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Alan Walker - Alone
(오늘은 중간에 브금 바뀝니당 이거 들으면서 썼어요~~)
<이 글에 나오는 모든 기관, 사건의 설정은 실제와는 다소 차이가 있습니다>
** 「‘이 괄호 안은 중국어 대화입니다.’」
대한민국이 시우민과 윤다이의 이름으로 떠들썩했다. 온갖 매체 중 두 사람의 얼굴이 나오지 않는 곳은 없었다. 그러나 이혁수는 기자들 앞에서 스스로 수갑을 차는 윤다이나 내내 심드렁한 얼굴로 입을 꾹 다문 시우민보다는 여유 넘치는 얼굴로 기자들에게 협박이나 다름없는 말을 늘어놓는 변백현에 더 관심이 있었다. 카메라를 보며 웃는 변백현의 얼굴을 보던 이혁수가 어이없다는 듯 뇌까렸다.
“허, 변호사?”
사람을 그렇게 많이 죽인 변호사가 어딨어?
“…아주 재밌네. 시엔.”
75인치 TV 화면 속에 갇힌 채 그를 향해 웃는 듯한 뻔뻔한 저 낯짝. 순하게 아래로 떨어지는 눈매가 어릴 적과 그대로여서 이혁수는 도저히 그때를 떠올리지 않을 수가 없었다. 매번 피를 묻히고도 항상 예쁘기만 하던 그 순한 얼굴. 다만 다른 것은…, 그때의 그 애는 저렇게 웃은 적이 없다는 것이었다.
중국 상해의 구석 끝자락에 위치한 그곳엔 보호자 없는 아이들이 수두룩했다. 버려졌거나, 납치되었거나, 스스로 어디선가 도망쳤거나, 아무런 기억이 없거나. 이유들은 다양했다. 어찌 됐든 더는 굶기 싫어 이곳에 모이게 됐다는 거 하나만큼은 다들 같았다. 나중에 알게 된 거지만 거긴 사실 중국 공안이 그들만의 특수한 목적을 갖고 만든 곳이었다. 실험쥐로 쓰이든 총알받이로 쓰이든 각자의 목적에 의해 굴려지다가 어느 날 갑자기 세상에서 사라져도 아무런 문제 없을 아이들만을 모아놓은 그런 곳. 공안에 돈을 바치며 중국 쪽에서 자잘한 뒷거래들을 맡아온 이혁수의 아버지는 그런 곳에 당신의 아들을 담보로 바치며 더 큰 신뢰를 얻고, 덩치가 큰 일들을 따냈다.
…그러니까, 어떻게 보면 자신도 버려진 것이나 다름없다고 어린 이혁수는 늘 생각했다. 그나마 이곳의 다른 아이들과는 달리 자신은 관리자 역할을 하며 비교적 자유로운 생활을 했지만, 다를 게 뭐란 말인가. 어차피 여기가 어딘지도 모르고 내일, 아니 당장 오 분 뒤에 무슨 일이 벌어질지 모르는 건 그도 같았다. 가끔 몇 명씩 아이들이 사라지고 또 몇 명씩 새로운 아이들이 들어왔다. 사라진 아이들이 어디로 갔는지 알려주는 이는 없었다. 그 사라지는 아이가 본인들이 될 수도 있다는 어렴풋한 두려움만 있을 뿐, 그들을 보호해 줄 어른 같은 건 없었다. 아이들끼리 서로를 의지해야 했지만 그들 사이에서도 배신과 불신은 만연했다. 정말, 정말로 그들에겐 아무도 없었다. 13살의 어린 이혁수 또한 그 안에서 살아남기 위해 많은 것들을 모른 척했고 또, 그 어떤 것에도 큰 관심을 두지 않았다.
「‘리. 쟤 새로 온 애 봤어? 8살인데 글쎄 뒷산에 멧돼지들을 다 찾아서 죽인 게 쟤래. 보스가 눈여겨보고 있는 것 같던데, 아무리 처맞아도 눈 하나 깜짝을 안 하고 울지도 않는다더라. 지금 길들이려고 굶기고 있거든. 네가 감시해.’」
「‘…알겠어요.’」
「‘아, 맞다. 쟤도 너처럼 한국말을 잘한다던데?’」
「‘…….’」
「‘뭐 상관없나? 아무튼 잘 봐. 몰래 뭐 먹지는 않는지, 도망은 안 가는지. 뭐 저러다 뒤지면 멧돼지밥 되는 거고?’」
가끔 이혁수에게 할 일을 주러 오는 조선족 남자가 주둥이를 쭈욱 내밀며 킬킬킬 웃어댔다. 그게 꼴 보기 싫어 이혁수는 대충 고개를 끄덕이고는 그에게서 등을 돌렸다. 어두운 창고 입구에 쪼그려 앉은 어린 남자애가 눈에 들어왔다. 한국말을 잘하든, 한국인이든 무슨 상관인가. 어차피 여기선 다 똑같은 짐승 취급을 받다가 죽거나, 사라질 뿐인데.
피골이 상접하여 금방이라도 죽을 것 같은 모습을 하고서도, 눈빛은 사나운 게 꼭 맹수 같은 그 아이. 이혁수는 그 아이를 감시해야 했기에 주변을 얼쩡대야만 했다. 괜히 먹을 걸 들고 그 앞에서 혀를 날름거리기도 했다. 그러나 그 애는 그를 본 척도 안 했다. 충동적이었다. 그 애에게 말을, 그것도 한국말로 건 것은.
‘야 너.’
그러자, 그 애의 눈이 처음으로 커졌다. 어린 이혁수는 왠지 흥분하여 말을 계속 이었다.
‘어차피 뒤지는 게 소원이면 도망이라도 가든가. 여기서 뒤지면 장기 털리고 살가죽은 멧돼지…….’
‘…하, 한국 사람이에요?’
그 애는 그간 참았던 숨을 한번에 터뜨리기라도 하듯 헐레벌떡 기어오다가 그의 발 앞에서 힘이 빠졌는지 풀썩 엎어졌다. 그제야 깨달았다. 자신이 한국말로 말을 한 것은 다분히 의도적이었다는걸. 어린 이혁수는, 그 애의 눈에 스치는 희망을 보고 싶었던 것이다.
‘그게 중요해? 그만 뻗대라고 좀. 나도 귀찮으니까.’
‘…뻗대는 게 뭔데….’
뻗대는 게 무슨 뜻인지도 모르면서 무작정 버티고 있는 8살 남자애의 눈이 오롯이 그에게로 향했다, 꼭 그가 뭐라도 된 것처럼. 꼭, 그가 유일한 희망이라도 되는 것처럼.
‘야. 너 이름은 뭐야.’
‘…….’
반짝 빛을 내는 눈을 가진…….
‘뭐냐고.’
‘………시엔.’
그에게 배신과 불신을, 그리고 실패를 가르친 그 이름.
「‘리, 뭐야? 지금 너네 한국말 했지? 미친, 웃기네 아주. 야 저 새끼 당장 끌고 와.’」
「‘예!’」
양아치 놈 하나가 성큼성큼 달려와 어린 이혁수의 목덜미를 잡고 질질 끌더니 이내 더러운 바닥에 내팽개쳤다. 내팽개쳐지는 순간 땅을 짚은 손바닥과 무릎에 널브러져 있던 유리 조각들이 박혔다. 그러나 이혁수는 아파할 틈이 없이 팔을 올려 얼굴을 가렸다. 동시에 덩치 큰 어른들의 무차별적인 폭력이 어린 그의 몸뚱이 곳곳으로 향했다. 밟히고 차이고 굴려졌다. 억, 헉. 피가 섞인 둔탁한 신음이 작은 몸에서 터져 나왔다. 그때였다.
「‘하, 할게요!’」
달려와 이혁수의 몸을 막아선 건 좀 전까지 넘어져 있던 시엔이었다.
「‘…시키는 거! 다 할게요.’」
「‘다 한다고? 정말?’」
시엔이 고개를 주억거리자 거짓말처럼 폭력이 우뚝 멎었다.
「‘너. 말도 잘 듣고 앞으로는 진짜 시키는 거 다 하는 거다? 네가 한댔다? 야, 리! 얘가 너 구했다, 이야!’」
놈들은 뭐가 그렇게 재밌는지 배를 잡고 한참을 웃어댔다. 이혁수는 그제야 그들의 ‘길들이기’에 자신 또한 이용됐음을 깨닫고는 입술을 짓씹었다. 등신 새끼들. 이내 손을 방방 흔들며 그들이 멀어지자마자 저벅저벅 작은 발로 걸어온 시엔이 어린 이혁수를 일으켜 세웠다. 이혁수는 그새 부은 눈을 찡그리며 물었다.
‘야. 뭔지는 알아? 너한테 시킨다는 거.’
그때 시엔이 하겠다고 나선 것이 뭐였는지 알았다면……, 이혁수는 진작 말렸을 것이다.
‘아니요.’
‘근데 뭔 줄 알고 다 하겠다고 덥석 나서?’
그랬다면 그가 시엔을 잃는 일도, 그렇게 많은 이들이 죽는 일도, 아니….
‘…그러면.’
‘…….’
시엔이 그렇게 많은 이들을 죽이는 일도 없었을 것이다.
‘그렇게 계속 맞게 둬요?’
‘웃기시네. 너, 내가 한국인 아니었어도 그랬을 거야?’
‘…….’
나를 구한 게 아니라 네 유일한 희망을 구했던 거잖아.
‘너랑 같은 말을 하는 내가, 뭐라도 해줄 수 있을 것 같으니까 그런 거잖아. 틀려?’
그 말에 차갑게 굳어있던 시엔의 얼굴이 슬쩍 풀어지고 입매가 비틀렸다. 이혁수가 서있는 만큼 가까운 거리에서 보지 않는다면 절대 발견하지 못할 희미한 미소였다. 잠깐, 미소? 이혁수는 잘못 본 것인가 하여 잠시 눈을 찌푸렸다. 이어진 것은 8살 아이의 것이라고는 믿기지 않을 만큼 놀라울 정도로 차갑고도 침착한 목소리였다.
‘그게 나빠?’
‘…뭐?’
살고 싶어 하는 게,
‘모르면 됐어요.’
그게 나빠?
영문도 모른 채 주어진 삶에 대한 대단한 의지를 처음으로 마주한 날. 아니라고 고개를 저을 타이밍조차 놓친 이혁수는 그 목소리를 영원히 잊지 못하게 됐다, 그날 이후로 그 또한 ‘삶을 이어간다는 것’에 대해 진지하게 생각하게 되었기에.
“형님. 시엔이란 이름으로는 상해든 한국이든 흔적조차 없습니다. 변백현이라는 이름으로는 그때 프로필 보여드렸다시피, 졸업한 학교들은 쭉 나오는데 주변을 조사해 봐도 친한 친구는커녕, 학생 때 관련해서 남아있는 자료가 전무합니다. 꼭 갑자기 튀어나온 사람처럼.”
“‘갑자기 튀어나왔다’라……. 그거 말이 안 되는데 말이 되는군.”
일전에 부하를 통해 시켰던 변백현에 대한 조사에도 그에 대해 알아낼 수 있는 건 여전히 없었다.
“아, 부모님은 어릴 때 한국에서 교통사고로 돌아가셨다고 돼 있고요.”
“그 새끼 부모가 교통사고? 그것도 한국에서?”
이혁수는 코웃음을 쳤다. 시엔은 어린 이혁수 앞에서 자신이 제 부모를 죽였노라고 고백한 적도 있었다.
“예. 그리고 하나 특이한 점이, 윤다이 형사 경찰대 다니던 시절에 둘이 만나던 사이였다고 합니다.”
변백현과 윤다이가 앳된 모습으로 함께 웃고 있는 사진이 이혁수의 앞에 내밀어졌다. 이건 또 무슨 조합이란 말인가. 이혁수는 얼굴을 이상하게 구긴 채 헛웃음을 짓고는 사진을 반으로 접어 정장 안주머니에 넣으며 말했다.
“상해에서 그 일이 있고 바로 한국으로 왔어도 11살이야. 고작 11살이라고.”
돈은커녕 아무것도 없는데 심지어 쫓기기까지 하던 어린애가 한국으로 넘어온 것부터 시작해서 와서 자리를 잡은 것까지 모두 다 혼자 했을 리 없다. 게다가 지금 있는 정보들은 분명히 조작된 바가 있어 보였다. 분명 이런 거까지 도울 수 있는 조력자가 있다는 것이었다. 하지만 대체 누가, 대체 무슨 득을 얻겠다고 많은 위험을 감수하고 쥐뿔도 없는 어린애를 도왔단 말인가.
“오늘부터 변백현한테 24시간 붙어.”
시엔, 잘 숨어있었어?
“예 알겠습니다.”
“아, 적당히 붙어있는 티도 좀 내. 제 발로 찾아오게 만들어야지.”
…형이 데리러 왔어.
“예. 그리고 피스인피스 김종인 이사랑 드디어 연락이 됐습니다, 그쪽에서 직접 이쪽으로 오겠다고.”
“그 새끼 한번 만나려다 졸도하시겠네. 그래서 언제 온다는데?”
그때, 이혁수의 허락 없이는 절대 열린 적이 없던 보스의 방문이 감히 벌컥 열렸다. 그에 적잖이 당황한 부하가 일단 이혁수를 가로막고 섰다. 그러나 이혁수는 그 몸뚱이를 가볍게 옆으로 치워내고는 앞으로 나왔다. 문 앞에 우뚝 선 이의 눈빛은 꼭 맹수의 것과 같아 보였다. 여유로운 웃음을 지은 그가 이혁수에게 악수를 청했다.
“처음 뵙겠습니다. 그 새낍니다.”
김종인, 피스인피스의 모든 실무는 그의 손을 거치지 않고선 절대 행해지지 않는다더라.
슈터(shooter)
- I’m hooked!
W.열여덟살
18,19,20
나의 승리에 필요하다면, 원수의 도움이라도 마다하지 않을 것.
유태오 국장은 국정원 요원들에게 항상 강조하곤 했다. 가슴에 새겨지지 않는다면 머리에 새기라며 일에 있어 사사로운 감정을 배제할 것을 종용했다. 종종 이를 받아들이지 못해 일을 어렵게 푸는 요원들이 있었다. 하지만 윤다이에겐 따로 받아들일 필요도 없는 덕목이었다. 이미 윤다이의 지나온 삶 자체에 깊이 새겨진 자세였기에. 따라서 윤다이는 다양한 감정을 지우지 않고도 흑색 요원으로서의 임무를 완벽하게 해낼 수 있었다.
일례로, 교복이 끝장나게 잘 어울리던 윤다이의 학창 시절이 있었다. 전교 1등으로 입학하여 학생 대표로 선서까지 하며 유난스레 시작된 것 치고 윤다이의 고등학교 생활은 대체로 조용한 편이었다. 거기엔 철저히 필요에 의해서만 움직이는 그녀의 성격이 큰 몫을 했다. 윤다이는 좋은 성적으로 졸업하여 경찰대에 들어가는 것이 목표였지만 경찰이 가져야 할 어떠한 사명감이나 도덕심 따위엔 별 관심도 없었다. 그러니 수준 낮은 것들이 반에서 엄석대처럼 굴며 누굴 괴롭히건 말건, 윤다이에겐 그저 상관없는 일이었다. 그리고 일이 터진 건, 수능을 백 일도 안 남겨둔 어느 점심시간의 학생 식당이었다.
며칠 내내 통 풀리지 않는 문제가 있어 식판 앞에까지 문제집을 가져와 펼쳐둔 채 식사를 하는 윤다이의 머릿속엔 온통 문제 풀이에 대한 생각뿐이었다. 왁자지껄 점심시간에 조우한 친구들이 반갑게 떠드는 소리, 수많은 수저들이 식판 위를 달그락거리며 오가는 소리, 식당 밖 복도를 뛰어다니는 요란한 발소리들……. 그 어떤 시끄러운 소음도 윤다이의 고요한 집중을 방해하지는 못했다.
그때였다. 툭 하는 소리와 함께 문제집이 바닥으로 떨어졌다. 껄렁대며 바지 주머니에 손을 넣고 무리 지어 걸어가던 남자애 중 하나의 다리가 윤다이의 문제집을 건드린 것이었다.
‘엇! 실수실수! 쏘리.’
‘……아.’
윤다이의 집중력이 깨지던 그 순간, 그녀는 속에서 무언가가 툭 끊어지는 것을 느꼈다. 작위적인 사과를 내뱉은 남자애는 문제집을 주워 대충 올려주고는 윤다이의 앞자리에 의자를 빼 앉으며 낄낄거렸다.
‘자, 다시 주워줬다? 근데 윤다이, 너 걔 맞지? 입학식 때 연설했던 존나 예쁜 전교 일등.’
감히.
‘다이야, 이 오빠가 사실은 네가 좀 맘에……억!’
윤다이는 ‘감히’라고 생각했다. 그래서 그랬다.
‘쟤네 뭐야? 윤다이 쟤 왜 저래! 미친 거 아냐? 선생님부터 불러와!’
어렸을 때부터 뺨 정도는 자주 맞아서 그런지 때리는 것도 생각보다 쉬웠다. 다른 곳이라고 뭐 어렵나. 그냥 손에 잡힌 문제집을 들고 냅다 내려쳤다. 정신없이 내려친 자리를 또다시 내려치고, 닿는 대로 밀고, 채이는 대로 발길질했다. 신체 조건으로만 따지면 당연히 윤다이의 우위일 남자애도 당황했는지 처음엔 마냥 맞기만 하다가, 이내 욕지거릴 뱉으며 그녀를 세게 떼어냈다. 그 바람에 윤다이는 하릴없이 뒤로 밀려 주저앉았다. 그러나 곧바로 오뚝이처럼 벌떡 일어난 그녀는 이번엔 먹다 만 식판을 들어 내던졌고, 미처 피하지 못하고 그대로 식판을 맞은 남자애의 교복 위로 음식물이 흘러내렸다.
‘아 씨발! 너 미쳤어?’
그에 얼굴이 붉으락푸르락 달아오른 남자애의 두꺼운 손바닥이 피할 틈도 없이 윤다이의 얼굴 쪽으로 올라왔다. 윤다이는 반사적으로 눈을 질끈 감았다.
‘…….’
바로 그 순간, 누군가 뒤에서 윤다이의 팔을 잡아당겼다. 그 바람에 몸이 옆으로 밀려 그녀에게로 떨어지던 남자애의 손 또한 비껴가 그녀의 어깨만을 치고 지나갔다.
‘너희들 뭐야! 다 교무실로 와!’
이어 곧바로 도착한 학생부장 선생님 덕분에 모두들 급하게 흩어지고 싸움은 더는 이어지지 않았다. 윤다이는 급하게 몸을 돌려 뒤를 봤지만, 이 많은 학생들 중 누가 그녀를 당겨 폭력으로부터 구했는지 도저히 가늠조차 할 수 없었다. 그러나 금세 윤다이의 뇌리에서 잊혀질 얄팍한 호기심이었다. 지금 당장 그녀에게 우선순위는 따로 있었으므로.
‘전 잘못 없는데요. 얘가 먼저 시비 걸었어요.’
‘내가 언제! 아니 그리고, 그렇다 해도 사람을 그렇게 패도 돼요? 거기 있는 애들한테 다 물어보시라고요!’
윤다이도 알았다. 그 자리에 있던 이들에게 둘 중 더 잘못한 이를 꼽으라면 대다수가 윤다이를 가리킬 거라는 것을. 따지자면 이번 일은 싸움보단 윤다이만의 급발진에 가깝다 말할 것이다. 하지만 결국 잘못을 빌게 되는 것은 절대 자신일 리 없다는 것 또한, 윤다이는 알았다.
‘아이고 제가 아들자식 교육을 잘못 시켜서……. 제가 대신 사과드리겠습니다.’
왜냐하면 윤다이의 뒤엔 굴지의 권력을 등에 업은 비리 검사장 아버지가 서있을 테니까.
‘…애들 일입니다. 저희끼리 사과를 주고받아서 무슨 필요가 있겠습니까?’
‘하하…. 예, 그건 아무래도 그렇죠…? 너! 얼른 다이 학생한테 똑바로 사과 안 해?’
윤다이는 그 사실을 썩 반기지는 않았지만 그로 인해 얻는 힘을 굳이 마다할 생각도 없었다. 남자애의 아버지 또한 제법 잘나가는 중소기업의 오너로서 제 분야에선 굵직한 뼈를 자랑했지만, 대한민국의 난다 긴다 하는 대기업 총수들과 친분을 지키며 검사장 자리에까지 앉은 윤다이의 아버지에 비할 바 아니었다.
‘아 씨……. 야, 미안. 내가 실수했어.’
남자애의 영혼 빠진 사과와 함께 그의 어머니 또한 연신 허리를 숙여댔다. 윤다이는 코웃음 쳤다.
‘진심? 아닌 거 같은데?’
‘하, 뭐래 이게 진짜 봐주니까! 야, 네가 먼저 애들 다 보는 데서 문제집 들고 나 내려쳤잖아!’
‘보세요. 전 이 거짓 사과 안 받을래요. 그리고 얘랑 같은 학교 못 다니겠어요.’
심드렁히 내뱉는 윤다이의 말 한 번에 남자애의 어머니는 사색이 되어선 다시 제대로 사과하라며 제 아들의 등을 떠밀었다. 그도 그럴 것이, 학교에선 둘 중 한 명을 선택하라면 당연하게도 윤다이를 선택할 것이 뻔했기 때문이었다. 그쯤 하여 남자애의 아버지까지 이 상황 때문에 학교로 오고 있다는 말이 전해졌다. 남자애는 그제야 상황의 심각성을 깨달았는지 불안한 표정을 숨기지 못하고 윤다이를 쳐다보았다. 이에 윤다이는 입꼬리를 비틀며 말했다.
‘그럼, 저희 둘끼리만 마저 얘기 좀 해도 될까요?’
‘그러렴. 아버지는 이만 일이 바빠서 갈 테니, 무슨 일 있으면, 교장 선생님께 바로 전달해라.’
윤다이로부터 시작된 말이 그녀의 아버지를 통해 끝을 맺자마자 상담실 안에 있던 모든 어른들이 당연하다는 듯 자리를 비워주었다. 본인을 대신할 이가 ‘교장 선생님’이라는 그의 말은 그 자리에 있던 모든 이들에게 에두르는 경고와도 같았다. 윤다이는 그 더러운 권력을 기꺼이 등에 업기로 했다. 불안함으로 점철된 남자애의 얼굴은 어느덧 하얗게 질려있었다.
‘안색이 구리네. 그러게 왜 지는 싸움에 달려들어.’
‘…내가 제대로 사과할 테니까 이쯤 하자.’
‘지랄.’
기실 남자애는 교내에서 소위 말하는 일진 무리에서도 가장 우두머리급이었다. 그러므로 그도 이 학교에선 무소불위의 권력을 가졌을 테다. 그러나 모든 힘은 더 큰 힘 앞에 무릎 꿇기 마련이었다.
‘…하 씨…. 내가 뭘 어떻게 하면 되는데. 네 앞에 무릎이라도 꿇을게.’
아니. 그것보다 더. 고개를 저은 윤다이가 조소하며 툭 내뱉었다.
‘기어봐.’
‘…….’
더는 숙일 수 없을 만큼 낮게. 더 낮게.
‘바퀴벌레처럼 기어 봐. 그럼 다 없던 일로 해줄게.’
그러자 망설임 없이 그녀의 발아래 머리통을 처박는 모습에 윤다이는 웃음을 터뜨렸다.
‘등신. 하란다고 진짜 하네. 이럴 줄 알았으면 한번 죽어보라고 해볼걸.’
잔뜩 일그러진 얼굴로 웃으며 제 몸에 아버지로부터 온 피가 흐르는 것을 다시 한번 실감했다. 이 피로는 아마 헌혈도 못하리라. 살리는 것보다 죽이는 것에 더 능한 피였기에. 그런 피가 윤다이의 혈관을 타고 흘러 그녀의 심장을 뛰게 한다는 거. 그러니까, 다른 것들은 잘도 죽게 하는 그 역겨운 피가 윤다이만은 살게 한다는 거.
……아. 결국 나는 다른 이들의 죽음을 밟고 살아있는 거로군.
그걸 깨달은 후로는 쭉, 죽음보다 역한 삶이었다.
“다이다이 선배.”
“…아- 오형.”
한숨도 못 잔 얼굴의 오세훈은 경찰서에서 씻었는지 덜 마른 머리를 수건으로 털며 잠시 상념에 빠져있던 윤다이에게 다가왔다. 한 손엔 언제나처럼 그가 좋아하는 싸구려 자판기 커피를 든 채였다.
“대체 뭘 어떻게 했는데 밤 사이에 진범이 나타나서 자수를 해요? 덕분에 야밤에 집도 못 가고 조서 정리했잖아요.”
만 하루가 채 지나기도 전에 윤다이와 시우민을 가두었던 유치장의 문이 열렸다. 지금껏 나타나지 않았던 일성빌딩 살인사건의 진범이 나타나 자수를 하며, 당시 사용했던 총까지 증거로 제출한 덕분이었다. 그리고 이 모든 해결은, 예상대로 윤다이의 아버지인 윤일호가 손을 쓴 것이었다. 그녀의 혈육인 윤다헌이 친히 전화까지 걸어 전하기를, ‘아버지가 무리하셨어. 당분간은 넙죽 엎드리고 사려.’라고 했으니.
물론, 그가 행한 ‘무리’라는 것이 오롯 제 딸인 윤다이를 지키기 위함만은 아닐 것이다. 차기 법무부장관으로 거론되고 있는 이 중요한 시기를 딸자식이 망치게 둘 수는 없기에 더 적극적으로 나선 것이겠지. 이유야 어찌 됐든 윤다이는 그저 그 권력을 기꺼이 이용할 생각이었다. 언제나 그러했듯.
“내가 하긴 뭘 함. 아, 혹시 범인이 내가 수갑 차는 뉴스 보고 감명이라도 받았나?”
하지만 이 역겨운 사실을 대쪽같은 오세훈에게까지 말할 수는 없었기에 윤다이는 시치미를 뗐다.
“뭐래. 나 이거 진범 맞는지 확실하게 조사할 거예요.”
오세훈은 못마땅한 눈초리로 윤다이를 쳐다보며 툭 뱉었다. 윤다이는 제게 없는 사명감을 가진 오세훈이 왠지 기특하여 피식 웃음을 흘렸다.
“그래. 당연히 그래야지.”
범인은 따로 사주 받은 적 없는 우발적 범행이었다며 제 죄를 실토했다. 범인이 말한 동선을 따라 발견된 CCTV 화면에선 정말로 그의 모습을 발견할 수 있었다. 살해 도구, 사건 현장, 진술까지 모든 증거가 그가 이 사건의 진범이 맞음을 가리키고 있었다. 게다가 권력의 입김까지 더해졌다면, 오세훈에게는 안타까운 일이지만 아마 그가 파헤치기도 전에 이 사건은 곧 종결되어 그의 손을 떠나게 되리라.
그때, 윤다이에 이어 유치장을 나온 시우민이 그녀를 발견하자마자 걸어와 옆에 섰다. 머리가 조금 가라앉았을 뿐, 유치장 바닥에서 하룻밤을 보냈다고는 믿기지 않을 만큼 흐트러지지 않은 모습이었다. 그가 오자마자 오세훈은 불편한 기색을 숨기지 않고 곧바로 자리를 떴다. 윤다이는 어깨를 으쓱이며 시우민에게로 고개를 돌렸다.
“일 처리 빠르지? 내가 이래 봬도 비리 검찰총장 딸내미임.”
“응. 허니 다이, 또 뺨 맞으러 가야 되지?”
“어떻게 알았어. 아까부터 자꾸 전화 와. 아마 경찰서 나서자마자 납치라도 당할 듯.”
넌더리를 내는 윤다이에게 시우민이 손을 내밀었다. 뭐 어쩌라는? 윤다이는 눈썹을 까딱이다가 아하, 하며 그 위에 제 손을 턱 올렸다. 그러자 시우민은 어이없다는 듯 헛웃음을 뱉었다. 그러면서도 제 손 위에 올려진 윤다이의 손을 자연스레 잡아 내리고는 이번엔 다른 쪽 손을 내밀었다.
“뭐?”
“폰.”
“폰?”
“…하.”
시우민은 답답한지 손으로 수화기 모양을 만들었다가 다시 그 손을 윤다이의 눈앞에 내밀었다. 윤다이는 ‘아아.’ 하고 멍청한 소릴 내다가 바지 주머니에 있던 휴대폰을 꺼내 그에게 건넸다. 때마침 윤다이의 아버지에게서 또 전화가 오고 있었다. 가만히 그 진동을 내려다보던 시우민이 말했다.
“여기에 뭐, 추억 많아?”
“응?”
“잃어버리면 안 되는 번호 같은 건?”
“뭐?”
“다이. 아까부터 한 글자만 말하고 있어.”
“아니,”
“됐어. 내 번호만 알면 됐지.”
아니 그러니까 이게 무슨 대화의 흐름인 거냐고. 미처 묻기도 전에 윤다이의 시선이 시우민의 손을 따라 움직였다. 그 안에 있던 윤다이의 휴대폰이 시우민의 손을 떠나 던져지고 있었다. 야구공처럼 날아간 휴대폰은 포물선을 그리며 떨어지더니 경찰서 대리석 계단 위를 통-통-통 튀며 굴렀다. 옆에 오세훈이 있었다면 아주 박살이 났다고 호들갑을 떨어댔을 것이다. 이런 망할. 아직 할부도 안 끝났는데. 윤다이는 뒷목을 잡고 시우민을 쳐다보았다.
“…민석이. 혹시 방금 내 폰 네가 던져서 즉사하는 거 봄?”
“응. 그래도 임종은 지켰네.”
시우민이 장난스레 웃으며 성호를 그었다. 한 번도 그어본 적이 없는지 아주 엉망이었다.
“야이! 왜 던졌는데?”
사실 시우민이 휴대폰을 던지는 순간부터 윤다이의 머릿속은 이미 그녀의 휴대폰에 그가 달아놨던 해킹 수신기에 관한 생각뿐이었다. 저걸 저렇게 망가뜨리는 건 더는 윤다이의 휴대폰을 해킹하지 않겠다는 뜻과도 같다. 왜? 이제 더는 감시하지 않으려고? 그만큼 윤다이를 믿어서? 아니면, 그래. 새로운 휴대폰을 사주고 거기에 더 확실한 해킹칩이라도 심어두려고? 그게 아니면 대체 어떤 이유로, 왜…….
“다이야.”
“…….”
왜 아까 잡은 손은 아직까지 놓지 않고 있는지.
“저번에 나한테 전화 걸어서 전남친이랑 떡치는 소리 들려줬었잖아.”
“……웁스.”
그건 변백현과의 과거 관계가 이딴 식으로 밝혀져 이번 임무에 쓰일 줄 몰랐던 때의 일이었다. 육시럴. 윤다이는 과거의 자신을 주먹으로 갈기고 싶은 심정을 가까스로 삼키고는 어색하게 입꼬리와 어깨를 함께 올렸다. 시우민은 그런 윤다이를 따라 저도 입매를 끌어당기더니 다시 말했다.
“그때 그거, 저 새끼야?”
윤다이는 아까보다 매서워진 눈매를 한 시우민의 턱 끝이 가리키는 방향으로 고개를 돌렸다. 건물의 입구 앞, 두 사람과는 달리 멀끔하고 정돈된 모습의 변백현이 이쪽을 보고 있었다. 다른 인원도 함께인 것을 보니 아마 이번 일의 사후 처리를 위해 온 듯했다. 거리가 좀 있는데도 변백현의 눈이 분명하게 윤다이에게 향하고 있음이 느껴졌다. 한편 윤다이의 대답이 바로 이어지지 않자, 시우민은 재촉이라도 하듯 잡은 손에 힘을 주었다. 에라이, 이판사판이다. 결심한 윤다이는 아예 몸을 확 틀어 변백현을 등진 채 시우민과 마주 보고 섰다. 그렇게 시우민의 시야를 오로지 본인으로 채우고는 ‘하하하…….’ 겸연쩍은 웃음으로 화두를 열었다.
“그게…, 맞다고 하면 빡칠 거임?”
사실 이건, 질문부터가 잘못됐다. 변백현과 연인 사이였던 적이 있으면서 모르는 사이인 척 굴던 것만으로도 이미 시우민을 기만한 것인데, 안 보이는 곳에서 붙어먹으며 그걸 이용까지 하여 시우민을 자극하려 한 것. 제아무리 성인군자라 해도 화가 나지 않을 리 없다. 이미 답이 정해진 질문을 굳이 해서 그의 화만 돋울 필요가 없기에, 윤다이는 황급히 고개를 저었다.
“아니아니 취소. 이게 아니라,”
“이거 좀 웃길 수도 있는데.”
그 순간 시우민이 웃으며 어깨를 으쓱였다. 분노를 삭이는 대신 짓는 헛웃음 같은 게 아니었다. 시우민은 정말로, 예쁘게 웃고 있었다. 그 언젠가 윤다이가 거꾸로 처박히고 싶어 하던 입동굴을 드러내며.
“…….”
“아니라고 해도 빡칠 거 같아.”
예상 답안에 전혀 없던 대답과 표정에 외려 당황한 윤다이가 말을 잇지 못하고 입만 뻐끔뻐끔 벌렸다. 그러자 길게 뻗은 손가락으로 윤다이의 턱 끝을 가볍게 툭 건드려 닫아준 시우민이 이내 웃음을 거두고 한쪽 눈썹 뼈를 올리며 말을 이었다.
“다이, 설마 다른 새끼가 또 있어?”
제법 심각한 표정에 윤다이가 기함했다. 그러자, 시우민이 웃음을 터뜨렸다.
배우거나 듣지 않아도 자연히 알게 되는 것들이 있다. 이를테면……, 누군가는 분명 저 웃음에 인생을 걸게 되리라, 같은.
매체에서는 이번 사건의 진범이 나타나서 시우민과 윤다이가 하루도 지나기 전에 혐의를 벗었음을 대서특필했다. 대한민국 전체가 이 일만이 오늘의 모든 흥미인 양 떠들어댔다. 어제 시우민이 잡혀들어갈 때보다 열 배는 더 시끄러웠다. 김종인은 헛웃음을 뱉으며 TV를 껐다. 정말, 이혁수의 말대로였다.
— 대표님 경찰서 나오셨고, 경호 인력들 모두 물리시고 윤다이 형사님과 경찰 차량으로 이동하셨습니다. 법무팀은 아직 경찰서에 남았고 경호팀만 회사로 복귀합니다.
귀에 댄 휴대폰에선 피스인피스 경호팀장의 목소리가 건조하게 흘러나왔다. 뭐? 경찰차를 타고 이동을 해? 누가 미친 건지 원. 김종인은 어이가 없어 대답할 가치도 없다고 생각했다. 대신에 물었다.
“변백현도 거기 있었습니까?”
— 변팀장님 법무팀 인원들과 함께 왔었는데 일 지시하시고 급하게 가셨습니다.
“법무팀 팀장이란 사람이 매번 그러면 쓰나.”
— …….
“변백현, 최대한 따라붙으세요. 저번처럼 들키면 이번엔 내가 나섭니다.”
마지막 경고와도 같은 김종인의 말에 경호팀장이 바짝 긴장한 목소리로 대답하자, 김종인은 휴대폰을 귀에서 내렸다. 그러고는 어제 오후, 이혁수와의 만남을 회상했다.
그간 이혁수가 새로 수장이 된 식구파 쪽에서 피스인피스로, 아니 김종인에게로 꾸준히 연락을 취했던 것은 알고 있었지만 괜히 엮이면 피곤해질 것 같은 느낌에 피해왔었다. 그렇지 않은가. 사업적인 이야기를 할 거라면 김종인이 아니라 회사로 연락을 해왔을 것이다. 그러나 그들은 꾸준히 김종인 개인에게만 컨택하려 했다. 다른 꿍꿍이가 있다는 생각을 배제할 수 없었다.
‘이사님. 식구파 쪽에서 또 연락이 왔는데, 일성빌딩 살인사건의 진범을 안다고 합니다.’
하지만 이런 타이밍 맞춘 미끼까지 놓칠 필요까지는 없지. 김종인은 직진할 때만큼은 거침없는 편이었다. 간다고 예고라도 하고 가면 미리 무슨 수라도 쓸까 봐 기습적으로 이혁수의 요새 한가운데에 쳐들어갔다.
‘이제야 만나주시네요. 이딴 식으로. 저는 이사님이 무슨 유니콘인 줄 알았습니다. 환상의 동물.’
‘그동안 절 왜 그렇게 만나려고 하셨죠? 껄끄러운 사이 아닌가요. 내 보스가 당신 아버지 살인 사건의 용의자였잖아.’
총꽂이 사건. 식구파의 전대 보스, 이혁수 아버지의 목에 총이 꽂혀 죽은 사건. 그는 김종인의 보스인 시우민과의 만남을 가진 며칠 뒤에 살해당했기에, 윤다이는 시우민을 용의자 중 하나로 특정했다. 그러나 아무런 증거도, 체포 영장도 없었을뿐더러 시우민에겐 사건이 벌어지던 시각에 아픈 어머니의 병원에 있었다는 확실한 알리바이까지 있었다.
‘총꽂이 사건? 알리바이 있다고 들었는데. 뭐 어차피 중요하진 않습니다.’
이혁수는 정말로 궁금하지 않은 얼굴이었다. 다만 그 위로 흥미로운 얼굴을 덧씌운 채 김종인에게 말했다.
‘그보다도, 지금 시우민 대표가 잡혀들어간 일성빌딩 사건의 진범을 찾는 게 급선무 아닙니까? 살인사건 용의자만 두 번이라니 얄궂은 운명을 타고났나 봐. 그쪽 보스가.’
‘진범이 따로 있다는 걸 당신은 어떻게 확신합니까? 진짜 우리가 했으면 어쩌려고.’
‘그야………. 우리가 했으니까?’
‘뭐?’
VIP의 지시였다고 했다. 검찰총장 윤일호가 제 딸인 윤다이에게 겁을 주려 고용한 총 쏘는 심부름꾼. 그걸 숨기기 위해 VIP는 그날의 증거를 지울 것을 지시했다. 그들에게 ‘지운다’는 의미는 곧 세상에서 지우는 것을 의미했다. 그래서 지시를 받은 식구파는 그렇게 했다.
‘그런데…, VIP가 하나를 더 지시했습니다. 윤다이 형사와 시우민 대표가 우리가 처리한 보안요원과 함께 있던 CCTV 영상을 검찰에 익명 제보하라고요. 나는 생각했죠. 어 이건 시우민을 범인으로 몰겠다는 건데? 이상하군, 분명 피스인피스도 VIP의 개새끼인 걸로 아는데.’
‘…….’
이혁수는 피식 웃으며 김종인을 쳐다보더니 말을 이었다.
‘아! VIP가 피스인피스의 목줄을 자르려는군.’
김종인은 달리 대답할 말이 없어 볼 안쪽을 씹었다. 이혁수의 말에 틀린 것이 없었다. 물론 윤다이가 시우민과의 열애설을 터뜨리면서 윤일호 검찰총장이 나서는 바람에 그 제보는 김준면의 하드 속에만 갇히게 되었다지만…. 만약 그 열애설로 두 사람이 묶이지 않았다면 분명 모든 걸 덮어쓰고 버려지는 개새끼는 시우민, 그리고 그가 수장으로 있는 피스인피스였을 것이다.
‘이 얘기를 왜 나한테 하는 겁니까?’
‘경찰에서, 아니 윤다이 형사가 진범을 찾으려고 달려들다가 뭐라도 문다면 VIP는 곧바로 내 목줄도 끊어버리고 내 쪽에 모두 덮어씌우겠죠. 이미 VIP에겐 우리의 모든 치부가 있으니.’
‘그래서, 그 목줄을 먼저 끊어버리겠다? 근데 이 얘기를 나한테 하는 이유는?’
‘개새끼가 두 마리인데, 하나만 주인을 물었다가 남아있던 놈한테 역으로 물리면 어떻게 합니까?’
아하. 영특한 김종인은 머리를 쓸어넘기는 사이 돌아가는 상황을 모두 이해하고는 입꼬리를 올렸다. 그러자 이혁수가 손을 내밀었다.
‘같이 물죠, 우리. 목줄도 서로 끊어주면 쉽잖아.’
김종인이 그 날렵한 손을 맞잡은 건 어쩌면 당연한 수순이었다. 손으로 전해지는 온기가 왠지 낯설었다. 김종인은 이혁수에게 어쩌다가 VIP와의 관계가 시작되었느냐 물었다. 그러자 이혁수가 가벼운 얼굴로 대답하며 어깨를 으쓱였다.
‘나는 뭐. 아버지 대에서부터 시작된 진부한 이야기입니다. VIP의 돈을 먹은 아버지가 그 대신 더러운 일들을 해주고, 그 일들이 점점 더 커져 가고. 그렇게 그를 위해 한 일들은 모두 아버지에겐 덫이 되어 돌아왔고. 결국은 아들에게까지 이어졌다는 그런.’
김종인이 고개를 끄덕이자 이혁수가 ‘그러는 당신들은?’ 하고 물었다. 김종인은 잠시 말을 골랐다. 그런 그를 알아챈 이혁수가 재미있다는 듯 눈을 가늘게 뜨고 고개를 갸웃 떨어뜨렸다. 김종인은 결국 허탈한 듯 웃으며 말했다.
‘이건 뭐, 어떻게 말하려고 해도 진부하지가 않아서.’
어떤 불행엔 클리셰가 없다는 걸, 알게 될 줄은 김종인도 몰랐었다.
‘그래요. 그럼 진부해지면 말해줘요.’
입가에 미소를 걸친 이혁수가 대답했다. 그리고 김종인이 별 대답 없이 입을 다물자 더는 묻지 않고 본래 만난 목적으로 돌아가 말을 이었다. 그의 짐작에 의하면 이번 조작 영상을 퍼뜨린 건 김준면 검사의 독단적 행동이었으나, 적극적으로 나서서 일을 키운 이는 추정컨대 VIP일 것이라 했다.
그리고, 딱 이 대화를 나눌 때 즈음이 윤다이가 기자들 앞에서 스스로의 손목에 수갑을 채웠을 때였다. 윤다이가 벌인 소동이 전파를 타고 이곳저곳으로 빠르게 전해지고 있던 그때, 이혁수에게 VIP의 새로운 지시가 내려왔다.
최대한 빠르게 자수할 사람을 준비할 것.
자수 시, 그 어느 세력도 얽혀있지 않은 독단적이고 우발적인 범행이었다는 것을 강조할 것.
그리고…, 윤다이가 더는 시우민의 일에 개입하지 못하도록 두 사람을 떨어뜨려 놓을 것.
‘우리 VIP께선 윤다이 형사를 치우고 피스인피스를 더 쉽게 밟고 싶은가 본데.’
아니, 정확히 말하자면 시우민을 밟으려는 것이겠지만 김종인은 굳이 이혁수의 말을 정정해 주지는 않았다. 그와 손을 잡았다고 하여 그에게 모두 말할 필요는 없었으니.
‘그런 것 같네요.’
‘대체 왜? 뭘 크게 잘못하기라도 했습니까?’
잘못……. 김종인은 헛웃음을 지으며 고개를 가로저었다. 어쩌면 시우민이 세상에 난 것이 잘못이라면 잘못일 것이다. 시우민도 가끔은 우스갯소리로 배냇적에 스스로 목에 탯줄이라도 감았어야 했다고 말하곤 했다. 그랬다면, 그래서 차라리 세상에 나지 않았더라면…….
그때, 줄곧 조용하던 김종인의 휴대폰이 묵직한 진동 소리를 냈다. 그는 회상하는 동안 잠깐 감았던 눈을 천천히 뜨고 전화를 받았다. 좀 아까 그에게로부터 변백현의 미행을 지시받았던 경호팀장의 연락이었다.
“왜요. 벌써 들켰습니까.”
— 아닙니다. 다만 미리 보고드려야 할 사항 같아서….
“뭡니까.”
— 변백현 팀장에게 붙은 미행이 저희 말고도 또 있습니다.
“하.”
― 식구파에서 붙인 사람 같고 허술한 게 잘 보여서, 아마 변팀장도 곧 눈치챌 겁니다. 그리고 추가로 혹시 몰라 확인했지만 대표님이나 이사님께 붙은 미행은 없었습니다.
식구파의 이혁수가 허술한 사람은 아니다. 그 정도라면 일부러 알아채라고 티를 내는 것일 테다. 하지만 가장 궁금한 것은 ‘왜 하필이면 변백현을 쫓는 것일까’였다. 피스인피스에 대해 쫓고자 했으면 당연하게도 시우민이나 김종인의 뒤부터 파는 것이 맞았다. 그저 변호팀의 수장인 변백현은 그 둘을 먼저 파본 뒤 부수적으로 더 알아보는 심화 과정 같은 것이다. 그런데 그 과정을 모두 건너뛰고 오직 변백현만을 쫓는다? 이것이 의미하는 바는 하나였다. 이혁수가 지금 파헤치려는 것은 피스인피스가 아니라 ‘변백현’이라는 것.
“재미있네.”
김종인은, 곧 무언가를 알아낼 수 있을 거란 강한 예감을 느꼈다.
윤다이와 시우민은 최대한 기자들의 눈을 피해 뒷문 쪽으로 향했다. 시우민의 경호팀이 다가와 그들이 타고 온 차를 권했지만 이미 기자들이 주목하고 있는 가운데, 그 차를 타는 건 동선을 동네방네 소문 내는 것밖에 안 됐기에 윤다이가 나서서 단호하게 거절했다. 시우민 또한 경호 인력을 모두 물리고 윤다이를 따랐지만 윤다이도 뾰족한 수가 없어 고민했다. 순간, 때마침 순찰을 돌러 나가던 후배를 본 윤다이의 눈이 번쩍였다. 윤다이는 후배의 뒷덜미를 잡아채고 그의 손에 들렸던 차 키를 낚아챘다. 아 선배니임! 안 되는데…! 후배의 아련한 음성을 뒤로하고 윤다이와 시우민은 차가 세워져있는 뒷문 쪽 주차장으로 나왔다.
“다이. 우리 꼭 이래야 할까.”
차를 본 시우민이 한껏 굳어진 얼굴로 소감을 뱉었다. 요란한 경찰 래핑과 경광등까지 달린 진짜배기 순찰차였다.
“응. 어쩌겠음.”
“이렇게 요란하지 않은 차도 있잖아? 이거 타고 나가다 들키면 완전 관종…….”
“아 이것도 몰래 키 뺏어온 거 못 봤음? 그리고 기자들이 설마 이 차에 너랑 내가 탔을 거라고 생각이나 할 수 있겠어?”
없지, 없어. 시우민이 삐걱대며 고개를 저었다. 정말 타기 싫은 표정이라 윤다이는 그를 억지로 조수석에 밀어 넣었다. 차에 욱여 넣어진 시우민은 운전석에 올라 시동을 거는 윤다이를 보며 허탈하게 웃었다.
“다이, 우리 장르가 혹시 코미디야?”
“로맨틱 코미디?”
“로맨틱이 어딨어. 경찰차에.”
“대충 있다고 치고. 아,”
아주 잠시 출발하지 않고 멈춘 윤다이는 깜빡했다는 얼굴을 하곤 시우민 쪽으로 몸을 숙여 안전벨트를 매 주었다. 그러고는 뿌듯한 얼굴로 천천히 고개를 움직여 그와 아주 가까이에 얼굴을 두었다. 색색거리는 서로의 숨이 닿는 거리였다.
“민석이, 역시 오늘도 잘 생겼…….”
그때, 시우민이 고개를 살짝 숙여 입을 짧게 맞추고 떨어졌다.
“있긴 있네.”
씩 웃으며 로맨틱의 존재 여부를 말하는 그의 음성에 윤다이의 심장이 악셀을 밟고 튀어 올랐다.
둘이 탄 경찰차는 기자들의 이목을 단 1%도 끌지 않고 유유히 경찰서를 빠져나왔다. 윤다이가 그것 보라며 의기양양하게 웃었다. 시우민은 말없이 입꼬리를 올리며 조수석을 뒤로 젖히고는 몸을 깊이 기댔다. 윤다이는 자기가 옳았다는 사실에 좀 더 큰 반응을 보이라며 손가락을 뻗어 그의 허리를 쿡쿡 찔렀지만, 시우민은 그저 눈을 감고 킥킥댈 뿐이었다. 감은 눈 위로 내려오는 그의 앞머리가 왠지 무거워 보여 윤다이는 입을 다물었다.
곧, 차 안에는 오로지 엔진 소리만이 들릴 뿐이었다. 적막이 찾아들자, 윤다이의 머릿속에선 가까스로 누르던 생각들이 자꾸만 둥둥 떠올라 고개를 처들었다. 이를테면, 윤다이가 몸을 틀어 변백현에게서 등을 지던 좀 아까 경찰서에서의 상황. 그 순간 눈동자에 걸리던 변백현의 표정 같은 것들이. 사실은……, 내내 떠올랐기에.
윤다이는 스스로의 역설에 구토하고 싶었다. 시우민의 입맞춤에 심장이 널을 뛰면서도 여전히 한구석에선 변백현을 놓지 못한 것이었다. 변백현에게 수없이 거절당해왔으면서 고작 그에게서 먼저 한번 등진 것이 이렇게까지 신경 쓰일 일인가. 그 순간 변백현이 지은 표정이 어떤 의미였는지, 그걸 왜 자꾸 생각하게 되는 건지. 이러다 그가 한번 다정하게 굴기라도 하면? 설마 또 습관처럼 속아 넘어가 그를 사랑이라도 할 셈인가. 하지만 분명 이제는 시우민을…….
“다이야.”
쭉 이어지려던 생각은 핸들을 잡지 않은 윤다이의 손을 시우민이 잡는 순간 쉽게 끊어졌다. 윤다이는 헉, 하고 숨을 들이쉬며 고개를 돌리고 급브레이크를 밟았다.
“…경찰차가 이렇게 운전 험하게 해도 되나.”
시우민이 헛웃음을 내뱉으며 윤다이를 보았다. 윤다이는 그제야 잠깐 어디론가 빠졌던 정신이 훅 돌아오는 느낌이었다. 시우민은 잡은 그녀의 손등 위에서 손가락을 움직여 살살 쓸어내렸다. 윤다이는 저도 모르게 사선을 내려 그걸 잠깐 보다가 다시 고개를 들었다. 그러고는 그에게 잡힌 손을 잡아 빼며 말했다.
“민석이, 다 왔네. 내려.”
시우민은 순식간에 비어버린 제 손을 아무렇지 않은 듯 가져가서는 차 문을 열고 다리를 쭉 뻗어 땅을 밟았다. 곧 완벽히 차에서 내린 그는, 이어지는 윤다이의 말에 몸을 다시 돌리고 허리를 숙였다.
“잘 가.”
“뭐해?”
시우민은 차 문을 닫지 못하게 위쪽을 팔로 짚고는 어이없다는 얼굴로 말했다.
“엉?”
“너도 내려. 답답하게 굴지 말고.”
“너네 집에 또 같이 가자고?”
“응. 로맨틱 코미디는 그래.”
윤다이를 뚫어져라 보는 시우민의 눈동자가, 차 루프를 손가락으로 툭툭 가볍게 치며 가볍게 내뱉는 그의 낮은 웃음소리가, 바로 어젯밤 그녀를 사랑해 보겠다고 한 결코 가볍지 않은 그의 고백까지. 모두 어떤 의미가 담겨있는지 윤다이라고 모를 리 없었다. 그리고 그녀에게 있어서 이 모두는 감정적으로나, 일적으로나 뒷걸음질보다는 두 팔 벌려 반길 일이었다. 처음부터 목적한 바에 드디어 가까워지는 것이었기에. 게다가 국정원 일을 하며 누군가를 속인 적이 없던 것도 아니다. 모든 죄책감은 나라를 위해 일한다는 사명감으로 씻어내 왔다.
“다이. 들어왔다 가. 라면은 없지만.”
…그러니까 괜찮을 것이다. 사랑같은 건 아무래도.
♬ AllieX - Devil I know
(여기부터 꼭 이걸로 바꿔주세요~!)
이 부분은 포스타입에서 생략없는 버전으로 보실 수 있으며,
포스타입을 안 보셔도 글 내용 이해에 무리가 없습니다.
포스타입 부분 이후 뒷 부분이 블로그에서 이어집니다.
무거운 현관문을 열자마자 시우민이 기다렸다는 듯 윤다이의 허리를 잡아당겼다. 문이 철컥 닫히는 소리와 동시에 두 사람의 입술은 열린 채 포개졌다. 둘은 서로 질세라 혀를 잡아당기고 숨을 삼켜댔다. 조용한 집안에 타액 섞인 숨이 오가는 끈적거리는 소리만 한참을 이어졌다. 먼저 신발을 벗고 집에 발을 들인 시우민이 윤다이를 끌어당겼다. 아직 미처 벗지 못한 윤다이의 신발이 먼지 하나 없이 깨끗한 시우민의 집에 발자국을 남겼다. 그걸 본 시우민은 잠시 미간을 찌푸리더니 윤다이를 힘주어 안아 올렸다. 그의 생각을 알아챈 윤다이가 그의 허리에 다리를 감았다. 그러자 바로 윤다이의 엉덩이를 받쳐 안정적으로 안은 시우민이 킥킥 웃었다. 어느덧 그의 위에서 목을 끌어안은 윤다이가 고개를 숙여 그의 휘어지는 눈두덩이 위에 쪽쪽 입 맞췄다. 그는 간지럽다는 듯 눈을 감으며 입꼬리를 올리며 한쪽 손으로 윤다이의 신발을 벗겨내 던졌다. 마침내 맨발로 달랑이는 윤다이의 발을 한번 쓰다듬은 그가 침실 쪽으로 발을 옮기며 윤다이의 가슴에 얼굴을 처박고 뜨거운 숨을 느릿하게 내뱉었다.
“푸하! 간지러워!”
윤다이가 간지럽다고 몸을 비틀자 그녀를 안은 그의 팔에 힘이 들어가는 것이 느껴졌다.
“다이, 자꾸 그렇게 움직이면 침대까지 못 가.”
벌겋게 달아오른 그의 시선이 다이닝룸 쪽으로 향하는 걸 발견한 윤다이가 헉 소리를 내며 손바닥으로 그의 눈을 가렸다.
“어우 인간적으로 대리석 식탁은 좀.”
“하……. 눈은 왜 가려. 미치겠네.”
답지 않게 앓는 소리를 낸 시우민에 윤다이가 손을 재빨리 내리자마자 그는 성큼성큼 빠르게 발을 옮겼다. 이내 윤다이의 등으로 침실 문을 밀어 연 그가 천천히 그녀를 안은 팔에 힘을 풀고 다시 가까워지는 윤다이의 얼굴을 잡아당겨 키스했다. 정신없이 그 입술을 받아들이다 보니 어느덧 침대 위에 눕혀진 뒤였다.
(생략)
시우민은 손을 내려 윤다이의 자상을 쓰다듬었다. 더는 아프지 않은 것이 분명한데도 자꾸만 그곳을 신경 쓰는 듯 구는 시우민에 이상한 기분까지 합쳐져 쾌락이 한계를 넘어설 것만 같았다.
“거긴!”
“여기 왜. 아파?”
윤다이가 상처 쪽을 언급하자마자 거칠고 급하던 시우민의 움직임이 순식간에 멈추기라도 할 것처럼 느려졌다. 그 스스로가 알는지 모르겠지만 이건 분명 다정의 범주에 속하는 행동이었다. 다정에 약한 윤다이는 이러다 흐물흐물 무너져내릴지도 몰랐다. 윤다이는 그가 알아채기 전에 재빨리 고개를 저었다.
“…안 아파.”
“정말?”
“민석이, 나 걱정함? 아프다면 그만하게?”
다시 장난스레 웃으며 말하는 윤다이에 시우민이 안심한 듯 입꼬리를 올렸다. (생략) 이내 환희 섞인 신음이 그녀의 입새로 터져 나오자 그가 낮게 웃음을 흘리며 대답했다.
“응. 로맨틱 코미디는 그래.”
순간, 윤다이의 심장이 쿵 내려앉으며 발끝부터 전율이 일었다. 이런 기분을 언젠가 느꼈던 적이 있었다.
(생략)
“민석아, 읏!”
그때, 시우민의 몸짓이 일순 멎었다. (생략) 그는 몸을 멈춘 채로 윤다이의 얼굴을 잡아 올렸다. 까딱 올라간 그의 눈썹 끝에서 툭 떨어진 땀이 그녀의 볼 위로 떨어졌다. 그녀의 턱 끝으로 흘러내리는 제 땀방울을 따라 가만히 시선을 옮기던 그가 고개 숙여 짧게 키스했다. 그러고는 아무 표정 없이 느슨하게 몸을 뒤로 빼며 말했다.
“다시 불러 봐.”
그제야 윤다이는 지금껏 관계 중에 단 한 번도 그 이름을 부른 적이 없다는 사실을 떠올렸다.
“…으? 민석아.”
윤다이의 혀끝에서 그 이름이 완성되기 무섭게 그가 전과는 비교할 수 없을 만큼 강하고 깊게 그녀를 안기 시작했다. 아마 잠시 느슨해졌던 것이 흥분감을 가라앉히려는 이유였던 듯했으나 큰 효과는 없는 듯했다. 그녀는 하릴없이 그의 몸에 매달려 애원해야만 했다.
(생략)
지쳐 까무룩 정신을 놓았던 것인지 눈을 떠보니 어슴푸레한 새벽이었다. 시우민이 몸을 모두 닦아주고 방 안의 온도를 조절한 것인지 몸은 전혀 찝찝하지 않고 오히려 보송보송했다. 윤다이는 몸을 옆으로 돌려, 저를 안고 곤히 자고 있는 시우민의 얼굴을 보았다. 꼭 진짜 사랑하는 연인들 사이의 밤 같았다. 윤다이의 허리 위에 올려진 그의 왼쪽 팔엔 아직 없어지지 못한 주사 자국이 많았다. 대체 왜 그 독한 약을 왜 그렇게 맞으며, 익숙해진 건지……. 더 가까워지고 더 믿음을 가지게 되면 그때는 윤다이에게도 말해줄까. 윤다이는 고개를 들어 상처 많은 그의 팔에 키스했다.
“…한 번 더 하고 싶다고?”
바르작대는 윤다이에 잠이 깬 건지 시우민이 게슴츠레 눈을 뜬 채 말했다.
“어우. 민석이, 아직도 선다고? 그 체력도 다 마약빨임?”
“…다이, 목소리 개같아졌네.”
뼈가 있는 윤다이의 말에 시우민은 아무렇지 않은 듯 윤다이의 쉰 목소리로 화제를 돌렸다. 윤다이가 발끈하자 시우민이 킥킥 잠에 잠긴 목소리로 웃으며 그녀를 끌어안았다.
“이게 다 누구 때문인데!”
“좋았잖아.”
“…진짜 김민석…….”
문득 아까 관계 중에 그가 ‘민석’이라는 이름에 예민하게 반응하던 것이 떠올라 윤다이는 눈썹을 올렸다. 이 이름에 페티시라도 있냐고 물어볼까 잠시 고민하던 중 시우민의 낮은 음성이 그녀의 이름을 불렀다.
“다이야.”
“…….”
“날 그 이름으로 부르는 사람들은, 다 내가 싫어하는 사람들이야.”
난데없는 고백에 윤다이는 침을 꿀꺽 삼켰다. 그가 뭐라도 말할지 모르겠다는 생각에 심장이 빠르게 뛰어댔다. 바로 이어질 줄 알았던 그의 음성이 이어지지 않자, 윤다이는 이내 에라 모르겠다 하는 심정으로 대답했다.
“…안 되는데. 나도 그 이름으로 부르잖아.”
그러자 시우민이 눈을 감은 채 킥킥 웃었다. 그러고는 다시 말을 이어갔다.
“그래, 계속 불러.”
“왜? 나 싫어하려고? 사랑해 본다며? 씨.”
“아니, 너는 예외 해.”
“…….”
왜?
“그리고 네가 어디서 그 이름을 알아냈는지도 끝까지 숨겨봐.”
그걸 알게 되면 윤다이에 대한 얄팍한 믿음이 깨질 것이 뻔하니까. 윤다이를 믿고 싶으니까.
“민석아. 너…….”
날 정말 사랑이라도 하려는 거야? 그래서, 해킹칩이 들어있던 휴대폰도 부수고, 제 몸도 아닌 자상에 그토록 애틋해하며 다정하게 군 거야?
그러나 윤다이는 아무 말도 잇지 못하고 입을 다물었다. 보통의 사람들에게 사랑과 신뢰는 동일선 상에 위치했다. 그러나 윤다이의 삶은 달랐다. 사랑과 신뢰가 결코 같이 간 적이 없었다. 아무리 사랑하는 이여도 믿으면 안 된다는 것은 이미 변백현으로부터 체득하였다. 그리고 이젠 윤다이 스스로도 그러해야 했다. 언제든, 사랑하는 이의 등에 칼을 꽂을 수 있었다. 모든 것은 사랑이란 감정과는 별개여야 했다.
“민석아.”
그 모든 걸 이용할 수 있어야 했다. 오직, 국정원으로서의 사명감으로.
“…….”
“나, 변백현이랑 네가 물에 빠지면 너 구할게.”
시우민은 대답 대신 피식 웃으며 윤다이를 끌어안을 뿐이었다.
다시 눈을 떴을 땐, 훤히 날이 밝은 아침이었다. 윤다이는 새벽 내내 자신을 안고 있던 옆자리가 빈 것을 느끼고는 주섬주섬 이불을 몸에 두른 채 침실 밖으로 나갔다. 거실 테라스에 기대 담배를 피우고 있던 시우민이 윤다이를 발견하고는 손짓했다. 윤다이는 기신기신 무거운 몸을 이끌고 가 테라스 문 앞에 털썩 주저앉았다. 그러자, 시우민이 씩 웃으며 테라스 문을 열고 그런 윤다이와 눈을 맞추며 무릎을 접어 앉더니 그녀의 입에 그가 피던 담배를 물려주었다. 윤다이는 필터를 한 번 빨아들이고 후, 연기를 뱉었다. 잠시 연기 사이로 사라졌던 시우민의 얼굴이 금세 사라지는 연기를 뚫고 나타났다. 그에 윤다이가 퉁명스레 말했다.
“그러고 보니 너 술, 담배, 마약 몸에 안 좋은 건 다 하네.”
“…….”
“요절이 꿈인가 보지?”
변백현이 듣는다면 사돈 남 말 한다고 비웃었을지도 모르는 말을 한 건, 다른 의미가 있는 건 아니었다. 그저, 정말로 그냥 걱정하는 마음에서 꺼낸 말이었다.
“응. 그건 태어났을 때부터 꿈이었지.”
그랬기에, 시우민이 킥킥대며 농담인지 진담인지 모를 대답을 했을 때 윤다이의 얼굴이 굳어지는 것은 당연했다. 시우민은 찌푸려진 윤다이의 미간을 손가락을 뻗어 톡톡 두드리고는 이내 담배를 끄며 아무렇지 않은 듯 말을 이었다.
“가자. 씻고 새 폰 사러.”
윤다이는 언젠가 다가올 슬픔을 예감했다. 그리고 동시에 체념했다. 원래 슬픔, 불행 그런 것들은 윤다이의 인생에 늘 함께였기에.
“헐. 맞아. 최신폰 아니면 총 쏠 거임.”
“그러든지.”
입꼬리를 올리며 대답한 시우민은 이내 팔을 뻗어 윤다이를 안아들고는 긴 다리를 성큼 뻗어 테라스를 나섰다.
여기까지 포스타입의 내용입니다. 아래로 글이 이어집니다.
변백현은 TF팀의 팀장이기 전에 전략실 국장 유태오의 충실한 개새끼였다. 이를 이유로 변백현은 윤다이를 의심하여 그녀를 감시하고, 그녀의 약점을 찾으라는 유태오 국장의 명령에 반드시 따라야만 했다. 그리고 그러기 위해선 윤일호 검찰총장과 윤가를 파고드는 수밖에 없었다. 찬찬히 윤가의 날들을 되짚어가며 정보를 모으던 변백현은 12년 전, 윤가에서 집안에서 일하던 직원들을 모두 내보낸 일이 있었다는 것을 우연히 알게 되었다. 파면 팔수록 이상했다. 당시 그만둔 직원들은 다 어디로들 숨었는지, 그리고 대체 윤가에서 어떻게 입막음을 한 것인지, 좀처럼 그 누구도 만날 수가 없었다. 게다가 겨우 찾아내 다가가면 모두 약속한 듯 줄행랑을 치기 바빴다.
“그래서, 윤가(家)에선 얼마나 일하셨다고요?”
“짧았어요. 한 4개월?”
변백현의 맞은편에 앉은 중년의 여자는 대답을 하면서도 불안한 듯 연신 주변을 두리번거렸다. 엄청난 보수와 가능한 모든 보호를 약속하며 겨우겨우 찾아낸 한 명이었다. 변백현은 테이블 위를 주먹으로 똑똑 두드려 여자의 산만한 시선을 제게로 집중시켰다.
“윤가를 나오게 된 이유를 좀 자세히 말해주실 수 있을까요.”
“엄청 자세히는 몰라요…. 전 그날 마침 휴가 갔다가 저녁 식사 때부터 출근하는 날이었거든요.”
“…….”
“그런데 출근하자마자 분위기가 아주 이상했어요. 뭔가 스산했달까…. 아니나 다를까 같이 일하던 동료들이 모두 짐을 챙기고 있는 거예요. 그리고 다들 출근한 절 보자마자 놀라면서 당장 같이 나가자고, 나가야 한다고…….”
“갑자기요? 그리고, 나가란다고 그렇게 바로 다들 나간다고요?”
변백현의 말에 당연하다는 표정으로 고개를 세차게 끄덕인 여자는 이내 검지와 엄지를 말아 동전 모양을 만들더니 대답했다.
“뭐겠어요? 퇴직금이라는 명목으로 꽤 챙겨준다고 약속했거든.”
“아 그럼 계약서나 각서 같은 게 혹시…….”
“아뇨. 그런 게 있을 리가 없죠. 그 댁에선 이 일에 대해 어떤 흔적도 남기지 않아야 했으니까.”
여자의 단호한 목소리에 변백현은 눈을 동그랗게 뜨고 고개를 옆으로 떨군 채, 계속해서 물었다.
“하지만 그런 게 없으면 사람들이 퇴직금을 준단 말을 어떻게 믿죠? 그리고 윤가에서도 사람들 입을 막으려면 그런 일종의 안전장치가 필요한 거 아닌가요?”
변백현의 말에 여자는 푸하하 웃음을 터뜨리더니, 눈썹을 괴상하게 올리며 아무것도 모르는 제 앞의 젊은 남자가 가엾다는 듯 혀를 쯧쯧 찼다. 그러고는 이내 고개를 앞으로 쑥 빼며 그에게 속삭이듯 말했다.
“말했잖아요. 그 댁에선 그 어떤 흔적도 남기지 않아요.”
“아니 그럼 어떻게…….”
“어떻게 계약서 한 장 없이도 그 집에서 일했던 모든 사람들이 지금까지 입을 다물 수 있었느냐고?”
변백현이 대답 대신 고개를 끄덕였다. 순진한 척하는 그의 얼굴에 하릴없이 속은 여자는 처음 보였던 망설임은 어디 갔냐는 듯 거침없이 말을 이어갔다.
“생각해 봐요. 계약서란 걸 쓰고 서로 지장을 찍어봤자 종이 한 장인데. 고작 종이 쪼가리 하나로 뭘 하겠어?”
“네? 그래도 계약서가 있으면 법적으로…….”
“푸하하! 법? 지금 법이라고 했어요? 그 댁이 법을 틀어쥐고 있는데?”
대대로 검사직을 이어오며 가져온 법의 권력. 마침내 오른 검찰총장의 자리와 곧 앉게 될 법무부장관의 자리까지. 대한민국의 헌법은 윤가(尹家)의 집 마당 안에서 자유로이 움직였다. 계약서 따위는 그들에겐 그저 이면지로도 못 쓰는 종이에 불과할 뿐이다. 얼마든지 무시하고, 조작할 수 있었다.
“입을 잘못 놀리는 순간 저세상 직행인 걸 다들 잘 알아요. 일하면서 많이들 봤으니까.”
“그런데도 오늘 나오신 건요? 돈 하나 때문이라기엔, 그동안 너무들 숨어 사셨잖아요.”
변백현은 심드렁히 물으며 휴대폰을 만졌다. 그가 들고 있는 휴대폰 화면 속, 윤다이의 GPS 위치는 시우민의 집인 한남동의 아파트 위에 멈춰있었다. 그걸 잠시 보던 변백현은 이내 대답해 보라는 듯 여자를 향해 고개를 까딱였다.
“그게…. 제가 나오면서 우연히 총장님 통화를 들은 게 있는데, 이게 너무 혼자 알고 있기 무거워서…….”
총장님이라면 윤다이의 아버지를 말하는 것일 테다. 그때 유태오 국장으로부터 온 호출이 울렸다. 윤다이의 약점은 찾았느냐는 물음이었다. 변백현은 제 시계에 있는 녹음 버튼을 눌렀다. 그러고는 생각했다.
“그게 뭡니까.”
“……가씨가………었어요….”
“예?”
윤다이를 이 프로젝트에 넣는 게 아니었다. 아니 애초에 윤다이를 국정원에 데려오는 게 아닌데. 그렇다면 더, 아예 윤다이를 안 만났다면…….
…아니, 아니. 그건 절대 안 되지.
“다이 아가씨가.”
그러나 사명감, 충성심. 그것들을 빼면 변백현이 살아온 생애에 무엇이 남는가.
“…….”
“…사모님을 주, 죽였다고요.”
딸깍, 맞물리는 기계음과 함께 녹음 파일이 전송되었다.
…그러니까 괜찮을 것이다. 누군가의 사랑같은 건 아무래도.
백현이와 이혁수의 과거 첫만남
아버지의 권력을 기꺼이 이용하되 그런 제 삶을 역겹게 생각하는 다이
종인이와 혁수의 만남과 거래
민석이와 다이의 연애(?) 시작. 하지만 신뢰느은?
백현이의 다이 약점 찾기
였슴니다. (말도 안 되게 요약하기ㅋㅋㅋㅋ)
선생님들 여신님들
제 혐생을 저주해주세요.
제가 쓰고 싶은 장면은 얘네가 서로 미워하고 상처받는데 사랑하는ㅋㅋㅋ(변태인가?) 부분인데
그 부분이 나올 때까지 열시미 달려갑니다.
아 진짜 글 올리면서 할 말이 많았눈데 이거 워째...일단,,,,, 또 봐요 우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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