈하며 성질을 냈다.
“실용적인 거, 먹을 수 있는 거 기르는 게 훨씬 재밌다!”
유신도 지지 않는다. 둘의 유치한 유치원생 티격태격은 시작되었다.
“뭐어? 내 꽃들 기르는 게 훨씬 재밌어! 호박같은 건 너나 길러! 이 호박!”
“뭐어? 호박? 너 호박이 얼마나 몸에 좋고 피부에 좋은 건지 알아? 모르지?”
유신이 아리의 말을 되받아치지 않고 멈칫했다.
“피부에 좋아?”
피부엔 여자만큼이나 관심이 대단한 유신이었다.
“그래! 피부에도 좋고! 몸에도 얼마나 좋은데! 그리고 호박으로 만든 음식이 얼마나 맛있는데! 꽃 먹을 수 있어? 너가 기른거 먹어본 적 없지?”
아리의 말에 밀리는 유신이다. 꽃을 먹진 않으니까.
“이왕 기르는 거 먹고 몸에 좋은 거면 얼마나 좋아. 안 그래? 너도 그렇게 생각하지?”
“조금. 어느정도는.”
“우리집에 남아있는 상추씨 있는데, 내일 가져와서 뿌려볼래?”
“어히! 어디 감히!”
“먹는 거 기르는 거 신기하지 않아? 뭐 싫으면 말구. 난 너 생각해서 귀한 씨도 가져온다는 말인데.”
몸에 좋고 피부에 좋은 상추씨를 준다는 말에 귀가 솔깃해진다. 유신은 원래 귀가 얇은 편이다. 사람 말을 안 듣는 거 같으면서도 굉장히 그런 면에 민감한 성격의 소유자다.
“누가 싫대. 내가 귀퉁이 조금 빌려줘볼테니까, 한번 심어봐. 딱 한번만이야.”
유신은 못 이기는 척 하고 아리에게 말을 했지만 내심 큰 기대를 하고 있는 듯 보였다.
‘귀여운 것.’
유신이 교복에 묻은 흙먼지를 털며 아리에게 물었다.
“근데, 너. 이번 일 잘 할 수 있어? 류아버지 말이야.”
유신이 교복에 묻은 먼지를 털며 아리에게 물었다. 아리는 자신감에 찬 얼굴을 하고 대답했다.
“고롬! 잘할 수 있지. 오늘부터 시작이야. 왜, 내가 성공 못 할까봐 걱정돼?”
“내-내가 걱정을 왜 해! 할 수 없을 것 같으니까 그냥 물어본거야! 큰 소리 뻥뻥 치고 못 했다고 쪽팔려 할 것 같아서!”
말은 밉게 하지만, 유신의 속마음은 아주 조금 얼굴에 나타났다. 성공했으면 하는 바람….
“내가 성공 못하면 서운해 할꺼지? 걱정마. 이 누나가 성공! 꼭 하고 만다!”
“저리가! 성공을 하던 말던 난 상관 안 해!”
아리가 유신의 머리카락을 살짝 헝크려트려 놓자, 유신은 교복 속안에서 머리빗을 꺼내 머리를 단정하게 빗었다.
아리는 꽃밭을 더 구경한다는 유신을 뒤로 하고, 교실로 올라왔다.
2층 계단 끝엔 아리를 기다리고 있는 이세아와 윤나비, 그리고 SS클럽 여자애들이 서있었다.
“깜짝이야.”
5명이 앞을 턱 하니 막고 있었다.
“아리야, 좋은 아침이야.”
‘뭐야? 이게 뭘 잘못 먹었나.’
이세아의 간드러지는 목소리에 닭살이 돋을 정도였다.
“왜 이래?”
“왜 이러긴. 너랑 이제 친하게 지내고 싶어서 그러지.”
“친하게 지내고 싶다고?”
아리에게 팔짱까지 껴며 달라붙는 세아다. 무슨 변화가 있었는지, 갑자기 방긋방긋 웃으며 말을 하는 세아를 보고 아리는 혼란스러웠다.
“그동안 미안했었어. 너가 처음 전학왔잖니. 내가 낯을 가려서 처음엔 쉽게 못 친해져서 그런 거야.”
이건 또 무슨 소리? 낯을 가리다니. 낯을 가리긴 커녕 못 잡아먹어 안달났었으면서.
처음 보자마자 갈치눈을 뜨고 째려보던 게 누구더라!
“너 어제 베르첼에 BM애들이랑 같이 있었다며?”
“어, 그런데.”
노련한 아리의 눈빛이 반짝 거렸다. 이세아의 검은 속셈을 모를 아리가 아니었다.
‘이래뵈도 너희보다 두 살이나 많고 오래 산 언니다, 아가들아.’
“너희들 무슨 얘기 했어?”
“그걸 너한테 알려줘야 돼?”
“당연하지. 우린 이제 친구잖아.”
친구우? 언제부터?
“우리 SS클럽에 들어 온 이상 비밀없이 모든 걸 다 말해야 돼.”
SS클러업? 언제부터 SS클럽 멤버가 된 건지, 알 수 없는 아리다.
아리는 세아의 팔짱을 빼내며 말했다.
“저기, 별 일 아니야.”
“아- 그래? 그렇구나. 그나저나 1교시 시간표 바뀐 거 알아? B건물 과학실에서 생물수업하는데.”
세아의 순간 번뜩이는 날카로운 눈동자가 아리의 눈에 스쳤다.
“그래?”
“저번에 과학실 너만 빼고 갔었을 때 마음이 아프더라. 오늘은 같이 가려고 네 교과서까지 챙겨가지고 왔어. 지금 가자.”
“어? 어. 그래.”
교과서까지 챙겨와서는 5명이 막무가내로 끌고 가니 어쩔 수 없이 아리는 SS클럽애들과 B동 건물로 이동했다.
분명 저번에 형빈이랑 갔었던 과학실은 A동에 있었는데, 과학실이 금세 바뀌었나? 조금의 의심이 들었지만, 아리는 SS클럽 애들을 따라갔다.
B동 건물에서 가장 후미진 곳, 아주 오래 전부터 창고로 쓰이고 있는 빈 교실 앞에 도착하자, SS클럽애들은 멈춰섰다.
과학실로 보이는데, 유리창 안으로 보니 아무도 없었다.
“아무도 안 왔는데?”
“우리가 제일 먼저 도착한거야. 들어가자.”
세아가 아리를 떠밀 듯 과학실 안으로 밀었다.
[12]
과학실에 한 발을 들여놓고 한 발은 밖으로 빼놓은 상태에서 아리가 의심쩍은 표정으로 세아에게 물었다.
“여긴 저번에 그 과학실이 아닌 것 같은데?”
그러자, 세아가 감추었던 검은 미소를 얼굴에 드러냈다.
“맞아. 그 과학실 아니야.”
“뭐?”
5명이 성공했다는 듯이 비웃음을 짓기 시작했다.
“내가 뭐가 이쁘다고 널 과학실로 안내하겠니. 호호호.”
사악한 웃음이 번지고, 세아의 말이 끝나기 무섭게 윤나비가 아리를 밀고 재빨리 과학실 문을 닫으려고 시도했다.
그런데, 확실하게 아리를 밀었어야 했는데 아리는 쉽게 밀리지 않았다.
그런 찰나, 아리가 닫히려는 문 틈으로 책을 끼워 넣었고 문을 부술 정도로 솟구치는 힘을 모아 문을 벌컥 열어젖혔다.
“헉!!”
5명 모두 아리의 괴력에 놀라 입을 다물지 못했다.
모두가 방심한 사이, 아리가 반대로 윤나비를 무적의 힘으로 과학실 안으로 끌어 당겨 바닥에 매쳤다.
“악. 아파.”
넘어지면서 무릎이 까진 나비가 울상을 짓자, SS클럽 애들이 꼴에 우정이라고 나비에게 달려갔다. 이런 경험과 대우는 처음인지 모두 놀란 기색이었다.
“나비야, 괜찮아?”
4명 모두 순순히 자기들 발로 과학실 안으로 들어 간 상태.
상황에 역전되어 있자 세아는 큰 눈을 번뜩이며 흥분한 듯 보였다. 그러나 그것도 잠시, 아리에게 힘으로 밀려 과학실 안으로 내동댕이 쳐졌다.
“사람 봐가면서 놀아. 난 너희들 상대가 아니야! 다시 한번 이런 못된 짓을 꾸몄다간 이 정도로 안 끝나.”
아리는 빠르게 몸을 움직여 과학실 문을 닫고 윤나비가 떨어뜨린 자물쇠와 열쇠를 주워 문을 잠가버렸다.
“까불고 있어.”
“야! 야!! 이거 열어!!”
문을 차고 난리를 치며 아리에게 욕설을 퍼붓는 부잣집 아가씨들이다.
“벌이야! 너희같으면 날 안에 가두고 열어줬겠냐?”
유리창에 붙어서 하나같이 살벌할 정도로 악독한 표정들을 지으며 문을 열어달라고 인상쓰는 SS클럽 여자애들을 보며 아리가 한 손에 들고 있던 열쇠를 바닥으로 떨어뜨렸다.
“주울 수 있으면 주워봐.”
찰랑, 경쾌한 소리를 내며 복도에 떨어진 열쇠를 물끄러미 바라볼 수 밖에 없는 SS클럽 여자애들이었다. 마음을 예쁘게 썼어야지.
아리는 통쾌한 듯 한바탕 크게 웃으며 복도를 빠져나갔다.
“태권도 관장님 딸을 어떻게 보구. 내가 된장먹고 자랐어. 너희들하고는 상대도 안돼. 아가들아.”
부드러운 실크같은 긴 머리카락을 휘날리며 아리는 씩씩하게 걸어서 교실로 향했다.
B동 과학실에 갇힌 SS클럽 여자애들은 안에서 방방 뛰며 난리가 났다.
그나마 희망이라고 가지고 있던 세아의 핸드폰이 터지질 않는 것이었다. 이런 상황이 될 줄 몰랐기 때문에 4명 모두 교실에 핸드폰을 두고 온 것이었다.
“핸드폰도 안 터지고 이젠 어떡해!”
“전학생 골탕먹이려다 이게 뭐야, 정말!”
두 명이 짜증섞인 목소리로 말하자 세아가 굳은 표정으로 두 애들을 쳐다보며 말했다.
“재밌겠다고 같이 일 벌인 게 누군데. 이제와서 나한테만 책임을 밀어?”
세아가 언성을 높이자, 꼼짝 못하고 조용히 앉아있는 SS클럽 여자아이들이다.
잠자는 사자의 코털을 건드린 것이다. 안 그래도 열받아 있는 세아의 머리에 기름을 칠한 것이나 매한가지였다. 이번엔 세아가 신경질적으로 돌변해 SS클럽 애들을 쪼기 시작했다.
“나비 넌 대체 일을 왜 이렇게 만들어? 너가 문닫는다고 했으면 책임졌여야 하는 거잖아!!”
피가 나는 무릎을 잡으며 앉아있는 나비가 세아를 올려다보며 우물거렸다.
“걔 힘이 셀 줄은 몰랐지..”
“몰라도 그렇지. 이게 뭐냐구! 아악!”
휘몰아치는 태풍같이 발악을 해대는 세아를 아무도 건드릴 수가 없다. SS클럽 애들은 아무말 없이 바라보기만 했다. 그랬다간 또 어떤 봉변을 당할지 알 수 없으니 말이다. 저번에 한 아이는 세아에게 덤볐다가 전학까지 가게 되었으니 말 다했다.
“지금 우리가 싸울 때가 아니야. 어떻게 해서든 나갈 방법을 찾아봐야지.”
나갈 방법이라. 나갈 방법은 없었다.
이 일을 어제부터 준비한 건 지금 과학실에 갇혀있는 5명이었다. 고로, 나갈 방법이 없다는 것도 아주 잘 알고 있는 셈이었다.
이 과학실 창문은 밖에서 잠그면 안에선 열지 못하게 되어 있어, 세아와 아이들은 어제부터 잠가놓고 아리를 가둘 만반의 준비를 해놓았던 것이다. 그리고 반대편 창문으로 나갈 수도 없었다. 2층이니까.
이들은 자신들이 파놓은 함정에 확실하게 빠진 것이었다.
아리가 시계를 보고 수업에 늦겠다 부랴부랴 교실이 있는 건물로 뛰어가고 있을 때, 느적느적 저 멀리서 걸어오는 지혁이 한 눈에 들어왔다. 뭐가 그리 태평인지 지각임에도 불구하고 저 여유만만함! 아리는 가다 말고 지혁을 향해 손을 마구 흔들었다.
“지혁아!”
자신 앞으로 손을 사정없이 흔들며 쪼르르 달려오는 아리를 보고 지혁은 픽- 웃었다. 지혁은 자신의 입가에 웃음이 진 걸 알고 아리가 보기 전에 바로 미소를 거두었다. 언젠가부터 아리만 보면 웃음이 나는 걸 들키기 싫다.
“너 지각이야. 지각!”
“근데.”
“너 진짜 불량학생이구나?”
“그러는 넌?”
지혁은 여전히 느리게 걸음을 걸으며 아리에게 말을 걸었다.
“가방도 없이. 그지.”
“아냐! 나 지각 아니야!”
오해를 받을까 얼른 손을 휘휘 저으며 아니라고 답했다. 큰 손동작은 아리의 다급함을 나타내주고 있었다.
“나 오늘 진짜 일찍왔어! 다른 날보다 1시간이나 일찍 왔단 말이야. 근데, 지금은 어디 좀 갔다오느라고.”
말끝을 흐리는 아리를 보고 지혁이 호기심에 가득 찬 눈으로 되물었다.
“어디 갔다왔는데?”
아리는 속으로 갈등했다. 지혁에게 말할까 말까, 망설여졌다. 그 틈에 지혁은 아리가 무언가를 고민하고 있다는 걸 재빨리 알아차렸다. 생각하는 게 얼굴에 쓰여있으니 당연한 일이다.
“사실은…….”
“빨랑빨랑 대답해!”
지혁이 재촉였다. 아리는 울상을 지으며 조심스레 입을 열었다.
원인을 자초한 건 SS클럽 애들이지만, 내가 애들을 가뒀다! 그러면 지혁이 얼마나 타박을 할까. 저번에 형빈이 도시락 사건만 해도 내 편을 안 들고, 이세아 편을 들어주었는데 말이다. 이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지혁은 세아를 구하러 B동건물로 향할 지도 몰랐다. 그 뒷모습을 보면 얼마나 열불이 날까, 그것까지 아리의 머릿속에 그림 그려졌다. 그러니 말하기 꺼릴 수 밖에. 하지만, 아리는 속 시원히 얘기해버렸다. 만약, 그런다면 그러라지! 흥! 이런 마음으로 말이다.
“이세아랑 걔네 무리들 가두고 왔어!”
배짱 한번 두둑하게 큰 소리를 치니 마음이 홀가분해졌다.
“가두다니?”
“걔네들이 먼저 날 저기 B동 과학실에 가두려고 그러는 거야! 그래서 내가 그냥 가두고 왔어!”
“뭐?”
“글쎄! 자물쇠까지 준비했더라고. 문 잠가서 못 나오게 하려고, 친한 척 하면서 끌고 간 것까지 다 계획적이었어! 그래서 그 계획, 걔들이 당하도록 해준 것 뿐이야.”
아리가 흥분해서 사실대로 털어놓자 지혁이 처음엔 뭔 소리야, 하는 표정으로 바라보다, 끝까지 듣고는 푸하하하 웃음을 터트렸다.
‘뭐야, 왜 웃는 거야?’
자리에 멈추면서까지 웃는 지혁의 모습이 생소하기만 하지만, 인상을 쓰고 차가운 표정으로 있는 것보단 훨씬 나아보였다. 웃는 모습이 살인미소 연예인 뺨 수백 대를 칠만큼 예뻤다.
세아를 구하러 간다거나, 아리에게 왜 그랬냐며 추궁을 한다거나 하지 않았다. 그렇게 생각한 건 아리만의 착각이었다. 오히려 잘했다는 듯 웃는 지혁이었다.
지혁은 머리를 한두어번 흔들고 느린걸음으로 교실 건물로 들어섰다. 물론 아리도 따라 들어갔다.
“왜 그렇게 웃어?”
“웃기니까.”
“갇혀있는 이세아 구하러 안 가?”
아리의 말에 지혁의 웃던 얼굴이 순식간에 굳어졌다.
“내가 왜 구하러 가.”
“너 이세아랑 친하잖아. 내 편도 안 들고 이세아편 들고 그랬었잖어.”
“이세아 편? 언제.”
자긴 그런 적 없다고, 왜 자기가 이세아 편을 들어주냐는 식으로 황당하다는 표정을 짓는 지혁이다. 아리는 이제까지 형빈이 도시락 사건 때, 이세아 편을 들었다고 길길이 날뛰며 분해했는데, 정작 본인은 이세아 편을 들지 않았다고 하니 말 다 했다.
“너 어제 우리들한테 한 말, 그냥 한 소리면 가만 안 둬.”
“응?”
“너가 했던 모든 말, 내 눈에 보이게 만들어.”
믿어…주는 거야?
건방지게 말하는 지혁의 말투가 전혀 거슬리지 않는다.
오히려 그 말을 듣고 아리의 입은 귀에 걸릴 정도로 큰 미소를 머금었다.
반드시 해내겠다는 굳은 각오와 함께…….
아리와 지혁이 교실에 도착했을 땐, 영어 수업이 한창 진행되고 있던 중이었다.
아리가 조심스레 교실 뒷문을 열고 먼저 안으로 들어갔다.
문 열고 들어가기가 무섭게 선생님의 냉랭한 목소리가 들렸다.
“대체 지금이 몇신데!”
순간, 지혁이 들어오자 선생님은 헛기침을 해대며 안경테를 만지작 거렸다.
“들어와서 앉아요.”
‘에잉?’
선생님의 급변화 된 태도에 아리가 두 눈을 동그랗게 뜨고 선생님을 쳐다보았다. 아리를 보자마자 호랑이처럼 앙! 달려들 태세더니, 지혁을 보자마자 얼굴빛이 온유하게 달라지다니! 이런 상황에 아리는 두 주먹을 불끈 쥘 수 밖에 없었다.
반드시! 반드시 성공해서! 강지혁과 꼭 친구가 되겠다! 라는 마음을 굳게 다졌다.
학교가 끝나고 어김없이 아리는 병원으로 직행했다. 학교 안에서의 생활이 굉장히 피곤했지만, 학교를 빠져나오는 순간부턴 몸이 최고의 컨디션으로 변했다.
SS클럽 애들은 한 두어시간 그곳에서 벌을 세워놓았다가, 형빈이에게 부탁해 그곳에 가 문을 열어주라고 부탁하여 애들을 빠져나오게 만들어주었다. 분한지 씩씩대며 교실로 돌아온 이세아는 화를 삼키며 눈이 찢어져라 아리를 째려보기만 할 뿐, 별 다른 공격을 해오거나 욕을 퍼붓거나 하지 않았다. 세아에게도 상대를 탐색할 충분한 시간이 필요한 것 같다. 아리는 결코 만만한 상대가 아님을 절실하게 깨달았기 때문이다.
류 아버지네 병원은 유명한 병원으로, 항상 환자들이 넘쳐난다. 우리나라에서 손꼽히는 큰 병원 중 하나다.
아리는 병원에 들어서자마자 지연을 찾았다. 이 병원에서 도움을 받을 수 있는 건 친절한 신지연 간호사 뿐이었다.
“언니!”
“어머, 아리씨! 왠일이예요?”
지연은 환한 웃음으로 아리를 맞아주었다.
“저 오늘부터 병원에서 청소하려구요!”
“청소요?”
“네! 청소도구 빌려주실 수 있어요?”
갑작스런 아리의 청에 지연은 놀란 얼굴을 하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병원청소는 청소하시는 아주머니들이 아침 저녁으로 오셔서 하는데…. 왜 그래요?”
“병원 깨끗하게 해드릴라구요!”
“아… 따라오세요.”
지연이 궁금했지만 더 이상 질문을 하면 아리가 곤란할까 싶어, 고개를 갸우뚱 거리며 아리를 데리고 청소도구가 있는 사무실로 안내했다.
“청소도구는 여기에 구비되어 있어요. 내가 도울 일이 있으면 언제든지 말해요. 어려운 일 있으면 말해요.”
“네. 언니, 고마워요.”
살구빛이 도는 아리의 밝은 얼굴은 지연을 안심시켰다.
락커룸에 책가방을 넣고, 교복 치마 안에 집에서 준비해온 트레이닝 복을 받쳐 입었다.
머리엔 하얀 수건을 질끈 동여매고 한 손에 빗자루를 또 다른 손엔 쓰레받기를 들고 병원 복도로 나왔다. 환자들을 피해 병원 구석구석을 찾아다니며 쓸기 시작했다. 청소하시는 아주머니들이 청소를 하셨다고 하지만, 병원에 워낙 사람들이 많은 다니니 금방 드러워져 있었다. 아리는 신나게 청소했다. 쓱쓱 쓸면서 콧노래까지 불렀다.
쓸기를 마치고, 물걸레를 빨아와 반질반질, 윤이 나도록 바닥도 닦았다. 몇 시간이 후딱 지나갔지만, 아리는 몰랐다. 힘들다는 생각보단, 기쁨을 가지고 일을 했다.
아리가 청소하는 모습을 지나가다 본 류의 아버지가 자리에 멈춰 섰다. 어제 상담을 하러 왔던 그 학생이 청소를 하고 있으니, 어쩐 일인지 자연스레 관심이 가게 되었다.
환자들에게 밝고 상냥하게 웃으며, 그러나 아주 정중하게 말하며 청소하는 아리를 물끄러미 서서 지켜보았다. 긴머리를 질끈 묶어올리고 교복 안엔 체육복을 입고 신나게 물걸레질을 하는 아리를 보니 류의 아버지 입가엔 자신도 모르게 미소가 번졌다.
아리는 환자들하고도 금세 친해져서 그 속에서 환영을 받고 있었다.
한 할머니가 청소하는 아리에게 다가와 음료수를 손에 쥐어 주며 말했다.
“학생이 청소를 하니까네 병원에 환해져. 고마우이. 좀 쉬었다가 해.”
“감사합니다, 할머니. 제가 사드려야 하는데….”
할머니 환자가 내민 음료수를 얼른 받아들며 꾸벅 고개 숙여 인사하는 아리다. 이 자리에서 얼른 마셔, 하는 눈빛을 비추는 할머니의 뜻을 따라 아리는 음료수를 원샷으로 뱃속에 채웠다.
청소하는 내내 작게 노래를 부르는 아리에게 환자들은 귀를 기울이고 있었다. 아리가 밝게 웃으며 인사를 하고, 괜찮으시냐고 말을 건네자, 환자들은 환하게 웃으며 아리를 반겨주었다.
이 모습을 지켜보던 류의 아버지가 아리에게 다가갔다. 음료수를 마시고 물걸레 질을 시작하려는 아리 앞에 류의 아버지의 큰 그림자가 드리워졌다. 아리는 걸레질을 멈추고 고개를 올려 앞을 보았다. 류의 아버지인 걸 확인하고 밝게 인사했다.
“아, 선생님! 안녕하세요!”
“학생, 지금 뭐하는 거지?”
류의 아버지는 무표정으로 아리를 바라보았다.
하지만, 류 아버지의 감정없는 표정에도 굴하지 않고 아리는 밝게 웃고 있었다.
“학생이 왜 이곳에서 청소를 하고 있지?”
“잘 보이려구요!”
당돌한 듯 당차게 대답하는 아리에게 류의 아버지는 당황했다.
“……?”
“류, 잘 봐주세요. 똑바로 봐주세요, 아버님.”
“……!!!”
[13]
“똑바로 잡아주세요, 아버님이.”
똘망똘망한 눈망울을 하고 류의 아버지를 올려다보며 말하는 인형같은 아리의 모습에 환자들도 류의 아버지도 눈을 떼지 못했다.
“우리 류를 아는가?”
“네, 친구예요.”
“흠…….”
류의 아버지는 깊은 한 숨을 내쉬며 다른 곳으로 시선을 돌렸다.
아리는 계속 이렇게 있다가 오지 말라는 소리를 들을까, 미리 선수를 쳤다.
“아버님! 저 내일 또 오겠습니다. 오늘은 이만 가볼께요. 그럼 안녕히 계세요.”
서둘러 인사를 마치고 청소함이 있는 사무실로 후다다닥 뛰어 들어갔다. 청소도구들을 말끔하게 치워놓고, 트레이닝 바지를 벗는 것도 잊은 채 가방을 들고 사무실을 나왔다.
병원을 나서니, 벌써 어두어지려고 검은 하늘이 드리워지고 있었다.
하루에 단 몇 번이라도 아리를 통해 류를 생각하게 만드는 게 아리의 작전 중 하나였다.
첫 작전은 다행이도 성공한 것으로 보인다.
“좋았어! 최아리, 꼭 성공하자! 아자아자!”
병원을 나와 버스를 기다리는 내내 아리의 마음은 따뜻했다. 희망이 보여서인지.
집에 도착하니, 집 앞에서 강이와 아버지가 나와 운동을 하고 계셨다.
“허허. 우리 아리 이제 오느냐.”
아버지가 딸을 대견스럽게 보며 허허 웃으셨다.
“다녀왔습니다.”
피곤해 보이지만 얼굴은 달덩이처럼 환하니 아버지의 마음이 놓인다.
“힘들지?”
네, 당연합니다! 라고 답하고 싶었지만, 아리는 꾹 참았다.
“이 정도쯤은 뭐, 별거 아니예요. 곧 친구가 될 수 있을 것 같아요.”
“그래? 그래야지. 내 우리딸만 믿는다.”
아버지를 보니, 아리는 류의 아버지와 지혁의 아버지가 생각났다. 아버지들의 마음은 다 똑같을까? 아리의 아버지도, 지혁의 아버지도, 류의 아버지도 다 똑같은 마음일까? 자식을 사랑하는 마음 말이다.
“강이 넌 사내놈이 얼굴이 그게 뭐야. 밥도 안 먹은 사람처럼.”
“밥 많이 먹었어요.”
이때다!
아버지가 강이를 걱정스러운 눈으로 바라보고 있을 때, 아리는 이 때가 적당하다고 생각했다. 아버지, 아버지한테 곧 손주가 생겨요!
“아부지!”
아리의 생각을 알아차린 강이 뒤에서 엑스자 표시를 하며 강력하게 반대했다.
입모양으로 ‘하지마, 제발!’을 반복했다. 아버지는 아리의 다음 말을 기다리고 있었고, 아리는 막상 둘러댈 말이 생각나지 않자, 엉뚱한 질문을 하고 말았다.
“아기 좋아하세요?”
“뭐?”
다행히 순간 위기를 모면했다고 생각했는지, 강이 두 눈을 감으며 숨을 돌렸다.
“너희들 애기 때 내가 업고 길렀다. 사랑이 없으면 그렇게 할 수 있겠느냐. 근데 그건 왜?”
“아뇨, 집에 오다가 너무 이쁜 아기를 봐서요.”
“싱겁긴. 들어가자.”
“네.”
아버지가 앞서 들어가시고, 아리와 강은 뒤따라 들어가며 작은 소리로 속닥거렸다.
“왜 말 못하게 해?”
“아직은. 아직은 때가 아니야, 누나. 나 떨려 죽겠다.”
“맞는 게 그렇게 무서워?”
“나 맞아죽으면 우리 애기 누가 길러.”
“바보냐! 아부지가 널 죽이냐?”
강은 고개를 설레설레 저었다. 아직은 말할 수가 없다. 마음의 준비가 안되어있다.
요 몇일 새 얼굴이 쏙 빠져있었다. 미래를 생각해야하는 어린아빠가 되니 저절로 살은 쑥쑥 빠지는 모양이었다. 안 그래도 강의 작은 얼굴이 부러웠는데, 큰 키에 작은 얼굴이 더 조막만해지니 아리는 부러워 죽을 맛이었다.
강은 어른이 되어가고 있었다. 아리는 강이 훌쩍 큰 느낌이 들어 대견했다. 툭하면 장난치고 까불고 싸우고 아무런 걱정없이 생각없이 살던 강이 아니다. 그는 아빠가 되려고 성장통을 겪고 있는 듯 했다.
아리는 일주일이란 짧은 기간동안 어떻게 해서든 류의 아버지와 류를 찰떡처럼 붙여주기 위해 학교가 끝나면 곧장 병원으로 달려가 청소를 했다.
류의 아버지가 보일 때마다 달려가 인사와 함께 류의 소식을 전하는 걸 잊지 않았다. “류, 잘 봐주세요.”라는 멘트도 빼놓지 않았다.
병원에선 환자들부터 시작해서 의사, 간호사들까지 모두 아리를 알게 되었다. 3일만에 착한 청소소녀로 병원 내에선 알아주는 유명인사가 되어 있었다.
4일 째 되는 날, 학교를 쉬는 일요일이라 아침부터 병원에서 하루를 꼬박 보내고 있을 때였다. 저녁 즈음, 뉴욕 세미나를 갔다가 돌아 온 이류의 이복 형, 이인준이 처음으로 모습을 드러냈다.
“저 사람이 류의 형인 이인준 선생님이예요.”
지연이 가리키는 류의 이복 형이란 사람은, 말끔하게 생긴 호남형이었다. 자상한 척 미소를 띄우고 친절한 얼굴을 하고 있지만, 어딘가 모르게 야비한 냄새가 나는 사람이었다.
청소를 하는 척 하며 류의 이복 형인 이인준의 사무실로 빼꼼 얼굴을 집어넣었다.
살금살금 들어가는데 성공!
사무실은 굉장히 넓었고, 블라인드가 쳐져있는 곳에서 인준이 누군가와 전화하는 걸 엿들을 수 있었다.
“어, 오늘 왔다.”
[어떻게 할까? 오늘 칠까?]
얼마나 통화소리를 높여놨는지, 밖으로 소리가 새어나왔다. 인준은 양복 자켓을 벗고, 하얀 가운을 덧입으며 귀에 대고 계속 통화했다.
“바로 처리해라. 오늘은 아주 걷지도 못하게 해봐. 너무 약한 거 아니냐.”
[약했나? 알았어. 근데 그 놈만 노리는 건 안되겠어, 오늘은. 네 명이 같이 있는데.]
“상관없어. 그냥 다 병신만들어.”
‘……!!!’
[고등학생들 주제에 얼마나 센지, 우리도 타격이 크다.]
“얼마가 더 필요해? 돈은 얼마든지 말해. 줄테니까……”
아리는 뜨거운 무언가가 치밀어 오르는 걸 느꼈다. 당장이라도 저 이복 형이란 자의 검은 속내를 만천하에 드러내 주고 싶었다. 하지만, 지금 그것이 먼저가 아니다. 나중에 처리해도 될 문제다, 그건.
전화통화 내용은 분명, BM애들을 위험한 상황으로 만들려는 인준의 지시다! 감을 잡은 아리가 쓰레기통을 밀치고 최고 속도로 병원을 뛰어나왔다.
“막아야 돼!”
싸움하면 안돼! 안돼! 애들아! 아리는 정신없이 뛰어 택시를 잡아탔다.
“학생, 어디로 갈꺼야?”
“아, 잠시만요. 잠시만요.”
아리는 주머니에서 핸드폰을 꺼내 들고 저번에 지연이 찍어준 류의 핸드폰 번호를 찾았다.
통화음이 길게 한 두어번 가다, 말고 끊겼다!
“받아라 좀!”
다시 한번 해봐도 받질 않는다. 아리는 애꿎은 입술을 깨물며 발을 동동 굴렸다.
‘어떡하지. 어디 있을까?’
“학생, 안 가? 안 타려면 내리고.”
“아-아뇨! 가요!”
아리는 자신의 감을 믿기로 했다. 저번에 갔던 베르첼에 있길 바라면서 그곳으로 달려갔다.
베르첼에 도착해서 앞 뒤 볼거없이 우당탕탕 뛰어내려갔다.
이젠 외국인 뚱보 두 명은 아리가 지혁이 ‘Honey’라는 걸 알고 잡지 않았다. 아리는 목까지 숨이 차도록 온 힘을 다해 클럽 안을 휘저었다.
1층에서 춤추고 있을리는 만무하고, 2층으로 다람쥐처럼 빠르게 뛰어 올라갔다.
사람들이 가득한 클럽 안에서도 BM애들을 쉽게 찾을 수 있었다. 역시나, 그 전화통화 내용대로, BM애들은 인준이 시킨 놈들과 한판 붙을 태세로 서있었다. 그 주위엔 구경하는 사람들이 삥 둘러싸고 있고.
“안돼! 잠깐!”
시끄러운 음악소리에 아리의 목소리가 묻힐 만도 했지만, 워낙 소리를 크게 지르다보니 그 소리가 BM애들 귀에 들어갔나보다. 모두들 아리에게 쳐다보았다.
“허헉. 안돼! 안된다고! 안돼!”
초힘을 발휘해 뛰어가 BM애들과 인준이 보낸 애들 가운데에 서서 두 팔을 벌렸다.
“싸우지마!”
지혁과 류를 번갈아 쳐다보며 아리가 힘을 주어 외쳤다. 류는 고개를 돌리며 말했다.
“비켜, 이 자식들이 먼저 시비 걸어줬어. 안 그래도 오늘 날씨가 개떡같아서 한판 붙을 곳 없나 찾고 있었는데, 잘 된거지. 비켜.”
류의 목소리가 아리의 귓가를 맴돌았다.
“그럼 이길 수 있어?”
아리의 질문에 지혁은 눈썹을 찡긋거렸다. 당연한 걸 묻냐는 식으로 쳐다본다.
반대편이 한 사람 더 많은 5 대 4인 상황이지만, BM애들에겐 이 정도는 우스울 뿐이었다.
몸이 질근거리는 찰나에 때 맞추어 잘 튀어나와준 먹이감이라고 생각하는 것 같았다.
“그럼, 이기고 보자!”
아리가 크게 소리치고 뒤돌아, 덩치가 큰 남자애 콧등에 펀치를 날렸다. 무방비상태에서 아리의 주먹을 받은 덩치는 코를 움켜잡으며 의자에 주저 앉았다.
“아윽!”
이렇게 싸움은 시작되었다. 아리의 선방이 제대로 먹힌 건지, 코뼈가 부러져 피를 철철 흘리는 남자애는 일어나 싸우지도 못했고, BM애들이 그 순간에 달려들어 한 사람씩 때려눕혔다. 아리도 신나게 싸움질에 동참하기 시작했다. 한 놈 정도는 간단하게 처리할 수 있는 능력을 가진 아리였다. 괜히 태권도 관장 딸이 아니다.
게임은 너무나 쉽게 승부가 났다.
인준의 사주를 받은 패거리는 뒷걸음질치다 재빨리 도망쳤다.
BM애들은 이마에 난 땀을 닦으며, ‘후-’하고 숨을 내쉬며, 자리에 털썩 드러누웠다.
지혁은 아무 표정없이 앉아있고, 류는 얼굴을 감쌌다. 순간이는 대자로 누워 미소를 지어보였고, 유신은 과일안주를 집어먹었다.
클럽 2층은 개판이 되어버려서 이들을 내쫓을 만도 한데, 클럽 사장은 나오지도 않았다. 오히려 웨이터들을 시켜 흐트러진 소파랑 깨진 유리들을 치우게 할 뿐. 거의 거물급의 고객인 녀석들이 싸우는데 말릴 수 없는 것이다. 이곳은 BM애들 세상이었다.
2층에선 피터지게 싸웠는데, 1층은 무슨 일이 일어난지도 모르고 춤추는 젊은 사람들로 가득했다.
“뭐냐, 넌.”
지혁이 아리를 보며 물었다. 헥헥 대며 자리에 앉아있는 아리가 빙그레 웃으며 답했다.
“너희들 친구.”
정말 미워할 수가 없다.
아리의 주먹은 이제야 아까 그 덩치 콧등을 때린 아픔이 밀려왔다.
아픈 주먹을 움켜쥐는 아리가 까진 손등을 쳐다보며 호호 불어댔다.
지혁이 그 모습을 보고 있다, 아리의 손을 무지막지하게 끌어당겼다. 옆에 앉히고 차가운 물을 부었다. 카펫트에 물이 젖지만 상관없다.
차가운 얼음 수건에 감싸고 아리의 뜨거운 손등을 식혀주었다. 이러고 보면 참 괜찮은 놈인데.. 하는 생각이 절로 든다.
“무적파워, 무식한 그지.”
지혁의 말에 아리가 눈을 세모꼴로 만들고 쳐다보았다.
괜찮은 놈은 무슨! 그 생각은 한순간에 싹 사라졌다.
“그 말 취소해! 도와줬더니 안 좋은 소리만 하고.”
“그러니까 누가 도우래?”
“어머머.”
“가만있어. 식히고 있잖아.”
살살 문지르며 얼음으로 마사지를 해주는 지혁이의 낮은 음성은 꽤 매력적이다. 아리의 얼굴이 자신도 모르게 붉어지기 시작한다. 클럽 안이 어두워서 다행이다.
“내가 직접 해주는 거 영광인줄 알아라. 해주고 있는데 움직이고 그래.”
“지혁이오빠, 친절한데? 뭐야~ 러브러브?”
유신이 과일을 마구 입에 넣으며 요상시런 눈빛을 쏘아대며 말했다.
양볼에 가득 과일을 마구 먹는 걸 보니, 아까 진지하게 싸움하던 녀석 맞나 싶다.
“너가 해!”
지혁이 황급하게 얼음수건을 손에서 떼내며 아리에게 넘겼다.
‘으이그, 이 싸가지. 꼭 이래요!’
“야, 한유신! 침 튀기지마! 드러워!”
깔끔떠는 성격 또 나온다. 지혁의 버럭 승질에 유신이 입 안 가득 들어가 있는 과일을 우적우적 씹어 넘긴다.
괜시리 물을 벌컥벌컥 마시지 않나. 짜증을 내지 않나. 지혁의 행동에 유신은 헤헤거리며 웃을 뿐이고.
“너, 우리 여기 있는 거 어떻게 알고 왔어?”
류가 하얀 수건으로 얼굴을 덮고 있다, 빼내며 아리에게 물었다. 싸움하기 직전 달려 온 타이밍도 그렇고, 궁금한 것이 많다.
“너희 이복 형, 병원 나왔던데.”
“알아.”
류가 한쪽으로 몸을 기울이면서 심드렁하게 대꾸했다. 그래서 기분이 꿀꿀했나보다.
“병원 갔다가, 전화하는 거 들었어. 너희들하고 싸우라고 지시하는 거.”
“개자식.”
낮게 들릴 듯 말 듯 류가 욕설을 내뱉었다.
“내가 말했지. 싸우지 말자고. 자꾸 그 사람 계획대로 움직이지 말자구. 그 사람은 너희들 성질을 돋구려고 일부러 그러는 거야.”
“알아. 그걸 아는데, 가만 있으면 그게 병신이지!”
“병신 아니야! 그런 걸 알고 지혜롭게 이길 수 있는 사람을 승자라고 하는거야. 무식돌아!”
아리가 이류를 보며 정신이 바짝 나도록 사납게 외쳤다.
“너희 아버지가 널 미워한다고 그랬지? 내가 보기엔 너가 널 미워하게 스스로 만들어가고 있어. 그거 알아? 자식은 자식다워야 해. 아버지가 줄 땐 받고! 아버지한테 먼저 해달라고 하기도 하고! 그래야 되는 거야. 아버지는 너한테 많은 걸 해주고 싶어하는데, 넌 그걸 자존심이라고 받기 싫어하잖아. 이복 형만 예뻐한다고? 너 이복 형보다 아버지한테 잘해드린 적 있어? 그 사람이 이쁨 받는다는 건 그 만큼 아버지한테 잘 해서 일 거야. 그 사람도 노력하는데, 너라고 못해? 너라고 노력 안하고 사랑 받는 다는 법은 없어. 노력해! 아버지 잖아. 하나뿐인 아버지잖아! 그런 아버지한테 비는 게 뭐가 창피해? 사랑한다고, 죄송하다고 말씀드리는 게 뭐가 쪽팔려! 사랑하는 사람한테 사랑한다고 못하는 거, 그게 세상에서 제일 쪽팔린 짓이야!”
아리가 하얀 수건으로 류의 얼굴을 덮었다.
그리곤 물었다.
“너, 세상에서 제일 싫은 게 뭐야.”
류가 얼굴에 수건을 덮고 있는 채로 대답했다.
“…외로운 거.”
다행이다. 아버지나 형, 이라고 대답했으면 수건을 벗기고 주먹으로 콱 때려주려고 했다.
[14]
“아- 빨링 한잔 따라봥! 콸콸콸!”
양주 몇 잔에 취해 헤롱거리며 기분좋게 미소짓는 아리가 지혁을 향해 잔을 들이밀었다.
지혁은 그런 아리를 황당하다는 듯 쳐다본다.
“안 따라줘? 응? 알았어. 고럼 내가 따를께. 잘 봐요.”
양주병을 눕혀 크리스탈 글라스에 술을 따르는 아리의 모습이 위태롭다. 결국 술이 넘치고 바닥으로 떨어지려는 양주병을 지혁이 잡아 올렸다.
“야!!”
아리가 고함이 놀라 모든 동작을 멈추었다.
“놀랐잖어.”
“너 집에 가!!”
지혁이 잔을 빼앗았다.
류와 순간, 유신은 벌써 아리와 친구가 되서는 왜 그러냐며 지혁을 말렸고, 4명이 서로 어깨동무를 했다. 취하지 않은 지혁만 고생하게 생겼다. 취한 4명은 노래를 부르며 웃긴 일도 없는데 킥킥 대며 서로를 보며 웃는다.
“춤춰! 춤춰!”
아리가 옆에 있는 순간이를 일으켜 세우며 외쳤다. 아리의 말대로 순간이는 테이블에 올라가서 현란한 춤을 선보기 시작했다. 요염한 동작으로 유혹하듯 춤추는 순간 때문에 아리와 류, 유신은 깔깔대며 한바탕 웃어제꼈고, 웃지 않는 건 지혁 뿐이었다.
“너희 정신 안 차릴래?”
“네! 상 차릴래요!”
아리의 이상한 개그에 지혁을 제외한 3명은 뒤집어졌고, 배를 잡고 뒹굴며 웃었다. 지혁은 이 상황에 머리가 지끈거렸다. 술만 먹으면 악동들이 되는 저 3명에 아리까지 더해졌기 때문이다.
“으유! 너 집이 어디야?”
“우리집? 우리집에 왜 왔니? 왜 왔니, 왜 왔니!”
“완전 맛이 갔네.”
지혁이 고개를 설레설레 저었다.
류와 어깨동무를 하며 ‘대한민국!’을 외치는 아리를 한참 쳐다보다, 큰 소리로 말했다.
“가방에서 핸드폰 좀 찾는다.”
“응응, 그래!”
그 와중에도 대답하는 아리가 신기하다. 지혁은 아리의 가방을 열어 핸드폰을 찾았다.
아리를 아는 누군가에게 연락을 해 빨리 데려가라고 소리치고 싶었다.
핸드폰 1번 버튼을 누르자, 저장되어 있는 번호가 뜨면서 신호가 간다.
몇 번의 신호가 가다, 달크닥, 건장한 남자의 목소리가 들렸다.
[여보세요?]
‘뭐야, 꼴에 남자친구도 있어?’
아리의 남동생 강을, 남자친구라고 착각한 지혁이 차갑고 딱딱하게 말하기 시작했다.
“최아리 아세요?”
[뭐예요? 누구세요?]
다혈질에 강이 성질을 내는 듯한 목소리를 뽑았다. 누나가 이 늦은 밤까지 안 들어오는 걸 걱정하고 기다리고 있었는데, 어떤 남자가 전화를 해 누나얘길하자, 흥분했는지 굵은 목소리가 튀어 나왔다. 지혁 또한 강의 반응에 맞대응했다.
“지금 최아리가 여기 있으니까, 데려가요.”
[너 누구야? 누군데 우리…]
“여기 베르첼이다. 알아서 찾아가.”
뚝-
이 불같은 성질. 지혁은 강이 반말로 나오자 똑같이 반말을 해준 뒤, 할 말만 하고 전화를 매몰차게 뚝 끊어버렸다.
지혁은 아리의 핸드폰을 가방에 성질대로 쑤셔넣고는 파도타기를 하고 있는 아리와 BM애들에게 소리쳤다.
“정신없어! 앉아있어!”
“같이 해! GO! GO! GO! GO!”
박수까지 쳐대며 4명이 화가 나있는 지혁을 둘러싸고, 정신산란하게 움직인다.
한편, 지혁의 전화를 받고 난 강이도 마찬가지로 짜증이 났다. 뭐 이런 놈이 다 있나, 대체 누난 뭐 하고 있길래 이런 놈이 전화를 하나, 걱정과 짜증이 밀려왔다.
“만나기만 해봐라, 싸그지없는 놈!”
강은 아리를 찾으러 옷을 입고 집을 나섰다.
베르첼에서 아리는 오랜만에 물 만난 듯 녀석들과 하나가 되어 놀고 있었다.
술을 마셔도 잘 취하지 않는 지혁은, 4명이 하나같이 술이 떡이 되어 저리 놀고 있으니 술맛은 떨어졌고, 차가운 얼음만 입 안 가득 넣고 아그작 아그작 씹어댔다.
“새신을 신고 뛰어보자 팔짝! 머리가 하늘까지 닿겠네!”
아리의 동요에 맞춰 ‘팔짝’ 부분에서 팔짝 뛰는 류와 순간이, 유신이 지혁을 일으키며 팔짝 뛰라고 괴롭혔다.
아리까지 합친 4명의 악동들 때문에 지혁의 한계도 다다르고 있을 때였다.
강과 통화를 한지 30분이 넘었는데 왜 이렇게 안 오냐며 한참 투덜대고 있을 때, 마침 낯익은 목소리가 들려왔다.
“누나!”
구원자가 나타났다. 강이 춤을 추고 있는 아리를 보고 달려갔다. 아까, 전화받은 목소리를 기억하는 지혁이 강을 곱지 않은 시선으로 바라보았다.
‘어쭈. 누나?’
강이 남동생일거라고는 생각하지 못한 지혁이 아리의 연하 남자친구라고 생각했다.
그냥 남자친구도 아니고, 연하남? 하! 굼벵이도 구르는 재주가 있다더니!
“가자. 정신 좀 차려봐.”
“어구구, 우리 이쁜 강이 왔쪄? 이제 곧 생길 아가이름 내가 생각해뒀어-♪♪”
아리가 흐느적거리며 강이와 어깨동무를 한다.
곧 생길 아가이름이라는 대목에서 지혁의 눈빛이 차가워졌다.
“아- 알았어. 그건 나중에 듣고. 일단 집에 가자.”
강이 힘들게 아리의 몸을 붙들고, 가방을 찾는데 BM애들이 몰려들었다.
“누구야? 누구야?”
유신이 강을 뚫어져라 쳐다보며 누구냐고 여러번 외쳤다.
“어! 소개해주께! 우리 강이! 인사들 해-”
“안뇽.”
유신이 술병을 꼬옥 껴안고 강을 보며 장난끼 가득한 얼굴을 하고 인사했다.
“어, 안녕. 가자, 얼른.”
빨리 자리를 뜨고 싶은 마음이 간절한 강이다.
“우리 강이 곧 아빠되니까 뽀뽀해줘야지! 쪽!”
강이에게 ‘쪽’소리나게 뽀뽀를 해주고 “GO! GO! GO!”를 외치는 아리를 보고 지혁은 경악 했다. 이런 진한 애정행각을 보이다니! 아리가 아기를 가졌다고 충분히 오해할 만한 상황이었다. 지혁은 차가운 물을 단숨에 들이켰다. 그리곤 아리를 부축하고 가방을 찾고 있는 강에게 지혁이 옆에 놓여있던 가방을 들이밀었다.
“여기.”
“아, 고마……”
강이 가방을 한 손에 받아들며 고맙다고 말하는 찰나 지혁과 눈이 마주쳤다. 강인준 대통령의 아들, 강지혁! 사진에서 보고 질투를 느꼈던 그 놈이 앞에 있자, 더군다나 전화통화를 했던 그 목소리의 주인공이라는 걸 안 강이 속안에서 불이 확 올랐다.
‘얘가 그 강지혁? 밥맛없게 생겼네!’
강과 지혁, 두 남자가 눈에서 튀어나올 법한 레이저빔을 서로를 향해 쏘아대었다.
왠지 모를 뜨거운 기운이 두 남자 사이에서 스멀스멀 아지랑이처럼 피워 올랐다.
“고맙다!!”
강이 눈에 힘을 주고, 목소리도 깔고 지혁에게 말했다. 지혁은 아리가 강에게 빨래처럼 매달려 있는 걸 쳐다보다 강에게 시선을 돌리곤 입을 열었다.
“고마울 거 없어.”
.
.
강이 아리를 등에 업고 택시를 잡기란 여간 힘든 일이 아니었다.
밤의 거리여서인지, 택시를 잡을라 하면 얌체같이 튀어나와 타고 휭 가버리는 사람도 있고, 택시도 잘 서지 않고 다니지도 않았다. 누나를 바닥에 버리고 택시를 잡을 수도 없는 일이고, 강은 낑낑대며 택시가 오길 기다렸다.
그러고 있는 중에 강과 아리를 향해 라이트를 켜고 빵빵 클락션을 울리는 자가 있었으니, 다름아닌 지혁이었다.
“타. 데려다 줄테니까.”
“됐어. 택시 잡으면 돼.”
“그래? 그럼 고생 하던가. 택시 파업 때문에 여기 택시 얼마 안 와.”
강은 어쩔 수 없이 지혁의 차를 얻어타야 했다. 아리가 물 안 빠진 빨래처럼 매달려 목을 휘감아오니 더 서있으면 다리가 후둘거릴 참이었다.
지혁의 외제차 뒷좌석에 아리남매는 정착했다. 지혁과 강은 주소얘기만 나눈 뒤 그 다음부터 말이 없었다.
‘고등학생이 차를 몰아? 장난아니네.’
강이네 학교 남자애들은 바이크만 가지고 있어도 부자라고 하는데, 이건 수준이 달라도 너무 달랐다.
깔끔한 차에, 부드럽게 운전까지 잘하는 지혁이 더 질투나고 부러운 강이다.
“강아…….”
지혁이 빽밀러로 뒷 좌석을 보았다. 아리가 강이 어깨에 얼굴을 푹 기대고 있었다.
“어, 왜?”
“애기 이름, 지었어.”
눈을 감고 잠꼬대를 하듯 주절주절 말을 늘어놓기 시작하는 아리다.
“어, 뭔데. 말해.”
누나 성격을 알기에, 술이 취하면 대답을 해주고 말을 받아줘야 같은 말을 계속 반복하지 않기 때문에 강은 꼬박꼬박 대답을 해준다.
“율. 너랑 같은 외자야. 예쁘지?”
“어, 예쁘다.”
“잘 키우자… 진짜 최고로 훌륭하게 키우자.”
아리가 술에 취했어도 강을 위로해 주고 있었다. 강이 누나에게 감동받고 고마워 하고 있을 때, 지혁의 오해는 갈수록 쌓여갔다. 이걸로 확실하게 둘 사이를 알게 된 (확실하게 오해를 하고만) 지혁은 어이없는 웃음이 날 뿐이었다.
“예쁜 애일꺼야.”
지혁은 강이 알려 준 주소대로 길을 잘 찾아가고 있었고, 강은 캄캄한 창 밖을 내다보고 있을 때였다. 아리가 강의 옆에서 뒤척거리기 시작했다. 답답한지 몸을 비틀어댔다.
“왜그래?”
아리가 가슴을 치며 갑갑하다고 온 몸으로 말하고 있었는데, 옷을 잡아당기다, 그만!
“으-웨-엑.”
“……!!!”
“……!!!”
지혁의 깨끗한 차에 아리가 오바이트를 하고 말았다!
놀라 차를 세운 지혁과 놀라 어쩔 줄 몰라 시선이 멈춰버린 강이, 두 남자가 입을 떡 벌렸다. 진땀이 났다. 식은땀이 등줄기를 타고 흘러내렸다.
동시에 두 남자의 입에서 같은 말이 튀어나왔다.
“미치겠다-!!”
“미치겠다-!!”
두 남자의 고생은 지금부터 시작됐다.
아리를 앞좌석으로 옮기고, 옷에 살짝 묻은 이물질을 닦아내었다. 아리는 속엣것을 게워놓고 편한지 온순해졌고, 반대로 지혁과 강은 분주하게 몸을 움직여 물티슈와 휴지, 수건 등으로 아리가 토해놓은 것을 치우고 냄새가 빠지길 밖에서 기다렸다. 다행히 먹은 것이 별로 없어서 심하진 않았다.
지혁과 강이 차를 세워놓고 밖에서 한 숨을 돌렸다. 두 남자가 똑같이 숨을 뱉으며 땀을 닦았다.
“미안.”
“후.”
지혁은 말이 없었다. 정확히 말하면, 말할 기운도 없었다. 괜찮다는 대답 대신 담배를 내밀었다. 이것이 오히려 둘 사이에선 좋은 대답이었다.
하얀 담배를 하나씩 물고 검은 하늘에 연기를 퍼부었다. 말이 없어도 뭔가 둘 사이에 통하는 것 같았다. 아까 전화할 때까지만 해도 서로 으르렁 거렸는데, 이젠 함께 고생을 하고 나서 동지가 된 동질감이 느껴져 편했다.
“우리 누나한테 이거 비밀이다.”
강이 담뱃재를 톡톡 쳐 떨어뜨리며 말했다. 담배 피우면 아리가 가만 있지 않기 때문에 집 안에서 절대로 피지 못한다. 폈다간 난리난다.
지혁도 수영장에서의 경험이 있기 때문에 당연하다는 듯 눈빛을 보냈다.
그런데, 이상한 점이 느껴졌다. 우리누나? 어감이 진짜 남동생같다는 느낌이 든다.
“이름이 뭐야?”
지혁이 묻자, 강이 피식 웃으며 답했다.
“최강.”
지혁이 담배를 입에 문 채 눈을 동그랗게 떴다. 이름을 듣고 머리가 띵해져왔다. 담배를 빼 손가락에 끼우고 다시 물었다.
“최강?”
고개를 끄덕이는 강이를 보고 지혁은 자신의 이마를 살짝 쳤다.
“진짜 누나? 최아리 친 남동생?”
고개를 신나게 끄덕이는 강을 보고 이제야 이제까지의 오해가 확실하게 풀렸다.
이럴수가. 오해를 해도 어떻게 이렇게 했나 싶다.
지혁이 한쪽 눈을 찡그려 트리며 피식 웃었다. 입가엔 저절로 멋진 미소가 걸린다.
다행이라는 안도감이 드는데, 이건 뭐냐?
[15]
평온한 아침, 짹짹짹 새들이 요들송을 부르며 지저귀는 소리가 들린다.
이불을 다리에 감고 뒹굴뒹굴거리다 침대에서 떨어질랑말랑한 위기에 놓인 아리가 아침햇살에 조심스럽게 눈을 뜰 준비를 했다. 머리가 깨어질 듯이 아프고 어지럽다.
“우으….”
쾅- 결국 바닥에 굴러 떨어지고 말았다.
“아야….”
바닥에 엉덩방아를 찧고 아픈지 얼굴을 찌그려 트리는 아리가 오만 인상을 쓰며 눈을 떴다.
엉덩이도 아프고 머리도 아프니 온몸이 땡기고 아픈 것 같다.
부스스한 머리를 긁적이며 몸을 일으켰다. 그와 동시에 두 눈은 침대 옆 화장대에 놓여있는 큰 시계를 확인했다.
“1시?”
혼잣말로 시계바늘을 읽었는데…
아리는 자신의 좋은 시력을 의심했다. 설마…
두 눈을 비비고 다시 시계를 보았다.
그러나 역시 양쪽 모두 2.0인 좋은 시력은 어디 가지 않았다.
“1시?! 아악!!”
아리는 비명을 지르며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수건을 가지고 요란한 소리를 지르며 화장실로 뛰어갔다.
학교라는 곳이 참으로 신기하다. 졸업하고 나면 왜 그렇게 지각에 목숨을 걸고 아침부터 일찍 일어나서 학교 정문을 뛰어 통과했을까 하는 생각이 들 때가 있다. 근데 그게 다 추억이라는 거. 부질없는 것이었다고 생각할 수도 있지만, 지각하지 않고 아침 일찍 학교로 향하는 마음은 기쁘고, 마음 뿐 아니라 상쾌하고 편한 하루를 맞을 수 있기 때문이 아닐까.
호랑이같은 태권도 관장이신 아리의 아버지는 아리가 어젯밤 술 먹고 늦게 들어온 걸 알고 아침에 나가면서 그냥 재우라고, 오늘은 학교 쉬어도 된다고 말하고 나가셨단다. 그 말을 듣고 뛸 듯이 기쁜 아리였지만, 그래도 친구들을 보러 학교에 가야 한다는 생각에 느긋하게 집에 있을 수 없었다.
아리는 서둘러 교복을 찾아 입었다. 무언가 허전하다.
‘아! 리본!’
교복 블라우스에 잘 어울리는 리본을 빼먹을 뻔 했다. 이 리본이 없으면 불량학생처럼 보인다고 생활점수가 깎인다.
“엄마! 나 리본! 리본!”
우당탕탕 요란한 소리가 들리고, 리본을 찾으러 분주하게 움직이는 아리를 보고 엄마가 걸어두었던 리본을 꺼내 건네주며 말했다.
“아리 너, 또 술먹고 업혀 들어오기만 해. 진짜 혼나!”
“헤헤. 알았어요. 알았어. 엄마, 고마워용.”
국자를 들고 서서 혼내려고 하는 엄마께 윙크를 해주곤 방으로 들어가 가방을 가지고 나왔다.
“밥먹고 가야지!”
“아냐. 늦었어. 완전 지각! 지각이예요!”
머리를 탈탈 털며 운동화를 구겨 신는 아리를 보며 음식준비를 하던 엄마가 서둘러 현관으로 나왔다. 미리 챙겨 둔 도시락을 아리의 손에 쥐어 주며 배웅했다.
“잘 갔다와. 차 조심하고. 서두르지마, 어차피 늦었는데.”
“네네. 다녀오겠습니다!”
“그래. 앞뒤 잘 살피고! 천천히!”
아리는 걱정스러운 눈빛을 하고 있는 엄마를 향해 빙긋 미소를 보여주고 집을 나섰다. 책가방을 휘두르며 기쁜 마음으로 학교를 향해 뛰었다.
어제 녀석들과 함께 있었다는 것만으로 기쁘고 즐거웠고 행복했다. 어제일이 드문드문 생각났다. 저절로 미소가 걸린다. 즐겁게 논 좋은 기억만 생각날 뿐 실수한 건 없었다고 장담하는 아리였다.
#학교
학교는 조용했다. 고요하다는 표현이 더 맞았다. 다행히 아리가 도착한 시간은 쉬는 시간이었다.
“휴.”
아무도 아리를 붙잡는 사람은 없었다.
당당하게 발을 떼어 교실로 들어가려고 문을 열었는데.
문이 열리는 동시에 앞을 가로막고 있는 SS클럽 무리가 있었다.
어떻게 자신이 들어올지 알고 그 앞을 봉쇄하고 있는지, 아리는 신기할 따름이었다.
운동장을 가르며 교실로 오고 있는 아리를 주시하고 있던 이세아였다.
“뭐야? 비켜.”
저번에 아리에게 따끔한 맛을 본 이후로 SS클럽 무리들은 아리를 건드리지 못하고 있었다. 그런데, 지금 뭘 믿고 앞을 막고 있는지 궁금했다.
이세아와 윤나비 그리고 SS클럽 여자애들의 매서운 눈초리는 아리에게 꽂혀있었다.
“그 재주 한번 보고싶네. 너! 어제 우리 지혁이랑 같이 있었다며!”
우리 지혁이? 이세아는 눈에 불을 켜고 이를 갈 듯 소리쳤다. 귀에 거슬리는 우리 지혁이라는 소리에 아리도 고개를 꼿꼿하게 세웠다.
“내가 저번에도 말했던 것 같은데? 내가 보고할 이유가 없다고. 비켜.”
아리가 그리 만만한 상대가 아니다. 눈을 똑바로 뜨고, 세아를 한 손으로 가볍게 밀치고 교실로 들어갔다. 교실엔 반 아이들이 모두 아리에게 주목하고 있었다.
BM애들의 자리가 비어있는 거 보니, 녀석들은 오늘 학교에 나오지 않은 모양이었다.
오, 그래서 SS클럽 공주들이 덤벼드는 거구나.
아리가 자리에 앉자 이세아는 졸졸 따라와 빈 책상을 엎었다. 겁도 없이!
“기물파손은 하지마. 학교물건 소중히 해야지.”
세아의 행동에 눈 하나 깜짝하지 않고, 평정심을 유지한 채로 말하자, 모두들 기가 막힌다는 듯 쳐다본다. 언니니까, 두 살이나 더 먹은 나이를 생각해서 참고 있는 아리였다.
“여기서 빈민근성이 나오네? 이런 책상쯤은 우리집에서 다 대줄 수 있거든?”
“그래? 그럼 부수던지. 좋겠다. 학교물건도 막 다루고. 근데, 남의 물건 막 다루면 너도 언젠가 누가 막 다루게 될껄.”
아리가 덤덤한 표정으로 일관하며 말하자, 세아는 기겁하 듯 쳐다보며 입에 거품을 물고 소리쳤다.
“너 대체 뭐야? 지혁이랑 BM 넘보는 이유가 뭐냐고! 너가 BM애들 넘볼 수 있는 주제가 된다고 생각하니? 정신차려! 냉수먹고 속차리라고! 빈민은 빈민답게!”
그 때였다. 아리가 책상을 주먹으로 쾅- 쳤을 때, 그 동시에 단정한 단발머리에 반듯해 보이는 인상을 가진 이하민이라는 여학생이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SS클럽 무리에게 소리쳤다.
“그만 좀 할 수 없어?”
항상 조용히 책만 읽고 있던 하민이 용기내어 소리치자, 모두들 놀라 하민에게로 시선이 돌아갔다. 아리도 세아도 모두 하민에게로 고개를 돌렸다.
교실에 있는 듯 없는 듯 앉아있던 하민의 발언에 반 아이들은 당황했고, 세아도 당황스러운 눈치였다. 하지만, 이내 픽- 비웃더니 가소롭다는 듯 말했다.
“그래. 너도 뭐 같은 과니까. 이해해줄게. 갑자기 굴러 들어와서 재벌 딸 된 주제에.”
“……”
정말이지, 이세아는 사람 속을 긁는데 뭐 있는 것 같다. 하민은 입술을 부르르 떨었다.
이세아는 아리가 아닌 하민에게 화살을 꽂으러 다가갔다.
“회장아버지가 너란 애 있는 줄도 모르다가, 갑자기 딸이네 하면서 너가 나타났었다며. 그 다음부터 너 팔자 폈고. 내 말이 틀려?”
“함부로. 얘기하지마.”
“있는 그대로 얘기한 것 뿐이야. 어디서 굴러들어온 찬밥같은 게……”
세아가 말을 끝내기도 전에 하민이 무섭게 달려들었다.
이세아의 꼬불거리는 머리카락을 한 손으로 냉큼 잡아 돌리기 시작했다.
“아악! 야!”
갑작스런 머리채 잡기 공격에 이세아는 바둥바둥거렸다.
“우리 집 얘기 함부로 하지말라고 했지!”
“이거 놔!”
세아도 하민의 머리카락을 한움큼 잡았다.
서로 머리를 뜯으며 싸우는 모습에 고상한 반 아이들은 어쩔 줄 몰라 지켜보기만 했다.
SS클럽 애들이 달려들어 말리다, 결국 세아를 도와 하민을 공격하는 모습에 아리가 정신이 번쩍 들어 달려가 두 여자를 말렸다.
“싸우지마!”
둘 사이를 갈라놓으려고 하는데, 5명이 떼거지로 몰려 하민을 뜯고 있으니, 참으로 기가막힐 광경이었다. 아리는 하나씩 떼어 씨름을 하듯 바닥으로 내동댕이 쳐주었다.
“떨어져! 떨어져 쫌! 이 찔긴 것들!”
“꺄! 꺄악!”
난장판이 되어 있는 교실에선 시끄러운 소리가 가득했고, 아리는 씩씩대며 4명을 모두 떨궈내버렸다. 그리고 마지막 남은 이세아를 밀어내려고 기를 썼다.
“떨어져! 이뇬아!”
기를 모아 손바닥으로 이세아의 이마를 힘껏 밀쳐 버렸다. 두 여자는 서로에게서 떨어졌고, 동시에 검은 머리카락들이 바닥에 후두둑 떨어졌다. 이세아와 하민의 머리카락이 교실 중앙에 흐트러졌다. 먼저 바닥에 쓰러진 세아가 울음을 터트렸다. 서럽게 엉엉 울기 시작했다.
“야아. 울지마.”
여자의 눈물에 여자도 약해지나? 마음이 약해진 아리의 눈에 비취는 세아의 우는 모습은 불쌍해 보였다.
“너가 못되게 구니까 그러지. 못된 말만 쏙쏙 골라서 하는데 누가 널 좋아하겠어. 그래도 머리카락 뽑힌 걸 감사히 여겨. 난 오늘 너 눈탱이 밤탱이 만들려고 했단 말이야.”
위로를 하는건지, 겁을 주는 건지. 아리의 말에 세아가 쫙 찢어진 눈으로 흘겨보다 더욱 꺼이꺼이 울어제꼈다.
“가만 안둬! 너희, 절대 가만 안둬.”
이렇게 유치한 얘기에 답해주기도 이젠 귀찮다. 앙심을 품은 듯이 말하는 세아에게 알았다고, 가만 두지 말라고 대충 대꾸해주고 하민을 데리고 교실을 나왔다.
“자, 마셔.”
아리는 하민에게 자판기에서 뽑은 음료수를 내밀었다.
학교 휴게실로 내려와 하민에게 동전을 탈탈 털어 음료수를 사주었다.
하민은 다시 조용한 성격으로 돌아와 있었다. 음료수를 주는데도 받지 않고 아리만 멀뚱멀뚱 바라보고 있는 하민이었다.
“뭐해? 받아.”
“넌. 너 마셔.”
돈이 없어 하나만 뽑은 줄은 어떻게 귀신같이 알았는지 받지 않으려고 하는 하민이다.
“돈 없어서 하나만 뽑은 거 아니야. 나는 목이 안 말라. 너가 싸우느라 힘들었으니까, 마셔.”
그제야 하민은 음료수를 받았다.
“고마워.”
“고맙긴. 너가 수고했지. 그래도 다음부턴 싸우지마. 똥은 무서워서 피하는 게 아니라, 드러워서 피하는 거니까.”
하민이 음료수를 홀짝거리면서 마시다 아리를 뚫어져라 쳐다보았다.
“왜? 내 얼굴에 뭐 묻었어?”
“아니. 너 대단한 것 같아서.”
“대단하다고? 내가? 왜?”
“그냥. 느낌이 그래. 뭔가 대단해. SS클럽같은 것들한테 기도 안 죽고, 할말 다하고.”
눈을 반짝이며 하민이 칭찬을 하자, 아리가 부끄러운지 한 손을 저으며 말했다.
“대단하긴. 무슨….”
“아냐. 정말 대단해. 전학생들 대부분이 우리반에 못 있고 다시 전학가거나 자퇴해. SS클럽이 교묘하게 괴롭혀서. 그리고 여기 학교가 좀 그래. 끼리끼리 수준에 맞는 애들끼리 지내야 한다는 원칙을 정해놓고 시작해.”
하민을 처음 봤을 때 차가운 이미지가 강해서 말도 붙이기 어려울 거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지금 초롱초롱한 눈을 하고 말하는 걸 들어보니 생각했던 것과는 많이 다르다는 걸 알았다.
아까 이세아의 말에 상처가 되지 않았나 걱정스러웠지만, 밝은 모습에 안심이 되었다.
“그만 들어가자.”
아리의 말에 하민이 벌떡 일어났다. 걸음이 빨라 먼저 저만치 걸어가고 있는 아리에게 외쳤다.
“이하민이야. 잘 부탁해.”
“나도. 잘 지내보자.”
아리는 특유의 예쁜 미소를 지으며 말을 받았다.
아리와 하민이 교실에 들어가자 싸늘한 기운이 맴돌았다. 물론 SS클럽 공주들의 째려보는 시선이 있어서 이기도 했지만, 갑작스런 수학시험이 기다리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왜 이렇게 늦었어?”
“화장실 좀 다녀오느라구요.”
“빨리 들어가서 앉아.”
그동안 좋은 이미지를 쌓아온 하민이 덕분에 아리도 혼나지 않고 자리에 앉을 수 있었다.
“이거… 뭐야?”
빽빽한 숫자들이 뒤엉켜 있는 수학시험지를 받아든 아리가 짝인 형빈에게 속삭이듯 물었다.
“쪽지시험이야. 틀리는 수대로 벌준대.”
“거기 뭐야! 왜 속닥거려! 떨어져 앉아. 컨닝하는 거 내 눈에 다 보여. 컨닝 할 생각하지마! 특히 거기 뒤!”
수학선생님이 긴 막대기로 아리와 형빈이 있는 쪽을 휘휘 가리키며 말했다.
‘맙소사!’
속도 울렁거려 죽겠는데. 가는 날이 장날이라고, 오늘 어쩜 이래!
‘이게 다 뭐래?’
시험지를 보니 속이 더 울렁거렸다.
눈 앞에 검은 숫자들이 펄쩍펄쩍 뛰놀고 있는데, 아리는 한 문제도 풀지 못하고 있었다.
하얀 것은 종이여, 검은 것은 숫자들일 뿐. 이름만 적고 더 이상 손을 못 대고 있는 아리는 학교에 오지 않은 BM애들 자리를 보며 녀석들을 너무나 너무나 부러워 하고 있었다.
‘나도 학교오지 말 껄! 으앙!’
[16]
수학시험을 망친 것도 아니고, 아예 손도 못대고 백지를 내고 만 아리는 학교가 끝나자마자 후다다닥- 병원으로 향했다.
“그래! 시험 못보면 어때? 난 강지혁이랑 친구되려고 학교 온거지! 성적 따위에 휘둘리는 고등학생이 아니란 말이야. 그렇지? 괜찮아. 못 풀 수도 있는 거지. 성적은 인생의 전부가 아니잖아! 그럼!”
아리는 스스로를 위로하고 또 위로했다. 자신의 임무는 지혁을 보호하고, 바른 길로 인도하기 위한 것이라는 걸 다시 한번 되새겼다. 잠복근무를 하는 바른 생활 인도자일 뿐이야. 몇 번을 생각하며 뛰었지만, 역시나. 잘보던 못보던 시험이라는 건 마음을 무겁게 만든다. 성적걱정이 되는 건 어쩔 수 없는 일인가보다. 벌받을 걸 생각하니 벌써부터 머리가 빙빙 돌았다.
병원으로 가면서 아리는 류에게 전화를 했다. 지혁과 같이 있을 것 같아서, 그리고 지혁의 전화번호를 알아내려고 전화를 해보지만 받지 않는다.
그 시각 4명의 녀석들은 뭉쳐서 아침겸 점심겸 저녁 식사를 하고 있었다.
아리는 병원으로 들어가 오늘도 어김없이 청소도구를 가지고 나와 병원을 청소했다. 병원의 환자들은 아리와 스스럼없이 인사를 나누고 오늘의 일을 주고받으며 정답게 이야기를 나누었다.
물걸레질을 마친 뒤, 창틀을 닦던 아리가 류의 이복 형, 이인준 의사가 지나가자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그리고 재빨리 앞을 가로막으며 인사를 했다.
“안녕하세요, 선생님.”
이인준은 고개를 까딱하며 간단한 인사를 하고 피하려고 했다.
“어제! 잘 주무셨어요?”
“네?”
그냥 지나가려던 인준이 황당한 질문에 반문했다.
“잘 주무셨냐구요.”
“네.. 그런데요?”
“두 다리 쭉 펴고 잘 주무신거예요?”
인준은 불만이 가득한 표정으로 아리를 아래 위로 훑는다. 이쯤에서 열 좀 받은 얼굴을 하고 있자, 아리는 방긋 웃으며 말했다.
“의사선생님이 잠을 잘 주무셔야 환자들이 마음놓구 진료를 받죠. 안 그래요?”
“그렇죠.”
인준은 이제야 아리의 말이 이해가 된다는 표정을 지었다.
“그럼 이만.”
짧게 인사를 하면서 안경을 한번 고쳐 만지고 아리에게서 빨리 벗어나려고 발걸음을 서둘러 돌리는 모습이 아리의 눈에 심히 거슬린다.
“흠. 잘 잤다구? 곧 있으면 못 잘테니까, 푸욱- 자두라구.”
아리는 하얀 손걸레를 한번 접고 다시 창틀을 닦기 시작했다.
#쁘리아뜨 레스토랑
지혁과 류, 순간이와 유신은 한자리에 삥- 둘러앉아 식사를 마친 뒤 이야기를 하고 있었다.
“나 어제 너무 정신없이 놀았나봐. 아직도 머리가 띵해.”
유신이 머리를 잡으며 말했다.
“나도. 아침에 일어나니까 머리속이 하얘.”
순간도 유신의 말을 거들었다.
유신은 하고 싶은 말이 있는지 입술을 내밀고 우물쭈물 거리다, 먼저 후식으로 나온 아이스크림을 한 입 먹고 난 후에야 다짐한 듯 눈을 반짝거렸다. 그리곤 살며시 입을 열었다.
“근데 빈민말이야. 그 아리. 솔직히 우리 어제 다 같이 재밌게 놀았잖아. 그렇게 놀아본 거 진짜 오랜만이었잖아. 그렇지?”
“응.”
역시 순간이 고개를 끄덕이며 거들어주었다.
“그래서 말인데, 이번에 일 성공 못해도 그냥 친구로 끼어주면 안될까?”
유신이 어렵게 꺼낸 말이었는데, 그 말이 끝날 찰나에 류의 핸드폰이 울렸다.
“나 전화 좀 받고.”
“에이씨. 꼭 내가 중요한 말할 때 이래!”
아까까지 우아하게 아이스크림을 먹다 이젠 퍽퍽 퍼먹는 유신이다.
류는 지연이라는 걸 확인하고 전화를 받았다.
“어, 누나.”
[뭐하니?]
“그냥 있어. 왜?”
[내일모레가 우리병원 창립 40주년 기념식인거 알아?]
“벌써 그렇게 됐나?”
큰 행사가 있다는 것에 류의 한쪽 입꼬리가 살짝 들렸다.
[응. 옷 갖춰있구 와.]
“그래? 가서 우리 꼰대 약 좀 올려야 겠네.”
[류야, 그러지마. 너 친구 생각해서라도.]
갑작스런 지연의 말에 류는 살짝 올린 입꼬리를 내렸다.
“친구? 무슨 친구?”
[너 정말 좋은 친구 뒀더라? 여자친구니?]
“무슨 소리 하는 거야? 내가 여자친구가 어딨어.”
알아들을 수 없는 이야기에 류의 신경이 곤두섰다.
[매일 병원와서 청소하는데, 벌써 5일째야. 몰랐어?]
“누나, 무슨 말 하는지 모르겠으니까 좀 알아듣게 말해. 누가 매일 청소를 한다구?”
[아리씨.]
“아리?”
류의 입에서 ‘아리’라는 이름이 나오자, 지혁과 유신, 순간이 모두 귀를 기울였다. 흐트러져있던 몸을 일으켜 세우고 류의 전화통화에 집중했다.
[정말 지극정성이야. 너 왠만해선 아리씨한테 상처주지 마.]
“아니, 누나.”
[병원 사람들도 얼마나 좋아하는데. 밝고 친절하고, 사람들 마음을 편안하게 해주고. 쉽지 않은 일인데, 병원에 시간 맞춰 와서 봉사를 해. 그리고 아버님한테도 깍듯이 예의지켜서 인사하구, 너 잘 봐달라고 꼭꼭 얘기하구.]
“……”
류는 가만히 지연의 이야기를 듣고 있었다. 아리가 어떤 일을 하고 있는지 새카맣게 모르고 있던 BM이었다.
[난 그런 친구 없잖아. 그래서 너가 너무 부러워. 정말…….]
류는 지연의 전화를 받고 바로 병원으로 향했다. 같이 있던 BM애들도 함께 그 얘길 듣고 함께 병원으로 달려갔다. 쉼없이 달려 병원에 도착했을 때, 지혁이도 류도, 순간이도 유신이도 동시에 아리를 보았다. 어제 함께 헤롱거리며 즐겁게 놀 때와는 또 다른 모습으로 밝게 웃으며 청소를 하고 있는 아리가 네 사람의 눈에 들어왔다.
“쟤 왜 저렇게 열심이냐…”
류가 중얼거렸다. 누가 시키지도 않았다. 강제로 하라고, 해달라고 부탁한 적도 없다.
그렇다고 저렇게까지 열심히 할 거라고는 생각도 못했다. 말뿐이라고 생각했다. 자신만만하게 해본다고 했을 때, 저러다 말겠지 했다. 일주일이라는 시간을 주었지만, 대체 무슨 방법으로 류와 아버지 사이를 붙여줄 것이냐 콧방귀나 뀌고 어림도 없는 일이라고 미리부터 단념하고 있던 BM이었다. 그런데 아리가 BM에 들어오기 위해서 억지로 떠밀려서 하는 것이 아니라, 류를 위해 진심으로 저렇게 할 줄은 몰랐다.
“우리랑 진짜 친구하고 싶은거야.”
유신이 똘망똘망한 눈망울로 아리를 쳐다보며 말했다.
아리는 행복한 미소를 짓고 있었다.
의무감에 억지로 하는 청소가 아니라, 진심으로 간절한 마음으로 청소를 하고 있었다.
류를 위해… BM에 들기 위해…….
4명의 녀석들이 넋을 잃고 아리를 쳐다보고 있을 때, 마침 아리의 앞으로 류의 아버지가 지나갔다. 아리가 먼저 밝게 인사하자, 류의 아버지도 편한 표정으로 인사를 나누고 몇 분간 대화도 나누었다. 그 모습을 보고 류의 마음이 따뜻해졌다.
지혁도 순간도 유신도 마음 속에 뜨거운 무언가가 들어왔다.
그녀의 최선을 다하는 모습에…….
.
.
“아리씨, 이거 좀 먹고 해요.”
지연의 손에 김밥이 들려있었다.
“고맙습니다.”
아리는 먹음직스럽게 보이는 김밥 하나를 집었다.
“힘들지 않아요?”
“전혀요. 재밌어요. 힘든 일 없어요. 청소가 쉽죠. 수학시험보다.”
“네?”
“아, 아니예요.”
아까 눈 앞이 캄캄했던 수학시험이 생각나자, 또 다시 머리를 흔들었다.
“아까 류랑 통화했어요.”
“아! 그래요? 내 전화는 안 받던데.”
“아리씨 류를 정말 많이 사랑하는 것 같아요. 보기 좋아요.”
“네에? 류? 사랑? 류를요? 케켁-”
김밥을 잘 먹고 있던 아리가 지연의 뜬금없는 사랑소리에 놀라 사레가 걸렸다.
“괜찮아요? 여기 음료수.”
켁켁대며 목을 부여잡는 아리를 보고 지연이 얼른 음료수를 건넸다.
오해를 하고 있는 지연에게서 그 오해를 한시라도 빨리 풀어줘야겠다 싶었다.
“언니가 오해를 하고 있는 것 같은데요. 친구로써 좋아하는거지, 사랑하고 그런 사이가 아니예요.”
“아…!”
지연이 실수를 했다고 생각했는지 두 손으로 입을 막았다.
“이해해요. 충분히 오해할 만하죠. 하하! 제가 류를 친구로써는 아주아주 좋아해요.”
아리가 음료수를 한모금 마시고 말을 이었다.
“류가 안타까워요. 그리고 원장선생님도요. 서로 아프고 서로 괴로워 하는데, 그걸 중간에서 풀어줄 사람은 없고, 더 감정만 나쁘게 만드는 일만 일어나서 더 안타까워요. 그래서 옆에서 지켜볼 수만 없어서 두 사람의 마음을 편하게 해주려고, 노력 하는 거예요. 물론 지금은 노력 중이지만, 좋은 뜻이 닿겠죠. 언젠가는….”
사랑스러운 미소를 띄우며 말하는 아리가 참 예뻐보인다.
“전 류도, 원장선생님도, 그리고 제 친구들 모두가 행복하길 바라거든요.”
지연은 아무말없이 아리를 쳐다보았다. 아리를 보며 자신이 한없이 부끄러워지기 시작했다.
그리고 이제까지 류의 아픔을 알면서도, 생각만 있을 뿐 정작 한번도 류를 도와주지 못했던 것 같아 마음이 아파왔다.
아리는 음료수를 마지막 한모금까지 쭉 마시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언니, 저 이만 가볼께요. 내일 또 올께요.”
“아리씨, 고마워요.”
지연의 감사인사에 아리가 두 눈을 동그랗게 뜨고 지연을 쳐다봤다.
“김밥도 사주시고, 음료수도 주시고, 언니한테 제가 더 고맙죠.”
“빈말이 아니라, 정말 아리씨한테 고마워요. 제가 언제든지 도움이 되고 싶어요. 도움이 필요할 때 꼭 말해요. 아! 그리고 내일 모레 우리 병원 창립 40주년 기념 행사가 있어요. 아리씨가 꼭 와줬으면 해요.”
“제가 가도 되는 자리예요?”
“그럼요. 제가 내일 초대권 줄께요. 꼭 와야돼요!”
아리의 입이 귀에 걸리더니 행복에 찬 얼굴을 하고 지연에게 말했다.
“꺄아! 언니 복 받으실꺼예요!”
지연의 손을 잡고 팔짝팔짝 뛰며 좋아하자, 지연도 흐뭇한 미소를 지었다.
“제가 진짜 가도 되는지 모르겠는데, 꼭 갈께요! 류도 와요?”
“그럼요. 제가 멋있게 옷 입고 오라고 했어요.”
지연과 아리가 얘기를 나누고 있는 도중에, 동료 간호사가 지연을 불렀다.
“신간호사! 한선생님이 부르셔.”
“네! 금방 갈께요. 아리씨, 내일 봐요.”
“네. 가세요!”
아리는 멀어져가는 지연에게 힘차게 손을 흔들어주었다.
그리고 사무실로 돌아와, 청소도구를 정리하고 가방을 들고 나왔다.
“유휴! 오늘도 잘했다!”
병원을 나오고 있을 때, 류의 아버지가 이복 형 인준의 사무실로 바삐 들어가는 게 보였다.
‘무슨 일이지?’
급한 일이 있나보다 생각하고 발걸음을 돌려 가려는데, 우연히 고개를 돌린 순간에 아리의 눈에 인준의 모습이 들어왔다. 가운 주머니에 손을 찔러 넣고 자신의 사무실로 가려는 모습에 아리는 정신이 번쩍 들었다.
‘하늘이 주신 기회다! 지금이야!’
콩닥거리는 가슴을 조금씩 진정시킨 뒤, 인준에게로 미끄러지듯 달려나갔다.
현재 사무실에 아버지가 기다리고 있는데, 인준이 그걸 모르는 상황이었다.
인준의 일을 폭로하고 나쁜 걸 드러내줄 수 있는 중요한 기회가 온 것이었다.
아리는 눈을 반짝이며 인준의 곁으로 다가갔다.
“안녕하세요, 이인준 선생님.”
아까 이상한 질문을 하던 아리가 또 한번 나타나 인사를 건네자, 인준의 눈이 커졌다. 아무래도 아리를 피하고 싶은 눈치였다. 인사를 받아주고 서둘러 사무실로 들어가려는데 아리가 소리쳤다. 정확하게 말하자면 경고했다.
“류, 다시는 건드리지 마세요.”
정중하게 그러나 아주 힘있게 말했다. 아리의 말에 사무실 문을 열다가 반쯤 열어놓고 인준은 동작을 멈추었다.
“뭐라구?”
“류는, 당신 맘대로 할 수 있는 인형이 아니예요.”
안경 안에 숨어있는 인준의 눈빛이 매섭게 변했다.
“무슨 소리 하는지 모르……”
“류는, 참는게 아니야. 형이니까, 그래도 가족이라고 생각하니까 가만히 있어주는 거야. 그리고 자기가 제일 사랑하는 아버지가 총애하고 있는 사람이니까 가만히 있어주는 겁니다. 아시겠어요?”
아리의 화난 듯한 눈에 인준은 당황했다. 더 이상 마주하지 못하고 사무실 문을 활짝 열고 들어갔다. 그런데, 가만히 놔둘 아리가 아니다.
“류를 당신 욕심대로 괴롭힌다면 이젠 가만 있지 않을 꺼예요.”
“가만 있지 않으면 어쩔껀데?”
인준이 비웃 듯 말했다. 아무도 없는 줄 알고 인정하 듯 말하는 인준은 큰 실수를 하고 있는 것이었다. 이걸 노리고 덤벼든 아리는 속으로 쾌재를 불렀다.
“싸울 겁니다. 맞서 싸울 겁니다.”
“기대되는데?”
“류를 원장선생님 눈 밖에 나게 하기 위해 뒤에서 얼마나 나쁜 짓을 벌이고 있는지, 하늘만이 알겠지요. 그런데요. 이건 꼭 기억하세요. 나쁜 사람은 벌 받아요. 남자라면, 남자답게 정정당당하게 겨뤄요. 힘없는 어린애 초콜릿이나 뺏으면 쓰겠어요?”
정확히 찔러주는 말에 인준은 얼굴이 굳어져갔다. 작은 여자애에게 이런 소리를 들어야 한다는 자체가, 또 이 소리가 정당하고 올바른 소리라는 것 자체가 인준을 짜증나게 만들었다.
“새싹을 밟으면 그 새싹은 죽을 거 같죠? 그런데요. 그 새싹은 죽을 힘을 다해서 일어난다는 거 알아두세요. 밟힘을 딛고 살려고 일어선다는 거 꼭 알아두세요.”
아리는 승리의 미소를 머금고 뒤돌아섰다. 해주고 싶은 말은 너무도 많았지만, 오늘은 이 정도로 끝내야 했다. 어느정도 류의 아버지도, 인준도 알아들었으리라 생각되므로.
[17]
아리는 고소한 마음에 킥킥대며 병원을 나섰다. 그 뒤에 벌어질 일을 생각하니 고소해 죽을 맛이다. 그렇게 좋아라하며 병원을 나오는데, 검은 물체가 아리 앞을 휙- 가로 막았다.
“옴마! 깜짝이야!”
싱글벙글 웃는 얼굴을 하고 있다 깜짝 놀라 몸을 뒤로 젖히며 아리가 소리쳤다. 얼마나 깜짝 놀랐는지 목소리가 쩌렁쩌렁 울렸다.
“아. 진짜. 내가 더 놀랬다!”
지혁이었다. 아리의 앞에는 귀를 막고 지혁이 서있었다. 가슴에 두 손을 얹고 놀란 듯 눈을 깜빡거리던 아리가 지혁의 얼굴을 확인하곤 얼굴에 웃음꽃이 피었다.
“지혁아!”
“목소리가 너무 커.”
“나 여기있는 줄 어떻게 알았어?”
지혁은 그냥 발걸음이 여기로 향했을 뿐이었다. BM애들과 헤어지고 오피스텔로 들어가려다, 병원으로 다시 돌아왔다. 이유는 없었다.
“그냥 지나가다 봤어!”
“지나가다? 어디가다?”
“뭐 그렇게 궁금한 게 많아. 너 나 좋아해?”
이유야 어찌되었든 지혁이 앞에 서있다는 것만으로도 아리는 기뻤다.
앞서 걷는 지혁이 옆으로 따라붙으며 기분좋은 미소를 날리는 아리다.
“왜 그렇게 실실대.”
“좋으니까! 나 오늘 좋은 일 두개나 생겼거든.”
아리가 어린애처럼 두 손가락을 펴보이며 말했다.
“지금 류 형 혼내주고 나왔어. 나 잘했지?”
지혁이 어이없다는 얼굴을 하고 아리를 쳐다보았다. 혼을 내줬다니, 이해가 가지 않는다.
“그리고 두 번째는 너가 마중 나와 줬으니까, 좋은 일 두개 생긴 거 맞지?”
애같은 건지, 바보같은 건지. 혼자 박수까지 치며 좋아한다.
“누가 마중을 나와.”
“기든, 아니든. 오늘 너 못보는 줄 알았는데 늦게라도 얼굴봐서 좋다는 거지! 왜 오늘 학교 안 왔어? 너 혹시 수학시험보는 거 알고 일부러 안 온거지!”
지혁은 고개를 설레설레 저으며 자신이 세워둔 바이크가 있는 곳으로 걸어갔다. 자기만 수학시험 본게 억울했는지 끈질기게 따라붙으며 물었다.
“말해봐. 너 오늘 왜 안 왔어?”
헬멧을 집어든 지혁이 아리에게로 고개를 돌렸다.
“가기 싫으니까.”
“이유가 그 뿐이야?”
“어.”
“정말 불량학생이네!”
“맘대로 생각하고. 탈거야?”
지혁이 헬멧을 내밀었다. 아리가 지혁의 얼굴을 보다, 손에 들린 헬멧을 보다, 세워진 은빛 바이크를 보고 입에 쩍 벌어졌다.
“어머어머어머! 이거 너꺼야?”
그렇다는 긍정의 뜻인 지혁의 눈빛을 보고 아리가 걱정스러운 표정으로 주절주절 말을 늘어놓았다.
“정말 이런 위험한 걸 타는 거야? 멋도 좋지만, 이거 타다 사고라도 나면 어쩔려구!”
“허.”
아리가 어제 일에 대해 전혀 기억을 못하는 듯 하자, 지혁은 한 숨이 절로 나왔다. 강과 고생고생 했던 어제의 수고가 물거품이 되어 버리는 것인가. 하긴, 집에 도착할 때까지 상황도 모르고 잠만 쿨쿨 자던 아리다. 그래도 아침에 일어나면 기억하겠지, 생각했다. 그런데 아리가 바이크를 보고 걱정하는 모습에 지혁은 머리가 아파왔다.
“이봐. 지금 내 차가 어떤 줄 알아?”
“차? 무슨 차?”
정말 모르는 것 같다.
“너 차가 있어?”
확실히 모르는 것 같다.
“어제 너 때문에.”
“나 때문에 뭐어.”
예쁜 쌍까풀이 진 큰 눈을 더 크게 뜨는 아리를 보고 지혁이 물었다.
“어제 기억 안 나?”
“무슨 기억?”
“아호. 답답해. 넌 내 차를 모욕했어. 지금 내 차가 어떤 꼴인 줄 알아?”
“내가 니 차 꼴을 어떻게 알아.”
본 적도 없는 차를 물으니 답답한 아리가 두 손을 들고 어깨를 으쓱해 보인다. 한쪽 눈썹을 살짝 들어올리며 정말 기억이 안 난다는 어리둥절한 표정을 짓는다.
“시트 새로 갈아야 돼. 차에서 냄새가 진동해서 들어가질 못해. 그래서 이거 타는 거거든. 차를 완전 바꾸고 싶을 지경이라고. 너가 어제 한 오바이트 때문에!”
“허헉!”
마지막 말에 아리가 입술을 꽉 깨물었다. 오바이트를 했다니. 그것도 지혁의 차에? 전혀 기억나지 않는 부분이다. 즐겁게 놀고 춤추고 노래하고 파도타고, 까지는! 생각이 나지만 그 다음부터는 영. 아침에 일어나보니 집이더라. 딱 여기까지가 아리의 머릿속에 남아있는 필름영상이다.
‘내가 그랬다구? 에이. 설마.’
기억이 없으니, 배째라는 식으로 나가려고 했는데. 동생 강이도 함께 고생을 했다는 얘길 듣고 발뺌할 수가 없었다.
“미안해. 어쩌니, 정말. 미안.”
울상을 지으며 이를 물고 아리가 사과했다. 그러다, 혼자 화들짝 놀라 다짜고짜 지혁에게 물었다.
“너 그래서 기다린 거야? 혹시! 혹시! 시트값 받으려구?”
“뭐어?”
생각한 적도 없는 시트값을 먼저 예상하고 말하는 아리가 혼자 사과하다 놀라다, 원맨쇼를 하자 지혁이 들고 있던 헬멧을 아리에게 내밀며 말했다.
“너 갚을 돈이나 있어?”
“없어!”
다급해서 헬멧을 받아들며 외쳤다. 놀란 토끼같은 얼굴을 하고 있는 아리를 보니 황당할 따름이다. 어느 새 지혁은 바이크에 올라탔다.
“나 돈이 없어. 진짜야. 나 돼지저금통도 저번에 갈라서 다 썼단 말이야. 근데, 이거 뭐하라구? 너 씌워주라구? 씌워줘?”
하도 여기저기서 귀빈대접을 받는 명문고 학생이니, 그것도 명문고의 왕자님이시니 헬멧을 씌워달라고 넘긴 줄 착각한 모양이었다. 줄줄이 자신의 사정을 얘기하다, 지혁의 머리에 헬멧을 씌워주려고 하는 아리다. 비굴모드다.
“너 쓰라고. 쓰고 타.”
타도 되는 건지, 어쩐지 아리가 눈치를 슬슬 보며 가만 서있었다.
“그럼 거기 서서 있어라. 난 간다.”
지혁이 냉정하게 바이크에 시동을 걸고 출발할 준비를 하자, 그제서야 붙잡았다.
“타! 나 뒤에 타면 돼? 요기? 떨어지면 어떡해?”
“물을 것도 많다. 타면 타는거지.”
.
.
집에 와서 잠이 들기 전까지, 지혁의 얼굴이 두리뭉실 머릿속에 그려졌다. 지혁은 아무말도 없었다. 돈 내놓으라는 말도 없었고, 너가 잘못했으니까 잘못한만큼 나한테 봉사해! 아니면 내 차 원상복귀시켜놔! 이런 말도 없었다. 딱 한마디, 들어가려고 내렸을 때 ‘나보다 지각하기만 해.’ 이 말만 남기고 쓍- 모래바람처럼 사라져버렸다.
아리는 이불을 가슴에 끌어안고 베시시 웃음을 지었다.
“된거야. 이제 친구야! 아-싸!”
성공을 눈 앞에 두고 있으니, 춤을 추며 기뻐하는 것은 당연했다.
.
.
그런데.
성공이라며 일주일 안에 BM에 드는 것이 성공이라며, 행사에서 류와 류의 아버지가 화해하는 해피엔딩으로, 곧 BM에 들어 4명의 녀석들과 친구가 되리라고 큰 꿈을 가지고 들뜬 마음으로 하루를 보내고 그 다음 날을 맞이했는데!
그런 아리의 부푼 꿈은 사그러져 푸우욱- 바람빠진 풍선이 되어 찌그러져 버렸다.
#병원 창립 40주년 기념파티장
얼음동상이 무대 중앙에 자리잡고 있고, 뷔페식으로 준비되어 있는 파티장엔 벌써 많은 귀빈들과 손님들이 자리를 가득 메우고 있었다. 그곳에 아리가 들어섰다. 우아하고 기품있게 보이게 하기 위해 고이 모셔두었던 원피스를 입고 왔는데- 이곳에 들어서는 순간, 이들 사이에 섞이니 조금 쪼그리는 느낌이 든다. 하지만, 절대 기죽지 않는다. 왜냐고? 젊으니까!
지연과 파티장에 들어서자 방망이질치는 가슴을 주체할 수 없었다. TV에서 보았던 유명한 의사들과, 외국인도 보인다. 격식있는 자리인만큼 행동을 조신하게 해야지 생각하며 주위를 찬찬히 둘러보는데. 저 멀리서도 눈에 띄는 지혁이 눈에 들어왔다. 모델같이 서있는 그의 자태는 광채를 몸에 둘러싸고 있었다. 그리고 이어 유신과 순간이 얘기를 하고 있는 것이 보였다.
“……!!”
그리고 이어 얼굴에 상처로 추정되는 흠집과 한손에 잔을 들고 포도주를 가득 따르라고 주문하고 있는 류가 보였다.
‘류!!’
아리가 몸을 날리듯 눈썹을 휘날리며 달려갔다. 벌써 어느정도 취한 류를 지혁이 말리고 있었다.
“그만 마셔라. 취했다, 너.”
아까 학교에서는 찾아 볼 수 없었던 상처가 턱하니 류의 얼굴에 자리잡고 있었다. 아리의 예상을 깨고, 아리가 세웠던 계획을 깨고! 류는 얼굴에 심한 상처를 입고 아리의 앞에 등장했다. 그것도 아버지 병원 파티에 말이다. 아리의 꿈이 와르르 무너지는 순간이었다. 그렇게 말했건만. 그렇게 말렸건만. 제발, 인준의 계획대로 싸우지 않기를 바라고 또 바랬는데. 이게 뭐야. 다 틀렸다.
“딱 한잔만 마실께.”
지혁에게 애교스럽게 눈을 찡긋거리며 적포도주가 담긴 와인잔을 빼앗아 드는 류가 자리에 털썩 앉아 홀짝홀짝 술을 마셨다.
‘이건 아니야. 이게 아닌데!!’
류의 아버지는 손님들과 인사를 나누며 이따금씩 류를 쳐다보았다. 불안한 눈빛으로.
아리가 생각했던 건 이게 아니었다. 류가 아니라! 인준이 폐인이 되어 비실거리고 있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어제 하루 인준이 병원에 보이지 않아 드디어 조치가 내려졌구나. 병원에서 짤렸구나 싶어 기뻐하고 있었는데 아리의 생각과는 다르게, 파티장안에서 손님들과 인사를 나누며 아무일 없다는 듯이 숙녀들에게 후한 모습을 보여주고 있는 인준을 보자, 아리는 화가 치밀어 올랐고, 기분이 확 상했다.
“흥!”
속이 타들어가자 아리는 예쁜 핑크색인 칵테일을 벌컥벌컥 들이켰다. 아리와 류가 앉아 똑같은 포즈로 술을 들이켜고 있는 모습을 보는 BM애들은 한숨을 내쉬었다.
류의 아버지가 감사, 축하 연설을 하는 동안에도 아리와 류는 짠- 하고 건배하고 술잔을 기울이고 있었다. 그런 두 사람이 앉아있는 자리로 불청객이 찾아왔다.
“잘하는 짓이다.”
인준이 사람들 모르게 혀를 끌끌 차며 눈이 살짝 풀린 류를 보며 눈을 흘기며 말했다.
“저리가.”
아리와 술잔을 부딪치며 킬킬 대던 모습은 싹- 사라지고, 분노가 가득한 눈으로 인준을 쳐다보는 류다.
“병원이미지가 있지. 너같은 거 때문에 우리 병원이 쪽을 팔아야 마음이 편하겠냐? 대충 즐겼으면 집에 가라. 여기 있다가 괜히 소란피우지 말고. 매번 이러는 것도 쪽팔리지 않냐? 차비없어? 없으면 내가 줄게. 택시잡아줄테니까, 가.”
인준이 주머니를 뒤져 지갑을 꺼내며 사람 속을 뒤집어 놓고 있었다.
술에 취했지만 정신은 살아있는 아리와 류가 긴 한숨을 내쉼과 동시에 짜증을 버럭 냈다.
“너나 가!”
신경이 극도로 예민해졌다. 짜증이 밀려왔다.
“제가. 경고했잖아요. 건드리지 말라구.”
“내 앞에 나타나지마. 피차 얼굴보면 욕나오잖아.”
톡 벌침 쏘 듯 두 사람이 번갈아가며 인준의 얼굴에 대고 소리쳤다. 사람들의 시선을 받자, 그제야 인준이 부랴부랴 자리를 피했다.
‘챙-!’
류는 그의 뒷모습을 보다 분노를 표출할 방법을 찾지 못해, 유리잔을 손으로 깨뜨려 버렸다. 유리파편이 테이블 아래로 떨어졌고, 손님들은 류의 붉은 피를 보고 ‘꺅-’소리를 질렀다. 옆에 있던 아리도 놀랐고, 맞은편 테이블에서 음식을 먹고 있던 BM애들도 놀라 달려왔다.
“류!”
“류, 괜찮아?”
“괜찮아?”
놀라 눈이 동그래진 건 류의 아버지도 마찬가지였다.
주위 가까이에 서있던 지연이 재빨리 달려와 수건으로 지혈을 했다.
“어떡해. 왜 이랬어.”
“시원해. 오히려.”
지연이 피를 닦아주는 걸 뿌리치고 류가 서늘한 미소를 머금었다.
“하하하. 하하하.”
실성한 사람처럼 웃는 류를 가만히 쳐다보던 아리가 씨익- 미소를 지었다. 그리곤 말을 걸었다.
“결정해. 류. 오늘 그냥 우리 둘이 깽판 칠래?”
아리가 피식 웃으며 말하자, 류도 헤실헤실 웃었다.
“아님, 너희 형한테 복수해줄래?”
아리가 웃음을 거두고 진지한 얼굴로 말했다.
술기운이 남아있는 상태지만, 아리의 눈은 초롱초롱했다. 류도 마찬가지였다. 둘이 속삭이며 말하다, 동시에 일어났다. 홀 안에 있는 모든 사람들이 이 둘을 주목했다. 지혁은 말리지 않고 가만히 지켜보았다. 어떻게 할 것인가. 아리와 류를 믿는데 한표를 던진 지혁이었다.
[18]
비틀대며 두 아이가 류의 아버지인 이원장에게로 걸어갔다. 류의 아버지는 멀리서 휘청휘청거리며 자신에게로 걸어오는 이들의 모습을 보고 있었다.
류는 손에서 흐르는 피를 그냥 내버려 둔 채 엉망인 모습을 하고 있었다.
아리와 류가 류의 아버지 앞에 도착해 섰다. 둘이 동시에 꾸벅 인사를 하고 고개를 들었다.
사람들의 이목이 집중되어 있는 상태에서 두 사람의 짧은 인사만으로 잔뜩 긴장한 류의 아버지였다.
“이게 무슨 짓이냐.”
류를 다그치듯 말하는 이원장의 낮고 무뚝뚝한 목소리가 파티장을 조용하게 만들었다.
류와 아리는 동시에 철푸덕 자리에 무릎을 꿇고 앉았다.
“……!!”
모두들 또 한번 놀라 수군거리기 시작했다. 꼭 사고라도 칠 것 같은 비장한 각오를 하고 달려들 기세로 걸어가더니, 무릎을 꿇자 두 사람을 보고있던 사람들은 놀랄 수 밖에 없었다. 아리는 고개를 떨군 채 가만히 앉아있었고, 류만 고개를 들어 이원장을 올려다보았다. 그리고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낯선 단어가 목구멍에 걸린 듯 나오지 않아 침을 몇 번 삼킨 뒤에야 부를 수 있었다.
“아버지…….”
목이 메었다.
“…….”
아버지라고 불렀을 때 대답이 없는 걸 아는 건 너무나 슬픈 일이었다. 이원장은 역시 대답이 없었다.
“나도… 아버지 아들이잖아요. 나도. 아버지 아들이예요. 아들이라구요. 아들.”
아들을 강조하며 여러번 힘주어 말했다. 술에 취해 중얼거리는 것처럼 보이지만, 류는 진심을 모두 꺼내고 있었다.
“나 안 이쁜 거 알아. 아버지가 나 안 이뻐하는 거 너무 잘 안다구요. 아버지가 사랑했던 사람은 우리 엄마가 아니었으니까. 이해한다구요. 그래도 난 아버지 아들이잖아요. 저도 좀 봐주시라구요. 형은 새어머니 있잖아요. 난 우리 엄마 없잖아….”
예전 같았으면 호되게 꾸짖으며 일어나라고 언성을 높일 류의 아버지인데, 오늘은 모든 사람들이 지켜보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류의 말을 들어주고 있었다. 귀를 기울여.
류의 슬픈 눈빛과 슬픈 말투가 이원장의 가슴을 흔들어 놓고 있었다.
“형은 어머니도 있고, 아버지도 있고. 다 가졌는데….”
결국 류의 눈에서 굵은 눈물이 볼을 타고 흘러내렸다.
사랑해달라고, 사탕달라고 떼쓰는 어린애처럼 흐느끼며 울먹거리다, 펑펑 터져버릴 울음폭탄을 참으려고 애썼다. 류의 아버지는 그렇게 울고 있는 류에게 눈높이를 맞추어 앉았다.
“미안하다…….”
류의 어깨를 감싸 안아 토닥여주며 그렇게 몇 번이고 말했다. 처음으로 인자한 얼굴을 하고 부드러운 표정을 지으며 류에게 말해주었다. 미안하다고.
옆에서 듣고 있던 아리도 이원장의 따뜻한 목소리에 안심이 되어 눈물이 차올랐다.
뒤에서 이를 지켜보고 있던 지혁이 천천히 박수를 쳤다. 따라서 유신과 순간이 박수를 쳤고, 류와 류의 아버지 화해로 훈훈해진 파티장에 모인 손님들 모두가 크게 박수를 쳐주었다.
형을 가장 멋지게 이기는 방법은 아버지와 화해하는 것 뿐이었다. 이를 절실히 알게 된 류였다. 아버지한테 용서를 받는 것이 인준에 대한 최고의 복수였던 것이었다.
.
.
다음 날 아침.
“아리 너 이리 안 와?!”
“아앗! 다녀오겠습니다!”
아리가 신발을 구겨 신으며 집을 도망치듯 뛰쳐나왔다. 뒤에선 무시무시한 엄마의 목소리와 함께 국자가 아리를 따라오고 있었다.
엄마가 따라올까 급한 마음에 머리도 제대로 묶지 못하고 산발을 하고는 뒤도 돌아보지 않고 뛰는 아리가 큰 목소리로 동네가 떠나가라 외쳤다.
“엄마! 고정하시구요! 아부지 국 떠드려야죠! 죄송해요!”
입에 식빵을 문 동생 강이 국자를 들고 아리를 따라나가려는 엄마를 뒤에서 붙들었다.
“최아리!”
엄마가 슬리퍼를 신고 밖으로 나가려는 걸 간신히 막은 강이 아리를 대신해 화를 풀어준다. 영락없는 애교스런 막내둥이 남동생이다.
“엄마, 화내면 주름살 많이 생겨. 들어가~”
아들의 애교에 엄마가 긴 한숨을 내쉬었다.
“어휴. 학교갔다오면 혼 내줘야지.”
“에이. 우리 맘, 또 왜 이러셔요. 마음 넓으면서.”
“다 큰 처녀가 매일 술이 떡이 되서 들어오는데 엄마가 화 안나게 생겼어?”
“에잉. 그래도 봐줘요. 누나가 임무수행 잘 하고 있잖아.”
막내둥이 아들 필사애교로 엄마의 기분을 풀어주었다.
강이 식빵을 손에 든 채 내려놓은 가방을 어깨에 둘러멨다.
“저 학교 갔다올께요!”
“잠깐! 강아, 요즘에 왜 밥을 안 먹어. 먹고 가. 식빵 이리 내.”
운동화를 천천히 신는 강을 엄마가 붙잡았다.
“지각해. 빵으로도 아침 충분하구.”
“요즘 얼굴도 푸석푸석하고. 아침을 어떻게 빵으로 떼워. 딱 한숟갈만 먹고 가!”
“아, 괜찮아요. 나 건강해. 이 근육 봐. 엄마, 다 지켜줄께.”
강의 기특한 말에 엄마가 또 한번 감동을 받았다.
“아이구, 우리 아들. 요즘은 사고도 안치고 대견해. 그럼 잘 다녀와. 차 조심하구. 응?”
강이 엉덩이를 툭툭 쳐주며 말했다.
“네!”
강에게 다정스레 손을 흔들어주는 엄마다. 아까 아리가 나갈 때와는 정 반대다. 그렇게 아리네 집은 시끌벅적한 아침을 맞이하다가도, 아리와 강이 빠져나가면 금세 조용해진다.
다행스럽게도 학교로 초고속 전력질주를 해 정문을 통과한 아리는 몇분 사이로 지각을 면했다. 달리기에 모두 힘을 소진해 헉헉 거리며 자리에 살짝 주저 앉은 아리 앞으로 BM애들이 지나갔다.
헉. 열심히 뛴 자는 이리도 숨을 거칠게 몰아쉬며 호흡곤란인 처지에 있는 반면, 이와는 대조적으로 너무나 여유만만한 BM을 보니 아리는 헉 소리가 저절로 나왔다. 지각임에도 불구하고, BM이 등교한다는데 막을 자가 누구랴. 무사통과인 것이다.
“뭐하냐. 일어나. 비엠은 그렇게 주저앉아있지 않아.”
코를 만지며 쑥쓰러운 듯 말하는 지혁이 괜히 시선을 다른 곳을 보며 아리에게 말했다.
지나가며 스치듯 말하는 지혁의 말에, 정확히 말하자면 ‘BM’이라는 소리에 아리의 눈은 번쩍 떠졌다. 저절로 몸이 붕 떴다.
“응? 비-엠?”
앞서 걸어가고 있는 4명에게 달려가 몇 번씩 되물었다.
“응? 응?”
어제 마신 술이 결코 독이 아닌 약이 되어 돌아왔다. 절망하여 마신 술이, 환희의 술로 돌아왔으니 아리는 더할나위없이 기뻤다.
류도, 순간도, 유신도 인정한 것이었다. 아리를 BM으로, 친구로 맞이하기로 이들이 인정했다. 쓰린 속에 밥도 못먹고 발바닥에 땀이 나도록 학교로 뛰어 온 보람이 있었다.
“우린 약속은 잘 지켜.”
류가 말했다. 이어 유신도 말했다.
“축하해, 친구.”
두 손바닥을 쫙 펴서 3번 박수를 치며 웃는 유신이 아리를 기분좋게 만들었다.
“약속은 약속이지. 뒤로 구르던 앞으로 구르던 류가 아버지랑 화해하는 걸 일주일만에 성공시켰으니. 우리도 네 조건을 받아들인거야. 아, 그리고 불굴의 여자가 BM에 들어오는 것도 재밌을 것 같고.”
순간도 예쁜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4명의 녀석들이 자리에 멈추어 돌아가며 말을 건네었고, 마지막 지혁이 말 할 차례였다. 주머니에 한 쪽 손을 넣고 있다 헛기침을 두어번 한 뒤 아리를 똑바로 보며 말했다.
“밥먹자.”
이로써 아리는 완벽히 BM 네명이 인정한 첫 멤버가 되었다. 마지막 한마디에 아리는 지혁의 얼굴에 뽀뽀라도 진하게 해주고 싶었다.
“꺄!” 소리를 내며 두 손으로 입을 가리며 믿기지 않는 듯이 BM애들을 쳐다보다 옆에 있는 지혁을 껴안았다.
“안으라고는 안 했어!”
갑자기 안긴 아리 때문에 당황한 지혁이 말을 하지만, 지금 아리의 귀엔 아무런 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축하 빵빠레 소리와 종소리가 귓가에 맴돌 뿐이었다. 지혁이 밀어내려고 하자, 뒤에서 손가락 두개로 눈을 가리고 보던 유신이 소리없이 입을 벙긋거렸다.
‘친-구.’
그래. 친구다. 첫 신고식이라 생각해야지. 좋아 어쩔 줄 몰라하는 아리를 냉정하게 떨쳐버릴 수는 없었다. 녀석들은 왠지 모르게 흐뭇했다. 살짝 부는 바람에 아리의 머리가 날리며 향기로운 냄새가 지혁의 코끝을 찡하게 만들었다.
“친구야!”
아리는 지혁 말고도 BM애들을 모두 껴안아주었다. 오늘같이 좋은 날 하늘을 슈퍼맨처럼 하루종일 날아다니고 싶은 심정이었다.
네 남자와 아리, 아니 BM 5명은 모두 학교 레스토랑으로 향했다. 학교 레스토랑은 아침에 아침식사를 못한 귀빈학생들을 위한 공간이었다. 상류층에 속해도 자격이 갖추어진 학생들만이 식사를 할 수 있는 곳이었다. 이런 레스토랑이 있는 줄도 몰랐던 아리는 입이 쩍 벌어졌다.
“우와. 학교에 이런 곳도 있었네.”
친구가 없으니 학교에 어떤 곳이 있는지, 학교 건물 소개도 받지 못한 아리였다.
“내가 학교구경 시켜줄게.”
유신의 말에 아리가 또 한번 감탄사를 내질렀다. 아리가 옆에 있으면 옆의 사람까지 저절로 힘차게 만드는 마력을 가지고 있다. 유신도 덩달아 입이 찢어져라 웃어제꼈다.
5명이 한자리에 앉았다. 바로 식사가 나오고, 물을 마시려고 손을 뻗은 아리와 똑같이 류가 다친 오른쪽 손을 뻗었다. 류의 다친 오른쪽 손은 말끔하게 치료가 되어있었다. 손을 감싼 하얀 붕대에선 류의 아버지 사랑을 팍팍 느낄 수 있었다.
“어? 아버지가 치료해주신 거야?”
류가 그냥 멋쩍게 씨익 웃자, 아리가 장난끼 가득한 눈빛으로 말했다.
“자랑하는 거지? 그래서 일부러 다친 손 쓰는 거지?”
성한 왼손을 두고 다친 손을 움직인다는 건 그만큼 류가 자랑하고 싶다는 것이었다. 처음으로 아버지께 받은 치료이니 당연했다.
“자랑하는 거 아니야!”
“자랑하는 거 맞구만!”
“아니다, 나 오른손잡이라 그래. 그렇지? 맞지?”
류가 BM애들에게 도움을 요청하지만, 모두 피식피식 웃기만 했다. 류는 옆에 있는 모닝빵을 집어먹으며 괜히 딴 곳으로 얼굴을 돌렸다. 그래도 그의 얼굴에선 밝은 미소가 떠나질 않았다.
“잠깐!”
물을 마시려는 아리를 제지하는 유신이 손으로 막았다.
“이거 먼저 먹어야 돼.”
준비해 온 건지, 유신이 아기자기한 예쁜 명품 컵을 내밀었다.
“뭐야? 컵 되게 이쁘다.”
“그거 비싼거야. 입만 대.”
“뭐어? 어떻게 입만 대?”
“아! 손도 대. 손하고 입만 대.”
황당한 웃음이 났다. 깔끔쟁이 한유신에게 이런 배려란 아주아주 큰 것이었다. 그리고 아무한테나 돌아가는 기회가 절대 아니었다. 코코아를 준비한 유신이 따뜻한 코코아를 예쁜 컵에 쪼르르르 따라주었다. 보기만 해도 달짝지근한 것이 맛있게 보이는 코코아다.
“날 위해 준비한 거야?”
“친구 된 기념으로 아침에 만든 거야. 최고 맛이야!”
자기가 탄 코코아를 최고라고 엄지손가락을 들어보이는 유신이 오늘따라 유난히 귀엽게 느껴진다. 부지런하기도 하지.
“얘는 이거 친구한테만 타주니까, 아주 큰 의미를 담고 있는 거야.”
순간이의 말에 의하면, 유신은 절대 다른 사람한테는 이런 친절을 베풀지 않는다고 했다. 자기 컵에 손을 대는 것도 싫어하고 입을 대는 건 아주 경악한다고 한다. 아예 컵을 깨트려 버린다고 한다. 그런 유신이 이쁜 컵을 지정해준다는 것은 그만큼 아리를 친구로 생각했다는 것이었다. 유신이 상자바구니엔 지혁의 컵, 류의 컵, 순간이의 컵이 있고, 이번에 새로이 아리의 컵이 자리를 잡았다.
[ 최 아 리 ]
새로 만든 명품 컵엔 아리의 이름이 깊게 새겨져 있었다.
“오- 고마워! 원샷할께!”
한번에 코코아를 들이키려는 아리를 유신이 또 한번 막았다.
“아냐! 원샷하면 안돼. 음미. 음미해야 돼. 내가 직접 만든거니까.”
고개를 끄덕이고 유신의 말대로 천천히 코코아향을 음미하며 홀짝 홀짝 마시기 시작했다. 정말로 단숨에 마셔버리면 음미하지 못했을 유신의 사랑이 담긴 코코아를 느낄 수 있었다.
“어때? 맛 최고지?”
“응! 최고! 최고!”
“나 코코아 말고도 티도 엄청 맛나게 만들어.”
유신이 슬쩍 자랑하며 칭찬받으려고 눈을 반짝거리고 있을 때, 순간은 지혁과 류를 보며 말했다.
“내 생일파티 할 때, 아리 소개하는 게 어때?”
“그게 좋겠다.”
“딱 좋네.”
지혁과 류는 빨리 알아듣고 동의를 한 반면, 유신과 아리는 ‘응? 뭐라고’를 되풀이했다.
이해하지 못한 두 사람에게 순간이 천천히 말했다.
“토요일 날 우리 비엠에 들어오게 된 아리 환영 파티를 내 생일파티랑 같이 겸사겸사 하는 거야. 어때? 난 상관없어. 파티 이유가 많으면 많을 수록 난 환영이지.”
파티광인 순간의 얼굴은 밝았다.
“좋아!”
[19]
지혁과 류, 순간과 유신이와 함께 아침식사를 하고 있는 아리를 보며 뒤에서 이를 갈고 있는 건 다름아닌 SS클럽 이세아와 윤나비였다.
“아, 혈압올라.”
이세아가 뒷목을 부여잡으며 말했다.
“쟤가 어떻게 지혁이랑 애들이랑 같이 있는거지?”
“그러게. 뭐야, 정말. 세아야, 이대로 가만 둘꺼야?”
“가만히 못 두지.”
“그럼 어떻게 할껀데?”
“그걸 나한테 물어보면 어떡해! 나도 모르지. 저렇게 BM애들이랑 아침먹는 거 보면 몰라? 우리가 건드릴 수 없게 된 거잖아. 그러니까 혈압이 오르는 거구!”
세아가 짜증을 나비에게 퍼부었다.
“왜 짜증을..”
“짜증 안나게 생겼어? 이제까지 BM애들이랑 어울릴 수 있는 애는 없었어! 근데 갑자기 전학 온 애가, 그것도 여자애가! BM애들이랑 있는데 내가 짜증이 안나게 생겼냐구!”
머리끝에서부터 발끝까지 분노로 가득찬 세아가 아리를 보며 입술을 깨물었다. 빨간 입술에선 조금만 더 깨물면 피가 나올 정도였다. 그 정도로 분한가보다. 여자의 질투심은 대단했다.
이들의 모습을 보고 있던 또 한 사람이 있었으니, 바로 정규식이었다. 항상 지혁을 주시하고 있던 찰나 좋은 먹이감이 생겼다고 생각이 들어 입맛을 다시고 있었다.
“강지혁, 지금 아주 좋을 때야.”
정규식은 비열한 미소가 가득 담긴 얼굴로 아리를 쳐다보았다.
아리까지 5명이 된 BM이 아침식사를 마치고 교실로 들어가는 내내 지나가는 학생들의 부러운 시선은 끊이질 않았다. 학교에서 가장 빛나는 왕자들과 함께 다니니 여학생들의 부러움 반 시샘 반을 받는 건 당연한 일이었다. 하지만, 이런 시선을 두려워 할 아리가 결코 아니었다. 누가 자신을 쳐다보는지 관심도 없을뿐더러, 누가 자신을 보고 있는지도 몰랐다. 오로지 궁금한 걸 묻느라 정신없었다.
“나 너희들한테 꼭 물어보고 싶었던 게 있었어. 아주 궁금했던 거. 꼭 대답해줘.”
“뭔데? 물어봐.”
“BM이 뭐야?”
가장 궁금했던 것이었다. ‘BM’이라고 불리는 건 아는데, BM이 무엇일까. 무슨 뜻일까. 친구가 없었으니 이제까지 알려주는 사람이 없었다. 처음으로 친구가 된 BM에게 직접 물어보려고 질문을 아껴두었었다. 오늘에서야 정확한 답을 들을 수 있었다.
유신이 혀까지 굴리며 대답해 주었다.
“Brave Man. 멋지지?”
“좋은 뜻이네? 용감한 사람!”
아리의 입에서 정확한 뜻이 나오자, 지혁은 피식 웃으며 말했다.
“영 바보는 아니네. 머리 나쁜 돌탱인 줄 알았더니.”
“야아- 나 머리 좋아! 이쯤 영어야 다 알아듣지. 내가 니들보다…”
니들보다 두 살 많다! 하마터면 이 말이 툭 튀어 나와 모든 일을 엎을 뻔했다. 아리가 말을 멈추고 입술을 앙 다물었다.
“뭐야. 왜 말을 하다 마냐?”
모두 주목하고 있으니, 아리가 어설프게 하하핫! 웃으며 말했다.
“니들보다 똑똑할 것 같다구! 나 머리 좋아. 이 긴 머리의 파워가 대단해.”
“모르면 바보지!”
으유. 하여간 칭찬을 안 해요. 이쁜 말 해주고 그러면 어디가 덧나나! 아리가 속으로 지혁에게 소리쳤다.
지혁과 유신, 순간이 앞서 걸었고 뒤따라 아리와 류가 걷고 있었다. 류도 그동안 궁금했던 걸 꺼내 물었다.
“나도 궁금한 거 하나 묻자.”
“뭔데?”
“너, 우리 BM에 들고 싶은 진짜 이유가 뭐야?”
질문에 아리가 긴 머리를 한번 쓸어 넘겼다. 비단결같은 긴머리카락이 허리춤에서 찰랑거렸다.
“이유? 이유없어. 그냥. 너희들하고 친구하고 싶어서.”
“그게 이유야? 그게 다야?”
“응. 무슨 거창한 이유가 있어야 되나?”
“그건 아니지.”
아무리 생각해봐도 이유가 없었다. 친구하고 싶은데 이유가 어디 있고, 이유란 게 또 뭔가. 친구면 친군거지. 아리는 자신의 마음 그대로, 진심 그대로 알려주었다. 아리의 대답이 맘에 들었는지 류가 살며시 미소를 머금었다. 그리곤 얼른 입을 열었다.
“어제, 같이…… 빌어준 거… 고맙다.”
흠흠. 헛기침으로 끝을 맺으며 쑥쓰러운지 앞만 보고 있는 류였다. 귀가 빨간 걸 보니, 고맙다는 얘기 한마디 하는 게 쑥스럽긴 정말 쑥쓰러운가보다.
“너가 같이 해주지 않았으면, 평생 그렇게 못했을 거야. 평생……. 아버지랑 화해하지 못했을 꺼구 이렇게 마음이 편할 수도 없었을 꺼구.”
어렵게 입을 열어 말한 류를 보며 아리가 씨익- 편안한 미소를 지었다.
“너 아버지랑 정말 많이 닮았어. 살짝 미소 지을까 말까한 그 웃음담긴 얼굴이. 아주 예뻐.”
대견스러워하며 누나같이 따뜻하게 말해주는 아리가 참 고마운 류였다.
사실, 성공을 할 수 있을지 없을지 몰랐고, 성공하지 못하더라도 아리는 류와 류의 아버지에게 서로는 서로에게 하나뿐인 사랑스러운 가족이라는 걸 알려주고 싶었다. 그렇지 못한 사람들은 아무리 세계적으로 훌륭한 사람일지라 하더라도 불행할테니까. 안타까운 마음에, 아픈 마음에 류와 함께 할 수 있었다. 아리는 그것만으로도 충분히 기뻤다.
“아. 그 이복 형은?”
“오늘 점심 비행기로 뉴욕 가. 아버지가 나 클 때까지 한국에 발도 들여놓지 말라고 했대. 고소해 죽겠어. 큭큭.”
통쾌한 해답은 류의 아버지 손에 있었다. 인준을 뉴욕에 있는 한국병원으로 보낸 것이었다. 서로에게 시간이란 것이 필요했기 때문이다.
아리는 그 말을 듣고 류와 함께 킥킥대며 좋아라 했다. 손바닥을 맞추어 짝짝 박수를 치는 두 사람은 영락없이 철없는 아이들 같다.
#교실
지혁이 교실문을 열고, 하나 둘씩 BM멤버들이 교실 안으로 들어가고 마지막, 아리가 천천히 발을 옮겨 문을 넘어 교실로 들어가자, 환한 빛이 쏟아졌다. 그 환한 빛은 반 아이들이 아리를 쳐다보며 부러워하는 눈빛들이었다. 따갑기도 하고 눈부시기도 하지만 아리는 그 빛을 온전히 받으며 자리에 앉았다. 다행히 곧바로 수학선생님이 날렵하게 앞문을 열고 들어오는 바람에 그 빛은 분산되었다.
아리는 부산스럽게 움직이는 수학선생님을 보자, 아니 정확하게 말하자면 저번에 보았던 쪽지 시험지 뭉탱이를 보자 등에서 식은땀이 주욱- 흘렀다.
‘맙소사.’
올 것이 드디어 오는 구나. 멀리 앉아있어도 빨간색으로 채점이 되어 있는 쪽지 시험지를 보는 순간 눈 앞이 캄캄해졌다. 시험은 못봤지만(손도 못대었지만) 시험과 시험 점수에 관해선 아주 예민한 아리였다.
“자, 이거 저번에 본 수학시험 점수 매긴 거니까, 자기 이름 확인하고 찾아가. 뒤로 넘겨.”
시험지를 네 갈래로 나누어 앞에 앉아있는 학생에게 주었다.
“이 점수 10점 기준으로 내신성적에 반영할 꺼니까 그렇게 알고. 저번에 시험 못 본 지혁이, 유신이, 순간이, 류는 안 봐도 성적 좋은 거 아니까 걱정은 안 해. 그래도 시험은 봐야돼. 재시험 봐야 될 애랑 따로 같이 보면 되겠고.”
수학선생님이 말을 멈추고 손에 든 시험지 한 장을 가만히 쳐다보다 무테 안경을 한번 매만졌다. 그리곤 아이들을 응시한 채 카랑카랑한 목소리로 물었다.
“그런데 이 반에 ‘최아리’라는 애가 누구니? 그 학생 있으면 어디 손 좀 들어봐. 얼굴 좀 보자.”
아리는 잠자코 가만히 있었다. 못들은 척 가만히.
“최아리. 창피한 줄은 아나보네. 손도 못들고. 수학하고 담 쌓기로 했니? 포기한거야?”
얌체고양이처럼 생긴 여선생님은 참 활기찬 목소리로 아리의 수학점수를 공개하고 시험지를 들어보였다.
“0점이다.”
팔랑팔랑 백지가 아리의 눈 앞에 그리고 반 아이들 모두의 눈에 들어왔다.
아리는 고개를 푸-욱 숙이고 말았다. 오. 신이시여. 왜 하필 기쁘고 행복한 날 불행을 함께 주시옵니까! 지혁은 0점이라고 빨갛게 크게 적혀있는 아리의 시험지를 보고 눈썹을 무섭게 치켜 올렸다. 그의 고개는 비스듬히 틀어 아리를 향했다. 눈이 마주친 두 사람. 아리는 서둘러 얼굴을 돌려버렸다.
뭐! 왜 째려보는 건데? 흥!
수학시간이 끝나고 지혁은 아리에게 다가왔다.
‘헉!’
수업시간 내내 옆에서 뜨거운 눈길을 보내더니, 결국 몸소 행차하셨다. 아리 옆으로 걸어왔다고 하더라도 몇 발자국 안되는 거리지만 말이다.
“최아리.”
왜 목소리를 깔고 잘생긴 얼굴을 찡그려 트리고 그러느냐!
“따라나와.”
“어딜.”
‘얘가 왜 화를 내고 그러는 것이야?’
지혁이 카리스마 눈빛을 쏘니, 아리는 속으로 ‘으이그!’를 외치며 앞서 걷는 녀석을 뒤 따라갔다. 뒤에선 류와 순간, 유신이 잘 갔다 오라고 손까지 흔들어준다.
지혁을 따라 간 곳은 예절실! 문 앞에 멀뚱멀뚱 서있자 지혁이 문을 열고 들어오라는 고개짓을 보냈다.
‘뭐야? 여기는 왜?’
아리는 궁금증이 가득한 눈으로 예절실을 들어가 안을 휘익- 둘러보았다. 깔끔하고 정돈되어 있는 굉장히 편안한 공간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조용한 예절실엔 둘 뿐이었다. 드르륵, 쾅. 소리나게 문을 닫은 지혁이 아리에게 고개를 휘익- 돌렸다. 새우눈을 하고 말이다! 그리고 쉴새없이 외쳤다.
“넌 우리 BM의 수치야!”
띵-!!!
땡-!!!
BM에 든지 몇 시간이나 지났다고 이런 소릴 듣나! 아리가 수치라는 단어에 발끈했다.
“야!!”
아리도 성격이 있는지라 소리를 꽥 질렀다. 먼저 큰 소리치는 것이 왕이다! 목소리 큰 자가 이긴다는 말도 있지 않은가. 어떤 일에서나 떳떳하게! 당당하게! 지혁이 화통한 그녀의 음성에 움찔했다. 하지만, 이 녀석도 만만치 않다. 곧바로 눈을 크게 뜨고 똑같이 소리쳤다.
“뭐!! 할 말이 나와? 지금 소리가 나와? 할 말이 없을 걸로 생각되는데 아니, 없어야 정상이지!”
“내가 왜 수치야! 너 혹시 내가 수학 빵점 맞아서 이러는 거야?”
“그래! 대체. 대체 0점이라니. 창피해! 수치야!”
그래도 지혁은 이젠 아리가 친구라고 생각되는 모양이다. 자기가 창피하다고 소리를 꽥꽥 지르고 있는 걸 보니.
“내가 빵점 맞았지, 너가 빵점 맞았어? 나도 빵점 맞아서 창피한 거 알아. 그러니까 건드리지마! 이런 선은 지켜줘!”
“지키긴 뭘 지켜! 우리 BM하고 어울리려면 성적도 좋아야 돼. 머리가 그렇게 나빠?”
“어머어머! 얘! 나 머리 안 나빠. 유전적으로 머리 좋아! 아이큐도 높아! 내가 공부를 안해서 그렇지 한번 하면 잘해. 잘한댔어! 우리 옛날 담임이! 그리고 수학 좀 못 할 수도 있고 못 풀 수도 있지! 그런 걸로 왜 사람을 기분 나쁘게 해? BM의 수치라니 말도 안돼! 너희가 얼마나 좋은 성적인지는 모르겠다만. 잠깐, 그럼 넌 몇 점인데?”
아리의 눈엔 매일 노는 걸로 보이는 지혁이 공부를 하면 얼마나 잘할까 궁금해졌다. 아까 수학선생님 말로면 잘하는 것 같은데…
“백점. 놀 땐 놀아도 점수는 유지하고 놀아.”
허거걱. 백점이란 말에 더 이상 무슨 말을 하리오. 괜히 물어봤다.
“이상한 놈!”
수학 0점 맞은 것도 분한데, 지혁이한테 자존심 상하는 잔소리까지 들어야 하다니. 강지혁하고 친구되기 정말 정말 힘들다. 이미 졸업한 마당에 공부까지 해야 된다니. 서러움과 창피함에 얼굴을 못 들 판이지만! 그래도 결코 기죽지 않는 아리다. 이미 0점 맞은 사람이 무엇이 무서우랴. 그 다음은 배짱이야. 다 덤벼!
“친구가 못 풀고 그랬으면 안됐다 생각하고 위로하는 게 친구지! 너처럼 망신을 주는 친구가 어딨어? 응?”
정말 다행인 건 교실에서 이런 상황이 벌어지지 않았다는 거다. 둘만의 비밀처럼 둘이서 투닥거리니 무슨 말을 못하랴. 그리고 아리가 창피함을 무릅쓰고 이렇게 땡깡을 놓을 수 있는 것도, 지혁이 아리의 친오빠처럼 0점짜리 점수라고 꾸짖을 수 있는 건, 두 사람이 알게 모르게 서로에게 마음을 터놓았다는 것이었다.
“와. 대단하다. 아주!”
지혁이 박수를 치며 반어법을 써 비꼬듯 말했다.
아리는 입술을 퉁 내밀고 지혁을 올려다보았다.
“너가 우리 BM이 되려면 간단한 테스트를 거쳐야 겠다. 이렇게 무식한 널 BM에 들어오게 하는 건 문제가 있지 싶다.”
“뭐-뭐어?! 테스트으? 문제?”
“그래.”
이게 왠 마른 하늘에 날벼락! 겨우 BM이 되었는데. 어제 일로 깔끔하게 친구가 되었는데 이런 태클이 들어오다니!
“그런 게 어딨어. 한번 BM이면 영원한 BM이야! 테스트 조건은 없었어. BM자격조건에 미달이어도 이미 너희들이 인정했으니까 나도 BM이야. Brave Man!”
“난 무식한 친구는 딱 질색이야. 무식한데다 노력까지 하지 않는 건 더더욱 질색이고! 내가 무식한 친구 데리고 다닐 만큼 맘 좋은 놈 아니란 거 알 거야. 난 분명히 말했어. 테스트를 받고 안 받고는 너가 결정할 일이지만 받지 않는다면 파티에서 널 소개하지 않을 꺼다.”
하늘이 노랗다는 말이, 눈앞이 캄캄하다는 말이, 머리 위에 별이 떠다닌 다는 말이, 딱 이럴 때 하는 말 같다.
“난 너가 말했듯 0점짜리를 위로해주고 공부를 못해도 BM에 끼어주는 일 따위는 하지 않을 꺼다. 난 그런 착한 친구가 아니거든.”
“못됐어! 쫌생이!”
“너 하나로 우리 BM이 무식탱이 취급받는 건 싫어. 절대로.”
하나같이 바른 말만 하니, 아리가 뭐라고 받아칠 말이 없다. 무식하지 않아! 라고 몇 번을 말해보아도 이미 결과는 0점인 수학시험지가 말해주고 있으니 아리는 입을 굳게 다물 수 밖에 없었다. 그런데, 그 때 지혁의 쓸쓸한 표정이랄까. 굉장히 안타까운 표정이 아리의 눈에 얼핏 스쳐지나갔다.
“난 누구한테든 우습게 보이는 건 딱 질색이야.”
아리에게 하는 말이 아니라, 꼭 지혁이 자기 자신에게 하는 말처럼 들렸다. 이제껏 그렇게 마음을 잡고 살아온 지혁이었다. 누구도 자신을 함부로 건드릴 수 없게끔 노력을 했던 것이다. 아리가 그런 지혁을 보고 입을 열었다.
“알았어! 알았다구. 테스트, 어떻게 하면 되는데? BM에 들어가려면 또 어떤 관문이 남았습니까, 강지혁군!”
지혁이 이제야 한쪽 입꼬리를 말아올리며 씨익- 웃었다. 말이 통하는 구나?
“근데. 갑자기 수학을 100점 맞아라. 이런 터무니없는 테스트면 나 진짜 못해. 미리 말해두지만 나 수학 정말 못해. 진짜. 옛날부터 수학하고 담쌓던 나야. 그러니까 그런 건 빼줘. 그건 하루아침에 로또 맞을 확률하고 거의 맞먹어.”
한발자국 물러섰지만, 완전 물러서진 않고 지혁의 테스트를 받아들인 아리였다.
“어디 테스트가 뭔지나 들려줘봐. 뭐야?”
[20]
지혁은 혼자 사용하는 개인락커룸에 아리를 데리고 갔다.
“이 학교는 정말 좋다. 내가 모르는 곳이 너무 많아.”
지혁은 자신의 삐까뻔쩍한 사물함 속에서 문제집 한권을 빼들었다. 순간, 광채가 번쩍번쩍 났다.
“테스트는 이거다.”
빽빽하고 두꺼운 사전두께의 문제집을 내미는 지혁의 팔이 대단하다고 느낄 정도로 무거운 물건이었다.
“이걸 뭐, 어떻게 하라는 건지. 난 잘…”
“풀어. 내가 정해주는 부분을 풀어서 검사맡아. 풀이도 해답도 없어. 여기서 30점만 넘는 다면 통과야.”
“30점?”
아리는 얼굴에 화색이 돌았다. 비록 지금 받아든 문제집에 해답과 풀이집이 없지만, 서점에 가서 똑같은 문제집을 사면 그 뒤에 답이 있다. 그 답을 이용해 맞추면 된다! 그러므로 30점은 문제없다! 고 생각하니 문제는 금방 풀렸다.
‘역시 난 똑똑해!’
금세 얼굴빛이 환해졌다. 참으로 현명한 생각이 번쩍 들었구나 자부했는데, 그런 아리의 환한 빛을 단번에 어둡게 만드는 것이 있었으니, 바로 지혁의 말이었다.
“좋아할거 없어. 시중에 파는 문제집 아니니까. 어디서 답을 구할 얕은 생각은 하지마.”
그렇다. 이 문제집은 지혁이 직접 만든 것이었다. 그러니까, 정확히 말하자면 숫자들만 가득한 강지혁만이 알고 있는 답이 없는 문제집이었던 것이다.
“30점 넘으면 파티에서 보자구.”
두꺼운 문제집을 아리의 손에 쥐어주었다.
락커룸을 나가려는 지혁을 얼른 붙잡았다. 아리가 지혁의 팔을 잡고 눈을 맞추었다.
“넘길 바래?”
“뭐?”
“내가 진짜 30점 넘길 바래?”
아리의 눈빛은 진지했다. 지혁의 의견을 듣고 싶었다. 이 대답은 아리에게 있어서 아주 중요한 대답이었다. 진지함에 지혁이 당황한 듯 얼떨떨한 표정을 짓다 피식 웃음을 흘렸다.
“당연한 거 아니겠냐. 0점짜리가 30점 넘는 것 좀 보여줘봐. 재밌을 것 같은데. 바보가 아니란 걸 보여주기 위해서라도 넘길 바란다. 꼭.”
말을 하고 룸을 나가는 지혁을 오도카니 바라보던 아리가 두 주먹을 불끈 쥐었다.
“한다! 강지혁! 나 한다! 같이 가!”
해볼꺼다.
아리와 지혁이 교실로 들어가자, 아이들의 지대한 관심은 또 한번 쏟아졌다. 모두 주목하고 온갖 스포트라이트를 비추며 바라보고 있지만, 정작 직접 다가와 ‘너희 무슨 얘기했니?’ 라던가, ‘너희 무슨 사이니?’라고 묻는 아이들이 없었다. 눈치를 슬금슬금보며 아리를 훔쳐보는 아이들이 거의 다였다. 이런 상황이 숨막힐 것 같지만, 아리는 더 답답한 문제가 있었으니 이런 문제는 문제꺼리도 아니었다.
책상에 앉아 지혁이 준 문제집을 펼쳤다. 갑자기 숙제가 쏟아지니 머리가 지끈거렸다. 숫자들이 눈 앞에서 춤을 추고 있으니 도통 머리가 아파 책상에 앉아있을 수가 없었다.
말끔하게 세수를 하고 돌아와야 겠다 싶어, 문제집을 덮고 학교 안 세면실로 향했다.
이 학교는 세면실과 화장실이 분리되어 있었다.
“푸우우.”
차가운 물이 얼굴에 닿으니 이제야 숨통이 트인다.
세수를 마치고 얼굴을 들어 거울을 보는데, 낯익은 얼굴들이 아리의 맑은 시야로 들어왔다.
“귀신인 줄 알고 깜짝 놀랬네.”
정말이다. 공포영화에서의 한 장면을 본 것 같아 간담이 서늘했다. 턱을 내리고 비열하고 웃고 있는 이세아는 공포 그 자체였다.
“너희들 나 좋아하니? 왜 맨날 내 뒤만 졸졸 따라다녀?”
아리가 손에 물기를 세아를 향해 탁탁 털며 말했다.
SS클럽 4명의 무리들은 똑같이 허리춤에 손을 얹고 아리를 노려보았다.
“너! 우리 지혁이랑 애들이랑 같이 시험보려구, 일부러 시험 빵점 맞은 거지?”
띠옹……!!
이세아양, 상상력이 그렇게 딸립니까. 그녀의 유치한 상상력에 두 손 두 발 다 들었다. 아리의 슬픔을 아는 건지 모르는 건지, 철없는 SS클럽은 우르르 몰려와 속을 긁어놓았다.
일부러 0점 맞은 거면 얼마나 좋겠니. 테스트없이 BM이 될 수도 있고. 뭐, 그래도 그렇게 생각해주니 고맙네. 그리 기분 나쁘지 않아.
“빨리 대답해. 너 귀여워 보일라구 괜히 공부 못하는 척 하는 거지! 그런거지!”
세아의 닦달에 이젠 실소가 터진다.
“그 속셈 다 보여. 공부 못해서 위로받고 귀여워 보일려는 거야.”
SS클럽 무리들은 맞장구까지 치며 북치고 장구치고 자기네들끼리 말한다. 얘네들. 정말. 바보들 아닐까. 아무렴 공부 못하는 걸로 귀여워 보이고 싶은 사람이 어디 있을까.
“마음대로 생각해. 난 간다.”
“너!”
세면실을 나가려는 아리를 붙잡는 세아의 날카로운 목소리가 뒷목 언저리에 자리 잡았다.
“BM이랑 어떻게 친하게 된거야?”
“분명 구린 속임수가 있었을 거야.”
고개를 떳떳하게 들고 SS클럽애들을 내려다보았다.
“나 BM이야. 그러니까 건드리지마. 이렇게 졸졸 따라 다니는 것도 이젠 용서 못해!”
선전포고다운 무시무시한 아리의 외침에 SS클럽이 움찔했다. 아리에게 당한 일들도 있고, 이젠 무서울 것 없이 든든한 백그라운드까지 있으니.
“너너. 내가 누군지 알아?”
살짝 목소리를 떨며 세아가 말을 건넸다.
“응. 이세아.”
“아니. 이름 말구, 내 정체 말이야. 정체.”
“정체? 처녀귀신아니야?”
아리의 농담에 세아가 파닥파닥 뛰었다.
“난 국회의원 딸이야! 난 물로 보지마!”
아리가 박수를 쳤다. 짝짝짝.
“우리아빠는 태권도장에서 대통령이야. 도장애들한테 최고! 따봉이지. 아니?”
엄지손가락을 들어보이며 당당하게 말하고 세면실을 나서는 아리를 어느 누가 꺾을 쏘냐.
SS클럽도 아리가 나가는 걸 멍하니 바라볼 뿐이었다. 분하지만, 아리를 상대하긴 리스크가 너무도 컸다. 자신들이 당할 것을 알기에 분을 삭힐 수 밖에 없었다.
.
.
학교에서 정규수업을 모두 마치고 집으로 터덜터덜 걸어가는 아리는 오늘따라 구름 한 점 없이 맑은 하늘을 보고 한 숨을 푸욱-푸욱- 내쉬었다.
고등학생으로 돌아가 산다는 것이 정말 쉬운 일이 아니었다. 그리고 BM과 친구가 된다는 것 자체가 골치 아픈 일의 연속이었다. 그걸 알면서도 아리는 기꺼이 몸을 던졌다. 녀석들과 하나가 되기 위해, 친구가 되기 위해 두 팔을 걷어부쳤다.
그런데 조금 힘이 부치는 것이 사실이다. 공부도 해야하고, 지혁이와 친구도 되야 하고. 수학문제집은 보기만 해도 머리가 띵해지고. 힘든 일이 한 두가지가 아니니 말이다.
힘없이 어깨를 늘어뜨리고 “다녀왔습니다”라고 속삭이듯 말하며 집으로 들어오는 아리를 보고 먼저 집에 와있던 강이 물었다.
“누나 왜 그래?”
입술을 삐죽 내밀며 울상을 짓는 누나를 보고 강이 이리저리 살폈다.
“무슨 일 있어? 왜? 뭐야? 무슨 일인데?”
비비탄 날리 듯 줄창 질문을 늘어놓는 강이다.
앉아서 과일을 먹고 있던 율아도 무거운 몸을 일으켜 세웠다.
“언니, 얼굴이 안 좋아요. 속상한 일 있어요?”
“내가…”
“응. 누나가 왜?”
아리가 가방을 바닥에 내려놓고 큰 테이블이 있는 중앙 쪽으로 털썩 주저앉았다. 율아와 강의 시선은 아리를 따라 움직였고, 함께 자리에 둘러앉았다.
“수학을…”
“수학을 뭐? 빨리 말해봐.”
궁금해 죽겠는지, 강이 답답한 교복 셔츠단추를 끌렀다.
“빵점 맞았어.”
창피한 일이지만, 가족이니 모든 걸 털어놓을 수 있다. 강은 그 소리를 듣자마자 두 손으로 얼굴을 감쌌다. 감싼 채로 피식 피식 새어나오는 웃음을 참으려고 노력했다. 그러나 결국 참을 수 없는지 호탕하게 웃음을 터트리고 말았다.
“푸하하! 우리 누나 너무 한다, 진짜. 빵점이라니!”
율아도 웃음을 참아보려고 했지만, 언제나 활기찬 아리가 기죽어 있는 이유가 빵점 맞아서라니 귀여워 저절로 웃음이 나왔다.
“웃지마. 나 창피해.”
“너무 했어, 누나. 그래서 애들한테 망신당해서 그래?”
“애들한테는 망신당하지 않았어. 다행이지. 근데 지혁이 그 놈한테는 엄청 구박 받았어! 막 화를 내는 거야. 빵점 맞아서 우울하고 속상한 사람이 누군데. 위로는 못해줄망정 짜증을 내더라니까. 사람이 살다보면 빵점 맞을 때도 있구. 백점 맞을 때도 있는 거지. 안 그래? 거기다 더 속상한 건 내가 수학테스트를 거쳐야 한다는 거야! 내가 수학을 얼마나 싫어하는데! 수학문제집을 풀고 30점이 넘어야 날 친구로 받아준댄다. 답도 없어, 이 문제집.”
“누나. 걔가 화를 왜 내는 거겠어. 나 같음 귀찮아서라도 누나 테스트하고 그런 짓 안해. 그냥 친구하기 싫다고 잘라버리고 말지. 강지혁이 왜 그러는 거겠어, 잘 생각해봐. 그건 좋은 징조야. 그만큼 누나한테 관심이 있다는 거지. 누날 친구로 생각하니까 빵점 맞은 게 같이 창피한거구. 그래서 화를 내는 거구!”
아리는 귀를 쫑긋 세우고 강의 말을 차근차근 들어보았다.
사실 아리는 고마워 해야 했다. 지혁이 최대한 배려한 것이기 때문이었다. 첨엔 예절실로 데려와 소리를 고래고래 지르고 창피를 주니, ‘나빴어! 왜 사람들 안 보는데서 화를 내는 거야? 이미지 챙기는 거야, 뭐야!’ 할 수도 있었는데. 가만 생각해보니 교실에서 그랬다면 왕 창피를 당하는 건 아리였다. 지혁은 아무도 없는 곳에서 아리가 듣기에도 바른 말만 골라서 했다. 그러니 아리는 지혁에게 고마워 해야 했다. 강의 말대로 이젠 친구로 인정해준 것이나 다름없으니 말이다.
“나도 인우자식이 수학 3점 맞았을 때 열라 쪽팔려서 고개를 못 들었었다니까.”
“그런 걸까?”
“그럼! 그게 다 친구니까. 내 일같으니까 그런 거야. 친구 아니면 0점이던 200점이던 뭔 상관이야.”
“맞아요, 언니.”
포도 한송이를 입에 넣으며 씨를 한 손에 톡 뱉던 율아도 강의 말을 천천히 듣고 있다 고개를 끄덕거리며 옳은 말이라는 듯 거들어주었다.
“저도 미령이가 영어 5점 맞았을 때, 정말 창피하더라구요.”
“원래, 친구가 같이 공부 못하면 쪽팔려.”
“그런데. 너희들은 대체 몇 점을 맞았는데?”
돌연 질문의 화살이 돌아오자 율아와 강은 토끼눈을 하고 잔뜩 긴장했다.
“강이 너부터 말해봐.”
“난 인우보다 점수 높아!”
“그러니까 대충 몇 점?”
“10점정도.”
역시 친동생이다! 피는 못 속인다더니, 뜨거운 남매의 피가 솟구치는 순간이었다. 아리는 베시시 웃고 말았다.
“이제야 기분이 좀 풀린다. 내가 너희들 때문에 웃는다, 정말. 근데! 내 조카가 이 말 다 들었으면 어떡해?”
아리가 율아의 배를 보며 입을 막았다.
“괜찮아요. 지금 쿨쿨 잘꺼예요.”
안심시켜주는 율아의 말이 예쁘다.
“다행이네.”
“언니, 저요. 배가 점점 불러오는 것 같아요. 먹고 또 먹어도 계속 먹고 싶구.”
“애기가 먹고 싶어 하는 거니까, 무조건 많이 먹어야 돼! 알았지? 강아, 냉장고에서 먹을 거 다 꺼내와.”
강은 벌떡 일어나 냉장고를 뒤졌다. 아이스크림부터 시작해 과일까지 몽땅 꺼내 율아 앞으로 대령했다.
“율아야, 많이 먹어. 언니는 수학공부하러 간다!”
“네, 언니 파이팅!”
“누나, 코피 쏟지는 마.”
동생들의 응원을 받으며 아리는 방으로 들어갔다.
교복을 벗고 샤워를 한 뒤 말끔해진 기분으로 책상 앞에 앉았다. 펜을 들고 지혁이 내준 페이지를 찾아 문제를 차근차근 풀어보기 시작했다. 객관식인 건 찍어보기도 하고, 공식을 대입해 문제를 풀어보기도 했다.
아리가 하얗게 날을 새우고 학교를 갔다. 얼굴이 좋을리 없는 아리를 등굣길에서 만난 유신이 걱정스러운 눈빛으로 쳐다보며 말했다.
“내가 도와줄 수도 있는데.”
“정말? 그럼 진작 말하지!”
“근데. 저번에 그… 빈민야채는 어떻게 된거야? 촌스러운 이름을 가진 야채말이야.”
“아! 상추! 고추!”
눈을 반짝이며 아리가 소리쳤다.
“그래, 그것들. 씨 준다고 했잖아.”
“내가 내일 줄께! 그럼 나 도와주는 거야?”
“내가 지혁이 몰래 답을 알려줄게. 이건 몰래해야 되니까 비……”
뒤에서 익숙한 목소리가 들리더니.
“몰래 뭘 한다고.”
갑자기 지혁이 나타났다.
“헉!”
“한유신, 몰래 문제집을 풀어주시려구?”
지혁이 묻자, 유신이 당당하게 대답했다!
“그-래! 아리 얼굴을 봐. 눈가에 주름도 생기고, 푸석푸석 밤새 공사판에서 일하다 온 사람같아.”
“공사판에서 일해도 이 정도는 아닐꺼야.”
“맞아. 맞아. 여자한테 피부가 얼마나 소중한데!”
“맞아. 맞아.”
꿍짝을 맞추며 맞아, 맞아를 연발하는 두 사람을 가만히 보고 있던 지혁이 유신의 말에 유심히 아리의 얼굴을 들여다보았다. 정말, 유신의 말처럼 매끈하고 뽀얗던 얼굴이 피곤에 가득 쌓인 엉망인 얼굴을 하고 있었다.
“너 때문에. 이 문제집 풀다가 막막해서 밤을 꼬박 새웠어. 죽어라 외워서 되는 것도 아니고 정말 힘들다.”
“……”
“풀어보긴 했는데. 정말 모르겠다구!”
“토요일까지야. 문제집을 풀어.”
“인정머리 없는…”
“나랑.”
첫댓글 수학 0점이라.....저도 수학은 진짜 못하는데 0점은 너무 심했어요, 단비님..
백지로 내서...게다가 명문고잔아요~
그래도 나는 84점 3개 틀림...근데.... 문제는 6점짜리 2개 4점짜리 한개ㅜㅜ
지혁이 지금 질투하는 걸까요??^^
어머나!! ㅋㅋ '나랑'이래~
재민서염!!
마지막 "나랑" 끝내줘요~~~!!(^^)
재밌어요><
꺄~~~~~~~~~~~ 나랑이래!!!!!!!!!!! 너무 재밌어요~!
와 ~ 이 소설 최고네요! 완전 드라마 뺨쳐요! 너무 재밌어요~ 아리가 BM에 들어가게 되서 너무 다행이에요! ㅋㅋㅋ
저도 수학 0점 맞은 기억이...ㅠ_ㅠ 너무 슬프져.. 수학 저도 너무 싫어해요! 과목중에서 제일 ㅠㅠ
아리 너무 부러워요! 힘도쎄고, 애들앞에서 막 해볼수도있꼬!! ㅠㅠ 전 애들앞에서 꿈쩍도 못하는데! 아리 너무 부럽다! 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
완전~ㅋㅋ 나랑이라니~!!ㅋㅋㅋ 너무 멋있어요~ㅋㅋ
나랑!!!??
>,,,,,< 잼있슴다 .... 난 수학 넘 좋아해요
>ㅁ< 꺄악 너무 재밌어요 ㅎㅎ지혁이 멋있다
나도 수학은 진짜 못하는데...ㅠㅠㅠㅠ암튼 정말 재밌어요ㅋㅋ
ㅋㅋㅋ 아 나랑.<
아*-_-* 나랑
큭큭, 지혁이 귀여워용!!
이거 드라마로 만들어도 정말 손색이 없을듯 해요 ㅠㅠ 우와 너무 재밌어요!!!
ㅋㅋㅋ ㅇ\재밌아여~~ㅋㅋ
아 웃겨 ㅋㅋ미치겠어요 진짜 ㅋㅋ
너 너무 재밌어 미치겟어요ㅋㅋㅋㅋ너무 재밋고욬ㅋㅋㅋ짱 재밋어♥
"나랑"최고닼ㅋㅋㅋㅋㅋㅋㅋㅋ
재밌어요
나두 같이 풀고싶다!!
-14 편까지 읽었네용.내일 다시 읽어야할듯 ㅠ
"나랑" 이 젤 귀에 담기네용~
꺄악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꺄악 ‘나랑’ 꺅 꺅악
너무 재미있어용
아.. 역시 단비님 소설이야!
재미있게 잘봤어요~
정말 재밌어용~~