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3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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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관 (本貫) 및 시조 (始祖) 의 유래 靑松 沈氏 는 조선시대 문과 급제자 224명, 알림 15명, 문형(文衡: 大提學) 2명, 왕비 3명, 부마 4명을 배출하여 조선 10대 벌열(閥閱)의 하나로 꼽히며, 풍산 심씨의 알림 2명을 제외하고 전부 청송 심씨에서 나왔다. 청송 심씨의 시조는 고려 시대 위위시승(衛尉寺丞)을 지낸 심홍부(沈洪孚)이며, 그의 증손인 고려말의 문하시중 심덕부(沈德符)와 전리판서(典理判書) 심원부(沈元符) 형제 대에서 경파(京派)와 향파(鄕派)로 크게 갈린다. 경파인 심덕부는 조선 개국 후에 좌의정을 지내고 그의 후손은 대대로 서울에 살면서 벼슬을 지냈으나, 향파인 심원부의 자손들은 고려가 망하자 새 왕조의 벼슬을 거부하고 두문동(杜門洞)에 들어간 심원부의 유훈을 지켜 대대로 고향에 살면서 벼슬을 멀리하였다. 경파는 ‘서울집’이라고도 부르는데, 심덕부의 아들 7형제에서 도총제공파(都摠制公派)·판사공파(判事公派)·성주지사공파(成州知事公派)·인수부윤공파(仁壽府尹公派)·안효공파(安孝公派)·청원군파(靑原君派)·동지총공파(同知摠公派)의 7파로 갈라진다. 그 중에서도 넷째 심징(沈澄)과 다섯째 심온(沈溫)의 자손이 크게 번창하였다. 특히 심온은 세종의 국구(國舅)로서 영의정을 지냈으며, 여섯째 심종(沈淙)은 태조 이성계의 부마가 되었다. 그러나 심온은 상왕인 태종에게 사사 당하였다. 그의 작은아들 심회(沈澮)도 영의정을 지냈는데 심덕부까지 넣으면 3대가 영의정을 지낸 셈이다. 심회의 후손에서 알림 8명, 대제학 2명, 왕비 2명, 부마 1명을 냈으며, 심징의 후손에서 영의정 1명, 부마 2명을 냈고, 심온의 큰아들 심준(沈濬)의 후손에서 영의정과 좌의정이 1명씩 나왔다. 심회의 증손 심연원(沈連源), 심통원(沈通源) 형제가 각각 영의정과 좌의정을 지내 형제상(兄弟相)으로 이름났다. 심연원의 아들 심강(沈鋼)은 명종의 국구, 여섯째아들 심충겸(沈忠謙)이 병조판서를 지냈으며, 그의 아들 심열(沈悅)은 인조 때 영의정을 지냈다. 심열의 현손 심호(沈浩)는 경종의 국구, 심연원의 둘째 아우 심봉원(沈逢源)의 손자 심희수(沈喜壽)는 선조 때 대제학과 좌의정을 지내고 청백리에 올랐다. 심의겸(沈義謙)은 영의정 심연원 의 손자이며 명종비 인순 왕후(仁順王后)의 동생으로 김효원(金孝元)과 함께 동·서 분당(東西分黨)의 발단이 된 장본인이다. 심씨는 선조 때를 고비로 하여 사색 당쟁의 주역 또는 조역으로 등장하였다. 동·서 분당은 직접적으로는 선조 때 심의겸과 김효원 두 사람의 반목 대립에서 빚어졌지만, 그보다 앞서 성종 때 비롯된 훈구파(勳舊派)와 사림파(士林派)의 대립 갈등과 연산군에서 명종에 이르는 약 50년간에 네 차례에 걸쳐 일어난 4대사화(四大士禍)에서 비롯되었다. 김효원이 서울의 동쪽(乾川洞)에 산다 하여 그 일파를 동인(東人)이라 하고, 심의겸이 서쪽(貞洞)에 산다 하여 그 일파를 서인(西人)이라 하였다. 그러나 같은 문중에서도 학통(學統) 관계나 혼인으로 인하여 파가 갈라져 대립 관계에 있는 경우도 있었다. 대체로 서인인 청송 심씨 중에서도 현종 때 경연관(經筵官)을 지낸 심광수(沈光洙), 숙종 때 이조판서를 지낸 심자(沈梓) 등은 남인(南人)이였으며, 관찰사·예조판서를 지낸 심단(沈檀)은 남인이면서 소론(少論)과 가까워 노론(老論)에 의하여 실각, 유배되었다. 심의겸은 동·서 분당의 장본인이 되었으나 원래는 붕당(朋黨)의 형성을 꺼려했으며, 명종 때 그의 외숙인 이량(李樑)이 사화를 일으키려 할 때 이를 사전에 막아내기도 하였다. 심의겸의 후손에서 많은 인물이 나왔는데 영조 때의 영의정 심수현(沈壽賢)과 이조판서 심택현(沈宅賢)은 6대손, 정조 때의 영의정 심환지(沈煥之)와 예조판서 심풍지(沈豊之)는 8대손, 영조의 부마 심능건(沈能建)은 9대손, 고종 때의 영의정 심순택(沈舜澤)과 예조판서 심경택(沈敬澤),내무부사 심이택과 참판 심기택이 11대손 이다. 판돈령부사 심상훈,독립운동으로 유명한 심수택, 심광식 등이 명문의 대를 이어온 어른들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