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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천이씨 쌍명재공파 국동 문중
프롤로그
성姓과 본本이 같은 사람이 모여 사는 마을을 집성촌 혹은 세거지라 한다. 도남동에는 집성촌이 세 곳 있다. 정선전씨 집성촌인 도남1동 진걸, 인천이씨 집성촌인 도남2동 사창리[국동], 덕산이씨 집성촌인 정골[정골에는 인천이씨도 많이 살았다]이다. 이중 사창리에 세거하는 인천이씨를 특별히 ‘인천이씨 쌍명재공파 국동 문중’이라 한다. 이 말은 인천이씨 여러 분파 중 쌍명재공파 후손이면서 동시에 국동을 연고로 하는 문중을 일컫는 말이다. 문중은 성과 본이 같으면서 가까운 지역에 모여 살고 있는 집안을 말한다. 이번에는 350년 내력 인천이씨 쌍명재공파 국동문중에 대한 이야기다.
인천이씨·김해김씨·허씨는 서로 결혼을 못한다?
우리나라에는 10여년 전만해도 ‘동성동본불혼’이란 말이 있었다. 법적으로 성씨와 본관이 모두 같은 남녀는 서로 혼인을 할 수 없다는 뜻이다. 예를 들면 김해김씨 삼현파 후손은 같은 김해김씨 삼현파 후손과는 혼인을 할 수 없다는 것. 그런데 이 조항은 지난 2005년 민법 개정으로 폐지됐다. ‘동성동본’ 범위가 너무 광범위해 이로 인해 야기되는 사회적 폐해가 너무 크다는 것이 이유였다. 다만 근친혼[가까운 혈족간의 혼인]을 제한한다는 취지에서 아직도 8촌 이내 혈족 간에는 법적으로 혼인을 할 수 없다.
우리나라 성씨 중에는 아주 독특한 ‘불혼’ 관습을 오랫동안 지켜온 몇 몇 성씨가 있다. 이들 성씨는 동성동본은커녕 아예 성씨 자체가 다른데도 관습적으로 서로 혼인을 하지 않았다. ‘안동김씨·안동권씨·예천권씨’가 그렇고, ‘청주한씨·행주기씨·태원선우씨’, ‘문화류씨·연안차씨’ 등이 그렇다. 이런 관습이 생겨난 것은 이들이 성씨는 비록 다르지만 족보나 문중 구전을 통해 동일한 조상의 후손이라는 생각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이와 비슷한 예가 또 있다. ‘인천이씨·김해김씨·허씨’가 그렇다. 이들 세 성씨도 성씨는 서로 다르지만 시조보다 더 먼 선대 조상이 동일인이란 오랜 관념 때문이다. 가락국을 세운 수로왕과 왕비 허황옥이 그들의 시조 할아버지, 할머니란다. 이러한 배경에는 다음과 같은 흥미로운 스토리가 있다.
‘구지가’와 ‘여섯 개 황금알’로 시작되는 가락국[가야] 건국신화의 주인공 ‘수로왕’. 6가야의 수장 금관가야 왕이었던 수로왕은 배를 타고 바다를 건너온 인도 아유타국 공주 ‘허황옥許黃玉’을 왕비로 맞이했다. 허황옥은 수로왕과의 사이에서 모두 10명의 아들을 낳았다. 어느 날 허황옥이 수로왕에게 부탁을 했다. “10명의 아들 중 한 명이라도 저의 성씨인 허씨를 잇게 해주소서” 이에 수로왕은 둘째[자료에 따라서는 두 아들로 보기도 한다] 아들에게 왕성인 김씨가 아닌 왕비의 성씨인 허씨 성을 잇게 했다. 이런 연유로 우리나라에서는 예로부터 관습적으로 수로왕을 시조로 하는 김해김씨와 허황옥 둘째 아들의 후손으로 알려진 ‘김해허씨·양천허씨·태인허씨·하양허씨’는 성씨와 본관이 달라도 서로 혼인을 하지 않는다.
이 이야기를 통해 김해김씨와 허씨가 혼인을 하지 않는다는 것은 어느 정도 이해가 된다. 그런데 뭔가 좀 이상하다. 이 이야기 어디에도 인천이씨는 등장하지 않는다. 그렇다면 인천이씨는 무슨 사연이 있어 이들 성씨와 혼인을 하지 않는다는 것일까? 여기에도 역시 흥미진진한 스토리가 숨어 있다.
인천이씨 시조는 고려 현종 때 상서좌복야 벼슬을 지낸 (이)허겸李許謙이다. 선대 조상은 가야국 김수로왕의 둘째 아들로 어머니인 허황옥의 성을 따라 본래 성씨는 허씨였다. 그런데 특별한 계기로 이들의 성씨가 허씨에서 이씨로 바뀌게 됐다. 이씨 성을 처음 획득한 득성조得姓祖는 신라시대 때 인물인 (이)허기李許奇다. 신라에서 아찬 벼슬에 있던 허기가 당나라로 사신을 갔다. 그때 당나라에 ‘안녹산의 난’이 일어났다. 당 현종은 난을 피해 촉나라로 피신했다. 사신으로 당나라에 가 있던 허기는 위험을 무릅쓰고 현종을 호위하며 따랐다. 이때의 공으로 허기는 현종으로부터 당나라 황제의 성씨인 이씨를 하사받아 허기에서 ‘이허기’가 됐다. 그가 신라로 돌아오니 신라왕이 공로를 치하하며 벼슬을 상서좌복야 상주국개국후 소성백에 봉하고 식읍 1,500호를 하사했다. 이때부터 이허기의 자손들은 소성부에 터를 잡고 소성을 본관으로 대를 이어오고 있다. 소성이 곧 지금의 인천이다.
이런 사연으로 인천이씨·김해김씨·허씨는 서로 혼인을 하지 않는다는 관습법이 생겨난 것이다. 앞서 언급한 다른 성씨들도 그 사연을 알아보면 대부분 비슷하다. 허씨에서 이씨가 된 인천이씨는 당나라 현종으로부터 ‘이씨’ 성을 하사 받은 이허기를 먼 선대 조상으로 하고, 고려시대 인물인 이허겸을 족보상 1세조로 한다. 이후 인천이씨는 번성하여 장화공파·상서공파·문간공파·문충공파·쌍명재공파·시중공파·공도공파 등으로 분파되어 지금에 이르고 있다.
성씨, 본관, 파
예전에는 어른, 아이 할 것 없이 자신의 성씨와 본관은 물론 파까지도 다 알고 있었다. 그런데 요즘은 그렇지 않은 것 같다. 한번은 어느 문중 재실에서 해설을 하다 실제로 있은 일이다. 탐방객 중에 해당 재실에 모셔진 인물과 성씨, 본관이 같은 한 여성이 있었다. 필자는 그녀에게 ‘파’가 어떻게 되느냐고 물었고, 그녀는 다음과 같이 답을 했다.
“글쎄요. 저는 김해김씨는 분명한데 파는 잘 모르겠어요. 내가 아는 파는 쪽파·대파·양파 이런 것밖에 없어요···”
파派는 ‘갈라져 나온 계통’을 말한다. 아주 먼 옛날에는 파가 필요 없었다. 시조로부터 대 여섯 세대 정도 내려올 때까지는 말이다. 대 여섯 세대면 고조할아버지, 증조할아버지, 할아버지, 아버지, 나, 아들, 손자 정도이니, 너와 나의 관계를 따지는 것이 그렇게 복잡하지는 않았기 때문이다. 하지만 대수가 내려갈수록 문제가 생겼다. 말 그대로 자손의 숫자가 기하급수적으로 불어났기 때문이다. 이런 식으로 수백 년 세월이 지나자 한 시조 밑에는 셀 수 없을 만큼 많은 후손들이 생겨났고, 그들 사이의 관계를 따지는 것이 여간 힘든 일이 아니었다. 그래서 찾아낸 방법이 바로 ‘계파’를 적용하는 것이었다.
통상 ‘계파’는 특정 인물을 파조[한 계파의 시조]로 설정하고 파조의 직계 후손들만 따진다. 이렇게 함으로써 시조 이하 모든 후손은 몇 갈래 계파에 각기 분산 소속되어 분류가 쉬워졌다. 계파는 처음에는 단순히 몇 개 파로 분파되었다가 대가 내려가면서는 수십, 수백 계파로 나눠지는 식이다. 이는 일반 사회조직에서도 마찬가지다. 일개 평사원이라 할지라도 조직도를 따라 거슬러 올라가면 최종적으로 조직의 장까지 연결되는 것과 같은 원리다. 그런데 하나의 ‘파’를 만든 파조는 아무나 될 수는 없다. 보통 나라에 큰 공을 세우거나 학문이나 덕행으로 세상에 이름난 조상이라야 후손들에 의해 파조가 될 수 있기 때문이다.
고려시대 문신이자 문장가, 쌍명재 이인로
이인로는 자字[과거에 이름처럼 사용했던 호칭]가 미수眉叟, 호는 쌍명재·청련·와도헌이다. 그는 고려 중기 고려를 대표하는 관료이자 학자였다. 벼슬은 비서감 우간의대부 및 좌간의대부에 이르렀다. 그는 본래 고려에서 손꼽히는 명문가 출신이었다. 하지만 어려서 부모를 잃고 고려 명종의 숙부인 화엄승통 요일 스님에 의해 길러졌다. 그의 나이 19세 때인 1170년[의종 24], 정중부에 의해 ‘무신의 난’이 일어났다. 이때 그는 혼탁한 세상을 피해 불교에 잠시 몸을 담았다. 몇 년 후 다시 세상으로 돌아온 그는 25세 때 고려 최고 교육기관인 태학에 들어갔다. 이후 1180년[명종 10] 29세의 나이로 문과에 장원급제해 세상에 자신의 이름을 알렸다. 특히 그는 시문에 뛰어나 많은 문학작품을 남겼다. 저서로는 은대집·쌍명재집·파한집을 남겼으나 현재는 파한집만 전한다. 그의 작품은 파한집 외에도 동문선·대동시선·보한집 등을 통해 일부가 현재까지 전하고 있다.
그는 이정·이양·이온·이세황·이아대 다섯 아들을 두었는데 모두 과거에 급제해 벼슬길에 올랐다. 대구광역시 북구 도남동에 세거하고 있는 국동 문중은 이중 맏이인 이정李程의 직계 후손이다. 국동 문중은 고려에서 조선 중기까지는 쌍명재공파 백파伯派[큰집]를 계속 이어오다 인천이씨 18세 이공전에서부터 갈라져 나온 분파다. 쌍명재공파 백파 맏집은 경북 경산이며, 작은집이 대구 북구 도남동이다.
350년 내력 도남동 인천이씨 ‘국동 문중’
대구 북구 도남동에 터를 잡은 인천이씨 국동 문중은 인천이씨 쌍명재공파 파조 이인로 이후 10대 약 300년 세월을 계속 맏집으로 이어오다, 18세 이공전 때 갈라져 나왔다. 국동 문중이 연고지 인천을 떠나 영남으로 내려온 것은 14세 이의산이란 선조 때문이었다. 이의산은 ‘사육신 사건’에 연루되어 죽임을 당한 단종 절의신[절의를 지키고 죽은 신하]으로, 단종 능인 영월 장릉 배식단 조사위에 위패가 모셔진 인물이다. 세조가 단종을 쫓아내고 왕위에 올랐던 시절. 이의산 후손들은 살아남기 위해 어쩔 수 없이 남쪽으로 내려와야 했다.
이들이 남쪽으로 내려와 처음 터를 잡은 곳은 조선시대 대구 수성현으로 지금의 지산동 무학산 남쪽 능인중고등학교 일원이었다. 이곳에서 2-3세대를 지내고 18세 이공전 때 거처를 팔거 노전으로 옮겼다. 팔거 노전은 지금의 북구 태전동 대구과학대 인근이다. 이후 다시 4대를 지난 22세 간재 이성량[1624-1720] 때 이르러 비로소 지금의 도남동에 터를 잡았다. 그러니까, 이들이 인천을 떠나 대구 지산동, 태전동을 거쳐 지금의 도남동에 첫발을 딛는 데까지 150-200년 정도 시간이 걸린 셈이다. 도남동 입향 이후 지금까지 14대 350년 세월을 국동에서 세거해 온 인천이씨 쌍명재공파 국동 문중의 역사는 이렇게 시작됐다.
국동 문중 인물들
국동 문중에서는 전국적으로 이름이 알려질 정도의 큰 인물은 배출하지 못했다. 하지만 임란 때 의병 활동을 한 이두남과 그의 동생 훈련원첨정을 지낸 어모장군 이규남[1521-1593], 국동 입향조 이성량, 영·정조 시대 ‘쌍효자雙孝子’로 이름이 나고 고종 때 효자 정려를 받은 이희성·이희효 형제, 역시 고종 때 의금부 도사를 지낸 남호 이병규[1844-1926] 같은 인물이 있었다.
어모장군 이규남과 용마총
인천이씨 국동 문중 대구 칠곡 입향조 이공전[18세]은 문과에 급제한 인물로 참봉 벼슬을 지냈으며, 이종[19세]은 효력교위 행 영등포 만호를 지냈다. 20세에서 이규남이란 인물이 났다. 호가 노암蘆岩인 그는 국동 문중에서 ‘어모장군’으로 높이 받드는 인물이다. 어모장군 훈련원첨정을 지낸 그는 임진왜란이 발발하자 형인 이두남과 함께 의병으로 일어나 망우당 곽재우 장군 부대에서 활략해 공을 세웠다. 문중에서는 그와 관련된 여러 구전이 전하는데 가장 대표적인 것이 그와 함께 전장을 누볐던 애마에 대한 전설이다.
어모장군이 한 전투에서 죽음 직전에 이르렀다. 이때 장군의 애마는 이미 죽어 전장에 쓰러져 있었다. 몸을 숨길 곳이 없었던 장군은 애마의 배를 가르고 그 속에 몸을 숨겼다. 결국 그는 애마 덕분에 목숨을 건질 수 있었다. 장군은 자신의 목숨을 구해준 애마의 은혜를 잊지 못해 말무덤을 만들어 주고 ‘용마총龍馬塚’이라 이름 붙였으며, 나중에는 자신도 용마총 곁에 묻혔다.
그의 묘와 용마총은 칠곡군 이언방 금시곡에 있었는데 지금의 현대공원 가무실 인근이었다. 2000년대 초 이규남의 묘를 지금의 도남동으로 이장하기 전까지만 해도 그의 묘 아래에 용마총이 있었고, 후손들은 묘사 때마다 용마총에도 별도의 상을 차려 주었다. 지금 용마총은 사라지고 없다.
국동 입향조 간재 이성량
간재澗齋라는 호를 사용한 이성량李成梁[1624-1720]은 인천이씨 22세로 쌍명재공파 국동 입향조[마을에 처음 살기 시작한 선조]다. 처음 이름은 이홍업이었다. 고촌 이심홍의 제자이며 문학으로 지역사회에 이름이 알려졌다. 1705[숙종 31]년 수직으로 통정대부에 올랐고, 1720년 증직으로 가선대부에 올랐다. 부인은 숙부인 웅천주씨로 주사춘의 딸이다. 문집을 남겼다.
쌍효자, 매국헌 이희성과 용호 이희효
인천이씨 25세 참판공 이화중[1707-1756]의 아들 이희성과 이희효다. 이희성李希聖[1729-1756]은 국헌菊軒 혹은 매국헌梅菊軒이란 호를 썼다. 동생인 이희효李希孝와 함께 효성이 지극하여 ‘쌍효자’로 세상에 이름이 났다. 형제는 병든 부모님을 모실 때 손가락을 그어 피를 내 봉양하는 단지주혈과 변을 맛봄으로써 병세를 살피는 상분을 행했다. 또 구하기 힘든 소간이나 메추리, 꿩 등을 우연히 구하는 기이한 행적도 있었다.
이들 형제는 죽고 난 후 조정으로부터 효자로 정려를 받았고, 이들의 효행은 읍지·여지지·조선환여승람 등에 등재되었다. 이희성은 죽은 지 122년이 지난 1878[고종 15]년 조정으로부터 증직으로 사헌부 감찰, 승정원 좌승지, 가선대부 공조참판에 올랐다. 동시에 그의 부모·조부모·증조부모 3대도 벼슬이 더해지는 은전이 있었다. 그런데 효자 이희성과 관련해서는 세상에 잘 알려지지 않은 가슴 아픈 스토리가 전한다.
효자 이희성은 아버지인 참판공 이화중이 세상을 떠나는 날 그 충격으로 그만 정신을 잃고 쓰러졌다. 그런데 정신을 잃은 사람은 이희성만이 아니었다. 그의 부인 청도김씨도 함께 쓰러졌던 것이다. 시간이 좀 흐른 뒤 이희성은 다시 정신을 차렸지만, 부인 청도김씨는 결국 일어나지 못하고 그 길로 세상을 떠났다. 하지만 몸을 다시 추스른 이희성의 명도 그리 길지 않았다. 상복을 갖춰 입는 성복을 마친 뒤, 그 역시 세상을 떠났기 때문이다. 당시 이희성의 나이는 향년 28세였다.
아버지 상 때 그 충격으로 부인과 함께 요절한 이희성은 슬하에 자식을 두지 못했다. 결국 동생인 이희효의 장남 이형근을 양자로 삼아 대를 이어 지금에 이르고 있다.
이희성의 동생 이희효[1733-1809]는 호가 용호龍湖다. 효성이 지극하여 형인 이희성과 함께 쌍효자로 세상에 이름이 났다. 그가 세상을 떠난 지 71년이 지난 1880[고종 17]년에 형인 이희성과 함께 쌍효자로 정려가 내려졌고, 증직으로 조봉대부 동몽교관에 올랐다. 부인인 영인 고성이씨와의 사이에서 이형근과 이동근 2남을 두었는데, 장남 이형근은 큰아버지인 이희성의 양자로 들어갔다. 쌍효자에 대한 자세한 내용은 뒤에 정효각을 다룰 때 다시 살펴보기로 하자.
유화당 창건주 화암 이해준
인천이씨 29세 이해준李海準[1816-1886]은 호가 화암華庵이다. 국동에 유화당을 처음 건립한 인물이다. 또 자신의 증조부인 쌍효자 이희성과 이희효의 효행을 세상에 알리는 일에 노력했다. 그는 고을 유림과 함께 쌍효자 효행 사실을 문서로 만들어 고을수령·암행어사·경상도관찰사 등에게 보내는 등 쌍효자 효자정려의 일등공신이었다. 부인은 하산장씨와 창녕조씨 두 분이었는데 슬하에 아들을 두지 못해 동생인 이해봉의 장남 이병규를 양자로 삼았다.
의금부 도사 남호 이병규
이병규李秉珪[1844-1926]의 처음 이름은 이문환, 호는 남호南湖다. 인천이씨 30세인 그는 조상의 업적을 더 높이고 후손을 번창케 하는 등 문중을 정비하고 빛내는 일에 공이 있었다. 그는 척암 김도화에게 학문을 익혔고, 1885[고종 22]년 의금부 도사에 임명됐다. 1916년에는 아버지 이해준이 처음 건립한 유화당을 중수해 지금의 모습으로 만들었고, 대구 유일 대문형 정려각인 정효각과 국동 문중 종택인 남호정사를 건립했다. 부인은 영인 옥산장씨로 슬하에 이돈엽·이영엽·이기엽과 딸 한 명을 두었다.
에필로그
도남동 유화당을 알기 위해서는 먼저 인천이씨 쌍명재공파 국동 문중에 대한 이해가 있어야 한다. 문중과 재실은 서로 떼려야 뗄 수 없는 관계에 있다. 재실은 문중을 담는 그릇이요, 문중은 재실이란 그릇에 담기는 내용물이기 때문이다. 350년 내력 인천이씨 국동 문중이 있었기에 유화당과 남호정사가 있는 것이고, 유화당과 남호정사가 있기에 그곳에서 살다간 국동 문중 사람들의 이야기가 실감나게 전해질 수 있는 것이다. 이제부터 유화당, 정효각, 남호정사에 대한 이야기를 본격적으로 시작해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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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월장릉 배식단 : 단종을 위해 목숨을 바친 충신위 32위, 조사위 186위, 환자군노위宦者軍奴位 44위, 여인위女人位 6위, 모두 268위의 영령을 추모하기 위해 매년 제사를 지내는 제단이다.
○壽職 : 과거 왕조 국가에서 해마다 정월에 80세 이상의 관원과 90세 이상의 서민에게 은전恩典으로 주던 벼슬.
○贈職 : 국가에 공로가 있거나 학문·효행 등이 뛰어난 인물이 죽은 뒤에 관직이나 품계를 더해주는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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