즉문즉답
2022.6.25.
나는 어떻게 하면 여러분을 내가 좋아하는 그리스도께로 중매해서 시집가게 할까 고민이다. 바울은 고린도후서 11장 2절에서 “내가 하나님의 열심으로 너희를 위하여 열심을 내노니 내가 너희를 정결한 처녀로 한 남편인 그리스도께 드리려고 중매함이로다.”라고 하였다. 나 역시 마찬가지다. 여러분을 정결한 처녀로 그리스도께로 중매하려고 한다.
여러분이 지금까지 듣고 아시겠지만 나는 객관적으로 남을 결혼시키고 돈을 받는 뚜쟁이가 아니라 내가 시집간 후에 나를 따르는 모든 사람들을 시집가게 하는 중매장이다. 내 소원은 내가 좋아하는 사람들, 나를 사랑하는 사람들을 나와 함께 데리고 내가 가장 좋아하는 신랑에게로 가는 것이다. 여러분이 나의 이런 뜻을 아시고 협력해 주시면 감사하겠다.
박장규
누가복음 23장에는 성소의 휘장이 한 가운데가 찢어졌다고 했고 예수께서 큰 소리로 “아버지여, 내 영혼을 아버지 손에 부탁하나이다.” 하고 운명하셨다고 했는데 예수께서 십자가에 못박히신 후에 이 말씀을 꼭 하셔야 했는가, 중요한 말씀인가.
이현래 목사
이런 말을 했든지 안했든지 사람은 마지막에 “내 영혼을 아버지께 부탁합니다.”라고 할 수밖에 없다. 우리도 마찬가지다. 내일을 모르니까 내일을 아시는 분에게 내 운명을 맡기는 것이다.
이번에도 나는 병원에 있으면서 그런 경험을 했다. 너무 암담한 장면을 보면서 “나는 아버지 것입니다. 나는 당신의 것입니다. 내 것이 아닙니다.”라는 말을 실제로 했다. 그것은 “내 영혼을 아버지 손에 부탁합니다. 나는 내 것이 아니고 당신의 것입니다.”라는 말과 같은 말이다. 그러자 마음이 편안해졌다. 앞이 캄캄한 어떤 현실에 부딪혔는데 그것이 환상인지 아닌지 모르겠는데 나로서는 그런 가운데 오래 있었다. 중환자실에 있었지만 병원이라는 생각을 못해보았다. 나중에 거기서 나와서 물어보니 거기서 3.5일을 있었다고 한다. 3.5일이면 엊그제일텐데 그것이 나에게는 아주 길고 지루한 시간이었다. 그리고 아무것도 모르는 캄캄한 다른 세계를 만났기 때문에 “하나님, 나는 내 것이 아닙니다. 당신 것입니다.”라는 말이 나왔는데 그때는 한숨이 쉬어지고 쉴 공간이 생겼다.
예수님도 “내 영혼을 아버지 손에 부탁하나이다.”라고 하셨다. 당연한 것이 아닌가. 어떤 성경에는 이런 말이 있고 어떤 성경에는 없다. 각자 개인의 사정이겠지만 우리가 돌아가면 어디로 가겠는가? 나를 내신에게로 가지 않겠는가. “아버지여”라고 하신 것은 나의 근원, 근본을 가리켜서 하신 말씀이다. 그러니 당연한 말씀이라고 생각된다.
송영소
현재 목사님이 말씀하시는 새로운 판, 새로운 복음이 원형의 자리, 근원의 자리, 형상의 자리와 내가 닭을 키우면서
인데 궁금한 것은 닭을 키우면서 태초에 하나님이 만든 자리에 있는 닭이 찾아올 때 계란이 병아리가 되고 닭이 된다. 그 닭의 세계와 목사님이 말씀하시는 세계가 어떻게 다른지 궁금하다.
이현래 목사
아주 재미있는 질문이다. 닭도 숫놈이 와서 새판이 짜진다는 말로 들린다. 마찬가지로 우리 인생도 구원자가 와야 새판이 짜진다. 나 혼자 가는 길과 구원자가 와서 인도해 가는 길은 차이가 많다. 구원자에 따라서 판도 달라지는 것이다. 그러니까 구원자에 따라 판도 달라진다. A라는 사람이 올 때는 이렇게, B라는 사람이 오면 저렇게 판이 달라진다.
어떤 판이 인류에게 쉽고 보편적이며 누구나 참여할 수 있는 판인가? 이것을 아는 것이 중요하다. 특별한 사람이 많다. 남이 갖지 못한 은사를 가진 사람도 있고, 능력을 가진 사람도 있다. 그것이 하나님이 주신 것이라 해도 그 판은 자기는 갖지만 다른 사람과 공유할 수 없다. 아무리 좋은 판이라도 공유가 안되면 완전한 복음이라고 할 수 없다. 모든 사람이 다 참여할 수 있는 판이라야 하나님이 정하신 판이 되지 않겠는가.
하나님은 모든 사람이 구원에 이르기를 원하신다. 자기가 지으신 세계니까 다 함께 구원에 이르기를 원하지 누구는 구원을 받고 누구는 멸망을 받기를 원하는 창조자는 없다.
그동안 복음이 많지만 부분적인 것도 있고 특별한 것도 있었다. 여기에 비해서 지금 내가 말하는 것은 특별한 것이 아니라 지극히 보편적인 것이다. 그리고 새롭게 우리가 새롭게 해야 할 일이 있는 것도 아니라 이미 정해진 길을 가는 것이다. 하나님은 사람을 지으실 때 이미 인간의 길을 지어놓으셨다. 우리가 인간의 길을 만들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정해놓은 길을 발견해서 그 길로 들어와야 하는 것이다.
예수님도 어디로 갈지 모르는 제자들에게 “좀 기다려라. 내가 아버지께로 가서 거처를 마련하면 내가 다시 와서 나 있는 곳에 너희를 영접하겠다.”고 하셨다. 제자들은 이 말을 듣고 ‘아버지 집에 무슨 거처가 있는가?’라고 생각했을 것이다. 오랫동안 사람들도 그렇게 생각했다. 어떤 사람들은 천당이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지금 내게 발견된 것은 아버지 집은 예수의 집이다. 예수 자신인 것이다. 거기는 집이 너무나 많다. 아무나 들어올 수 있는 집이다. 넓고 크고 많다. 인류라면 한 사람도 예외없이 들어갈 수 있는 집이 준비된 것이다.
이것이 지금 내가 말하는 십자가에서 죽은 예수 안에 있다. 여기서는 누구라도 예외없다. 사람이면 다 같다. 세상에서는 소유가 있어서 차별이 많은데 이 안에 오면 아무것도 차별할 것이 없다. 누구라도 들어갈 수 있다.
이것은 이미 정해진 것이지 새로 만들어진 것이 아니다. 예수로 말미암아 그 자리가 우리에게 주어진 것이다. 그분이 문을 안열었으면 우리가 들어갈 수 없는데 그분이 우리와 같은 사람으로서 그 문을 여셨다. 그래서 모든 사람이 다 들어갈 수 있다.
천사가 열었다면 우리는 못들어간다. 특별한 사람이 열었어도 우리는 못들어간다. 놀라운 능력을 가진 사람이 열었어도 우리는 못들어간다. 그런데 우리와 똑같은 입장에서 사람으로서 그 문을 열었기 때문에 누구나 들어갈 수 있다. 그래서 내 이 문으로, 열린 문으로 들어와야 한다고 말하는 것이다.
다른 데 문이 있으면 가도 된다. 못가게 하는 것이 아니다. 갈 데가 없으면 이 문으로 오라는 것이다. 나도 문을 찾다가 내가 들어갈 문이 없었다. 유명한 사람도 많고 놀라운 사람도 많다. 그리고 은사를 받은 사람도 많다. 그러나 내가 들어갈 문이 없었다. 심지어 나는 방언을 해 보려고 열심히 추구했지만 못한 사람이다.
우리나라에 유명한 분이 있다. 그분은 평생 한 문으로 사람들을 인도했다. 그문으로 많은 사람이 인도되었다. 왜냐하면 그분은 병고치는 문을 만났기 때문에 그 문으로 사람들이 구름떼처럼 모여들었다. 한국에서 70만 성도를 가진 목사님이고 세계 각처에 그분을 기다리는 사람들이 엄청 많다. 심지어는 인도에서 힌두교도들이 병이 나으려고 수만 명 모이기도 했다. 그분은 병고치는 예수를 만나서 평생 병 고치는 사역을 했다. 자기가 만난 예수를 전한 충성스러운 사람이다.
만일 사역자들이 이렇게 실제로 만난 예수를 전한다면 얼마나 세상이 달라졌겠는가. 자기가 만난 예수를 전하지 않았기 때문에 자기도 안되고 남도 안되는 것이다. 만난 것만큼 하면 된다. 병 고치는 예수를 만났으면 병 고치는 예수를 열심히 전하면 되고 물 위로 걷는 예수를 만났으면 그 예수를 열심히 전하면 된다. “너희는 나의 증인이 될 것이라.”고 하셨듯이 증인이 되면 된다.
나는 십자가에서 내려오지 못하고 죽은 예수를 만났다. 그래서 이 말을 주야로 하는 것이다. 이것밖에는 할 말이 없다. 전에는 왜 이 말을 안했느냐고 하는데 나는 전에도 이 말을 했다. 아브라함이 백 세에 아들을 낳았다는 것도 그 말이다. 같은 말이다. 이삭은 야곱이 아니라 에서를 축복하려고 했는데 눈이 어두워서 에서를 축복하고 말았다. 이것이 그 사람이다. 나는 인간의 제한, 이것을 내가 지금까지 말해왔다.
에덴 동산에는 그런 제한이 있었다. “동산 각종 나무의 열매는 네가 임의로 먹되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열매는 먹지 말라 네가 먹는 날에는 반드시 죽으리라(창2:16-17).”라고 말씀하셨다. 이것 한 가지만 제한이 있었다. 다른 것은 아무것도 제한이 없었다. 그런데 이 한 가지 제한을 거역했던 것이다.
그러므로 구원은 간단하다. 이것만 회복되면 간단하다. 복잡할 것이 없다. 그런데 이것이 어디서 회복되는가. 십자가에서 회복되었다. 그래서 나는 이 사실이 지극히 근원적이고 평범한 것이라고 생각한다. 그러니 모든 사람이 가능한 것이다. 나만 가능하면 아무것도 아닌데 모든 사람이 가능한 이 복음을 발견하고 여러분에게 나눠줘서 함께 참여하자는 것이다. 이것이 새판이다.
전에는 문을 찾아도 문이 없었다. 어떤 사람은 열고 들어가는데 나는 못열었다. 그런 판이었다. 나는 그 판에 못들어갔다. 해보았지만 들어갈 수 없었다. 그런데 이 문은 만인에게 열려있다. 나 같은 사람에게는 너무나 쉽다. 그러니 안되는 사람은 나를 따라오면 된다. 쉽다.
더 좋은 문, 자기가 마음대로 열고 닫을 수 있는 문이 있는 사람은 그 문으로 가면 된다. 말리지 않겠다.
“수탉이 와야 새판이 짜진다.”고 했는데 아주 재미있는 질문이다.
장기희
십자가에서 내려오지 못해서 죽은 예수를 깊이 알고 나에게서 모든 질문이 사라졌다. 그런데 내가 알고 있는 답과 목사님의 답이 차원이 다를 수 있다는 생각이 들어서 신학적인 질문을 드릴까 한다. 몰트만은 십자가에 달리신 하나님이라는 책에서 정체성의 위기와 관계성의 위기를 다루었다.
십자가에 달린 그리스도라는 정체성을 강조하다 보면 이웃과의 관계가 소홀하게 되고 사회 참여하는 문제에도 소홀하게 된다. 그리고 관계를 너무 강조하다 보면 정체성의 위기가 따라오게 된다. 그래서 몰트만은 정체성과 참여의 딜레마라고 했다. 이 딜레마를 어떻게 해결할 것인가. 지금까지 교회와 사회는 상호보완하면서 존속해왔다. 그런데 몰트만은 상호보환을 보지 않고 변증법적 인식을 통해서만 이 딜레마를 해석할 수 있다고 했다. ‘하나님은 자기와 다른 것 안에서 계시되기 때문에 하나님을 모르는 사람들과 하나님께 버림받은 사람들에게 의해서 인식된다.’ 이것이 변증법적 인식이고, 이 인식 안에서만 딜레마가 해결된다고 했다.
십자가에서 내려오지 못한 예수를 듣고 반대하는 사람도 있고 이질감을 느끼는 사람도 있다. 이런 사람들을 통해서 계시가 나타나니까 그 계시를 보고 목사님은 더욱 다른 차원으로 가지 않았나 생각되고 그래서 변증법적 인식을 하지 않았나 생각된다. 십자가에서 내려오지 못한 예수라는 정체성을 강조하다 보니 이에 대해서 반대하거나 소외되거나 이질감을 느끼는 사람들과 연합이 소홀하게 되지 않았는가, 서로 구분되어 있지 않은가?
시간이 지나면 해결된다고 하셨는데 과연 해결될지?
정체성의 위기냐 관계성의 위기냐, 이 두 관계 속에서 어떻게 해결해야 하는지?
이현래 목사
원체 학문이 많은 분들이라서 쉬운 말도 어렵게 한다. 알아듣기가 어렵다. 문제만 이해하려 해도 상당한 시간과 지식이 필요할 것 같다. 그래서 쉽게 얘기하겠다.
몰트만은 만인구원설을 주장했다고 한다. 나는 대책도 없는 만인 구원설을 어떻게 주장하느냐고 생각했더니 듣고 보니 나름대로 대책이 있는 것 같다. 그러나 그 대책이 쉬운 것은 아닌 것 같다.
아주 간단하고 쉬운 것은 십자가에 못박혀 죽은 예수 안에, 우리의 소유를 떠난 인간 안에, 본질적인 인간 안에 정체성과 관계성이 동시에 만나지는 자리가 있다는 것이다. 하나님과 우리는 서로 다르지만 우리의 정체성은 하나님을 만나기에 적합하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인간이 필요하고 인간은 하나님이 필요하니까 다르지만 서로를 필요로 하는 것이다. 그렇게 만들어 놓으셨다. 그러니 그 안에서 갈등이 있을 필요가 없다.
창세기 1장에서 “우리 형상을 따라 우리 모양대로 사람을 만들자.” 하신 것은 자기의 형상을 따라 만든 인간과 본질인 하나님이 연합해야 한다는 것이다. 이것을 사람들이 어렵게 생각하는 것은 비슷해야 된다고 오해하기 때문이다. 비슷한 것이 아니다. 형상이라는 말은 비슷하다는 의미가 아니라 그를 나타낼 수 있는 존재라는 말이다.
2장에서는 이것을 다시 설명했다. 농부로서 그 동산을 경작하는데 사람을 흙으로 지으셨다고 했다. 농부가 곧 흙이고 흙이 곧 농부다. 왜냐하면 씨는 흙을 받으면 열매를 만들어내기 때문이다. 씨와 열매는 완전히 다르다. 씨 속에는 흙의 성분이 없고 흙 속에는 씨의 성분이 하나도 없다. 그런데 그 둘이 합해야 열매가 나온다. 이것이 창조의 오묘한 비밀이다. 이것은 사람들이 생각하는 결합도 아니고 혼합도 아니다. 전혀 다른데 꼭 없으면 안되는 관계다.
두 번째는 아담에게 배필이 없어서 갈빗대를 빼서 하와를 만드셨다는 것이다. 이 두 사람은 뼈 중의 뼈요 살 중의 살이니까 둘이 연합해서 한 몸이 되라고 하셨다.
같은 사람인데 남자와 여자는 전혀 다르다. 그래서 서로 필요한 것이다. 남자 같은 여자, 여자 같은 남자는 있을 필요가 없는 사람이다. 여자는 꼭 여자다워야 하고 남자는 꼭 남자다워야 한다. 그래야 생육하고 번성한다.
복잡하게 설명할 것 없이 하나님이 창조하신대로 만나면 정체성이고 관계성이고 다 한 자리에서 만나진다.
교회와 사회, 이런 관계에서 이것이 어떻게 적용될지 그것은 그때 그때 인간의 정체성이 어디로 돌아오느냐에 따라서 달라질 것이라고 생각한다. 우리 교회도 같은 정체성이 있다면 갈등이 있을 필요가 없다. 그래서 많은 정결한 처녀들을 그리스도 앞으로 중매한다고 한 것이다. 그 처녀들이 다 다르면 어떻게 중매하겠는가. 같은 정체성을 갖고 있으니까, 많든지 적든지 내가 가는 곳에 그 사람들도 가고 그 사람들 가는 곳에 나도 가는 것이다. 조금도 다를바가 없기 때문에 함께 가는 것이다.
정체성을 물었는데 지금 내가 하고 있는 말이 인간의 정체성에 관한 것이다. 무엇이 인간인가. 원래 사람은 어떤 것인가. 이 말을 하고 있는 것이다. 원래의 사람 안에서는 모든 사람이 하나다. 소유 때문에 다르지 다를 것이 아무것도 없다.
소유는 물질만이 아니라 정신적이고 영적이고 종교적인 모든 것이 소유다. 그것은 하나님이 만들어 놓으신 것도 아니고 하나님이 주신 것도 아니다. 사람이 만든 것이다. 동산을 떠난 가인과 아벨은 각기 자기들이 만든 것을 가지고 와서 제사를 드렸다고 했다. 지금도 똑같다. 그런데 그렇게 제사를 드리는 데서 최초의 살인사건이 생겼다. 사람이 만든 것을 가지고 하나님께로 오면 이런 문제가 생긴다.
그래서 하나님은 사람의 손으로 만든 것을 원치 않으신다고 하셨다. 왜냐하면 하나님이 다 만들어놓으셨기 때문이다. 다 만들어놓고 안식하셨다. 우리는 뭔가 모자라서 자꾸 무엇을 만들고 있는데 하나님은 우리가 만들 필요가 없이 사용할 수 있도록 다 만들어 놓으셨다. 소유는 내가 알아서 취할 수도 버릴 수도 있다.
원 생명은 하나님이 정해놓으셨다. 이미 만들어져 있다. 내 생명은 하나님에 의해서 만들어져 있다. 우리가 조금도 바꿀 수 없다. “너희 중에 누가 염려함으로 그 키를 한 자나 더할 수 있느냐.”고 하셨다. 정해진 것은 바꿀 수 없다. 그래서 정해진 것 속으로 우리를 이끌고 있는 것이다. 예수님에게 남은 것은 그것뿐이다. 하나님이 정해 주신 한계, 경계, 그것만 남았다. 우리도 그 자리에 가면 똑같다.
예수님의 소유와 우리의 소유는 전혀 다르다. 우리가 그 소유를 알 수 없을만큼 그분의 소유는 크다. 내가 예수를 모른다는 말이 그 말이다. 그 엄청난 소유를 가지신 분을 나는 도무지 알 수 없다. 그런데 소유가 없어진 예수를 보니까 너무 만나기 쉽다. 여러분도 소유가 많으신 예수를 찾아가면 여러분이 설 자리도 없고 그분을 알 수도 없다.
나는 벳세다 광야에서 떡을 얻어먹었지만 떡을 만드신 이를 알 수 없었다. 광야에서 이스라엘 백성은 만나를 먹었지만 만나를 주신 이를 몰랐다. 그래서 먹고 나면 또 먹어야 했고 또 다시 먹어야 했다. 광야를 지나간 그 판에서는 만나밖에 먹을 수 없었다. 가나안 땅에 가서는 농사를 지었다. 하나님께 제사를 드리는 물건은 농사 짓는 데서 나왔다. 만나로 제사를 드릴 수는 없다.
그러니까 하나님이 정하신 것은 모두 이렇게 인생을 위해서, 하나님 자신을 위해서 이미 정해져 있다. 이미 정해져 있는 것을 우리가 발견하는 것이 중요하다. 새로 줄 것은 없다. 하나님도 새로 주실 일은 없다.
우점덕
“목사님은 나의 아버지입니다.”라는 자길 오빠의 말을 듣고 그런 관계가 너무 부러워서 교회에 오게 되었다. 여기 와서 교회 안에서 목사님이 다른 형제들을 아버지처럼 보살피는 것을 보았다.
이무원, 노영경 형제는 무한긍정으로 중고등부 아이들을 대하고 있고 그 마음을 아이들도 생겼다. 우리 교회 안의 관계에서 나타나는 최고의 감동은 아버지 마음이 나오는 것이다. 그러나 나는 아버지 마음이 없다. 힘든 상황에서는 나부터 살고 싶다. 십자가에 못박힌 예수 안에 머물면 언제쯤 아버지 마음이 있는 사람이 될까요?
이현래 목사
여러 사람들이 이 복음 안에 오면 어떻게 되느냐는 의문을 많이 갖고 있다. 이 복음 안에 들어오면 어떻게 될지 모른다. 들어와 봐야 알지 말로 해서 알 수 있는 것이 아니다. 그리고 각자에게 무엇이 올지 모른다.
문제는 내가 있는 판에서 안되면 하나님이 정해 놓으신 판으로 들어와야 하는 것이다. 굳이 그 판으로 안들어오고 바깥에서 기웃거릴 필요는 없다. 다른 판이 있으면 기웃거려도 되는데 다른 판은 없다.
나는 하나님께 부르심을 받을 때 다른 길이 없었다. 그래서 더 생각할 여지가 없었다. 갈 데가 없으니까 ‘갈 것이냐 말 것이냐?’ 했지 ‘어디로 갈 것인가?’라고 생각해 보지 않았다. 지금까지 나는 그런 길을 걸어왔다. 여러개의 길이 있으면 나는 아무것도 못한다. 이럴 수도 있고 저럴 수도 있으면 아는 아무것도 안된다. 순택이와 늘 그런 일로 부딪쳤다. 나는 이렇게 하자 했어도 가다 보면 저렇게 하자고 한다. 가다가도 더 좋은 길이 있으면 늘 바꾸는 사람이다. 아예 처음 시작할 때 길이 여러개면 아예 출발을 못한다.
그런데 하나님의 부르심에는 후회하심이 없다 하였다. 한번 부르셨으면 끝까지 책임을 지신다. 나는 올 데 갈 데가 없어서 응답했는데 지금까지도 그렇다. 내가 이럴 수도 있고 저럴 수도 있는 데서 뭔가를 선택해 놓으면 반드시 문제가 생긴다. 그래서 한 길밖에 없을 때만 하나님이 인도하시는 것 같다.
우점덕 자매님, 아버지가 없으면 아버지로 부를 이를 만나면 된다. 육신이 없을지라도 하나님은 근본이니까 우리 아버지 아닌가. 내가 근본을 찾아가는 것은 아버지를 찾아가는 것이다. 부르기를 아버지라고 부르는 것이지 근본으로 돌아가는 길이 아버지께로 돌아가는 길이다. 아버지 따로, 근본 따로 있는 것이 아니다.
근원으로 돌아감, 여기 아버지가 있다. 아버지는 근원을 말한 것이고 남편, 배필은 연합을 의미하는 것이다. 근원이 있고 연합이 있고 그래서 하나님의 세계가 완성이 되는 것이다.
구자길 형제가 “목사님은 내 아버지다.”라고 한 것은 자기의 근원이라는 뜻이다. “나는 목사님 덕분에 여기 왔다.”는 뜻이다. 특별히 다른 뜻이 있는 것이 아니다. 육신으로는 부모에게서 태어나듯이 새 사람으로 태어날 때도 그와 비슷하다. 그래서 아버지라고 하는 것이지 육신의 아버지라는 말이 아니다.
우점덕 자매님, 아버지 세계가 있다. “내 아버지 집에는 거할 곳이 많다.” 하는 세계가 있다.
지방 모 자매
지방에서 모이는 가정이 몇 안되는데 죄의식이 안생기는 교회생활이 좋다. 부부관계에서 형제 스타일을 인정하고 내 스타일 대로 사니 갈등이 없다. 삶의 질이 이렇게 높아진 것이 은혜 중의 은혜다. 그런데 이렇게 사는 내 모습에 대해 요즘 교회 문화라고 부르는 것 같다. 나는 이 문화가 좋고 부족함이 없다. 십자 가에 못박혀 내려오지 못하고 죽은 예수 안에서 자신을 발견하는 이 복음이 인생의 절박한 위기에 있는 사람에게는 큰 은혜인데 나는 아직 그 필요를 모르겠다. 내가 여기서 옮겨갈 필요가 있을까?
이현래 목사
평범하지만 우리 교회의 상당 부분을 점유하고 있는 문제다. “여기는 살기 좋다. 다른 데 보다 훨씬 자유롭고 인간관계도 좋다. 이러면 됐지 않은가.” 하는 분들이 더러 있다. 행복한 사람들이다. 그런데 인생은 근원적으로 가난하다. 그 문제는 생활 문제고 본질적으로 인생은 가난하다.
그냥 생활만 편안하게 하면 되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언제 깨질지 모른다. 무슨 문제가 있으면 깨져 버린다. 우선은 편리해도 계속 편리할 수는 없다.
나도 몸에 문제가 많아도 얼마 전까지는 불편함이 없이 살았다. 전국을 매일 순회하고 다녔고 미국을 일 년에 두 번씩 갔다. 도저히 상상할 수 없는 생활이다. 그런데도 별로 불편을 못느꼈다. 그런데 어느 날부터 불편을 느끼기 시작했다. 그래서 지금은 방안에서 갇혀 산다. 언제 무슨 일이 일어날지 모른다. 그러니까 영구적인 자리로 옮겨야 한다. 찾아야 한다. 하나님이 우리를 만드실 때는 그렇게 편하고 자유롭게 살라고 지으신 것이 아니다. 하나님과의 특별한 관계를 위해 지어놓으셨으니가 그 관계가 인생의 영구적인 행복이 아니겠는가.
집을 지으면 우선 뚝딱 지을 수 있지만 비가 오고 바람이 불고 창수가 나면 무너지고 만다. 그런데 반석 위에 지은 집은 비가 오고 바람이 불어도 넘어지지 않는다.
일단 교회 생활이 좋다니 축하한다. 이런 교회에서도 불편하면 곤란한데 그나마 편하게 느낀다니 감사하고 좋다. 그러나 절박한 위기에 있는 사람이 먼저고 그렇지 않은 사람은 그 뒤다. 이런 차이다. 왜 먼저 가고 나중 가는 차이가 생기는가? 어떤 사람은 절박하게 느끼고 어떤 사람은 그렇지 않은데 어차피 먼저 가고 나중 가는 차이밖에 없다.
아브라함과 다윗의 자손 예수의 족보에 다섯 여자가 나온다. 그 사람들은 죽느냐 사느냐였다. 그래서 다윗의 조상이 된 것이다. 요조숙녀가 얼마나 많았겠는가. 그들은 이 족보에 오르지 못했다. 다섯 여자들은 죽기 아니면 살기였는데 영광스러운 다윗의 족보에 끼어있다.
먼저 오고 나중 왔어도 언젠가는 다 될 것이다. 대추가 열릴 때 보면 제각기 열린다. 그런데 익을 때는 다 같이 익는다. 차례 차례 익는 것이 아니라 한꺼번에 다 같이 익는다. 우리도 그렇게 될 것이라고 생각한다.
장기희 추가
몰트만이 십자가는 양면성이 있다고 했다. 신성도 있고 인성도 있다는 것이다. 신성이냐, 인성이냐 이렇게 양자택일할 성질의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설득력있고 논리적이라는 생각이 든다. 이렇게 말하는 것이 오늘날 기독교다. 이런 입장에서 젊은 사람들이나 다른 사람들이 질문해 오면 어떻게 답을 해야 하는가.
이현래 목사
우리 말에 신(神)이라는 개념과 성경의 하나님이라는 개념은 차이가 있다. 하나님이라는 개념은 나와 어떤 관계에서 나에게 절대적인 영향을 주는 분이라고 할 수 있다. 신은 존재적인 본질을 말한 것이다. 중국어 성경에는 상제(上帝)라 했다. 일본어 성경에는 신(神)이라 했고 우리 말 성경에도 하나님이라 했다. 그런데 이스라엘 사람들은 하나님이라 할 때도 있고 여호와 하나님이라고 할 때도 있다. 그들과 역사적인 관계가 있는 하나님을 여호와라 했다. “나는 너를 애굽 땅, 종 되었던 집에서 인도하여 낸 네 하나님 여호와니라.”라고 했지 그냥 하나님이라고 하지 않았다. 희랍 사람들의 하나님은 절대자, 객관적인 존재다. 성경에 나오는 여호와 하나님과는 구별되는 말이다.
예수를 보고 하나님이라고 했지만 본질이 하나님은 아니다. 예수는 사람이다. 그런데 어떤 경우에는 “나의 주시며 나의 하나님입니다.”라고 할 수 있다. 하나님이라는 말은 군수, 도지사와 같은 칭호다. 여호와, 예수는 구체적인 성분을 의미한다. 여호와를 번역하면 ‘나는 ~이다(I am ~.)’라는 뜻이다. 하나님은 어떤 절대자에 대한 호칭이다.
예수님을 어떤 절대자로 보았는지 모르지만 그것은 그 사람 개인의 문제고 본질은 사람이다. 왜냐하면 그것이 십자가에서 나타났기 때문이다. 예수님의 본질이 사람이라는 것이 가장 명백하게 나타났다는 말을 하기 위해서 십자가에서 내려오지 못한 예수를 말하는 것이다. 너무나 명백하게, 더 이상 여지없이 판명된 자리를 말하기 위해서 내려오지 못했다는 말을 덧붙이고 있는 것이다.
이 말을 듣기 싫다는 사람도 있다. 그런데 듣기 싫어도 이것을 확실하게 하기 위해서 어쩔 수 없이 하는 것이다. 왜냐하면 우리 개념에 섞여 있는 것이 있기 때문이다. 그것이 완전히 빠져나가기 까지는 이 개념을 가지고 있어야 한다.
예수는 십자가에서 내려오지 못한 분이다. 그는 완전히 사람이다. 하나님이 그렇게 지어놓으신 그 사람을 이해해야 한다.
몰트만은 잘 모르겠는데 아마 그런다고 인류가 하나 되지는 않을 것이다. 만인구원론을 주장했다는데 그래갖고는 만인 구원이 안될 것이다.
사람이신 그리스도가 만유의 후사로서 모든 것을 상속받은 사람일 때 그 안에서 만유가 하나되지 그렇지 않으면 하나가 되기 어렵다. 나는 그렇게 생각한다. 자세히는 모르지만 예수 안에서가 아니면 통일이 안될 것이다. 하늘에 있는 것과 땅에 있는 것이 그리스도 안에서 통일된다는 에베소서 1장 말씀대로 하늘에 있는 것과 땅에 있는 것이 그리스도 안에서만 통일되지 그리스도 밖에서는 통일될 수 없다.
씨가 흙과 통일되려면 푸른 풀이 있어야 한다. 푸른 풀 속에 씨와 땅이 통일되어 있다. 그것이 통일이다. 몰트만은 좀 더 연구해봐야겠지만 나는 그럴 시간이 없다.
양승숙
십자가에서 내려오지 못한 예수를 목사님을 통해 처음 들었다. 예수님에 대해 많이 들었어도 “십자가에서 내려오지 못하고 죽은 예수가 바로 너다.” 그 말씀을 듣고 나서 인생의 본질, 정체성이 분명해 졌다. 소유와 존재가 구별되고 분명해졌다.
그리고 목사님을 통해 나는 예수님에게 완전히 중매되었다. 그 전에는 예수에게 별 관심이 없었는데 목사님 복음을 통해서 예수가 나의 원형이라고 알게 되었다. 나는 목사님을 통해 이 복음을 받아들였기 때문에 이것을 다른 사람에게 얘기할 때 목사님을 빼고 말할 수 없다. 마태복음, 누가복음이라고 하듯이 이 복음은 목사님의 전매특허다. 그래서 나는 여태 들어본 적이 없는 예수를 만났다. 이 복음을 이현래 복음이라 해도 나는 아멘이 된다.
이런 말을 하면 이현래를 신격화한다거나 이현래의 프레임 안에 갇혀 있다고 하는 사람들이 있지만 아무리 봐도 목사님은 신이 아니다. 목사님은 신적인 사람이 못되는데 오해하는 것이다.
목사님은 이현래 복음이라는 말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시는지?
이현래 목사
말하기가 대단히 조심스럽다. 잘못 들으면 곤란하기 때문이다. 바울도 나의 복음이라는 말을 했다. 그래도 괜찮았다. 바울이니까 괜찮은 것이다. 다른 이유는 없다. 바울이니까 괜찮은 것이다.
굳이 이현래 복음이라고 할 필요는 없는데 나를 통해서 이 복음을 들은 사람들은 내용은 그렇게 알고 있다. 좀전에 우점덕 자매가 목사님은 내 아버지라고 말했던 것과 같다. 하나님은 같은 하나님이고 아버지는 다 같은 아버지다. 인간사회에서는 내 아버지와 네 아버지가 다르다. 나와 너가 하나면 우리 아버지는 하나다. 근원적으로 우리가 하나면 아버지도 하나다. 숫자로 하나라는 의미가 아니라 한 계열이라는 뜻이다. 계열별로 말하면 한 하나님이고 한 형님이고 한 남편이다.
이것은 한 사람이다. “한 사람으로 말미암아 죄가 세상에 들어오고 한 사람으로 말미암아 의가 세상에 왔다.”는 말과 같다. 하나님 나라는 숫자적인 나라가 아니라 성질상으로 하나다. 천명이고 만명이고 한 성질을 가졌다. 하나다.
학교에서 성적을 매길 때 백점짜리 백 명을 모아놓는다 해서 만점이 되는 것이 아니다. 백점짜리를 만 명을 모아도 백점이다. 백점 실력밖에 안나온다. 만명을 모아서 실력을 짜내도 백점밖에 안나온다. 혼자도 백점이고 만명도 백점이다. 그런데 101점짜리가 하나 있다면 다른 것이다.
이런 성질로 함께 우리가 함께
예수 안에서 우리가 하나된다는 말은 이런 뜻이다. 같은 운명, 한 운명, 한 생명, 한 사람이다. 그러니까 중매장이가 곧 시집가는 사람이고 시집가는 사람이 곧 중매장이다. 여럿이 아니다. 이 개념을 갖는 것이 필요하다.
“한 사람 안에서 죄가 세상에 들어오고 한 사람 안에서 의가 세상에 왔다.” 바울의 이 말은 굉장히 위대한 말이다. 이 한 사람은 개인이 아니다. 한 사람이다. 여기 모인 여러분은 모두 예수 안에서 한 사람이다. 예수 안에 있는 것이 백점이라면 우리는 다 백점이고 예수 안에 있는 것이 90점이라면 우리는 다 90점이다.
자기 복음이 있으면 굳이 남의 복음을 말하지 않아도 된다. 그럴 필요가 없으니 안하는 것이지 필요하면 내 복음이라고 해도 된다. 바울도 어떤 경우에 필요하니까 나의 복음이라고 했다. 그렇다고 내 복음이라고 써 놓은 것은 없다. 마태가 전한 복음, 누가가 전한 복음이 마태복음 누가복음이다.
여러분이 속에서는 어떻게 생각하든 상관없다. 바울의 복음을 받았든, 베드로의 복음을 받았든 여러분은 복음을 받은 것이다. 상관은 없는데 잘못 말하면 내가 돌을 맞는다. 그러니까 조심해서 말하시기 바란다.
이지숙
이 복음은 보편적인 길이고 사람의 길이고 사람이 더 이상 덧붙일 것이 없는 하나님이 정해 주신 길이라고 말씀하셨다. 나에게는 구속의 복음을 말씀하시기 전에도 목사님 말씀이 넘치는 말씀이었다. 목사님과 교회를 만나 살고 있는 것 자체가 내게 넘치는 복이었다.
그래서 이 말씀을 하실 때 이것만으로도 충분한데 또 더 좋은 복을 말씀하시니 혼란이 왔다. 질문하고 싶은 것은 그 날에는 어린아이도 다 알 것이라고 했고 보편적이 될 것이라 했는데 이 말씀이 우리 교회 안에서도 보편적이지 않다. 무슨 말씀인지 깊이 들어야 되고 유사한 것이 있어서 확신이 없으면 또 그 말씀에 귀를 귀울이게 된다. 그래서 혼란스러운데 그 날에는 어린아이도 다 알 것이라고 한 복음의 상태가 어떤 것인지?
이현래 목사
새 언약의 내용은 아주 놀라운 것이다.
옛 언약은 특별한 사람이 받아온 것이다. 모세가 산에 올라가서 받아왔는데 아무도 그 산에 올라가지 못했다. 누구든지 접근하면 죽는다고 아무도 못오게 했다. 그 말은 그 시대에 그 사람 외에는 이 말씀을 받을 사람이 없었다는 뜻이다. 하나님을 만나면 죽는다는 것이다. 모세가 아니라 다른 사람이 모세가 들은 말을 들었으면 죽었다. 요즘 내가 한 말만 들어도 혼란이 온다는 사람이 있고 죽는다고 난리인데 모세가 들은 말은 어떻게 듣겠는가. 그 말은 모세 외에는 아무도 못듣는다. 그 말을 들으면 당장 죽는다. 육신이 죽는다기 보다 그 인생 자체가 망한다.
그래서 항상 모세가 있어야 했다. 하나님 말씀이 모세를 통해서 주어지면 그 다음 단계는 조금 쉬워졌다. 그 다음에 여호수아가 오면 쉬워졌다. 하늘에서 만나를 먹었는데 그 다음에는 땅에서 양식을 먹었다. 이렇게 점점 사역이 정상적으로 내려가면 모든 사람이 다 보고 그냥 알 수 있게 된다는 뜻이다.
사역자의 임무는 전에 한 말을 전하는 것이 아니다. 그것을 좀 더 쉽게 풀어나가야 한다. 그래서 마지막에는 어린아이로부터 어른에 이르기까지 다 보면 알아야 되지 언제까지 계시를 받는 사람이 따로 있고 듣는 사람 따로 있어야 하겠는가. 처음에는 우리가 하나님을 알기 어려우니까 모세처럼 그런 사람이라야 되지만 다음에는 그보다 더 쉽게, 그 다음에는 더 쉽게 알 수 있어야 한다.
기계를 만드는 것도 그렇다. 이번에 인공위성을 올렸다는데 처음에는 4년 5년을 연습해도 안됐다. 몇번 실패한 것이 축적되어서 이번에 즉방으로 올라갔다고 한다. 세계에서 일곱 번째로 위성을 보유한 나라가 되었다. 기술이 늘 발전해서 점점 쉬워진 것이다.
처음 만들었던 컴퓨터를 미국의 어느 박물관에 보관해 놓았는데 큰 방에 기계가 가득 차 있다. 그렇게 커도 지금 우리가 쓰는 조그마한 컴퓨터와 성능은 비교가 안된다. 처음에 우리는 286컴퓨터를 썼는데 지금은 그런 숫자로 계산할 수 없을만큼 기술이 발전했다. 점점 쉬워진 것이다.
하나님 말씀도 점점 쉬워져야 되지 어려워지면 되겠는가. 그러면 하나님도 피곤하고 사람도 피곤하게 된다. ‘성령의 도우심으로’라는 말은 맞는 말이다. 그런데 항상 그러고 있으면 되겠는가. 성령은 보이는 것도 아니고 만질 수 있는 것도 아니고 우리와 직접 대화가 되는 것도 아니다. 만일 성령이 우리를 알기만 한다면 “내가 이런 일을 하려고 하는데 도와주십시요.”라고 하면 될 텐데 그렇게 되지 않는다. 기도를 해 놓고도 성령이 도와주실지 아닐지 모른다. 끝나고 나면 ‘아, 성령이 역사하셨구나.’라고 아는 것이지 사전에 알 수는 없다.
사전에 알 수 없으면 소용이 없다. 물에 빠져 죽지 않으려면 사전에 물어봐야 되지 빠져 죽고 나면 어떻게 물어보겠는가. 전에는 성령의 도우심이 있었을지라도 이제는 그렇게 하면 안되는 것이다. 사역이 점점 발전하면 누구나 쉽게 알 수 있어야 한다.
십자가에 못박혀서 내려오지 못하고 죽은 예수를 보자. 눈으로 보면 알 수 있다. 성령의 도우심이 없어도 그냥 보면 안다. ‘아, 인생의 본질이 저렇구나. 저런 분도 죽는구나. 사람은 죽는구나.’라고 어린아이라도 알 수 있다. 그러니 신앙이 필요한가, 성령이 필요한가.
나는 이 복음이야 말로 신약의 마지막 복음이라고 생각한다. 누구나 보면 알 수 있으니까 마지막이다. ‘성령의 도우심으로’라고 하는데 나는 그런 것이 안되는 사람이다. 보이지 않는 하나님이 나를 도와주신 것을 알고 있다. 그런데 보이지는 않는다. 일이 끝나고 나면 ‘아, 하나님이 역사하셨구나.’라고 알뿐이다. 하나님이 나에게 영원히 그렇게 하시겠는가. 하나님이 눈에 환히 보여서 동으로 가는지 서로 가는지 안다면 무슨 인생 문제가 있겠는가.
성경에 있을지라도 그보다 더 발전하고 발전해서 만민이 다 볼 수 있는 날이 와야 한다. 그래서 사역자가 필요한 것이다. 400미터 계주를 하면 네 사람이 백미터씩 달린다. 마지막 골인하는 사람은 300미터에서 출발한다. 다 처음부터 달리면 계주가 아니다. 앞 사람의 바통을 이어 받아서 마지막 주자는 300미터부터 달려야 한다. 앞에서 선지자들이 왔으니까 우리는 300미터에서 시작해야 되지 처음부터 달리거나 200미터에서 달릴 필요가 없다. 300미터에 갖다 놓았으니까 200미터에 찾아가 봐야 바통이 없다.
계시가 그런 것이다. 우리가 하나님을 바로 알지 못하니까 누군가를 통해서 열려지고 또 열려져야 하는 것이다. 내가 눈으로 보는 것처럼 알 수 있게 열려져야 한다.
안죽고 살기만 하면 다 알게 될 것이다. 이거코 오래 살아서 볼 것인지, 아니면 지금 볼 것인지 이것이 우리에게 달려 있다.
양생회 김성훈
꽃과 향기 중 무엇이 존재고 무엇이 소유인가? 요즘 예수와 예수의 소유를 구분하는 사람들이 많은데 헷갈린다.
두 번째 질문은 종교인과 우리 교회 사람의 차이가 무엇인지.
이현래 목사
나도 옛날에 이것을 잘 몰랐다. 예수님에게 소유가 있다는 것을 몰랐다. 예수님에게 오면 좋은 것이 많아서 얻어먹었다. 잔치집에 가서 포도주도 좀 먹었고 어떤 분에게 은혜를 베풀면 나도 같은 은혜를 받았다. 그런데 혜택은 받았는데 그분의 존재는 몰랐다. 내가 마지막에 예수님의 존재를 몰랐다는 말이 그 말이다. 포도주를 먹지 못했다는 말이 아니다. 포도주도 먹고 떡도 먹었다. 그리고 여러분에게 갖다 나눠주기도 했다.
문제는 이 사람이 누군지를 모르겠다는 것이다. 내가 만날 수 없는 사람이었던 것이다. 내가 알 수 없는 사람이었다. 그러니 결혼을 못했다.
결혼은 안다는 뜻이다. 남자가 여자를 알고 여자가 남자를 아는 것이 결혼이다. 나는 결혼할 수 없었던 것이다. 친구처럼 놀수는 있는데 결혼할 수 없었다. 만나면 좋아도 모르니까 결혼을 못했다.
존재와 소유는 이렇게 다르다. 예수님만큼 소유가 신비롭고 놀라운 분은 없다. 어떤 사람은 물질이 엄청나게 많다. 그것은 눈으로 보면 알 수 있다. 그런데 예수님 소유는 우리가 모른다. 소유 자체도 모르고 더구나 그 소유를 가진 분은 더욱 모른다.
신약성경, 특별히 복음서에 나타난 예수를 보면 결함이 전혀 없는 완전한 사람이다. 이것을 사람들이 그대로 두지 않고 기어코 후벼팠다. 어떤 신학자는 “이것은 옛날 신화적 표현이지 실체는 그것이 아니다.”라며 옷을 벗기고 껍데기를 벗겼다. 그것을 비신화화론이라고 한다. 그렇다면 이분의 정체가 무엇인가? 확실하게 정체를 까놓았으면 우리가 볼 수 있을 텐데 그들이 까놓은 정체를 알 수 없었다.
그분의 정체성이 확실하게 드러난 것이 십자가에 죽은 자리다. 죽을 때 보니까 소유가 다 없어졌다. 내려와 보라는 것은 그 소유를 보고 한 말이다. 그래서 “당신 같으면 내려올 수 있지 않느냐?”, “예수님, 지금 내려와 보세요.”라고 했던 것이다. 제자들도 얼마나 애타게 내려오기를 기대하고 있었겠는가. 거기서 만일 내려오기만 하면 제자들은 기고만장했을 것이다. 모든 인간이 다 엎드려서 “주여, 우리를 떠나소서.”라고 했을 것이다. 내려오기를 제일 갈망한 사람이 제자들이다. 그러나 못내려오고 죽었다. 그래서 다 실망하고 가 버렸다. 기대했던 사람이었으면 실망했겠는가. 기대했던 사람이 아니니까 실망하고 가버린 것이다.
존재는 무엇이고 소유는 무엇인가? 여기서 갈라졌다. 십자가를 지고 죽은 것은 존재고 떠나간 것은 소유다.
우리도 마찬가지다. 우리는 신비한 소유는 없으니까 죽으면 존재만 남는다. 그러나 소유는 아무 소용없다. 이병철씨가 죽으나 내가 죽으나 매한가지다. 아무리 많은 것을 남겨놓았어도 그것이 이병철씨가 아니다. 이병철씨에 비하면 나는 남겨놓을 것도 없다. 그래도 살았을 때는 그것이 내 소유였다.
우리가 누구에게 “무엇을 합니까? 직장은 어디 다닙니까? 학교는 어디 나왔습니까?”라고 묻는 것은 그 사람의 소유를 묻는 것이다. 우리는 소유를 보고 그 사람을 알아왔다. 그러니 완전한 관계가 안되는 것이다. 그래서 초등학교 때 친구가 제일 친하다. 그때는 멋도 모르고 뛰어다니며 살았기 때문이다. 이번에 누가 사진을 보여주는데 국무총리가 된 사람이 초등학교 동창생을 공관으로 불렀다고 한다. 높은 자리에 가니까 국민학교 때 친구들이 그리웠던 모양이다.
우리는 원래 있던 사람이 무엇이었는지 모른다. 내가 원래 어떤 사람인지 모르는 것이다. 존재와 소유, 꽃과 향기는 다르다. 꽃에서 향기가 나니까 향기도 소유라고 할 수 있지만 사실은 존재에서 풍기는 것이다. 향기도 입자라고 한다. 존재가 분해되어 나온 것이 향기니까 이런 경우는 내가 대답하기 곤란한데 그래도 의미는 전달되었을 것이다.
예수의 소유는 무엇인가, 우리가 모르는 그것이다. 볼트만은 신화적인 것이라고 했는데 우리는 모르는 것이 좋다. 신화적인 것인지 아닌지 모르니까 그렇게밖에 표현이 안되니까 그렇게 표현한 것이다. 신화적이라면 신화만 벗기면 되는데 신화를 벗기면 뭔지 모른다. 그러면 또 다시 신화적인 예수가 아니라 이성적인 예수를 만들 것 아닌가. 차라리 그럴 바에는 신화적인 예수가 낫다. 이성적인 예수를 만들어 놓으면 곤란하다. 비신화화, 이것은 세상을 떠들썩하게 한 굉장히 엽기적인 발상이었다.
종교인과 우리 교회 사람의 차이가 궁금하다고 했는데 함부로 할 말이 아니다. “너는 종교인이다.” 이런 말을 함부로 하면 안된다. 주의하기 바란다. 누구를 대하든 너도 사람이고 나도 사람이라고 생각하면 쉽다. 그 사람이 불교인이든 기독교인이든 따질 필요가 없다. 왜냐하면 그런 것과 우리는 관계가 없기 때문이다. 생명의 노선이 아니니까 그런 것을 꼭 알 필요가 없다.
나도 옛날에는 구별하려고 했는데 필요가 없어서 안한다. 누구라도 인생의 본질 속에 있으면 다 만나지는 것이 너와 나고 본질을 벗어나면 차이가 많아지니까 서로를 모른다.
석가모니는 유아독존이라 했는데 그렇게 되면 다른 사람과 대화가 어렵지 않겠는가. 높은 경지에 이른 것은 맞는데 우리 같은 사람은 상대가 안된다. 종교인이니 그런 말을 할 필요가 없다. 종교인이든 아니든 사람은 사람이다. 그렇게 알면 좋겠다.
이주형
아담도 인류를 대표하고 예수도 인류를 대표한다. 아담도 죽음을 피하려고 선악과를 먹었으나 결국 죽었고 예수도 “하나님, 하나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십니까.” 하시고 죽음을 피하지 못하고 죽었다. 둘다 죽음을 싫어했으며 원치 않는 죽음을 맞았다. 그러나 둘의 죽음의 결과는 너무나 다르다. 아담의 결과는 하나님과의 관계가 끊어진 것이고 예수의 결과는 하나님과의 관계가 회복되고 연합이 된 것이다. 왜 두 사람의 죽음의 결과가 다른 것인가?
이현래 목사
사람은 누구나 죽음을 제일 싫어한다. 그런데 결국은 죽음이 왔다. 한 사람은 안죽으려고 나갔는데 죽고 말았다. 안죽고 싶었는데 죽은 것이다.
선악과라는 것이 꼭 도덕적인 문제만이 아니다. 옳고 그름은 좋고 나쁜 것이라는 뜻이다. 우리 인간에게 가장 좋은 것이 무엇이고 가장 싫은 것이 무엇인가. 가장 좋은 것은 안죽고 사는 것이고 가장 싫은 것은 죽으면 헛일이 되는 것이다.
뱀이 유혹을 했을 때 왜 그렇게 먹음직도 하고 보암직도 하고 지혜롭게 할 만큼 탐스럽기도 했겠는가. 세상에서 가장 먹음직도 하고 보암직도 하고 지혜롭게 할 만큼 탐스러운 것이 무엇이겠는가. 죽지 않고 사는 것이 아니겠는가. 그래서 두말도 안하고 먹어버린 것이다.
나도 죽음 앞에 있으니까 그런 생각이 들었다. 만일 이럴 때 누가 나에게 약 하나 주면서 “이것을 먹으면 안죽고 산다.”고 하면 내가 어찌하겠는가? “예수 안믿고 이것만 먹으면 된다.”고 하면 어쩌겠는가. 이런 생각이 들었다. ‘잠시 동안 거짓말을 할까? 우선 뱀에게 거짓말 좀 해서 먹고 안죽으면 되지 않겠는가.’ 이런 얄팍한 생각이 들었다. 그러니 인류를 대표한 아담, 죽음이라는 문제를 숙명을 가진 아담이 이 말을 들었을 때 먹지 않을 수 있겠는가. 지금 우리도 마찬가지다. 다 먹게 되어 있다.
둘 다 죽음을 피하고 싶었다. 하지만 사람이니까 죽은 것이다. 한 사람은 살려고 도망쳤다가 죽은 부끄러운 죽음이고, 한 사람은 살려고 도망친 것이 아니라 죽을지라도 아버지 뜻대로 가겠다고 하신 분이다. 그래서 우리에게 복음이 된 것이다. ‘저렇게 충성스러운 사람, 온전한 사람도 역시 사람이니까 죽는구나. 아담이 죽는 것은 당연하지만 저 사람은 안죽어야 하는데…….’ 이런 사람인데도 죽었다.
그러므로 ‘무엇을 해도 사람은 죽는다.’는 사실에 대해서 조금도 여유를 주면 안된다. 혹시 선악과를 먹고 죽지 않게 되면 몰라도 예수도 죽는데 우리가 잘해봤자 마찬가지 아닌가. 소유는 어차피 소유다. 잘할 생각을 하는 것이 나쁜 것은 아니지만 그렇게 하다가 고생하느니 차려놓은 밥상이나 먹는 것이 좋지 않겠는가. 대대손손 안됐는데 안될 것을 또 한다고 되겠는가. 어차피 안될 일이니까 잘 차려놓은 구역만 지키면 된다. “내게 줄로 재어 준 구역은 아름다운 곳에 있음이여 나의 기업이 실로 아름답도다.”라며 감사하면 행복이다. 그러나 줄로 개어 준 구역을 거부하고 나오면 불행이다. 인생은 간단하다. 줄로 재어 준 구역 안에 있으면 행복하고 그곳을 벗어나면 불행이다.
씨를 심으면 흙은 열매를 내는 것이 자기에게 정해진 경계다. 흙이 ‘아니, 열매는 내가 만드는데 주인이 다 가져가 버리면 나는 무엇인가.’ 하면 허무하지만 ‘나 같은 흙이 이런 열매를 만들어서 주인에게 드리다니 영광이구나.’ 하면 행복이다. 똑같은 일인데 생각하기에 따라 불행하기도 하고 행복하기도 한 것이다.
인생이 왜 허무하다고 하는가. 자기가 무엇을 이루려고 하다가 못이루니까 허무한 것이다. 그런데 우리가 이루려고 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그렇게 만들어 놓으셨다. 씨를 심으면 열매가 사람 속에서 자라서 맛있는 열매가 되도록 만들어 놓으셨다. 흙이 노력해서 된 것이 아니다. 우리가 순수한 입장에 있다면 하나님 말씀이 우리에게 들어오면 당연히 열매가 된다. 씨 자체가 열매를 맺는 것이다.
부활에 대해서 어떤 모양으로 부활하느냐고 묻는 사람들에게 바울은 “어리석은 자여, 하나님이 그 뜻대로 저에게 형체를 주시되 각 종자에게 그 형체를 주시느니라.”라고 말했다. 호박을 거두려고 호박을 그대로 심는 사람은 없다. 씨를 심으면 된다.
씨만 보고는 호박이 얼마나 큰지 아무도 모른다. 한번 봤으니 아는 것이지 안보고는 모른다. 호박씨를 보고 호박이 날지 알 사람은 아무도 없다. 씨를 받았으면 재배해야 한다.
최정임
우리는 분명히 위치를 이탈해서 정체성을 잃어버린 것이 확실하다. 모든 문제가 위치를 이탈한 데서 생겨난 것 같다. 하나님같이 되고 싶어서 이탈했다고 하셨는데 하나님같이 되고 싶다는 말씀이 이해가 될듯하면서 안된다. 신화적 예수, 이성적 예수라고 하신 것이 그 부분인 것 같다. 하나님 같이 되었다는 말이 구체적으로 무엇인지?
이현래 목사
하나님 같이 된다는 말은 물론 경우에 따라 의미가 여러 가지가 있을 수 있다. 예수님에게서 하나님 같이 된 것은 그의 능력이다. 그를 볼 때마다 ‘저것은 사람이 할 수 없는 일이구나. 저가 누구기에 바람과 바다를 잔잔케 하는가. 우리가 볼 때 저것은 인간이 할 수 있는 것이 못된다.’ 이렇게 보였던 것이다. 이보다 큰 소유는 없다. 다른 것을 버릴 수 있는데 이것은 버리기 어려운 것, 버릴 수 없는 것이다. 왜냐하면 하나님과의 연합에서 일어난 일이니까 버릴 수 없는 것이다. “하나님과 연합하면 저렇게 된다.” 이렇게 말할 수 있는 일이다.
그러면 다른 사람에게서는 왜 나타나지 않았는가. 다른 사람에게서는 다른 면으로 나타난다. 그 시대에는 그렇게 필요하기 때문에 그렇게 나타난 것에 불과하다. 이것을 신화적이냐 아니냐 할 필요가 없다.
지금 우리도 하나님과 연합하면 신이 될 수도 있다. 하나님께서 모세에게 “바로에게 말하여 이스라엘 자손을 그 땅에서 내어 보내게 하라.” 하셨을 때 산에서 여호와 만났을 때 가라 내 백성을 인도하라 하셨을 때 모세는 “나는 입이 둔한 자이오니 바로가 어찌 나를 들으리이까.”라며 몇번이나 고사했다. 그때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볼지어다. 내가 너로 바로에게 신이 되게 하였은즉 네 형 아론은 네 대언자가 되리니…….”라고 하셨다. 어떤 경우에는 신이 될 수 있다.
바로가 노예처럼 부려먹던 이백만이 넘는 인구를 데려가라는 말을 쉽게 했겠는가. 신으로 안보였으면 그렇게 했겠는가. 마지막 재앙이 내려지지 빨리 나가라고 했던 것이다. 모세가 신으로 보였기 때문이다. 사람은 신이 될 수 있다. 하지만 본질은 신이 아니다. 예수님도 그 말을 인용해서 “하나님의 말씀을 받은 사람들을 신이라 하셨거든 너희가 어찌 내가 하나님 아들이라 하는 것으로 참람하다 하느냐.” 하셨다.
나도 작은 경험이지만 그런 경험이 있다. 나는 별 말을 안했다. 그런데 즉석에서 마음이 돌아서면서 “예, 그렇게 하겠습니다.”라고 하는 것이었다. 그 후에 나는 하나님이 쓰시면 그렇게 될 수 있다는 것을 알았다. 나는 생전 누구에게 말을 해서 설득을 해 본 일이 없다. 설득을 하려고 하면 실패했다. 그런데 그런 경험을 하니 하나님께서 필요하면 나를 신으로 쓰실 수 있다는 것을 알았다. 하나님은 우리를 신으로 쓰실 수 있다. 그렇다고 해서 그것이 내가 아니다.
모세가 그렇게 했지만 신은 아니다. 비스가 산에서 멀리 요단 동편을 바라보고 죽었다. 그 땅은 하나님이 모세에게 허락하시지 않은 땅이다. 모세는 철저하게 인간이었다. 반석을 치라 하셨을 때 두 번을 쳤다 해서 가나안 땅에 못들어간 것이다. 보통 사람 같으면 열 번을 쳤어도 들어갈 수 있는 일인데 모세가 그랬기 때문에 봐 주실 수 없었던 것이다. 그는 신처럼 되었기 때문이다. 모세가 큰 잘못을 해서 그런 것이 아니다. 지면에 모세보다 온유한 사람이 없다고 했다. 그런 사람인데 단지 반석을 두번 쳤다는 이유로 가나안 땅에 들어가지 못했다.
우리는 사람이지만 필요하면 신 같이 될 수 있다. 우리는 하나님이 형상으로 만들어졌으니까 무엇이 될지 모른다. 어떤 모양이 될지, 나를 하나님이 무엇으로 쓰실지 모른다. 신으로 쓰실지 당나귀로 쓰실지 모른다. 발람이 가지 못할 곳으로 가자 타고가던 당나귀가 버티면서 발람에게 예언을 했다. 당나귀도 선지자노릇을 한 것이다. 하나님께서 당나귀를 선지자로 사용하셨다. 그러니 하나님이 사용하시면 내가 무엇이 될지 모른다. 이것이 인생의 위치다. 그러니 얼마나 놀라운 위치인가. 언제 어떤 일이 있을지 모르는 것이다.
나는 몇번 그런 작은 경험을 했다. 내가 한 말은 별 것 아니고 일상적인 말인데 상대방이 확 뒤집히는 역사가 생겼던 것이다. 나는 그런 능력이 없다. 그래서 그런 신적인 능력을 얻어 보려고 삼각산으로 돌아다녔는데 도저히 기미가 없어서 불가능하다고 알았다. 그런데 어느 날 그런 역사가 있었다. 그렇다고 다음에도 그런 일이 있었던 것이 아니다.
예수는 죽었지만 하나님께서 우리를 위해서 그를 쓰셨다. 내가 이것을 우연히 발견했겠는가. 우연히 발견한 것처럼 보이지만 답답하니까 발견하게 된 것이다. 그래도 하나님이 눈을 가리셨으면 못보았을 것이다. 내가 굳이 이 말을 안했지만 하나님이 눈을 열어주셔서 본 것이다. 그렇다고 ‘하나님께서 어떻게 눈을 열어주시는가?’라고 생각하면 곤란하다. 나도 모른다. 그런데 왜 보였을까? 생각해 보니 하나님께서 눈을 열어주셨다고밖에 말할 수 없는 것이다.
죽음의 결과는 너무나 달랐다. 아담의 죽음을 보면서 ‘인생은 허무하다. 잘난체해봤자 헛일이다. 아무리 잘나봤자 별 것 없구나.’라고 알 수 있다. 그런데 예수의 죽음을 보면 ‘저기에 진실이 있구나. 하나님이 저 진실을 사용하시는구나.’라고 알 수 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가 그 안으로 구속되는 것이다.
아담의 죽음과 예수의 죽음은 이탈과 연합에서 오는 다른 결과다.
김성식
구속의 복음을 알고 너무 감사해서 어쩔 줄 모르는데 이 복음을 알면 부부사이도 알콩달콩할 것으로 기대했는데 그렇지 않았다. 어떤 형제는 안보이는 주님과 결혼하고 나면 육신의 자매와도 진짜 결혼이 되어 꿀방울이 떨어진다고 하는데 그렇지 못한 우리 부부는 주님과 진짜 결혼을 못한 것인가?
이현래 목사
아마 재미있는 얘기가 많을 것 같다. “이러면 어찌 됩니까? 저러면 어찌 됩니까?” 이런 질문이 많다. 나는 그런 질문이 안좋다고 생각한다. 배고프면 우선 먹고 볼 일이지 “이것을 먹으면 어찌 됩니까?”라고 물으면 되겠는가. 배가 고프면 우선 먹과 봐야 한다. 너무 배가 고프면 쉬었는지 아닌지 구별하지 못할 때도 있다. 먹고 설사할지도 모르고 먹는다. 그런 사람이 먼저 먹고 여유 있는 사람은 나중 먹는 법이다.
우리 집도 코드는 전혀 안맞는다. 그래서 늘 투덜투덜하는데 그렇다고 못사는 것도 아니다. 그러니 이상하지 않은가. 50년 이상을 살았어도 코드가 안맞는다. 타고난 것이 달라지겠는가. 달라질 리가 없다. 그런데 한 곳을 같이 바라볼 때는 딱 맞다.
부부는 마주 보는 것이 아니라 한 곳을 바라봐야 한다는 말이 있다. 한 곳을 바라볼 수 있는 판이 있다는 것이 행복이다. 볼 데가 있어야 보지 않겠는가. 각자 제팔 제 흔들고 살아도 싸우지 않는 것이 낫지만 한 곳을 바라볼 수 있어야 제일 좋지 않겠는가. 팔은 각자 흔들지 한 곳을 바라본다고 남의 손가락을 붙잡고 흔들겠는가.
온 인류에게 하나님께서 한 곳을 바라보도록 지어놓으셨으니 너무 상심하지 말기 바란다. 환장커플도 아니고 환상커플도 아니라 정상적인 커플이다. 한곳을 바라볼 수 있는 것이 행복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