鄭
성(姓)의 하나.
〈증보문헌비고〉에 210개의 본관이 전하나, 오늘날 계통이 자세히 전하는 본으로는 동래(東萊)·경주(慶州)·연일(延日)·진양(晉陽)·하동(河東)·초계(草溪)·나주(羅州)·영일(迎日)·청주(淸州)·해주(海州) 등이 있다.
우리나라의 정씨는 서산정씨(瑞山鄭氏)나 낭야정씨(琅
鄭氏)와 같이 중국에서 도래한 특별한 경우를 제외하고는 대부분 신라 6촌의 하나인 자산(
山)의 진지촌장(珍支村長) 지백호(智伯虎)를 공통된 시조로 하고 있다. 정씨는 뒷날 그의 5세손인 동충(東沖)이 유리왕으로부터 사성(賜姓)받은 것이다. 그후 선대의 세거지나 봉군(封君)된 인연을 좇아 관향을 달리하며 분파해간 것이 120여 본관에 이르게 되었다. 대종을 이루는 경주정씨는 지백호를 시조로 하며, 고려시대에 평장사(平章事)를 지내고 월성군(月城君)에 봉해진 진후(珍厚)를 중시조로 한다. 그의 대에 비로소 관향을 경주로 고쳐 부르고 문헌공파(文獻公派)·양경공파(良景公派)·월성위파(月城尉派)·평장공파(平章公派)의 4개 파를 이루며 계대를 이어왔다. 동래정씨의 시조는 고려시대에 안일호장(安逸戶長)을 지낸 회문(繪文)으로 전한다. 그러나 이후의 소목이 확실하지 않기 때문에 비교적 계대가 확실한 지원(之遠)을 기세조(起世祖)로 하고 있다. 지원의 손자 목(穆)이 좌복야(左僕射)의 벼슬에 오르고 목의 아들 항(沆)이 예부상서를 지내는 등 대를 거듭하여 현달함으로써 족세(族勢)를 다지게 되었다. 동래가 선대부터의 세거지였던 까닭으로 그곳을 관향으로 삼아 경주정씨에서 분적했다고 한다.
하동정씨는 본관은 동일하면서 시조를 달리하는 몇개의 계통이 있다. 하동정씨의 시조로 전하는 세유(世裕)는 응양대장군(鷹揚大將軍) 손위(遜位)의 아들로 고려 명종 때 서북면병마사와 형부상서를 지냈다. 아버지 손위는 응양대장군과 문하시중을 지내고 하동백(河東伯)에 봉해졌는데 그 후손들이 손위를 시조로 삼아 일파를 이루고 있다. 다른 한 계통은 신라 진성왕 때 하동의 호족 출신인 도정(道正)을 시조로 하는 일파이다. 도정은 경명왕 때 후백제군을 맞아 하동성을 지켰고 뒷날 고려 태조 왕건에 귀부하여 광평성평장사(廣評省平章事)에 올랐다고 한다. 하동정씨에서 분파된 것으로 전하는 금성정씨(錦城鄭氏)는 석숭(碩崇:하동정씨 도정계의 기세조)의 6세손 성(盛)을 시조로 한다. 그가 고려시대에 금성(錦城:나주의 속지)에 봉군(封君)됨으로써 후손들이 그를 시조로, 금성을 관향으로 삼아 분적했다고 한다. 금성은 시조 이래의 세거지였던 것 같다. 나주정씨의 시조는 고려 중엽의 인물 해(諧)로 전한다. 그의 증손 가신(可臣)이 중찬(中贊)을 거쳐 좌복야에 올랐기 때문에 해를 군기감에 추증했다고 한다. 나주의 본관은 선대로부터의 세거지로서의 인연을 좇아 정한 것으로 보인다.
〈증보문헌비고〉에 보면 연일정씨의 시조 종은(宗殷)이 신라에서 벼슬을 하던 중 임금에 직간하다 뜻을 거슬려 인동의 약목현(若木縣)으로 유배되었다고 한다. 그뒤 후손 의경(宜卿)이 연일로 옮겨가 호장을 지내면서 연일을 관향으로 삼게 되었다. 연일정씨에는 본(本)은 동일하되 시조를 달리하며 따로 계대를 이어오는 두 계통이 있다. 지주사공파(知奏事公派)는 지주사를 지낸 습명(襲明)을 기세조로 한다. 다른 한 계통은 종은을 시조로 하는 감무공파(監務公派)이다. 종은 이후의 몇 대가 실전되어 고려 때 감무를 지낸 극유(克儒)를 기세조로 하고 있다. 연일은 영일(迎日)로서 그 중심되는 지명인 오천(烏川)을 관향으로 사용하기도 했으므로 영일·연일·오천 정씨가 다 같은 본관의 정씨이다. 영일정씨에서 분파된 것으로 전해지는 이본(異本)으로는 야성(野城)·영덕(盈德)·장기(長
)·전주(全州) 등이 있다. 진양(晉陽:晉州)을 관향으로 하는 정씨 역시 동본이면서도 시조로 삼고 있는 인물들간의 소목을 따질 수 없는 여러 파가 있다. 고려시대에 문하시중을 지낸 예(藝)를 시조로 하는 충장공파(忠莊公派)가 있고, 자우(子友:고려시대에 호장을 지냄)를 시조로 하는 은열공파(殷烈公派), 장(莊:고려시대에 첨추를 지냄)을 시조로 하는 공대공파(恭戴公派), 신(侁:고려시대에 지후를 지냄)을 시조로 하는 지후공파(祗候公派), 중공(仲恭:고려시대에 첨정을 지냄)을 시조로 하는 첨정공파(僉正公派), 온(溫:고려시대에 대사간을 지냄)을 시조로 하는 우곡공파(愚谷公派), 택(澤:고려시대에 감찰어사를 지냄)을 시조로 하는 어사공파(御史公派), 그리고 안교(安校:고려시대에 판내부사를 지냄)를 시조로 하는 내부사공파(內府事公派)가 모두 진양(진주)을 관향으로 한다.
초계(草溪:지금의 합천)를 관향으로 하는 초계정씨는 고려 현종부터 문종 때의 배걸(倍傑)을 시조로 한다. 배걸은 진현관대제학(進賢館大提學) 또는 중추원사를 지냈다고 하는데 선대부터의 세거지인 초계에 봉군되었다. 그리하여 후손들이 초계를 관향으로 삼았다. 초계의 다른 이름인 팔계(八溪)를 본관으로 하는 팔계정씨의 시조는 승(丞)으로 전한다. 그는 초계정씨의 시조 배걸의 후손으로 고려시대에 국자박사(國子博士)를 지냈다. 팔계를 관향으로 삼은 연유는 상고할 수 없으나 그의 후손들이 그를 시조로 하고 초계에서 분적하여 계대를 이어왔다. 청주정씨는 고려시대에 중랑장을 지낸 극경(克卿)을 시조로 한다. 극경의 선계(先系)는 상고할 수 없으나 후손 책(
)이 판선공사에 오르고 서원백(西原伯:서원은 지금의 청주)에 봉해짐으로써 청주를 관향으로 삼게 된 것으로 전한다. 해주정씨는 고려 신종 때 숙(肅)을 시조로 한다. 숙은 전법정랑을 지냈다고 하며 해주는 숙의 선대부터 누대에 걸쳐 살아온 세거지라고 한다. 숙 이후의 세계는 확실하지 않아 고려말에 사복시소부소윤(司僕寺少府少尹)을 지낸 언(
)을 기세조로 삼아 계대를 이어왔다.
외래의 정씨로는 서산정씨와 낭야정씨가 있다. 〈증보문헌비고〉에 의하면 서산정씨의 시조로 전하는 신보(臣保)는 중국 저장 성[浙江省] 사람으로, 송(宋)나라에 벼슬하여 판장작감사(判將作監事)를 지낸 응충(應沖)의 증손자이다. 그 역시 송나라에서 원외랑(員外郞)을 지냈으나 송이 망하자 우리나라로 건너와 서산에 정착함으로써 후손들이 그를 시조로, 서산을 관향으로 삼게 되었다. 낭야정씨는 중국 낭야 출신인 선갑(先甲)을 시조로 하는 성씨이다. 선갑은 명(明)나라에서 진사를 지냈고 조선 인조 연간에 청(淸)과의 일전(一戰)에 기병(起兵)했다가 포로가 되어 선양[瀋陽]에 강제로 머무르게 되었다. 역시 볼모의 신세로 선양에 억류되어 있던 봉림대군이 귀국길에 오르자 이때 대군을 배종하여 우리나라에 와서 정착했다. 후손들이 시조의 출신지인 낭야를 관향으로 삼고 계대하여 일족을 이루었다.
그밖에도 온양·봉화·광주(光州)·해남·함평·청산·정주·예천·김포·정산·고성·창원·공주·풍기·서경·영천·평해·학성·장흥·보령·영정·옹진·돌산 등을 관향으로 하는 정씨가 있다. 2000년 인구주택총조사의 성씨 및 본관 집계결과에 따르면, 가구수 62만 6,265호와 인구수 201만 117명으로 성씨 중에서 인구순위 5위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