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전의 뿌리를 찾아서
아침 일찍 집사람이 싸준 김밥과 물통이 든 가방을 둘러메고 차를 몰았다. 대전에 살면서도 역사의 숨결이 흐르는 대전의 진산을 멀리 했었다. 대전 시민으로, 대전의 교사로서 아이들과 학부형 앞에서 당당하자고 집중 탐구한 자료를 확인하고자 현장답사에 나섰다. 가깝기는 해도 계족산과 계족산성을 둘러보려면 서둘러야 했다.
시내에서 가까운 대덕구 읍내동 경부고속도로 지하도를 통과해 제월당(현종 2년 송규림선생이 지음) 앞을 지나 오르는 길을 택했다. 커다란 둥구나무의 시원한 그늘이 걸려있는 개울엔 물소리가 청량했고 다락 논엔 길게 뻗은 벼 잎들이 햇빛에 빤들거리며 싱싱했다.
태양의 따가운 빛은 모자로 가렸지만 땅에서 품어대는 열기는 벌써 턱까지 차오르고 있다.
평소 멀리서 들려오는 매미소리는 시원스런 맛이 있었건만 말매미, 털매미, 찌매미, 매엄매미 쓰름매미와 이름도 알 수 없는 매미들이 제각기 울어대는 소리가 오늘따라 시끄럽게 들리고 있으니 이상한 일이로다.
별로 높아 보이지 않는 산인지라 가소롭게 생각하고 속도를 냈으나 산은 결코 호락호락하지 않았다. 등줄기에 땀이 흘러내리고 앞가슴엔 송골송골 맺힌 땀방울이 계곡으로 모여 흐른다. 솔잎을 씹으며 두 번을 쉬어 정상에 올라가는 동안 땀으로 멱을 감았다.
모자와 가방을 벗어 놓고 옷깃을 풀어 제쳤다. 상큼하고 시원한 바람이 확 밀려오니 일순 소름이 돋고 서늘해져 정신을 맑게 한다. 이 맛에 겨워 '야-호! 야-호!'를 목청 것 내지르는 것일 거다.
그러나 시원한 맛도 잠시, 대전 시내를 내려다보지 않으면 산 정상에 와있는 것인지 구별이 안 된다. 산마루에 세워진 커다란 정자와 화장실을 어쩜 이리 잘도 지어 놓았단 말인가? 대전의 성스런 산에다가.
우리 민족은 예로부터 하늘을 숭배하며 하늘님의 정기가 서려 있는 산 아래 성스런 땅에 자리하여 살아 왔다. 하늘의 아들 환웅은 햇빛이 가장 멀리 비치는 아사달 신단수에 고조선의 터전을 마련했다.
한밭(대전)은 한수 한강, 북한산 등에서와 같이 크고 높고 신성하며 환한(밝은) 들이란 뜻에서 이 땅에 살았던 조상들이 ‘한밭’이라 했던 것을 한문화 된 것이 대전(大田)이다.
대전의 밝산 계족산(鷄足山)
회덕 신탄진 동면에 걸쳐있는 이 산은 계족산성, 계족산 봉수, 비수재, 백달산, 성재, 봉우재로 불리기도 했다.
계족산이 있는 회덕은 백제 땐 우술군(雨述郡), 통일 신라 땐 비풍군(比豊郡), 고려 땐 회덕현(懷德縣)으로 변했다. 우(雨)는 비를 뜻하고 비는 볕(햇빛)을, 풍(豊)은 술(西豊)의 약자로 ‘술’의 뜻이 있어 수리(峰)를 음차한 것이며 볕수리의 뜻을 갖고 있어 볕이 밝은 봉우리가 있는 마을이란 데서 붙여진 한자식 이름들이다. 그리고 회덕(懷德)의 회(懷)는 훈이 ‘배’로 ‘볕’을, 덕(德)은 훈이 ‘바르’라는 뜻도 있어 ‘벌’을 나타내 ‘빛이 밝게 비추는 고장’을 뜻한다.
계족산(鷄足山)의 계(鷄)는 새를 뜻함으로 ‘새 발’이 된다. 이는 새복-새밖-새벽을 의미하며 동이 트는 밝은 곳을 말한다. 새재를 조령(鳥嶺)이라 하는 것처럼 새벽이 오는 밝은 산, 백달산을 한자화한 것(鷄足山)이라 볼 수 있다. 이 산 아래엔 송 씨들이 많이 사는 곳이라 붙여진 송촌(宋村)동을 옛날에는 백달(白達)촌 이라 한 것을 보아도 이를 뒷받침한다.
이런 역사적 의미로 보아 대전의 모체는 회덕이며 한밭의 주산은 계족산이라 할 수 있다. 이 산을 오르내리는 저 사람들에게 계족산의 의미를 알리는 안내판이나 세웠더라면 산에 오른 느낌이 좋아 저렇게 함부로 쓰레기를 버리지는 않았을 것이란 생각이 든다.
사통팔달 막힘이 없어 전망이 시원하다. 대전 시내가 한눈에 들어와 높고 낮은 건물들이 반짝이고 있다. 고구려 신라의 침입을 막아준 대전의 지킴이 수리들이 올망졸망 금실금실 동남쪽 식장산으로 움직인다.
저만큼 먼발치에 계족산성이 내려다보인다. 등산화 끈을 조이고 서둘렀다. 언제나 그렇듯 마음이 조급하면 느낌이 없다. 여행은 여유로운 마음으로 세월이 네월이를 잊고 떠나야 하는 것이다.
산등선을 오르내리며 계족산성에 이르렀다.
1300여 년 전, 서기 660년 신라와 당의 연합군에 의해 백제가 멸망한 후 나라 잃은 백제사람 들은 곳곳에서 봉기했으며 당과 신라에 대한 항전은 백제인의 애국애족 정신을 잘 드러낸 투쟁사였다.
신라의 기운이 쇠잔해 지자 궁예와 견훤의 옛 백제와 고구려국 복원으로 이 땅은 다시 처절한 전쟁터로 변하게 된다. 금강변과 계족산에서 식장산을 잇는 산등선에는 신라군과 고구려군을 방어하기 위한 수많은 산성들을 쌓았다. 한밭 땅을 둘러싸고 있는 산과 계곡엔 산성들이 즐비하다. 동쪽에만도 노고성, 덕고성, 성치산성, 계족산성, 개머리산성, 질현성, 고봉산성, 식장산의 만경대산성, 보문산성 등 그 수를 말할 수도 없을 정도니 대전은 산성으로 둘러싸인 요새였던 것이다.
이 땅은 백제국의 최전방으로 신라와 고구려의 국경과 맞다있어 국방의 요충지이며 문화, 문물 교류의 관문 이였기에 전쟁이 끈일 날이 없었다. 많지 않은 이 땅의 주인들은 일하면서 싸우고 성 쌓아 나라를 지키는 호국열사들 이었던 것이다.
파란 담쟁이 넝쿨 잎에 가리어진 성벽 돌, 까만 이끼가 덕지덕지 붙어 굳어버린 돌 틈에서 숨결이 들린다. 소리가 들린다. 백제인들의 다급한 숨소리가. 승리의 함성이!
별다른 속을 넣지 않고 둘둘 마라 썰지 않은 통김밥을 들고 오이를 베어 물듯 한 입 베었다. 아삭아삭한 단무지와 오돌한 밥알 씹히는 맛이 꿀맛이다. 평소 입맛이 까다로워 밥투정이 심하다고 집사람한데 핀잔을 듣지만 목구멍 가득 정신없이 넘겼다.
상황에 따라 적응하는 것일까? 마음의 변덕일까? 밥맛도 입맛도 시끄럽게 들린 매미 소리도 더위도 모두가 내 탓이로다. 여름은 더워야 식물이 잘 자라고, 열매는 잘 열리는 때인지라 ‘여름’이라 했으니 ‘그저 그러려니’하면 될 것을 덥다고들 짜증이다.
오를 때 시끄럽게 들렸던 매미소리를 사랑을 구애하는 애절한 호소로 받아들이며 둥구나무 밑을 흐르는 물에 발을 담갔다. 그 시원함이 머리끝까지 올라 소름이 돋는다.
저마다 거리낌 없이 내지르는 매미들의 불협화음이 점점 높아간다. 도심의 시끄러움이 매미소리에 묻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