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 사백만원과 아버지의 돌변
사백만원! 나는 아직도 이 액수를 분명히 기억한다.
외아들이어도 병역면제대상이 되지 못했던 오빠에게 영장이 나왔던 때는 대학을 졸업하고 미국가기 바로 전 해(年)인 1968년으로 내가 초등학교 6학년이었다.
내가 지금도 생각하면 절로 몸서리 쳐지는 엄마와 언니들과의 어떤 말싸움 중에 오갔던 내용이 한 가지 있다. 그 말싸움은 오빠가 미국으로 가고 나서 몇 년 지난 어느 날에 있었던 것으로 나는 기억한다.
“아니! 엄만! 집에 무슨 돈이 그렇게 없다고 해? 오빠, 군대 빼는데 돈, 꽤 들어갔다며!”
“느이 아버지가 느이 오빠를 논산훈련소에서 두드려 얻어맞기나 하는 그런 군대에 어떻게 보내느냐며 마구 노발대발했었어! 오빠, 군대에서 빼느라고 들어간 돈은, 사백만원밖에 안 돼!!”
“아니!! 엄마!! 그 때 사백만원이면 얼마나 큰 돈인데 그래! 흥, 그 돈으로 우리들 시집갈 때나 대줄 것이지!!”
그 때 집안을 뒤흔드는 언니들의 분노 섞인 흥분은 듣기만 해도 치가 떨리고 절망적이었다.
도대체 오빠는 앞으로 온 식구들의 인생을 얼마나 책임질 수 있었길래 엄마 아버지가 오빠에게 그렇게 많은 돈을 투자했을까?
내 어린 시절부터 우리 집은 줄곧 큰 불행이 없이 평화로웠다.
큰 언니에 이어 오빠까지 미국으로 떠난지 만 6년째 되던 해였다.
평화로운 우리 집안에서 어느 날 갑자기 64세의 아버지는 엄마와 한국에 남은 우리 다섯 자매들로선 도저히 상상할 수 없는 의외의 행동을 하기 시작했다.
아버지의 갑작스런 폭음과 술주정
아버지는 어떤 고생도 마다하지 않은 채 7남매 모두 대학공부 시킬 정도로 훌륭한 분이라고 굳게 믿고 있던 엄마와 우리 자매들로선 아버지의 돌변을 감히 예상하지도 감당하지도 못했었다.
아버지가 돌아가시기 3년 전인 1975년 1월부터였다. 나는 그 해 대학 입시에 실패해서 재수생이 되었다. 어느 몹시 추운 날, 어느 새 흰머리에 주름살이 부쩍 늘어난 아버지는 갑자기 폭음하고 집에 와서는 눈에 띄는 식구들에게 술주정하는 습관을 드러내기 시작했다.
우리 자매들 기억에 아버지는 생전에 남과 유쾌하게 술대작을 즐기는 분이 아니었다. 아니 그때까지만 해도 우리 7남매는 아버지의 그런 모습을 집에선 아예 구경조차 하지 못하며 지냈었다.
인사불성에 몸을 못 가눌 정도로 친구들의 부축을 받으며 팔자 걸음을 하고서 요란하게 삐그덕 대문 소리를 내며 들어오는 아버지 모습을 확인한 우리 자매들은 분노를 못 이겨 어느새 흐르는 눈물을 억제하지 못하게 되었다.
“얘, 얘들아, 너희 아버지, 받아라. 이 영감탱이가 글쎄 잔치집에서 밥은 통 안 드시고 처음부터 2홉 소주를 대여섯 병이나 마구 마셔대시니, 말이다….”
워낙 체격이 큰 아버지를 부축해서 데리고 온 아버지 친구들은 얼굴이 일그러진 우리 자매들에게 지친 표정으로 털어놓았다.
그 후부터 아버지는 한 번 술을 마셨다 하면 폭음을 했고 곧 술주정으로 이어졌다. 이 과정은 아버지만의 변함없는 음주벽이 되었다. 아버지의 술주정은 상대방이 뭐라고 자극을 주건 안 주건 마다하지 않고 그저 아버지만의 일방적 공격이었다. 술주정에는 귀 기울이며 들어줄 만큼 합당한 내용이라곤 없었다. 그저 눈 앞에 있는 엄마와 우리 자매들에게 공연한 트집을 잡아대며 마구 언성 높이며 술주정했다. 눈에 띄는 대로 우리 자매들을 마구 쏘아보며 “이, 썅놈의 계집아 새끼들! 야, 물 떠와! 이것 치워!”, “왜 이 물건을 칠칠치 못하게시리 부숴놓았냐? 에에, 썅놈의 계집아새끼들같으니라구! 다아, 때려죽어야 해!” 등 심한 욕설과 폭언을 마구 퍼부었다. 아무리 홧김에 나오는 말이라도 우리 자매들로선 도저히 곱게 봐 줄 수 없는 아버지의 언어폭력이었다. 난데없이 당하는 우리로선 치밀어오르는 분노에 그저 가슴이 펄쩍 펄쩍 뛸 뿐이었다.
욕설을 퍼붓는 아버지의 눈빛 또한 분노를 안겨주었고 살기 있어 보였다. 당장 달려들어 잡아먹을 듯한 맹수의 눈빛 그 자체였다. 비유하자면 햇빛에 반사되는 들고양이의 노란 구슬 같은 눈빛과도 같았다.
좁고 지저분한 구멍가게에서 우리 자매들의 학비를 대랴 생계를 꾸려가랴 수시로 물건 사러 들어오는 손님으로부터 손에다 십원, 이십원을 받아챙기며 물건을 건네주는 엄마에게도 그랬다. 엄마에게도 술주정하는 일은 우리 자매들이 태어난 이래로 처음 목격하는 일이었다.
엄마는 얼떨결에 받는 아버지의 공격세례에 얼굴만 붉어질 뿐이었다.
“에이!! 걔 썅년들!!!! 술 가져와!!”
“에이!! 썅놈의 계집아 새끼들 같으니라구!!!”
윗니 아랫니를 다 드러내며 눈알을 샛노랗게 부릅뜬 아버지의 표정은 쳐다보기조차 울분으로 가슴이 덜덜 떨릴 지경이었다. 그럴 때마다 우리 자매들은 반사적으로 서로 얼굴만 찡그리며 간간히 아버지에게 말대꾸나 하며 분노를 억지로 달랬다.
그 무렵부터 우리 자매들 중 누구라도 가끔 엄마를 돕기 위해 가게로 가면, 엄마는 마음속에 담아두고 지내기 오죽 괴로웠던지 눈을 무섭게 치뜨며 아버지에게 톡 쏘아붙이며 대드는 일을 종종 목격해야만 했다. 가게에서 이런 격한 부부싸움은 예전에는 통 일어나지 않았었다.
아버지는 엄마의 공격을 늘 무시하는 눈치였다.
“아버지이! 자꾸 그러시면 엄마만 자꾸 힘들잖아요? 좁은 가게에서 술마신 아버지땜에 엄마가 장사도 안 되잖아요?”
언니들은 엄마가 너무 딱해 보여서 엄마를 위해서 아버지에게 아무리 다그쳤지만 아무 소용없었다. 아버지는 미안하단 말은커녕 아예 무시했다. 아버지는 가게에 물건 사러 오는 사람들에게 쓸데없는 야유나 퍼붓고 툭하면 방에 드러눕기 일쑤여서 엄마는 가게 보기가 그전보다 배로 힘들어졌다는 것이다. 엄마의 그 힘듦은 고스란히 우리 자매들의 몫이 되었다. 우리 자매들은 늘 엄마의 온갖 하소연을 들어주어야만 하는 처지가 되었기 때문이다. 조그마한 동네 구멍가게를 통해 우리 집 생계가 유지되는 형편에 아무런 힘이 되어 주지 못하는 나 역시 보아주기도 들어주기도 그저 괴로울 뿐이었다.
내가 자라면서 엄마를 통해서 아버지에 대해 들은 바로는 아버지는 평생 엄마를 고생만 시키는 인정이 없고 못된 분이며 식구들을 창피하게 만드는 무식한 분이라는 것이었다. 엄마는 함경도에서 배운 것 가진 것이 없이 멋모르고 18세에 아버지에게 시집 온 후로 고부갈등에다 아버지의 별난 성격에 평생을 고생만 하고 살았다는 것이다. 어린 나이에 시집와서 괴팍한 아버지 성격 탓에 도망가고 싶은 생각이 몇 번이나 날 정도로 마음고생을 했다고 한다. 엄마 아버지는 1938년과 1944년에 큰 언니와 오빠를 각각 낳기 전 함경남도 이원 군(郡)에서 장사로 재산을 모으며 집안을 꾸려왔다. 6.25동란과 1.4후퇴를 맞아 남하한 후 우리 집은 서울역 앞 동자동에서 줄곧 목재상을 꾸리는 엄마 아버지 덕에 집에는 식모 언니를 두며 무척 부유하게 살았었다. 엄마 아버지는 점심 때마다 목재상에서 걸어서 5분 거리인 집에 와서 꼬박 식사했다. 우리 7남매는 식모 언니와 할머니 손에서 자랐다.
엄마는 아들을 바라는 아버지의 욕심에 계속 낳다보니 딸부자가 되었고 그리고 아버지의 애정을 못 받아서 고생만 하며 지냈다고 한다. 우리 자매들은 자라면서 엄마의 이런 신세한탄을 귀 따갑게 들었다.
부모의 싸움만을 보면서 자라온 자녀치고 마음이 불안해지지 않겠는가? 특히 딸은 더 하다. 딸은 으레 엄마 편이라서 엄마에게서 영향을 받기 마련이고 엄마가 아버지에게서 당하는 심적 고통에 동참하는 것이 인지상정이다. 엄마는 이런 우리 자매들의 심정을 아는지 모르는지 내내 아버지 성토에 열을 올렸다. 내 어릴 적 기억에도 집에서 저녁을 먹고 난 한가한 시간에 엄마가 가게 일을 끝내고 나서 우리 자녀들과 시간을 보낼 때면 늘 그런 유쾌하지 못한 신세한탄으로 이어졌다.
“에이. 느이 아버지는 말야 어디가서, 말도 제대로 할 줄도 모르고 말이다. 창피해서 원, 옛날에는 말이다. 글쎄에, 나를 혼자 내버려두고 지 친구들과 계곡에서 놀고 말이다….”
그 뿐이 아니었다. 언니들은 내가 어릴 적부터 나와 동생이 듣건 말건 아랑곳하지 않고 아버지에게 종종 다그치는 일도 잦았다.
“아이, 아버지이. 포천의 할머니 산소에 엄마랑 새벽에 같이 가는데도 아버진 혼자서 설렁탕 사드시고 그랬다면서요?”
할머니는 내가 초등학교 1학년때 그러니까 막내인 동생이 두 살 되던 해에 뇌졸중으로 돌아가셨다.
아버지는 성장과정에서 불우했던 것이 하나 있었다. 함경도에서 어린 시절을 보내던 어느 날 고기잡이하러 나간 아버지와 할아버지를 동시에 잃는 불행을 겪었다. 아버지는 엄마와 결혼한 후 홀어머니를 줄곧 모시며 살아왔다.
우리의 어린 시절부터 엄마 아버지의 기둥은 오로지 큰 언니와 오빠였다. 그 외 나의 성장과정에서 기억에 남는 것은 큰 언니와 오빠가 미국에 가기 전부터 각자 아버지와 언성 높이며 싸우던 일이었다. 그래서인지 어린 시절부터 우리 자매들은 큰 언니와 오빠가 든든하면서도 늘 무서웠다. 엄마도 큰 언니와 오빠에게 집안의 질서를 맡겼다.
종업원을 두고 운영하는 목재상 일로 인해 그리고 집에선 7남매를 모두 공부시켜야 하는 형편 탓에 엄마 아버지는 늘 같이 목재상에서 일해야만 했다. 그 덕에 엄마는 집에서 고부 갈등을 모면할 수 있었다고 한다. 이번에 혹시나 아들일까 하는 욕심을 못 버려서 엄마는 42살이 되도록 막내를 출산했다. 그 때 큰 언니는 대학 4학년이었고 아버지는 50세였다. 큰 언니는 엄마의 막내 출산이 무척 창피해서 그 사실을 한동안 친구들에게 숨겼다고 한다. 그래도 그 때는 7남매가 함께 살던 흐뭇함과 큰 언니와 오빠가 각자 미국에 가기 전에 아버지랑 생각이 맞지 않아서 가끔 싸우던 애처로운 추억이 함께 있던 시절이었다.
엄마는 아버지에 대해 늘 좋은 얘기를 해 주진 않았지만 어릴 적 내 눈에 아버지는 일벌레로 살아온 7남매의 성실하고 반듯한 가장이었다. 단지 성격이 고집스럽고 괴팍한 면이 있어서 가끔 우리에게 잔소리가 심했고, 엄마하고 말다툼을 하는 일이 잦았던 것뿐이었다.
내가 자라면서 가끔 목격하기론 아버지는 늘 식구들에게 야단을 맞는 사람이었다. 엄마에게서, 언니들에게서, 오빠에게서. 똑똑하게 야무지게 가게 일을 못 보았다고, 남에게 약점이나 잡히게시리 쓸데없는 소리를 했다고, 물건을 잃어버렸다고, 집에서 딸들이 보는 앞에서 소변을 본다고 등등 이유는 실로 다양했다.
그래도 아버지는 집에서는 딸들 방을 일일이 열어보며 책상 앞에 앉은 모습만 봐도 대견한 듯 자상한 웃음을 띠우던, 거인의 인상을 풍기는 가장이었다. 적어도 내 소견으론 그러했다. 완고한 노인네답게 우리들이 평소에 TV 앞에 앉아 있으면 마구 잔소리하면서도 우리가 울면서 떼를 쓰면 큰 체구에 어울리지 않게 겁을 먹으며 달래주던 순박하면서도 감정이 단순한 아버지였다. 내 기억에 아버지는 분명 그렇게 소심한 면도 지녔었다. 엄마에게 말하면 야단맞기 십상일 우리들의 용돈 요청에도 엄마 몰래 건네주었던 아버지였다. 아무데나 가래를 탁 탁 뱉어서 우리 자녀들에게 질타를 받아도 멋쩍은 듯 묵묵히 넘기는 우직스런 아버지였다. 이것이 내가 기억하는 아버지에 대한 유일한 장점이었다.
아, 그런데 내가 고교를 졸업한 해부터 아버지는 온 식구에게 혹독하게 미운 정을 심어주는 것이다. 내가 비록 이 글을 통해 아버지의 잘못을 들추어내지만 아버지는 본성 자체가 악인이라고는 여기지는 않는다. 사람의 행동 자체를 비난할 수는 있어도 그 사람 자체를 비난할 수는 없기 때문이다.
내가 중학교 1학년이 되던 해 가을이었다. 정부의 도시 계획 정책에 의해서 목재상이 위치한 도로가 헐리게 되자 그 보상금으로 한강로로 이전해서 용산역 앞에다 구멍가게(지금의 동네 슈퍼)로 업종을 바꿨다. 지금은 그곳이 용산 전자상가에 4호선 지하철역이 있고, 오피스텔 건물이 많이 들어서서 번화가이지만 당시는 ‘미성년자출입금지’ 팻말이 붙었던 비포장도로의 지저분한 동네였다. 1982년도에 나온 영화 <어둠의 자식들>의 배경을 연상하면 딱 알맞은 그런 동네였다.
대학 졸업한 후 체신부에 잠시 근무하던 오빠는 유학 준비 차 퇴직하고 잠시 그 구멍가게에서 일을 거들다가 미국으로 갔다. 그 때가 1970년. 내가 중학교 1학년 겨울방학이었다. 오빠가 자신의 개인적 야망을 달성하려고 미국으로 갔을 때 아버지 나이는 59세였고 엄마는 50세였다. 아버지는 늦은 나이까지 자식을 많이 낳은 죄로 딱하게도 그 나이가 되도록 일을 해야만 했다.
7남매 모두에게 고등교육까지 시킨다는 열의를 가진 아버지는 종업원 서너 명 거느리는 목재상 사장에서 허름한 구멍가게 주인으로 변했다. 나는 그 업종 변경이 누구를 위한 엄마 아버지의 희생이었는지 나중에서야 알았다. 엄마는 예전처럼 목재상을 하자고 했지만 아버지가 한사코 우긴 탓에 구멍가게를 하게 되었던 것이다. 그것보다는 오빠의 미국 유학을 위한 비행기 값 등에 따른 비용과 군대 면제를 위한 로비 금액 사백만원이 빠져버린 탓도 있었다.
막상 구멍가게를 해보니 그것이 온 식구들을 고생시키는 셈이 되었다는 것을 아내 깨달았다. 우선 엄마 아버지가 부득이 가게를 비울 때에는 늘 우리 자매들이 교대로 가게를 보아야 했고 때로는 그것으로 서로 다투다 보니 내키지 않는 심정으로 가게를 보기도 했다. 우리 자매들은 손님 상대하는 일부터 수많은 물건의 가격을 익히는 것 등 해서 가게 보는 일에는 늘 익숙하지 않았다. 아버지는 결국 이런 것을 노리고 일부러 구멍가게를 하지고 우긴 것 같았다. 목재상을 했을 때에는 목재를 나르는 종업원들이 가게에 늘 있어서 우리 자녀들이 저녁에 목재상에서 숙직을 보느라 자는 것 외에는 동원되는 일은 거의 없었다.
구멍가게 주변에는 술집, 식당, 여관이 밀집해 있어서 말 그대로 역전의 환락가였다. 저녁 시간이면 비틀 비틀 걷는 취객 모습에, 지나가는 남자를 호객하는 술집 여자와 포주가 곳곳에 자리하고 있는 유곽이었다. 좁은 골목에는 술집 여자나 포주들이 껌을 짝짝 씹은 채 늘 몰려 있었고 그녀들이 가끔 남자 투숙객이랑 악쓰며 험악하게 싸우는 풍경이 있곤 했었다.
가게는 매춘해서 번 돈으로 늘 군것질을 일삼는 여관이나 술집의 여자들, 남자 손님들, 역 앞이라서 분주히 오가는 행인들 그리고 그런 사람들을 상대하는 엄마의 수완 덕에 장사는 늘 잘 되었고, 그 가게 덕분에 우리들은 대학공부까지 했던 것이다.
집에선 고급스런 반찬 욕심도 없이 그저 아무 것이나 배나 채우자는 식으로 늘 소박하게 식사를 하며, 꾀죄죄한 옷차림으로 좁고 허름한 가게에서 돈 세며 바삐 몸을 움직이는 엄마 아버지에게는 미국에 있는 큰 언니와 오빠가 유일한 희망이요 자랑거리였다.
오빠가 떠난 후 우리 집은 동자동 집을 팔고 엄마 아버지가 장사하는 한강로의 구멍가게에서 10분 거리인 60평 한옥 주택으로 이사했다.
저녁이면 문을 닫고 집으로 왔던 동자동 목재상 시절과는 달리 엄마 아버지는 밤늦게까지 장사했고 집에는 식모 할머니를 두었다. 엄마 아버지는 종일 구멍가게에서 장사하면서 예전처럼 끼니가 되면 엄마랑 교대로 집에 와서 빨래감을 내놓고 잠은 그 가게에 딸린 좁고 어둠침침한 골방에서 주무셨다. 엄마 아버지는 가게에서 새벽에 눈뜨자마자밖으로 난 베니아판 진열대에다 과일과 과자 상자, 아이스크림 통 따위를 죄 들어 옮겨놓는 일을 시작으로 종일 담배, 라면, 등 온갖 식품과 잡화를 팔았다. 엄마 아버지의 취침용인 어둠침침한 골방은 두 사람이 누울 정도로 좁았고 바깥쪽으로 조그마한 창이 하나 나 있었다.
지금도 기억에 생생한 그 골방 앞의 바닥 한 쪽은 시멘트, 나머지는 흙바닥이었다. 골방 앞에는 요강과 연탄 구들이 있었는데, 사이다 콜라 소주 맥주 등 음료수 박스가 통로를 방해할 정도로 늘 층층이 쌓여 있었다. 음료수 상자를 쌓아놓은 그 골방 부근에 들어서기만 해도 늘 찌든 반찬 냄새에 퀴퀴한 냄새가 코를 찔렀다. 가끔 벌레도 들끓었고 쥐도 다녔었다. 그 공간에선 벽 하나 사이로 월세를 놓은 옆방의 소음이 다 들렸다. 그 모든 것이 우리 눈에는 엄마 아버지가 오빠의 금의환향할 날을 기다리며 고생하는 모습이었다.
반면 미국의 큰 언니와 오빠가 보내준 사진 속의 그들이 거주하는 미국 집은 외국 영화에서 본 것처럼 크고 환기가 잘 되는 멋지고 깨끗하게만 보였다. 몇 년 후 편지로 오빠는 중고차를 구입해서 몰고 다닌다는 소식을 전했다. 그 당시 국내에서 자가용 소지한 집은 부유층 중에서 손꼽을 정도였었다. 오빠의 소식은 주로 아르바이트와 하숙집을 어디에서 어떻게 구했으며 어떻게 김치 담가 먹고 세 끼 식사를 해결하며 학교 다닌다는 얘기였다.
목재상 시절과 마찬가지로 집에는 늘 엄마가 계시지 않았고 우리가 엄마랑 급한 얘기를 나누려면 걸어서 10분 걸리는 구멍가게로 일부러 쪼르르 달려가야만 했다. 집에는 엄마 대신에 예전처럼 언니들이 집안 분위기를 책임지다시피 했다. 엄마 역시 언니들에게 나와 막내인 내 동생 인성교육까지 떠맡겼다. 심지어 소풍날에 김밥 싸주는 것부터 학부모 노릇까지 떠맡겼다. 그래서인지 나는 나보다 두뇌가 명석하고 화법이 풍부하고 외모를 잘 꾸미고 사고방식이 신식이던 언니들 틈에서 교육 받으며 자랐다.
허름한 동네 구멍가게에서 우두커니 앉아 있다가 동네 조무래기가 내미는 10원 100원부터 알뜰히 모으며 장사하는 엄마 아버지 덕에 우리 자매들은 원하는 대로 용돈 타내고 방과 후 학원 다니며, 집에선 원하는 대로 갖추어지지 않으면 엄마에게 늘 투정 부리며 지냈었다.
“에이, 저것들도 대학 들어가면 다아 돈덩이들이야! 내가 늙도록 편하지도 못하고!”
아버지는 집에서 우리 자매들과 마주치면 종종 이렇게 푸념했다.
아버지의 음주벽이 시작된 때에는 시집간 둘째 언니가 첫 애를 낳기 전 주거 문제로 잠시 친정인 우리 집에 들어와서 살고 있었다.
엄마의 저녁밥이 담긴 시장 바구니
아버지의 음주벽이 있었던 그 3년간, 아버지는 음주를 평균 2~3일에 한번 했었다. 잦으면 이틀에 한 번 했다. 어느 때에는 일주일 내내 마셨다.
아버지의 만취 상태와 엄마의 저녁밥이 담긴 시장 바구니. 이 둘은 꼭 따라붙었다.
초저녁이 되자 아버지는 슬그머니 가게를 나선다. 그러다가 두어 시간 후에는 어김없이 술 취해서 가게로 왔다. 비틀비틀 걸음에 혀 꼬부라진 목소리로 쏘아보며 횡설수설하는 아버지 모습은 우리에게 대뜸 불쾌감만 던져 주었다. 때로는 인사불성 상태에서 같이 술 마시던 친구의 부축을 받고 왔다.
술 마신 아버지 몸에선 늘 악취가 났다. 특히 아버지가 아침마다 우리 집 마당 한 켠에 놓인 타이루 붙여진 욕실에서 물이나 몇 번 끼얹고 욕조에 몸을 담갔다 나오면 욕실에선 늘 찌든 술 냄새와 악취가 풍겨났다. 스스로 당신 몸을 관리하지 못하는 아버지에게서 우리 자매들은 그만 정이 떨어졌다.
아버지는 주로 가게 안에서나 가게 근방 술집에서 술 마셨다. 근방에는 이북 고향 친구들이 더러 있었다. 나중에 들은 바에 의하면, 아버지는 주변의 별로 친분이 없는 사람에게 막무가내로 접근해서 “나랑 똑같이 고향이 이북이다”, “나처럼 외아들을 두었다” 등 별 사소한 구실을 갖다 붙이면서 강제로 술자리에 앉혔다. 좁은 가게 안에서 물건 팔며 거스름돈을 내 주랴 정신없이 몸을 놀리는 엄마에게 우리가 보건 말건 “술 가져와! 이년!”란 호통을 서슴지 않았다. 나는 내 귀를 의심했다. 항상 우리 딸들에게 아버지에게 대든다며 눈물 나도록 야단치는 엄마에게 딸들이 바로 보는 앞에서 “년!”이라니!
엄마는 그럴 때마다 반항도 못하고 불쾌감과 울분을 억지로 참은 탓에 고개만 숙이고 입술을 깨물듯 얼굴만 내내 붉혔다.
나와 막내인 중학생 동생 눈에도 아버지의 추태와 공격성 행동을 고스란히 받아주는 엄마가 한없이 불쌍해 보일 뿐이었다. 밥상에선 그저 배나 채우려고 딸들이 먹고 남긴 밥과 반찬으로 끼니를 때우던 엄마였다. 그런 엄마가 무슨 죄가 있다고 다 성장한 딸들 앞에서 아버지가 퍼붓는 인격모독을 고스란히 받아야만 했는지?
“야! 이 썅놈의 계집아 새끼야! 무어 그리 아버지에게 인상 쓰냐!! 이 술상, 빨리 치워!!”
이런 호통은 물건 사러오는 사람이 깜짝 놀랄 정도로 가게 안을 쩌렁쩌렁 울렸다. 그 때 엄마와 나는 반사적으로 분풀이하듯 애매하게시리 가게에 앉아 있는 아버지의 술친구를 쏘아보고 말았다. 쏘아보는 것에 지치면 나는 어느새 설움에 지쳐 눈물을 떨구곤 했다.
술주정에는 어김없이 욕설이 나왔다. 우리 자매들로선 평생 들어보지 못한 “걔이! 썅년들 같으니라구!!”이란 등의 욕설이 아버지 입에서 마구 쏟아져 나왔다.
술 취한 사람에게 맨 정신 상태의 사람이 일부러 트집을 잡으며 따지고 들면 술 취한 사람이 오히려 더 난폭하게 나온다고 들었다. 그러나 아버지는 술 취한 후에는 가만히 있는 엄마나 우리 자매들에게 먼저 괜한 생트집을 잡으며 공격적 언사를 퍼붓기 일쑤였다.
집에서나 가게에서나 취중의 아버지 앞에서 벌어지는 모든 광경은 어김없이 아버지의 술주정을 겸한 생트집과 욕설로 이어졌다.
“야, 너는 왜 맨날 네 언니 말을 안 듣고 그러냐!!”
“저 개년들은 왜 맨날 우리 가게 와서 빵이나 처먹고 그러냐!!”
아버지는 술 취한 후 가게에서 엄마에게 술주정을 겸한 소란을 한바탕 피우다가 끼니가 되면 평상시와 똑같이 가게에서 걸어서 10분 거리인 집으로 왔다. 아버지의 그 습관의 반복은 3년간 어김이 없었다.
술 취한 아버지는 집에 와서도 우리에게 똑같이 술주정했다.
술 취한 상태로 가게로 온 아버지는 평소처럼 엄마를 편안하게 저녁 식사하게끔 집으로 보내고서 도저히 혼자 가게를 볼 수가 없었다. 요즘 식으로 음주운전처럼 위험한 일이었다. 엄마는 아버지가 술 마시고 가게에 오기 시작했을 때부터 아버지를 가게에서 절대로 혼자 물건을 팔지 못하게 했다. 수시로 물건 사러 들어오는 사람이 있고 돈 서랍을 열어야 하기 때문이다. 엄마는 그럴 때마다 우리에게 안이 둥그렇게 파인 손잡이 달린 시장 바구니에다 엄마 밥을 챙겨서 가게로 오라고 명령했다. 우리 자매들은 늘 얼굴 표정을 일그러뜨리며 따뜻한 밥 한 그릇에 김치, 국, 나물 등을 뚜껑 덮어서 넣었다.
초저녁에 아버지는 술 취한 상태로 가게에서 엄마에게 한바탕 난리를 치고 난 후 비틀 비틀 걸어서 집으로 왔다. 초인종 소리를 요란하게 누른 후 대문을 탕 치며 마당에 들어섰다 하면 우리 자매들은 누가 시키지 않아도 누가 먼저라 할 것 없이 묵묵히 시장 바구니에다 엄마 밥을 챙겨 넣었다. 그 시간에 아버지는 집안에서 실컷 고래고래 소리 지르며 술주정한 후 늘 안방에서 술 냄새를 잔뜩 풍기며 식사했다.
그때 집에서 살림을 도맡아 하던 둘째 언니는 임신 중이었다.
“아이, 아버지이! 술 마시고 오면 누가 엄마 밥 가지고 가게에 가요!”
친정 아버지의 상습 음주벽 때문에 둘째 언니도 어느새 히스테리가 생겼다.
“야! 너! 공부하지 말고, 엄마 밥 가지고 가게로 당장 가! 아이 지겨워! 아버지 또 술 마셨잖아!”
우리 집에는 3년 내내 초저녁마다 이런 식의 대화가 자매들 간에 종종 있었다.
비틀 걸음으로 가게를 향하는 아버지 뒷모습을 보며 엄마 저녁밥이 담긴 시장 바구니를 들고 가게로 향하는 나는 화가 나기에 앞서서 서러움으로 고개가 절로 숙여졌다. 학원의 다른 재수생 애들은 집에서 엄마가 간식이나 주며 기분 좋게 공부 잘 하도록 해 줄 거야.
초저녁에 행하는 나의 이런 일상은 그 후 대학 2학년이 될 때까지 계속되었다.
첫댓글 술주정 하는 사람들의 얘기를 가만히 들어보면 정말 한소리 또 하고 한소리 또 하고......아무것도 아닌것을 가지고 시비 걸고 트집 잡고....저의 아버지는 술을 전혀 못 드시기에......대신 담배는 골초......1968년도에 400백만원이면 어마어마하게 큰 돈인데.....하기사 자식을 위해서라면야 뭔들 아까우셨을까요. 감사히 잘 읽었습니다. 주인공....홧팅........
저의 아버지께서는 술취하시면 형제들 모두를 무릎꿇여 놓고 두 세 시간을,
과거 일제시대의 삶부터 이야기를 시작하시면...... 무릎이 저려도 꼼짝 못하고 견뎠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