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시조문단을 찾아서
(사) 열린시조학회 편
○ 사단법인 열린시조학회는 민족시가의 대표적 정형시인 시조문학의 역사적 존재를 재확인하고 시조미학이 이룬 문학적 성취와 자긍심을 고양한다. ○ 해마다 학술 세미나 및 ‘현대시조와 인접 예술의 만남’ 행사를 함께 개최, 행사 주체와 문학 향수자(관객)들이 상호 소통하는 시조문학 어울림 한마당을 전개한다. ○ 시조문학 전통의 현대적 계승 차원에서 미학적 성과물의 자료 구축과 비평의 지평 확대 및 시조 인구의 저변 확대와 사회적 관심을 제고한다. ○ 시조시학의 정형이 결코 제약이 아니요, 오히려 시인의 창조 의지를 자극하는 강한 기제로 작용함을 실증한다. ○ 기관지 『정형시학』을 년年 2회(상반기, 하반기) 발행하여 기존 시조시인 및 비평가는 물론 시조에 입문하고자 하는 문학도들에게 참신한 정보를 제공하고 현대시조와 판소리, 기악 연주, 시조낭송 등 폭넓은 무대를 마련한다.
삼십분 호우
김 숙 희
투두둑 소금 뿌려 미꾸라지 요동치듯 너나없이 기겁하여 추녀 밑에 뛰어들고 날벼락 홍수가 났나, 내리꽂는 작달비
좌판 위에 벌인 과일 허둥허둥 걷어들어 용달차에 밀어 넣는 장 씨 아제 한쪽 팔은 경보기 수해주의보 깃발처럼 흔들리네
제 한 몸 간수 못해 뒤집혀진 우산하며 흠뻑 젖은 햇과일을 눈물로 닦고 있는 장 씨의 성한 팔 하나, 만 평 시름 달래는 중
빈 꽃대에 등을 달고
김 영 완
1. 사무실 책상 위에 오래된 화분 하나 구부정한 마른 꽃대, 눈에 선한 모습이다. 모두들 떠나보내고 주름 깊어 홀로 남은.
꽃 피운 자리마다 맺힌 흔적 굴곡지고 멀리 가던 향기마저 서늘히 식은 이마 침침한 눈을 비비며 가는 줄기 어두워진다.
다문 꽃술 간질이던 벌 나비 여린 날갯짓 아득히 떠오르네, 그 봄빛 한나절이… 꽃송이 환하게 벌어 한 세상이 흐뭇하던.
2. 여섯 남매 뒷바라지 그늘처럼 굽은 허리 늦가을 여문 씨방 갓털 달아 떠나보내고 텅 빈 방 어둠을 더듬어 등불 밝힐 어머니.
천수만 청둥오리
김 윤 희
지축을 뒤흔드는 수만 개 북 두드린다 오색 깃발 나부끼는 천수만 대형 스크린 지고 온 바이칼호의 눈발 털어놓는 오리 떼
아무르강 창공 넘어 돌아온 지친 목청 오랜 허기 채워 줄 볍씨 한 톨 아쉬운데 해 짧아 어두운 지구 먼 별빛만 성글어
민들레 솜털 가슴 그래도 활짝 열고 야윈 목 길게 뽑아 힘겹게 활개 치며 살얼음 찰랑 가르고 화살처럼 날아든다
나이 든 여름
김 환 수
한 세상 목쉰 언어 불러 앉힌 끝물 여름 국민가수 꿈이라던 친구 누님 쏙 빼닮은 사나흘 건밤 세우며 목청 돋운 저 말매미.
언틀먼틀 등굽잇길 허방 디딘 풍경 속에 생장작 도두 쌓듯 층층 쌓은 울음 계단 내 귓속 말문을 여는 경전 소리 문득 깊다.
가슴앓이 하다말고 속내 감춘 나를 보며 은근슬쩍 꼬리치는 뒤태 고운 물잠자리 간간이 까투리 웃음 바람마저 귀 세운다.
쇠꼬리만큼 긴 여름도 건들바람 얼쩡대면 서열 낮은 원숭이가 앉은 자리 양보하듯 나이 든 쭈그렁이 계절 뒷걸음질 치고 있다.
먼지의 행로
문 수 영
힘 부치면 내려앉는다, 민들레 꽃씨처럼 안착한 그곳에다 거미의 집 한 채 짓고 그 속을 들여다보면 온통 바람 흔적이다
상처는 오래 남아 몸집 자꾸 부풀리고 벌어진 틈새마다 숨어 있는 실금의 시간 날마다 벗어낸 허물 서로 엉키고 있다
가도 가도 모르는 길 이제 버려야 하나 거미가 토해 놓은 저 아득한 구렁 안고 먼지는 티라노사우루스 꿈을 꾸고 있다
눈 감아도 환해질 날, 오늘이 그날일까 오래된 불면증은 꽃대 하나 올릴 수 없어 아침이 찾아오기 전에 어지러움을 지운다
연꽃우체통
배 우 식
바깥소식 궁금해진 버들붕어 송사리가 연못 속 꽃봉오리 하나 둘씩 밀어 올린다.
어느새 세상에 앉아 제 몸 여는 빨간 연꽃.
일제히 물고기의 말들이 날아오른다. 사람의 마을 향해 환하게 열려 있는
저 꽃은 빨간 우체통, 두근거리며 바라본다.
편지를 배달하는 체관 물관 분주하고, 글 읽는 말간 눈의 물고기가 보인다.
오늘도 연꽃우체통에 편지 한 통 넣는다.
새는 날개가 있다
송 영 일
당찬 야성 내려놓고 발에 익은 길을 따라
날갯짓 접어둔 채 뒤뚱거린 몸짓으로
달뜨는 도시의 하루 쪼고 있는 도도새*
날아 오른 시간들을 깃털 속 묻어 두고
쿵쿵 뛰는 심장소리 뉘도 몰래 사그라진
그만큼 섬이 된 무게, 어깨를 짓누른다
화석에 든 아이콘이 무젖어 말을 건다
푸드덕 홰를 치는 한 마리 새 나는 행간
앙가슴 풀어헤친 채 물음표를 집어 든다
* 도도새 : 인도양의 모리셔스 섬에 서식했던 새. 천적이 없어 날개가 퇴화돼 날지 못하다가 1505년 포르투갈인들이 포유류와 함께 이 섬에 들어오기 시작하면서 멸종됐다. 현실에 안주해 변화를 바라지 않는 사람을 ‘도도새의 법칙’으로 비유해 일컫기도 한다.
매향리* 사격장
송 유 나
벙어리 낡은 몸피 수년 그리 살아왔나 저체온증 배 맞대고 온기 나눠 여는 길목 철조망 농섬이 웃고 상처로 핀 개망초 꽃
깊은 밤 잠 못 들어 환히 피던 조명탄 빛 훌쩍 지난 긴긴 세월 벽화로 남아 있다 썰물이 싹 쓸어가도 속도 깊은 저 갯벌
해안가 철조망 따라 들며날며 오가던 새 감자밭 흰 꽃 필 즈음 창문 걸어 닫았다 고온리 마을 입구에 널브러진 덧난 상처
* 매향리 : 경기도 화성군에 있는 미군사격장. 이제 사격장은 문을 닫고 탄피만 수북하게 쌓여 있다.
번지점프 해송 현애懸崖
송 필 국
한 점 깃털이 되어 허공 속을 떠돌다가
치솟은 바위틈에 밀려 든 솔씨 하나
서릿발 등받이 삼아 웅크리고 잠이 든다
산까치 하품소리 따사로운 햇살 들어
밤이슬에 목을 축인 부엽토 후비작대며
아찔한 난간마루에 고개 삐죽 내민다
버거운 짐 걸머메고 넘어지다 일어서고
더러는 무릎 찧어 허옇게 아문 사리
뒤틀려 꼬인 몸뚱이 벼랑 끝에 매달린다
떨어질듯 되감아 오른 힘줄선 저 용틀임
눈 이불 솔잎치마 옹골찬 솔방울이
씨방 속 온기를 품어 천년 세월 버티고 있다
* 현애 : 벼랑에 붙어 뿌리보다 낮게 기우러져 자라는 나무.
외발 썰매 ― 백로
이 상 야
셀 수 없이 낙하하는
목화송이 목련송이
날개와 날개사이
여백과 여백사이
사르르
미닫이 닫히듯
완벽하고 사뿐한 착지.
느티나무, 스매싱하다
이 순 권
비상소집 아니해도 잰걸음의 느티나무 눈 뜨는 공원 한쪽 배드민턴 추임새로 갓 밝은 동살을 안고 아침 쩌렁 열고 있다
시퍼런 잎 거느리고 활개 치던 한철에는 번뜩이는 햇살처럼 불꽃 튀던 긴긴 랠리 이따금 던진 승부수 공은 곧잘 빗나가고
바람 잘 날 없는 벌판 마른 가지 다독이며 그늘 자리 넓히려고 발싸심하는 노인들 다 삭은 고목을 치는 스매싱이 야멸차다
숯검댕이 이 정 홍
1. 이 세상 한숨이란 죄다 걷어 홀로 쉬고 한평생 있는 속내 없는 속내 그리 태운, 철없는 나를 키우신 울 어매 속 저랬을까.
2. 살다보면 한 뼘 앞이 캄캄한 일 왜 없겠나. 이 산 저 산 먹먹토록 실업의 재 하냥 남긴 벌겋게 달군 불잉걸 타다 만 심장 꿈꾼다.
온기 없는 방구들장 쓰다듬는 구직자 손 마른 동백 밑불 지펴 몸과 몸 포개 사르고 밤 세워 누운 몸 등허리 어루만져 주고 있다.
카피, 라이터
임 채 성
광고회사 신입 시절 광고주 인사 갔죠 갓 찍은 명함 주며 카피라이터라 했어요 남의 글 베껴 쓰는 일? 복사기냐며 웃대요
식은 커피 다시 끓어도 웃으며 대답하길 코피를 쏟을 때까지 문안 뽑는 일이라고, 오늘도 문안 여쭈러 잠시잠깐 들렀다고
살다보니 복사기가 도처에 있더군요 TV에도 신문에도 서점과 인터넷에도 거리엔 같은 얼굴에 같은 옷의 사람들
생각까지 복제하는 디지털 카피시대 내 시는 그 무엇을 베껴 쓴 판박일까 붕어 살 한 점도 없는 붕어빵도 그러거니
애기똥풀 자전거
장 은 수
색 바랜 무단폐기물 이름표 목에 걸고 벽돌담 모퉁이서 늙어가는 자전거 하나 끝 모를 노숙의 시간 발 묶인 채 졸고 있다
뒤틀리고 찢긴 등판 빗물이 들이치고 거리 누빈 이력만큼 체인에 감긴 아픔 이따금 바람이 와서 금간 생을 되돌린다
아무도 눈 주지 않는 길 아닌 길 위에서 금이 간 보도블록에 제 살을 밀어 넣을 때 산 번지 골목 어귀를 밝혀주는 애기똥풀
먼지만 쌓여가는 녹슨 어깨 다독이며 은륜의 바퀴살을 날개처럼 활짝 펼 듯 페달을 밟고 선 풀꽃, 직립의 깃을 턴다
메밀밭으로 오는 저녁
정 평 림
시월상달 산모롱이 하루해 이우는가
미처 못 잊은 겨운 한때 허기인 듯, 속울음인 듯
흰 꽃대 발돋움하고 하늘 한켠 쓸고 있다
청솔가지 타는 연기 아직 걷히지 않았는지
눈에 돋은 별 그림자 한 모금 물로 달래지만
신발 끈 질끈 조이는 날 저녁이 오래 깊다
선대先代가 물린 죄업 접고 사는 요즘 시대
산말랭이 뚫린 찻길 해종일 그리 붐비고
등 굽은 초승달 뜨면 목이 타는 저 메밀밭
퍼즐 가계도
정 황 수
1. 나무의 집 부름켜 잠근 나목, 너무 늙은 시간 앞에 외기러기 가지마다 눈물방울 흔들려도 해거름 한뉘 자락을 낙엽이 덮고 있다.
2. 메마른 땅 수채화로 마름질하면 세상 더 밝아질까 하늘 덫에 걸린 아내 줄을 끊는 메스 소리 무영등 불빛 속으로 하루가 스러지네.
3. 열매 그늘 아이는 아직 거기 나비를 좇고 있다 구부러진 햇살까지 제 몸 구석 끌어 담고 방안에 뿌리를 박고 떨켜 고이 키운다.
4. 벙어리 종鐘 활활 타는 성전 보며 우왕좌왕 발 굴러도 지다위 남 탓인가 팔짱 낀 저 타르튀프 울어도 눈물이 없는 비상구 밖의 종루.
5. 가난의 자서自敍 움켜쥔 주먹에서 황금빛 시그러지고 허기를 지우려는 발돋움만 뜨악하다 한바탕 팔랑개비로 사는 날의 엑서더스.
6. 달의 성城 칠흑으로 칭칭 감아 내쳐진 막다른 길, 피투성이 헛이름이 절뚝이며 멀어질 쯤 달의 성 갈피 못 잡고 붉은 옷섶 솔깃 여네.
오동나무 & 하현
조 민 희
울안에 갇힌 허공
돌담이 에워싼다
물소리로 자라난 잎 바람이 귀를 접고
도린곁
인광의 비늘 터는 하현 한 채
기운다.
시다야, 히말라야시다야 조 성 문
팍팍하고 가파른 건 길만은 아니었다 그 누가 배도는지, 귀먹어 눈먼 거기 아홉 번 꼬부라진 길 회오리 돈다 회오리
어둑서니 골목 어귀 눈 맞는 히말라야시다 그렁한 눈석임 하루 모국어만 자꾸 헛돌아 바늘잎 콕콕 찌르는 물도 선 곳 턱지다
틈바람 든 봉제공장 콜록대다 보풀 일고 이 동네 네팔 누이야, 미싱 그만 타려무나 드르륵 들었다 놨다 창신동 길 또 꺾인다
옛집에서 담아 온 오복
최 오 균
어릴 적 나를 키운 옛집이 헐린다기에
마을 어른 모시고 가 빈집 분합문 열고
적막에 볼모 된 대청 뉘엿뉘엿 올랐네.
마룻대에 문신처럼 오롯이 뵈는 상량문
하늘의 세 빛 좇아 사람은 오복을 갖춰*
박제된 가문의 염원 눈에 담아 나왔네.
건강한 몸과 맘 지녀 어련무던 해로하여
자식 눈치 아니 보고 남을 돕는 일도 하며
이웃과 친구랑 함께 오순도순 사는 오복.
* 應天上之三光(응천상지삼광) 備人間之五福(비인간지오복) 한옥의 대청마루 마룻대에 써서 보여주는 상량문의 한 구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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