墓誌文은 공의 사망당시에 공과 가장 가까운 유족이나 지인들에 의해서 제작되었기 때문에 생존시의 이력이나 당시 상황을 자세히 알수 있는 자료입니다.
현재 우리나라에서 발견된 묘지문은 약 200여개로 그 중에서 오종의 선조님 묘지문이 발견되었다는 것은 우리에겐 큰 자산이며 귀중한 자료가 되는 것입니다. 현재와 같이 묘비를 묘소앞에 설치할 경우 비바람에 마모되어 수백년이 지나면 글자의 판독이 어려울 텐데 고려시대에는 묘소 내부에 묘지석을 같이 묻었기 때문에 오랜시간이 경과되어도 글자의 해석이 가능하며 국가적으로도 이 자료를 전부 종합하여 연구하면서 하나의 커다란 역사자료로 활용하고 있습니다.
지난번 대종회보 제20호, 제21호에서 언급한 바와 같이 묘지문의 내용이 족보의 내용과 대부분 일치한다면 문제가 없으나 차이가 있다면 대종회에서는 차이점에 대하여 심각하게 연구, 검토할 필요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묘지문은 돌아가신 분의 가장 가까운 가족들과 지인들에 의해서 제작되었고 공의 평생의 행적을 기록했다는 측면에서 묘지문의 한글자 한글자를 소중히 여기고 연구하는 자세가 필요하며 현재 족보와 차이가 발견된 몇가지 문제점에 대해 살펴보고자 합니다.
첫 번째로, 복경공과 공의 형제분들의 휘자 문제인데 이것은 지난 대종회보 제20호, 제21호에서 이미 언급한 바가 있으므로 더 이상의 내용은 생략합니다. 대종회에서 자세한 연구와 검토가 필요한 사안이라고 생각합니다.
두 번째로, 2세 貞簡公의 관직에 대한 자료입니다. 현행 족보에는 刑部尙書(형부상서) 太子賓客(태자빈객) 政堂文學(정당문학)을 지내시고 特進(특진) 左僕射 參知政事(좌복야 참지정사)에 추증되셨다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묘지문과 분명히 차이가 있습니다.
묘지문에는 『公姓鄭諱復卿字世貴草溪人 左僕射叅知政事贈諡貞簡公諱文之子』
“공의 성은 정씨로 이름은 복경이며 자는 세귀로 초계사람이다. 좌복야 참지정사를 지내고 추증된 시호가 정간공인 문의 아들이다”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족보에는 증 특진 좌복야 참지정사라고 하니 결국 좌복야 참지정사를 실제로 지냈느냐 추증받았느냐의 문제입니다.
좌복야 참지정사에 추증되었다고 하려면 『公姓鄭諱復卿字世貴草溪人 贈左僕射叅知政事諡貞簡公諱文之子』라고 표시되어야 합니다. 묘지문 내용을 자세히 확인해 보시기 바랍니다. 이 문제에 대하여는 나중에 별도로 대종회보에 자료를 등재하여 좀더 자세하게 살펴볼 예정입니다.
세 번째로, 복경공의 최종관직에 대한 내용입니다. 현재의 족보에는 殿中內給事(전중내급사)를 지냈다고 간략히 기술되어 있으나 묘지문 어디에도 전중내급사를 지낸 기록이 없습니다. 복경공의 주요 이력을 보면 國學直學(국학직학), 閤門祗候(합문지후), 昇平郡知事(승평군지사), 禮賓主簿 兼 堂後官(예빈주부 겸 당후관), 春州道按察使(춘주도안찰사), 試戶部員外郎(시호부원외랑), 禮部郎中(예부낭중), 戶部員外郎(호부원외랑), 試軍器所監(시군기소감) 등을 역임하셨습니다.
복경공의 과거 급제 이전부터 시작해 관직 이동사항이 자세히 나와 있는데 전중내급사를 지냈다는 기록은 발견되지 않습니다. 최초에 어떤 경로로 전중내급사로 등록되게 된 것인지 경로가 궁금해 집니다. 전중성은 고려시대 왕실의 譜牒(보첩)을 관리하던 기관으로 내급사는 종6품의 관원으로 고위 관직은 아니니 사서에 기록을 찾아볼 수도 없어 아마도 족보 제작시 구전을 통해 내려오는 이야기를 수록하였으리라고 추정해 봅니다. 묘지문을 바탕으로 조상의 진실한 역사를 바로세워야 합니다.
네 번째로, 복경공의 아들 윤기공의 자료입니다.
현재의 족보에는 복경공의 아들 윤기공이 독자로써 進賢館大提學(진현관대제학)을 지냈다고 기록되어 있으나 묘지문에 나오는 기록과 서로 일치되지 않습니다. 묘지문 기록을 보면 복경공은 4남 2녀의 자녀를 두셨는데 큰아들은 영도(永圖)로 여택재유(麗澤齋諭)로 있고, 둘째는 덕구(德丘)는 천태종(天台宗)에 승려이며, 셋째는 영충(永忠)으로 어려서 아직 관직을 받지 못했으며, 넷째는 4남 효윤(曉胤)도 천태종의 승려가 되었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과연 이분들중에 누가 윤기공입니까? 그것이 아니라면 윤기공은 4분의 형제가 아닌 전혀 분입니까? 몇가지 가정을 해보면, 우선 큰아들 영도와 셋째 영충의 이름이 나중에 윤기로 바뀌었을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둘째 덕구와 넷째 효윤도 승려가 되었다고는 하나 여건에 따라 還俗(환속)하고 윤기라는 이름을 사용할 수도 있겠습니다. 아니면 4형제 중 한명이 아닌 전혀 다른 제3의 인물이 될수도 있다고 추정합니다.
그리고 또 한가지 부연할 것은 오종의 족보에 윤기공의 사위로 나오는 문화유씨 柳湜(유식)공의 족보자료를 확인해 보니 윤기공이 진현관대제학이 아닌 版圖判書(판도판서;이전의 호부상서)를 역임한 것으로 기록되어 있습니다. 진현관대제학은 사서에 처음 등장하는 것이 고려 충렬왕(1274~1308)때로 실제 설치한 연도는 확실치 않으나 윤기공이 생존했을 것으로 추정되는 시기(1100년대)와 많은 차이가 있으며, 판도판서는 고려 공민왕때부터(1362년) 사용하던 관직명으로 전에는 호부상서이므로 윤기공의 생존시기와 차이가 많습니다. 묘지문, 족보, 사서 자료가 일치하는게 거의 없습니다.
필요하다면 선조역사바로잡기추진위원회라도 구성하여 깊이 있게 논의할 문제라고 생각합니다.
다섯번째로, 복경공의 묘소입니다. 현재 합천군 쌍책면 다라리 정간공 묘소 아래편에 몇기의 묘소가 있는데 종중에서는 3세 복경, 복유공의 묘소로 대략 추정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묘지문을 보면 갑술년(1154년) 5월 14일 병일일에 大法雲山(대법운산) 동쪽 기슭에 장례지냈다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대법운산이 어디에 있는지 자세히 나와 있지는 않지만 대법운산이라고 구체적인 지명을 쓴 것으로 보아 3세 복공공의 묘소처럼 개경에서 비교적 가까운 황해도 일원이라고 추정해 볼 수 있습니다. 당시 경상도 초계에 묘소를 정했다면 경상도나 초계 등 지명 이름을 쓰거나 초계 ○○산 등으로 기재하였으리라고 보며 혹은 후세에 이장을 해서 옮겨 왔을 수도 있다고 생각해 봅니다.
이상으로 복경공의 묘지문을 보고 생각나는 의문점들을 몇가지 적어보았습니다.
여러 가지 의문점이 생겼고 한꺼번에 모든 것을 확인할 수는 없지만 항상 묘지문을 기본적인 자료라고 생각하고 접근해 가야 하지 않을까 생각하며 오종의 종인들이 늘 관심을 가지고 노력해서 선조들의 자료를 바로잡고 올바른 역사를 후손들에게 물려줘야 되리라고 생각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