간략설명 |
걸어온 길 시신 되어 나간 곳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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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위 37°28′58″ 동경 127°13′33″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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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기도 광주시 중부면 산성리 446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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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31)749-8522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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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31)749-8524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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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www.nhss.or.kr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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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에서 동남쪽으로 26킬로미터, 성남시에서 북동쪽으로 6킬로미터 떨어져 있는 남한산 위에 자리 잡고 있는 남한산성은 편리한 교통과 수려한 경관으로 주말 등산객들의 많은 사랑을 받고 있다.
산성 내 중턱에 있는 로터리까지 널찍한 도로가 열리고 자가용은 물론 좌석 직행버스가 통행하면서부터는 평일 아침에도 가벼운 차림으로 남한산을 찾는 사람들이 자주 눈에 띈다. 더욱이 도로 양편으로는 깨끗하게 지어 놓은 기념관이나 전시장들이 들어서 있고 산채, 자라탕, 메기탕 등 특산물을 파는 식당이나 숙소들도 충분해 찾는 이들은 조금도 불편함을 느끼지 않는다.
하지만 울긋불긋한 옷차림을 하고 우거진 나무들 사이로 오가는 사람들 중에, 오직 천주를 섬긴다는 이유 하나만으로 수많은 신앙 선조들이 바로 여기서 처참하게 처형됐다는 역사적 사실을 아는 이는 그리 많지 않다.
서늘한 산공기를 마시며 오르는 즐거운 산행길 곳곳에는 순교자들의 굳센 믿음과 꿋꿋한 결의가 서려 있다. 남한산성은 병자 호란(1839년) 이후 처형터가 있어 기해박해(1839년)와 병인박해(1866년) 당시 광주(廣州) 일원, 양주(楊洲), 용인(龍仁), 이천(利川)에서 잡혀 온 교우들이 치명, 순교한 곳이다.
원래 남한산성이 위치한 자리는 신라 문무왕(661-681년)이 쌓은 주장성(일명 일장산성)의 옛터로 그 후 몇 차례 축조가 있었다. 그러나 현재의 남한산성은 조선 인조 2년(1624년) 때 크게 고쳐 지은 것으로 후금국의 위협과 이괄의 난을 계기로 2년간에 걸쳐 축성됐다고 한다.
성의 둘레는 약 8킬로미터에 달하고 높이는 7.3미터가량이다. 동서남북 4군데에 문루가 있고 역시 4방위에 각각 장대(將臺: 옛날에 장수가 올라서서 명령, 지휘하던 대)가 있었는데 현재는 수어 장대(守禦將臺)만이 남아 있다. 또 원래 9개의 절이 있었다고 전해지지만 지금은 장경사만 남아 있다.
남한산성으로 들어서는 길은 두 군데로, 서쪽으로는 성남 방면, 동쪽으로는 경기도 광주 방면으로 연결된다. 치명 터가 동문에 자리하고 있기 때문에 순례객들은 동문으로 들어서야 한다. 하지만 사정이 여의치 않을 경우 서문으로 와서 로터리를 거쳐 동문으로 빠져 나오는 길도 가능하다. 사실 대중 교통 편은 성남 방면이 더 노선이 많다.
새로 복원돼 깔끔하고 세련된 모습을 자랑하는 남한산성 입구 정문을 지나면 동문이 나온다. 동문 오른쪽으로는 산비탈을 거슬러 올라가며 육중한 성벽이 위용을 자랑한다. 동문을 지나 몇 걸음을 옮기면 오른쪽으로 도랑 건너편에 '천주교 순교 성지'라는 철제 푯말이 서 있다. 여기에 적힌 내용은 다음과 같다.
"이곳은 서기 1791년 신해(辛亥), 1801년 신유(辛酉), 1839년 기해(己亥), 1866년 병인(丙寅) 네 차례에 걸쳐 한덕운, 김덕심, 정은 등을 위시하여 70명 이상(실순교자 2-3백 명으로 추산)순교한 곳임."
순교 성지의 이정표를 본 순례객들은 바로 이곳이 삶과 죽음의 갈림길이라는 사실을 알 수 있다. 막 지나온 동문을 통해 신앙 선조들은 오랏줄에 묶여서 살아서 들어왔지만 혹독한 고문 끝에 결국은 시체가 되어 성 밖으로 던져졌다.
더욱이 살아서 동문을 들어온 이들은 죽어서는 물이 빠지는 구멍으로 성 밑에 파놓은 수구문을 통해 내팽개쳐졌다. 그래서 수구문(水口門)은 시구문(屍口門)이 됐고 이곳으로 흘러내리던 물도 핏물이 됐으며 동문 밖 계곡에는 시신이 쌓였다.
시구문은 동문을 바라보며 왼쪽 길 바로 밑에 깊숙이 자리 잡고 있다. 얼핏 보면 잘 알 수 없고 얼기설기 철조망으로 가려 놓은 밑으로 잘 들여다보면 어른 두어 명이 허리를 굽히고 다닐 만한 크기의 사각진 구멍이 있는 것을 볼 수 있다. 옆길로 돌아 비탈길을 내려서 시구문 바깥쪽으로 내려서면 마치 당시의 처참한 광경이 눈에 보이는 듯 선하고 그 험한 고통 속에서도 신앙을 지켜 내고야 말았던 선조들의 굳은 신앙이 메아리 치는 듯하다.
동문의 애달픈 이야기를 뒤로 하고 비탈을 따라 1킬로미터 정도 걸어 올라가면 남한산성 로터리가 나온다. 로터리는 북문과 서문, 남문으로 가는 길이 교차하는 지점으로 계절이나 날씨에 따라 적절한 코스를 선택할 수 있다. 좌석 직행 버스가 성남이나 광주 쪽에서 로터리까지 올라오기 때문에 승용차를 이용하지 않더라도 쉽게 성을 둘러볼 수 있다.
이 로터리에 천주교도들을 수감했던 옥 터와 처형 터가 있다. 동문 쪽에서 올라오면서 로터리에 도착하면 오른쪽에 있는 주차장이 옥 터로 추정된다. 정면에는 섭정 10년간 2만여 명의 천주교인을 학살한 것으로 전해지는 대원군의 영세 불망비(永世不忘碑)가 세워져 있어 세월의 무상함을 일러 주는 듯하다. 어느 사찰 승려들이 세워 준 것으로 전해지는 불망비와 마주한 곳이 바로 처형지였다고 교회사가들은 전한다. 여기서 처형된 교우들이 시체가 되어 산비탈로 질질 끌려 내려가 동문 밖 개울로 던져졌다.
당시의 슬픈 사연을 아는지 모르는지 로터리에는 산행 나온 사람들의 즐거운 목소리가 가득하고 처형 터에 연이어 늘어서 있는 식당에서는 오랜만에 특미를 즐기는 사람들의 모습이 한가롭다.
경기 도립 공원인 남한산성은 수림과 유적 기념관 등이 잘 정리돼 있다. 수어 장대, 숭열전, 청량당, 현절사, 침괘정, 연무관 등은 경기도 유형 문화재 1호부터 6호까지로 지정돼 있으며 본성 축성 당시 창건한 성내 9개 절 중 유일하게 남아 있는 장경사와 병자호란 기록화 전시장 등도 한번 둘러볼 만한다. [출처 : 주평국, 하늘에서 땅 끝까지 - 향내나는 그분들의 발자국을 따라서, 가톨릭출판사, 1996]
구산, 단내에서 남한산성으로 이어진 순교
호국(護國)과 호교(護敎)를 위한 몸부림이 배어 있는 남한산성(광주군 중부면 산성리)은 하남시 서부 성당에서 사적지 조성을 위해 힘을 쓰고 있는 곳이다.
이곳의 첫 번째 애환은 1636년 12월 14일, 청나라의 침입을 받아 한양이 위태롭게 되자 인조가 세자와 백관들을 대동하고 피난해 오면서 시작되었다. 인조는 이곳에서 40여 일을 수성하였지만, 모든 사정이 악화되자 결국 이듬해 1월 30일 백관과 군사들의 호곡 소리가 끊이지 않는 가운데 성문을 열지 않으면 안되었다. 이후 조선에서는 청나라와 굴욕의 맹약을 맺은 삼전도에 세워진 청나라 태종의 송덕비를 가리켜 '치욕의 비' 또는 '한(汗)의 비'라 불렀으니, 이것은 곧 '호국의 몸부림'이었다.
그로부터 200여 년이 지난 1839년의 박해 때 남한산성에서는 두 번째 애환이 있게 되었으니, 이것은 바로 '호교를 위한 몸부림'이었다. 그러나 이 몸부림은 천상의 승리로 결실을 맺게 되었고, 신앙인들의 노래는 훗날까지도 이어져 남한산성 한 모퉁이를 치명터로 만들었다. 당시 이곳이 치명터가 된 이유는, 1626년에 산성리가 형성되고 1795년부터 광주 유수가 성안에 거처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박해가 계속되는 동안 광주 일대에서 체포된 수많은 신자들이 이곳으로 끌려와 모진 형벌을 받으면서 배교를 강요당했고, 신앙을 지키기 위해 세속의 모든 부귀와 육신의 고통을 버려야만 했다.
남한산성에서 맨 먼저 호교의 노래를 부른 이는 광주 의일리(현 의왕시 학의동)에 살다가 1801년에 체포되어 동문 밖에서 참수된 한덕운(韓德運, 토마스)이다. 그 뒤를 이어 광주의 거북뫼 곧 구산(현 하남시 망월동) 출신인 김만집(金萬集, 아우구스티노)이 기해박해 때 체포되어 1842년 초에 남한산성 옥중에서 "진실한 통회와 애덕의 정을 지닌 채" 순교하였다.
한편 김만집의 형 김성우(金星禹, 안토니오) 성인은 이때 포도청과 형조에서 수많은 형벌을 받은 뒤 1841년에 교수형을 받아 순교하였으며, 셋째인 김문집(金文集, 베드로)은 김만집과 함께 체포되어 남한산성으로 끌려가 오랫동안 옥중 생활을 하다가 1858년경에 석방되었다. 이곳 남한산성에서 다시 순교자가 탄생한 것은 1866년의 병인박해 때였다.
바로 그 해 겨울 이천 단내(이천시 호법면 단천리)에 거주하던 정은(바오로)도 63세의 나이로 체포되어 재종손 정 베드로와 함께 1866년 12월 8일 남한산성에서 순교하였다. 당시 남한산성의 광주 유수가 그들에게 내린 사형은 일명 도배형 또는 도모지(塗貌紙)라고 부르던 백지사(白紙死)였다. 이 형벌은 먼저 팔과 양다리를 뒤로 하여 나무에 결박하고, 여기에 풀어헤친 상투를 묶어 움직이지 못하게 한 다음 얼굴에 물을 뿌리고 창호지를 한 장씩 겹쳐 나감으로써 숨이 막혀 죽도록 하는 방법이었다. 이렇게 순교한 정은의 시신은 동문 밖에 짐승의 먹이로 버려졌다가 가족들에 의해 어렵게 거두어져 단내에 안장되었다.
박해자의 손길은 얼마 되지 않아 이미 교우촌으로 알려져 있던 구산에 뻗혔다. 이내 김문집(베드로)을 비롯하여 집안의 어른 남자들이 모두 체포되었고, 남한산성으로 끌려가 문초를 받게 되었다. 당시 김문집의 나이는 66세의 고령이었다. 그와 함께 체포된 김씨 집안의 신자들은 김성우 성인의 외아들인 성희(암브로시오), 순교자 김만집의 차남 차희, 김문집의 외아들 경희, 경희의 5남이자 성희의 양자인 교익(토마스), 경희의 6촌 윤희 등 모두 6명이었는데, 이중에서 김교익만이 안면 있는 포교의 도움으로 생환하였을 뿐 모두 순교하였다. 결국 구산의 순교자는 김성우 성인을 비롯하여 모두 7명이 된 셈이다.
한편 가까스로 생환한 김교익은 사형이 집행된 뒤에 매일같이 형장으로 찾아가 김문집과 김성희·경희 등 3명의 시신을 찾아다 구산의 가족 묘역에 보존되어 오던 성 김성우와 김만집 형제의 무덤 옆에 안장하였다. 그러나 김차희의 시신은 아들 김교문에 의해 거두어져 안양 수리산에 안장되었다가 실묘되었으며, 후손이 없던 김윤희의 시신은 거두어지지 않았다.
이처럼 구산과 단내에서 시작된 신앙을 천상의 영복으로 영글게 한 남한산성에는 이 밖에도 수많은 순교자들의 애환과 몸부림이 어려 있다. 그러나 지금도 계속되고 있는 순교 터 매입과 사적지 작업은 어렵기만 한 상황이다. '순교자들이 살아서 들어갔던 동문과 배교하지 않고 시체가 되어 나온 시구문' 모두가 우리에게 한 시대의, 그러나 잊어서는 안될 역사를 증언해 주고 있다. 오늘도 성지에는 순교자들의 전구가 깃들어 있다. [출처 : 차기진, 사목 244호(1999년 5월), pp.107-109]
남한산성은 어떤 곳인가?
남한산성은 문자 그대로 남한산에 소재한 성곽이다. 남한산은 북한산에 대칭되는 이름으로서, 한수(漢水) 남쪽의 큰 뫼를 지칭한다. 남한산은 삼국시대 이래로 중요한 지리적 요충지로서 인근에 도읍을 정하였던 백제 사람들은 큰 뫼라는 뜻에서 한산(漢山)이라고 불렀고, <삼국사기>에 의하면 온조왕 13년 7월 한산 아래에 성책을 쌓고 위례성(慰禮城)의 민호를 옮겨 이를 하남위례성(河南慰禮城)이라고 불렀으며, 근초고왕 26년에는 한산으로 도읍을 옮겼다고 전해진다.
그리고 <고려사>에서는 백제 시조 온종왕이 위례성에 도읍했다가 그 13년에 한산 아래에 성책을 쌓고 위례성의 민호를 옮겨 살게 하고, 마침내 궁궐을 짓고 이듬해 도읍을 옮겨 남한산성이라고 하였다고 전한다.
그 후 신라 문무왕 12년(672)에 한산을 요충지로 주목하고 이곳에 주장산성(晝長山城)이란 성곽을 쌓으면서 사람들은 주장산(晝長山)이라고 불렀고, 조선 초기 세종실록에서는 일장산(日長山)이라고 불렀다. 주장산이나 일장산이라고 부른 이유는 산성 안의 분지가 평탄하여 여느 산속과는 달리 해가 일찍 뜨고 늦게 짐으로 인해 낮이 길다 또는 해가 길다는 의미로 붙여진 이름이라고 여겨진다.
공간적 측면에서 볼 때, 남한산은 한반도의 중심에 위치하고 있으며, 한반도를 동과 서로 갈라놓은 백두대간이 남으로 내달리면서 서편으로 여러 가지를 뻗쳤는데, 그 하나가 금강산에서 갈라진 한남정맥이다. 한국지리에서 이야기하는 광주산맥의 산줄기가 그것이다. 산줄기는 곳곳에 크고 작은 산악들을 형성하였는데, 대성산, 현등산, 예봉산, 검단산, 문형산, 남한산 등이 그러한 산악들이다. 그중에 한남정맥 중심에 남한산이 위치하고 있다.
경위도로는 동경 127˚ 10' 15", 북위 37˚ 29' 10"에 소재한다. 높이는 460미터로 높은 산은 아니지만, 산세와 지형 그리고 주변과의 관계에서 예로부터 전략적으로 그 가치가 매우 높았던 요충지이다.
남한산은 일반적인 삶의 주거공간으로 꾸미기 보다는 관방의 기지로서 주목을 받게 되었다. 남한산이 관방기지로 중요시되기 시작한 것은 신라가 삼국을 통일하면서였다. 신라가 삼국을 통일했지만, 당시 북방에서 말갈족의 내습이 잦아 이에 대한 방어체제가 시급하였고, 그런 상황 속에서 한강, 임진강, 연변에 방어시설을 추진하면서 그 일환으로 672년(문무와 12년) 남한산 동쪽 봉우리에 주장성을 수축하였다. 돌로 성곽을 쌓았는데, 성곽의 둘레는 4360보였고, 영조척으로 둘레는 86,800척이고, 높이는 24척이었다. 그러나 고려왕조와 조선왕조에 이르러서는 국경선이 압록강 선으로 북상하면서 남한산의 역할이 감소되어 관방기지에서 소외되었다.
그러다 남한산이 다시금 관방기지로 주목받게 된 것은 여진족의 족장 누르하치가 부족을 통일하고 후금이라는 나를 세운 후, 남침을 시도하면서이다. 이러한 국제정세를 파악한 광해군은 그 대비를 위하여 관방기지를 정비토록 하였는데, 광해군 13년(1621년)에 남한산을 처음으로 보장처로 정하고 산성도 보수하였다. 그 후 후금의 남침 형세가 날로 심해지자 1624년 인조는 총융사 이서(李曙)로 하여금 산성을 본격적으로 보수케 했는데, 이 때의 작업은 보수가 아니라 신축이나 다를 바 없었고, 이 때에 현재와 같은 성을 축조하였다.
성곽이 완성되자 1626년(인조4년)에 현재의 하남시 춘궁동에 있었던 광주부의 치소를 산성 안으로 옮기고, 수어청을 두고 광주목사로 하여금 방어사를 겸하게 하여 산성을 관리하고 관방을 통제하게 하였다. 이로써 남한산성은 명실상부한 관방기지로서 자연적 요충지 뿐 아니라 인위적 시설로서 그 위상이 드러나기에 이른다.
이처럼 남한산성이 중요한 관방기지가 되고 주요기관이 들어오게 된 것은 보장처(保障處)로 활용되면서이다. 보장처란 국왕이 전란을 맞아 그 화를 피하기에 용이한 곳으로 곧 피난처를 의미한다. 실제로 1636년(인조 14년) 병조호란 때에 국왕과 세자가 남한산성으로 피난한 바 있었다. 실로 남한산성은 평시에는 보잘 것 없는 산골짜기에 불과하였지만, 외침을 당하여 국도가 함락되었을 때 국왕이나 왕족, 대신들이 난을 피할 수 있는 천혜의 요충지로서 주목받게 되었다.
남한산성과 천주교와의 관계
앞서 살펴본 바대로 남한산성이 보장처로서의 가치가 높아지면서 광주부는 고을의 지위가 부윤제로 또 유수제를 오가다 1795년(정조 19년) 유수제를 확립하여 한 말까지 유수(정2품)가 임명되었다. 부윤제 하에서 부윤은 도(道)와 행정 실무를 주관하였으나 유수제로 상향조정 되면서 종5품 판관과 종9품 검률이 산성 안에 주둔하게 되었는데, 이로써 남한산성은 단순한 산성이 아니라 정치적, 군사적으로 매우 중요시되는 특정한 곳으로 위상이 높아지게 되었고, 광주유수는 행정권과 군사권을 갖고 지휘하게 되면서 광주 일대를 포함한 한강 이남을 통제하게 되었다.
광주가 부윤으로 승격되고 1695년(숙종 21년)부터 광주부윤은 토포사를 겸하게 되었는데, 토포사란 반역도당들을 토벌하고 떼강도와 같은 큰 도적을 잡는 일을 직임하는 관리이다. 그러나 1750년(영조 26년)에 광주부윤에서 광주유수로 승격하면서 토포영이 여주로 옮겨 갔고, 1760년(영조 36년)에 유수제가 혁파되면서 다시 광주부윤으로서 토포사를 겸하게 되다가 1795년(정조19년)다시 광주 유수로 확정되면서 토포영은 양주로 이전하게 된다. 그러나 토포영은 이전 되었지만 실질적으로 수어영의 전영장을 맡고 있던 판관이 토포사를 맡아 치안을 담당하였다.
관방의 요지며, 보장처로서 주목되어 산성이 축조되고, 행정치소가 산성 안에 마련되고, 나아가 광주유수가 임명된 남한산성이 천주교와 관련을 맺고 순교성지로 바뀌게 된 이유는 광주부윤이 토포사를 겸하면서 이곳이 바로 형장의 장소가 되었기 때문이다.
남한산성의 토포사는 광주 고을의 치안을 맡으면서 동쪽으로는 양근의 용진, 서쪽으로는 안산의 성곶이, 북쪽으로는 한강, 남쪽으로는 이천, 여주, 양지, 용인에 이르는 고을 안에서 강도나 역도들을 섬멸하는 역할을 하였는데, 천주교 박해령이 내려지면 토포군관들은 위의 지역으로 나가 천주교 교우들을 잡았던 것이다.
광주 토포사가 관할 광주에는 1784년 공식적으로 교회가 이 땅에 출범하기에 앞서 천주 신앙에 관심 있는 학자들이 모였던 천지암을 비롯해 교회가 창설되면서 신앙 운동이 우선적으로 전개되었던 곳이다. 교회의 선구자 이벽(李檗)으로부터 세례를 받고 신앙운동에 나선 권일신(權日身)은 광주, 양근 일대에 신앙공동체를 조성하였고, 정약종과 정약용은 마재에 공동체를 조성하였는데 이같은 공동체는 박해에 따라 토포사의 표적이 되었다.
교인들을 사학죄인으로 치죄한 최초의 광주 토포사, 즉 광주부윤은 이가환(李家煥)이다. 이가환은 실학자 성호 이익(星湖 李瀷)의 종손이며, 최초의 영세자 이승훈(李承薰)의 숙부로서, 그 자신이 1801년 신유박해 때 천주교 신자로 지목되어 죽음을 당한 순교자이다. 그러나 한때는 박해에도 앞장섰는데 1791년(정조5년) 광주부윤으로 임명되어 조정의 뜻을 지키고자 각 면리에 이단 배척의 뜻을 명령하고, 장시에 방을 붙여서 널리 사학을 금지하였다. 그리고 수배를 통해 천주교 신자 4~5명을 체포하였는데 이들에게 곤장을 쳐서 신문하고, 결국 마음을 바꾸겠다는 다짐을 받고 풀어 주었다고 스스로 밝혔다.
그 후 1801년(순조1년) 신유박해 때에 광주 의일리(현 의왕시)에 살던 한덕운(韓德運) 토마스가 체포되어 1801년 12월 28일(음력) 동문 밖에서 처형되면서 천주교 신앙의 잊을 수 없는 순교지가 되었다. 그리고 1839년 기해박해에는 새로운 교우촌으로 성장한 구산의 김만집(金萬集), 김문집(金文集), 김주집(金?集)과 그의 아들들이 체포되었고, 1866년 병인박해 때에는 구산의 김성희(金聖熙), 김차의(金次熙), 김경희(金敬熙), 김윤희(金允熙), 최지현(崔址鉉), 심칠여(沁七汝)와 서문 밖의 홍희만(洪喜萬), 홍학주(洪鶴周), 이천 단대의 정은(鄭?) 등 40여 명의 교우들이 체포되어 온갖 고문을 받으며 끝내 신앙을 증거 하다가 순교하였다. [출처 : 남한산성 순교성지 홈페이지]
한덕운(韓德運) 토마스(1752-1802년)
충청도 홍주 출신인 한덕운 토마스는 1790년 10월에 윤지충(바오로)에게 교리를 배워 입교하였다. 바로 그 이듬해 윤지충은 신해박해로 체포되어 전주에서 순교하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토마스는 비밀리에 신앙생활을 하면서 더욱 열심히 교리를 실천해 나갔다.
그 후 토마스는 주문모(야고보) 신부가 조선에 입국하였다는 소식을 듣게 되었다. 이에 그는 성사의 은총을 받으려는 생각에서 주 신부를 만나려고 하였지만, 끝내 뜻을 이룰 수 없었다.
1800년 10월, 토마스는 좀 더 자유로운 신앙생활을 위해 고향을 떠나 경기도 광주 땅에 속한 의일리(현 경기도 의왕시 학의동)로 이주하였다. 이곳에서 그는 성실하게 생활하면서 기도와 독서를 부지런히 하였으며, 오로지 하느님의 뜻을 따르는 데만 열중하였다. 그는 신자들을 모아 놓고 가르치고 권면하기를 좋아하였는데, 이럴 때면 그의 말은 언제나 그의 마음과 마찬가지로 굳건하고 날카로웠다고 한다.
다음해 초 신유박해가 일어나자, 한덕운 토마스는 옹기 장사꾼으로 변장을 한 뒤 한양으로 올라가 보기로 작정하였다. 교회와 교우들의 소식이 궁금하여 견딜 수 없었기 때문이다.
한양으로 올라가는 도중 청파동에 이르렀을 때, 토마스는 거적으로 덮여 있는 홍낙민(바오로)의 시신을 보게 되었다. 이때 그는 놀라고 비통한 마음으로 그 시신에 애도를 표하였다. 그런 다음 그의 아들 홍재영(프로타시오)을 보고는 부친을 따라 함께 순교하지 못한 것을 엄하게 질책하였다. 홍재영은 그 후 다시 신앙을 되찾아 열심히 교리를 실천하다가 1839년에 순교하였다. 또 토마스는 서소문 밖에서 최필제(베드로)의 시신을 찾아 장례를 치러 주기도 하였다.
사실 박해 상황에서 신자들의 시신을 돌보아 준다는 것은 자신이 신자임을 드러내는 위험한 일이었다. 결국 한덕운 토마스는 포졸들에게 체포되어 포도청으로 끌려갔고, 여러 차례 혹독한 형벌을 받게 되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결코 다른 사람을 밀고하지 않았으며, 어떠한 형벌에도 굴하지 아니하였다. 그런 다음 동료들과 함께 사형 판결을 받고 경기도 광주에 있는 남한산성으로 옮겨져 참수형으로 순교하였으니, 이때가 1802년 1월 30일(음력 1801년 12월 27일)로, 당시 그의 나이는 50세였다.
토마스가 사형 선고를 받기 전에 한 최후 진술은 다음과 같다.
“저는 천주교의 교리를 깊이 믿으면서 이를 가장 올바른 도리라고 생각해 왔습니다. 이제 비록 사형을 받게 되었지만, 어찌 (신앙의 가르침을 믿는) 마음을 바꿀 생각이 있겠습니까? 오직 빨리 죽기를 바랄 뿐입니다.” [출처 : 이상 한국천주교주교회의 시복시성특별위원회, 하느님의 종 윤지충 바오로와 동료 순교자 123위]
정은(鄭溵) 바오로(1804-1866년)
정은 바오로 순교자는 단내에서 1804년에 출생하셨다. 1866년 병인박해 때 신자들의 지도자로 지목되어 체포되었으며, 남한산성에서 백지사(白紙死)형으로 순교하셨다. 순교하신 후 두 아들인 일동과 수동 형제가 시신을 단내 성지로 모셔와 안장하였다.
정 베드로(?-1866년)
정 베드로 순교자는 정 바오로 순교자의 종손자로서 단내에서 출생하셨다.1866년 정 바오로 순교자가 체포되시자, 감옥에서 병약한 할아버지를 도와 드리고 함께 순교할 것을 결심한다. 그래서 스스로 관청을 찾아가 천주교 신자임을 밝히고 체포되어, 정 바오로 순교자와 같은 날, 같은 장소에서, 같은 방식으로 순교하셨다. 시신을 찾지 못했기 때문에, 순교 터의 흙을 채취해서 정 바오로 순교자의 묘 옆에 의묘(儀墓)를 조성해 놓았다. [출처 : 이상 수원교구 홈페이지]
김만집(金萬集) 아우구스티노(1798-1841년)
김만집은 김성우 성인의 첫째 동생으로, 자는 덕심(德深) 또는 치영(致英)이고, '만집'은 그의 보명인데, 교회사의 기록에는 '덕심'이라는 자로 나온다. 비록 형제들보다는 늦게 천주교 신앙을 받아들였지만, 이후로는 누구보다도 열심히 교리를 실천하였다. 1839년에 기해박해가 발생한 지 얼마 안되어 구산 교우촌에 포졸들이 들이닥쳤을 때, 그는 아우인 김문집(베드로)과 사촌 김주집(金胄集, 스테파노)과 함께 체포되었다. 그때가 3월 21일(양력)이었다. 그들 형제는 처음에 포졸들의 호의로 석방될 수 있었으나, 박해가 끝날 즈음에 다시 체포되어 광주 유수(留守)의 치소가 있던 남한산성 옥에 갇히고 말았다.
김만집·문집 형제와 사촌 김주집은 함께 재판관 앞에 나아가 문초와 형벌을 받게 되었다. 이때 김만집은 천주교 교리를 설명하면서 이렇게 큰소리로 대답하였다.
세상 사람들이 말하는 것처럼 천주교는 임금도 없고 아비도 없는[無君無父] 이적(夷狄)·금수(禽獸)의 교가 아니라 천주님의 참다운 진리다. 그래서 그는 여러 차례 형벌을 당하게 되었지만 이를 용감하게 참아 받았다. 사령들은 그에게 '배교한다는 것과 비슷한 말만 하면 석방될 수 있다'고 회유하였지만, 어떤 말로도 그의 마음을 움직일 수는 없었다. 하는 수 없이 광주 유수는 그를 감옥에 가두도록 하고 한 겨울 내내 그대로 방치하였다.
1840년에 김만집의 아들들은 부친과 연락을 취할 수 있게 되면서 한때 석방될 지도 모른다는 희망까지도 가졌으나 그 자신은 조금도 석방되고 싶어하지 않았으며, 유수도 끝내 이를 허락하지 않았다. {경주김씨족보}에 의하면, 김만집은 장남 원희(元熙)와 차남 차희(次熙)를 둔 것으로 나타나 있다. 이때 장남의 나이가 14세였으니, 차남은 10세 전후가 아니었나 생각된다. 또 구산 마을에 전해 오는 전승에 따르면, 그가 남한산성에서 옥고를 치를 때 집안 사람들이 교대로 밥을 갖다주었는데, 돌아올 때면 눈물이 밥그릇에 가득 괴었다고 한다. 구산에서 남한산성까지는 40리가 넘는 고개 길인데 날마다 걸어서 밥을 날라다 주었다는 것이다.
이로부터 김만집은 다시 오랫동안 험난한 옥고를 겪어야만 했으나, 신앙의 가르침에 조금도 어긋나지 않기 위해 이를 참아 받았다. 결국 옥중에서 병을 얻게 된 그는 몇 주일 동안 고통을 받다가 순교하고 말았으니, 이때가 1841년 1월 28일(양력 2월 19일)로, 그의 나이 44세였다. 그러나 다행히도 그는 끝까지 "진실한 통회와 애덕의 정을 지닌 채" 숨을 거둠으로써 순교자의 반열에 오르는 영광을 안게 되었다.
김만집이 순교한 뒤에도 아우인 김문집과 김주집은 약 18년 동안 옥에 갇혀 있다가 1858년에 석방되었다. 한편 김만집의 장남 원희는 부친이 순교한 뒤 버려진 시신을 가까스로 찾아다 구산에 안장하였다.
김문집(金文集) 베드로(1801-1868년)
김문집은 김성우 성인의 둘째 동생으로, 자는 윤심(允深)이며, '문집'은 그의 보명이다. 맏형과 함께 천주교 신앙을 받아들인 그는 1839년 기해박해가 발생한 지 얼마 안되어 구산 교우촌에 포졸들이 들이닥쳤을 때, 둘째형인 김만집(아우구스티노)과 사촌 김주집(스테파노)과 함께 체포되었다. 그때가 3월 21일(양력)이었다. 그들 형제는 처음에 포졸들의 호의로 석방될 수 있었으나 박해가 끝날 즈음에 다시 체포되어 광주 유수의 치소가 있던 남한산성 옥에 갇히고 말았다.
김문집은 형 김만집과 함께 배교를 강요당하며 여러 차례의 심문과 모진 고문을 당하였으나 끝내 굽히지 않았고, 오히려 천주가 진리임을 역설하였다. 그러자 재판관은 끝내 그들의 마음을 돌이킬 수 없음을 알고는 그대로 옥에 가두어 둔 채 한 겨울을 나도록 하였다. 그 중에서 형 김만집이 이듬해 초에 옥사로 순교하였다. 그러나 김문집과 사촌 김주집은 이후에도 오랫동안 석방되지 않은 채 약 18년 동안을 갇혀 있다가 1858년 왕세자의 탄생을 계기로 베풀어진 특사 때 석방되어 집으로 돌아올 수 있었다.
집으로 돌아온 김문집은 비밀리에 신부를 모셔다 성사를 보았으며, 언제나 교회를 도울 방도를 궁리하였다. 그러다가 1866년(고종 3) 병인박해(丙寅迫害)가 일어나자 김문집은 형들과 같이 순교하지 못한 것을 안타깝게 생각하면서 순교의 열망을 키워 나가게 되었다. 그러다가 2년 뒤인 1868년(戊辰年)에 박해가 점점 심해지자 후손들을 모두 불러모은 뒤, "만일 기회가 온다면 예수 그리스도의 모범을 따라 영광스럽게 순교를 받아들일 수 있도록 하라"고 가르쳤다.
실제로 얼마 되지 않아 광주 포졸들이 구산으로 몰려왔고, 이내 그들은 김씨 집안의 성인 남자들을 모두 체포하였다. 이때 남한산성으로 끌려간 사람들은, 김문집을 비롯하여 김성우 성인의 외아들 성희(암브로시오), 순교자 김만집의 차남 차희, 김문집의 외아들 경희, 성희의 양자인 교익(敎翼, 토마스), 김주집의 장남 윤희 등 모두 6명이었다. 그러니까 5촌 이내의 3대가 같은 날 같은 옥에 갇히게 된 셈이었다.
이후 김씨 집안 사람들은 여러 차례 유수 앞으로 끌려나가 문초와 형벌을 받으면서 배교를 강요당하였다. 그러나 그 누구도 신앙을 버리지 않고 꿋꿋하게 고통을 이겨냈다. 특히 68세의 김문집은 조카와 손자를 다독거리면서 함께 순교의 영광을 얻자고 권면하였다. 그 결과 이들 6명 모두는 유수 앞에서 사형 판결을 받고 형장으로 끌려가게 되었는데, 이때 김씨 집안의 은혜를 입은 적이 있는 포교가 '3대가 함께 죽도록 할 수는 없다'고 생각한 나머지 도중에 가장 어린 김교익을 언덕 아래로 밀쳐내 살려 주었다고 한다. 이렇게 되어 김문집과 아들·조카 4명은 1868년 2월 15일(양력 3월 8일) 함께 순교하였다. 이들이 순교한 뒤 김교익이 몰래 남한산성의 형장으로 가서 김문집, 김성희, 김경희 등 3명의 시신을 가까스로 찾아다 구산에 안장하였다.
김성희(金聖熙) 암브로시오(1815-1868년)
김성희는 김성우 성인의 외아들로, 자는 희백(喜伯), 세례명은 암브로시오였다. 그의 세례명은 집안에서 구전으로 전해지다가 훗날 족보에 기록되었다고 한다. 그의 부인은 전주 이씨 범회의 딸이었는데, 후사가 없었으므로 김문집의 아들인 경희의 5남 교익(敎翼, 토마스)을 양자로 삼아 대를 잇게 하였다.
김성희는 부친 김성우가 1841년에 순교하자, 그 시신을 찾아다가 구산에 안장하였다. 이후 그는 약국을 경영하여 집안을 다시 일으켜 세웠고, 1860년경에는 매부 홍희만(洪喜萬)에게 교리를 전하는 등 전교와 신앙 생활에 열심하였다. 그러다가 1866년에 병인박해가 일어난 지 2년 뒤인 1868년에 일가 친척과 함께 체포되어 남한산성에 투옥되었으며, 이후 여러 차례의 문초와 형벌을 이겨낸 뒤 사형 판결을 받고 1868년 2월 15일에 54세의 나이로 순교하였다. 시신은 그의 양자 김교익이 밤에 몰래 찾아다가 구산에 안장하였다.
김차희(金次熙, ?-1868)
김차희는 김만집(아우구스티노)의 둘째 아들로, 자는 희선(希善)이었으나 세례명은 알 수 없다. 부인은 광산 김씨였다. 그는 부친 김만집이 기해박해 때 체포되어 1841년 남한산성에서 옥사로 순교할 때 12세 전후의 어린 아이였다고 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깊은 신앙심을 갖고 있었으며, 이후로는 종형 김성희(암브로시오)를 따르면서 열심히 신앙 생활을 하는 한편 침술을 배워 생활을 꾸려나갔다. 그의 침술은 인근에 잘 알려질 정도로 능통하였다고 한다.
김차희는 1866년에 병인박해가 일어난 지 2년 뒤인 1868년에 일가 친척과 함께 체포되어 남한산성에 투옥되었다. 그런데 어느 날 그는 우연히 옥리들이 하는 말을 듣고 포교의 아들이 위급하다는 것을 알게 되었고, 자신의 침술로 그 아들을 소생시켜 주었다. 그 일이 있은 뒤 김차희가 하루는 심한 곤장을 맞고 신음하고 있을 때, 그 포교가 다시 찾아와 배교하고 살아나가라고 권유하였으나, 그는 이를 완강히 거절하였다.
사형 판결을 받던 날 재판관이 모든 신자들을 끌어내 마지막으로 배교를 권유할 때, 김차희의 차례가 되자 그 포교는 그의 뒤에 서서 대신 "다시는 천주교를 신봉하지 않겠습니다"라고 대답하였다. 그 결과 김차희만은 형장으로 끌려가지 않고 그 자리에 남게 되었다.
이렇게 살아 남은 김차희는 그 순간부터 가슴이 떨리고 매를 맞아 부어오른 상처가 더욱 쑤시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이에 그는 다시 재판관을 향해 "조금 전의 대답은 제가 한 것이 아니오. 저는 비록 매를 맞아 죽을지언정 천주교를 버릴 수가 없소"라고 말하였다. 그런 다음 사형 판결을 받고 1868년 2월 15일 인척들과 함께 순교하였다. 이후 그의 시신은 아들 김교문이 거두어 안양 수리산(현 안양시 안양 3동)에 안장하였으나 실전되고, 훗날 그의 의묘(擬墓)가 구산에 조성되었다.
김경희(金敬熙, 1823-1868년)
김경희는 순교자 김문집의 외아들로, 자는 치선(致善)이었으나 세례명은 알 수 없다. 1823년(순조 23년) 구산에서 태어난 그는 장성한 뒤 순흥 안씨 진환(鎭煥)의 딸과 혼인하였지만, 첫 부인이 일찍 사망하면서 전주 이씨 종태(從台)의 딸과 재혼하게 되었다.
일찍부터 부친의 영향을 받아 천주교 신앙을 실천하던 그는 비밀리에 자신의 집을 방문한 신부로부터 성사를 받고 열심히 생활하다가 1868년에 부친과 친척들과 함께 체포되었다. 이후 남한산성 안에 있는 광주 유수의 치소로 압송된 그는 친척들과 함께 여러 차례 문초와 형벌을 받았으나 굳게 신앙을 지키고 1868년 2월 15일 46세의 나이로 순교하였다. 그의 시신은 후손들에 의해 거두어져 구산에 안장되었다.
김윤희(金允熙, 1834-1868)
김윤희는 김성우 성인의 사촌 김주집(스테파노)의 장남으로, 세례명은 알 수 없다. 김주집은 기해박해 때 김문집과 함께 체포되어 남한산성에 투옥되었으며, 이후 약 18년 동안 옥중에서 고통을 겪다가 1858년에 석방되어 집으로 돌아올 수 있었다. 따라서 김윤희도 일찍부터 부친으로부터 교리를 배워 신앙 생활을 하고 있었음을 미루어 짐작할 수 있다.
김윤희는 성장하면서 인척들과 함께 열심히 교리를 실천하였고, 신부로부터 성사도 받았다. 그러다가 1868년에 5촌 당숙 김문집(베드로)을 비롯하여 6촌 형제들과 함께 체포되었다.
남한산성으로 끌려간 김윤희는 집안 사람들과 함께 유수 앞에서 여러 차례 문초와 형벌을 받았다. 그러나 조금도 마음이 약해진 적이 없었으며, 끝까지 신앙을 지킨 뒤에 사형 판결을 받고, 1868년 2월 15일 35세의 나이로 순교의 영광을 안았다. 이후 순교자의 시신은 찾지 못하였으나, 훗날 구산 신자들이 그의 용덕을 기려 구산에 그의 의묘를 조성하였다. [출처 : 이상 구산 성지 홈페이지]
출처--가톨릭정보 http://www.catholic.or.kr/
남한산성 (출처- http://blog.daum.net/pius4004)
북한산성과 함께 서울을 수비하던 군사 요충지였다. 1636년 인조가 병자호란을 맞아 이곳으로 피난왔다가 결국 청 태종에게 무릎을 꿇고 항복한 치욕의 장소이다. 남한산성은 본성과 외성, 옹성으로 구성되어 있다. 둘레는 무려 11.76Km이며 성곽의 높이는 낮은 곳이 3m, 높은 곳은 무려 7.5m에 달한다. 남한산성은 원래 토성으로 만들어졌다. 기원전 5년 백제의 시조 온조왕이 위례성에 도읍을 정했다가 말갈의 침입을 피해 이곳으로 옮겨왔다는 얘기가 있다. 성내에 온조왕의 위패를 모신 사당인 숭열전이 있는 것도 이 때문이다. 남한산성은 672년 삼국을 통일한 신라 문무왕 때에 이르러 다시 중요성을 인정 받았다. 문무왕은 당과의 연합을 깬후 한강 유역일대를 수비하기 위해 남한산성에 토성을 쌓았다. 이로부터 949년이 흐른 1621년 광해군은 남한산성을 경도보장지(京都保障地)로 정하고 후금의 침입을 막기 위해 토성을 오늘날의 석성으로 개축하기 시작했다. 1624년 인조는 남한산성 개축을 대대적인 국가사업으로 독려, 1626년 서울의 남쪽을 수비하는 번듯한 석성으로 완성시켰다. 남한산성은 한·중 관계사를 연구하는 학자들에게 매우 중요한 소재중 하나이다. 향토사학자들에 따르면 청태종은 우리나라를 침략하기 전 남한산성 전투가 승부를 가르는 분수령이 될 것으로 판단했다고 한다. 그는 직접 첩자들을 보내 남한산성의 위치와 길이, 높이, 접근로 등 많은 정보들을 수집했다. 청태종은 이를 근거로 직접 우리나라를 침략했고 강화도로 피신하려던 인조는 청태종의 예측대로 남한산성으로 피신하게 되었다. 그러나 남한산성은 청태종의 생각 보다 견고한 성이었다. 인조는 항복과 결사항전을 주장하는 신하들의 틈바구니에서 45일간 버틸수 있었다. 병자호란이 인조의 항복으로 막을 내린 후 청태종은 소현세자와 봉림대군(훗날 효종)을 볼모로 끌고 갔다. 그러나 청태종은 왕자를 볼모로 끌고가는 것에 안심하지 않고 남한산성에 대한 감시의 눈초리를 거두지 않았다고 한다. 청태종은 인조의 항복문서에 남한산성을 개보수 하려면 사전에 청의 허락을 받아야 한다는 글을 넣도록 요구 했다. 이 때문에 병자호란이후 조선에 들어온 청의 사신들이 제일 먼저 들른 곳이 바로 남한산성이었다.
남한산성은 천주교의 박해가 일어난 시초부터 많은 천주교 신자들이 체포되어 이곳에 끌려와 순교를 하신 곳이다. 한국 초대교회 최초의 대대적인 박해인 신해박해(1791)와 신유박해(1801) 때 많은 분들이 잡혀 있었던 기록이 있으며, 병자호란(1636년) 이후 처형터가 있어 기해박해(1839년)와 병인박해(1866년) 당시 광주 일원, 양주, 용인, 이천 등에서 잡혀 온 무명 교우 약 300분이 참수, 교수, 장타, 도모지법 등의 방법으로 치명, 순교하셨으며, 순교자들의 시신은 남한산성의 물이 나가던 수구문을 통해 버려졌다. 이곳의 첫 번째 애환은 1636년 12월 14일, 청나라의 침입을 받아 한양이 위태롭게 되자 인조가 세자와 백관들을 대동하고 피난해 오면서 시작되었다. 인조는 이곳에서 40여 일을 수성하였지만, 모든 사정이 악화되자 결국 이듬해 1월 30일 백관과 군사들의 호곡 소리가 끊이지 않는 가운데 성문을 열지 않으면 안되었다. 이후 조선에서는 청나라와 굴욕의 맹약을 맺은 삼전도에 세워진 청나라 태종의 송덕비를 가리켜 '치욕의 비' 또는 '한(汗)의 비'라 불렀으니, 이것은 곧 '호국의 몸부림'이었다. 그로부터 200여 년이 지난 1839년의 박해 때 남한산성에서는 두 번째 애환이 있게 되었으니, 이것은 바로 '호교를 위한 몸부림'이었다. 그러나 이 몸부림은 천상의 승리로 결실을 맺게 되었고, 신앙인들의 노래는 훗날까지도 이어져 남한산성 한 모퉁이를 치명터로 만들었다. 당시 이곳이 치명터가 된 이유는, 1626년에 산성리가 형성되고 1795년부터 광주 유수가 성안에 거처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박해가 계속되는 동안 광주 일대에서 체포된 수많은 신자들이 이곳으로 끌려와 모진 형벌을 받으면서 배교를 강요당했고, 신앙을 지키기 위해 세속의 모든 부귀와 육신의 고통을 버려야만 했다.
출처--성화사랑 http://blog.daum.net/sunghwa/2239292
출처--가톨릭정보 http://www.catholic.or.kr/
출처--성화사랑 http://blog.daum.net/sunghwa/223929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