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진 : 김발용(金勃鏞) 참고문헌 : 성범중 교수의 '척약재 김구용의 문학세계'
[출처] 가을비 우산속에서 아름다운 폐허를 만나다. (충렬공김방경기념사업회) [작성자] 군사공파 상락 김태영
가을비 우산속에서 아름다운 폐허를 만나다.
일시 : 2013. 11. 02(토) 08: 30 장소 : 신륵사. 법천사지. 흥법사지. 봉서정. 육우당터 답사 참석 : 영환. 영윤. 재구. 발용. 태우. 태영. 태철. 춘식. 경식 (9명) 은회(서울 합류)
2013(癸巳)년 11월 02일(토) 안동김씨역사연구회(이하 安史硏)는 창립 12주년을 맞이하여 신륵사→ 법천사지→ 흥법사지→ 봉서정→ 육우당터를 차례로 답사하였습니다. 원래는 11월 11일이 창립일 이지만, 금년에는 안동 향사일과 겹치게되어 1주일 앞당겨 실시하게 되었습니다.
오전 8시 30분 재구(在九) 회원이 운전대를 잡고, 6명의 회원이 승차한 자동차는 종합운동장역을 출발, 고속도로 혼잡을 피해 양평 국도를 이용하여 순조롭게 달립니다. 영환(榮煥) 회장님이 들려주는 여주의 역사 인물 소개를 흥미있게 듣다보니 지루함도 잊은채 어느새 신륵사에 도착하였습니다. 이곳 신륵사 주차장에서 수원에서 출발한 태철(泰喆). 춘식(春植). 경식(敬植) 회원 등과 합류하여 모두 9명의 회원이 이번 답사에 동참 하였습니다.
▲신륵사 일주문
만산홍엽(滿山紅葉), 맑고 푸른 하늘을 꿈꾸었던 일정은 가을을 재촉하는 비속에 묻히고, 저마다 우산을 바쳐 들은 일행은 일주문(一柱門)을 지나 나옹선사(懶翁禪師:1320-1376)의 마지막 자취인 강월헌(江月軒)에 올랐습니다.
▲강가 언덕에 자리 잡은 이곳 강월헌(江月軒) 정자에서 흩날리는 낙엽을 바라보며 영환(榮煥) 회장님이 들려주는 불교 용어. 사찰의 구조. 의미 등 멋진 강연을 흥미있게 청취하였습니다.
▲자리를 옮겨 조사당(祖師堂) 뒤쪽 외진 언덕에 자리잡은 보제존자 나옹화상의 부도탑과 석종비를 찾았습니다
▲여주 신륵사 보제존자석종비(驪州 神勒寺 普濟尊者石鍾碑): 보물 제229호로 지정되었습니다.
▲비문은 목은(牧隱) 이색(李穡:1328-1396)이 짓고, 명필 유항(柳巷) 한수(韓脩: 1333-1384)가 썼습니다. 비문의 글씨를 더듬어 전삼사좌윤 김구용(金九容: 1338-1384)이라 각인된 글자와 많은 이름자들을 확인하였습니다. 당시 이 일을 추진하고 법회에 참여 했던 분들의 명단인것 같았습니다.
▲신륵사 극락보전(極樂寶殿)
1379년(우왕 5) 5월에 유항(柳巷) 한수(韓脩: 1333-1384)는 왕명을 받고, 나옹 선사의 비문을 쓰기 위해 여주 신륵사에 머물고 있었습니다. 뜻밖에 척약재(惕若齋) 김구용(金九容: 1338-1384)의 내방을 받습니다. 개경에서 이별하고 몇 년만에 만나니 얼마나 반가웠을까요? 김구용은 언사(言事)로 죽주로 유배되었다가 여주로 옮겨 한거하고 있을 때의 일이었니까요. 한수는 척약재의 안내로 여강에 배를 띄우고 음주와 담소로 지난 날의 회포를 풀며 ‘척약재 승주래방 음주중(惕若齋乘舟來訪飮舟中)이라는 시를 지어 마음에 담습니다.
척약재(김구용) 승주래방 음 주중(惕若齋乘舟來訪飮舟中) 한수(韓脩)
驪江煙雨泛扁舟 여강 안개 비에 조각 배를 띄우고 隨意隨流或泝流 뜻대로 물따라 내려가기도 거슬러 올라가기도 千點岡巒同暗淡 천 점 봉우리는 모두 다 수묵 빛 兩邊花木各淸幽 양 옆 꽃나무들 각기 맑고 그윽하네.
魚因知樂潛相趁 고기들도 낙을 알아 물에 잠겨 서로 따르고 鳥識忘機近尙浮 새는 저 안 잡을 줄 알고 가까히 가도 그대로 있네 不有詩仙居此地 이 고장에 살고 있는 詩仙(척약재) 곧 아니면 豈能爲此畫中遊 이 멋진 그림속 놀음 어찌 볼 수 있었으랴.
관람을 마치고 시간은 흘러 법천사지(法泉寺址)로 이동합니다. 신륵사에서 문막을 거쳐 49번 지방도를 타고 22㎞쯤 달려 부론면 법천리에 도착하였습니다.
725년(성덕왕 24)에 창건되었으며, 고려 문종 때 지광국사(智光國師)가 이곳에 머물면서 대찰(大刹)의 면모를 갖추었다고 합니다. 조선 초기에는 유방선(柳方善)이 머물면서 강학(講學)하였으며, 이 때 수학한 한명회(韓明澮)·강효문(康孝文)·서거정(徐居正)·권람(權擥) 등이 탑에 그들의 이름을 새겨 놓았습니다. 그 뒤의 역사는 자세히 전해지지 않으나 임진왜란 때 전소된 뒤 중창되지 못했다고 합니다.
▲마을 전체가 옛 절터였다는 법천사는 현재 발굴중에 있습니다. ▲압권은 11세기의 고승 지광국사(智光國師)의 부도탑비인 현묘탑비(玄妙塔碑: 국보 59호)입니다. ▲구름무늬 위에 놓인 거북의 머리는 용의 모습이요, 등껍질엔 임금 왕(王) 자를 줄지어 새겼습니다. ▲거대한 몸체의 양 옆면의 용무늬는 지금까지 보아 온 그 어떤 석조 예술품보다 더 섬세하고 화려한 조각으로 치장되어 볼 수록 눈이 부실 지경입니다.
▲법천사 지광국사부도탑비인 현묘탑비(국보 59호) 옆면
석탑 일부와 광배, 연꽃무늬 받침대 등 각양각색의 석물들을 건물터 한쪽에 모아 놓았습니다. 화려했던 법천사의 옛 모습을 그리며, 흥망성쇠의 허망함도 함께 보았습니다.
동정(東亭) 염흥방(廉興邦: ? - 1388)이 법천사에 와 있다는 소식을 들은 척약재 김구용은 반가운 마음에 한걸음에 달려 왔습니다. 당시에 법천사 가는 길은 배를 타야 했고, 강을 건너 가서는 다시 말을 타고 절까지 이동해야 했을 것입니다. 이곳 스님은 귀한 분들을 대접하기 위해 멀리 조각배를 띄워 술과 안주를 구해 왔습니다. 밤이 깊도록 몇 순배의 술잔이 돌고, 취기가 오르면서 서로 느낀 정회(情懷)를 이야기하기도 합니다. 때론 호탕한 웃음소리도 들립니다. 봄은 코 앞에 와 있는데 아직도 눈은 내리고 있습니다. 다음날 아침 밤새워 술을 마신 惕若齋와 東亭 두 선생은 취기오른 몸을 이끌고 법천사에서 돌아옵니다. 앙암진으로 가는 길에 말 위에서 깜막 졸았으나 늙은 말은 절둑거리며 가는 길을 알아서 잘도 갑니다.
謁東亭相公 會法泉僧以扁舟載酒而來 夜深痛飮 東亭有詩云 동정(東亭)상공(염흥방)을 뵈었더니 마침 법천사의 스님이 조각배에 술을 싣고 와서 밤 깊도록 실컷 마셨다. 동정 상공이 시를 짓기를,
短棹煙波僧載酒 작은 돛대 아지랑이 물결에 스님은 술을 싣고 蹇驢風雪客吟詩 다리 저는 나귀 눈보라에 나그네는 시를 읊다. 相逢一夜情無極 서로 만난 하룻밤의 정(情)도 끝이 없어 更約仰嵒芳草時 다시 앙암(仰嵒)의 향기로운 시절을 약속하네.
予亦次韻 나도(척약재) 차운(次韻)하였다. 扁舟未禁別離情 조각배로 이별의 정(情)을 금치 못하여 盡醉分携水上程 모두 취해 물위의 길로 이끌려 나뉜다. 老馬也能知主意 늙은 말은 그래도 주인의 뜻을 알아서 睡中還繞碧波行 조는 중에도 오히려 푸른 물결을 돌아가네.
어느새 12시가 훌쩍 넘었습니다. 금강산도 식후경이라는 말을 새기며 식당을 찾았습니다. 생소한 지역이지만, 스마트폰의 빠른 검색으로 인근의 명소 ‘남한강민물매운탕집’을 쉽게 찾았습니다. 메기 매운탕으로 꿀맛 같은 식사를 마치고 다음 코스인 ‘흥법사지’로 이동합니다. 부론면에서 약 21㎞ 쯤 달려 원주시 지정면 안창리에 도착하였습니다. 마을 주민에게 ‘흥법사지’를 물었더니 모른다고 합니다. 다시 절터를 묻자 절터는 차를 타고 뒤쪽 언덕으로 오르면 바로 주차할 수 있다고 대답합니다. 흥법사지는 모르는데, 절터는 잘 알고 있었습니다.
▲흥법사지(興法寺址) 삼층석탑(보물 464호)
《고려사》에 937년(태조 20), 당시 왕사(王師)였던 진공대사 충담(眞空大師 忠湛: 869-940)이 입적하자 940년 진공대사의 부도탑이 있는 흥법사에 태조가 직접 비문(碑文)을 지어 진공대사탑비를 세웠다는 기록이 있는 것으로 미루어 흥법사가 신라 때부터 있던 사찰임을 알 수 있습니다. 넓은 축대가 있고, 삼층석탑(보물 464호)과 몸체가 없어진 우람한 거북상과 화려한 지붕돌의 조각이 인상적입니다. 척약재 김구용이 안렴사 하륜(河崙: 1347-1416) 에게 준 시에 “뜰 앞에는 끊어진 비석이 거친 이끼에 묻혔는데” 라는 구절을 보면, 탑비는 이미 고려말 이전에 없어진 것으로 추정해 볼 수 있습니다. 현재 절터 주변은 모두 개인 소유 경작지로 변해 있었습니다.
▲비신이 없는 진공대사탑비의 거북좌대 우람한 이수
1378년(우왕4) 12월, 여주에서 한거하던 척약재 김구용(金九容: 1338-1384)은 당시 강원도 안렴사로 부임한 하륜(河崙: 1347-1416)에게 글을 보내 이 곳 흥법사에서 만나자는 약속을 합니다. 성균관에서 이학을 같이 공부했고, 요승 신돈 측의 인물들을 탄핵하는데 함께했던 20년 지기입니다. 두 선생은 서로 술잔을 권하며 옛 이야기와 안부를 묻기도 하고, 때론 정치 현안에 대해서도 이야기를 합니다. 정적이 흐르면 관현(管絃)을 연주하기도 했지요. 밤이 늦어서야 하륜이 돌아가고 하룻밤을 이곳에서 쓸쓸하게 보내야 했던 척약재는 동지 섣달 기나긴 추운 밤을 쉽사리 잠자리에 들지 못했습니다. 흥법사 주변, 영봉산 자락은 힌 눈이 내려 쌓이고 있습니다.
다음날 아침 강원도안렴사 하륜이 고기와 술을 보내왔습니다. 쓸쓸이 추운 밤을 지새운 척약재 김구용은 얼근하게 취하여 돌아오면서 다음과 같은 시를 지어 하륜에게 보내 줍니다.
馬上吟得二詩 奉呈河廉使。 말위에서 시 두수를 읊어 안렴사 하륜에게 받들어 드리다.
梵宮寥落臘天寒 절간이 쓸쓸하고 섣달 날씨는 차가운데 飮破三壺信馬還 세 항아리의 술을 마시고 말을 믿고 돌아오네. 大醉哦詩雙耳熱 크게 취하여 시를 읊으니 두 귀가 화끈화끈한데 不知新雪擁千山 새로 내린 눈이 온 산을 감싼 것은 알지 못하네.
一夜平原興未闌 하룻밤 들판에서의 흥이 끝나지 않았는데 更期山寺作淸歡 산사(山寺)에서 즐길 것을 다시 기약하네. 庭前斷碣埋荒蘚 뜰 앞에는 끊어진 비석이 거친 이끼에 묻혔는데 似欲郞官着意看 마치 낭관(郞官)이 뜻을 붙여 보려는 듯하네.
흥법사 탐방을 마치고 귀경 길에 여주 금사면에 있는 둔촌(遁村) 이집(李集: 1314-1387)의 봉서정과 척약재 김구용의 육우당터를 찾아 보았습니다. 석탄유고(이존오李存吾: 1341-1371)에 실려있는 1679년에 조석주가 지은 고산사 상량문에 보면... 서쪽 방향으로, 넓고 큰 들판에 넘는 해 낮으막하네, 우리고을 옛 부터 군자 많으니, 육우(척약재)의 남긴 터는 봉서(둔촌)와 근접했다네. 라는 구절이 있습니다. 하지만 현재의 봉서정도 옛터가 아닌, 근대에 현재의 자리로 옮겨 복원했다고 합니다.
▲ 둔촌 이집 선생의 봉서정
금사 파출소 주차장에 주차시키고, 길 건너 금사공원으로 오릅니다. 정상에 산신당이 있고, 강가로 조금 내려가면 언덕에 보호수인 600년된 은행나무가 서있습니다, 옆에 조그만 채소 밭이 있는데 이곳이 옛 '육우당터'로 추정되는 곳입니다. 여기에서 내려다 보는 여강(驪江)의 경치가 아름답습니다. ▲육우당(六友堂) 터
어질구나, 그대가 여섯을 벗함이여, 진실로 초월하게 속세를 벗어났네. (月)달은 (山)산 언덕에 비치고 (風)바람이 슬슬 불어오니 (江)강에는 절로 물결이 이네. (花)꽃의 말은 더욱 아름답고 (雪)눈 녹은 물은 차를 끓일 수 있네.
원재(圓齋) 정추(鄭樞: 1333-1382)가 멋지게 찬사한 육우당부(六友堂 賦)의 한 대목입니다.
둔촌 이집 선생이 육우당을 부러워 하며 지은 시에 “강루에 높다란 곳이 그대의 거처인데, 언덕 사이로 마주 보이니 십 리 남짓 하네. 노를 저어 오고 감이 빈번해야 할터이니, 이쯤에다 나도 역시 초가 한 칸 지으려네.” 라고 하였습니다.
금사파출소 주차장에서 수원팀과 작별하고 귀경길에 올랐습니다. 강동 둔촌동에 이르러 송파에 사는 은회(銀會) 회원을 불러 함께 성내시장내 저렴한 고기집에서 저녁식사를 마치고 근처의 호프집에서 한 잔씩하고 헤어졌습니다.
이번 안사연 12주년 기념 답사회는 만추의 가을비가 내리는 가운데 과거로의 멋진 시간여행이 되었습니다. 텅빈 폐허에서 주춧돌과 기왓조각을 보았고, 천년 세월을 견딘 부도탑과 석비를 만났습니다. 그것들은 현란한 석조 예술의 극치를 보여준 국보였고, 보물이었습니다. 또 필자가 준비해간 자료속의 시문(詩文)을 낭독하며, 그곳 사찰에서 있었던 역사인물들의 발자취를 들여다 보는 것도 흥미롭고 즐거웠습니다. 그 분들의 시문에서 선조님을 만나고, 그 속에서 여러 유형의 인사들과 친분을 쌓으며 교류했던 모습들을 통해 한 시대의 역사를 알 수 있었기 때문입니다.
사진 : 김발용(金勃鏞) 참고문헌 : 성범중 교수의 '척약재 김구용의 문학세계'
[출처] 가을비 우산속에서 아름다운 폐허를 만나다. (충렬공김방경기념사업회) [작성자] 군사공파 상락 김태영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