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리피리를 찾아간 섬, 소록도
김도솔
소록도, 언젠가 꼭 한 번은 가 봐야지 하는 막연한 생각을 품고 있던 곳, 그러면서도 선뜻 나설 수 없었던 건 어릴 때부터 들어오던 소록도에 대한 호기심보다는 문둥이란 말에 대한 두려움이 앞선 때문이었는지도 모르겠다.
소록도는 어린 사슴과 비슷하다고 해서 붙여진 이름만큼이나 조용하고 아름다운 섬이지만 1916년에 설립된 자혜의원으로 시작된 한센병 환자를 위한 ‘국립 소록도병원’이 들어서면서부터 우리들에게 유명한 섬이 되었다. 과거에는 한센병 환자들의 애환이 깃들어 있는 섬이었지만 현재는 500여 명의 환자들이 애환을 딛고 사랑과 희망을 가꾸고 있다. 섬의 면적은 4.42㎢에 불과하지만 깨끗한 해안 절경과 역사적 기념물 등으로 인해 고흥군의 새로운 관광 명소로 떠오르고 있다. 고흥반도를 가로질러 녹동항 부둣가에 서면 600m 전방에 작은 사슴처럼 아름다운 섬 소록도가 한눈에 들어온다. 예전에는 녹동항에서 운항되는 뱃길로만 드나들 수 있었지만 2009년도에 개통된 소록대교로 인해 국도 27호선을 이용하여 소록도까지 이동 가능하며 이로 인해 섬을 찾는 관광객이 늘어나고 소록도 주민들이 섬 밖으로 왕래하기가 편리해졌다.
전라남도 고흥군 도양읍 소록리에 속한 섬. 고흥반도 녹동항에서 남쪽으로 약 600m 지점에 있다. 남쪽은 거금도와 인접해 있고, 그 사이에 대화도·상화도·하화도 등 작은 섬이 있다. 지형이 어린사슴과 비슷하여 소록(小鹿)이라 했다고 한다.
최고지점은 118m로 섬의 북쪽에 솟아 있으며, 대부분 100m 내외의 낮은 구릉지를 이룬다. 해안은 드나듦이 심하며, 북서쪽 해안을 제외하면 사빈 해안이 대부분이다. 기후는 대체로 따뜻하고, 비가 많다. 섬 전체가 울창한 산림과 바다가 어우러져 아름다운 경치를 이룰 뿐 아니라, 도로변 곳곳에는 공원이 조성되어 있고, 동쪽 해안에는 해수욕장이 있다. 섬의 남단에 소록도 등대가 있고 각종 의료시설 및 복지시설을 비롯하여 종교단체가 많다.
일찍부터 한센병 환자들의 집단거주지로 자리 잡았으며, 한센병 치료를 위해 건설된 국립소록도병원은 1916년 도립자혜의원으로 출발하여 지금은 한국에서 가장 규모가 크고 시설이 잘 되어 있다. 주민은 한센병 환자와 국립소록도병원에 근무하는 직원 및 그 가족이 대부분이다. 취락은 주로 북동쪽 해안가에 집중 분포하며, 환자촌은 도로를 중심으로 병사 지대와 직원 지대로 구분된다.
농산물로는 마늘·생강·유자 등을 생산하며, 특히 마늘은 생산량이 많아 다른 지역으로 반출하고 있다. 연근해에는 장어·감성돔 등의 어류가 회유하지만, 어업활동은 전혀 이루어지지 않는다. 도로는 해안이나 낮은 저지를 따라 잘 정비되어 있으며, 녹동항에서 출발하는 소록도병원 전용 도선과 일반용 도선이 매일 수시로 운항된다. 면적 3.742㎢, 해안선길이 12km, 인구 708명이다.(2016). (다음 백과)
섬에 도착한 건 8월의 태양이 눈을 뜰 수 없을 만큼 강하게 내리쬐는 오전 11시경이었다. 주차장에 차를 주차하고 해안가로 가자 먼저 ‘보리피리 휴게소’가 이름만큼이나 정답게 다가온다. 더위를 식힐 음료수를 산 뒤 주변을 돌아보자 수탄장이 눈에 들어온다. “과거 직원 지대와 병사 지대를 구분하는 경계지역이었던 이곳은 병원에서 감염을 우려하여 환자 자녀들을 직원 지대에 있는 보육원에서 생활하게 하였으며, 병사 지대의 부모와는 이 경계지역 도로에서 한 달에 한 번 면회를 허용하였다. 부모와 자녀가 도로 양옆으로 갈라선 채 일정한 거리를 두고 눈으로만 혈육을 만나야 했던 이 장소를 환자들은 <탄식의 장소>라는 의미로 <수탄장>이라 불렀다.”라는 안내 표지판에는 길 양 옆으로 길게 늘어선 채, 더 이상 다가갈 수 없는 한센인 부모와 자녀들의 면회 장면이 담긴 사진이 먼저 가슴 먹먹하게 눈에 들어왔다. 공기로 전염이 될까 봐 바람의 방향에 따라 서야 하는 위치가 달랐던 한센인 부모와 자녀들, 부둥켜안는 건 고사하고 아이들의 이름조차 마음 놓고 부를 수 없었던 그들의 면회 장소를 보면서, 오늘 하루가 처음부터 만만치 않으리라는 예감을 하며 무거운 걸음을 떼어놓는다.
여기서부터 중앙공원까지는 방문객들의 증가에 따른 혼잡과 차량 통제로 인한 보행자 전용 통행로인 총길이 612m의 데크로드가 해안을 따라 길게 이어져 있다. 데크로드를 따라가다 보니 제비 선창이 보인다. 이곳은 직원이나 외부인이 이용하던 북관사 선창과는 구별되어 한센인들이 주로 이용하던 곳으로 이곳 이름이 된 제비호는 경계선 직원이 운행하던 감시선으로 도주하는 한센인들을 잡기 위해 당시에는 보기 드문 동력선으로 제비처럼 빠르다고 해서 제비호로 불렀다고 한다. 중앙공원으로 가는 해안선은 한센인들의 아픔은 아랑곳없이 하늘색과 바다색이 하나인 듯 푸르기만 하고 모래사장과 해안선은 조용하고 깨끗하여 감탄사가 절로 나올 만큼 절경을 이루고 있다. 데크로드 중간중간 설치되어 있는 표지판에는 신사, 검시실, 감금실, 녹산초등학교, 성실 고등 성경학교, 만령당, 식량창고, 마리안느, 마가렛 간호사님 등의 사진과 함께 간단한 설명을 볼 수 있어 우리가 봐야 할 곳을 미리 알려주고 있다. 데크로드를 지나서 처음 닿은 곳에 “애환의 추모비”가 세워져 있다. “1916년 일본 총독부 영에 의해 개원된 국립소록도 병원의 원생들이 1945년 8월 15일 해방을 맞아 자치권을 요구하다 이를 거부하는 자들에 의해 협상 대표자 84명이 처참하게 학살당하는 참사가 있었다. 참사 56년 만인 지난 2001년 12월 8일에 화장, 매몰되었던 유골 발굴 작업과 함께 학살당했던 이곳에 추모비를 세워 84명의 희생이 헛되지 않음과 지구상에 있는 한센인에 대한 이해와 온전한 인권 회복을 소원하며, 다시는 이 세상에 이 같은 죄악이 저질러지지 않기를 기도하고 추모해 주기를 바란다”는 추모비의 내용에 나도 모르게 온몸에 소름이 돋는다.
중앙공원으로 들어서자 한센인들의 애환만을 생각했던 것과는 달리 공원이 너무나 정갈하게 정돈되어 있어 수목원을 보는 듯 아름답게 가꾸어져 있는 모습에 한 번 더 놀란다. 조금 더 들어가자 이내 검시실과 감금실이 으스스한 분위기로 서 있다. 함께 간 일행은 벌써 속이 메스껍다며 안으로 들어서기를 꺼린다. 검시실은 일제 강점기에 일본인이 한센병 환자들을 대상으로 시체 해부를 했던 곳으로 소록도의 인권유린의 아픈 역사를 간직하고 있다. 검시실 또는 해부실이라 불리는 이 건물은 두 칸으로 나누어져 있으며, 입구의 넓은 방은 사망환자의 검시를 위한 해부실로 사용되었고 안쪽은 주로 검시 전 사망환자의 시신을 안치하는 영안실로 사용되었다. 모든 사망자는 본인이나 가족의 의사와는 관계없이 우선 검시 절차를 마친 뒤에야 장례식을 거행할 수 있었고 시신은 구북리 뒤편의 바닷가에 있는 화장터에서 화장되었다. 건물 내부에 들어서자 중앙에 콘크리트로 된 검시 대가 덩그러니 놓여 있는데 시신을 세척할 수 있는 세척 시설과 밑으로 배수로가 연결되어 있는 게 그대로 보존되어 있어 끔찍한 당시의 상황을 짐작하게 한다. 이러한 상황을 보고 소록도 환자들에게 “3번 죽는다”라는 일화가 전해지고 있는데 그 첫 번째는 한센병 발병, 두 번째는 죽은 후 시신 해부, 세 번째는 화장으로 세 번을 죽는다고 한다.
감금실은 일제 강점기 인권탄압의 상징물이다. 붉은 벽돌과 육중한 담으로 둘러싸여 있으며 남과 북 두 건물이 회랑으로 연결된 H자 형태로 방은 철창이 설치되어 있고 각 실의 한쪽 마룻바닥을 들어 올리고 용변을 볼 수 있는 형무소와 유사한 구조로 되어있다. 한센병 환자들은 조선 나병 예방령에 따라 직업의 자유, 거주이전의 자유, 이동의 자유 등을 박탈당하였으며, 소록도에 수용된 환자들은 원장의 자의적인 판단에 따라 변론의 기회조차 없이 이곳에서 감금, 감식, 금식, 체벌 등의 징벌을 받아야 했고 강제 노역이나 온갖 가학에도 굴종케 하고, 요양소 운영에 대한 저항을 미연에 방지하기 위한 장소로 활용되었다. 일제 말기에는 부당한 처우와 박해에 항거하던 환자들이 무수히 이곳에서 사망하거나 불구가 되었으며, 출감 시에는 예외 없이 정관을 절제당하였다고 한다. 작은 방으로 된 감금실에는 뜯긴 벽지가 너덜거리는 사이로 콘크리트 벽에 새겨진 희미한 글씨들이 먼저 눈에 들어온다. ‘5되 사람 죽여’ ‘이것도 죄이런가’ ‘정말 억울하다’ ‘정의는 부활하나니 불의는 패하고 정의는 승리한다’ ‘하나의 문둥 이리’ ‘웃어야 한다’ ‘고향’ ‘원장과 이야기했다고 감금 10일’ ‘공부할 시간을 달라는 것이 죄냐’ ‘이뇸 교독’ 미처 알아볼 수도 없는 글씨들이 가슴에 아프게 새겨진다.
두 건물을 벗어나 밖으로 나오자 8월의 무더위와 건물 안의 질식할 것만 같은 분위기에 그제야 등이 흥건히 젖어있음을 알 수 있었다. 나무 그늘에 앉아서 잠시 더위를 식히는 중에도 눈길로만 서로를 바라볼 뿐 누구도 말이 없다.
다시 공원을 천천히 걸으며 조각처럼 잘 가꾸어진 수목들을 바라보노라니 오랜 기간 공원을 가꾸기 위한 그들의 노고가 어떠했으리라는 것이 짐작이 가고도 남는다.
사실 한센병이란 말은 아직도 조금은 생소하다. 어릴 때 들은 바로는 나병이나 문둥병으로만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우리나라에서 처음 나병으로 의심할만한 기록이 등장하는 것은 고려 고종 때에 간행된 〈향약구급방 鄕藥救急方〉에서이다.
현존하는 가장 오래된 의서인 〈향약구급방〉에는 천포창(天泡瘡), 양매창(楊梅瘡), 음창(淫瘡) 등을 가장 악독한 창(瘡)이라 기록하고 있는데, 이중의 하나가 나병이 아닐까 추정된다. 이후 발간된 〈삼국유사〉·〈고려사〉·〈향약집성방〉 등에 나병으로 의심되는 병의 이름이 기록되어 있으나 나병이라는 문자가 뚜렷하게 표기된 것은 조선왕조시대에 들어서이다.
조선 세종대(1419∼50)에는 이미 나병의 전염설을 폈고 격리 구호 치료라는 나병 관리 개념을 채택한 사실이 〈세종실록〉 권 41에 기록되어 있다. 문종대(1450~52)에는 구료 막(救療幕)을 설치하고 1백여 명의 나환자를 남녀별로 수용하여 고삼원(苦蔘元)이라는 약으로 치료하면서 바닷물에 목욕을 시켰다는 기록이 〈문종실록〉 권 7에 나타나고 있다. 광해군대(1608∼23)에는 경상·강원·충청도에 환자를 수용, 치료케 하였으며, 도사(都事)로 하여금 각처를 순시케 하여 환자의 상황을 등록시키되 만약 태만한 자가 있으면 엄벌토록 하였다는 기록이 〈광해군일기〉 권 52에 남아 있다." <한센병-다음 백과>
조선 중기에는 전래의 무속신앙도 큰 몫을 했고 속설에 의한 미신요법도 성행하였다. 즉 기도, 주술, 무복, 속설 요법을 사용하거나 인육(人肉)이나 사람의 장기를 약재로 썼다.
그래서였는지 어릴 때는 나병 환자라고 하면 어린아이를 잡아다가 먹어야만 병이 낫기 때문에 어린아이를 보면 무조건 잡아간다고 해서 나병이나 문둥이란 말은 공포의 대상이었다. 그런 나병 환자들이 소록도에 집단 거주를 한다는 말은 전설처럼 소록도에 대한 호기심을 키우기에 충분했다.
그런 나병이, 아니 한센병이 오늘 내 가슴에 이렇게 아프게 와닿는 건 한하운 시인의 시를 만나면서부터였다.
아버지가 문둥이올시다
어머니가 문둥이올시다
나는 문둥이 새끼올시다
그러나 정말은 문둥이가 아니올시다.
하늘과 땅 사이에
꽃과 나비가
해와 별을 속인 사랑이
목숨이 된 것이올시다.
세상은 이 목숨을 서러워서
사람인 나를 문둥이라 부릅니다.
호적도 없이
되씹고 되씹어도 알 수는 없어
성한 사람이 되려고 애써도 될 수는 없어
어처구니없는 사람이올시다.
나는 문둥이가 아니올시다
나는 정말로 문둥이가 아닌
성한 사람이올시다.
『나는 문둥이가 아니올시다』 전문 / 한하운
한하운 시인의 보리피리 시비 앞에서 오늘 내가 이곳에 온 이유를 되짚어 본다.
한하운 시인의 『보리피리』라는 시는 익히 알고 있었지만 『나는 문둥이가 아니올시다』라는 시를 처음 본 순간 목구멍이 콱 막히면서 뜨거운 것이 울컥 올라왔다. 아무 생각 없이 읽은 시가 가슴에 꽂혀 부끄러운 눈물을 쏟았다. 시를 통해 그가 나병환자로서 어떤 삶을 살았을지, 어떤 감정으로 평생을 시를 썼을지 감히 조금은 이해할 수 있을 것 같았다. ‘해와 별을 속인 사랑이 목숨이’ 됐을 뿐 문둥이의 삶은 누구의 선택도 아니었다는 절규에 가까운 그의 외침이 너무 절절해, 부끄러운 내가 스스로를 참회할 수밖에 없도록 만든 것일까
그때부터 소록도는 호기심과 두려움의 대상이 아닌 꼭 가봐야 할 필요불가결의 대상이 되었다.
한편 소록도 하면 푸른 눈을 가진 두 분의 천사를 빼고는 얘기할 수가 없다.
"오스트리아 출신 간호사 마리안느와 마가렛은 인스브루크 간호학교를 졸업하고 1960년대 꽃다운 나이에 한국에 온 뒤 소록도에서 40년 이상 한센인을 위해 헌신·봉사하다가 2005년 11월 22일 지인들에게 편지만을 남기고 조용히 고향 인스브루크로 돌아갔다. 이제 자신들은 나이가 70세를 넘어서 소록도 사람들에게 불편을 줄 뿐 도움이 되지 못하며, 그동안 한국의 사회복지시스템도 발전하였고 의료 인력이나 의약품도 충분히 갖추어져 있기 때문에 `천막을 접고` 슬프고도 기쁜 마음으로 이별을 고한다는 것이었다. 그들은 오스트리아 평신도 재속회(在俗會)인 `그리스도 왕 시녀회`에 입회하여 일생을 독신과 청빈을 지키며 타인들을 도우며 살겠다고 다짐한 간호사일 뿐 수녀는 아니었다. 그들은 서원대로 간호사로 가장 낮은 곳에서 희생·봉사하며 순명과 겸손의 모범을 보여주었다.
한센병 환자들 사이에서 태어난 아이는 감염을 막기 위하여 부모와 격리하여 보육할 필요가 있었다. 마리안느 간호사는 이 아이들을 부모 대신 양육하는 일부터 시작하였다. 처음에는 부모들이 아이를 빼앗겼다고 섭섭하게 생각하는 사람도 있었으나, 이내 마리안느가 정성껏 길러주어 고맙게 생각하게 되었다. 부모와 자식들이 서로 먼발치에 떨어져 바라보는 방식으로 만나는 안타까운 상황이 연출되었지만 많은 아이들은 사랑 가운데 잘 자라났다. 그들 가운데 성장하여 신부가 된 사람도 2, 3명이나 있었다. 한센병은 어린 나이에 발병하는 경우가 많은 질병이다. 또한 감염 우려와 한센인에 대한 사회적 편견 때문에 엄격히 격리되어야 했다. 그렇기에 한센병 환자들에게 필요한 것은 치료와 함께 사랑이었다. 두 간호사는 그 역할에 충실하였다. 그들은 새벽에 출근하여 우유를 끓여 병실을 돌며 환우들을 대접하고 만나는 일로 일과를 시작하였다. 우유 한 잔과 영양제를 얻기 위해 부락에서 찾아온 사람들도 깍듯하게 챙겼습니다. 환우들에게 투약 치료를 하는 것은 물론 진물 나는 신체 부위에 코를 박고 냄새를 맡아 증상을 확인하며 장갑도 끼지 않은 맨손으로 약을 바르고 심지어 자기 무릎 위에 환자의 다리를 얹어놓고 고름을 짜내고 약을 바르고 굳은살을 깎아내었다. 직원이나 환자들 생일 등을 챙겨 집으로 초대하여 스스로 구운 케이크나 식사를 대접하였다. 환자들의 마음까지 치료하는 사랑의 실천이었습니다. 이에 감화된 많은 한국 사람들도 함께 나섰다. 완치되어 소록도를 떠나는 사람들에게 정착금을 주어 재활을 도왔다. 이 모든 비용은 두 분이 오스트리아 가톨릭 부인회 등에 도움을 요청하여 충당하였다. 이런 일을 하는 과정에서 작은 갈등이 생기고 재활 정착금과 관련하여 두 분을 속이는 실망스러운 일들도 있었지만 그들은 모든 것을 사랑으로 덮고 극복하였다.
천천히 공원을 한 바퀴 돌면서 당종려 나무와 나한송, 나사백(가이스카 향나무) 등을 둘러보다 보니 어느새 예수상이 있는 벽돌공장터까지 왔다. 이곳 사람들에게 ‘저주받은 땅’이라고 불리는 벽돌공장터, 이곳이 저주의 땅이라고 회자되어 지금까지 내려온 이유는 이렇다.
1933년도 소록도병원의 4대 일본인 원장 수호는 당시 1200명이었던 원생의 인원을 3000명 이상 수용 가능하도록 벽돌 제조 공장을 계획하고 소록도에 벽돌공장을 세운다. 초기에는 중국 기술자들이 와서 기술 전수를 해주었지만 본격적인 일은 모두 이곳 소록도 환자들에 의해 이루어졌다. 초창기에는 최초의 개화된 건물에 대한 기대와 우리의 힘으로 집을 짓는다는 보람이 있었다. (당시에는 초가집과 나무로 된 일본식 집만 존재) 노동에 대한 보수도 많지는 않았지만 있었다. 하지만 이곳이 한센환우들로부터 저주받은 땅이라고 불리게 된 것은 중일전쟁(1937년) 때부터다. 병원 재정의 많은 부분이 전쟁비용으로 들어가게 되자 환자들의 노동력으로 일정 부분을 충당하게 된다. 즉 벽돌공장에서 생산한 벽돌을 팔아서 병원을 운영하기 시작했다. 강제노동이 시작된 것이다. 수입증대를 위해 1년 총생산량을 할당하여 소록도에 있는 마을별로 분배하였다. 이렇게 하다 보니 공사가 무리하게 진행되었다. 벽돌을 만들기 위해서는 많은 양의 흙을 다져 가져와야 했다. 환자들은 불편한 몸을 이끌고 많은 양의 나무를 해 와야 했고, 그것들로 3일간 불을 지펴야 했다. 병원에서는 빠른 생산을 위해 식지도 않은 것을 가마에서 꺼내도록 시켰다. 그러다 보니 감각이 없던 손에 더 큰 화상을 입게 되고 환우들의 병은 이 벽돌 제조과정에서 훨씬 심각해졌다. 이런 고된 일을 견디지 못하거나 일을 하지 않고 반항하면 어김없이 감금실(소록도 감옥)에 갇혔고, 출소하면 바로 강제로 단종수술(정관수술)을 받아야 했다. 그래서 당시 사람들은 “벽돌을 생산하면서 환자 병신도 같이 생산했다”라고 이야기한다. 소록도에서 탈출하는 환자들이 속출하였다. 바다로 탈출을 시도하다 잡히면 더 혹독한 일을 당했고, 수영을 하지 못해서 죽은 이들도 많이 있었다. 그래서 이곳 소록도 벽돌공장터는 ‘저주받은 땅’으로 불리게 되었다. 당시 환자들은 이곳을 쳐다보기도 싫어했다고 한다. 지금은 벽돌공장의 굴뚝자리에 십자고상이 서 있다. 저주받은 땅이라고 부르던 벽돌공장터와 십자고상은 너무나 잘 어울린다. 십자가의 예수님은 저주의 상징이기 때문이다. 저주의 상징이 지금은 구원의 상징이 되었다. 이것이 신앙이다. 그래서 이곳 모든 환우들도 위로를 받는다. 자신들은 천벌 때문에 그런 고통을 당한 것이 아닌, 자신들의 고통과 예수님의 고통은 닮은 것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소록도의 벽돌공장터는 특별히 고통받는 이들에게 많은 생각을 하게 해 준다.
얼굴도 한번 본 적 없는 한센인들의 아픔으로 소록도를 돌아보는 내내 무거워진 발걸음을 돌려 돌아오는 길은 파란 하늘빛처럼 아름답기만 하던 바닷물이 내 가슴에 멍이 되어 시퍼렇게 밀려왔다.
ㅡ문예지 『작가 사상』제16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