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꿈이었군….
난 방금 전에 꾸었던 생생한 꿈을 생각해 내며 슬그머니 미소를 지어 보였다.
그러나 나의 눈가에는 어느새 뜨거운 물기가 느껴졌고 난 조심스럽게 손을 들
어 눈물을 훔쳤다.
이젠 완전히 잊은 줄 알았는데….
지난 삼 년 동안 그녀의 생각은 절대로 하지 않고, 아니 그녀의 기억이 떠오
를 만 하면 애써 다른 생각을 하며 그녀를 생각하지도 않았던 나였다.
게다가 운도 좋아서인지 단 한번도 꿈속에서 나타나지 않던 그녀의 모습이….
"하연누나…."
언제까지고 내가 지켜 주었어야 할 여인. 죽는 그 순간까지 그녀를 지키겠다
고 다짐을 하였던 나였지만….
그녀가 죽으면 나 또한 죽는다고 수없이 되뇌던 나였지만….
지금 현재 그녀는 두 번 다시 돌아올 수 없는 길을 떠나버렸고 나는 이 이상
한 세계에서 멀쩡하게나마 살아서 숨을 쉬고 있었다.
"빌어먹을…."
그녀의 새하얗고 갸름한 얼굴과 부드러운 미소가 다시금 떠올랐다. 난 애써
그녀의 모습을 지워 버리며 이건 분명 어제 그 드래곤 녀석 때문이라고 중얼거
리며 이를 갈았다….
물론 시원하게 몸을 갈라도 봤고 본체로 변신해서 다 죽이겠다고 외친 녀석을
간단히 샤이닝 버스터 한방에 보내버리기는 했지만….
역시나 약간 아쉬움이 남는 것이었다.
한방에 보낸 것이 아쉽다는 말이다. 우선 날개를 찢어버린 후. 그 무시다리를
날려 버리고…. 다리와는 반대로 쪼그만 한 팔도 뜯어버린 다음.
마지막으로 머리를 날려도 충분했는데.
…. 쩝. 너무 잔인한 생각인가? 내가 언제부터 이렇게 됐지?
에휴. 모르겠다. 이미 지나간 일인데….
생각을 정리하고 머리를 긁적이는 나는 갑작스레 거꾸로 나타나는 아리스의
얼굴에 순간적으로 기겁을 했지만 잠시 후 내가 왜 아리스를 보고 놀라지? 라
고 생각하며 고심에 빠졌다.
그러나 곧 그 이유를 생각해 내고는 급해 아리스의 놀림감이 될 증거물을 지
우기 위해서 손을 들었지만….
"어머! 주인님 울었어요?"
이미 한발 늦었다. 크윽!!!! 재수 없게 직빵으로 걸리다니….
아리스는 잠시 놀란 얼굴로 날 보더니 곧 싱글싱글 웃으며 손을 뻗어 나의 얼
굴에 묻은 물기를 닦아주었다.
순간적으로 난 그녀를 보고 하연 누나를 떠올렸지만…. 곧
미쳤어. 미쳤지. 미쳤어를 연발하며 혀를 차야 했다.
쯧. 내가 정말 미쳤지. 이 자칭 초 슈퍼 울트라 컴퓨터 코드네임. 001원 아리
스를 하연 누나로 착각을 하다니….
우선 성격부터 판이하게 달랐다. 하연 누나는 대체적으로 조용한 스타일에 언
제나 보호해주고 싶은 느낌이드는 여자이지만….
아리스는…. 성격파악 불가.. --;
보호해 주고 싶은? 개뿔이. 누가 이 샤이닝 브링거를 부술 꺼야?
왕국 기사단 평생 활 쏴봐라. 닿기나 하는지. 드래곤?
브레스 쏘아도 실드 뚫기 힘들다. 고룡급 정도 된다면 가능 할만도 하지만….
녀석이 쏠 때 나 맞추쇼 할만큼 샤이닝 브링거는 만만치도 않다.
게다가 주포인 샤이닝 버스터의 파괴력….
어제도 보아서 알겠지만 더 확실한 예를 위해 한 일년 전쯤에 있었던 이야기
를 해주겠다.
그러니까 그게 무슨 사건이었더라….
아무튼 무슨 게임을 가지고 아리스와 한판 붙은 적이 있었다.
음. 펀치 머신이었던가?
서로 치사한 방법 쓰지 말고 -나는 내 내공, 아리스는 컴퓨터 조작- 순수하게
힘만으로 점수를 내자고 한 적이 있었다.
여자와 남자가 그게 말이 되냐고 말하는 사람이라면….
이 한마디 듣고 쓰러질 거다. 난 이상하게 만치 힘이라면 잼병이다.
오죽하면 누나와 팔씨름해서 지겠냐? --; 크윽!!!
물론 우리 누나가 약간 힘이 세다고 하지만…. 여자 하나도 이기지 못했던 나
다. 그러니 학교 다닐 때 내가 가장 싫었던 것이 펀치머신.
물론 내공을 이용해서 친다면 세계 신기록도 가능하지만….
어쨌건 그때 그 펀치머신으로 샤이닝 브링거의 대청소를 걸고 아리스와 한판
한 적이 있었다.
그리고 결론은? 당연히 내가 이겼지. 아무리 우리 누나한테 지는 몸이라고 하
지만…. 우리 누나는 이미 여자의 한계를 넘어선 사람이고…. 쿠하하하!!!
아리스 정도야 껌이지.
그리고 일은 그때부터 시작되었다. 청소도 순전히 자신의 힘만을 이용해서 하
기로 했던 터라... -보통 때는 내 정신력을 이용해서 먼지란 먼지는 싹 쓸어
버린다- 아리스는 열심히 청소기 들고 그 넓은 선내(船內)를 돌아다녔다.
그때 아리스는 약간 화가 난 것 같았다. 그러나 내가 아리스를 그냥 쉽게(?)
청소를 하게 내버려두겠는가? 당연히 아리스가 청소를 해놓으면 그 즉시 쓰레
기를 버리고 돌아다녔다.
그 일로 결국 아리스의 화가 폭발해 버렸고 화풀이로 강제적으로 -폭주모드
돌입이었다- 루미디아를 향해 주포를 발사해 버렸고 그때 어느 소국의 수도가
순식간에 날아가 버렸었다.
그때 난 아리스의 폭주모드를 알고는 다섯가지 모드의 이름을 붙이게 되었다.
전에 말했다 시피..
노멀모드. 미친다. 완전히 장난꾸러기 꼬마다.
애교모드. 일명 고양이 모드. 이것 때문에 아리스에게 화를 낼수도 없고. 내
가 가장 치를 떠는 모드다.
하지만…. 정말 귀여우니까 봐준다. 이건.
사교모드. 이것 또한 옆에서 보고 있으며 사람 환장한다. 나와 있을 때 노멀
모드에서 처음보고 좀 생긴 남자가 나타났다 하면…. 크윽. 더 이상 말하기 싫
다.
선생모드. 가장 좋은 모드이지. 큭큭. 정보가 짭짤하게 들어오거든. 일명 걸
어 다니는 컴퓨터.
마지막으로 폭주모드. 본 것은 한번뿐이지만…. 그 이후로 절대로 아리스와
내기로 펀치머신은 하지 않았다. --;
음. 그러고 보니 어제 또 한가지 더 모드가 있던데. 내가 싸울 때는 이상하게
아무 말이 없이 내 말에 복종만 했단 말야…. 이것도 하나 모드가 되려나?
우씨. 몰라. 어제는 성격을 제대로 파악을 못해 모르겠고….
……. 근데 어째서 이야기가 이렇게 흘렀지?
아! 아리스의 성격을 파악하다가 샤이닝 버스터의 파괴력을 말하다 그렇게 됐
구나.
아무튼 이쯤에서 결론을 내려야 겠군.
아리스…. 건들면 무서운 여자다. --; 음. 좀 빈약하긴 하지만….
이것보다 더 확실한 설명이 있을까? 그리고 소국 수도 하나 날려버리는 샤이
닝 브링거의 파괴력. 고룡과도 맞짱뜬다.
절대로 아리스는 보호해 주고 싶은 여자가 아니다.
…. 근데 아리스가 여자였던가?
"어휴. 또 잡생각."
나의 이 길고도 논리정연(論理井沿) 하고도 멋진 생각들을 단 한마디 잡생각
이라고 단정 지어버린 아리스는 나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 그러고 보니 여기는 샤이닝 브링거의 브릿지의 함장석이네….
내가 여기서 잠이 들었잖아. …. 그보다 어떻게 잠들었지? 기억 나는 것은 어
제 드래곤 녀석 배 뚫리고 돼진 것뿐인데….
"그후에 바로 잠드셨어요. 어떻게 된 건지는 저도 모르겠지만…."
아리스의 말에 난 고개를 끄덕여야 했다.
그러고 보니 어제 난 또 전에 로이드일행과 여행 중에 겪었던 살육의 느낌을
받았다. 그게 비록 드래곤이라고 하지만…. 녀석의 몸을 베었을 때 그 짜릿한
전율을 난 아직까지도 기억하고 있다.
젠장…. 진짜 어떻게 된 거야?
난 한숨과 함께 옆에 놓인 물컵을 들어 입으로 가져갔다.
"주인님! 잠깐 여기 좀 보시래요?"
그때 뒤쪽에서 아리스가 나를 불렀고 난 별 생각 없이 고개를 돌렸다가 그대
로 입에 들어있는 물을 삼키지도 못하고 뿜어버리고 말았다!!
"어때요?"
"크. 크윽!!! 아! 아리스!!!!!"
신무(神武)
26.
내가 돌아본 그곳. 그곳에는 아리스가 수영복만을 입은 채로 나에게 양팔을
쫙 펴고 서있었다.
그것도 말이 좋아서 수영복이지….
갓난아기 손바닥만한 크기의 천으로 중요부위만을 쏙 가리고 있는 그 모습을
보니 정말….
기분 좋다. 헤…. 가 아니지….
"장난 좀 그만해!!!"
"히잉. 난 주인님이 슬퍼하시기에 기분 좀 풀어 드리려고 한 건데."
"이. 이봐…. 아리스…. 그런 차림으로 애교 모드 돌입하지 말라구…."
돌아버리겠다. 내 가운데 그 녀석은 발광하고 아리스는 나의 몸에 붙어서 몸
을 비비고….
젠장. 내가 보통의 색한이라면 벌써 일 벌리고도 남았다.
아니…. 아리스가 보통의 여자라면 나도 벌써 일 벌렸다.
그! 러! 나! 아리스는 여자가 아닐뿐더러!!!!
지금 이 행동은 순전히 날 놀리기 위해서 하는 것이다!!!!!
"빨리 옷 안 입어? 맞는다!!!"
나의 고함과 함께 아리스는 입술을 쭈욱 내밀고는 간단하게 손짓을 하였다.
그러자 아리스의 몸이 약간 흐려지더니 곧 평소에 입고 다니는 옷을 몸에 걸쳤
다. 뭐 시각 상으로 그렇게 보이게 할뿐이지만….
물론 지금 옷도 상당히 가슴과 허리가 두드러지고 무릎보다 약간 위쪽으로 올
라오는 치마는 좀 야한 편이었지만…. 아까보다는 낳았다.
"칫. 주인님은 여체의 아름다움을 모른다니까."
"알만큼 아니까 걱정마."
난 퉁명스럽게 말하고는 시선을 돌리려다 곧 아리스의 뒤쪽을 보며 숨을 들이
켰다.
그곳에는…. 베르리나가 멍한 얼굴로 나와 아리스를 바라보고 있었다.
젠장. 그러고 보니 아리스가 베르리나를 이곳으로 데리고 왔었군. 난 베르리
나를 아무 자리에나 앉게 한 후 아리스를 보며 마음속으로 물었다.
-대체 뭐하고 있었던 거야?
-저도 깜빡 했다고요.
하아. 컴퓨터가 깜빡해? 난 허탈함의 한숨을 내쉬며 곧 다시 궁금한 것이 일
어 아리스에게 물었다.
-그보다 베르리나 어디에다가 놓아두었던 거야?
-주인님의 방 옆방인데요.
아리스의 말에 난 존경 어린 눈길로 베르리나를 바라보아야 했다. 나의 시선
이 이상했는지 베르리나는 약간 표정을 변화시키며 아리스를 바라보았다.
-쿡쿡. 주인님은 함장 실로 찾아오기까지 자그마치 한 달이나 걸렸는데.
-시끄러!!!
난 솟구치는 짜증에 혀를 차고는 몸을 돌려버렸다. 그러자 아리스는 베르리나
를 보며 서로 대화를 나누기 시작했다.
"어제 잘 주무셨어요?"
"아. 네…. 네. 그보다 여긴…."
하긴 황당도 하겠지. 드래곤한테 죽을 뻔했는데 일어나 보니 생전 보도 못한
최첨단 전함이라니.
완전히 내가 처음 이 샤이닝 브링거에 탔을 때의 기분일거다.
"이곳은 신함 샤이닝 브링거. 자세한 것은 함장님께 물어보세요."
컥!!! 다시 한번 물을 마시려다 실패했다. 난 아리스를 힐끔 노려보았고 아리
스는 재미있다는 얼굴로 날 바라보고 있었다.
젠장. 내가 아리스를 만든 사람정도의 지식만 있다면 저것 갈아치우고 새로
만들어 버린다.
라고 투덜거리면서도 베르리나의 시선을 받고는 어쩔 수 없이 헛기침을 해야
만 했다.
젠장. 그나저나 뭐라고 해야 하는 거야? 실지로 나는 이 배에서 함장이라는
직위와 동력원 -내 정신에너지- 이라는 것만 빼면 모든 일은 아리스가 책임을
지고 수행한다.
게다가 이런 것은 밝히기 뭐하지만…. 난 아직 이 배의 구조도 다 못 외었단
말이다!!!!
쩝. 베르리나. 그렇게 보지 말라구요. 저도 대체 이 배가 뭔지 궁금하니까.
내가 이런저런 잡생각에 빠져 있을 때 먼저 말을 꺼낸 것은 베르리나였다.
"혹시 이건 지고족의 유물인가요?"
엥? 지고족? 난 황당한 얼굴로 아리스를 바라보았다. 그러나 아리스는 조금
놀란 얼굴로 베르리나를 보고 있었다.
뭐야? 베르리나의 말이 맞는 거야?
"노. 놀랍네요. 지고족을 알고있는 사람이 있다니…."
"마. 맞군요!!"
말한 아리스나 대답한 베르리나나 둘 다 놀란 얼굴이었다. 다만 아리스는 베
르리나만을 신기한 얼굴로 바라보았고 베르리나는 신기한 얼굴로 선내를 돌아
보는 것만 다르다 뿐이지.
쩝. 저 베르리나가 저렇게 감탄할 정도로 지고족이 대단한 건가?
그러고 보니 그제부터 베르리나의 표정이 변하는 것을 자주 보네. 거의 일주
일동안 같이 여행하면서 베르리나는 언제나 무표정을 고수하고 있었는데….
쩝. 원래 원판이 어느 정도 되니 어떤 표정을 지어도 예쁘군….
그보다 진짜 궁금한 것은 물어봐야지.
-이봐. 아리스 지고족이 대체 뭐야?
"그럼. 여기 카인님은 지고족의 후손이신 가요?"
"그렇답니다."
씨. 씹혔다!!!
서로 잘도 화기애애하게 대화를 하는 아리스와 베르리나. 둘의 대화는 점점
더 그 심도가 더해져 신화 이야기가 나오는가 하면….
수 천년 전에 어쨌느니 그런 이야기로 넘어가고 있었다.
나야. 당연히 지식 발이 짧은 관계로 그들이 무슨 말을 하나 멍한 얼굴로 바
라볼 수밖에 없었다.
그. 그보다. 내가 지고족인가 뭔가의 후손?
이. 이봐 아리스. 난 단군 할아버지의 후손이라고!!!
멋대로 남의 조상 바꾸지 말란 말야!! 알아?
"하지만 지고족은 수 천년 전 마족과의 전쟁에서 전멸을 했다고 했는데."
"완전한 전멸은 아니었답니다. 아직 그 당시 열 두 명의 지고족이 살아남았지
요. 카인님은 그중 이 신함 샤이닝 브링거의 주인님이었던 전신(戰神) 아라크
드님의 후손이랍니다."
!! 아. 아라크드?
난 놀란 얼굴로 대화를 하고 있는 아리스를 바라보았다.
아라크드! 언젠가. 이 세상에서 첫 살인을 하고…. 그날 꿈에서 나타났던 이
름. 수천의 날개 달린 천사들과의 전쟁.
비록 꿈이었었지만 너무나도 현실처럼 느껴졌던 꿈이었었다.
그 천사의 목을 베던 느낌이 아직까지도 생생히 남아있을 정도였다.
그 당시. 그들은 나에게 아라크드라고 했었다.
난 주체할 수 없는 흥분을 느끼며 아리스를 바라보았다.
나의 시선을 느껴서일까? 아리스와 베르리나는 나에게로 시선을 돌렸다.
"주. 주인님."
"아리스. 아라크드가 대체 누구지?"
"네?"
놀란 얼굴의 아라크드. 그녀의 얼굴은 무엇인가 상당히 큰 충격을 받은 것처
럼 하얗게 질려 있었다.
"…. 서. 설마…."
"빠. 빨리 말해. 그 아라크드라는 자식이 대체 누구야?!!!"
젠장. 갑자기 왜 이렇게 몸이 뜨거워지지? 겨우 아라크드라는 이름을 들었을
뿐인데….
대체 그놈이 누군데 나의 꿈속에 자신이 나인 것인냥 나타나서 지랄을 떨고
날 이렇게 혼란스럽게 만드는 것이냔 말이다!!
젠장. 젠장!!! 빌어먹을!!!
난. 난 최성빈이란 말이다!!! 지구에서 태어났고 19세라는 나이인 3년전까지
지구에서 살아온 최성빈이란 말이다!!!
그런데…. 그런데!!! 지랄 같은 이 세계에서 생전 보도 듣도 못한 이름을 가
진 녀석의 후손이 되어야 하고….
그녀석이 꾸어야 할 꿈을 꾸어야 하느냔 말이다!!!
"주. 주인님!! 제발 진정하세요!!"
"마. 말해. 아라크드. 그녀석이 진짜 누구야? 그리고…. 세이라인은 대체 누
구지?"
세. 세이라인? 이건 대체 누구지? 갑자기 한번도 들어보지 못한 이름이 나의
입에서 튀어나오는 것은 대체 어떻게 된 거야?
순간 난 혼란 속에 빠져드는 나의 정신을 주체할 수가 없었다.
난 대체 누구지? 과연 난 지구에서 살던 최성빈이 맞는 건가?
난…. 난…. 난 대체 뭐야!!!!
"크아아아아아악!!!!!"
"주인님!!!"
점점 흐려지는 정신을 비집고 아리스의 고함이 들려왔지만 난 그것을 털어 버
리고 편안함에 몸을 맡겨 버리고 말았다.
신무(神武)
27.
-전 왜 안 되는 건가요?
넌 누구지? 갑자기 왜 나에게 그런 소리를 하는 거야?
-그래요. 당신과 저는 엄연히 다른 존재예요. 영원한 삶을 살아가는 당신과는
다르게 저는 겨우 60년을 살아가지도 못해요.
하지만…. 저를 위해서 그 정도만 제 옆에 있어주면 안 되는 건가요?
영원히 살아간다고? 내가? 무슨 소리야?
-당신도. 당신도 저를 좋아한다고 하셨잖아요. 그런데…. 그런데….
내가 그쪽을 좋아한다고 했었다고? 무슨 소리야? 난 그쪽을 지금 처음 보는
거라고.
넌. 넌 대체 누구야?
-제. 제발 저만을 바라봐 주실 수 없나요?
내가 왜? 무엇 때문에….
-부탁이에요. 아라크드….
!!!! 아. 아라크드!?
헉헉….
꾸. 꿈? 난 아직까지도 귓속에 울리는 것만 같은 그 목소리를 떨쳐내며 호흡
을 가다듬었다.
떨려 오는 몸. 나는 손을 들어 흡사 병이라도 걸린 듯 흔들리는 손을 바라보
았다.
순간 내가 정신을 잃기 전의 기억이 마치 각인이 되듯 나의 머리 속에서 떠올
랐다.
아라크드….
이 신함 샤이닝 브링거의 원 주인.
그가 대체 누구 길래. 이름 하나만으로 날 흥분하게 만드는 거지?
난 떨려오는 몸을 감싸안으며 신음을 흘려 내야만 했다.
모든 것이 의문에 쌓여있다.
내가 이 세계로 온 이유…. 내가 이 신함 샤이닝 브링거의 주인이 된 이유….
그리고 아라크드란 이름만을 들어도 몸이 떨려오는 이유.
내 꿈속에 내가 아라크드란 녀석이 되어야만 하는 이유….
미칠 것 같다. 무엇인가 있다.
이 샤이닝 브링거에는…. 아리스는 내가 모르는 그 무엇인가를 알고 있을 것
이다.
그곳까지 생각이 미치자 나는 고개를 들어올리고는 주위를 돌아보았다.
"아리스…. 아리스!!"
비틀거리며 침대에서 일어난 나는 소리쳐 아리스를 찾았다.
그러자 아리스가 약간 어두운 얼굴로 나의 앞에 스르륵 모습을 드러냈다. 난
급히 아리스의 양어깨를 잡으며 그녀에게 물었다.
"아리스…. 대체 아라크드가 누구야? 어째서 그 자식이 자꾸 내 기억 저편에
서 꿈틀대는 것이냐고!! 왜 꿈에서 나타나는 사람들은 다 날 아라크드라고 부
르는 거지? 아리스! 알고 있지? 제발…. 대답 좀 해줘!!"
"주인님…."
"부탁이야…. 나 이러다가 미쳐버릴 것 같아…."
힘이 빠졌다. 머릿속은 어지럽기만 했고 궁금함에 돌아버릴 지경이었다. 난
아리스의 앞에 무릎을 꿇은 채로 이마를 감싸 쥐었다.
"나…. 난…. 크흑…."
"주인님…."
그런 나를 아리스는 부드럽게 끌어안으며 쓰다듬어 주었다. 난 아리스의 품안
에서 계속해서 내 머리 속에 맴도는 의문점과 씨름을 하며 그녀에게 물었다.
"말해줘…. 아리스…."
"주인님……"
"부탁이야…. 넌 알고 있지. 아라크드가 대체 누구지?"
한동안 아리스는 대답이 없었다. 그러나 난 그때 그녀가 심각하게 고민을 하
는 것을 볼 수가 있었다.
프로그램이…. 모든 것을 연산으로 실행하는 프로그램이 고민을?
그러나 이런 생각은 잠시였다. 결국 그녀가 체념한 듯 고개를 끄덕였기 때문
이었다.
"알겠어요 주인님…. 하지만…. 전 자세한 것은 말씀 드릴수가 없어요."
"무. 무엇이라도 좋아! 아리스 네가 아는 것이라면…."
"휴우…. 어쩔 수 없네요. 다른 열 한 명의 지고족을 찾으세요. 그러면 아라
크드님과 주인님의 관계를 아실 수 있을 거예요."
다. 다른 열 한 명의 지고족?
난 잠시 생각을 하다 아리스에게 물었다.
"그들은 어디에 있지?"
그러나 아리스는 고개를 저을 뿐이었다.
난 허탈한 기분이 들었다. 이 넓은 세상에서 열 한 명의 지고족을 어떻게 찾
는단 말인가?
그것도 아무런 단서도 없이.
"…."
"지고족의 머리카락은 모두 검은색이에요."
아리스의 말에 난 눈을 크게 뜨고 그녀를 바라보았다.
검은색? 그렇다면 가능성은 있다. 이 세상에 검은 머리카락을 가진 사람들은
손가락으로 셀 수 있을 정도라 하지 않았던가?
물론 그들이 모두 지고족이라는 보장도 없고 또 자신을 숨기기 위해서 염색을
하고 사는 지고족도 있을 수도 있지만….
우선은 그 몇 명의 검은 머리카락의 인물을 찾으면 된다는 건가?
…. 그런데 그들이 어디에 있는 줄 알아서 찾지?
"루난왕국의 재상의 머리카락이 검은색이라고 했었던 것 같은데…."
…. 하하! 아리스!! 역시 넌 나의 구세주라니까!!!
난 밝게 웃으며 아리스를 껴안아 주었다.
잠깐 아리스의 얼굴을 봤을 때 그녀의 얼굴에 어떤 이유 모를 슬픈 미소가 어
려있는 것 같았지만….
지금의 나에게는 그것을 그렇게 신경 쓸 틈이 없었다.
"아리스! 지금 당장 루난왕국의 수도로 가자."
"…. 네…."
루난 왕국의 수도 페알딘의 근처 숲에 내려선 나와 아리스, 베르리나는 즉시
숲을 벗어났다.
베르리나는 순간적으로 앞에 숲이 나타나자 좀 놀란 것 같았지만 곧 이게 지
고족의 힘이구나 생각을 하며 흥미로워 하는 것 같았고 -아무리 봐도 베르리나
보통의 상인이 아닌것 같았다- 아리스는 어느새 샤이닝브링거에서의 표정을 모
두 날려버리고는 노멀모드로 돌입해 내 옆에서 지나 가는 산새 한 마리와 장난
을 치고 있었다.
"자! 받아!!"
짹!!
"참 잘했어요!!"
작은 쌀알 같은 것을 던지면 산새는 휙 날라 그것을 받아먹었고 아리스는 박
수를 치는 것이었다.
…. 꼭 유치원 선생 같았다. --;
베르리나는 그런 아리스를 신기하게 바라보고 있고….
쩝…. 저쪽은 서커스 구경하는 동네 여자 같네….
어쨌든 그 모습을 보고 있자니 지금까지 조금 꿀꿀했던 기분이 풀리는 것만
같았다. 완전히는 아니지만… 아라크드라는 단어를 생각만 해도 끓어오르던 이
상한 흥분이나 감정도 이제는 상당히 약화되어 있었다.
그리고는 돌맹이를 던져 산새에게 먹이고는 꺄르르 웃는 아리스의 잔인한 장
면을 보자….
허탈한 한숨이 나왔다.
저게 정말 얼마 전까지 그 무게잡고 슬픈 미소를 짓던 아리스가 맞나?
"에휴. 그만 가자. 우선 저 도시에 들어가고 봐야지…."
"아! 주인님 잠깐만."
그때 산새를 날려보내고는 아리스가 나에게 급히 말했다. 난 막 옮기려던 걸
음을 멈추고는 아리스를 바라보았다.
"왜?"
"그 머리 염색 좀 하면 안 되요? 그리고 주인님 그 강맹한 기운 좀 죽이면 안
되요?"
"뭐?"
"여기 수도에는 상당히 강한 사람이 많다구요. 주인님의 기운정도면 금방 느
끼고 기사들이 몰려올걸요."
"설마…."
"저곳에는 소드마스터가 셋이나 있다구요. 아주 가까이 있지 않으면 느낄 수
없다고 하지만 그래도 혹시 모르잖아요. 그리고 머리도…. 검은 머리카락은 특
이한 것이에요. 사람들의 시선이 바로 모인다구요."
에? 그러고 보니 전에 세든에서도 나에게 시선이 모인 이유가 옷 때문만이 아
니라 머리카락 때문일 때도 있는 것 같았다. 비록 조금 이기는 하지만….
쩝. 그렇다고 이제 와서 염색을 바로 할 수도 없고 기운을 감추는 것은 더더
욱 할 수가 없다. 아직 내 모든 힘을 내가 조절하지를 못한다는 말이다.
젠장. 내 힘을 전부 조종만 가능하다면…. 그때 드래곤 녀석도 내가 갈라 버
릴 수 있었는데…. 아까워….
"지금 어떻게 할 수 있는 게 아니잖아. 염색약도 없을뿐더러…. 이 기를 감추
는 것은 아직 나에게는 무리라고…."
"음. 잠깐만요…. 그게 어디에 있었더라…. 여긴 아니고…. 여긴가? 아닌
데…."
아리스는 무엇인가를 중얼거리며 공중에 손을 휘젓고 있었다. 난 그 모습에
아리스가 샤이닝 브링거의 어디에선가 무엇을 찾고 있다는 것을 알 수가 있었
다.
하지만 그것을 모르는 베르리나로서는 아리스의 행동이 이상할 것이 분명했
다.
어쨌든 그때 아리스가 얼굴을 밝게 펴며 손을 휘저었다.
"찾았다!!"
잠시 후 난 아리스의 손 바로 위에 빛이 모이더니 그것이 곧 두 개의 물건으
로 변하는 것을 볼 수가 있었다.
신무(神武)
28.
Part 11. 소드마스터 하스미르
아리스의 손에 놓여 있는 물건. 그것은 각각 귀걸이 하나와 반지 하나였다.
난 그것을 보며 이게 뭐냐는 얼굴로 아리스를 바라보았다.
"음. 이 반지는요 저의 모습을 실체화하는 프로그램과 약간 비슷한 기능을 가
지고 있어요. 주인님의 생각대로 빛의 굴절을 일으켜서 눈에 보이는 시각효과
를 변화시키는 거죠.
주인님의 정신력 정도면 몸 전체의 모습도 바꿀 수 있을 거예요."
"흐음. 그러니까 이것으로 내 머리카락 색깔만 바꿀 수도 있다는 말이야?"
"네! 그리고 이 귀걸이."
난 아리스가 건네주는 반지를 -특이했다. 금속의 재질도 상당히 특이했고 단
조로운 그냥 둥근 반지였지만 그 곳에는 여러 가지 이상한 문자가 써져 있었다
- 오른손 약지에 끼며 -근데 약혼반지를 왼손 약지에 끼는 것이 맞지? 이거 잘
못하면…. 우. 몰라…- 아리스의 손에 들린 귀걸이를 바라보았다.
"설마…. 나보고 그것도 하란 말은 아니지?"
"당연히 해야죠. 이건 착용자의 몸속 마나를 흩어버리는 역할을 해요. 원래는
일종의 마나 봉인용으로 만들었는데…. 이런 쪽으로 쓰일 줄은 몰랐네요. 주인
님 정도의 마나는 완전히 다 흩어 버릴 수 있을지 없을지는 모르겠지만…. 전
충분히 사람들의 위화감이 느껴지지 않을 정도로 마나를 흩어버릴 수 있다고
생각해요.
물론 완전히 날려버리는 것이 아니라 그 귀걸이 쪽으로 모아서 봉인을 시켜놓
은 거예요. 주인님이 원하신다면 다시 원래대로 할수도 있구요."
난 잠시 못마땅한 얼굴로 그 귀걸이를 바라보았다.
참…. 남자인 내가 귀걸이 따위를 해야 하다니…. 아무리 귀찮은 일을 피하는
것이 목적이라고 하지만…. 그냥 덤비는 놈 족족이 다 날려버려?
"어~머! 설마 귀 뚫기 무서워서 그런 것은 아니겠죠?"
덜컥!!
순간적으로 내 속에서 무엇인가가 떨어지는 소리가 들렸다.
계. 계집애 눈치도 빨라….
"까르르! 주인님 설마 진짜예요?"
"그. 그럴 리가 없잖아!!!! 젠장!! 그래 내놔!! 한다 해!!!"
라고 말하며 빼앗듯 귀걸이를 낚아챈 나는 잠시 그것을 노려보았다. 역삼각형
의 얇은 판에는 역시나 반지와 마찬가지로 여러 가지 이상한 문자가 빡빡이 적
혀 있었다.
"안 뚫어져요. 그만 쳐다보고 빨리 차세요."
크윽!! 아리스!! 언젠가는 복수한다!!!
난 조심스럽게 그것을 오른쪽 귀로 가져가 대었다.
쿵쾅거리는 가슴. 젠장. 드래곤과도 맞장 뜬 내가 겨우 귀걸이 하나 차는데
이렇게 떨리다니….
"빨리좀 해요. 해지겠어요!!"
"알았어!!!!"
결국 화가 폭발한 나는 될 대로 되라는 심정 하나로 귀걸이를 귀에 찔러 넣었
다. 그러나….
"뭐. 뭐야?"
"꺄르르!!"
뻥진 얼굴로 아무 무리 없이 귀에 걸어진 귀걸이를 만지며 서있는 나를 보며
웃음을 터트리는 아리스.
순간 나는 아리스에게 뭔가 당했다는 생각이 강하게 뒷통수를 강타했다.
"너! 무슨 짓 한 거야!!"
"꺄하하!! 주인님 너무 겁쟁이다! 그건 그냥 귀에 갖다 대기만 하면 저절로
착용이 되는 것이라구요. 귀를 뚫을 필요도 없어요."
"하. 하지만…. 분명 귀걸이에는 귀를 뚫어야 쓸 수 있게끔 장치가 되어 있었
는…. 설마!! 아리스 너!!!"
"꺄르르!!"
아리스의 웃음으로 난 확실히 심증을 굳힐 수 있었다. 아리스의 능력이라면
이런 귀걸이 정도 모양을 바꿔 보이게 하는 것은 간단하니까….
난 부들부들 떨리는 몸을 진정 시키며 최대한 분노를 참아보려고 했지만….
했지만….
크윽!! 폭발한다!!
아냐아냐! 참자. 참아!!! 여기서 화를 낸다면 난 아리스와 똑같은 수준이 되
고 만다.
인간 최성빈. 겨우 컴퓨터 프로그램 따위에게 놀림 당한 것을 가지고 화를 속
좁게 화를 낼 수는 없지 않느냐.
…. 뭐? 내가 컴퓨터 프로그램 따위에게 놀림을 당했다고?
겨우 컴퓨터 프로그램 따위에게!!!!!!!
"크아악!!! 아리스 너 주인 알기를 뭐로 아는 거야!!!!"
"겁쟁이!"
"크아아악!!!!!!"
순간 나는 에반게리온이 폭주할 때 어떤 기분(?)이었는지 알 수가 있었다.
결국…. 또 당했다.
그렇게 화를 내며 오늘만은 아작을 내겠다고 다짐. 다짐 또 다짐을 했건만….
아리스의 애교모드 돌입과 함께 이번에도 어김없이 꿀밤 한 대로 끝을 내고야
말았다.
크윽!!! 역시 난 아리스의 밥이란 말인가?
"그럼 무슨 색깔로 하시고 싶으신 거예요?"
"앞 머리카락 약간 붉은 색 나머지는 은색."
오오옷!! 이걸 얼마나 해보고 싶었던 염색인가?
학생이라는 이유 하나만으로 게다가 누나의 은색으로 염색하면 쫓아내 버린다
는 말에 해보지도 못했는데….
드디어 해보는 구나!!!!!
"음. 알았어요. -Transformation-- "
순간 나의 눈에 보이는 긴 앞머리의 일부는 붉은 색으로 나머지는 은색으로
변해버리는 것을 볼 수가 있었다.
신기하다는 얼굴로 보는 베르리나를 -요즘 이 여자 놀란 얼굴밖에 못 보는 것
같단 말야. 원체 말이 없어 목소리도 못 듣고, 쩝- 보니 머리카락 전체의 색깔
이 변했다는 것을 알수가 있었다.
크흑!! 이 감격!!!!! 난 죽어도 좋아!!!
…. 그런데…. 이거 약간 불길한데…. 이렇게 변화시킨 것은 아리스인데….
난 약간 뚱한 얼굴로 아리스를 보았다.
"아리스 제대로 한 거야?"
"어머! 저를 못 믿겠다는 거예요? 이건 주인님의 생각하시는 모습 외에는 제
가 임의로 바꿀 수는 없단 말이에요. 제가 괜히 주인님께 물어 봤겠어요?"
"네 평소 모습을 보면 도저히 믿을 수가 없는데…."
내가 한말 그대로다.
그 동안 아리스의 행동으로 보건데….
아리스의 말을 곧이곧대로 믿느니 차라리 에인셔트 드래곤이 1사이클 견습 마
법사의 매직 미사일을 맞고 죽었다는 말을 믿겠다.
"히잉. 주인님 너무해요."
"그래요. 카인씨가 말한 그대로 변했어요."
흐음. 베르리나까지 이렇게 말하니…. 믿어야 겠군. 적어도 베르리나는 거짓
말을 하면서까지 날 놀릴 여자로는 보이지 않으니….
"주인님 못됐어. 삶을 그렇게 삐딱하게 살면 안 되요."
"…. 뭐? 삶을 삐딱?"
"그래요. 저 같은 미소녀가 장난을 치더라도 그냥 넘겨주는 아량도 없어요?"
"…."
할말없다. 갑자기 두통이 막 밀려오는구나.
난 아픈 머리를 감싸며 머리를 흔들었다.
"알았어. 그보다 이번에는 이 귀걸이나 좀 가동 시켜봐."
"주인님이 저한테 사과 할 때까지 안 해줄 거예요."
"갑자기 사과는 무슨 사과?!"
"방금 전 절 의심한 것. 그리고 저를 거짓말쟁이로 몬 것. 등등."
…. 이 애가 갑자기 왜 이렇게 세게 나오는 거야?
"빨리 해요."
"안해!! 그냥 이 꼴 그대로 살란다. 안 감추고 덤비는 놈들 다 날려 버리면
되는거잖아. 너한테 사과를 하느니 조금 짜증나는 것을 택할래."
"밴댕이 소갈딱지."
"뭐?"
"그렇잖아요. 겨우 사과 한마디도 못하고. 주인님 그렇게 세상 살면 안되요."
"…. 크윽!! 알았어!!!! 미안하다!! 됐냐?"
크윽. 근데 내가 왜 밴댕이 소갈딱지라는 말을 들어야 하지? ….
그리고 그 말에 사과를 하다니…. 이거 어째 아리스에게 또 말장난으로 당한
것 같다.
"꺄르르! 됐어요. 그럼. -stamped seal---!!"
순간 나는 내 몸 속의 내공 대부분이 귀걸이 속으로 몰리는 것을 느낄 수가
있었다.
순식간에 3갑자의 내공이 30년 정도의 내공밖에 남지 않자 나는 약간 얼떨떨
한 기분을 느껴야 했다.
처음에는 약간 몸이 무거워 진 것 같았지만 어느 정도 시간이 지나자 그것은
괜찮아 졌다.
난 내공을 끌어 올려 손가락으로 기를 모아보았다. 그러나 탄지공은 시전 되
지 않았다.
"이거 정말이네. 내공이 이렇게 까지 줄어버리다니…."
"봉인 해제 시에는 --Cancellation-- 이라고 주문을 외우시면 되요. 약속언어
니까 꼭 잊어버리지 마세요. 위험할 때는 주인님이 알아서 푸셔야 하니까."
난 고개를 끄덕였다.
그보다 이제 모든 준비는 다 갖추어 진 건가?
쩝 도시로 내려가서 검이라도 하나 사야겠군. 이 정도 내공으로는 기살검도
쓸 수 없을 것이고…. 무기가 하나 필요하겠어.
그 보다 예도(銳刀)가 좋을 건데…. 그런 것이 이런 곳에 있을까?
…. !! 이건?
그때 난 왼쪽에서 한 거대한 기가 다가오는 것을 느꼈다. 난 급히 아리스와
베르리나의 앞에 서며 그쪽으로 시선을 향했고 곧 그곳에서 달려오는 세 마리
의 말을 볼 수가 있었다.
신무(神武)
29.
가장 앞쪽에 달려오는 사람은 칠흑처럼 검은 흑마를 탄 40대 중반의 아저씨였
고 그 뒤로 10대 후반정도의 짜증날 정도로 잘생긴 사내녀석과 20대 후반정도
의 약간 험악하게 생긴 청년이 뒤따라 왔다.
그들은 우리 일행이 있는 바로 앞까지 다가와 말을 멈추며 물었다.
"이보게. 혹시 이곳에 다른 사람 못 봤는가?"
썅. 말에서 내리지도 않고 아랫것 보듯 말하다니. 아무리 나보다 나이가 많은
아저씨라고 하지만 너무 하잖아.
이런 생각이 들자 자연히 나의 입은 삐죽 튀어나왔고 좋게 말이 튀어나올 리
가 없었다.
"몰라요. 알아서 찾아봐요."
"윽! 이 녀석!!! 감히 말버릇이 그게 뭐냐!!"
흐응. 늙은이는 가만있는데 가장 어린 녀석이 발끈하네. 어차피 처음 나타날
때부터 얼굴이 상당히 마음에 안 들었는데 -인정하기 싫지만 나보다 잘생겼다-
밟아버려?
쯧. 참자. 불쌍한 인생 벌써 종치게 할 수는 없잖아.
난 그를 무시하듯 시선을 돌려버렸다.
"이. 이녀석!!"
"그만두거라!!"
"하. 하지만 아버지…."
오호라. 저 아저씨의 아들이었군.
녀석은 아버지의 말에 잠시 주춤하더니 곧 나에게 싸늘한 시선을 보내고는 고
개를 돌려버렸다.
그런 그를 보며 아저씨는 혀를 약간 차더니 나에게 정중하게 입을 열었다.
"미안하네. 아들녀석이 아직 덜 자랐네. 그보다 정말 이곳에서 아무도 못 봤
는가?"
"아참. 모른다니 까요. 저희는 지금까지 이곳에서 죽치고 있었는데 아무도 지
나간 사람 따위는 없었다고요."
"허허. 참 이상하군…."
얼굴은 중년아저씨인데 행동은 완전히 늙은이이다. 그보다 이 아저씨 정말 엄
청난데…. 정확히는 느낄 수 없지만…. 거의 1갑자 정도의 내공을 가지고 있는
것 같아….
"그럼 그 사이에 대체 어디로 갔단 말인가?"
"빨리 말하지 못할까? 분명 이곳에 누군가가 있었다. 어느 안전이라고 거짓을
고하느냐?"
쯧. 저 녀석 또 나서네. 조그마한 녀석이 애비 믿고 깝죽거리네 그려.
결국 그 녀석에게 뭐라고 한마디 갈겨 주려고 했는데 그보다 내 뒤쪽에 있던
아리스가 먼저 입을 열었다.
"지금 그럼 우리 주인님이 거짓말을 하고 있다는 거예요? 그리고 거기 꼬맹
이! 감히 어느 안전이라고 아직까지 말 위에서 깝죽거리는 거야? 정 묻고 싶은
것이 있으며 내려와서 무릎꿇고 물어!!"
강력한 일격이다. 녀석은 당황해서 아무 말도 못하고 아리스만을 바라볼 뿐이
었다. 하기야 뭐라고 하고 싶어도 아리스의 얼굴을 보면 차마 말을 못하겠지.
나조차 아무리 화가 나도 꿀밤 하나로 끝나는데…. 네놈이야 오죽 하겠냐?
난 씩씩거리는 아리스를 말리는 척 하면서도 속으로는 박수를 쳐주고 있었다.
"참아. 아직 어린애잖아."
"짜증나는데 샤이닝 버스터 한방 쏴버릴까 보다."
이…. 이거 빨리 말려야겠네. 잘못했다가는 오늘 또 한나라 망하게 생겼잖아.
난 아리스를 어르고 달래서 조건 하나를 걸고 겨우 화를 가라앉힐 수 있었다.
-그 조건이란 게 조금 그렇지만…. …. 젠장 그냥 루난왕국 오늘 날려버릴까
보다-
그러나 그 꼬맹이 녀석은 자신이 어떻게 살아났는지도 모르고 소리를 버럭 지
르며 길길이 날뛰기 시작했다.
크윽. 저 녀석이 이 몸이 희생(?)을 해서 지 몸하고 나라 살려주니까 그것도
모르고 지랄을 떨어? 그냥 콱!!
"이놈!! 감히 이 몸이 누구인줄 아느냐? 대 루난 왕…."
"메르틴!! 그만하지 못하겠느냐!!"
그러나 녀석의 발악은 그 아버지의 고함 한방에 2초를 넘기지 못하고 죽어버
리고 말았다.
고개를 푹 숙이는 메르틴이라는 녀석을 한번 노려본 그 아저씨는 곧 말에서
내리고는 나에게 입을 열었다.
"미안하네. 사냥 중 이곳에서 상상도 못할 마나를 가진 사람이 있는 것을 느
껴 급히 왔는데…. 아무래도 내가 착각을 했었나 보네."
그 말에 난 아리스에게로 힐끔 시선을 돌렸다.
그러자 아리스는 나에 귀에 대고는 소근거리며 말했다.
"거 봐요. 바로 걸리잖아요."
쩝. 뭐 할말없다. 거의 1갑자의 내공을 가진 사람. 그럼 이 사람이 소드마스
터인가?
그러고 보니 소드마스터를 한번도 본적이 없으니…. 그들의 실력이 얼마나 되
는지를 모르잖아.
"그보다…. 자네도 굉장하군…. 그래 지금 나이가 몇인가?"
"에? 이제 스물 하나인데…."
그때 그 아저씨가 나에게 시선을 고정시키며 물었고 난 얼떨결에 대답을 해주
고 말았다.
그러자 그 아저씨는 약간 놀랍다는 얼굴로 나를 바라보았다.
"놀랍군. 이제 겨우 스물 하나에 소드마스터에 근접해 있는 경지를 이루다
니…. 어쩌면 앞으로 2,3년이면 소드마스터에 이를 수도 있겠어."
그 말에 뒤쪽의 두 명은 특히 나에게 까불었던 그 꼬마녀석의 표정은 정말 가
관이었다.
하지만 난 아리스를 힐끔 돌아보며 쓴웃음을 지어야 했다.
이자의 말을 듣기로 약 40년에서 정도의 내공만 있다면 소드마스터의 경지를
이룰 수 있다는 말인 것 같았다.
쩝. 내 3갑자의 내공이면 소드마스터 열 명이 덤벼도 이길 수 있겠군.
"그래. 자네들은 여행자들인가?"
나의 이런 생각을 아는지 모르는지 그 아저씨는 나에게 물었다.
그러고 보니 이 아저씨 상당히 호감이 가는 아저씨다.
아들녀석처럼 거만하지도 않고. 아리스의 말을 듣자마자 바로 말에서 내리기
도 하고….
호감이 가자 나의 말도 당연히 그 아저씨에게 예의를 차리게 되었다.
"네. 지금 페알딘으로 들어가려 하는 참입니다만…."
"흐음. 그런가 그럼 묶을 곳이라도 있나?"
"하하. 당연히 여관에서 묶어 야죠. 여행자가 그곳 말고 어디서 지내겠습니
까?"
"흐음. 그런가? 그럼 내가 자네들을 손님으로 초대를 하고 싶은데 자네들의
생각은 어떤가?"
"네?"
"아! 아버지!!!"
"고. 공작님!!!"
나의 반문과 뒤쪽의 두 녀석들의 고함소리.
그보다. 이 아저씨 공작이었나? 내가 알기로 공작이라면….
한 나라의 짱의 친척이나 또는 엄청나게 나라에 보탬이 되는 일을 해야지 얻
는 직위라고 하던데….
이 아저씨. 보통 아저씨는 아닐 것이라고 어렴풋이 느끼기는 했지만…. 설마
이 정도로 높은 아저씨일 줄이야.
게다가 그 정도 직위면서 한낱 여행자인 나에게 예의까지 차리고….
정말 보면 볼수록 호감이 가는 아저씨이다.
"어떤가?"
뒤쪽의 둘의 말을 싹 무시하고 나에게 빙긋 미소를 지으며 묻는 공작어르신.
-어느새 호칭도 바뀌어 있다- 난 뒤쪽에 두 여자에게 시선을 돌렸다.
아리스는 당장이라도 허락하라는 얼굴로 나에게 눈초리를 보내고 있었고 베르
리나는 나보고 알아서 하라는 눈길을 보낼 뿐이었다.
음 결론은 내가 내리는 건가? 나야 뭐? 당연히 좋다. 공작가 정도 된다면 엄
청난 부자일 것이고….
호강 한번은 기똥차게 해볼수 있을 것이다.
큭큭. 내가 이런 기회를 마다할 리 있겠냐?
"그렇게 신경을 써주신 다면 정말 몸둘 바를 모르겠습니다."
말 졸라 길고 어렵게 했지만 두 자로 짧게 압축하면 OK라는 말이었다.
큭큭. 나도 이런 어려운 말이 되다니…. 아아! 최성빈. 너의 천재성은 언제나
빛을 발하는 구나!!
한스라는 험상궂은 아저씨는 곧 고개를 숙이고 말을 몰고 사라졌고 나와 그
아저씨는 -이름이 하스미르 덴 유리샤크 이렌드 피레시온이란다. 하여간 이름
하나는 기똥차게 길다- 서로 이런 저런 이야기를 하며 나무 그늘에서 시간을
죽였다.
아리스는 금새 그 아저씨에게까지 애교를 부렸고 난 재빨리 그녀에게 눈치를
주었지만 그녀는 장난스럽게 웃으며 혀를 날름 내밀 뿐이었다.
우쓰….
갑자기 저 하스미르 아저씨가 미워지네….
신무(神武)
30.
예상 대로였다.
엄청 넓은 저택에, 수많은 하인 하녀들….
크하!!! 이게 바로 공작 저택이라는 것이구나!!!!
난 처음 들어오는 순간 설마 왕성으로 가는 건가? 라는 생각까지 했었다.
그 정도로 저택은 컸고 난 한동안 멍하니 그 저택을 바라볼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나의 이런 즐거운 뻥짐은 메르틴이라는 꼬마녀석의 알랑거림에 순식간
에 깨지고 말았다.
"촌놈…."
!! 참자…. 겨우 17살 짜리 꼬맹이 아니냐?
녀석보다 4년이나 더 오래 산 내가 참아 야지…. 어린 녀석 갈겨서 뭐 할래?
젠장.
그때 아리스가 나에게 말했다.
"짜증나는데 샤이닝 브링거 내려오게 할까요?"
…. 이 애도 나름대로 저 메르틴이라는 녀석에게 상당히 감정이 쌓였나 보다.
하아. 주인 위해서 화도 내줄 줄 알고….
평소에 장난이 심해서 그렇지 정말 착하고 귀여운 애라니까.
난 오랜만에 기분 좋게 미소를 지으며 아리스의 머리를 쓰다듬어 주었고 아리
스는 헤헤 웃음을 지어 보였다.
그때 이미 마차는 저택에 가까워져 있었다.
아니 가까이 에서 보니까 이건 진짜 성이었다.
세상에 정문에서 저택까지 마차 타고 20분이라는 게 말이 되냐?
이 시대의 귀족과 평민의 차이가 얼마나 큰지 실감이 간다.
"다 왔네. 나의 집에 온 것을 환영하네."
"후훗. 그럼 얼마동안만 신세 좀 지겠습니다."
나의 말에 하스미르공작은 호탕하게 웃으며 나와함께 저택 안으로 걸음을 옮
겼다.
후아…. 기분 죽인다….
난 욕탕에서 머리만 내놓은 채로 편안한 나른함을 느끼고 있었다.
물의 온도도 딱 적당했고….
후훗. 이거 샤이닝 브링거에서 목욕할때와는 또다른 기분이군….
…. 그때는 날마다 목욕할 때마다 아리스가 쳐들어 와서 등 밀어 주겠다고 난
리 치는 통에 피곤했는데….
이거 오늘은 아리스가 조용하니 그런 대로 또 적적하네….
난 아리스의 싱글거리는 모습을 생각하며 물 속으로 머리끝까지 푹 집어넣었
다가 곧 푸우 하며 물 밖으로 몸을 꺼내었다.
이미 여기 오기 전에 샤이닝 브링거에서 목을 한 터라 별로 때를 밀 필요는
없었다.
난 머리에 묻은 물기를 머리를 흔들어 털어 내고는 몸을 일으켜 욕탕에서 나
오려고 오른발을 꺼내었다.
그때….
"주인님!! 등 밀어 드릴게요!!!"
갑자기 문을 벌컥 열고 들어오는 녹색 머리카락의 소녀. 자칭 초 슈퍼 울트라
컴퓨터 코드넘버.001 아리스를 보며 난 한동안 시간이 정지하는 것을 느꼈다.
그리고…. 그 시간을 다시 흐르게 한 것은 아리스의 한마디였다.
"어머! 주인님 물건 진짜 크다!! 여자들이 좋아하겠어요."
"으. 으악!!! 아리스!!!!!!!"
"하하하하!!!"
저녁 식사시간에 하스미르공작의 웃음소리에 난 고개를 들 수가 없었다. 다만
힐끔거리며 아리스에게로 싸늘한 시선을 보낼 뿐이었다.
빌어먹을. 오늘 욕탕에서 있었던 일은 순식간에 저택 안으로 다 퍼져버렸다.
게다가 더 심각한 일이 있었으니….
아리스가 들어오며 문을 열어 놓은 까닭에 욕실 담당 어리고 순진한 하녀가
내가 목욕을 다 끝낸 줄 알고 들어와 버렸고 곧 나를 보고 비명을 지르며 기절
해 버리고 말았던 것이다.
아니 정확히 말해서 내 그 물건이었지만….
게다가 그녀가 내지른 비명으로 인해 저택 안의 사람들이 순식간에 몰려 들어
와 버렸고 난 순식간에 모든 사람들의 앞에서 예정에도 없는 누드쇼를 벌여야
했다!!!
젠장. 그때 상황…. 한마디로 난리도 아니었다.
남자들은 민망한지 고개를 돌리고 있었고 여자들은 두 분류로 나누어져 있었
다. 완전히 고개를 돌리고 도망치는 부류와 안보는 척 하면서 다 보는 여자들
로…. 제~엔~장!!!!
흐윽!! 나 이제 장가 어떻게 가!!!
"쿡쿡…."
그래. 웃어라. 웃어…. 지 주인 그렇게 곯리고 놀리는 게 재밌나? 으이?
그냥. 성질 같아서는….
…. 에휴. 성질은 무슨 개풀이 성질. 애교모드 한방이면 꿀밤 한방으로 끝나
는 게 벌써 몇 번이었지?
난 한숨을 내쉬며 내 앞에 놓인 고기를 입으로 가져갔다.
"그래. 여행자시라고요?"
그때 하스미르공작의 부인. 즉 이 저택의 안방마님이 나에게 물었다.
그녀는 이제 겨우 30대 중반정도로 보이는 금발 머리카락의 온화해 보이는 미
녀로 젊은 시절에는 남자들 상사병께나 들리게 만들었을 만큼 아름다워 보였
다. 하스미르공작과 마찬가지로 이 공작부인에게도 상당히 호감이 있던 나는
정중히 입을 열었다.
"네."
"그래 어디서 오는 길인가?"
"세든에서 오는 길입니다."
나의 말에 공작부인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하스미르공작은 세든이라는
말에 나에게 시선을 향하며 물었다.
"그래. 그럼 자리스 마을을 지나왔겠군."
순간 나는 가슴이 뜨끔 하는 것을 어쩔 수 없었다. 그러나 초인적인 인내력으
로 얼굴을 무표정으로 하고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면서 시선을 힐끔 내 왼쪽의 왼쪽에서 식사를 하고있는 베르리나를 바라
보았다.
그러나 그녀는 무표정한 얼굴로 고기를 썰 뿐이었다.
"이주일전 그 마을이 순식간에 초토화가 되었네. 그곳을 지나던 여행자의 말
을 들어보면 한 마리의 거대한 블랙 드래곤이 그곳에서 난동을 피우고 있을 때
갑자기 하늘에서 거대한 빛이 떨어져 그 근방 수Km를 초토화 시켰다고 하네."
이주일전? 난 멍한 기분으로 아리스를 바라보았다. 그러자 아리스가 나에게
귓속말로 입을 열었다.
"주인님 그때 이주일 동안 기절을 해 있으셨어요. 몰랐어요?"
"내. 내가?"
"네."
허참…. 벌써 그 드래곤 녀석이 죽은지 이 주일이나 지나버렸다고?
"그래 자네는 언제쯤 그곳을 지났나?"
"전 그곳을 삼 주전쯤에 지난 터라. 게다가 이곳저곳 돌아다니다가 오늘에야
페알딘에 도착했답니다. 그 소문도 오늘에서야 들었고…."
난 본의 아니게 얼굴에 철판을 깔고 거짓말을 해야만 했다.
그 짓 내가 했어요 라고 말하면 믿을 사람도 없었고 나 또한 그런 일을 퍼트
리고 다닐 일도 없었던 것이다.
그보다 이들이 그 사건을 어떻게 생각하는지 정말 궁금하네….
"저. 근데 그 하늘에서 덜어진 빛이라니…. 그건?"
"음. 나도 그게 가장 궁금하네. 그런데 이런 일이 이번이 처음이 아니라는 말
이야. 한 이년 전쯤에도 그 빛으로 인해 스프리던 왕국의 수도가 날아가 버린
적이 있다네."
"그. 그렇군요."
라고 말하면서 난 아리스를 바라보았다.
듣거라 저것이 바로 네가 저지른 만행이다.
"하지만 그 당시 스프리던 왕국은 상당히 문제가 있던 곳이었네. 왕자들은 패
권다툼으로 서로를 상잔하고 마지막 남은 둘째 왕자 히르딘은 자신의 아버지인
국왕까지 죽이는 만행을 저지르기까지 했더군. 게다가 가혹한 세금과 폭정으로
나라는 거의 파멸 위기까지 갔었다네. 그때 하늘에서 그 천벌이 내린 거지. 이
건 혹시 신이 내린 벌인지도 몰라. 이번 자리스 마을의 일도 드래곤의 만행에
대한 신의 벌이 아닐까?"
아리스의 폭주모드로 벌인 일과 나의 명령 한마디에 일어난 일이 그대로 신이
내린 벌로 바뀌는 순간이었다.
아리스는 아무도 모르게 킥킥 웃을 뿐이었고 나는 황당함을 감추기 위해서 고
기로 시선을 돌릴 뿐이었다.
신무(神武)
31.
Part 12. 꼬맹이 넌 죽었어!
후아아아!! 잘 잤다!!!
푸훅. 푹신한 침대라서 더 잠이 잘 오더라구.
난 일어나서 길게 기지개를 핀 후 침대에서 내려섰다.
그러고 보니 샤이닝 브링거가 아닌 밖에 나와서 잠을 잔 이래로 아리스와 같
이 자지 않은 것은 이번이 처음이군.
뭐 나야 잠자리는 편해서 좋았지만…. 매일 껴안고 자던 물건(?)이 없으니 좀
적적하던데….
칫. 내가 대체 무슨 생각을 하는 거냐?
난 쓸데없는 생각에 빠져드는 정신을 수습하며 잠옷을 벗어 어제 하스미르공
작이 내준 옷을 꺼내 들었다. 그러나….
쫙 달라붙은 쫄 바지에 -그곳이 무진장 강조가 된다- 번쩍번쩍한 그 옷은….
도저히 내가 입을 것이 아니었다.
….
한동안 말없이 그것을 바라보던 나….
별수 없이 그것을 다시 집어넣고는 어제 입고 왔던 여행복을 꺼내 입었다.
음. 역시 나에게는 이런 것이 더 잘 어울려. 역시 얼굴이 받쳐주니 아무리 싸
구려 옷을 입어도 커버가 되는군.
난 거울을 보며 갖은 포즈를 다 취해보고는 문을 열고 밖으로 나갔다.
오랜만에 일찍 일어난 기념으로 상쾌한 아침공기를 맛보고 싶었던 것이다.
하지만…. 이상하게 문을 열자 보이는 것은 수없이 많은 옷뿐이었다.
…. 알고 보니 옷장이었다. --;
젠장. 무슨 놈의 옷장 문이 이렇게 커!!
난 탕 소리가 나도록 옷장을 닫아버리고는 반대쪽에 있는 다른 문으로 향했
다.
이번에는 다행이도 출입문이었다.
그러나…. 막상 나오자 어느 쪽으로 가야할지가 막막했다.
왼쪽도 쭉 뻗은 길. 오른쪽도 쭉 뻗은 길이었던 것이다.
아는가? 샤이닝 브링거에서도 브리지까지 혼자서 찾아가기까지 장장 한 달이
나 걸렸던 나다.
애초부터 이런 저택에서 어디로 가야하는지 아는 것은 불가능했던 것이다.
난 한숨을 내쉬며 다시 안으로 들어갔다.
길도 모르면서 돌아다니다가 미아가 될 만큼 난 무식하지 않다. --;
게다가…. 꼭 밖으로 나가는데 문으로 나가야 한다는 것이라도 있는가?
방으로 돌아온 나는 간단히 창문을 열고는 그대로 뛰어내렸다.
3층? 이 정도는 식은 죽 먹기지!!
멋지게 공중에서 한바퀴를 돌며 땅에 닿기 직전에 가볍게 벽을 차고는 다시
문설트!!! --;. 아! 이거 체조 만화 아니지….
어쨌건 멋지게 착지만 하면 되는 것 아닌가?
별 어려움 없이 가볍게 착지한 나는 마음속으로 10점 만점이라고 소리를 치고
는 고개를 돌렸다.
그리고는 보았다. 한 여인이 멍하니 날 바라보고 있는 것을….
20세 정도의 짙은 푸른색 머리카락을 가진 미녀였다.
그녀는 갑자기 하늘에서 떨어진 나 때문에 놀랐는지 화원 앞에서 손에 작은
화분을 든 채 정지하듯 멈춰 있었다.
그보다 어디선가 본 여자인데….
아! 어제 식당에서 보았던 하스미르공작의 첫째 영애. 이름이….
"루나린님이라고 했었나요?"
"아! 어제 아버님과 같이 오셨던 손님이셨군요. 죄송해요 갑자기 하늘에서 떨
어져서 좀 놀라서…."
내 말에 급히 정신을 차리고는 얼굴을 붉히며 고개를 숙이는 그녀를 보며 난
미소를 지었다.
상당히 수줍음이 많은 여자 같았다.
"그런데…. 어째서 저런 곳에서…."
"아! 그게 아침 바람 좀 쐬려고 나왔어요."
"네? 저… 정문은 저쪽인데…."
그녀는 말과 함께 시선을 저택의 입구 쪽으로 향했다.
난 그런 그녀를 보며 빙그레 미소를 지으며 입을 열었다.
"그게 제가 좀 방향치이거든요. 그래서 방문으로 나와서 정문으로 나오다가
길을 잊어먹을 것 같아서 그냥 창문으로 뛰어내렸답니다."
내 말에 그녀는 잠시 멍청히 날 바라보더니 곧 입을 가리며 웃음을 터트렸다.
비록 아리스처럼 꺄르르 웃지는 않았지만 상당히 밝아 보이는 웃음이었다.
"정말 재미있으신 분이네요."
"에? 농담이 아니라 정말인데…."
"호호호. 네네. 그보다 움직임이 굉장하던데요. 거의 15미터 이상에서 뛰어내
리셨는데…. 그렇게 가뿐히 내려서고…."
그녀의 말에 난 미소를 지어 보이고는 가볍게 기를 끌어 올려 발을 굴렸다.
순간 내 몸은 5,6미터 이상을 솟구쳐 올라갔고 난 그 상태로 몸을 펴 회전을
한 후 가볍게 땅으로 내려섰다.
그러자 그녀는 신기하다는 얼굴로 나를 바라보았다.
"노. 놀라워요. 어떻게 그렇게 높게 뛰는 거죠?"
"약간의 수련을 한다면 인간이라면 누구든 가능한 겁니다. 물론 그 약간의 수
련을 얕보면 안돼지만요."
나의 말에 그녀는 고개를 끄덕였다. 난 그런 그녀를 보며 이 여인 어딘가 내
가 아는 그녀와 닮았다고 생각을 했다.
하연누나….
그랬다. 비록 아주 약간이기는 하지만…. 그녀와 풍기는 기질이 비슷했다.
그것 때문일까? 이상하게도 처음 만나는 사이임에도 불구하고 꼭 몇 년은 만
나온 사이인 것처럼 말이 술술 나왔다.
그때 갑자기 시원하면서도 약간은 강한 바람이 불어왔다. 순간 그녀의 긴 머
리카락이 바람에 휘날렸고 화원의 꽃잎들이 하늘로 솟구쳤다.
오색빛깔의 꽃잎들….
난 가볍게 손으로 바람을 일으켜 우리를 향해 날아오는 꽃잎들을 날려보냈다.
영화에서나 나올법한 장면에 그녀는 멍하니 그 모습을 바라보았다.
"후훗. 아름답네요."
그 순간 그녀가 짓는 부드러운 미소. 난 하연 누나와 너무도 닮은 그 미소에
그녀의 아름다운 얼굴을 멍하니 바라볼 수밖에 없었다.
그녀도 나의 시선을 느꼈는지 곧 얼굴을 붉히며 고개를 숙였고 그런 침묵이
우리를 갈랐다.
그러나 곧 그 침묵을 부수며 아리스의 목소리가 위에서 들려왔다.
"주인님!! 잘 잤어요? …. 꺄악!! 그 여자 누구예요?"
난 쌍심지를 켜며 날 노려보는 아리스의 시선과 나와 아리스를 번갈아 가며
바라보는 루나린의 시선을 느끼며 갑자기 밀려오는 두통에 오른손으로 콧등을
주물러야만 했다.
공작가 저택 생활은 편했다.
하스미르공작은 날 잘 대해 주었고 그의 부인인 공작부인도 나의 마음에 들었
다. 하인들도 친절했고…. 게다가 아침에 만난 루나린과의 대화도 즐거웠다.
하지만 이런 편안한 생활에도 언제나 복병이 숨어있기 마련이다.
그 복병의 이름은 바로. 메르틴 덴 유리샤크 이렌드 피레시온이라는 녀석이었
다.
쓰앙!!!! 꼬맹이라고 봐준다 하니까 이 녀석이 정말 하늘이 높은 줄 모르고
기어오르는 것. 정말 짜증나 죽겠다.
지 녀석 아비도 나한테는 한 주먹 거리도 안 되는데 어린놈이 자꾸 깔짝거리
는 것이 눈에 거슬리지만….
이 집에서 신세를 지는 터라 참는 데까지는 참아 보려고 했다.
하! 지! 만!
"흥! 어디서 굴러먹은 거지새끼가 감히…."
라는 말에 난 그 녀석에 대한 처절한 보복을 감행하기로 마음을 먹었다.
샤이닝 브링거 부른다고 날뛰는 아리스를 진정시키며 난 차근차근 계획을 짜
기 시작했다.
그리고 그 계획의 첫 스타트로서 난 하스미르공작을 찾아갔다.
때마침 그곳에는 공작부인과 루나린도 있었다.
"음…. 내 아들에게 검술을 조금 가르치고 싶다고?"
"네. 이렇게 대접을 해 주신 것에 대한 약간의 보답이라도 하고 싶어서 입니
다."
물론 아버지가 소드마스터인데 아직 그 경지에 달하지 못한 내가 -어디까지나
외면적으로- 아들을 가르치는 게 과연 필요할까? 라고 생각하겠지만….
난 여러 가지 검술을 알아두는 것도 나쁘지 않다고 말하며 공작을 설득했다.
그리고 그런 나를 가장 많이 도와준 것은 루나린이었다.
아침에 내가 보인 행동. 순식간에 5미터 이상을 뛰었던 것을 본 루나린은 그
것을 말해가며 부모를 설득시켰고 곧 공작의 고개가 끄덕여졌다.
순간 난 루나린에게 고맙다고 미소를 지어주었지만….
모를 것이다. 그것이 얼마나 사악한 미소였는지….
큭큭. 메르틴 덴 유리샤크 이렌드 피레시온! 넌 죽었어!!
신무(神武)
32.
뒤이어 내가 제시한 두 번째 조건.
수련이 조금 강도가 심할 것이라는 말에는 하스미르공작은 오히려 나에게 박
수를 치며 그렇게 하라하여 쉽게 넘어갔다.
이로서 모든 초기 조건은 갖추어 졌다. 이제는 그 녀석을 꾀어내는 일만이 남
았는데….
난 즐겁게 미소를 지으며 -물론 속으로- 메르틴 녀석을 끌고 수련장으로 직행
하기 위해 공작의 서재에서 빠져 나왔다.
그러나…. 단 10초도 안 되어서 다시 들어온 나를 공작은 이상하게 바라보았
고 난 헤헤 웃으면서 입을 열었다.
내 말에 두 공작 내외는 어리둥절한 표정이었고 루나린만이 싱긋 웃고는 나의
의도를 알아채 몸을 일으켰다.
"제가 안내해 드릴게요."
젠장. 이놈의 방향치…. 아리스에게 방향인식 장치 같은 것은 없나 좀 물어봐
야겠네.
약 10분 정도 걸어서 -집 내부를 이 정도 걸어서 목적지에 도착할 수 있다고
생각해봐라. 오히려 짜증이 인다- 난 수련장에 도착할 수가 있었다.
상당히 넓은 실내 수련장에서는 오직 단 둘. 한스란 덩치와 메르틴 그 녀석만
이 열심히 검을 부딪치며 서로 달라붙고 있었다.
쩝. 여기가 저놈들 개인 훈련장인가?
난 한동안 그 둘의 대결을 지켜보았다. 척 봐도 한스가 메르틴 녀석을 가지고
노는 것을 알 수 있을 정도였다.
가볍게 한 손으로만 검을 들어 방어만 하는 한스와는 달리 메르틴 녀석은 열
심히 이리 갔다 저리 갔다 하며 검을 휘둘렀지만…. 한스는 단 한발자국도 움
직이지 않았다.
쩝…. 저 녀석을 내가 가르쳐야 하는 거야?
힘의 이동. 몸의 균형 모두다 엉망이잖아.
그리고…. 에구 저 어이없는 검 휘두르기는 뭐야?
쩝. 거만하고 소드마스터의 아들이라 길래 좀 하는 줄 알았더니…. 이거 완전
히 개판이잖아.
이곳 검술이 원래 이런가?
난 한동안 그 모습을 턱을 괴고 바라보았다.
그런 나를 보며 루나린이 작게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엉망이죠?"
"에? 루나린도 검술에 대해서 알아요?"
난 나의 생각과 일치하게 루나린이 말하자 약간 놀라 그녀를 바라보며 물었
다. 그러나 그녀는 고개를 좌우로 흔들 뿐이었다.
"그런데 어떻게 저게 엉망이라는 것을 알죠?"
"후훗. 비록 검은 안 배웠다고는 하지만 전 무사가문의 자녀랍니다. 어렸을
때부터 아버지와 동생이 검을 휘두르는 것을 보고 자라왔어요. 비록 검술에 대
해서는 아무 것도 모른다지만 대충 제 동생의 실력이 형편없다는 것쯤은 알고
있어요."
쩝. 그렇다는 말이지…. 휴우…. 그나저나 공작어른도 상당히 골치 아프겠군.
자식 중에 하나가 저 모양이니….
"아마 아버지께서도 카인님께 메르틴의 훈련을 맞기면서 별로 기대를 하고 계
시지 않을 거예요. 이미 아버지는 메르틴보다는 둘째에게 더 기대를 하고 계시
거든요."
"둘째요?"
난 어리둥절한 얼굴로 루나린을 바라보았다. 분명 어제 저녁 식사 때 이들 가
족은 넷이었다. 공작 내외와 루나린, 그리고 메르틴이 전부였다. 그런데 또 남
은 사람이 있나?
"둘째는 지금 기사학교에 있어요. 여자임에도 불구하고 전교에서 수석을 할
정도로 검에 대해서는 엄청난 천재죠."
"예에…. 에? 여자요?"
건성으로 대답하던 나는 여자라는 말에 당황해서 다시금 루나린에게로 시선을
향했다. 그러나 그녀는 빙그레 미소를 지을 뿐 더 이상 입을 열지 않았다.
그나저나…. 여자라…. 루나린의 동생이니 예쁘겠지?
…. 내가 무슨 생각을 하는 거지?
쩝…. 천재라는데…. 궁금하네…. 쓰리 사이즈는 얼마나…. 크악!!!! 정신차
려 최성빈!!!! 너 언제부터 이렇게 변했냐? 응?
그때 한스와 메르틴의 훈련이 끝이 났다. 메르틴은 그 조금 움직였다고 헥헥
거리며 바닥에 널브러져 있었고 한스는 한숨을 한번 내쉬더니 오늘은 여기까지
입니다 라고 말하며 검을 집어넣고 있었다.
하지만…. 큭 한스에게는 오늘은 여기까지지만…. 나는 이제부터 시작이지….
꼬마녀석. 지금까지 나에게 한 그 싸기지 없는 말에 제곱 제곱을 해서 그대로
1000%이자까지 붙여 돌려 보내주지….
난 간단히 수련장으로 뛰어 내려갔고 가볍게 문설트…. 젠장 이거 체조만화
아니라니까… 자꾸…. 어쨌건 가볍게 착지를 하였다.
갑작스런 나의 등장에 메르틴은 처음에는 어리둥절한 얼굴이더니…. 곧 얼굴
을 싸늘히 굳히고는 나를 노려보았다.
썅. 10분만 지나봐라. 그 얼굴이 나오나….
한스가 나에게 물어오자 루나린이 계단으로 내려와 상황 설명을 해주었다. 그
러자 한스는 잠시 날 바라보더니 곧 몸을 돌리며 계단으로 올라갔다.
"수고하십시오."
오케이. 한스까지 인정을 했겠다. 이제 남은 것은 저 싹수머리 없는 녀석에게
사부라는 소리를 듣는 것뿐이지?
"일어나…."
"뭐야?"
"못 들었나? 일어나라는 말. 겨우 그 정도 움직이고 숨이 차서 헥헥 거리 다
니. 너 정말 남자 맞냐?"
나의 말에 녀석이 날 노려보았지만…. 그걸 누가 무서워 하냐?
"노려만 보지 말고 일어나서 검으로 날 찔러보지 그래? 세상에 노려만 본다고
나가 죽는 것은 아무 것도 없어."
"이. 이 녀석이…."
"그리고 그 반말부터 고치도록. 오늘부터는 내가 너의 스승이다. 이번 한번은
봐주지만…. 그 이상은 용서 안해."
"별 거지같은…."
녀석의 중얼거리는 소리. 다 들었다.
뒤쪽에서 듣고있던 루나린이 나서서 뭐라고 하려고 했지만. 난 그녀를 막으며
빙긋 미소를 지어 보이고는 녀석을 향해 걸어갔다.
그리고는…. 약간의 기를 모아 녀석의 배를 차버렸다.
순간적으로 붕 떠서 2m이상 날려가 바닥에 추락한 녀석은 컥컥 거리며 배를
부여잡았지만….
"카. 카인님!!"
"걱정 말아요. 저정도로 죽지는 않아요."
"하지만…."
루나린이 동생이 걱정스러운 듯 말했지만 난 싸늘히 얼굴을 굳히고는 메르틴
녀석에게 시선을 고정시키며 입을 열었다.
"겨우 그 정도 맞았다고 죽을상을 짓는 녀석이라면…. 검을 잡을 자격조차 없
는 겁니다."
내 말은 녀석에게도 똑똑히 들렸을 것이다.
하지만 얼굴과 말은 이렇게 심각하게 하였지만…. 속으로는 기분 좋아 죽을
지경이었다. 지금까지 저 녀석의 배에 발길질을 해버리고 싶은 것이 얼마였던
가?
푸하하!! 십 년 묶은 체증이 다 내려간 것 같다!!
다시 루나린이 메르틴을 보며 입을 열었다.
"하. 하지만…."
하아. 이 여자 정말 마음 약하네…. 안 죽인다니까. 조금 밟는다고 죽는 것
아냐. 오히려 루나린이 불쌍해서 봐주고 싶어지네.
…. 하지만…. 이쯤에서 끝내기에는 지금까지 나한테는 쌓인 것이 너무 많았
다.
"서로 검을 들고 싸우면…. 팔이 한쪽 잘린다고 해도 살아 남기 위해서는 남
은 팔 하나로 적의 목을 베어야 합니다. 겨우 이 정도 가지고 저런 꼴을 보인
다면…. 앞으론 검을 잡지 않고 집에서 책이나 읽는 것이 저 녀석을 위한 겁니
다."
"…."
우와! 내 말발도 죽이네. 게다가 연기력도 이 정도면 수준 급이고….
후훗. 루나린도 더 이상 아무 말도 않고 뒤로 물러섰다.
크크크…. 이제 마지막 방해자도 사라졌겠다.
메르틴. 기대하던 쇼타임이다!!!
신무(神武)
33.
"크아악!! 이 녀석!!!"
허술한 검 놀림. 나는 가볍게 녀석의 공격을 피하며 그대로 뺨을 한 대 갈겨
버렸다.
다시금 나가떨어지는 메르틴. 음. 이로서 24번째인가? 쩝. 이제는 세기도 귀
찮군….
동생이 심각하게 맞는 꼴을 더 이상 못 보겠는지 루나린은 이미 돌아간 후였
다. 그러나 그 빈자리는 어느새 아리스가 차지하고 있었다. 물론 열화와 같은
환호를 보내는 것도 잊지 않고 말이다.
"꺄악!! 주인님!! 멋져요!! 더 세게!!!"
후훗. 너의 그런 응원이 얼마나 큰 힘이 되는 줄 알고 있느냐?
물론 꼬맹이 녀석은 돌아버리기 일보직전 이겠지만….
"검 들고 날 죽여버리겠다고 설치던 메르틴 어디 갔나? 자나?"
난 짐짓 녀석이 안보인 다는 듯이 두리번거렸고 녀석은 다시금 눈에 불을 켜
고 몸을 일으키기 시작했다.
이미 퉁퉁 부운 얼굴은 더 이상 때릴 자리도 없었지만….
"이녀석!!!"
짜악!!
난 그 자리 또 때린다. 캬캬캬!!!
…. 얼래? 이 녀석 안 쓰러지네? 아쭈 버틴다 이거지?
조금 맷집이 생겼군.
난 녀석을 조금 칭찬해 주면서 간단하게 나마 그 보답을 해주기로 했다.
가볍게 주먹을 말아 쥐고는 자세를 잡은 후 기를 끌어 모아 빠르게 주먹을 내
뻗었다. 이거 맞고도 버티면 내가 내일은 조금더..
인정을 두지 않고 죽도록 패주지!! 큭큭.
"천기류(天氣流) 권술(拳術) 난격(亂擊)."
나의 주먹에 수십 방을 맞은 녀석은 뒤로 쿵하고 쓰러져 더 이상 일어서지 못
했다. 후훗. 당연한 거야….
그럼 꼬맹이 네가 들을 수 있을지 어쩔지는 모르겠지만….
이말은 꼭 해줘야 겠지?
"오늘 수업은 여기까지…. 수고했어. 큭큭!"
"음. 자네를 못 믿는 것은 아니지만…. 오늘은 조금 심했다고 생각되는군."
"어쩔 수 없습니다. 메르틴은 우선 정신부터 뜯어 고쳐야 했으니까요."
그 와중에 저의 화풀이도 하고요. 큭큭.
어쨌든 나의 말에 하스미르공작은 한숨을 내쉬며 고개를 흔들었다.
"하지만…. 그렇게 심하게 할 필요까지 있었나? 아주 애가 떡이 되었네."
"어차피 치유마법이면 내일쯤 가뿐하게 일어날 수 있지 않습니까? 그리고 제
가 분명 처음부터 저의 수련 방식은 조금 거칠다고 말씀 드렸습니다."
난 빙그레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그러자 나에게 아무 말도 못하는 하스미르 공작.
쩝. 여기서 못을 박아 두어야지….
"저에게 맡겨 주십시오. 한달 내에 한스와 비슷한 경지까지 만들어 드리겠습
니다."
"…. 그. 그게 가능한가?"
당연히 3주 정도면 가능하지. 그러나 한달 정도는 녀석을 패야 내 기분이 풀
릴 것 같아서 그런 답니다.
아! 그리고 준비물도 좀 필요하지….
"검 두 자루만 제작해 주시겠습니까?"
"검이라고?"
"네. 검신(劍身)의 길이는 약 1하른 -약 1.2m- 정도. 검날은 한날이고 검폭
(劍幅)은 손가락 두 마디 반정도. 검신은 5도정도 약간 완만하게 휘어있고 칼
날 받침대는 약 손가락 한마디 정도의 두께로 둥글게 해서 해주시고 손잡이는
검폭정도의 크기에 약 30 치하른 -1치하른 = 1.2cm- 정도 해주시면 됩니다."
"흐음. 못할 것도 없는데…. 그런데 상당히 특이한 검이군…."
후훗. 그럼 그렇지. 이곳에 예도(銳刀)같은 것이 있을 턱이 없지. 물론 예도
와 똑같이 만들어 달라는 부탁은 거의 불가능하고. 약간 비슷하게나마 만들어
주면 되는 것이다.
여기서 내가 두 개를 주문한 이유는…. 나도 하나 가지기 위해서 이다.
"휴우. 알았네. 준비하도록 하지. 그리고 앞으로 좀 상처는 나지 않게 해주길
바라네. 애가 온몸이 멍 투성이니…. 생전 처음으로 마누라에게 바가지를 긁혔
다네…."
"후훗. 최대한 노력해 보죠."
라는 말은 장담 못한다는 말이었다.
그리고 그 다음날도 역시나 나는 메르틴 녀석을 흠씬 패버렸고 그 다음날도
역시나 반 죽도록 밟아버렸다.
거의 화풀이로 밟아댔지만…. 그렇다고 내가 무조건 밟기만 하는 것은 아니었
다. 난 녀석의 성장 속도에 따라 점점 더 그 속도와 강도를 높여갔고 -물론 나
는 갈수록 좋았다. 끝내주는 샌드백이 생겼으니- 그에 따라 메르틴 녀석의 반
사신경은 불과 일주일만에 상상도 못할 정도로 늘어 버렸던 것이다.
게다가 엄청난 악도 생겨버려서 요즘은 한 대 맞으면 바로 일어나서 달려들
정도이다. 더군다나 어쩔 때는 때려도 오히려 밀고 들어올 정도니….
한번은 그만 실수로 녀석의 검에 제대로 맞을 뻔한 일도 있었다.
진짜로 깔보고 대충 하다가 저승구경을 할 뻔했던 것이다. 결국 화풀이로 녀
석을 신나게 패버렸지만….
천강기까지 써서 난격으로 때려버렸으니…. 지가 버티고 배겨?
수련 시작 일주일쯤 후에 주문한 검이 들어왔다. 난 두 자루의 검을 들어보고
는 약간 더 잘 만들어진 것은 내가 가지고 더 꼬진 것은 메르틴 녀석에게 넘겼
다. ^^;;
"이건 뭐죠?"
어느새 일주일 사이에 녀석은 나에게 존대어까지 쓰게 되었다.
이게 다 나의 탁월한 폭력식 인성교육 덕이지.
어쨌건 녀석의 질문이니 답을 해 주어야지.
"이건 예도라고 부르는 검이다. 보다시피 검날이 한쪽이기 때문에 보통 검보
다는 더욱더 쓰기 힘들 것이야. 하지만 날이 하나임으로 인해서 더욱더 장점이
있지. 자 공격해 봐라."
난 가볍게 검을 빼들고는 메르틴에게 공격 주문을 내렸다. 그러자 메르틴은
즉시 검을 들어 나를 내려쳤고 난 가볍게 나의 검을 들어 날이 없는 쪽으로 오
른손을 대며 녀석의 검을 막아내 버렸다.
"이건…."
"봤겠지. 검날이 하나이기 때문에 이런 방법으로 상대의 몇 배나 무거운 공격
도 받아낼 수 있는 것이다. 그리고…. 이제부터 내 공격을 받아보도록…."
"네?"
녀석 놀라긴. 하긴 지금까지 내가 먼저 공격한 적은 없었으니까.
하지만 난 분명 녀석을 앞으로 삼 주안에 한스와 싸워서 이기게 -맞나? 비슷
한 경지였던가? 쩝 건망증이. --;- 만들어 주어야 했다. 그러기 위해서는 이곳
의 검법과는 다르게 상당히 특이한 검법을 가르쳐주어야 했다. 그것도 힘이 별
로 없는 메르틴에게 가장 잘 맞는 검법으로.
"잘 보도록 해. 천천히 할 테니까."
그렇게 말한 나는 가볍게 녀석에게 달려들어가 검을 내리쳤다. 그리고는 녀석
이 방어에 들어가자 내리치던 힘을 줄여 검의 공격 진로를 바꾸어 순식간에 왼
쪽에서 오른쪽으로 베어 들어갔다.
나의 이런 공격에 메르틴은 사색이 되어서 급히 검을 들어 막았지만….
나는 녀석의 검과 나의 검이 부딪치자마자 그대로 몸을 회전시키며 반대쪽을
베어 들어갔고 메르틴은 그것을 겨우 뒤로 물러서며 피해냈다. 그러나….
여기서 끝낼 수는 없지. 난 순식간에 오른발을 앞으로 내밀며 강하게 땅을 밟
으며 회전을 멈추고는 그대로 녀석의 가슴으로 찌르기 공격을 들어갔다.
"헉!!"
쯧쯧. 겨우 이 정도에 쫄아서 쓰러져 버리다니…. 난 혀를 차며 검을 거두어
들였다.
"봤냐?"
"바. 방금 전 그 검술은…?"
"이름 따위는 없어. 그냥 바로 생각해내서 쓴 것이니까. 어쨌든 뭘 느꼈지?"
나의 말에 녀석은 잠시 생각을 하는 듯 하더니 입을 열었다.
"검의 진로를 예측하지를 못했어요. 그리고 끝없이 물 흐르듯이 이어지는 듯
한…."
이 녀석도 영 바보는 아니었네. 난 녀석의 말에 그렇게 중얼거리며 약간 가르
치는 보람이 생기는 것을 느낄 수가 있었다.
"잘 봤어. 어쨌든 이 검술을 쓰기 위해서는 상대의 움직임을 순식간에 읽고
반응할 수 있는 시각과 반사신경이 필요하지. 내가 지금까지 널 그렇게 무식하
게 팬 것은 맷집도 맷집이지만 우선 그 시각과 반사신경을 키우기 위한 것이었
어. 알았냐?"
물론 궁극적인 목표는 화풀이였지만.
"네!!"
그러나 그런 것을 알 턱이 없는 녀석은 활기차게 대답하며 나를 초롱초롱 하
는 눈으로 바라보았다.
쓰으… 이거…. 갑자기 이 녀석이 귀여운 동생으로 느껴지는 것을 왜일까?
젠장. 벌써 미운정이 들어버렸나?
신무(神武)
34.
Part 13. 재회(再會)
"하하핫!!!"
"어깨에 힘을 빼! 힘도 별로 없는 녀석이 무슨 놈의 힘을 그렇게 쓸려고 발악
을 하는 거야? 강한 힘으로 밀어붙이지 않아도 빠르고 짧은 공격으로 상대의
몸에 얼마든지 치명적인 상처를 취할 수 있는 거다!"
메르틴의 검을 방어해내며 난 소리를 질러댔다. 처음 목적은 한 한달 동안 죽
도록 패버리는 것뿐이었는데….
젠장. 어느새 이 녀석에게 제대로 검술을 가르쳐 주고 있네….
뭐. 재미있으니까…. 그냥 넘어가자. 일주일 동안 죽도록 패놨더니 이 녀석도
고분고분 해졌고 아리스도 그 동안 스트레스를 팍팍 풀었는지 별말 없으니.
"공격은 언제나 원을 그리면서 해라. 비록 직선공격이 원 공격에 비해서 빠르
다고 하지만…. 원 공격은 그 나름대로 특징이 있다. 끊어지지 않는 무한한 공
격과 원심력을 이용하기 때문에 더욱더 강한 충격을 상대에게 줄 수도 있다."
"검을 쥐는 손은 최대한 힘을 주지 말고 부드럽게 해라. 그러면서 상대와의
타격 시에만 강하게 쥐어주어라."
"언제나 몸에는 힘을 주지 마라. 몸에 힘이 들어가면 동작이 굳어지기 마련이
다. 부드럽게 움직여라. 그러다가 단 한번의 공격기회를 찾는다면 누구보다 빠
르고 강하게 태풍처럼 밀어붙여라!"
"흐름을 읽어라! 세상에 그 어떤 검법에도 약점이란 존재한다. 그 약점을 찾
아내는 눈을 길러라. 비록 바늘구멍만큼 작은 약점이라 하더라도 그것을 꿰뚫
어 버릴 수 있는 눈과 기술의 정확성을 만들어라!!"
약속 시간이 한달 에서 4일정도 남았을 무렵. 나는 어처구니없게도 녀석에게
천기류검술의 오의(奧義)를 제외한 모든 기술을 전수해 버렸다.
물론 발도(拔刀), 일섬(一閃), 뇌섬(雷閃), 천살(天殺), 천풍(天風)등의 기술
들은 아직 녀석이 사용하기에는 힘든 감이 없지 않아 있겠지만….
난 이론은 모조리 전수를 해버린 후였다.
물론 이것의 이론이야 해봤자 기본기이지만…. 수천 수만 번을 연습하지 않고
는 자신의 것으로 만들기는 힘들 것이다.
그 외에 검을 다루는 법이라든지 흐름을 읽는 법. 싸움에 임할 때의 마음가짐
등…. 녀석에게 더 이상 가르칠 것이 없을 정도로 난 녀석에게 많은 것을 가르
쳐 주었고 녀석도 그것을 흡수해 버렸다.
참나…. 그냥 가지고 놀려고 했던 것이 어느새 밑천까지 거덜나게 생겼네.
뭐….검기(劍氣)는 녀석이 소드마스터의 경지에 도달한다면 가능하겠고….
검강(劍剛)이야. 나도 잘 쓰지 않는 것이고….
음. 그러고 보니 이곳에서 검강을 쓸 정도가 되려면 어느 정도가 되야 하지?
소드마스터보다 더 높은 경지가 있나?
쩝. 모르겠군. 그리고 마지막으로 기살검(氣殺劍)이야…. 저 녀석이 죽을 때
까지 해도 못 쓸 것이 분명하니….
가르쳐줄 필요도 없다. 흐음…. 앞으로 남은 것은 나흘…. 녀석이 과연 한스
를 이길 수 있을까? 비록 많은 것을 가르쳤고 녀석의 진척이 빠르다고 했지
만…. 아직 모두 자신의 것으로 만들 수는 없을 것인데.
게다가 한스도 만만치 않은데. 지금의 나의 내공정도면 -30년- 거의 5성 이상
의 힘을 내야이길 수 있을 것 같은데….
뭐 어떻게든 되겠지. 난 할만큼 했다고. 진다면 메르틴녀석의 실력 문제지.
"오늘은 여기까지. 쉬도록…."
"수고하셨습니다."
흐음. 언제부턴가 저 수고하셨습니다 라는 목소리가 듣기가 좋아진 거지?
히히. 어쨌건 기분은 좋네.
난 녀석에게 빙그레 미소를 지어주고는 수련장 밖으로 걸음을 내딛었다.
"어머! 카인님 끝나셨나요?"
수련장 쪽으로 오는 루나린을 만난 것은 그때였다. 난 밝게 웃으며 고개를 끄
덕였고 루나린도 미소를 지어 보였다.
음. 예쁘군….
"메르틴은?"
"아! 아직 안에 있을 겁니다. 지금쯤 언제 나처럼 혼자서 골머리 싸며 검을
휘두르고 있을 거예요."
요 근래 메르틴에게 보인 특징 중 한가지였다. 나에게 수련을 받기 전에는 검
술수련을 한 후에는 방에 가서 잠만 자기 일수라 더니…. 요즘에는 자신이 알
아서 혼자서도 한다고 하스미르공작도 나에게 고맙다는 말을 할 정도였다.
쩝. 보복으로 시작된 일이 한 녀석의 인생을 옳게 변화 시켜 놓은 것이 조금
찔리기는 하지만…. 뭐 결론은 좋았으니까.
"메르틴을 만나려면 들어가 보세요. 뭐 부르기 전에는 대꾸도 안할테지만…."
"아니에요. 오늘은 카인님께 볼일이 있어요."
"네? 저에 게요?"
나의 반문에 부드럽게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끄덕이는 루나린이다. 난 잠시
그녀가 나에게 무슨 볼일이 있을까? 라고 생각을 했지만…. 칫 내가 알 턱이
있나.
"무슨 일입니까?"
"저기…. 오늘 갈곳이 좀 있는데…. 제 호위 좀 해 주시겠어요?"
고개가 갸우뚱. 의문이 새록새록.
그녀의 호위라면 널려있다. 게다가 외출 시에는 언제나 마차를 타고 다닐텐
데….
나의 얼굴에서 생각을 읽어냈는지 -아리스냐?- 그녀가 웃으며 입을 열었다.
"혼자서만 조용히 나가고 싶을 뿐이에요. 부탁인데 들어주실 수 있죠?"
"뭐. 저야…. 별 상관은 없습니다만…."
나야 좋다. 그러나…. 아리스가 과연 가만있을까?
"당연히 안되죠!!"
역시 나타날 줄 알았어…. 난 한숨을 내쉬며 힐끔 뒤쪽에 서있을 아리스를 바
라보았다. 생글생글 웃고 있었지만 그녀의 이마에 솟은 약간의 핏줄을 나는 볼
수가 있었다.
하아…. 하여간 이상하다니까. 다른 사람들에게는 친절한 아리스가 왜 유독
루나린에게는 저렇게 거부반응을 보이는지….
이건…. 꼭 질투하는 것 같잖아…. --;
"안녕하세요. 아리스님."
"그래요. 그런데 주인님과 둘이서 무슨 밀담을 나누고 있었던 거죠?"
"별거 아니에요. 잠시 밖에 나갔다가 올 일이 있는데 카인님께 호위를 좀 부
탁하고 있었어요."
그. 그리고…. 루나린도 아리스에게만은 약간 살갑게 대하는 것 같은 것은 나
만의 착각일까?
결국 아리스도 같이 나왔다.
루나린과의 오붓한 데이트(?)가 깨져버린 것이 약간 그렇기는 했지만…. 뭐
이것도 나름대로 좋지. 왼쪽에는 차분한 분위기에 루나린. 오른쪽에는 밝고 명
랑한 아리스.
세상을 다 얻은 기분이오. 하하하.
"아직 약속시간 까지는 조금 시간이 남았네요. 우리 식사나 해요."
"에? 루나린 누구 만날 약속이었나요?"
나의 물음에 빙그레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끄덕이는 그녀. 난 상대가 여자일
가 남자일까 상당히 궁금했다.
남자라면 기분 잡칠 것이고 여자라면 기분 주가 상승이겠지.
"식사는…. 아! 저 식당으로 가요."
"네? 하지만 저런 식당은 루나린에게는 별로…."
"괜찮아요. 꼭 가보고 싶었어요."
이렇게 말하며 날 올려다보는 루나린에게는 차마 안 된다고 말할 수가 없었
다. 결국 한숨과 함께 고개를 끄덕여 버린 나였다.
"고마워요! 후훗."
꽤나 좋아하는군. 그러나 그런 루나린과는 반대로 아리스는 내 팔짱을 끼운
채로 입술을 삐죽 내밀었다.
난 그런 아리스를 보며 그만 화 좀 풀어 라는 식으로 머리를 쓰다듬었다.
그러자 단순한 아리스는 금방 기분을 풀며 헤헤 웃었다.
"빨리 들어가요."
나의 손을 이끄는 루나린과 아리스와 함께 들어간 식당은 평소 서민들이나 여
행자들, 용병들이 자주 이용하는 그런 2류 식당이었다.
이런 곳에 공작가의 영애가 들어가는 것은 좀 그렇지만…. 어쩌겠나. 본인이
가보고 싶다는데….
입구에 들어서자마자 모이는 시선에 난 잠시 혀를 차야만 했다. 루나린도 미
모 하면 한 미모하고 아리스는 또 어떤가?
게다가 판이하게 다른 느낌을 풍기는 둘을 양쪽에 끼고 들어선 나에게는 질투
의 시선이 박히는 것을 느낄 수가 있었다.
그때 그런 그들의 사이로 반가운 목소리가 들려왔다.
신무(神武)
35.
"설마! 자네 카인 아닌가?"
"얼라? 로이드? 그리고…. 프레야. 시드. 이레릴?"
난 그들을 향해 걸어가며 환한 미소를 지어 보였다.
삼 년 만이었다. 이 세상에서 내가 가장 처음 만난 사람들….
비록 일주일도 못돼서 헤어지고 그 끝이 약간 씁쓸하기는 했지만…. 그래도
꼭 한번은 만나보고 싶었다.
그런데 오늘 이런 곳에서 만나다니….
"정말 카인 맞나? 근데 머리가 그게 뭔가?"
"아아! 사람들의 시선이 모여서 염색 좀 했어. 그보다 정말 모두 오랜만이군.
다들 엄청 변했잖아!"
난 그들을 돌아보며 말했고 로이드일행은 서로를 보며 미소를 지었다.
우선 로이드는 이제 완전한 30대 초반의 아저씨가 되어 있었고 시드는 약간
어린 감이 있어 보였는데 이제는 완전히 청년이 되어 있었다.
프레야는 더욱더 섹시해졌고. 크크.
이레릴도 나름대로 성숙한 맛이 풍겼다. 다만…. 머리를 컷트 해버린 것이….
내가 그녀의 풀 네임을 다 밝히기도 전에 루나린은 급히 나의 말을 끊으며 고
개를 숙였다. 쩝. 이름을 밝히기가 싫은가 보군.
그리고 나에게 팔짱을 끼고있던 아리스도 싱긋 웃으며 고개를 숙였다.
"안녕하세요. 카인님의 연인인 아리스라고 합니다."
비. 비틀….
난 풀리는 다리에 기를 집중시키고는 질린 얼굴로 아리스를 바라보았지만 그
녀는 싱긋 웃으며 나에게 더욱더 달라붙을 뿐이었다.
허허…. 이 녀석 또 시작이잖아!!!
"하하하! 카인 얼굴값을 하는군. 이런 미녀들을 끼고 다니고 말야. 그래 그런
데 요즘에는 어떻게 지내는가?"
"아아! 어떤 꼬맹이 녀석에게 검술을 좀 가르쳐 주면서 지내고 있죠."
로이드의 질문에 난 의자에 앉으며 입을 열었다. 그러자 로이드는 잠시 생각
하는 듯 하더니 고개를 끄덕였다.
"흐음. 하긴 자네정도면 충분하겠지…. 다크아이의 암살자들을 순식간에 해치
워 버릴 정도였으니까. 그럼 여기 수도에는 언제쯤 도착을 했나?"
"약 한달 전쯤입니다. 약간 일이 있었거든…."
에? 일? 그러고 보니 내가 여기 뭐 하러 왔더라?
그게…. 그러니까….
…. !!!! 크아아악!!! 그러고 보니 재상녀석인자 밥상녀석인지 만나보러 왔던
거잖아!!!! 지금까지 깜빡하고 있다니~!!
…. 뭐. 상관없지. 그 동안 호강하며 지냈고…. 시간이야 남아도는 거니까.
"쿡쿡…."
"에? 다들 갑자기 왜 그래?"
난 모두가 갑자기 웃자 난 황당한 얼굴로 아리스를 바라보았고 곧 그 이유를
알 수 있었다. 아리스가 방금 내가 한 행동을 그대로 따라하고 있었던 것이다.
생각하는 표정. 갑자기 발광. 그리고 허탈. 마지막으로 싱글싱글….
…. 젠장 이게 정말 내가 지은 표정인가?
음. 그보다…. 약간 이상한 것이 한가지 있는데….
"그런데 세라스는?"
난 아리스와 비슷한 녹색 머리카락을 가진 귀여운 소년을 생각하며 일행에게
물었고 곧 얼굴이 굳어지는 일행을 볼 수가 있었다.
순간 나는 뭔지 모를 불길한 예감이 들었다.
"무슨 일이 있었나요?"
"휴우…. 그게…."
로이드는 한숨을 내쉬며 약간 씁쓸한 미소를 머금었고 나의 의문점은 더욱더
커져 갔다. 그때 더 이상 볼 수가 없었는지 시드가 입을 열었다.
"세라스는 죽었어."
"뭐?"
"너 귀머거리냐? 죽었다고."
그 말에 난 한참동안을 황당한 얼굴로 시드를 바라보아야 했다.
그 녀석이 죽었다고? 난 아직도 믿지 못하겠다는 얼굴로 이레릴 쪽으로 시선
을 돌렸고 곧 슬픈 얼굴로 고개를 끄덕이는 그녀를 볼 수가 있었다.
"무슨 일이 있었죠?"
그냥 병으로 죽었을 리가 없다. 비록 지난 삼 년 동안 무슨 병에 걸려 죽을
수도 있었지만…. 아니 그럴 가능성은 거의 없었다. 그 애는 신관이었다. 비록
13세라는 어린 나이 이었었지만….
신의 축복을 받은 신관은 절대로 병 따위에 걸리지 않는다고 들었던 기억이
있었다.
그럼 녀석이 죽은 이유는…. 단 하나뿐이다.
"그때 네가 떠나간 다음…. 우리는 의뢰를 완전히 해결하기 위해서 세다인으
로 향했다. 그러나 한번의 실패로 인해서 다크아이에서는 대대적으로 암살자를
파견했고 결국 세라스가 먼저…. 휴우…. 하지만 덕분에 우리는 살아날 수 있
었다."
"다크아이는 대체 어떤 곳이죠?"
"암살집단이네. 아주 오래된 유명한 암살단으로 세계에서 가장 큰 암살단 중
에 하나지…."
그 말에 난 이를 부드득 갈았다.
세라스의 귀여웠던 얼굴이 나의 머릿속에 스쳐 지나갔고 그에 따라 그 애를
죽인 다크아이에 대해서 살심(殺心)이 피어올랐다.
언젠가는…. 녀석들을 완전히 박살내 버리겠다.
그렇게 다짐을 한 나는 나의 볼을 쓰다듬는 아리스의 행동에 살심을 거두었
다. 아니 거둘 수밖에 없었다.
아! 아리스!! 사람도 많은데 뭐 하는 짓이야!!!
휴우. 젠장. …. 그보다 그때 이들이 운반하던 물건이 대체 뭐였지? 내 눈에
띄지도 않았던 것을 보니 그렇게 큰 것은 아니었던 것 같은데….
"그런데 그때 운반품이 뭐였지?"
"으음…. 그게 나도 자세히는 모르겠네. 그러나 세다인 왕국 학술단에 넘겨주
고 대충 듣기로는 지고족의 유물이라고 하더군…. 쩝. 내가 보기에는 대충 오
래된 책같이 보이더구만…. 별 이상한 글자들로 다 쓰여진…. 그런 것에 눈에
불을 켜고 다크아이가 달려들다니…. 완전히 피 봤다니까."
대답을 한 것은 로이드였다. 그러나 나에겐 그의 마지막 말까지 듣고있을 정
신 따위는 없었다. 두 눈을 크게 뜨고 로이드를 바라보는 나….
"지…. 지고족의 유물이라고?"
"음. 그렇다고 들었네. 하지만…. 누구도 해석을 하지 못해서 마지막으로 세
다인 왕국 학술단에 넘겼다고 하더군. 그러나 그들도 해석을 못했고 지금은 세
다인 왕국의 도서관 어디 구석에 박혀 있을 거네…."
"그런데 지고족이라뇨? 그게 뭐죠?"
로이드 일행과 헤어져서 루나린의 약속 장소로 향하던 나에게 그녀가 갑자기
물어왔다.
그러나 내가 뭘 알아야 대답을 해주지. 아는것이라고는 엄청난 과학력을 가진
종족이었다는 것 과 그들의 머리카락 색깔이 검은 색이라는 것 뿐. 그것 외에
는 없었다.
난 힐끔 아리스에게로 시선을 돌렸고 그녀는 입을 쭉욱 내밀었다.
꼭 내가 왜 저 여자한테 그걸 설명해 줘야해 라고 묻는 것 같았다. 그러나 내
가 머리를 쓰다듬어 주자 곧 빙긋 미소를 지으며 입을 열었다.
단순치.
"지고족은 1만년전 이 대륙에 존재했던 종족 중에 하나 에요. 신족보다 더 강
하고 비록 그 숫자는 별로 되지 않았지만 그들의 힘은 이 대륙을 지배하고도
남았지요. 그러나 그들은 그런 것을 신경 쓰지 않고 자신의 영역에서 조용히
살아가는 평화로운 종족이었어요. 적어도 먼저 상대가 도발을 하기 전 까지는
요."
그 말에 난 고개를 갸웃 거렸다. 신족? 정말 그들이 있단 말인가?
"후훗. 그 당시에는 분명 신족도 있었어요. 그리고 그들은 멸망했죠. 바로 지
고족에게…."
"뭐?"
"네?"
나와 루나린이 동시에 물었다. 그러자 아리스는 특유의 선생모드 돌입의 포즈
를 취하며 입을 열었다.
"사실이에요. 수십만의 신족이 불과 수백의 지고족에게 몰살을 당했죠. 지고
족이 가진 무한한 힘과. 영원히 죽지 않는 불사의 신체. 그리고 그들의 수장이
피르스와 아라크드에 의해서."
또…. 나왔다 아라크드. 나와 그 어떤 관계가 있는 지고족.
그런데 그가 지고족의 두 수장 중 하나였다니?
"피르스와 아라크드?"
"네. 피르스는 지고족의 사회를 지탱하는 수장. 즉 나라의 왕쯤 되는 존재이
고 아라크드는 전투의 신. 평소에는 그다지 존재를 나타내지 않는 존재이지만
전투에서만은 그의 한마디가 피르스의 힘을 누르죠. 그의 손에 죽어간 신족은
전체 신족의 절반 이상이에요. 그런 엄청난 존재가 있다는 것 하나만으로도 지
고족은 세상의 군림자로 남을 수 있는 종족이었죠."
난 허탈한 심정이 들었다. 아라크드. 보통의 존재는 아닐 것이라고 생각을 했
지만…. 설마 그 정도로 괴물일 줄이야….
그런데…. 그런 지고족이 어떻게 멸망을 당했지?
"그런데 그런 지고족이 왜 지금은 이름조차 알려지지 않은 거죠?"
루나린도 나와 같은 생각이었는지 물었다.
그러자 아리스는 씁쓸한 얼굴로 고개를 숙일 뿐이었다.
그녀는 지고족 최고의 수장중 하나인 아라크드가 주인인 샤이닝 브링거의 제
어 프로그램.
그녀라면 나와 아라크드의 관계. 그리고 지고족이 멸망한 이유를 충분히 알고
있을 것이다. 하지만….
그녀는 절대로 그것을 나에게 말하지 않는다.
그건 어쩌면…. 그녀가 그것을 말하지 못하게 하는 그 무엇인가가 있을 지도
모른다.
락이라던가…. 필요한 암호가 있다든지 하는….
신무(神武)
36.
Part 14. 그 동생에 그 누나
루나린과 함께 도착한 곳은 이그네스 기사학교였다.
주로 가르치는 쪽은 검술이었지만 그 외로 마법사도 양성을 하고 있는 곳으로
서 대륙에서는 상당히 유명한 학교라고 했다.
하지만 우선 입학 조건이 까다롭고 -귀족가의 자제가 아니거나 평민이라도 상
당한 입학금을 내지 않는다면 입학이 힘들다- 1년마다 보는 네 번의 시험에서
어느 정도의 점수가 아니면 즉각 퇴학이기 때문에 졸업하기가 상당히 까다로운
학교라고 루나린에게 들었다. --;
쩝. 아무튼 이 학교에 졸업생이라는 뺏지만 있으면 어느 곳에 가도 인정을 받
는다고 하던데….
근데…. 대체 이곳에 누굴 만나러 온 거지?
난 루나린의 뒤를 따라 걸으면서 고개를 갸웃거렸다.
얼마 후 한 건물로 들어간 우리는 한 방으로 들어가 그곳에서 서류를 보고있
는 30대 초반정도의 지적으로 보이는 안경을 쓴 여인에게로 다가갔다.
그녀는 우리가 다가가자 곧 고개를 들었고 금새 루나린의 얼굴을 보며 입가에
미소를 머금었다.
"오랜만에 뵙는군요. 휘리아나를 만나러 오셨나요?"
"네. 지금 어디에 있죠?"
"지금 검술학 수업을 듣고 있을 거예요. 한 십분 정도면 끝날 테니 조금만 기
다려 주세요."
그녀와 루나린은 상당히 잘 아는 사이 같았다. 대화를 들어보면 루나린은 이
곳을 자주 왔고 지금처럼 휘리아나라는 사람을 찾아오는 것이라는 것인데….
휘리아나? 이름은 여자인데?
"네. 알겠어요. 고마워요."
"아니에요."
대화를 마친 루나린은 나에게로 다가왔고 빙긋 미소를 지었다.
"잠깐만 기다리기로 하죠. 아직 수업이 끝나지 않았다고 하네요."
"네…. 그런데…. 휘리아나라는 사람은 누구죠?"
"어머. 아직도 모르시겠어요? 제 동생이요."
…. 그러고 보니 한달 전쯤에 그녀에게 동생이 하나 있다는 말을 들은 것 같
다. 여자임에도 불구하고 뛰어난 검술을 가지고 있다고 하던데….
쩝. 만나보면 알겠지.
휘리아나 덴 유리샤크 이렌드 피레시온.
그녀의 첫인상은 한마디로….
얼음 미녀였다.
루나린과 같은 짙은 푸른 머리카락을 가진 미녀였는데 루나린이 포근하고 부
드러운 느낌이 난다면 그녀는 정 반대로 싸늘하고 찬바람이 풀풀 풍기는 빙녀
(氷女)의 분위기이었던 것이다.
이거 참. 베르리나보다 더 찬바람이 풀풀 나는 여자는 내 생전 처음이네.
뭐 베르리나야 얼굴이 무표정하다 뿐이지 가끔씩 부드러운 표정이나 짓지
만…. 이 아가씨는 절대로 미소라고는 짓지 않는 아가씨 같았다.
"오랜만이구나 휘리아나. 거의 두 달 만이지? 그래 공부는 잘 되니?"
부드럽게 웃으며 안부를 묻는 루나린에게 그냥 고개만을 까딱할 뿐이었다. 그
리고는 나와 아리스에게로 힐끔 시선을 주며 싸늘한 눈으로 날 노려보는데….
우씨. 짜증나는데 그대로 박치기 한방 해 버릴까보다….
입술박치기…. ^^;;;
"아. 이쪽은 아버님이 모셔온 메르틴의 검술선생님 카인님. 지금 우리 저택에
서 생활하고 계셔. 그리고 여기 옆은 카인님의 동료 아리스. 인사해.
카인님. 아리스. 여긴 제 동생 휘리아나 에요."
난 정중히 고개를 끄덕였지만 그녀는 고개만을 까딱할 뿐이었다.
우이씨!!! 누가 메르틴 누나 아니랄까봐 되게 거만하네.
"죄. 죄송해요. 휘리아나가 조금 낮을 가려서요. 그래도 마음은 착한 아니니
까."
나의 얼굴이 굳는 것을 본 루나린이 급히 휘리아나를 변호했지만….
처음부터 잡쳐버린 첫인상이 그렇게 좋게 변할 리가 없다.
아리스도 뚱한 얼굴로 휘리아나를 바라보고…. 쩝. 이거 또 샤이닝 브링거 부
르자고 조르는 것 아냐?
"주인님 저 샤이닝 브링거가 보고 싶어요."
그러면 그렇지. 난 아리스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한숨을 내쉬었다.
이 말이 안 나오려야 안나올 리가 없지.
하지만 나도 약간 아리스와 비슷한 생각을 했었다.
과연 샤이닝 브링거를 불러내면 저 빙녀의 얼굴에 표정이 조금이라도 생길까?
라는 것이 바로 그것.
그러나 곧 고개를 저었다. 괜스레 그런 일로 소란스러운 일을 만들기는 싫었
던 것이다.
"그보다 무슨 일이에요? 언니."
…. 방금 이 말이 어디서 들린 말이더냐?
난 약간 놀란 얼굴로 아리스를 바라보았고 아리스도 놀란 얼굴로 휘리아나를
가리키고 있었다.
너무나도 아름다운 옥음.
무협지에서나 자주 쓰일법한 옥구슬이 굴러가는 듯한 목소리라는 것이 바로
이런 것을 말하는 게 아닌가 싶을 정도다.
난 첫 번째로 평생 말을 하지 않을 것 같은 빙녀가 말을 하는 것에 대해서 놀
랐고 두 번째로 그녀의 목소리가 상상 이상으로 아름다운 것에 또 한번 놀라야
했다.
"별거 아냐. 오랜만에 네 얼굴이나 좀 보고 싶고. 또 일주일 정도 후에 있을
대회 잘 치르라고. 격려해주러 왔어."
"…."
다시 한번 듣고싶다는 내 생각과는 반대로 그녀는 입을 다물고는 고개만을 끄
덕일 뿐이었다.
젠장. 정말 말없는 계집이네….
난 대화하는 둘을 보며 뒤쪽에 의자에 아리스와 함께 주저앉았다.
무슨 놈의 할 말이 저렇게 많은지.
루나린은 연신 즐겁게 미소를 지으며 입을 열었고 그것을 듣는 휘리아나는 대
답 없이 가볍게 고개만을 끄덕일 뿐이었다.
참나…. 루나린도 평소에는 그다지 말이 없는 타입인데….
휘리아나와 같이 있으니 오히려 수다쟁이같이 보이네….
게다가 휘리아나…. 저렇게 말 안하고 살면 귀찮지 않나? 쌓이는게 상당히 많
을 것 같은데…. 쩝.
"주인님 심심해요."
아리스가 하품을 하며 나에게 말했다. 나도 때마침 심심했던 터라 대화를 하
는 루나린과 휘리아나에게서 아리스에게로 시선을 돌리고는 가볍게 장난을 치
기 시작했다.
"뭐할까?"
"우리 업그레이드 3,6,9해요."
언젠가 샤이닝 브링거에서 가르쳐 주었던 게임.
아리스가 그것을 하고싶다고 하자 난 잠시 생각을 하고는 고개를 끄덕였다.
절대로 이길 수 없을 것 같지만…. 큭큭 가끔씩은 불가능에 도전을 해 봐야
지.
그러고 보니 저번 대전 때 이것의 내 승률은…. 0%이었군.
주위 사람들이 우리를 이상하다는 듯이 바라보았지만…. 한번 시작한 일에는
끝을 봐야 했다!!
아무튼 샤이닝 브링거에서의 특훈 하나로 삼육구 하나만은 거의 신의 경지에
도달한 나였다.
이 세상에 3,6,9로 그것도 업그레이드로 10000이상 가는 사람 있으면 나와 보
라 그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