희망의 근거 김근태
김인기
쇠귀 신영복 선생은 명정용 붉은 천에 ‘민주주의자 김근태의 구’라고 썼다. 이제는 김 의장도 이 세상 사람이 아니다. 고인과 오래 알고 지낸 분들의 심회야 누가 어찌 형언하랴. 그래도 이 분들은 구석에서 조용히 슬픔을 삼키며 지내는가 보다. 그렇게나 모진 고문을 당하고도 용케 버티나 했더니 끝내는 이렇게 되고 마는구나. 이런 마음을 헤아리자면 나도 그저 가만히 있어야 한다. 나는 고인과 서로 알고 지낸 사이도 아니다. 더군다나 나는 겁이 많다. 이러니까 나대지 말아야지. 이미 여러 사람들이 펜을 들고 안타까움을 표했으니까, 내가 또 새삼스레 그럴 것까지도 없다.
나는 다만 홀로 미세하나마 이렇게 반응할 뿐이다. 내가 살아있으니까. 저마다 됨됨이도 제각각이니 흔들림도 제각각이다. 위대한 인물들이야 태도 역시 그러할 것이나, 나는 아무래도 이들과는 거리가 멀다. 그러면서도 이런 내 모습에 서운해 하지도 않는다. 나는 이런 자신을 기꺼이 용인한다. 싸락눈이 솔밭에 내릴 적에도 이러하더라. 솔잎 하나하나가 오들오들 떨며 버티지만, 멀리서 바라보는 그 광경은 장엄하다. 그래서 솔바람에는 사철 내내 싸락눈 내리는 소리가 여운으로 남았지 않더냐. 민주주의도 이런 사람들에게 더 잘 어울린다. 그나마 이게 내 위안이다.
혹시 내가 잔혹극이나 부조리극을 보고 있는 게 아닐까? 아니야, 아마도 이건 악몽일 거야. 이러지 않고서야 어찌 이럴까 싶은 일들이 끊임없이 일어난다. 백범 김구 선생한테 총질을 한 안두희를 비호한 자들도 있었다지 않느냐. 그래서 그런지 군사반란 수괴에다 광주학살 원흉인 전두환은 아직도 멀쩡하다. 그 삶을 보면 어떻게 이런 개망나니가 다 있을까 싶은 독재자 박정희를 누구는 길이길이 떠받들자 한다. 이러니까 ‘고문기술자 이근안 목사’란 ‘기적’도 나타나는 것이다. 내 배만 부르다면야 사기꾼인들 어떠리. 이래서 소망교회 이명박 장로도 대통령이 되었다.
고인은 민주주의자로 살다가 민주주의자로 죽었다. 그러므로 명정에도 그렇게 적힌 게 당연하다. 그래도 장례위원들이 고인의 삶을 오롯이 드러내는 말을 찾아 한때는 고심했나 보더라. 그 삶을 표현할 수 있는 용어야 많았다. 열사나 지사라 해도 좋고 고문피해자나 인권운동가라 해도 그르지 않다. 청년이나 선배 또는 형님이라 불러도 전혀 어색하지 않다. 내게도 고인은 그렇게 보인다. 그러나 인간들이란 게 다 같지는 않으니까, 여전히 망발로 추태나 부리는 망종들도 있으리라. 이것들 눈에는 채송화나 나팔꽃도 ‘친북좌파 빨갱이’로 보일 것이다.
고인은 선구자였다. 그래서 고난도 그렇게 왔다. 민주주의는 대단히 귀한 삶의 방식이지만, 이건 오로지 자유인들만이 향유할 수 있는 것이다. 그야말로 뼛속까지 노예인 자들한테는 민주주의가 도리어 증오의 대상이다. 어중이떠중이들이 내세울 게 뭐가 있겠는가? 그저 터무니없는 허세로 줄이나 세우고 끼리끼리 또 그 안에서도 끼리끼리 분열과 갈등을 획책한다. 이러다가 환경이 변하면 어쩔 줄을 모른다. 그 지도자란 작자 또한 골목대장만도 못하다. 자신이 감당해야 할 책무에는 허둥대다가 뒤늦게 졸개들한테 역정이나 잔뜩 낸다. 이러면서 이것들이 부랴부랴 빌붙을 대상을 물색한다.
더러는 고인을 두고 ‘국제신사’라 했다. 나도 공감한다. 누구보다도 불의에 치를 떨었을 사람이 기품을 잃지 않았다. 그 예의와 겸손이라니. 고인은 만신창이가 된 몸으로도 용서와 화해를 역설했다. 내가 자문한다. 나라면 어땠을까? 나는 도저히 그럴 수 없었을 것이다. 미친개한테는 그저 몽둥이가 약이다. 내게는 이런 표현마저도 순하다. 저 가증스런 것들을 보라, 바로 저것들이 이제는 또 저러는구나! 나는 사람들이 성찰과 다짐으로 나아가길 바란다. 그러니까 앞으로는 절대로 이런 인재들을 잃지 않도록 하자! 그러나 이런 한 걸음 내딛는 것도 여간 어려운 게 아니다.
의장은 영영 우리들 곁을 떠났다. 혹자는 마음의 빚으로 고인을 기억할 것이고, 혹자는 횡설수설로 고인을 헐뜯을 것이다. 한 하늘 아래 살아도 여기저기가 이러이러하고 저러저러하다. 나도 깜냥대로 산다. 문득 자신의 면모를 돌아본다. 내가 지금 죽는다면 누가 내게 민주주의자 아무개라 할까? 어림도 없다. 그러면 내게 적합한 칭호는 무엇일까? 나를 두고 누가 ‘수필가 아무개 선생’이라 해도 자신이 무척이나 쑥스러울 것이다. 이러니 내가 정직하게 챙겨 보자. 부실한 가장·한심한 친구·어리벙벙한 작자……. 아무래도 나는 이 언저리를 맴돌 것이다.
이미 관곽에 든 처지에 누가 뭐라고 한들 무슨 수가 날 리야 없다. 기실은 그런 칭호도 이승의 인간들 소관사이다. 그러나 아직은 내가 저승에 들지 않았다. 그래서 자신의 명정에 적힐 만한 칭호를 나름대로 골라 본다. 바라기로는 ‘원칙주의자 아무개’라거나 ‘화쟁론자(和諍論者) 아무개’였으면 하나, 막상 이러자니 이것도 억지스럽다. 내가 기필코 그러자 해도 여생이 너무나 고달프지 않을까 걱정스럽다. 그렇다고 누구는 불의에 맞서다가 병을 얻어 그예 죽고 말았다는데, 나는 도대체 언제까지나 어정쩡하게 이러겠는가? 이것도 인간이 할 짓은 아니다.
고인은 내게도 희망의 근거가 되었던 사람이다. 그래도 저런 사람이 저렇게 있으니 나도 더는 절망하지 말자. 내가 저 사람보다 더 나은 구석도 없었으면서 저 사람보다 더 편히 살지 않았느냐. 은연중에 나는 이렇게 자신을 다스렸다. 고인이 이렇게 서둘러 갈 게 아니었다. 이게 어디 당신의 뜻이었겠느냐만, 나로서도 이런 아쉬움을 금할 수 없다. 그래서 나는 그 삶의 태도와 지향을 잊지 않기로 했다. 나는 나대로 사니까, 내가 그 분이 될 수야 없다. 그러나 나는 고인이 내게 그랬듯이 나도 누군가에게 절망을 물리치는 힘이 되었으면 한다.
[2012.1.3.]
첫댓글 절망을 물리치는 힘...참 아름다운 말씁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