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덕천군파 종친 대화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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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조 고황제 스크랩 전주이씨(全州李氏)시조및 종파
이창주 추천 0 조회 234 13.07.18 21:05 댓글 0
게시글 본문내용

 

전주이씨(全州李氏)는

우리나라 본관별 성씨 인구 순위에서

김해김씨(412만5000명), 밀양박씨(303만1000명) 다음으로 많은 성씨이다.

 

2000년 인구조사에서 전주이씨는 260만9890명으로 조사되었는데,

이는 전체 인구의 5.7%를 차지하는 것이다.

 

전주이씨의 파는 총 122개로 나뉘어 있는데,

그중 효령대군파, 광평군파, 덕천군파, 밀성군파, 양녕대군파 등이 번창했다.

전주이씨는 조선왕실 가문으로 유명한데,

그 시조는 신라 말에 사공(司功) 벼슬을 지낸 이한(李翰)이다.

 

이한의 22세손이 태조 이성계(李成桂)이다.

조선은 총 27대(대한제국의 순종을 제외하면 26대) 왕을 배출했으며 500여년을 통치했다.  

전주이씨 분파는 122개로 알려져 있는데, 크게 태조 이성계 이전과 이후로 나뉜다.

태조 이성계 이전의 분파는 또다시 고조부인 이안사(李安社) 선대에서 갈라진 분파와,

이안사 이후 이성계 이전에 갈라진 분파로 나뉜다.

 

 

시조 이한(李翰)은,

덕망(德望)이 높고 문장(文章)이 탁월(卓越)하여

신라(新羅) 문성왕(文聖王)때 사공(司空) 벼슬을 지냈으며

그후 대대(代代)로 신라(新羅)시대(時代)에 벼슬을 해왔다.

 

18세손(世孫)되는 이안사(李安社)

대대(代代)로 전주(全州)에 살아온 호족(戶族)이었는데

새로 부임(赴任)한 지주의 탐학(貪虐)을 규탄(糾彈)하자

 

지주가 군사(軍事)를 휘둘러 보복(報復)하려하여 그를 피해

강원도(江原道) 삼척(三陟)으로 피했다가, 다시 함경도(咸鏡道)를 거처

 

()나라의 간동으로 가 그곳에서 다루가치 벼슬을 지냈고

증손자(曾孫子) 되는 이자춘(李子春)이 고려시대(高麗時代)에 공을 세워

사복경(司僕卿)에 이르렀다.

 

이자춘(李子春)의 아들,

(), 시조(始祖) 22세손(世孫) 이성계(李成桂)에 이르러

어지러운 국정(國政)을 바로잡고,

 

 배극렴(裵克廉) 52명의 추대(推戴)로 왕위(王位)에 오르게 됨으로

조선왕조(朝鮮王朝)를 창건(創建), 전주이씨(全州李氏)의 중시조(中始祖)가 되었다.



이안사 이전의 분파로는

이한의 14대손인 이단신(李端信)을 파조로 하는 문하시중공파,

15대손 이거(李巨)를 파조로 하는 평장사공파,

 

17대 이영습(李英襲)을 파조로 하는 주부동정공파(主簿同正公派),

 이안사의 종손 이윤경(李允卿)을 파조로 하는 대호군공파,

이한의 21대손 이귀을(李歸乙)을 파조로 하는 문하평리공파 등이 있다.

 

이안사 이후, 태조 이성계 이전의 분파로는

이안사의 아들인 안천(安川), 안원(安原), 안풍(安豊), 안창(安昌), 안흥(安興) 등의 5대군파와

이행리의 아들인 함녕(咸寧) 등 7대군파, 춘의 아들인 완창(完昌) 등 4대군파,

 

이자춘의 아들이며 태조의 서형제(庶兄第)인 완풍대군파(完豊大君派)와

의안대군파(義安大君派) 등 18개가 있다.  

 

전주이씨의 분파 중에서 가장 번성한 파는

세종의 열세번 째 아들 이침(李琛)을 파조로 하는 밀성군파(密城君派)이다.

 

그다음이 정종의 열 번째 아들 이후생(李厚生)을 파조로 하는 덕천군파(德泉君派)가 있고,

세종의 다섯째 아들 이여(李璵)를 파조로 하는 광평대군파(廣平大君派)가 번창한 가문으로 알려진다.

그리고 태조 이성계 후손의 분파로는 그 후손이 99파(고종까지 大君 25, 君 74명)로 알려져 있으나,
미혼으로 죽거나 후사가 없는 대군, 군이 20여명 되기 때문에 그 분파는 많이 줄어든다.

그래서 현재 전주이씨대동종약원에 등록된 파종회는 총 86개파가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여기서 알아둬야 할 것은 각 본관의 시조 또는 파조는 왕(임금)이 아니라,

그 아들 또는 형제를 시조로 한다는 사실이다.

그것은 왕(임금)이 모든 백성의 어버이이기 때문에

 

특정 성씨의 시조나 파조로 쓸 수 없기 때문이다.

그래서 태조 이성계를 시조로 하는 파가 없는 것이며,

경순왕을 시조로 하는 파도 존재하지 않는 것이다.

 

그래서 수많은 대군이나 군파(君派)는 있어도

왕(임금)을 시조로 하는 본관(本貫)이나 파(派)는 존재하지 않는 것이다. 

 

[ 분파(分派), 계파(系派) ]

  전주이씨(全州李氏)의 분파(分派)는 122파로서

거의, 왕자대군(王子大君, 嫡)과 왕자군(王子君, 庶)을 파조로 하고 있으며,

시대 구분에 따라 세 갈래로 나눌 수 있다.

 

즉, 이태조의 고조부인 안사(安社)의 상계(上系)에서 갈라진 파, 안사 이후 이태조 이전에 갈라진 파, 이태조(李太祖)의 후손으로 왕자대군과 왕자군을 파조로 하는 파이다.


  안사(安社, 18世) 이전의 분파로는,

시조 한의 14대손인 단신(端信)을 파조로 하는 문하시중공파(門下侍中公派),

15대손 거(거)를 파조로 하는 평장사공파(平章事公派),

 

17대손 영습(英襲)을 파조로하는 주부동정공파(主簿同正公派),

안사의 종손 윤경(允卿)을 파조로 하는 대호군공파(大護軍公派),

한의 21대손 귀을(歸乙)을 파조로 하는 문하평리공파(門下評理公派) 등이 있다.


  안사(安社, 18世) 이후, 이태조 이전의 분파로는

안사의 아들인,

안천(安川) ·안원(安原) ·안풍(安豊) ·안창(安昌) ·안흥(安興)의 5대군파(五大君派),

행리의 아들인,

 

 함령(咸寧) ·함창(咸昌) ·함원(咸原) ·함천(咸川) ·함릉(咸陵) ·함양(咸陽) ·

함성(咸城)의 7대군파(七大君派), 춘의 아들인 완창(完昌) ·완원(完原) ·

완천(完川) ·완성(完城)의 4대군파(四大君派),

 

자춘의 아들이며 태조의 서형제(庶兄弟)인 완풍군파(完豊君派)와 의안대군파(義安大君派) 등

18개의 파가 있다.


  태조의 후손 분파(고종 이전까지)는 일반적으로 99파(25大君 ·74君)로 알려져 있지만

미취졸(未娶卒), 즉 미혼으로 죽었거나 무후(無後), 즉 후사(後嗣)가 없는 대군 ·군이 20명 정도가

되므로 실제로는 그 수가 줄어든다.
  
  역사적으로 전주이씨(全州李氏)는

방대한 씨족기반 위에서 정치권력 또는 정치세력의 중추를 이루었다.


  즉, 상신(相臣, 三議政) 22명, 문형(文衡, 大提學) 7명을 배출하여 타씨족을 압도했으며,

문과 급제자 873명을 내어 이씨의 문과 급제자 총 3,190명의 27 %를 차지하였다.


  전주이씨(全州李氏)의 100여 파 중에서 으뜸가는 명가는

밀성군파(密城君派, 琛, 세종(世宗)의 아들)로서,

6명의 정승(政丞)과 3대 대제학(大提學, 홍문관, 예문관, 정2품 벼슬)을 배출했으며,

덕천군파(德泉君派, 厚生, 정종의 아들)가 부자 대제학 등 3명의 대제학과 영의정 1명을 내어

밀성군파에 버금간다.


 그 다음으로는 3명의 정승을 배출한 광평대군파(廣平大君派, 여(璵), 세종의 다섯째 아들),

정승 2명을 배출한 선성군파(宣城君派, 무생(茂生), 정종의 아들),

 

정승 1명과 많은 문 ·무관을 배출한 효령대군파(孝寧大君派, 보(補), 태종의 둘째 아들) 등이

뛰어나고,

무림군파(茂林君派, 선생(善生), 정종의 아들)와 덕흥대원군파(德興大院君派, 초 , 선조의 생부(生父))는 무관(武官)의 집으로 유명하다.


  오늘날 전주이씨(全州李氏)의 후예가 얼마나 되는지 정확히 알 수 없지만

전주이씨 대동종약원(全州李氏大同宗約院) 측에서는 대략 200만으로 추산하고 있으며,

 

100여 파 가운데 후손이 가장 번창한 파는 효령대군파(孝寧大君派)가 으뜸이고

광평대군파(廣平大君派) ·덕천군파(德泉君派) ·밀성군파(密城君派) ·양녕대군파(讓寧大君派) 등이다.

 

 

시중공파(侍中公派)
평장사공파(平章事公派)
주부공파(主簿公派)


안천대군파(安川大君派)
안원대군파(安原大君派)
안풍대군파(安豊大君派)
안창대군파(安昌大君派)

안흥대군파(安興大君派)
함녕대군파(咸寧大君派)
함창대군파(咸昌大君派)
함원대군파(咸原大君派)
함천대군파(咸川大君派)
함릉대군파(咸陵大君派)

함양대군파(咸陽大君派)
함성대군파(咸城大君派)
완창대군파(完昌大君派)
완원대군파(完原大君派)


완천대군파(完川大君派)
완성대군파(完城大君派)
영성대군파(永城大君派)
완풍대군파(完豊大君派)
의안대군파(義安大君派)

진안대군파(鎭安大君派)
익안대군파(益安大君派)
회안대군파(懷安大君派)
의안대군파(義安大君派)


의평군파(義平君派)
순평군파(順平君派)
선성군파(宣城君派)

종의군파(從義君派)
진남군파(鎭南君派)
수도군파(守道君派)


임언군파(林堰君派)
석보군파(石保君派)


덕천군파(德泉君派)


임성군파(任城君派)
도평군파(桃平君派)
장천군파(長川君派)


정석군파(貞石君派)
무림군파(茂林君派)
양녕대군파(讓寧大君派)
효령대군파(孝寧大君派)

성녕대군파(誠寧大君派)
경녕군파(敬寧君派)
함녕군파
온녕군파(溫寧君派)


근녕군파(謹寧君派)
혜녕군파(惠寧君派)
희녕군파(熙寧君派)
후녕군파(厚寧君派)


익녕군파(益寧君派)
임영대군파(臨瀛大君派)
광평대군파(廣平大君派)

금성대군파(錦城大君派)
영응대군파(永膺大君派)
화의군파(和義君派)


계양군파(桂陽君派)
의창군파(義昌君派)
한남군파(漢南君派)
밀성군파(密城君派)
수춘군파(壽春君派)


익현군파(翼峴君派)
영풍군파(永豊君派)
영해군파(寧海君派)


담양군파(潭陽君派)
덕원군파(德源君派)
창원군파(昌原君派)


월산대군파(月山大君派)
인성대군파(仁城大君派)
제안대군파(齊安大君派)


계성군파(桂城君派)
안양군파(安陽君派)
완원군파(完原君派)


회산군파(檜山君派)
봉안군파(鳳安君派)
견성군파(甄城君派)
익양군파(益陽君派)


이성군파(利城君派)
경명군파(景明君派)
전성군파(全城君派)
무산군파(茂山君派)

영산군파(寧山君派)
운천군파(雲川君派)
양원군파(楊原君派)
복성군파(福城君派)


해안군파(海安君派)
금원군파(錦原君派)
영양군파(永陽君派)

덕양군파(德陽君派)
봉성군파(鳳城君派)
덕흥대원군파(德興大院君派)
영창대군파(永昌大君派)

임해군파(臨海君派)
신성군파(信城君派)
순화군파(順和君派)
인성군파(仁城君派)


경창군파(慶昌君派)
경평군파(慶平君派)
인흥군파(仁興君派)
영성군파(寧城君派)


능원대군파(綾原大君派)
소현세자파(昭顯世子派)
인평대군파(麟坪大君派)
용성대군파(龍城大君派)


숭선군파(崇善君派)
낙선군파(樂善君派)
은언군파(恩彦君派)


은신군파(恩信君派)
은전군파(恩全君派)



<본관지>
전라북도 전주시

 

▣ 과거급제자(조선시대)
 

이부(李溥, 1444 甲子生) : 문과(文科) 세조14년(1468) 중시 갑과(甲科) 장원급제
이목(李穆, 1471 辛卯生) : 문과(文科) 연산군1년(1495) 별시 갑과(甲科) 장원급제


이건(李楗, 1505 乙丑生) : 문과(文科) 중종37년(1542) 정시 갑과(甲科) 장원급제
이정빈(李廷賓, 1539 己亥生) : 문과(文科) 명종18년(1563) 알성시 갑과(甲科) 장원급제


이호의(李好義, 1560 庚申生) : 문과(文科) 선조30년(1597) 정시 갑과(甲科) 장원급제
이은로(李殷老, 1554 甲寅生) : 문과(文科) 선조38년(1605) 별시 갑과(甲科) 장원급제
이식립(李植立, 1567 丁卯生) : 문과(文科) 선조38년(1605) 증광시 갑과(甲科) 장원급제


이민구(李敏求, 1589 己丑生) : 문과(文科) 광해군4년(1612) 증광시 갑과(甲科) 장원급제
이경석(李景奭, 1589 己丑生) : 문과(文科) 인조4년(1626) 중시 갑과(甲科) 장원급제
이만(李曼, 1605 乙巳生) : 문과(文科) 인조6년(1628) 별시2 갑과(甲科) 장원급제..등등.. 모두 4331명의

과거 급제자가 있다.


(문과 785명, 무과 374명, 사마시 2719명, 역과 120명, 의과 70명, 음양과 77명, 율과 17명, 주학 169명)  

 

본관 연혁
 

본관소재지 : 전라북도 전주
전주(全州)는 전라북도 중앙에 위치한 지명으로 고대 마한(馬韓)의 원산성(圓山成)에서 유래하며, 

 

백제시대에 완산(完山) 또는 비사벌(比斯伐)·비자화(比自火) 등으로 불렸다가,

555년(위덕왕 2)에 완산주(完山州)로 하였다.

757년(신라 경덕왕 16)에 완(完)을 의역(意譯)하여 전주(全州)로 고쳤고,

 

900년(효공왕 4)에 견훤(甄萱)이 무주(武州: 光州)로부터

이곳으로 후백제의 도읍을 옮겨 백제 부흥의 노력을 하였다.

936년(고려 태조 19)에 후백제가 망하자 안남도호부(安南都護府)가 설치되었다가

940년에 다시 전주로 회복되었다.

 

983년(성종 2)에 12목 가운데의 하나인 전주목이 설치되었으며,

993년에 승화(承化)로 개칭하고 절도안무사(節度安撫使)를 두었다.

995년에는 강남도(江南道) 관하의 전주순의군절도사(全州順義軍節度使)가 되었다가

 

1018년(현종 9)에 다시 안남대도호부로 승격되고,

1022년에 전주목으로 개칭되어 1곳의 속군과 11곳의 속현을 포함하는 큰 고을이 되었다.

 

1310년(충선왕 2)에 전주로 강등되고, 1355년(공민왕 4)에는 부곡으로 강등되었다가

이듬해에 완산부(完山府)로 복구되었다.

1392년(태조 1)에 전주이씨의 본향지라 하여 완산부유수(完山府留守)로 승격되었으며,

 

1403년(태종 3)에 전주부(全州府)로 개칭되어 조선시대 동안 유지되었다.

1895년(고종 32) 지방제도 개정으로 전주부 전주군이 되었고,

1896년 전라북도 전주군으로 개편된 이래 1935년 전주면이 부로 승격하여 독립하고

1949년 전주시로 개칭되었다.  

 

 

 

전주이씨의 유래

우리나라의 김씨가 신라계 김씨와 비신라계 김씨(김해김씨)로 나뉘듯이

이씨(李氏)는 토착 이씨와 외래 이씨(주로 중국계)로 나뉜다.

토착 이씨에는 경주이씨(慶州李氏)를 비롯하여

 

경주이씨에서 갈라져 나온 수많은 본관들이 존재한다.

그리고 경주김씨에서 갈라져 나온 광산이씨(光山李氏), 김수로왕의 김해허씨(金海許氏)에서

갈라져 나온 인천이씨(仁川李氏) 등도 토착성씨라고 할 수 있다.

 

중국계통으로는 연안이씨(延安李氏), 고성이씨(固城李氏), 상산이씨(商山李氏), 안성이씨(安城李氏), 원주이씨 구파(原州李氏 舊派), 태안이씨(泰安李氏), 평산이씨(平山李氏) 등이 있으며,

 만주계통으로는 청해이씨(靑海李氏), 월남계통으로는 정선(旌善), 화산(花山)李氏등이 있다.

그런데 전주이씨에 대해선

외래 성씨라는 주장과 토착 성씨라는 주장이 엇갈린다.

즉, 전주이씨의 시조 이한(李翰)에 대해 경주이씨 분적설’과 ‘당나라 도래설’이 공존하는 셈이다.

<1>먼저 경주이씨에서 분적했다는 ‘경주이씨 분적설’을 살펴보자.

 경주이씨는 신라 6부족 중 하나인 급량부를 본거지로 한 부족의 성씨이다.

 

경주이씨의 시조인 알평(謁平)은 하늘로부터 내려와서 급량부의 촌장이 되었는데,

6부족의 촌장과 논의하여 박혁거세를 왕위에 세웠다.

2대 유리왕 8년(기원전 32년)에 신라건국의 공을 인정받아 아찬(阿餐) 벼슬에 오르고,

 

이씨 성을 사성받았다. 그 후 소판공 이거명(李居明)을 중시조로 삼아 세계를 이어오고 있다.

그런데 경주이씨의 시조인 이알평(李謁平)에서 중시조인 이거명까지의 세대는 밝혀지지 않았다.

조선과 중국은 강대국과 약소국의 관계,조공관계,사대주의 모화사상의 영향으로인해,

 

조선말까지.족보가 감추고있다가,조선말,이알평에서부터 이거명까지의 계보를 찾았는데,

이희두의 동생으로 진두를 거명하며 두(斗)라는 동일 항렬자로 기록되있다.

경주이씨에서 갈라져 나간 합천이씨(陜川李氏) 족보에서 이알평에서 이거명까지의

 

36대 명단을 찾아낸 기록을보면-(희두-계-거명)(진두-백전-공-한) 그중 34대 이희두(李禧斗)의 동생 진두(辰斗)의 손자가 전주이씨의 시조인 사공공 이한(李翰)이고,이한은"대사공은 상서 어사중승 상주국으로서 자금어대를 하사받았고, 배위는 군윤 김은의의 딸인데 이분이 전주이씨의 시조다"라고

기록되있다.

<2>반면 야사에 의하면,이한의 중국 전래설이 있다.

이는 작자와 연대가 밝혀지지 않는 ‘완산실록(完山實錄)’에서 주장된 것이다.

완산실록에는 “우리 시조 사공 공의 휘는 한(翰)이요, 자는 견성(甄城)이시다.

 

공은 본디 중원(中原 : 중국)에 살았는데,태어나실때부터 거룩하시고 총명하시어…..~~(중략)

배가(裵哥)의 모함을 피해 바다를 건너오게 되었다….~~..(중략)

문장이 뛰어나 사람들의 칭송을 받아 문성왕이 사공의 벼슬을 주었다.

 

그 후 태종(태종무열왕)의 10세손 김은의의 사위가 되었다”고 씌어 있다.

이외에도 전주이씨 득성의 유래를 기록한 글들에서는

 

전주이씨가 본래 중국 당나라 황실의 후예라고 하며,

이세직의 "세"자와 당의 이세민의 "세"자는 동일 항렬이고, 대대로 전주에서 살았다고 기록하고 있다.


============그러나..<1><2>번 모두 받아들이기 힘든 이유는=========================


<1> 번은, 동일 항렬자를 쓰는 것은 조선시대 족보제작이 한참 유행했다는 것을 생각할 때,

 이 주장에 대한 신뢰성이 어려워보인다.


<2>번은,중국전래설은 성씨 득성 과정을 보면,

인물를 신격화하고,기록하는 과정에서 사대주의적 모화사상에 기초하여,

어떻게든 황실과 연관지어 위상을 높이기위해 기록되어 있다는 점에서

신빙성을 부여받기 힘든 것 같다.

 

즉 중국전래설을 주장하는 성씨들이 공통으로 사용하는 "한림원" 학사, 또는 "황실" 성씨 등의

주장을 그대로 따르고 있기 때문이다.

 

또한,이세직의 "세"자와 당의 이세민의 "세"자도 동일 항렬로 보게하여

당 황실과 연관지어 어떻게든 위상을 높이려 하고 있다는 점에서, 어려워보인다.


--결국, 두가지 경우 모두 애매모호하여-


따라서 전주이씨는, 시조 이한(李翰) 이후로 전주에서 살아온 토성(土姓)이고.  

시조 이한의 선대가 어떻게 되는지에 대해선 밝혀지고 있진 않으나,

 

각 성씨와 본관들이 (신라말부터 고려)에 들어와서야

비로소 성씨를 쓰기 시작했다는 역사적 과정을 볼 때....

 

'이한'에서부터 이씨 성을 쓰기 시작했다고 보는 것이 타당할 것이다. 

 

전주이씨의 연혁과 인물

시조 이한에서부터 시작된 전주이씨는 목조이안사(태조 이성계의 고조부) 이전의

선원선계(璿原先系·왕의 조상을 선원이라고 한다),

목조 이안사에서 태조 이성계까지의 각 파 선원파계(璿原派系),

 

태조 이성계 이후의 선원속계(璿原續系)로 나뉜다.

그중 선원선계에서는 무신란을 일으키고 실권을 장악한 이의방(李義方)과

그의 동생 이린(李隣)이 유명하다.

 

이린의 아들이 장군 이양무이며, 이양무의 아들이 태조 이성계의 고조부인 목조 이안사이다.

이들은 전주에서 대대로 살아오다 새로 부임한 호족과 사이가 나빠져 강원도 삼척으로 피했다가

다시 함경도를 거쳐 원나라 간도로 건너간 것으로 되어 있다

.

이의방(李義方)은 1170년(의종 24) 견룡행수(牽龍行首)로서 정중부(鄭仲夫)·이고(李高)와 함께

무신란을 일으켰으며, 대장군·전중감(殿中監) 겸 집주(執奏)에 임명되고

벽상공신(壁上功臣)에 책록되었다.

 

후에 이고를 제거하고 정권을 장악한 뒤 중방(重房)을 강화하여 실권을 장악하였다.

실권을 장악한 뒤 승려들과 적대하다가 조위총(趙位寵)이 난을 일으키자 토벌하려 했으나

 

실패한 뒤 권력에서 축출되었다.

그는 태조 이성계의 고조부인 이안사의 아버지이며 문극겸의 사위인 이린(李隣)의 형이다.

이안사 이전의 전주이씨는 전주에서 지방 토호로 살아왔으나,

고려 무신란에 이의방이 참여한 이후 중앙정계의 부침에 따라 가문이 어려움을 처하게 되어

 

강원도, 함경도를 거쳐 원나라까지 흘러가게 된 것으로 추정된다.

원나라 간도지방으로 피신한 이안사는 그곳에서 다루가치라는 벼슬을 지냈으며,

그의 증손자 이자춘이 고려에 공을 세워 사복경에 이르렀다.

 

이어 그의 아들 이성계는 고려의 병마사를 거쳐 위화도회군으로 실권을 장악하게 되고,

조선을 개국하게 된다. 

 

이렇게,고려에서 조선으로 왕조가 바귀면서

 전주이씨 가문의 가장 빛난는 업적은 한글 창제 이다

 

만일,(위화도 사건..없이)고려가 지속되었다면,조선이 없으므로,세종이 태어나지도 않았고, 

고려는,,세종처럼 애민정신으로 백성과 소통하려 한글 만들어야겠다는 생각이 없었으므로-

 

창제의 동기부여 없음-(고려왕조 5백년동안,전혀 없었고,,그들은 한자와 이두에 만족하면서 살고 있었음),

그래서..한가지 확실한건,세종이 태어나지않는한,한글도 태어날수 없다는 사실.

 

정말 생각만해도 끔찍합니다.위화도회군이 어찌보면,지금 한글쓰는 우리들한테는'전화위복'

KBS역사스페셜.2010년 10월9일-한글창제-무료보기<참조>
 
전주이씨의 인물로는 조선왕조의 가문이니만큼 수많은 역사적 인물이 많다.

하지만 국왕은 특정가문의 인물로 서술할 수 없기에 전주이씨의 인물에서는 제외한다.

그럼에도 역사적 인물들을 일일이 거론할 수 없을 정도로 수많은 인물을 배출한 가문이다.

 

[ 대표적 인물(代表的人物)로는,  

 이위종(瑋鐘)   이준(儁)열사   이승만(承晩)   이범진(範晉)..등등이 있다.

 

고려 이후, 역사적으로 유명한 이씨의 인물 중 셋 중 하나는

전주이씨 가문에서 배출되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근현대사에 들어와서 대표적인 전주이씨 인물로는

대한민국 초대 대통령 이승만.

 

이승만 대통령에 대해서는 대한민국을 건국하고 기틀을 잡았다는 공과

독재를 자행했다는 것에 대해서도 함께 논의되고 있다


이승만(李承晩)은 독립운동가이며, 대한민국 초대 대통령이다.

호는 우남(雩南)이며 황해도 평산 출신으로 이경선(李敬善)의 아들이다.

 

서재필(徐載弼) 등이 독립협회 등을 조직하자 이에 가담하여 개화독립운동에 투신하였다.

후에 독립을 요청하기 위해 미국에 건너갔다가 뜻을 이루지 못하고

미국에 머물면서 조지워싱턴대학에 입학하여 1907년 졸업하였으며,

 

하버드대학에서 석사학위를, 프린스턴대학에서 철학박사학위를 받았다.
3·1운동 이후 상해임시정부가 수립되고 대통령에 취임했으나,

 

다시 미국으로 건너가 외교활동을 통한 독립운동에 주력하였다. 1945년 광복후에는

독립촉성중앙위원회를 결성하여 총재에 취임하였으며,

 

1948년 대한민국 정부 수립과 함께 대통령에 취임하였다. 6·25가 일어나고 정부가 부산에

피란해 있던 1951년 12월 자신의 장기집권을 위하여 자유당을 창설하였으며,

장기집권을 위한 독재정치를 시도하였다.

 

결국 1960년 3·15부정선거와 자유당 독재로 4·19를 초래하여

대통령직을 사임하고 그해 5월 하와이로 망명하여 그곳에서 임종을 맞이했다.

 

그 외에도,이범석 전 국무총리, 이회창 자유선진당 총재,이현재 전 총리,

이선근 전 문교부장관, 이종림 전 교통부장관 등이 있으며,

전 현직 국회의원도 70여명이나 존재한다.


이회창(李會昌)은 황해도 서흥에서 출생하였다.

서울대 법학과와 하버드대학교와 캘리포니아대학교 버클리캠퍼스에서 법학 공부를 하였다.

 

대법관과 26대 국무총리를 지냈으며, 한나라당 제15대 대통령 후보, 제16대 대통령 후보,

무소속으로 제17대 대통령 후보로 나선 바 있다. 현재는 18대 국회의원으로 재직 중이다.

 

유명 연예인으로는, 신화의 이민우

효령대군파 개그맨이경규 이휘재

양녕대군파 탤런트 이승기 영화배우 이준기 ..등이 있다

 

<집성촌>
-경기도 연천군 중면 도연리
-제주도 북제주군 한림읍


-함경남도 북청군 거산면, 단천군 북두일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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