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제 : 청교도 운동과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
(이 글은 유튜브 박용규TV에 올라온 청교도 운동과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의 강의 내용을 녹취한 것임을 밝힙니다.)
https://www.youtube.com/watch?v=c0YWMPp2gLo
안녕하십니까?
총신신학대학원 명예교수 박용규입니다.
청교도 운동과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에 대해서 함께 살펴보겠습니다.
1570년부터 1643년까지 영국 내 청교도 운동이 영향력 있는 운동으로 발전합니다.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은 그 영향으로 만들어진 결과물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우리는 엘리자베스 1세 여왕의 치하에서 청교도 운동이 발흥했고 그 뒤를 이어서 왕위를 계승한 제임스 1세 그리고 제임스 1세의 뒤를 이어 왕위를 계승한 찰스1세 동안에 청교도 운동은 박해 가운데서도 놀랍게 영향력을 확대했다고 하는 사실을 기억할 필요가 있습니다.
찰스 1세 치하의 의회파와 왕당파 간에 전투가 벌어지고 스코틀랜드 군대의 지원을 받아 의회파가 승리합니다.
스코틀랜드 언약파 군대의 지원을 받을 때 약속한 대로 웨스트민스터 회의가 열렸고 웨스트민스터 회의에서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을 제출해서 이것이 1647년 스코틀랜드 의회에 의해 인준을 받은 것입니다.
우리는 이와 같은 역사적 배경을 좀 더 이해하기 위해서 우리는 그 당시 시대적인 배경을 좀 더 면밀하게 살펴볼 필요가 있습니다.
먼저 로마 카톨릭으로 회귀하려고 하는 찰스 1세와 의회와의 충돌을 우리가 이해해야 합니다.
찰스 1세와 영국 의회의 충돌
1625년 제임스 1세의 뒤를 이어 왕위를 계승한 찰스 1세는 부왕의 정책을 그대로 계승해서 왕실의 강력한 중앙 집권을 강화시킵니다.
그는 청교도주의와 의회주의를 동시에 반대했기 때문에 자연히 청교도 및 의회와 왕 사이에는 충돌이 생겨서 세 번이나 의회가 해산되는 어려움을 겪은 것입니다.
찰스 1세는 1633년에 임명된 캔터베리 대주교 윌리엄 로우드를 통해서 청교도 성직자들을 박해하기 시작했습니다.
이를 위해서 로우드는 필요 적절한 인물이었습니다.
그는 신학적으로 알미니안적이어서 칼빈주의 신앙을 가진 영국의 청교도들을 달가워하지 않았습니다.
그의 탄압은 아주 혹독했습니다.
어떤 청교도들은 형틀에서 고문을 당하기도 하고 귀가 잘리는 수모를 당하기도 했습니다.
심지어 윌리엄 프라인(Prynne)의 뺨에는 선동자(Sedifious Lebeller)라고 하는 제목의 약자인 SL을 새겨 넣기도 했습니다.
프라이는 3년 전에 극장과 연극에 참여한 여왕을 공격했다는 이유로 이미 귀가 잘렸던 아주 독실한 청교도 지도자였습니다.
이런 상황에서 왕은 로우드로 하여금 영국만 아니라 스코틀랜드까지 감독할 것을 요청했습니다.
로우드가 영국교회와 같은 예배형식을 강요하고 영국 국교회의 공동기도서를 스코트틀랜드에도 강요해서 종교적인 통일을 기도했습니다.
그런데 결과는 오히려 정반대였습니다.
찰스와 로우드의 종교정책은 종교적인 내분을 자초했고 정부의 입장을 더욱 궁지로 몰아넣었습니다.
칼빈주의 색채가 뚜렷한 스코틀랜드교회의 총회가 영국의 종교정책에 반발한 것입니다.
에딘버러에서 1637년 7월 강력한 저항운동이 발생했고 1638년 12월에 글래스고우에서 열린 스코틀랜드 총회는 왕실의 명령을 거부하고 감독제도를 폐지해 버렸고 스코틀랜드 교회를 장로교 원칙대로 재조직하기로 결정했습니다.
1638년 2월 스코틀랜드 사람들은 전통적인 종교와 정치적 자유를 지지하는 국민조약으로 알려진 문서를 작성하고 대다수의 스코틀랜드 사람들이 여기에 서약했습니다.
이것은 찰스 1세의 권위에 대한 직접적인 도전이었습니다.
찰스의 내정 간섭이 오히려 반란을 유발하는 결과를 낳은 것입니다.
의회파의 승리와 웨스트민스터 회의
의회파와 왕당파와의 전투에서 의회파가 승리하고 그리고 웨스트민스터 회의가 열리게 됩니다.
찰스 1세는 스코틀랜드 사람들과 타협을 모색하든지 아니면 강압적인 정책을 사용하든지 결단을 내려야하는 상황에 놓이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찰스 1세는 1638년 6월에 후자 쪽으로 기울었고 스코틀랜드 사람들을 진압하기 위해서 군대 동원령을 내렸습니다.
그런데 스코틀랜드 사람들이 대항해서 효과적인 전쟁을 수행할 만큼의 자금이 없었기 때문에 왕은 전비를 마련하기 위해서 1640년 4월에 의회를 소집한 것입니다.
4월에 소집된 의회는 전비 문제에는 관심이 없었고 왕의 정치 및 종교 정책에 관해서 불만만 늘어놓자 찰스 1세는 2주만에 의회를 해산했습니다.
바로 이것이 단기의회로 역사에 알려진 의회였습니다.
찰스 1세의 군대는 스코틀랜드 언약파 군대와의 전투에서 크게 패합니다.
스코틀랜드 군대가 영국에 쳐들어와자 찰스 1세는 스코틀랜드 군대의 요구를 들어주는 조건으로 전쟁을 종식합니다.
그래서 이 욕구는 영국의회를 소집하는 것이어서 왕은 11월에 다시 의회를 소집합니다.
그 결과 역사사아 중요한 장기 의회(1640~1660) 1640년에서 1660에 장기 의회가 이렇게 시작했습니다.
의회는 다수가 장로교 청교도였고 이미 왕에게서 마음이 떠나 있었기 때문에 왕을 기소할 움직임을 갖고 있었던 것입니다.
1641년 의회는 자기들의 동의 없이 왕이 일방적으로 의회를 해산할 수 없다고 하는 법령을 통과시키는 한편 청교도에 반대하는 인사들을 의회에서 제거하고 의회 직속병사들을 모집했습니다.
장기 의회는 왕과 대립해서 1642년 왕당파와 의회파로 나뉘어서 7년간의 내전을 치르게 되었습니다.
이제 왕과 의회간의 충돌이 피할 수 없게 되자 왕과 의회 간의 분쟁이 결국은 내란으로 이어졌고 영국 국민들은 자연히 둘 중에 한쪽을 지원하지 않으면 안 되었습니다.
귀족층들은 왕을 지원했고 민중들은 의회를 지원했습니다.
주변 국가들도 영국의 내전에 대한 자신들의 입장을 분명히 천명하지 않으면 안 되는 상황이 되었습니다.
교회에서 정치적으로 장로회 주의였던 스코틀랜드는 의회를 지원했고 카톨릭이었던 아일랜드는 왕을 지원했습니다.
1642년에 의회와 왕 사이의 전쟁이 일어나서 참으로 이러한 어려운 상황에 청교도였던 존 핌이 의회파를 규합합니다.
1643년 9월에 의회파와 스코틀랜드 언약파 사이에 ‘엄숙동맹 및 언약’이 체결되어서 이와 같은 맹약에 따라서 스코틀랜드 군대가 의회를 돕기 위해 참전을 합니다.
스코틀랜드 군대의 참전은 영국의 교회가 스코틀랜드 교회와 같은 장로교회로 과감하게 개혁하는 방향으로 추진한다는 조건하에 이루어졌습니다.
결국 의회파가 왕당파와의 전투에서 승리하고 의회는 교회의 개혁을 과감하게 시도하고 개혁을 위해서 교직자들의 총회를 소집해 줄 것을 찰스 1세에게 요구합니다.
그러나 왕은 다섯 번이나 이를 거부합니다.
그래서 상원의 동의를 얻어서 웨스트민스터 총회를 웨스트민스터 사원 헨리 7세 채플에서 개최하기로 결정을 내렸습니다.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과 그 영향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의 작성과 그것이 미친 영향은 어떤 결과를 가져다주었을까요?
영국과 스코틀랜드 대표들이 런던의 웨스트민스터 사원에 모여서 웨스트민스터 회의를 열었습니다.
의회는 1643년 감독제도를 폐지하고 교회와 교회의 정치 및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7월 1일 상원의원 10명 하원의원 20명 그리고 121명의 성직자들 전체 총대 151명이 참석했고 스코틀랜드 교회도 5명의 목사와 3명의 장로 그래서 8명의 대표를 파송했습니다.
스코틀랜드의 협력을 확보하기 위해서 감독제도를 폐지하고 장로제도를 옹호하고 영국 스코틀랜드 아일랜드의 종교의 일치를 최대한 실시한다고 하는 결정을 내렸습니다.
1643년 7월 1일 첫 회의가 열렸고 1649년 2월 22일 마지막 회의가 열렸습니다.
5년 6개월 동안 열렸고 1,163번의 회의가 진행되었습니다.
웨스트민스터 회의는 유명한 예배 모범(1645) 장로교회의 정치규범(1645)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1646), 소요리문답(1648) 이렇게 장로교 표준문서를 준비해서 국회에 제출합니다.
이 신앙고백은 1647년 8월 27일 스코틀랜드 총회의 비준을 받아서 스코틀랜드 미국 장로교의 골격이 되고 영국 국회도 이 신앙고백을 다소 수정해서 부분적으로 1648년 6월에 승인합니다.
1646년에 웨스트민스터 총회가 신앙고백을 비준해 줄 것을 영국 의회에 요청했지만 영국 의회는 신앙고백의 각 조항에 성경구절을 제출하라고 요구하면서 비준을 연기합니다.
이와는 달리 스코틀랜드 의회는 1647년에 아무런 조건 없이 신앙고백을 비준한 것입니다.
결국 영국의회도 1648년 부분적으로 비준했다가 명예혁명으로 왕 위에 오른 윌리엄 3세 그리고 메어리 2세 치하였던 1690년에 영국 의회도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을 비준합니다.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은 이후에 미국과 영국의 많은 교회들에게 영향을 끼치게 됩니다.
1648년에 ‘케임브리지 강령’, 그리고 1658년에 회중주의자들의 ‘사보이 선언문’ 1689년에 침례신앙고백서 그리고 이를 약간 수정한 1742년에 필라델피아 신앙고백서는 모두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에 뿌리를 두고 있다고 볼 수 있습니다.
그리고 미국 장로교도 1789년 총회가 결성되면서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을 공식적으로 미국 장로교 신앙고백으로 채택합니다.
다만 교회와 정부와 관련된 부분을 삭제하고 교황을 적 그리스도로 규정한 부분을 삭제하고 수정해서 받아들이게 됩니다.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의 의의
이제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의 교회사적인 의의가 무엇일까 하는 부분을 우리가 좀 정리해 보길 원합니다.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은 33개 조항으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이 신앙고백은 칼빈주의 교리를 가장 잘 해석한 것으로 유명합니다.
이 신앙고백은 1618년에서 1619년에 작성된 도르트 신조 이후에 30년 만에 개혁주의 공동체가 이룩한 쾌거라고 평가를 받고 있습니다.
이것을 가르쳐서 유명한 청교도 지도자였던 리처드 백스터는 사도시대 이후로 도르트 회의와 웨스트민스터 회의보다 더 거룩한 회의는 없었다고 힘주어서 말했습니다.
이 신앙고백은 성경관에 있어서 칼빈을 따라 성경의 원본이 오류가 없는 하나님의 말씀임을 명문화하고 성경에 대한 영감과 성경의 무오성을 특별히 강조하고 있습니다.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은 예정론에 있어서 도르트 신조의 타락후 예정론(Infralapsarianism)을 따르지 않고 타락전 예정론(Supralapsarianism)을 수용했습니다.
이 신앙고백의 또 하나의 특징은 이중예정론에 대한 항목입니다.
어떤 사람은 구원으로 어떤 사람들을 멸망으로 예정하셨다고 하는 8개항에 걸쳐서 자세하게 이중예정론을 명문화시키고 있습니다.
이런 예정론은 베자 이후 개혁파 정통주의자들에 의해서 개혁주의 정통으로 강조되어 왔던 예정론 형태였던 것입니다.
또한 이 신앙고백은 루터와 달리 율법과 복음을 이원론적인 관점에서 보지 않고 다 같이 은혜의 계약 속에 포함시키고 있습니다.
이것은 칼빈의 사상을 그대로 반영한 것이라고 하는 평가를 받고 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에는 언약신학이 강하게 나타납니다.
행위언약과 은혜언약이 바로 그것입니다.
전자는 하나님이 인간의 대표 아담에게 분명한 약속을 하였으나 범죄로 인해 그와 그 후혼이 약속하신 모든 복을 잃게 되어 하나님이 인간이 실패한 행위언약 대신 그리스도를 통한 은혜언약을 실시하셨다고 하는 것입니다.
원래 언약신학의 기원은 쯔빙글리에게서 찾아볼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것을 신학적으로 정립한 사람은 쯔빙글리의 제자 불링거와 브르네커 – 라이덴 대학의 요한 콕세이우스(1603~1669)라고 할 수 있습니다.
1603년에서 1669년까지 살았던 인물이죠. 콕세이우스는 1648년에 “하나님의 언약에 관한 교리”를 써서 개혁주의 신학을 집대성한 개혁파의 언약신학의 최고의 권위자라고 할 수 있습니다.
종합결론
결론적으로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은 청교도 운동의 결실이었고 이 신앙고백은 세계 장로교회의 표준 문서가 되었고 장로교회뿐만이 아니라 칼빈주의적인 회중교회와 칼빈주의적인 침례교회에게도 지대한 영향을 끼쳤습니다.
독일개혁교회 하이델베르크 요리문답, 네덜란드의 칼빈주의 도르트신조, 프랑스 개혁교회의 벨직 신앙고백서가 개혁교회의 삼대 신앙고백이라고 한다면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은 장로교회의 유일한 표준문서라고 할 수 있습니다.
또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은 영국과 미국 전 세계의 장로교의 표준문서로 소중하게 계승되고 있는 것입니다.
한국의 대부분의 장로교회도 이 신앙고백을 표준문서로 받아들이고 있습니다.
오늘의 강의는 여기까지 입니다. 끝까지 시청해 주신 시청자 여러분들과 구독자 여러분들께 진심으로 감사드립니다.
하나님의 크신 은혜가 여러분들과 함께 하시기를 간절히 소망합니다.
대단히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