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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티칸(Vatican)과 로마(Roma)
1) 바티칸(Vatican)
바티칸 시국은 이탈리아의 수도인 로마 북서부에 위치한 0.44㎢정도의 영토를 가진 세계에서 가장 작은 주권 국가다. 외교상으로는 교황이 바티칸 시국의 원수로서 바티칸을 대표한다.
이같이 규모는 작지만 교회를 위한 독립국가로 형성된 것은 지난 1천년 동안의 유럽역사에서 가톨릭 교회와 일반 여러나라 통치자들 사이에 수없이 일어난 마찰 때문이었다
특히 근세에 와서는 국가가 교회의 독립성을 위협하는 일이 종종 있었다. 이 때문에 교회는 국가의 부당한 간섭에서 벗어나 정치적으로도 교황이 주권을 행사하며 통치하는 국가의 필요성을 절감하게 되었다. 이리하여 1929년 이탈리아 뭇솔리니 정부와 교황청(비오 11세)간에 정교협정(政敎協定)인 라떼란(Lateran)조약이 성립되어, 오늘의 바티칸 시국이 탄생하게 된 것이다.
바티칸 시국의 인구는 약 1천명으로, 전세계에 교황사절(敎皇使節)을 파견하고(현재 107개국과의 외교관계 수립)외교사절을 접수하며, 독자적인 화폐, 우표, 신문, 방송국 등을 경영하고 있다. 우리 나라와는 1966년 이후 대사 교환으로 승격되어 오늘에 이른다.
2) 성 베드로 대성당
지금 바티칸(바티칸이란 점치는(vaticinia)고지(高地)란 뜻을 지니고 있다.) 대성당은 네로(Nero)황제(54-68년)의 경기장으로부터 북쪽 언덕받이 위에 콘스탄틴 대제(大帝, 272-337)가 4세기에 세웠던 대성당 터에 서 있다. |
사도 성 베드로가 순교한 지(67년경)얼마 안되는 2세기 초엽 사도의 무덤 위에 가이오 신부가 이교인 무덤과 비슷하게 다시 기념 묘각을 세웠다. 313년 밀라노 칙령으로 그리스도교인들에게 종교자유가 인정된 이후 콘스탄틴 대제는 초라하게 땅 속에 묻혀 있던 사도의 유골을 거두어 특별히 마련한 돌궤에 안치하였다. 그리고 기념 묘단을 만들어 그 돌궤를 보존하기 위해 무덤 위를 덮었다. 그 무덤을 중심으로 지은 대성당을 교황 실베스떼르(Sylvester, 314-335)1세가 326년 11월 8일 성대하게 축성하였다. 교황 그레고리오 1세(590-604년)는 콘스탄틴 대제 기념 묘단과 거의 같은 높이로 그 주위를 대리석으로 덮어 성직자석으로 꾸미고 새 제대를 크게 지어 그 기념묘단을 덮었다. 교황 갈리스도(Calixtus, 1119-1234년) 2세는 다시 더 큰 제대를 만들어 기왕에 있던 제대를 덮고, 교황 클레멘스(Clemens, 1592-1605년)8세는 새로운 대성당 건축을 계속 하면서 다시 더 큰 제대를 세워 덮었으니, 이 제대가 바로 현재까지 사용되고 있다.
콘스탄틴 대제에 의해 세워진 대성당은 1,200년 동안 존속하였으나 붕괴될 위험이 있었다. 성년을 맞이하여 보수, 증축할 필요성이 생겨 교황 니꼴라오(Nicholas, 1447-1455) 6세 때 공사가 시작되었으나, 그의 죽음으로 중단 되었다. 1506년 교황 율리오(Julius, 1503-1513년) 2세는 대성당을 허물고 새로 짓도록 명하였다. 브라만떼, 라파엘로, 미켈란젤로, 폰티나, 베르니니, 마데르노 등 당대의 거장들에 의해 작업이 이어진 끝에 1626년 11월 18일 콘스탄틴 대제 때 세워진 대성당 이후 1,300년만에 교황 우르바노(Urban, 1623-1644)8세가 새로운 대성당을 축성하였다.
이 대역사는 120년만에 끝났다. 그러나 광장과 그 외의 부분들은 1700년 초까지 공사를 계속하여 이루어진 작품들이다. 광장 주위의 기둥들은 1656년에 시작하여 11년 후인 1667년에 완성되었다. 이리하여 그리스도교 신자들의 신앙과 예술이 총 발휘되어 옛 묘소를 영예롭게 장식하기에 이르렀다.
최근의 고고학 발굴로 그 묘소가 오랜 세월이 지난 지금까지 옛 모습을 고스란히 간직하여 왔음이 고증되었다. 여러 과학적인 연구를 토대로 교황 비오(Pius, 1939-1958)12세와 교황 바울로(Paulus, 1963-1978년) 6세는 현존하는 유해가 사도 베드로의 것임을 재차 공식 선언하였다. "정말 사도 베드로의 무덤이 재발견 되었는가? 많은 작업과 여러 가지 연구의 최종적인 결론은 '그렇다'는 답변입니다. 사도들의 머리이신 베드로의 무덤이 과연 재발견되었습니다."(비오 12세, 1950년 크리스마스 메세지)
"예, 그렇습니다. 그분의 무덤뿐만이 아니라, 그분의 지극히 존경하올 유해에 대해서도 마찬가지로 역사적 고증이 성립되었습니다. 베드로는 바로 이 자리에 계십니다. 문헌, 고고학, 방증, 그리고 논리 등의 분석이 우리에게 이 사실을 입증해 주었습니다."(바울로 6세, 1978년 6월 29일자 연설)
(1)베드로 대성당의 내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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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전에 들어서면 우선 한 사람이 일한 듯이 모든 게 잘 균형 잡혀 있다는 데 놀라지 않을 수 없다. 현관까지의 총 길이는 230미터, 둥근 천정까지의 높이가 136미터, 가운데 통로 끝에 있는 성령을 상징하는 비둘기 모양의 상은 날개 길이가 1.5미터이며, 성전 안에는 6만 명이 서 있을 수 있다. 성전의 가운데 통로 바닥에는 세계 유명한 성당의 길이를 표시하고 있어 성 베드로 성전의 크기를 짐작할 수가 있다. |
넓다란 현관으로 들어서면 성당으로 들어가는 문이 다섯 개가 보인다.
- 가운데 청동문은 피렌체의 필라레떼(Filarete)가 1445년 옛 베드로 성전문으로 만든 것이다. - 맨 오른편 끝의 문이 성문(聖門; Porta Santa)이라 하여, 25년마다 찾아오는 성년에만 열리는 문이다. 이 문은 "나는 문이다."(요한 10,7)라고 하신 그리스도를 상징한다. 2000년 대희년을 맞아 1999년 성탄 때 열린 이 문은 2001년 1월 6일 예수공현대축일까지 열려있을 것이다. 베드로 성전 입구 좌편에서 시작하여 차츰 앞으로 나가 중앙 정면을 돌아 우편 입구의 삐에따(La Pieta)상으로 나오는 순서로 살펴보기로 한다. -베드로 대성당에 들어서면 세계에서 가장 크고 화려한 그리스도교 성전의 위용이 한눈에 들어온다. 바로 중앙 회중석이 제 2차 바티칸 공의회(1962-1965년)가 개최되었던 곳이다. |
- 좌편 회랑(Navis)에서 맨 먼저 눈에 띄는 것은 세례당(Baptisterium)이다. 그리스도의 세례(마태오 3, 13-17 : 마르코 1, 9-11 : 루가 3, 21-22)를 그린 벽화는 마라따의 원화를 모자이크로 복원시킨 것이다. 물과 성령으로 다시 나는 그리스도교적인 재생의 신비를 상기시키고, 신앙의 은혜를 두고 하느님께 감사드리게 한다.
여기서 조금 나아가면 영국 스튜어트 왕조의 마지막 3대 국왕(제임스 3세, 찰스 3세, 헨리 9세)들을 새긴 기념비가 나온다. 유명한 카노바(1819년)의 작품이다.
-바로 왼쪽에는 예수 봉헌 경당이 있다. 여기에는 교황 비오 10세(1903-1914년)성인의 유해가 안치되어 있다. 어린이들에게 영성체를 허락한 교황이다.
-그 다음 상당히 큰 경당은 참사원 성무일도(聖務日禱)경당으로서 이 대성전 참사원들이 성무일도를 합송하는 곳이다. 이곳에 동방교부(東方敎父) 성 요한 크리소스톰(344-407년)과 교황 글레멘스 11세 (1700-1721년)의 유해가 안치되어 있다. 제단 위에는 그리스도의 원죄 없으신 모친 성모 마리아의 모자이크가 펼쳐져 있다.
-바로 이어서 맞은 편에 예수의 거룩한 변모(마태오 17, 1-8 : 마르코 9, 2-8 : 루가 9, 28-36) 제단이 보인다. 여기 있는 거대한 그림은 라파엘의 최후의 걸작 중의 하나다. 왼쪽 뒷편으로 보이는 것은 대 그레고리오의 제단이다. 조금 나아가 왼편에 열려 있는 문은 대성전 제의실과 역사, 예술 박물관 입구이다.
그 다음 넓은 공간이 나오는데 십자형의 이 대성전 좌편 주랑(柱廊=transeptis)에 해당한다.
-맨 먼저 성 베드로 순교 제단이 보인다. 제단 위의 모자이크는 구이 도레니의 그림이다. 이 자리가 네로 황제의 경기장 가까운 곳이며, 이곳이 초대 교황 베드로 사도가 거꾸로 십자가에 매달려 순교한 장소로 전해진다. 이어서 성 요셉 제단과 토마의 제단이 차례로 있으며, 이 주랑에는 고백소가 여러 개 마련되어 있어 사제들이 각국어로 고백성사를 준다.
-좌편 주랑을 다 지나면 베르니니(Bernini)가 만든 알렉산델 7세의 기념비가 있다. 그곳에 장막을 헤치고 모습을 나타내는 죽음이며, 사랑, 정의, 진리, 현명이라는 네 가지 덕목이 조각으로 표상되어 있다. 이어서 왼편에는 기둥의 성묘 경당, 맞은 편에는 대 레오 성인의 제단이 보인다.
그리고 대성전이 머리끝이 되는 후진(apsis)이 나타난다. 석고재로 된 반투명 유리의 창문에서 나오는 빛은 그 밑의 '베드로의 교좌'를 비춘다. 제단 이름도 베드로의 교좌이며, 양측에는 초대 교회의 4대 교부(敎父) 성 암브로시오(334-397년), 성 아우구스티노(354-430년), 성 아타나시오(295-373년), 성 요한 크리소스톰(344-407년)의 커다란 상들이 세워져 있다. 이 후진의 전체 구조는 (초대 교회에서 비둘기로 상징된 교회의 영혼인)성령께서 교좌를 비추어 주심을 상징한다.
(2) 교황 제단
중앙 회중석과 양편 주랑이 교차하는 지점, 대성전 중심이 되는 곳에 교황제단이 놓여 있다. 고백의 제단이라 불리는 여기서 교황이 미사를 집전한다. 일찍이 성 베드로가 피로써 신앙고백을 하였고, 그 뒤 모든 세기를 통해 헤아릴 수 없이 많은 신자들이 이곳에서 신앙을 고백하고 있다.
이 제단은 베드로 사도의 무덤 바로 위에 세워져 있다. 갈릴리의 어부였던 베드로에게 바쳐진 영광은, 제단 위에 세운 베르니니의 거대한 구리기둥 천개(Ciborium), 그 위로 치솟은 미켈란젤로의 웅장한 원형 천정, 그리고 천정(Cupola)받침 둘레에 새겨진 "너는 베드로이다. 내가 이 반석 위에 내 교회를 세우겠다."(마태오 16, 18)는 예언 말씀을 대변하고도 남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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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후 여러 차례 제대를 새롭게 덮어 설치했음에도 불구하고, 2천여년 전에 묻혔던 베드로 사도 무덤의 중심과 그 제대의 중심은 한번도 변경되지 않고 수직선을 유지했다. |
베르니니의 청동의 천개는 판테온의 천장을 덮었던 청동으로 만들어 졌으며 나선형(꽈배기)의 원주가 받치고 있는 이 제단은 교황님의 제단으로 사도 베드로의 무덤 위에 있다.
-제단 주위에서 사방을 둘러보면 성녀 헬레나, 성 론지노, 성 안드레아의 거대한 석상이 눈에 띈다. 성 안드리아 상 아래에 지하 묘소(Crypta)로 내려가는 층계가 있다.(맞은편 성 론지노 상 아래에도 입구가 있음.) 그리로 내려가면 성 베드로의 묘소는 물론 여러 교황들, 우리가 들어 익히 아는 현대의 교황들, 비오 12세, 요한 23세, 바울로 6세, 요한 바울로 1세의 묘소 앞을 지나 대성전 옆으로 나오게 된다.
-중앙 제단에서 현관을 향하고 보면 왼편 머리에 고대의 성 베드로 동상이 보인다. 여러 세기를 두고 무수한 순례자들이 스다듬고 입맞춤에 오른 발은 밋밋하게 닳아져 있다. 우측 주랑은 제 1차 바티칸 공의회(1870년)회의장으로 쓰였다.
어머니의 모습을 아주 젊게 조각한 것은, 모성애는 결코 늙을 수 없고 또 영원한 동정녀임을 표시하고자 했다 한다. 미켈란젤로의 서명이 있는 유일한 작품이기도 하다. 완성된 그의 작품을 보고 놀란 사람들이 밤 사이에 성모님의 가슴에 두른 띠에 미켈란젤로라는 이름을 새겨 넣었다는 얘기도 있다. 원래 이 제대는 십자가에서 죽으신 주님께 봉헌된 것이다. 이 작품은 미켈안젤로가 25살이 되기 전의 1500년 대희년을 위해 조각했다.
이 성전에서 그림처럼 보이는 것은 모두가 완전에 가까운 모자이크이다.
(3) 성 베드로 광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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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 베드로 광장은 광활한 타원형으로, 멀리서 보면 넓은 사다리꼴의 공간이 둘기둥과 궁전의 지붕 사이에 뻗쳐 있고 마데르노(Maderno)가 조각한 전면이 우뚝 솟아나 보인다. 궁전의 옆부분은 반원형으로 도리아식의 회랑이 네 개씩 줄을 지어 있다. 이 거대한 건물에는 모두 284개의 기둥과 20미터 높이의 88개의 기둥으로 되어 있으며, 대리석으로 142분의 성인의 상이 지붕위에 세워져 있다. |
성 베드로 광장 한 복판에는, 이 광장에서 제일 오래된 기둥처럼 세워진 오벨리스크(Obelisk)가 있다. 네 마리의 청동제 사자의 호위를 받으며 서 있는 이 오벨리스크는 높이가 25.88미터인데 칼리골라(Caligola)황제가 그의 경기장을 장식하기 위해 이집트에서 가져온 것으로 지금의 모습대로 세우는 데에 4개월이 걸렸고 9백명의 인부가 동원되었다고 한다. 이 첨탑은 성 베드로 사도가 순교했던 네로 황제의 원형 경기장에 장식되었던 것으로, 교황 식스또(Sixtus 1585-1590년)5세가 현 위치로 옮겨왔으며, 교황 알렉산델 7세의 출신 가문 인장으로 꼭대기를 장식했다. 맨 꼭대기의 십자가가 퍽 이나 인상적이다. 이 오벨리스크 위에는 에수님의 십자가의 일부분이 보존되어 있다.
교황 식스또 5세의 명으로 1586년 이곳으로 옮겨온 이 오벨리스크 양옆에는 14미터 높이의 분수대가 있는데, 각기 다른 시기에 만들어졌다. 오른쪽 것은 1615년 마데르노가, 왼편 것은 1677년 베르니니가 만들었다. 두 개의 분수와 오벨리스크 사이엔 광장의 중심부를 나타내는 둥근 대리석판이 놓여 있는데, 이 곳에서 보면 네 줄로 된 기둥이 하나로 보인다.
많은 순례자들과 로마인들은 주일 정오에 교황님의 강복(降福)을 받기 위해 이 광장에 모인다. 특히 1월 1일, 성지주일, 부활주일, 그리고 성탄절에는 더욱 붐빈다.
3) 바티칸 박물관(The Vatican Museum)
성 베드로 광장 오른편 성벽을 따라 5-6분 정도 걸리는 거리에 있는 바티칸 박물관은, 그 역사가 거의 500년이나 되어, 세계 각국 박물관의 표본이 되어 왔다. 1503년 교황 율리오 2세(1503-1513년)가 아폴로 석상을 교황청 안에 안치함으로써 시작된 이 박물관은 28개의 부분으로 크게 분류되는 바, 이곳에는 고대 이집트의 미이라와 상형문자를 비롯, 그리스, 로마제국, 르네상스, 현대미술 등이 총망라되어, 여기에 소장된 작품이 얼마나 되는지는 아무도 알 수 없다. 물론 이 가운데엔 아직 미공개의 예술품도 있고, 분류가 안된 필사본 등이 꽤나 된다고 한다.
양쪽 벽에만 작품이 있는 것이 아니라, 바닥과 천장에도 가득 차 있으며 시스틴 성당도 이 박물관의 마지막 코스에 해당하는 부분이다.
■ 시스틴성당(Sistine Chapel)
오른 쪽 그림은 시스틴 성당의 정면 벽화로 미켈안제로가 1540년 교황 바오로 3세를 위해 최후의 심판을 그린 것이다. 이 그림은 오랜 복원작업을 마치고 최근에 다시 공개된 것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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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모승천을 기념하는 시스틴 성당은 교황 식스또 4세(1471 - 1484)의 명으로 1475 - 1482년에 걸쳐 죠반니 데 돌치(Giovannino de Dolci)의 설계로 건축된 것으로, 당시의 교황의 이름을 따서 시스틴 성당이라고 부른다. 이 성당은 교황의 비공식적인 의식을 행하는 성당이며,또 교황이 서거했을 때, 전세계의 추기경들이 여기에 모여 교황의 비밀선거가 이루어지는 곳이기도 하다. 제대를 중심으로 양쪽 벽에는 12개의 그림이 있는데, 제대 오른편엔 모세의 일생을 왼편엔 예수 그리스도의 일생을 나타낸 작품들이 있다.
원형의 천장은 미켈란젤로가 교황 율리오 2세의 명을 받아「창세기」에 나오는 내용을 프레스코(frescoes)화로 그린 것이다. 시스틴 성당의 제대 뒤에는 미켈란젤로의 최대걸작인 '최후의 심판'이 있다. 1536-1545년 사이에 완성된 것으로 200평방미터가 넘는 방대한 작품이며, 390명 이상의 인물이 등장한다.
4) 라떼란(Lateran)대성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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콘스탄틴 황제는 라떼란 가문의 파우스따와 결혼했는데, 이때 결혼 지참금처럼 가져온 프라우찌오 라떼라노(Plauzio Laterano)궁전을 325년에 교황 실베스떼르 1세에게 선물로 드린다. 이로써 교황은 첫 번째로 부동산을 소유하게 되고 그후 교황은 이곳에 성전을 짓고 천여 년 간 거처하게 되었다. 라떼란 대성당은 455년 반달족의 침입으로 빼앗겼다가 교황 레오 1세때 되찾았고, 896년엔 지진으로 파괴됐다가 905년 세르지오 3세때 재건되었다. |
그후 교황 니콜라스 4세가 많은 단장과 장식을 했으나, 1308년과 1361년 사이에 두 차례 화재로 소실됐다가 우르바노 5세와 그레고리오 11세 때 각각 재건된 수난의 건물이기도 하다.
정면 부분은 끌레멘스 12세때, 알렉산드로 갈릴레이(Alessandro Galilei)가 만든 것으로 꼭대기에 있는 6미터나 되는 석상들은 가운데 그리스도를 모시고 옆에는 성 암브로시오와 성 아우구스띠노 등 교회 박사들이 있다. 현관 오른쪽에 성문이 있으며, 왼쪽에는 흔하지 않은 콘스탄틴 대제의 석상이 있다.
중앙의 청동문은 305년에 포로 로마노(Foro Romano)의 원로원에 있던 것을 1650년에 이곳으로 옮겼다. 성전 내부는 세기를 두고 보수하고 손질해 왔지만, 오늘날의 모습은 1650년 보로미니(Borromini)의 작품이다. 성전 중앙통로 양쪽 기둥에 서 있는 사도들의 석상은 베르니니 제자들의 작품이며, 석주의 장식 등은 신구약의 사건들을 취급한 보로미니의 작품들이다. 우리는 이 안에서 바로크 양식의 화려함을 볼 수 있다. 바닥은 14세기, 천장은 16세기의 것이며 미켈란젤로의 제자 다니엘르 다 볼떼라(Daniele da Volterra)가 만들었다.
중앙 교황제대의 천개 양식은 15세기의 고딕식이다. 윗 부분 굵은 철사안에 사도 성 베드로와 성 바울로의 석상이 있는데, 두 사도의 두개골을 모시기 위함이다. 중앙제대 앞의 교황 마르띠노(Martinus, 1417 ∼ 1431년) 5세의 무덤은 그가 예루살렘에서 그리스도께서 묶이어 매맞으시던 기둥을 옮겨온 공적 때문이라 한다. 제대를 향해 왼쪽에 성체를 모시는 경당에 있는데, 그 꼭대기에 예수께서 최후만찬 때에 쓰시던 식탁이 보존되어 있어서 성 목요일에 교황께서 집전하는 만찬미사는 오늘날에도 이 곳에서 봉헌된다. 오른쪽으로 1598년에 제작했다는 갈대 오르간이 있다. 제대 뒤쪽에는 지난 세기에 새로 장식한 로마 주교좌가 있다. 주교좌 위의 모자이크는 13세기 뚜리띠(Turriti)의 작품이다.
라떼란의 성 요한 대성당은 성전에 들어오면서 읽을 수 있는 것과 같이(omnium urbis et orbis ecclesiarum Mater et Caput) 세계 제일의 성당이다. 바티칸이 새로운 교황좌로 정해져 옮겨지기는 했지만 중세기까지 교황들의 거처는 바로 라떼란 궁이었고, 한때(1309∼1377년)는 프랑스 아비뇽에서 있었던 적도 있다. 이때 라떼란 궁은 화재를 당하게 된다. 그래서 아비뇽에서 돌아온 교황은 바티칸에서 거처하게 된다.
성전에 들어와 가운데 통로 오른쪽 첫 기둥 뒤에 있는 지오또(Giotto)의 그림도 빼놓을 수 없는 것이다. 그는 사상 첫 성년인 1300년에 로마에 왔다가 교황 보니파시오(Bonifatius, 1294∼1303년) 8세의 부탁으로 이 벽화를 그렸다.
5) 성 바울로 대성당
성 베드로 대성당 이전에 세계 최대 규모를 자랑했던 바울로 대성전은 콘스탄틴 황제의 뜻을 따라 성 바울로의 무덤 위에 세워졌다. 성 바울로 사도께서는 앗 아꽈스 살비아스(ad Aquas Salvias)라 부르는 장소에서 순교하셨다. 지금은 그곳을 뜨레 폰따나(Tre Fontana)라 부르는데 그 이유는 사도께서 순교하실 때에 몸에서 분리된 그의 모리가 세 번씩이나 땅에서 뛰었고, 또 그곳에서 샘이 솟았다 한다. 지금 그곳에는 트라피스트 수도원이 자리잡고 있으며, 가까이에 예수의 작은 자매회 수녀원이 있다. 사도께서 순교하신 후 그의 유해는 오스띠엔세 길 옆에 모시게 되었으며 콘스탄틴 대제 때, 즉 4세기 초에 그의 무덤 위에 세운 성당은 386년에 크게 증축되었다.
30m 의 길이와 65m의 폭을 가진 이 성당은 로마에서 성 베드로 대성당 다음으로 큰 성당이다. 콘스탄티누스 시대에 시작해서 395년에 완성되었으나 1823년 7월 15일∼16일 큰 불이 나서 이 아름다운 성전은 거의 타버렸다. 그후 교황 레오(Leo, 1823∼1829년) 12세와 비오 9세(1846∼1878년) 때, 뽈레띠(L. Poletti)의 설계로 옛 성전의 면모를 살리면서 새로 지어, 1854년 교황 비오 9세에 의해 축성되었다. 전면은 깔데르니(G. Calderni)의 설계로 금세기 초에 추가되었으며, 가운데 있는 사도의 석상은 오비치(G. Obici)의 작품이다. |
성전 전면의 아름다운 모자이크는 바티칸의 모자이크 제작자들이 만든 것이다. 현관 오른쪽에 성문(聖門)이 있다.
성 바울로 사도의 무덤 위에 있는 교황제대 위의 천개 장식은 13세기의 작품이며, 호재 때에도 상하지 않은 승리의 아치는 5세기 고트의 왕후 갈라 쁠라이디아(Galla Plaidia)가 기증한 것이며, 뒷면의 모자이크도 화재에 손상을 받지 않은 13세기 작품이다. 유리 대신 사용한 대리석은 이집트의 부왕 모하멧 알리(Mohamed Ali)가 기증한 것이며, 맨 끝에 있는 제대는 러시아 황제 니꼴라오 1세가 기증한 것이다.
성 바울로 대성당의 내부에 들어서면 너무나도 훌륭한 실내 장식과 장중한 모습 때문에 안도감이 들며, 아름다운 벽이나 정교한 천장 모습은 감탄을 금할 수 없다.
눈꽃 모양의 석고로 된 유리창으로 아름답게 비치는 햇빛은 경건한 신앙심을 자아내게 해주는 듯하다. 중앙부 끝에는 성 베드로와 성 바울로 사도의 조각이 만들어져 있고, 13세기의 걸작으로 치는 거대한 촛대도 장관을 이룬다.
다른 성당에선 좀처럼 보기 힘든 정원이 딸려 있고 회랑이 삼면을 에워싼다. 정원 한 가운데에는 칼과 성경을 든 사도 바울로가 서 있는데, 칼은 든 사도의 모습은 모든 이단으로부터 그리스도교를 보호하시는 바울로 사도를 상징적으로 표현하며, 사도의 참수치명을 뜻하기도 한다. 바울로 사도께서 "나는 이미 피를 부어서 희생제물이 될 준비를 갖추었습니다."(2디모데오 4, 6) 한 것을 보면 순교를 알고 계셨던 것 같다.
6) 성 마리아 대성당(성모설지전 성당 ; Basilica of Santa Maria Maggior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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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스퀴리노 언덕위의 이 거대한 성모 마리아 대성당은 식스투스 3세 때인 5세기 초의 건축으로서 로마네스크 양식의 종탑은 높이가 75m로 로마에서 가장 높다. |
로마의 7개 언덕 중 하나인 에스뀔리노(Esquilino) 언덕 위에 352년에 세워진 이 성전은 서방 가톨릭 교회에서는 처음으로 성모님께 봉헌된 성전이다. 이 성전이 여기에 세워진 이유에 대해 눈(雪)에 얽힌 유명한 기적이 전해 내려오고 있다.
리베리오(Liberius, 352∼366년) 교황 때의 일이다. 로마에 '요한'이라는 독실한 신자 귀족이 있었다. 그는 경건한 아내를 맞아 평화스럽게 원만한 가정을 이루어 나날을 보내었으나, 그 가정엔 자녀가 없는 아쉬움이 있었다. 그래서 늘 기도 중에 자녀를 원하는 간절한 소망을 말씀드렸다. 그러나 하느님의 뜻은 딴 데 있었음인지, 둘이 다 연로하여 이제는 자녀에 대한 희망을 더 이상 갖지 못하게 되었다.
그리하여 이들 부부는 막대한 재산을 성모께 바치기로 결심하였다. 그런데 어떤 방법으로 바쳐야 되는지를 모르던 두 부부는 열심히 기도하며 자선행위도 하고 단식과 금육의 재계를 지키며 주의 계시만 기다렸다. 그들의 소원은 참으로 기이하게 이루어졌다. 즉 8월 4일이 지나 5일로 접어든 밤중에 지극히 거룩하신 동정녀 마리아께서 이들 부부 각자의 꿈에 나타나시어 "로마의 에스뀔리노 언덕에 나를 위한 성당을 세우라. 그 장소는 눈이 하얗게 내린 곳이니 즉시 알 것이다" 하셨다.
아무리 꿈이며 묵시라고는 하지만 둘에게 동시에 나타난 현상이요, 찌는 듯한 이 삼복되위에 과연 눈이 내렸을까 하는 생각이 들기도 했으나, 날이 새자 즉시 그곳으로 달려가 보니 과연 눈이 하얗게 와 있지 않는가! 그것도 꼭 성당을 지을 장소에만 눈이 내려 있었다. 신기하고도 형언하기 어려운 감동으로 두 부부는 곧 교황 알현을 청해 자초지종을 말씀드리니, 교황도 다른 사제들과 함께 그곳으로 향했다. 이 소식을 듣고 모여든 수많은 군중들도 삼복더위 8월 중에 내린 백설을 보고 이는 거룩한 동정 성모님의 순결을 상징함이라 하며 경탄하면서 감동되어 하느님께 찬미를 드렸다.
이런 경로를 거쳐 세워진 성당이라 처음엔 교황 이름을 따라 '리베리오 성당'이라 불렸고, 그후 예루살렘에서 예수 아기가 누웠던 말구유가 이 성당에 안치된 뒤에는 '말구유의 성모 성당'이라고 불렸으나, 로마의 다른 성모 상당과 구별하기 위하여 '대 성모 성당'(Basilica of Santa Maria Maggiore)이라고 하였다. 그런가 하면 8월 5일 삼복더위 중에 내린 백설을 기념하기 위해 '성모 설지전'(聖母雪地殿)이라고 한다.
그후 이 건물은 5세기에 와서 교항 식스또(Sixtus, 432∼440년) 3세가 확장 개축했다. 교황 그레고리오(Gregorius, 1371∼1378년) 11세 때에 지은 종탑은 로마에서 가장 높은 종탑 가운데 하나다. 성년에만 열리는 성문은 현관 좌측에 있다. 성전 정면의 광장에는 마센찌오(Massenzio)의 바실리카 기둥이 있어 아름다움을 더해 주고 있다.
성전 안에 들어서면 여러 가지 건축양식의 매혹적인 장식들이 우리를 압도한다. 아벤띠노(Aventino) 언덕의 쥬노(Giunone) 신전에서 옮겨온 36개의 기둥 위에 성서를 소재로 한 36개의 아름다운 모자이크를 볼 수 있다. 승리의 아치나 제대 후면의 장식 등에서도 이 설지전의 매력을 느낀다. 여러 가지 조각으로 장식된 바닥은 13세기에 장식된 로마의 어떤 성당보다도 아름답다. 나무로 된 천장은 르네상스 때 너무나도 유명한 안또니오 다 상갈로(Antonio da Sangallo)의 작품으로 15세기말 콜룸부스가 신대륙에서 가져와 아라고나(Aragona)의 페르디난도(Ferdinando) 왕을 거쳐 교황 알렉산델 6세(Alexander, 1492∼1503년)에게 선물한 금으로 도금했다 한다.
중앙제대의 화려한 천개장식은 성 베드로 대성전의 베르니니 작품을 본받아 푸가(F. Fuga)가 만든 것이다. 제대 밑의 동굴경당(Cripta)에는 베들레헴의 예수님 구유가 보존되어 있어, 성탄 때에 따로 구유를 꾸미지 않는다. 여기엔 또 1854년 '성모의 원죄 없으신 잉태' 교리를 선포한 교황 비오 9세(Pius, 1846∼1878년)가 무릎을 꿇고 있다. 제대 위의 모자이크는 5세기의 작품으로 성모님의 생애와 예수님의 어린 시절이 에페소(Efeso)공의회와 관련되어 만들어졌다. 뒷면의 승리의 면류관을 받으시는 마리아의 모습을 그린 아름다운 모자이크는 휠씬 뒤인 13세기에 비잔틴 양식의 영향을 받은 뚜리띠(Turitti)의 작품이다.
중앙제대 양편에 커다란 경당이 둘 있는데, 왼편 것은 까ꥉ라 보르게세(Cappella Borghese)라 하며 교황 바울로 5세(Paulus, 1605∼1621년) 때에 세운 것이다. 이 경당은 로마에 있는 수많은 경당 중에서 가장 화려한 경당이다. 제대 꼭대기의 부각은 17세기 스테파노 마데르노(Stefano Maderno)의 작품으로, 그 유명한 한 여름의 눈의 기적을 그리고 있다.
맞은편 경당은 교황 식스또 5세 때 즉 1585년에 도메니꼬 폰따나가 세운 것으로 성체를 모신 경당이다. 도금한 화려한 제대장식은 스깔쪼(L. Scalzo)가 만들었다.
7) 성 계단 성당 (Scala Santa, 거룩한 계단)
라테란 대성당에서 길 하나를 건너면 예수 그리스도께서 빌라도 총독 앞에 끌려가 매를 맞으시고 재판을 받으실 때, 모욕과 고통을 참으며 오르내리셨다는 28개의 계단을 보존하기 위한 경당이 있다. 이 계단은 바로 예루살렘의 본시오 빌라도 총독관저에 있던 것을 콘스탄틴 대제의 어머니 성녀 헬레나가 옮겨온 것이다.
수세기 전부터 신자들은 이 계단을 무릎을 꿇고 올라간다. 그리스도께서 밟으신 계단을 그의 제자들이 발로 밟기가 황송스러워 그랬을 것이다. 이 경당은 1585년 교황 식스또 5세(1585-1590년)가 세운 것이다.
8) 가다꼼베 (지하 공동묘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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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마는 흔히 지상 로마와 지하 로마가 있다고 한다. 그만큼 옛부터 지하를 개발하였다. 지하도, 지하 무덤들, 수로들, 지표 하단의 건축물, 수조, 갱도, 목욕탕. 이러한 지하구축물의 총 길이는 무려 수 백 Km나 된다고 한다. 이 지하의 도시는 아주 오래 전 다신교를 믿던 이교도 시대까지 거슬러 올라가는데 그리스도교도들이 박해를 피해 이곳에 숨어서 집회도 하고 미사를 지내기도 했기 때문에 오늘날 우리 신자들에게는 매우 의미있는 곳이 된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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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다꼼베(Catacombe)란 안식처란 뜻으로 로마에 있는 가다꼼베는 대부분 크리스찬의 무덤이다. 그러나 가끔 비크리스찬과 유대인들도 있었다. 당시 크리스찬은 부활의 희망으로 그리스도와 같은 방법 즉 아마천으로 싸고 무덤 문을 돌로 막는 방법을 원했었다. 또 이들은 대부분 가난하고 노예들이 많았기 때문에 개인 무덤을 만들수가 없었고 땅도 제한되어 있어 땅속 깊숙이 5-6층 정도의 통로를 뚫고 장사 지내는 방법을 택했다. 이 통로의 총 길이가 약 900킬로미터정도나 되며, 300년 동안 약 6백만명으로 추정되는 인원이 묻혔다.
본래 가다꼼베는 비밀스런 장소는 아니었다 왜냐하면 로마법엔 모든 무덤은 신성 불가침의 장소로 지정되어 있었기 때문이다. 이런 상황 속에서 크리스찬은 땅 속 무덤으로 피신할 수 있었고 때로는 종교예식도 자연스럽게 거행할 수 있었다. 모든 가다꼼베의 구조는 거의 비슷하다. 가운데 곧은 통로가 있고, 그 측면 층층으로 시체를 묻었던 것이다.
많은 가다꼼베 중에서 제일 큰 성 갈리스도 가다꼼베는 3세기부터 크리스찬의 무덤이었으며 많은 교황들이 묻힌 곳이기도 하다. 성 뽄시아노(230-235년), 성 식스또 2세(257-258년)교황 등 9명의 교황과 3명의 주교가 확인되었고 아직 5명의 밝혀지지 않은 교황들이 묻혀 있다.
초세기 교황님들의 소성당(Chapel)도 눈에 띄고, 성녀 체칠리아의 무덤도 내려가다 보면 눈에 들어온다. 음악인들의 주보 성녀인 체칠리아는 뜨라스떼베레(Trastevere)의 자기 집 뜨거운 목욕탕에 가두어 놓는 장시간의 고문을 당했다. 그래도 굽히지 않자 참수형을 받아 순교한다. 성녀의 관은 821년 교황 파스칼 1세(817-824년)의 명으로 뜨라스떼베레의 성녀 체칠리아 성당으로 이장되었는데, 여기에 있는 현재의 석상은 1599년 성녀의 관을 열었을 때, 그 성녀의 몸이 조금도 손상되지 않은 현상을 목격한 스테파노 마데르노(Stefano Maderno)가 남긴 작품으로, 원형은 성녀께 봉헌된 뜨라스떼베레의 성녀 체칠리아 성당에 보전되어 있고 여기의 것은 모조품이다. 성녀는 오른손가락으로 셋, 왼손가락으로 하나를 가리키는데 삼위일체이신 하느님께 신앙고백을 하고 있는 모습이다.
희미한 벽화, 그 밖에 군데군데 떨어져 나가긴 했어도 만찬 장면, 그리스도의 초상화, 비둘기, 어린 양, 물고기, 닻이 달린 십자가(바울로 사도가 많이 사용했다는)... 그리스어, 라틴어 단어들의 파편 등을 볼 수 있다. 이곳 성 갈리스도 묘지는 성 베드로와 바울로 사도의 시체를 임시 대피 시켰던 장소로 믿어진다.
■ 아삐아 가도(街道)의 쿼바디스 성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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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마에서 가장 오랜 역사를 가진 이 길은 가장 유명하고 가장 길고 가장 곧바른 길로서 거의 완벽하게 보존되어 있다. 카라칼라 목욕장에서 시작되는 이 길은 90km의 도로가 직선으로 이어져 테라치나와 이어지고 다시 이곳에서 카푸아, 베네벤또를 거쳐 브린디시 항구에 이르른다. 브린디시는 동양과의 교역이 활발하던 곳이다. |
갈리스도 지하묘지 입구 건너편에 쿼바디스(Quo vadis)성당이 있다. 성전에 의하면 네로(Nero)황제(54-68년)의 크리스찬에 대한 혹독한 박해로 죽음을 피해 달아나 아삐아 가도(Appian Way)를 걸어가던 베드로 사도는 홀연히 나타난 스승 예수를 만나, 쿼바디스 도미네(Quovadis Domine? 주여, 어디로 가시나이까?)하고 물으니, "다시 십자가에 못 박히기 위해 로마로 들어가는 길이다."라고 대답하셨다. 베드로 사도는 부끄러워 즉시 성문 안으로 들어가 체포되어 바티칸 언덕에서 십자가에 거꾸로 매달려 67년경 순교한다. 이런 예수님과 베드로 사도와의 사실을 기념하는 쿼바디스 성당은 아주 조그마하고 볼품은 별로 없다. 성당 안에는 그리스의 발자국이 선명하게 새겨진 돌이 통로 한 가운데 놓여 있다고 한다.
9) 원형 경기장(Colosseum)
콜로세움은 로마 제국시대의 유물 중에서 가장 잘 알려진 로마의 상징으로 통용된다. 원래의 이름은 플라비안 암피테아뜨르(Flavian Amphitheatre)인데, 콜롯세움이란 명칭은 후대에 주어진 것으로, 왜 이렇게 불리게 되었는지는 명백하게 알려져 있지 않다. 다만 원형경기장 근처에 세워졌던 50미터 높이의 거대한(colossal) 네로 황제(54-68년 재위)의 동상(지금은 없어졌지만)으로부터 유래한다고 추정한다. 게다가 로마의 예술에서는 필적할 만한 상대를 찾아볼 수 없는 이 놀라운 건물의 건축가도 알려져 있지 않다. 우리는 오늘날 우리의 눈으로 보는 것 이상은 알지 못한다. <꼴로세움의 자세한 내용을 보시려면 사진을 클릭하세요> |
원형 경기장의 건립연대는 72년에 기공하여 80년경에 개관한 것으로 알려진다. 당시 로마 인구를 120만 명 정도로 추정하는데, 이 건물은 5만 명을 수용할 수 있다니.... 1900년여 년 전에 말이다. 오늘날의 원형 경기장은 부분적으로 파괴되었지만, 네 개의 층에서 네 개의 원주를 아직도 볼 수 있다. 각 층마다 기둥의 양식이 다른데 1층은 도리아식(Doric), 2층은 이오니아식(Ionic), 3층은 고린토식(Corinthian)이다. 단일 건물 안에 이렇게 세 가지 그리스 기둥 양식이 있는 예는 별로 없으리라. 전체 높이는 약 50미터, 타원형 외곽의 직경은 180미터와 156미터다.
원형경기장에서 초대 그리스도교인들이 순교 당했는데, 그때 그리스도교 신앙은 정부의 법에 의해 금지되었으며, 신자로서 잡히면 이곳에서 판결을 받았고, 이 경기장에서 잔인한 방법으로 죽어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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