Jan 11,2009 월 모임 ( Edith Stein)
주제 : who is Edith Stein 에디트 슈타인은 누구인가!
에디트 슈타인은 20세기 전반의 그 격동의 시대를 산 특이한 인물이다.
그녀는 유대인이었고 철학자 였으며 카톨릭 개종자,
교육자였으며 여성론자였고
저술가였으며 가르멜 수도자였고 카톨릭 성인이 되었다
1. 유대인
2. 철학자
3. 카톨릭 개종자
4. 교육자
5. 여성론자
6. 저술가
7. 가르멜 수도자
8. 카톨릭 성인
1.유대인으로서의 에디트 슈타인
![](https://img1.daumcdn.net/relay/cafe/original/?fname=http%3A%2F%2Fc2down.cyworld.co.kr%2Fdownload%3Ffid%3D64241770a5c63b01185d181d70616e7d%26name%3D1380217445160251372710255.jpg)
에디트 슈타인은 1891년 10월 12일에 지그프리트(Siegfried Stein)과
어머니 아우구스트(Auguste Stein) 의
막내딸로 독일 동북부 지역의 브레슬라우(Breslau)에서 태어났다
에디트가 이세상에 태어난 10월 12일은
그해의 유대교 달력으로 “ 속죄의 날 “ ( yom Kippur) 이라 불리는
중요한 축일에 해당되는 날이었다 .
“ 속죄의 날” 이란구약성서의 “레위기” (16장) 에서 그유래를 찿을수있는데
인간이 죄를 벗는날로 주님 대전에서 인간과
하느님사이에 새로운 관계가 맺어지는날로 기념되어왔다 .
실제로 에디트 자신도 “ 속죄의 날” 에 태어난것을
각별히 뜻깊게 생각하고 있었다.
그녀는 자서전에서 이렇게 말하고 있다
![](https://img1.daumcdn.net/relay/cafe/original/?fname=http%3A%2F%2Fimg.ezday.co.kr%2Fcache%2Fboard%2F2008%2F09%2F24%2F58d4984bbc6d016f042db378aebccf95.gif)
“ 내개 이 속죄의 날은 각별한 의미가 있었습니다.
나는 바로 이속죄의 날에 태어났기때문입니다
어머니는 해마다 이 돌아오는날이 내 생일이라고 생각하고 계셨습니다.
그런일로 막내딸인 나를 특별히 귀여워 하신게 아닌가 여겨집니다”
에디트 슈타인의 생애를 뒤돌아 볼때
그녀가 속죄의 날에 태어났다는것은
그 전생애의 방향을 가리키고 있는것처럼 생각된다.
완전한 희생은 그리스도의 십자가 상에서의
완전한 번제물의 희생에 의하여 이루어진다.
.
두 살 때 목재상을 하던 아버지 지그프리트(Siegfried Stein)를
일사병으로 잃고
어머니 아우구스트(Auguste Stein Courant)에
의해 양육되었다.
그녀는 어려서부터 집안에서 거행되는
유대교 열심한 유대인이었던
전통 예식을 보며 자랐고,
유달리 고집스럽고 사색과 독서를 좋아하는
학구적인 성격의 아이였다.
유대인이면서 독일 시민이란것에
굉장히 자부심을 가지고 있었다.
그래서 전쟁때 독일을 위해
간호원으로 봉사하기도 했다.
그러나 후에 독일에 의해
그 애국심은 배신을 당하고 만다.
11세 때 숙부의 갑작스런 죽음을 경험하면서
삶의 궁극적인 의미에 대해,
그리고 유대인들이 믿고 있는 하느님의 존재에 대해
의심을 품기 시작하였다.
또 가족과 친지들의 형식적인
유대교 의식과 기도에 실망하여
더 이상 참석하지 않기로 결단을 내리기도 하였다.
2. 철학자로서의 에디트 슈타인
철학이란 무었인가---
철학이란 단순히 지식을 얻는 것만이 아니다.
철학이란 어떤 삶의 태도이다.
어떤 지식을 받이 들이는데있어
그답을 얻는데 그 밑바닥 까지
알려고 하는것이다 .
이런 자세가 성녀의 생활을 지배하게 된다
그러기에 그녀의 철학을 모르면
그녀를 이해하기 힘들다,
그녀는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1911년까지는 브레슬라우에서, 그리고 1913년부터는 괴팅겐(Gottingen) 대학으로 옮겨
심리학, 철학, 역사학, 독일어학 등을 공부하였다.
다양한 학문을 공부하던 중 제1차 세계대전의 발발로
잠시 간호사로 활동하기도 했던 그녀는 Husserl의 책을 읽다가
현상학에 관심을 갖게된다.
이교수를 따라 학교를 옮기고
1916년 프라이부르크(Freiburg)에서 후설(Edmund Husserl) 지도로
박사학위를 받고 그의 개인조교가 되었다.
그 후 독자적인 연구 활 동을 하며 교수 취임 논문을 제출하고
후설이 직접 추천서까지 작성해 주었으나,
당시 독일 학계에서 여성이 교수로 재직하는 것이
거의 불가능하였기 때문에 그 뜻을 이루지 못하였다.
(Husserl의 문하생으로 현상학 연구에
종사하고 있던 시기의 에디트는
연구의 테마나 발표된 논문이 현상학의 범주에 한정되어
사고의 대상도 자연적인 경험속에 한정되어있다.
그러나 그리스도 교의 신앙의
눈뜬뒤의 에디트의사상의 주제는
제일 진리로서의 하느님 ,
영원한 존재를 탐구하는것에 있었다.
철학자인 에디트 슈타인의 독자성이란
현상학 학자로서의 확고한 지위를 쌓았으면서도
그러한 현상학적인 사유를가지고 스콜라적인 존재론과 만나
대결했다는데 있을것이다.
그녀는 현대 철학에서는 회피하고있는
하느님의 문제를바로 정면에서 맞서 현대에 있어
그리스도교 철학의 가능성을 추구하려 한것이다.)
에디트 슈타인 사랑과 진리의 불길 중에서옮김)
3. 카톨릭 개종자로서의 에디트 슈타인
프라이 부르그에서 철학 박사 학위를
최우수 성적으로 취득하고 그후 훗썰의 조수 로서 활약하며
학문의 길로 매진하고 있던 에디트는
막 서른 살을 맞이하려는 시기가 되자 재차
내면적인 위기와 영혼의 갈등에 짖면하게 된다.
그것은 에디트가 원하던 대학 교수 자격과
그 강좌를 얻지 못했다고 하는 생활면에서의 좌절만이 아니라
그녀의 존재 기반을 오통 뒤흔들어 놓은것같은
정신적 위기이기도 했다.
인간적인 사랑이 결실을 맺지 못했다고 하는데서
오는 깊은 실망도 있었다.
그때까지는 자기의 노력과 능력에 의하여
이상적인 인생을 걷게 되리라고 자부하고 있던 에디트는
자기 자신이 결정적으로 깨짐을 경험한것이다.
그리하여 자기힘으로 모든것을 획득하려하는
자기주심의 가치관이 뒤 엎어지고 새로운 경지가 열리게 된것이다.
이때의 심경을 이렇게 이야기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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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하느님안에서 쉬게 되어 모든 지적활동이
완전히 정지되는 상태라는 것이 있습니다.
이런 상태에 있을때에 사람은
어떤 계획도 결단을 내릴수가 없어 행동하는것 까지
한때엔 멈추고 마는수가 있습니다. .
그래서 오직 하는님의 뜻에 자기의 미래를 의탁하고
“ 자기를 완전히 섭리에 맡기는것입니다”
이런 상태를 나자신더 어느정도 경험했습니다
그것응 내 역량과 정신적인 원천이 완전히 흡수되어 버려
행동할수있는 온힘을 빼앗긴 뒤에 경험한 일입니다.
생명력의 결여가 원인이되어 활동할수 없는 것과는 달리
“ 하느님안에서 쉰다”는 것은
전혀 새롭고 독특한 경험 이었습니다.
생명력이 없어진다는것은 말하자면 “ 죽음의 고요함”인데 대해
하느님 안에서 쉰다는 것에선
자기가 완전히 떠 받쳐 지고 있다는 느낌이 들었습니다.
하느님안에서 쉬는것에 몸을 맡기게 되면서
그와 함께 나는 생명으로 충만해 지는 것입니다.
이 생명의 힘의 유입은
나 자신에 의하지 않는 활동성으로 나타나느것으로 여겨졌습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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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후 브레슬라우로 돌아와 계속 철학 연구 논문들을 집필하던 중
1921년 여름 같은 괴팅겐 학파 친구인 콘라트 마르티우스와 그
녀의 남편이 경영하던 농장에 머무르게 되었다.
친구 부부가 외출한 어느 날 서재에서
우연히 손에 잡힌 “아빌라의 성녀 데레사의 생애”를 읽고,
그녀는 자신이 오랫동안 실존적으로 회의하고 있었던 신이
그녀를 사랑해 왔으며,
그녀가 전 인격으로 그 사랑에 응답하기를
기다려 왔음을 깊이 깨닫게 되었다.
이러한 하느님 체험 후 그녀는 평화를 얻었고,
이듬해 1월 1일 테레사 베네딕타(Teresia Benedicta)라는
세례명으로 세례를 받았다.
4.5. 6.교육자 여성론자 , 저술가 로서의 에디트 슈타인
세례를 받음과 동시에 성녀 테레사 베네딕타는
카르멜 수도원에 입회할 의지를 확고히 하였으나,
어머니의 반대와 지도신부의 만류로
이를 연기하였다.
에디트는 이때의 사정을 이렇게 말하고 있다.
“ 나는 1922년의 새해 첫날에 세례를 받았을때
이것은 바로 수도 생활에 들어서기위한
첫걸음이라고 생각하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세례를 받은후 어머니를 만났을때
어머니는 딸이 수녀원에 들어간다고 하는것에는
크게 타격을 받고 견디지 못할것이라고 생각이 들었습니다 .
그렇게 되면 어머니는 죽도록 괴로워 하게 될것이며
필경 카톨릭 교회에 대해서 평생토록 잊지못할 원한을
품세 될것임이 틀림없겠다고 생각햇고
또 그러한 일이 생기면
내게도 견뎌 낼수 없는 큰 부담이 될것이었습니다.”
그 대신 지도신부의 제안으로 1931년까지
슈파이어(Speyer)에 있는
성 막달레나 수도원 교사 양성 학교와 도미니코 수녀회의 여학교에서
독일어와 역사를 가르쳤다.
그리고 점차 후설의 관념론적인 철학 노선을 떠나
그리스도교 철학의 실재론적인 사상을 연구하기 시작하였다.
가톨릭 신앙에 들어선 뒤의 에디트의 사상적 행보를 깊이 규정하게
한것은 성 토마스 아퀴나스의 사상이었다.
토마스의 사상이 그후의 에디트의 철학 연구에 미친 영향은
훗썰의 현상학에 비길만큼 결정적인 것이었다.
에디트느 토마스의 철학 연구의 자세 ,
다시 말해 진리에 대하여 자기 스스로를 열어나간다고 하는 신앙에
바탕을 둔 학구적 삶의 태도를 알게 된것이다.
에디트는 이렇게 말하고 있다.
“ 관상생활에서 이세상과의 인연을 끊어서는
안된다는 것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성 토마스에게서 배울때까진 나는 학문 연구를 ,
하느님께 바치는 봉사 작업의 일환으로 할수 있다는 것을
충분히는 이해하지 못하고 있었습니다.
그리하여 나는 비로소 학문 연구에 진지하게 파고 들게 된것입니다”
7. 가르멜 수도자로서의 에디트 슈타인
계속 왕성한 교육 및 학문 활동을 하던 그녀는
발처 아빠스로부터 카르멜 수도원 입회를 허락받고
어머니와 힘겨운 이별을 나눈 뒤
1933년 10월 14일 쾰른의 카르멜 수도원에 입회하면서
수도명을
십자가의 테레사 베네딕타(Teresia Benedicta a Cruce)로
정하였다. 입회한 후에도 수도원 원장의
적극적인 학문 지원에 힘입어
지속적인 연구와 저술활동을 할 수 있었다.
1936년 9월 14일 첫서원을 하였으나,
바로 그 해 어머니가 사망하였다.
그녀는 마지막까지 어머니가 지녀왔던
유대교 신앙을 존중해 주었다.
1938년 4월 21일 종신서원을 하였다.
그러나 나치의 유대인에 대한 위협은 날로 심해져 갔고,
성녀 테레사 베네딕타는 이를 피하기 위해
수도원의 주선으로 비밀리에 그녀의 언니 로사(Rosa)와 함께
네덜란드의 에히트(Echt) 카르멜 수도원으로 옮겼다.
이곳에서 그녀는 십자가의 성 요한(Joannes) 탄생 400주년을
기념하는 저서 “십자가의 학문”을 발표하였다.
그런데 이때 네덜란드의 주교들이 독일의 반유대주의를 비난하였고,
이에 화가 난 히틀러는 모든 비아리안계 가톨릭 신자들을
체포하라는 명령을 내렸다.
이로 인해 1942년 8월 2일 언니 로사와 함께
게슈타포에게 체포된 그녀는
많은 유대인 그리스도교 신자들과 함께
아메르스포르트(Amersfoort) 수용소를 거쳐
베스터보르크(Westerbork)로 끌려갔다.
그리고 그 해 8월 7일 이들 중 987명이
아우슈비츠 수용소에서 살해되었는데,
두 자매는 이틀 후인 8월 9일 가스실에서
살해된 것으로 추정된다.
9. 카톨릭 성인으로서의 에디트 슈타인
그녀가 사망한 지 20년 만인1962년 1월 4일
쾰른의 대주교 프링스(Josef Frings) 추기경은
그녀의 시복을 위한 소송을 제기하였고,
1980년에는 독일 주교회의를 거쳐 로마에서
시복절차를 위한 공식적인 청원이 이루어졌다.
그 후 교황 요한 바오로 2세(Joannes Paulus II)가
독일을 방문한 1987년 5월 1일 쾰른에서
순교자로 시복되었고, 1998년 10월 11일
로마에서 교황 요한 바오로 2세에 의해 시성되었다.
시성식에서 그녀를 “이스라엘의 탁월한 딸이자
전세계를 위한 성인으로서 교회의 충실한 딸”이라고
칭송한 교황 요한 바오로 2세는
이듬해 10월 1일 자의교서를 통해
시에나의 카타리나(Catharina) 성녀와
스웨덴의 비르지타(Birgitta) 성녀와 함께
유럽 대륙의 수호성인으로 선포하였다.
. 에디트의 삶은 그리스 말의 “파토스”라는 말을 떠오르게 한다
그리스 말의 파토스에서 라틴말의 “파씨오”라는 말이 생겨났고
이말은 다시 독일어 프랑스어 영어로도
“ 파씨온””PASSION”라는 현대어로 되어있습니다.
PASSION”은 두가지 뜻을 가지고 있고
두개의 차원을 지닌 언어입니다 .
한편에서는 “열정이라던가 “열정적 헌신” 으로
능동적인 요소가 강조 되고
다른 편에서는 “수난” 이라는 말로
수동적인 요소가 있습니다
그녀의 생애의 결정적인 단계에 있어서는
Passion” 이 뜻하는 두가지 측면이
얼마나 밀접하게 연관되어 있는지 알게 됩니다.
에디트의 인생 -----
확실히 극적인 것이라곤 아무것도 없는 최후였다.
그 누구의 눈에도 띠는일이 없는 대중속에서의 외로운 죽음 .
빛나는 순교와는 까마득히 먼 이름도 없는 죽음 .
에디트의 유해는 많은 사람들과 함께
한 소각로에 버려져 모든것을 불태워 없애버리는
검은 연기가 되어 하늘로 올라갔다.
에디트의 죽음은 장소와 시간에 얽매이는일이없는
영원속으로의 승리 , 부활에의 희망을 나타내고 있다.
하느님께 사로 잡혀
완성되는 삶의 깊은 의미와 그신비에 관해
그녀는 이렇게 말하고 있다.
![](https://img1.daumcdn.net/relay/cafe/original/?fname=http%3A%2F%2Fimg.ezday.co.kr%2Fcache%2Fboard%2F2008%2F09%2F24%2F58d4984bbc6d016f042db378aebccf95.gif)
“내 계획에는 없었던일이
하느님의 계획속에 있었던 것입니다.
오갖 사건과 경험을 쌓아가면서
나는 이렇게 확신하게 되었습니다.
하느님의 눈으로 보시면 우연이라는 일은 없고
내 모든 삶은 자잘한 일에 이르기까지
하느님게획의 그 섭리속에 마련 되어 있다고 말입니다.
그리하여 모든것을 살펴 주시는
하느님의 눈길아래 그 모든것은 사람의 지식이나
지혜를 넘어서 관련되고 있다고
하는 의미를 가지고 있습니다.
그렇게 하느님께서 창조하시는
그러한 의미 관련이 내게도 나타나고
영광의 빛남이 되어 주기를
기다리며 바라고 있는것입니다.”
추천 도서 "Life in a Jewish family" , "Stein",
"The life of a Philosopher and Carmelite"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