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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화(江華) - 江을 끼고 있는 강 아래 아름다운 고을
강화도는 제주도, 거제도, 진도, 완도에 이어 우리나라에서 다섯 번째로 큰 섬이다. 남쪽의 마니산 정상에는 단군왕검이 제사를 지내기 위해 마련했다는 참성단이 있으며, 섬의 해안과 강화읍에는 고려시대부터 근대에 이르기까지 숱한 국난을 겪은 역사유적들이 남아 있어 가족단위의 답사 여행지로도 적합하다.
강화 문화관광 http://tour.ganghwa.incheon.kr/
강화8경
1.전등사 2.보문사 3.연미정 4.갑곶돈대 5.마니산 6.광성보, 7.초지진 8.적석사
갑곶돈대(甲串墩臺 제4경)
1866년 10월13일 프랑스군은 삼랑성(정족산성) 전투에서 양헌수 장군의 부대에 패해 간신히 갑곶으로 패주하였다. 이때 강화성 내에 있던 강화동종을 가져가려 하였으나 무거워 가져가지 못하고 성내에 있던 외규장각 도서 345권과 은괴 19상자 외 각종 문화재와 재물을 약탈해갔다.
1970년 훼손된 것을 복원하였으며, 돈대 내에는 고려 때 몽골과 외교교섭을 벌였던 이섭정(利涉亭)이 있고 조선시대의 대포가 그대로 전시되어 있다
곶(串) 바다로 돌출한 육지로, 보다 규모가 크면 반도라 부른다. 육지가 침강하면 골짜기는 만이되고 산줄기가 반도나 곶이 된다. 사취가 바다에 돌출하여 형성되기도 한다.
만(灣) 일반적으로 바다에서 육지 안으로 들어가 있으므로 물결이 잔잔하여 대피항으로 이용되며, 항만으로 발달할 조건도 좋다.
진과 보는 군사상 중요한 지역인 해안변방에 설치하여 외적의 침입을 방어하던 군사주둔 지역입니다. 돈대(墩臺)는 조금 높직한 평지에 초소가 있던 곳을 말합니다. 5진 7보 53돈대
강화 갯벌 및 저어새 번식지
강화 갯벌(천연기념물 제419호)은 우리나라에서 보존 상태가 양호한 몇 남지 않은 갯벌로 경제적 생산성은 물론 자연 정화능력, 해양생태계의 보물창고로서 아주 중요한 곳이다.
강화 갯벌 및 저어새 번식지는 1억 3천 6백만평으로 여의도의 52.7배에 달하여 단일 문화재 지정구역으로는 가장 넓으며, 세계적으로도 가장 우수한 갯벌로 갯벌보존과 저어새의 서식환경을 보호하기 위해 천연기념물로 지정하여 보호하고 있다.
강화갯벌센터 갯벌을 한눈에 내려다볼 수 있는 자연친화적인 통나무로 갯벌센터를 2005년에 설립, 갯벌과 생물, 갯벌의 중요성 등 재미있는 갯벌이야기와 더불어 농게의 힘자랑, 염생식물 관찰, 저어새 관찰 등이 가능하여 갯벌을 체계적으로 전달할 수 있는 교육의 장소로 활용되고 있다.
강화고인돌유적[江華─遺蹟]
강화고인돌(마니산,고인돌)
http://itour.visitincheon.org/utourpia/cybertour/05_01/index.jsp?chk=01
문화재청 세계유산 강화 고인돌 유적 http://www.cha.go.kr/html/heritage/heritage_play07.html
한국 최대의 북방식 고인돌인 강화 지석묘(사적 137)를 비롯하여 내가 지석묘(인천기념물 16), 강화 대산리 고인돌(인천기념물 31), 강화 부근리 점골지석묘(인천기념물 32) 등을 포함하는 강화 고인돌유적은 고려산 기슭을 따라 총120여 기의 고인돌이 분포해 있다.
표고 280m의 높은 곳까지 고인돌이 분포하고 있는 점이 특징이며 탁자식 고인돌이 주류를 이루고 있다. 주로 경제력이 있거나 정치권력을 가진 지배층의 무덤으로 알려져 있다.
한반도에 사람이 살기 시작한 시기는 대략 70만 년 전 구석기시대로 추정된다. 기원전 1000년 무렵에 이르면 원시 농업 경제 사회라 불러할만한 단계의 청동기시대가 시작된다. 청동기는 대부분 ‘지석묘’라 불리는 고인돌에서 출토되고 있다. 고인돌은 말 그대로 ‘돌을 고였다’ 하여 붙여진 이름으로, 청동기시대의 대표적인 무덤 형식이다. 무덤 속에는 주검만을 묻는 것이 아니라 그 안에 토기나 석기, 청동기 등의 다양한 유물을 넣기도 하므로, 무덤은 그 시대의 사회상을 파악하는 데 매우 중요한 유적이 된다.
강화 고인돌문화축제
http://www.ganghwa.incheon.kr/open_content/tour/festival/introduction/dolmencultur.jsp
우리나라 청동기시대의 대표적인 무덤 중의 하나인 고인돌은 강화군이 자랑하는 고대문화를 주제로 한 이색관광축제로 1998년 처음 열렸다. 구석기시대의 유물인 쌍날찍개, 청동기시대 족장의 무덤인 고인돌 등 고대 유적과 유물이 많은 고장의 역사적 특성을 널리 알리는 다양한 행사가 펼쳐진다.
강화 고인돌 식물원 http://www.i-goindol.com/
강화군 농경문화관
강화산성[江華山城]
http://itour.visitincheon.org/popup/popup_flv.jsp?uccfile_src=200908201531000031&title_chk=강화산성
그러나 1270년 다시 개경(開京)으로 천도한 후 몽골의 요청으로 헐어버렸다. 성은 내성, 중성, 외성이 있었는데, 내성은 주위 약 1,200m로 지금의 강화성이다. 중성은 내성을 지키기 위하여 1250년에 축조했고 외성은 중성을 수비하기 위하여 1233년부터 축조하기 시작하였다. 조선 전기에 규모를 축소하여 다시 축성하였으나 병자호란 때 파괴되고, 1677년 강화유수 허질(許秩)이 대대적인 개축을 하면서 고려시대의 내성 규모로 돌성[石城]을 쌓았다.
강화 선원사 http://www.seonwonsa.com/
원래 강화도 성 서문 밖의 대장경판당에 보관되었던 것을 선원사를 거쳐 태조 7년(1398) 5월에 해인사로 옮겨 오늘날까지 이어오고 있다. 현재 해인사 법보전과 수다라장에 보관되어 있는데 일제시대에 조사한 숫자를 보면 81,258장이지만 여기에는 조선시대에 다시 새긴 것도 포함되어 있다. 선원사에는 목탁 소리를 내는 소(우보살)가 있다.
강화역사관 http://museum.ganghwa.go.kr/
http://itour.visitincheon.org/popup/popup_flv.jsp?uccfile_src=200908241841490041&title_chk=강화역사관(강화역사박물관 개관으로 폐관)
강화 은암자연사박물관 http://www.kangwhahiking.com/jayonsa/
자연사박물관에는 세계 각국의 희귀 패류, 곤충(나비)류, 조류, 동물류, 화석류 등과 살아있는 파충류 및 애완동물들을 관람객에게 보여주게 된다.
은암자연사 박물관은 현재 강화군 송해면 양오리에 있으며, 건축 연면적 7218㎡에 지하 1층, 지상2층 규모로 세계 각국의 희귀 패류, 곤충(나비)류, 조류, 동물류, 화석류와 살아있는 파충류 및 애완동물 등 1만 여점이 전시돼 있고 이외에도 20여 만점을 소장하고 있다.(옛 양당초등학교)
강화 평화전망대
http://itour.visitincheon.org/utourpia/cybertour/09_01/view.jsp?bbsno=4153&bbs=booumup20110401
본 전망대는 전방으로 약 2.3㎞ 해안가를 건너 예성강이 흐르고 우측으로 개성공단, 임진강과 한강이 합류하는 지역을 경계로 김포 애기봉 전망대와 파주 오두산 통일전망대가 위치해 있으며 좌측으론 중립지역인 나들섬 예정지와 연백군으로 북한주민의 생활모습과 선전용 위장마을, 개성공단 탑, 송악산, 각종 장애물 등을 조망할 수 있다.
고려궁지
http://itour.visitincheon.org/popup/popup_flv.jsp?uccfile_src=200908241914330014&title_chk=고려궁지
광성보(제6경)
이곳은 사적 제227호. 강화해협을 지키는 자연 지형이 험한 요새로 강화 12진보의 하나이다. 고려가 몽골의 침략에 대항하기 위하여 강화로 천도한 후에 돌과 흙을 섞어 해협을 따라 길게 쌓은 성터이다.
강화도의 5진7보53돈대 가운데 규모가 가장 큰 곳이다. 이곳은 염하에서 물목이 가장 좁은 곳이기도 하다. 건너편
어재연 장군의 제사 신미양요 당시 총기 한 자루 없이 미군과 싸워 장렬히 전사한 어재연 장군의 제사에는 늘 검은색 돼지를 올린다. 한번은 흰 돼지를 잡으려고 했는데 흰 돼지가 저절로 죽고 잡으려던 사람 꿈에 꼭 까만 돼지를 잡으라는 계시가 있었다고 합니다. 흰 돼지는 서양 사람 색깔이니 제물로는 적합하지 않다는 것입니다
신미양요[辛未洋擾] 1871년(고종 8) 미국이 1866년의 제너럴셔먼호(號) 사건을 빌미로 조선을 개항시키려고 무력 침략한 사건
교동향교[喬桐鄕校]
http://itour.visitincheon.org/popup/popup_flv.jsp?uccfile_src=200907061726470026&title_chk=교동향교
고려 충렬왕 12년(1286) 문성공 안향(1243∼1306)이 원나라에 갔다가 돌아오는 길에 공자상을 들여와 이 향교에 봉안하였다고 전한다.
건물로는 대성전(大成殿) ·동무(東廡) ·서무(西廡) ·명륜당(明倫堂) ·제기고(祭器庫) ·주방(廚房) 등이 있다. 창건 당시 화개산(華蓋山) 북쪽에 있던 것을 조선 중기에 현재의 위치로 옮겼으며 1980년 복원되었다.
건물로는 대성전 ·동무 ·서무 ·명륜당 ·제기고 ·주방 등이 있다. 창건 당시 화개산 북쪽에 있던 것을 조선 중기에 현재의 위치로 옮겼으며 1980년 복원되었다. 1966년에 중수하였다.
대성전 안에는 5성(五聖)·송조2현(宋朝二賢) 및 우리 나라 18현(十八賢)의 위패가 봉안되어 있다.
덕진진[德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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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66년 병인양요 때는 양헌수(梁憲洙)의 부대가 밤의 어둠을 타서 이 진을 거쳐 삼랑성(三郞城:정족산성)으로 들어가 프랑스군을 격파하였고, 1871년 신미양요 때는 J.로저스 중장이 이끄는 미국 극동함대와 이곳에서 치열한 포격전을 벌였다. 그러나 초지진(草芝鎭)에 상륙한 미국해병대에 의하여 점령당하는 비운을 맞았다.
마니산(摩尼山 제5경)
마니산(마니산,고인돌)
http://itour.visitincheon.org/utourpia/cybertour/05_01/index.jsp?chk=01
"마니"는 범어로 탁한 것을 맑게 하여 재앙을 물리치는 여의주를 뜻 한다고 한다. <마니산>의 원래 이름은 우두머리란 뜻의 <두악>으로 고려사, 세종실록지리지 등에 기록되어 있으며, <마리>는 머리를 뜻하며 민족의 머리로 상징되어 민족의 영산으로 불리어 오고 있다.
마니산 산정에는 단군왕검이 하늘에 제를 지내기 위해 마련했다는 참성단(塹城壇, 사적 제136호)이 있다. 높이 5m로 자연석을 쌓은 것인데, 기단(基壇)은 지름 4.5m의 원형이고 상단은 사방 2m의 네모꼴로 되어 있다. 이 단의 축조 연대는 아직까지 밝혀지지 못하고 있어 확실한 것은 알 수 없으나 4000년을 넘는 유물일 것이다.
또 그 위치나 구조로 보아 천문·관상대와 비슷하므로 후세에 와서 이를 병용하였으리라 생각된다. 고려 시대에도 왕과 제관이 찾아가 하늘에 제를 올렸고 조선 시대에도 제를 지냈다고 전해진다. 단역은 수천 년 동안 계속 수축되어온 흔적이 있다. 정확한 수축 기록은 1639년(인조 17)과 1700년(숙종 26)이다. 현재 이곳은 성역(聖域)으로 보호되어 있으며 매년 개천절에는 제전이 올려진다.
마니산 참성단(塹城壇:사적 136)
보문사[普門寺 제2경] http://www.bomunsa.net/
선덕여왕 4년(635) 회정대사가 금강산으로부터 이곳에 와서 처음으로 절을 세우고 보문사라 하였습니다. 창건 당시 관세음보살이 상주한다는 산의 이름을 따서 낙가산이라고 하고, 관세음보살의 원력이 광대무변함을 상징하여 보문사라 이름 짓고 지금에 이르고 있습니다. 이처럼 산과 절의 이름이 모두 관세음보살을 상징하고 있어 보문사가 관음도량임은 창건의 역사부터 시작이 되었다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보문사는 우리나라 3대 관음성지로서 절을 창건 후 14년이 되던 해에 고씨성을 가진 어부가 바닷가에서 불상과 나한상 22구를 그물로 낚아 올려 절의 우측 석굴에 봉안하였다고 합니다. 입구에 3개의 홍예문을 설치하고 천연동굴 내에 반월형 좌대를 마련하고 탱주(撑柱)를 설치하였는데, 탱주 사이에 22개의 감실(龕室)이 있어 거기에 석불을 안치하였다. 이 석실은 지방유형문화재 제57호로 지정되어 있다
또한 상단 뒤편으로 총 3,000분의 옥부처님이 모셔져 있어 법당에 장엄함을 더 하고 있습니다.
삼존불 위로는 아름다운 닷집이 조성되어 있으며 천정의 좌우에 각 하나씩 용상(龍像)이 지나다니고, 또 다른 한 쌍의 용상이 전각의 안에서 밖으로 머리를 내미는 형태로 배치되어 있습니다.
머리에는 커다란 보관을 쓰고 있으며 얼굴은 네모진 모습이다. 얼굴에 비해 코는 넓고 높으며, 귀는 투박하고 목은 매우 짧게 표현되었다. 옷은 각이 진 양 어깨를 감싸고 있으며, 가슴에는 큼직한 卍자무늬가 새겨져 있다. 손에는 깨끗한 물을 담은 병을 들고 연꽃무늬 대좌 위에 앉아 있으며, 불신 뒤에는 부처의 몸에서 나오는 빛을 형상화한 광배가 있다.
이 불상은 문화재적인 가치보다는 성지로서 더 중요시되고 있는데, 이 석불에서 기도를 하면 아이를 가질 수 있다고 하여 찾는 여인의 발길이 그치지 않는다고 한다.
보문사의 계단은 상당히 가팔랐고 자주 찾던 육영수여사의 생일에 맞춰 418개로 설치했다는 계단은 두고두고 말이 많아 나중에 맨 아래애 계단 하나를 더 끼워 넣어 419로 만들었다고 한다.
삼랑성[三郞城] 길상면 온수리 산 41
http://itour.visitincheon.org/popup/popup_flv.jsp?uccfile_src=200910151909500009&title_chk=삼랑성(종해루)
이 성에는 동.서.남.북에 4대문이 있고 남문을 제외한 3개 문에는 문루가 없었다 하나 영조때에 남문에 문루를 건립하였다 한다. 남문의 문루(종해루)가 무너져 없어진 것을 1976년 현재와 같은 모습으로 복원하였다.
병인양요[丙寅洋擾] 1866년(고종 3) 대원군의 천주교도 학살 ·탄압에 대항하여 프랑스함대가 강화도에 침범한 사건.
삼랑성 역사문화축제
삼랑성(사적 130)의 역사적 중요성을 재조명하고 병인양요 당시 프랑스 해군이 약탈해 간 외규장각 도서반환을 범국민 운동으로 승화시키기 위해 2001년부터 열리고 있다. 삼랑성 역사문화축제 조직위원회가 주최하고, 강화군·인천광역시·한국관광공사·전등사가 후원한다.
성공회 강화성당 강화읍 관청리 250
건립자는 한국 성공회 초대 주교인 존 코르페(한국명 고요한)이다. 특히 서양식 장식이 거의 없는 순수한 한식 목조건물이면서 지붕과 내부구조는 한국적 건축양식을 많이 가미하였기 때문에 그리스도교의 한국 토착화를 뚜렷하게 상징하는 듯하다. 최초 한옥성당
아르미애월드
아르미애란 쑥의 학명인 Artemisia의 첫 자와 한자어 애(艾)를 조합한 특구의 대표브랜드로 여성에게 특히 좋기로 유명한 약쑥으로 아름다움을 추구하고자 한다는 또 다른 의미를 지닙니다.
강화약쑥테마 체험공간인「아르미애월드」를 찾아가면 랜드마크격인「약쑥웰가」가 제일 먼저 눈에 띕니다.
애기봉[愛妓峰]
정상 전망대에서 망원경으로 북한의 선전마을과 송악산 등을 볼 수 있어 관광객과 실향민들이 많이 찾고 있으며 1993년에는 실향민들을 위해 망배단이 세워졌다. 크리스마스 때는 북녘을 향해 대형 트리를 세우고 성탄 축하예배를 드리며 석가탄신일에는 법회가 열리는 등 각종 행사가 열린다. 2000년 현재 군 주둔지역으로, 출입통제소에서 신고서를 작성해야 출입할 수 있기 때문에 주민등록증을 지참해야 한다.
연무당 옛터
고종 7년에 창건된 연무당은 지금의 농협 자리 서쪽에 있었는데, 비좁아 동소문 밖으로 옮겼다가 내성서문 남쪽에 당을 세우고 그 전면에 조련장이 마련되어 있었다. 이 연무당은 병자수호조약을 체결한 곳으로서 우리 민족의 암울했던 과거사를 잊지 않기 위해 이곳에 기적비가 세워져, 민족 자주의식을 드높이 간직해야 한다는 경고를 하고 있다.
연미정[燕尾亭 제3경] 강화읍 월곶리 242
한강과 임진강이 합류하여 한 줄기는 서해로, 또 한 줄기는 강화해협으로 흐르는데 모양이 마치 제비꼬리 같다 하여 연미정(燕尾亭)이라 이름 붙었다 한다. 조선시대 인조 5년(1627) 정묘호란때 인조가 청과 굴욕적인 형제관계의 강화조약을 맺었던 곳이기도 하다, 고려 고종(재위 1213∼1259)이 사립교육기관인 구재학당(九齋學堂-私學)의 학생들을 이곳에 모아놓고 공부하게 했다는 기록이 있다. 또한 조선 중종 5년(1510) 삼포왜란 때 큰 공을 세운 황형에게 이 정자를 주었다고 한다.
옥토끼우주센터
2007년 5월에 문을 연 옥토끼우주센터는 학습, 탐험, 놀이가 집합된 체험형 테마파크이다.
외규장각[外奎章閣]
문화재청 세계기록유산 조선왕조 의궤 http://www.cha.go.kr/html/heritage/heritage_play14.html
국가기록유산 의궤 http://www.memorykorea.go.kr:7779/mov/uigwe.html
외규장각에는 어보(御寶), 교명(敎命), 어책(御冊), 어필(御筆), 지도, 왕실이나 국가 주요 행사의 내용을 정리한 의궤(儀軌) 등 왕실 관련 자료들이 집중적으로 보관되게 되었으며, 철종 연간에 파악된 외규장각 소장 도서는 약 6천권 정도에 이르렀다.
외규장각 의궤는 대부분 국왕의 열람을 위해 제작한 어람용(御覽用)이라는 점에서 더욱 주목된다.
1866년(고종 3) 병인양요 때 프랑스군이 강화도를 습격하면서 297권의 왕실의 주요행사를 기록한 의궤 191종(유일본 30종 포함) 297책을 포함한 도서 359점을 약탈했다. 나머지는 불에 타 없어졌다.
1975년 프랑스국립도서관의 촉탁 직원으로 일하던 박병선 박사가 도서관에 조선시대의 도서가 보관되어 있음을 발견하고 목록을 정리하여 그 존재가 알려졌다. 2010년 11월 12일 G20정상회의에서 양국의 대통령 간에 외규장각 도서를 5년마다 계약을 갱신하는 임대형식으로 대여하기로 합의하였고, 이에 따라 2011년 4월부터 약탈해 간 294권의 조선왕실 의궤를 포함한 전체 297권의 외규장각 도서가 4차례에 걸쳐 국내로 돌아오게 되었다. 고려궁지 내에는 외규장각이 있었다.
용흥궁(龍興宮)
조선 제25대 왕인 철종(재위 1849∼1863)이 왕위에 오르기 전에 살던 집으로 철종이 왕위에 오르자 강화유수 정기세가 건물을 새로 짓고 용흥궁(용이 일어난 곳) 이라 이름을 붙였다.
용흥궁은 청덕궁의 연경당, 낙선재와 같이 살림집의 유형을 따라 지어져 소박하고 순수한 느낌이 든다. 경내에는 철종이 살았던 옛 집임을 표시하는 비석과 비각이 있다.
용흥궁 찬우물 약수터 강화도령 원범이는 조선 24대 헌종의 뒤를 이어 왕으로 추대되어 강화를 떠났는데 훗날 철종으로 불리게 된다.
원범은 14살에 강화로 부친과 함께 유배되어 왔다. 강화도령은 천주교 박해에 희생으로 부모님을 모두 잃고 홀로 19살까지 강화도에 숨어살았다. 그때 위로를 해주고 삶의 희망을 심어준 아가씨가 양순이다. 이들은 강화읍 내수골 도령네 집에서 멀리 떨어진 찬우물에서 사랑을 확인하곤 했단다.
그러나 나뭇꾼 강화도령과 양순이는 못내 사랑을 이루지 못하고 헤어져야만 했단다. 임금으로 등극한 강화도령은 찬우물 사랑을 잊지 못해 “강화도가 좋았다”는 말을 틈만 있으면 했다고 전하며 양순이는 임금 되신 도령과의 사랑을 정절로 지키며 홀로 일생을 살았다고 전한다.
원래 안채와 사랑채를 좌우로 둔 H자형 구조의 건물이었으나 지금은 행랑채 일부가 헐려 몸체만 남아 있다. 집 뒤에는 염씨 집안의 묘가 있다.
일반 사대부 집의 웅장한 규모와는 다르게 법도에 맞도록 고졸(古拙)하게 지은 건물이이어서 양반가옥에서 볼 수 있는 기품과 화려함은 없으나 단아하고 고풍스럽다.
적석사(積石寺 제8경)
전등사[傳燈寺 제1경] http://www.jeondeungsa.org/
http://itour.visitincheon.org/popup/popup_flv3.jsp?no=2620&title_chk=전등사 템플스테이
전등사는 고구려 소수림왕 11년(381년)에 아도화상이 처음 창건하고 진종사(眞宗寺)라 이름 지었습니다. 그 후 고려 충렬왕비 정화궁주가 이 절에 귀한 옥등을 시주했다 해서 전할 전, 등불 등(傳燈寺)자를 써서 전등사로 개명한 사찰입니다. 현존하는 국내 사찰 중 가장 오랜 역사를 가진 전등사
백자 연봉(白磁 蓮峯)은 다른 건축에선 한 번도 보지 못했던 것이다. 까만 기와들 사이에서 문득 기러기 떼가 날아가는 듯한 착각을 느낀다지붕 위 기왓골 끝에 백자로 만든 연봉오리 장식이 올려져 있다. (기와고정못의 부식을 막기 위해 덮어씌우는 꽃봉오리 모양의 물건)
그런데 불사가 마무리될 무렵 도편수가 주막으로 찾아가보니 주모는 자취를 감추고 말았다. 이에 도편수는 배신감과 분노를 느껴 그 주모를 생각하면서 대웅보전 네 군데 처마 밑에 추녀는 떠받들고 있는 벌거벗은 여인상을 만들었다. 나쁜 짓을 경고하고 죄를 씻게 하고자 하는 의미가 담겨 있다고 한다.
드무 화재를 막는 그릇으로 큰 가마솥처럼 생겨서 일종의 방화전으로 목조로 지어진 궁궐이나 사찰에 불이 날 경우 방화에 사용할 물을 담아두던 용기란 것을 알게 되었다. 불을 잡아먹는다는 전설의 짐승인 해태를 조각하여 세우고, 전각 월대(섬돌)의 모서리에 물을 담은 '드무'를 놓아 화마(火魔)가 물에 비친 제 꼴에 놀라 도망가도록 한 것 등이 그렇다.
형태가 장중하고 조각이 웅경하며 소리도 청아하다. 전체적인 형태에서 개성 연복사종을 연상케 하며 중국종의 특징을 볼 수 있다. 명문(銘文)으로 보아 1097년 중국의 허난성[河南省] 백암산 숭명사의 종임을 알 수 있다. 그러나 어떤 경로로 전등사에 전해졌는지는 알 수 없다.
정수사[淨水寺] http://www.jeongsusa.or.kr/
http://itour.visitincheon.org/popup/popup_flv.jsp?uccfile_src=200908202039410039&title_chk=정수사
정족산사고[鼎足山史庫] 길상면 정족산성 내 전등사 부근
초지진(草芝鎭 제7경) 사적 제225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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함허동천[涵虛洞天]
마니산 서쪽 기슭에 펼쳐져 있으며, 빼어난 산세를 끼고 곳곳에 거대한 너럭바위들이 흩어져 있다. 이 바위들을 넘나들며 흘러내리는 물줄기가 장관을 이루고, 특히 계곡 한 켠에 200m에 달하는 암반이 넓게 펼쳐져 있어 마니산의 절경으로 꼽힌다.
계곡 아래에는 한국 최고의 야영장으로 꼽히는 함허동천 야영장이 자리 잡아 여름철이면 캠핑을 즐기는 사람들로 북적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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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화개천대축제(開天大際)
단군왕검께서 최초의 민족국가 건국을 기념하는 국경일인 개천절을 맞이해서 강화군만이 지닌 마니산 참성단을 소재로 자라나는 청소년과 우리 국민들에게 신념있는 국가관 및 민족정체성을 확립하도록 하여 민족 자존심과 애국심을 고취하는 행사이다.
낙조봉 낙조대 일몰
적석사 낙조봉에서 바라보는 일몰 또한 장관을 연출 한다. 해거름에 낙조봉에 서면 석모도 앞 잔잔한 바다를 붉게 물들이며 떨어지는 해넘이를 볼 수 있는데 강화8경 가운데 하나로 꼽힌다.
고려산(高麗山)은 고려시대 때 몽고의 침략을 받아 강화도로 도읍을 천도한 후 고려산이라 부르게 되었는데 고려산이라는 이름은 송도의 고려산에서 이름을 따온 것이라 한다.
고려산은 고구려 장수왕 4년(416년)에 창건됐다는 천년고찰 백련사와 적석사를 비롯해, 고구려 대막리지인 연개소문이 고려산 치마대(馳馬臺)에서 말을 타며 무예를 닦고 말에게 물을 먹였다는 전설이 있는 오련지(五蓮池)가 있다.
단군신화(檀君神話) 우리나라 최초의 건국 신화(建國神話), 하늘에 사는 환인(桓因)의 아들 환웅(桓雄)은 인간 세상에 내려가 인간들을 선하게 다스리고 싶어 하였다. 그리하여 환인의 허락을 받고 비, 바람, 구름을 다스리는 신(삼위 태백 : 풍백, 우사, 운사)과 3000명의 무리를 이끌고 태백산(지금의 묘향산)으로 내려와 신시를 열고, 인간을 널리 이롭게 한다는 정신으로 인간들을 다스렸다. 그러던 어느 날, 곰과 호랑이가 찾아와 인간이 되기를 간절히 원하자 쑥과 마늘을 주며 이것만을 먹으며 100일 동안 굴 속에서 정성스럽게 기도를 드리면 인간이 될 수 있다고 하였다. 이에 곰은 끝까지 버티어 아름다운 여인으로 변하였고, 환웅과 결혼하여 아들을 낳았는데, 이가 단군왕검이며 아사달을 도읍지로 세운 나라가 고조선이다.(BC 2333년)
강화 맛집 편가네 된장 http://www.pyungane.com/
전통장 맛을 제대로 살린 집이다. 이곳은 강된장의 자작한 형태를 살린 강된장 비빔밥이 대표 메뉴로 속성장의 특성을 잘 살렸다.
강화 새우젓 국내 생산량의 70%를 차지할 정도로 품질이 우수하다. 육젓은 6월에 수확한 산란기의 새우로 담그며, 새우젓 가운데서 가장 상등품으로 여겨진다. 장기간 보관을 하기 때문에 다량의 소금을 살포하지만, 가을에 잡히는 추젓은 소금이 오젓, 육젓보다는 적게 들어간다. 김장용으로는 육젓이 가장 좋으며 오젓이나 추젓은 반찬으로 좋다. 광천읍의 젓갈 상가는 광천의 토굴에서 숙성시킨 새우젓이 특산물이다. <강화도새우젓축제>
강화해수랜드
강화해수랜드의 해수는 인체가 생명을 유지하는데 없어서는 안 되는 미네랄이 골고루 함유되어 있으며 몸과 해수의 염도 차이를 이용한 삼투압 작용으로 인하여 몸속의 노폐물은 쉽게 배출되고 필요한 광물질은 효과적으로 흡수되어 신진대사, 혈액순환을 도우며 살균, 해독작용으로 인하여 관절염 신경통, 아토피성 피부질환 등 피부미용에 탁월한 효과가 있다.
선원사지[仙源寺址]
사적 제259호로 지정되었다. 1232년(고려 고종 19) 최이(崔怡:최우)가 호국사찰로 창건하였다. 여기에 대장도감(大藏都監)을 설치하여 현재 합천 해인사에 있는 고려대장경 목판을 만들어 보관하였다. 고려시대에는 순천 송광사(松廣寺)와 더불어 2대 선사(禪寺)였으나, l398년(태조 7) 훼철되어 그 유지(遺址)조차 찾지 못할 정도로 폐허가 되어버렸다.
손돌목돈대(孫乭─墩臺)
인천광역시 강화군의 길상면 덕성리와 경기도 김포시 대곶면 신안리 사이의 염하 가운데에 위치한다. 이곳은 염하의 수로 폭이 좁아지면서 물살이 험하고 소용돌이가 잦은 것으로 알려져 있다. 조선 시대에는 삼남지장의 세곡미를 운반해 오던 조운선이 수시로 난파되었던 곳이기도 하다. 『강화부지』에 "물 흐름이 빠르고 격렬해 아주 위험한 곳으로 이름이 높다. 삼남의 선박이 이곳으로 모인다. 한양으로 가려는 자는 모두 그렇다."고 기록되어 있다. 『해동지도』에도 지명이 기입되어 있다. 전설에 의하면 고려 시대의 한 왕이 피난을 위해 손돌이라는 뱃사공에 의지하여 이곳을 지났다고 한다. 그런데 갑자기 물살이 위태롭게 움직이는 것을 보고 왕이 손돌을 의심하여 참수하였는데, 손돌은 죽음에 직면하면서도 "바가지(표주박)를 물에 띄우고 그것을 따라가면 안전하게 지나갈 수 있다."고 말했다고 한다. 손돌의 말대로 하여 안전하게 이곳을 지난 왕은 자신의 잘못을 뉘우치고 손돌의 넋을 위로하며 장사를 지냈다고 한다. 손돌의 무덤이라 전하는 곳이 김포시 대곶면 신안리에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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