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4월 30일 저녁 7시40분, 국회 운영위원회가 조용히 열렸다. 위원회는 각 의원실에 5급 민원비서관 1명씩을 늘리도록 하는 ‘국회의원 수당 등에 대한 법률’ 9조 일부 개정안을 통과시켰다. 4분 만에 이 개정안 하나를 통과시킨 후 운영위는 바로 산회했다. 이 법안은 이날 자정 회기가 끝나는 바람에 본회의를 통과하지 못했지만, 6월 본회의에서 통과될 것으로 보인다.
2010년부터 신설되는 5급 비서관은 5300만원의 연봉과 매년 50만원가량의 공무원 복지포인트를 받는다. 재적 국회의원이 299명이므로 연간 약 177억원의 세비가 더 들어가는 셈이다.
일부 언론과 시민단체들은 “평소엔 싸우기만 하던 與野(여야)가 자기 밥그릇 챙기는 데는 찰떡궁합”이라며 강력하게 비난했다. 이미 국회는 9년 전 연봉 6400만원에 달하는 4급 보좌관을 1명 늘린 바 있다. 9년 전에 비하면 의원 한 사람당 연 1억원이 넘는 인건비가 더 들어가게 된 것이다.
여야가 “일은 안 하면서 세비만 낭비한다”는 비난을 감수하고 보좌진 증원을 강행한 이유는 뭘까. 보좌관은 무슨 일을 하며, 어떤 처우를 받으며, 무엇을 위해 일하고 있을까.
1984년부터 세금으로 봉급 받기 시작
국회 보좌진이 국민 세금으로 봉급을 받기 시작한 것은 ‘국회의원 수당 등에 대한 법률’이 개정된 1984년부터다. 이전까지는 국회의원이 자기 세비로 보좌진을 고용했다. 이 법률 중 제9조가 ‘보조직원’ 즉 보좌진에 대해 규정하고 있다.
1984년 이후 2000년 16대 총선 전까지는 국회의원 1명이 4·5·6·7·9급 각 1명씩 보좌진 5명을 임명할 수 있었다. 1997년 11월 법을 개정, 16대 국회에 들어서 1인당 4급 보좌관 1명을 더 둘 수 있게 됐고, 17대에는 국회의원 수가 273명(16대)에서 299명으로 늘면서 보좌진 수는 현재 인턴을 포함해 2400여 명에 달한다.
‘국회의원 수당 등에 대한 법률’ 제9조에 따르면 현재 국회의원 한 사람당 4급 보좌관 2명, 5급 비서관 1명, 6급 정책비서 1명, 7급 비서 1명, 9급 비서 1명을 둘 수 있다. 4급 2명과 5·6급은 정무와 정책업무를, 7급은 운전기사 겸 비서, 9급은 행정업무를 주로 하는 비서다. 인턴은 2명을 둘 수 있다. 여기서 언급되는 급수는 일반공무원과 같다. 단 별정직 공무원이어서 수당, 연금 등의 혜택은 받을 수 없다.
가장 높은 직책인 보좌관은 4급 21호봉에 해당한다. 연봉은 4급 6400만원, 5급은 5300만원, 6급 3600만원, 7급 3100만원, 9급 2400만원으로 정해져 있다.
일반적으로 4급 보좌관 2명은 4급 1명-5급 1명, 4급 1명-6급 1명 등 두 팀으로 일하는 경우가 많다. 4급 보좌관이 2명으로 늘어난 16대 국회 초기에는 지구당 사무국장을 보좌관으로 등록해 지구당 업무를 보게 하거나, 친지의 이름을 올려놓고 월급만 의원이 받아 활동비로 쓰는 경우도 더러 있었다고 한다. 그러나 최근에는 국회 업무가 워낙 많아 그런 일이 현실적으로 불가능하다고 보좌관들은 입을 모았다.
보좌진 任免(임면)은 4·5급의 경우 국회의장, 6~9급의 경우 국회 사무총장의 승인을 받아야 한다. 그러나 이는 형식에 불과하다. 임면권은 전적으로 국회의원에게 있는 것이나 마찬가지다.
국회의원이 보좌관을 임용하고자 할 때는 임명요청서를 작성해서 구비서류와 함께 국회의장에게 보낸다. 면직할 때도 국회의장에게 보내는 면직요청서 한 장이면 간단하게 면직 처리된다. 국가공무원법 제33조에 해당되지 않으면 임용에 큰 문제는 없다. 단, 보좌관은 공무원이지만 정치활동이 허용된다. 정당법 제1항 1호에서 ‘당원이 될 수 있는 공무원’으로 지정했기 때문이다.
임기 4년 동안 보좌관 10명 이상을 바꾼 의원도
보좌관들의 일터인 국회 의원회관.
임면권이 의원에게 있는 만큼 보좌관을 ‘파리 목숨’에 비유하는 사람도 많다. 임기 4년 동안 보좌관을 10명 이상 바꾼 의원도 있을 정도다. 민주당 이상경 전 의원의 보좌관 등 14년 동안의 보좌관 생활을 접고 현재 ‘좋은보좌관(www.goodstaff.or.kr)’을 운영하고 있는 金鶴英(김학영)씨는 “국회사무처 공무원들처럼 입법고시를 보고 국회에서 일하는 것도 아니고, 어느 날 갑자기 의원이 채용해서 몇 급이니 하는 직책을 받았다가 어느 날 면직요청서라는 종이 한 장에 실업자 신세가 되는 것이 국회 보좌관”이라고 말했다.
국회 사무처 인사계에 요청해 자료를 찾아본 결과, 17대 국회에서 가장 많은 수의 보좌관을 고용했던 의원은 宋永仙(송영선) 당시 한나라당(現 친박연대) 의원인 것으로 나타났다. 송 의원은 4년 동안 16명의 보좌관을 교체했다. 18대에 들어서는 보좌진 6명 전원을 교체했다. 17대에서 송 의원의 보좌관을 지냈던 裵振錫(배진석) 경기개발연구원 연구위원은 “사업을 하겠다거나 다양한 이유로 스스로 나가는 이도 많았고, 다른 의원실에 스카우트돼 가는 이도 있어서 타 의원실에 비해 이동이 많았던 편”이라고 회고했다.
보좌관이 자주 바뀌는 의원실은 보좌관들의 ‘블랙 리스트’로 통한다. 朴炳哲(박병철) 한나라당 보좌진협의회 회장(金在庚 의원실)은 이렇게 말했다.
“물론 보좌관이 실력이 안되면 교체돼야 하는 것이 마땅합니다. 하지만 보좌진을 지나치게 자주 교체하거나, 의원의 성격이 괴팍하면 금방 의원회관에 입소문이 나죠. 보좌관들끼리 정보를 공유합니다. 여야 막론하고 10여 명의 블랙 리스트가 존재하는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그 역시 과거 ‘괴팍한 성질’의 의원을 보좌하다 스스로 나온 경험이 있다.
“처음으로 모신 분이고 여당의 실세와 가까운 분이어서 나름 기대를 하고 들어갔는데, 인간적인 모멸감도 많이 느꼈고 도저히 보좌관 일을 못 할 것 같다는 생각이 들어서 나왔지요. 하지만 그 후 네 분째 의원을 모시고 있는 걸 보면 보좌관 일은 잘 맞는 것 같습니다. 당시 사람을 잘못 만났을 뿐이죠.”
18대 보좌관 ‘구인난’
‘파리목숨’일지언정 보좌관이 되려는 사람은 여전히 많다. 보좌관이 되려면 어떤 과정을 밟게 될까. 국회 홈페이지나 신문·전문지·인터넷 등을 통해 공개채용하는 경우도 가끔 있지만 대부분 ‘인맥’으로 채용된다. 인맥이라고 해서 가까운 사람을 채용하는 것이 아니라, 전문가를 통해 추천받는 경우가 많다.
재선이나 다선의원들은 동고동락한 보좌관이나 정치적 동지들과 계속 같이하는 것이 보통이지만, 문제는 초선의원이다.
18대 초선의원은 134명으로 전체 의원 중 절반 정도나 된다. 이들에겐 지인을 보좌관이나 비서로 취업시켜 달라는 ‘취업청탁’도 많이 들어오지만, 국회 업무가 처음인 초선의원 입장에선 국회 경력이 없는 보좌진만으로 의원실을 꾸릴 수는 없다.
따라서 선거 때 동고동락했던 기존 비서진 2~3명에 기존 보좌관이나 당직자 출신 1~2명을 함께 고용하는 것이 일반적이다. 선배 의원이나 당직자 등을 통해 국회나 법, 관련 분야에 대해 잘 아는 사람을 추천받기도 하고, 6급이나 9급 비서는 정치학 교수들에게 정치학 전공자를 소개받거나 지인의 딸 등을 추천받기도 한다.
서울 한 사립대학의 정치외교학과 교수는 “총선 때마다 정치외교학과를 졸업한 여성을 9급 비서로 추천해 달라는 의원들이 몇 명 있었다”며 “좋은 기회라고 생각해 우수한 학생들을 소개해 준 적이 있다”고 말했다.
보좌관이 의원실을 옮겨다니는 경우도 적지 않다. 과거에는 특정 계파의 의원들이 낙선한 동료 의원의 보좌관을 ‘구제’ 차원에서 채용하는 경우가 꽤 있었지만, 계파의 결속도가 약해지면서 전문성과 경험을 위주로 ‘모셔오기’가 의원실 이동의 주류를 이루고 있다.
특히 18대 국회 초기에는 한나라당의 보좌관들이 다수 청와대나 국책기관 등으로 옮겨가 ‘구인난’이 심각했던 것으로 알려졌다. 5년 이상의 경력을 지닌 보좌관들은 여러 의원에게서 ‘러브콜’을 받기도 했다.
한나라당 秦聖昊(진성호) 의원실의 申德淳(신덕순) 보좌관은 17대에는 朴贊淑(박찬숙) 의원실에서 근무했다. 그는 대학에서 광고홍보를 전공하고, 박찬숙 의원이 문화관광위원회에서 공공디자인과 문화재 보존 등의 이슈를 제기하는 데 많은 역할을 했다. 18대에서 초선으로 국회에 입성한 진 의원은 문광위를 선택한 후 주변의 추천에 따라 신 보좌관을 채용했다. 신 보좌관과의 대화 내용이다.
―한 의원실에서 다른 의원실로 옮기는 사례가 많습니까.
“총선에서 모시던 의원이 낙선하면 초선의원들이 낙선의원의 보좌관을 스카우트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의원들은 어떤 기준으로 보좌진을 스카우트 하나요.
“일단 4년 이상 근무한 경력자를 선호합니다. 대학 전공과 보좌관 이전 경력도 보지만 본인이 속한 위원회 출신 의원의 보좌진을 선호하는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무엇보다 법안 발의와 감사를 하려면 그 분야를 잘 알아야 하니까요.”
―총선 직후가 아닌 평소에도 스카우트가 자주 이뤄집니까.
“도의적인 이유로 임기 중에 다른 의원실의 보좌관을 스카우트해 오는 예는 거의 없습니다. 그러나 제안을 자주 받는 인기 보좌관은 분명히 있는 것 같습니다. 어느 의원실이든 급수와 연봉이 같기 때문에 의원들이 우수한 인재를 데려오고 싶어 하는 것은 당연한 일입니다.”
―그렇다면 여러 의원의 스카우트 대상이 되는 보좌관은 어떤 기준으로 의원을 ‘선택’할 수 있을까요.
“의원의 정치적 성향과 하는 일, 성격이 자신과 맞는지, 그리고 해당 위원회가 자신의 전문성과 연계가 될 수 있을지를 판단하는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4급 보좌관이 2명인데 서열이 있습니까. 혹은 업무를 분리합니까.
“의원실마다 다릅니다. 연령이나 경력이 오래된 분에게 선임보좌관이라는 명칭을 붙이기도 하고, 정무보좌관과 정책보좌관으로 나누기도 합니다. 대부분 4급 2명의 업무는 부딪치지 않도록 완전히 분리됩니다.”
1992년 국회 5급 비서관으로 들어와 朴錫武(박석무)·趙贊衡(조찬형)·裵奇雲(배기운) 의원에 이어 현재 민주당 유선호 의원까지 4명째 보좌하고 있는 奇吉東(기길동) 보좌관의 이야기를 들었다. 기 보좌관은 이전에 보좌했던 3인의 의원이 모두 낙선하는 바람에 계속 의원실을 옮겨야 했다.
―의원이 낙선하면 보좌진은 어떻게 됩니까.
“본인이 보좌관 일을 계속하고 싶어 하는 한 국회에 머무는 것이 보통입니다. 매번 초선의원이 많이 들어오니까 수요와 공급이 적절하게 유지되는 것 같아요. 모시던 의원이 선거에서 낙선해서 몇 달 쉬고 있으면 또 다른 의원실에서 연락이 오기도 하고요. ”
―보좌관은 어떤 사람들이 하는 것이 어울린다고 생각하십니까.
“정치인이나 국정 참여를 꿈꾸는 젊은이라면 해 볼 만한 직업입니다. 정치가 사람들의 손가락질을 받긴 하지만 결국 우리 사회를 이끌어 가는 것은 정치입니다. 보좌관 생활로 세상을 보는 눈이 넓어져 또 다른 직업을 갖게 될 수도 있고요.”
여당은 전문 보좌관과 당 사무처 출신 등 기존 정치권 관련 인물이 많은 반면 야당의 경우 이른바 ‘운동권’ 출신이 적지 않다. 특히 민주당은 10년간의 여당생활로 ‘보좌관 인재 풀’이 어느 정도 형성된 상태지만 민노당과 진보신당 의원의 보좌관은 대학이나 시민단체 등에서 정치·사회운동을 한 경험이 있는 사람이 많다.
민노당 姜基甲(강기갑) 의원실의 박웅두 보좌관은 강 의원과 마찬가지로 농민 출신. 전남 곡성에서 농사를 지으면서 농민회 활동에 참여했으며 강 의원과 전국농민회에서 함께 일했던 인연으로 보좌관이 됐다.
전문직 등 특이한 경력의 보좌관도 늘고 있다. 한나라당 李範觀(이범관) 의원실의 정영호 보좌관과 민노당 李正姬(이정희) 의원실 조수진 보좌관은 변호사다.
‘직업’으로서의 보좌관
보좌관은 국회의원이 행하는 법률 제안·의결, 정부 예산안 심의·확정과 결산 심사, 국정감사 및 조사 업무를 돕는다. 따라서 법적인 지식 외에도 회계, 행정 등 총체적인 지식이 요구된다.
보좌관의 업무는 국내 모든 기관의 모든 자료를 청구, 얻을 수 있다는 것이 매력이다. 국회의원은 국정에 대해 감사와 조사를 할 권리가 있기 때문이다. 기자들이 자료를 얻을 수 있는 곳 역시 의원실이다.
한나라당 陳永(진영) 의원실의 朴容錫(박용석) 보좌관은 “국회 업무에서 가장 매력적인 것은 역시 일반인은 접근조차 할 수 없는 자료를 얻을 수 있다는 것”이라면서 이렇게 말했다.
“국회는 행정부에 대해 자료 요구권을 갖고 있는데, 이는 국회에 우월적인 지위가 있다는 것이지요. 의원실에 그냥 굴러다니는 자료들은 보통 정보가 아닙니다. 기자들이 의원회관 쓰레기통을 뒤진다는 말이 나온 것도 이 때문 아니겠습니까.”
그는 보좌관의 업무가 단순히 의원을 보좌하는 비서업무가 결코 아니라고 설명했다.
“의원이 어떤 위원회에 소속돼 있느냐에 따라 보좌진은 그 분야의 전문가가 돼야 합니다. 그 분야의 전문가가 되지 않으면 의원이 국회에서, 청문회에서, 국감에서 최고 전문가들 앞에서 어떤 이야기를 할 수 있겠습니까. 보좌진이 제대로 된 자료를 만들지 않으면 의원이 활동할 수 있는 범위는 크게 좁아집니다.”
과거 보좌관들의 애환이었던 지역구 업무나 의원의 개인적 업무 등은 많이 줄었다고 그는 말했다.
“과거에는 회기가 열리지 않을 땐 의원 지역구에 농사 지으러 가는 보좌관도 많았다고 들었습니다. 지금은 지구당도 없어졌고 신세대 보좌관이 많아서 분위기가 많이 바뀐 편입니다. 의정활동이 없어 보좌진이 비교적 한가한 시간에는 사람들을 만나기도 하고 자료를 조사하기도 합니다.”
보좌관이 가장 보람을 느낄 때는 본인이 ‘만든’ 법안이 통과될 때다. 박용석 보좌관은 “몇 달에 걸쳐 밤을 새우며 자료를 조사하고 관계자들을 만나고 공청회를 열어 만들어낸 법안이 통과됐을 때, 특히 그 법안이 언론에서 좋은 평가를 받을 때는 정말 세상을 얻은 기분입니다. 내가 나라를 위해서 이런 일을 하고 있구나 라는 생각이 들어요.”
“그래도 그 모든 게 의원의 성과로 평가되지 않느냐”고 질문하니 “의원이 높이 평가받는다는 것은 보좌관이 높이 평가받는 것과 마찬가지”라고 말했다.
한나라당 보좌관들 사이에서 ‘보좌관의 전설’로 불리는 인물이 金炯旿(김형오) 국회의장을 오랫동안 보좌해 온 高成鶴(고성학) 전 보좌관이다. 정치부 기자들 역시 보좌관을 취재한다고 하면 다들 고 보좌관부터 찾는다.
필자가 김형오 의장을 처음 만난 것은 1999년 재선의원(15대)일 때였는데, 고 보좌관은 이미 국회 내에선 유명인이었다. 그때까지 국내에서 심각성이 대두되지 않았던 도·감청 문제를 처음으로 제기한 사람이 김형오 의원인데, 그 기본작업을 고성학 보좌관이 해내 김 의원을 과학기술정보통신위원회의 ‘스타 의원’으로 만든 사람이기 때문이다.
김 의장은 1998년 국정감사에서 도·감청 문제제기로 스타가 된 데 이어 당시 <엿듣는 사람들>이라는 책을 출간했다. 정보기관 등에서 공공연히 이뤄지고 있는 도·감청에 대한 내용을 국내 최초로 파헤친 책인데, 이 책을 실질적으로 만들어낸 사람이 고 보좌관이다.
고 보좌관은 “김대중 정부가 출범한 1998년 국정감사 때 도·감청 문제를 제기했고, 이후 2000년까지 3년 동안 이 주제로 폭넓고 집요하게 문제 제기를 해 왔다”고 설명했다. 그 결과 통신비밀보호법이 만들어졌고, 김형오 의장은 과학기술정보통신위원회에서 10여 년간 활동하며 두드러진 활약을 펼쳤다.
고 전 보좌관은 2006년 도·감청을 다룬 ‘한국의 민주화와 감시권력의 변화’라는 논문으로 숭실대 정외과에서 박사학위를 받았다. 국내 도·감청 분야의 전문가가 된 것이다.
국회에서 20년 가까이 근무하는 보좌관의 경우 의원의 낙선이나 당적 변경에 따라 의원실을 옮겨다닌 경우가 대부분인데, 1992년(14대)부터 김형오 의장만을 17년째 보좌해 온 경력이 특이하다. 지난해 7월 김형오 의원이 국회의장이 되면서 고 보좌관도 국회의장 비서실 정무수석비서관으로 자리를 옮겼다. 이 자리는 1급에 해당한다. 고 정무수석비서관은 “오랜 보좌관 생활 동안 출마 권유도 많이 받았을 텐데 정치를 직접 할 생각이 없느냐”는 질문에 “보좌관 생활을 시작할 때부터 보좌관으로서의 역할에 충실하기로 했다”고 답했다.
“보좌관이라는 직업의 여건이 좋은 것은 아닙니다. 수많은 보좌관이 의원회관에 들어왔다가 소리없이 사라집니다. 하지만 보좌관을 ‘한때 거쳐 가는 직업’이라고 생각하면 좋은 성과를 낼 수 없다고 생각해요. 보좌관 후배들에게는 전문성을 키우라고 조언하고 싶어요. 사실 보좌관 생활이라는 게 바빠서 공부할 엄두를 내지 못하는 것이 사실입니다. 하지만 전문 보좌관이든 다른 직업이든 성공하려면, 끊임없는 자기계발을 하는 수밖에 없습니다.”
고 보좌관 못지않게 15년 이상 근무하고 있는 ‘직업 보좌관’도 있다. 한나라당 孫範奎(손범규) 의원실 이민경 보좌관은 20년, 민주당 崔仁基(최인기) 의원실 고영대 보좌관은 27년, 자유선진당 柳根粲(류근찬) 의원실 오연달 보좌관 15년, 무소속 宋勳錫(송훈석) 의원실 김현목 보좌관은 20년째 보좌관으로 근무 중이다.
1989년 13대 金奉旭(김봉욱) 의원 보좌관으로 국회에 들어와 14대 林春元(임춘원) 의원, 15~17대 丁世均(정세균) 의원, 18대 송훈석 의원까지 4명의 의원을 보좌한 김현목 보좌관은 “보좌관으로 오래 일하기 위해서는 열정 외에도 전문성과 실력이 있어야 한다”며 “법률과 정치뿐 아니라 경제·통일 등에 대한 공부를 끊임없이 해야 한다”고 조언했다.
보좌관들의 결속력은 ‘글쎄’
600명에 달하는 보좌관은 그들끼리 힘을 합치고 정보를 공유할까. 현재 국회 보좌관 전체를 아우르는 조직은 존재하지 않는다. 14년 보좌관 경험을 토대로 저서 <보좌관이 말하는 국회의원 보좌관의 세계>를 펴낸 徐仁錫(서인석)씨는 “국회에는 299개(국회의원 299명을 의미)의 서로 다른 회사가 있으며, 각 회사는 오너(국회의원)의 경험과 관심·정서, 개인적 취향에 따라 일을 처리한다”고 말했다.
보좌관들은 바로 옆방에서 일하더라도 친분이 돈독하지 않다. 각 의원실이 각각의 회사처럼 인식되는 만큼 ‘직장 동료’라는 개념도 약하다. 그나마 보좌관들이 모여 의견을 나눌 수 있는 것이 정당별로 구성된 한나라당 보좌진협의회(한보협·회장 金在庚 의원실 박병철 보좌관)와 민주당 보좌진협의회(민보협·회장 崔喆國 의원실 임재동 보좌관)이다.
한보협 회장 박병철 보좌관은 “현재 모든 보좌관의 당면과제는 고용안정과 직업교육 등 처우”라며 “법률로 보좌관의 업무환경과 처우를 개선하기 위해서는 전체보좌관협의회가 꼭 필요한 만큼 가까운 시일 내에 협의회를 만드는 것이 목표”라고 말했다.
“보좌관협의회가 필요한 이유는 단순히 보좌관의 처우개선을 위한 것이 아닙니다. 훌륭한 정책과 법을 만들고 수준 높은 정치환경을 만들기 위해서는 각 분야에 전문성과 경력을 가진 우수한 보좌관이 많아야 하는데 현재 우리나라는 우수한 인재가 보좌관 일을 하기 어려운 상황입니다. 3급 입법보좌관을 도입하자는 주장도 그 일환입니다. 입법활동을 위해 전문직과 경력자 등을 스카우트하는 일이 꼭 필요한데, 이들에게 최소 3급의 처우를 해 주지 않으면 누가 오겠냐는 거죠. 보좌진의 자질이 우수해야 국회가 제 역할을 할 수 있습니다. 우수한 인재를 끌어들일 수 있는 시스템을 만들어야 해요.”
한보협과 민보협은 최근 몇 년에 걸쳐 전체보좌관협의회 구성을 논의해 왔고 가칭 ‘대한민국 국회 보좌진 협의회’를 만드는 데 동의했지만, 여야 보좌관들이 의원들과 함께 치열한 몸싸움을 벌였던 지난 2월 국회 ‘폭력사태’ 이후 논의는 소강상태다.
“보좌 시스템의 변화를 위해서는 여야를 막론하고 모두 모여 합의를 도출해야 하는 것 아니냐”고 묻자 박 보좌관은 “보좌관의 업무 자체가 의원 및 소속 정당과 밀접하다 보니 다른 당의 보좌관들이 함께 모여 할 수 있는 일은 많지 않은 편”이라고 답했다.
보좌관의 꿈 ‘국회의원’
국회 보좌관 출신으로 국회 수장을 역임한 朴寬用 전 국회의장.
정치의 꿈을 안고 보좌관이 되는 경우가 많은 만큼 보좌관 출신 국회의원들도 적지 않다. 특히 金永三(김영삼)·金大中(김대중) 전 대통령의 보좌진 출신은 오랜 정치 경험을 토대로 출마해 의원이 된 경우가 많다.
김영삼 전 대통령의 보좌관·비서관 출신 의원은 金德龍(김덕룡) 朴鍾雄(박종웅) 金武星(김무성) 李性憲(이성헌) 鄭柄國(정병국) 전·현 의원이, 김대중 전 대통령의 보좌관·비서관 출신은 權魯甲(권노갑) 韓和甲(한화갑) 金玉斗(김옥두) 崔在昇(최재승) 薛勳(설훈) 鄭東采(정동채) 尹鐵相(윤철상) 裵奇雲(배기운) 趙在煥(조재환) 전 의원이 있다.
보좌관 출신으로 국회의 首長(수장)이 된 예도 있다. 朴寬用(박관용) 전 국회의장은 李基澤(이기택) 전 의원의 보좌관이었다. 박관용 전 의장은 정치규제로 11대 총선에 출마하지 못하게 된 이 전 의원 대신 출마했는데, 모시던 의원이 노쇠하거나 정치생명이 끝난 경우 보좌관이 지역구를 이어받아 출마하는 예는 흔했다.
18대 국회의원 중에는 22명이 보좌관 경력을 가진 것으로 집계된다. 한나라당의 具相燦(구상찬·李世基 의원실), 曺海珍(조해진·李元昌 의원실), 李珍福(이진복·朴寬用 의원실), 柳在仲(유재중·柳興洙 의원실), 車明進(차명진·金文洙 의원실), 權宅起(권택기·權正達 의원실), 趙源震(조원진·黃秉泰 의원실) 의원, 민주당의 白元宇(백원우·諸廷坵 의원실), 趙慶泰(조경태·徐錫宰 의원실), 李光宰(이광재·盧武鉉 의원실), 徐甲源(서갑원·黃圭宣 의원실), 趙正湜(조정식·諸廷坵 의원실) 등이 있다.
총선에 출마했다 낙선한 보좌관도 많다. 18대 총선 때는 한나라당 安榮培(안영배·元喜龍 의원실)·李明雨(이명우·李會昌 의원실), 민주당 鄭基南(정기남·鄭東泳 의원실) 등 총 50여 명의 보좌관 출신 후보들이 출마했었다.
정치권에 성공적으로 진입한 보좌관 출신 의원들을 보면 박관용 의원이나 故(고) 제정구 의원 등 정치경력이 오래된 정치인이나 노무현 전 대통령, 김문수 경기도지사 등 실세로 떠오른 정치인 보좌관 출신이 다수를 차지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柳時敏(유시민) 전 의원도 李海瓚(이해찬) 전 의원의 보좌관 출신이다. 거물급·실세 정치인일수록 보좌관도 성공할 수 있는 길이 더 넓은 셈이다.
본인도 보좌관 출신이며, 이진복 의원과 李成權(이성권) 전 의원 등 자신의 보좌관들을 정치인으로 길러낸 박관용 전 국회의장은 11대 국회에서 정치규제로 이기택 의원의 출마가 봉쇄되자 이 의원의 지역구인 부산 동래에서 출마해 당선, 16대까지 6선을 지냈다. 다음은 박 전 의장의 이야기다.
―당시의 보좌관 생활은 지금과는 많이 달랐을 것 같습니다.
“지금처럼 여러 명이 의원 한 사람을 보좌하는 것이 아니라 모든 보좌진이 함께 정치를 하는 형식이었습니다.”
―후배 보좌관들을 정치인으로 많이 길러 내셨는데, 본인의 정치경험을 후배 보좌관들에게 전수하셨나요.
“특별히 어떤 방법을 전수하지는 않습니다. 정치에 꿈을 안고 들어오는 후배들에게 좋은 정치에 대한 기본을 알려 주는 것이 가장 중요하다고 봅니다.”
문제는 ‘미래’
박영준 전 청와대 기획조정비서관은 대통령의 형인 李相得 의원의 보좌관출신이다.
보좌관들의 공통된 고민은 고용안정과 미래다. 4년 계약직 신분이기 때문에 의원이 낙선하면 계약도 끝나고 갈 곳이 없다. 재선에 성공해도 계약여부는 국회의원 뜻대로다. 의원을 제대로 보좌하지 못했거나 기타 이유로 갑자기 해고되는 예도 비일비재하다. 특히 국정감사가 끝난 겨울철 ‘짐을 싸는’ 보좌관들이 많다.
스타로 떠오를 수 있는 기회인 국정감사에 의원들이 공을 들이는 정도는 상상을 초월한다. ‘국회엔 가을이 없다’는 말도 있다. 국정감사가 열리는 9~10월엔 보좌관들은 귀가를 거의 포기할 정도다. 국회의원들도 지역구 방문이나 행사에 나설 시간이 없이 국감준비에 매달리고, 의원회관 복도에는 며칠씩 귀가를 못 하는 보좌관들의 이불과 컵라면 그릇이 쌓여 간다.
그러나 국감결과에 따라 보좌관의 희비가 갈린다. 지난해 국정감사가 끝난 11월, 국회 홈페이지에는 보좌진 채용공고가 60여 건 게시됐다. 비공개 해고와 채용을 합치면 국감 후 100여 명이 ‘물갈이’된 셈이다.
국정감사 이후 ‘잘렸다’는 한 전직 보좌관의 말이다.
“국감기간에 의원회관의 긴장감은 대단합니다. 무조건 언론의 주목을 받는 것이 목표죠. 보좌관들끼리 복도에서 눈도 안 마주칩니다. 국감 때면 뉴스 보기가 겁이 납니다. 다른 의원들이 화면에 자주 등장하거나 주목받는 걸 보면 오금이 저릴 정도예요. 다음날 영감님(의원)에게 깨질 게 뻔하니까요.”
국감이 끝난 후 그는 의원에게 “다른 길을 찾아 보라”는 말을 듣고 의원회관을 떠났다. 현재 내년 5월 지방선거에 광역의원 출마를 준비 중이다.
임기가 끝난 보좌관들은 비슷한, 혹은 완전히 새로운 길을 찾기도 한다. 다른 의원 보좌관으로 취업하는 것 외에 지방선거에 출마하기도 하고, 총선 출마를 준비하는 경우도 있다. 5~6급 비서(관)들은 비교적 젊은 나이여서 다른 직업을 찾기도 하지만, 4급 보좌관을 지낸 사람들은 대부분 정치에 뜻이 있는 사람들이다.
최근 특이한 현상은 한나라당 의원 보좌관들이 대거 청와대에 자리 잡았다는 것. 현재는 국무총리실 차장으로 근무중인 박영준 전 청와대 기획조정비서관과 張(장)다사로 청와대 정무1비서관은 李相得(이상득) 의원 보좌관 출신이다. 박광명 조해구 문형욱 김윤정 유석현 이종헌 신용형 행정관 등이 국회의원 보좌관에서 청와대 행정관으로 자리를 옮겼다. 이들 중 대부분은 해당 의원이 대통령직 인수위원회에서 주요 직책을 맡은 덕에 파견돼 일하면서 공로를 인정받은 경우다.
청와대 행정관직은 대부분 전문성을 보유하고 있거나 정당 등에서 대선과정에 공로를 세운 인재들을 기용하는 것이 보통인데, 보좌관 수십 명이 청와대로 들어간 것은 이례적인 일이다.
공무원으로의 변신도 흔히 볼 수 있다. 許崇(허숭) 경기도 대변인(전 金文洙 의원 보좌관)은 18대 총선에서 한나라당 경기 안산단원갑에서 출마했으나 고배를 마셨고, 이후 경기도 대변인으로 변신했다. 李忠宇(이충우) 전 보좌관(李祥羲 전 의원)은 강원도지사 비서관으로 재직 중이다.
현직 보좌관들 중에서 내년 지방선거 출마를 준비하는 사람이 많다는 것은 의원회관에 공공연히 알려진 사실이다. 한 보좌관은 “국회의원이 되면 가장 좋겠지만, 최근에는 지역구민들이 후보자의 경력 등을 꼼꼼히 보고 투표하는 만큼 보좌관 경력만으로는 당선이 쉽지 않다”면서 “보좌관이란 직업을 언제까지 할 수 있을지도 불투명한 만큼 30~40대 초반의 보좌관들은 도의원이나 시의원에 출마해 전문 정치인으로 입문, 국회 입성의 꿈을 이루려는 경우가 많다”고 말했다.
보좌관은 ‘매력적인 직업’
10여 년 전 한 친지가 필자에게 “보좌관이란 어떤 직업이냐”고 문의한 적이 있다. 전문직인 여동생이 보좌관 남성과 결혼하겠다고 하는데, 어떤 직업인지 감을 잡을 수 없다는 것이었다. “연봉이나 처우가 괜찮은 편이고 일에 자부심과 보람도 생기는 만큼 직업으로서의 매력은 있겠지만, 안정성이 떨어지고 가족의 고생이 예상되는 만큼 남편감으로는 추천하고 싶지 않다”고 답한 기억이 난다.
친지분의 요청으로 그 보좌관과 만나 보기도 했지만 생각은 변하지 않았다. 어쨌든 두 사람은 결혼했고, 행복하게 살고 있다. 그 보좌관은 이후 정권실세를 거쳐 현역 국회의원이 됐다. 남편감으로도 나쁘지만은 않은 셈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