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적 인물
# 황기로(黃耆老)
중종 16년(1521)에 고아 망장(현 대망리)에서 출생했다. 조선 중종으로부터 '세상에 제일 가는 초서의
성인이요, 왕희지(王羲之)가 죽은 뒤에 손꼽은 한 사람(天下之草聖 羲之後一人 천하지초성 희지후일인)이라는 칭찬을 받은 분이 있으니, 본관은 덕산, 자는 태수이며, 호는 고산이다.
고려시대 덕풍군(德豊君) 언필(彦弼)의 후예로서 상정(橡亭) 필의 손자이며, 진사 옥의 아들로 진사 시험에 오른 것은 중종 29(1534)인데 그때 선생의 나이 14세였다.
진사에 오른 뒤로 고향에서 학문과 글씨에만 정진했으며 여러번 관직에 임명되었으나 한번도 취임하지 않고 구름과 학 및 매화와 벗하고 후진을 가르치는데 낙을 삼았으며 전력을 다하였다. 초서로써 세상에 이름을 떨쳤는데 중국인이 그의 글씨를 보고 '왕희지(王羲之)가 죽어 다시 환생했다'고 칭찬을 했기 때문에 뒤에 명종께서 그를 칭찬하여 그 귀절을 인용했던 것이며 마침내 그의 필적을 얻으려고 종이와 먹, 붓을 가지고 와서 문을 두드리는 사람들이 하루에도 그 수를 헤아릴 수가 없었다고 한다. 그리하여 중국인들이 그를 일러 '동국의 장욱'이라고 칭찬한 나머지 초성(초서의 성인)이란 존칭을 듣게 되었다.
# 허위(許蔿)
김해인(金海人), 호는 왕산(旺山)이다. 1855년 청추헌(聽秋軒) 조(祚)의 네째아들로 임은동에서 태어났으니 방산(舫山) 훈(薰)의 막내 동생이다.
천성이 강직(剛直) 강개(慷慨)하며 조부 태초당(太初堂)에게 형제가 같이 수학(修學)하였으며 백형(伯兄)인 방산(舫山)의 지도가 컸었다.
어려서 총명하여 열살 전에 문구(文句)를 만들었으니 '월위대장군 성위만병수(月爲大將軍 星爲萬兵隨)' 즉 '달은 대장군이 되고 별은 군사처럼 따르네'라 했으니 어려서부터 대장군의 기질을 타고났다 하겠다. 자라면서 경학(經學)보다는 병서(兵書)를 즐겨 읽었다.
을미년(乙未年 1895) 국모시해사건(國母弑害事件)이 일어남에 이를 을미사변이라 하는데 이런 치욕을 앉아서 당할 수 없다 하고 동지 이은찬, 조동호, 이기하 등과 같이 금산(金山, 김천) 장날을 기해 봉기하니 금산무기고(金山武器庫)를 습격하여 탈취하고 관군과 접전하여 곤경에 빠지자 피신하였다. 영호남 각지에 격문을 보내 의병을 모아 충청도 진천까지 진격하던 중 신기선(申箕善)이 갖고온 '의병을 해산하라'는 고종의 비밀봉서를 받고 땅을 치며 호곡하며 훗일을 기약하고는 헤어졌다.
이 때 공은 백형이 은거한 청송 진보에 가서 3년간 형(방산)의 지도로 학문에 증진하였다. 그 후 대신 신기선의 천거로 45세에 영희전(永禧殿) 참봉(參奉)으로 시작하여 성균관 박사, 중추원 의관, 평리원 재판장, 의정부 참찬, 비서원 승 등을 역임하고 종이품 가선대부에 올랐다.
공은 엄격하여 평리원 판사로 있을 때 이미 판결난 것이라도 사리에 맞지 않으면 비록 세도가(勢道家) 일일망정 번복시켰다. 또한 계속 배일격문(排日檄文)을 배포하자 일제(日帝)가 구금하고 벼슬을 사임케하고 석방했다. 2개월 뒤 고종의 깊은 은총으로 비서승(秘書承)에 임명하였으나 계속해서 격문을 보내는 항일운동을 하다가 최익현과 같이 구금되었다.
그 후 방면된 그는 전라, 충청, 경상의 접경지인 지례(知禮)의 삼도봉 아래 은거하여 의병 규합에 전념하였다. 1905년 11월 을사보호조약이 체결되어 일본이 조선을 대표하고 외교업무를 통감부가 장악하니 전국민이 통분하였다.
이때 황성신문의 주필이었던 장지연이 '시일야방성대곡(是日也放聲大哭)'이란 논설로 '원통하도다 남의 노예가 된 동포여! 살았는가? 죽었는가?'라는 격조 높게 비분을 토로하자, 각지의 유생들이 빗발치는 상소로 역신을 성토하고 을사의병의 봉화가 타올랐다. 공은 경상도, 전라도, 강원도, 경기도 등지를 돌며 유생들과 대응책을 강구하였다. 이듬해인 1907년 해아밀사사건(海牙密使事件)으로 고종은 양위(讓位)되고 군대가 해산을 당하니, 공이 경기도에서 창의(倡義)하여 포천, 양주, 철원, 장단, 연천을 누비면서 그 때 해산당한 강화진의 병졸까지 흡수하였고 중형인 성산 노는 연천 등지에서 400여명의 의병을, 연기홍은 500여명의 의병을 고양에서, 이홍응은 300여명의 의병을 영평에서, 연기우와 김호규는 각각 200여명의 의병을 이끌고 왕산의 휘하에 모여들었다.
1908년에 왕산은 감사병 300명을 이끌고 통감부를 격파하기 위하여 동대문 밖 30리 지점인 수택리에 집결토록 약속하였으나 각도의 의병들은 교통의 불편으로 도착이 지연되었고 이러한 정보가 일본군에 입수됨으로 대병력이 집결되기 전에 일본군은 선수를 쳐 1월 25일 공격을 당하여 필사의 전투를 벌렸으나 중과부적으로 사상자만 나올 뿐이라 할 수 없이 양주로 후퇴하였다.
그 때 총리대신 이완용이 사람을 보내 관찰사로 혹은 내부대신으로 왕산을 유혹하기도 하였으나 완강히 거절하고 심히 꾸짖었다. 왕산은 적성 동남쪽 감악산에 의병훈련장을 만들고 화약을 구하기 위해 김창식 등을 서울로 파견하고 경현수에게 밀서를 주어 청국 혁명당에 요청하기도 하고 태황제의 복위. 외교권의 반환. 통감부의 폐지 등 30개 항목을 인편으로 서울에 보내기도 하며 재차 서울 공격을 서두르던 중 6월 11일 철원의 일본헌병 분대장 태전청송(太田淸松)이 거느린 한 부대의 기습으로 그만 체포되고 말았다.
공은 헌병사령관 명석원이랑(明石元二郎)에게 '나의 행동이 비단 조선을 위해서 뿐만 아니라 일본을 위해서도 좋은 일이며 조선이 독립되어야 동양평화(東洋平和)가 유지된다'고 하였다. 공의 동양평화론은 안중근 의사의 동양평화론과 같이 유명하다.
또한 공을 심문하던 헌병사령관 명석원이랑이 깊은 학문에 감동되어 국사(國士)라 존칭했다. 공이 교수형의 언도를 받고 죽음에 임하여 남긴 유서는 '국치와 민욕이 이에 이르렀으니 죽지 않고 어이하랴/ 아버지 장례도 치루지 못하고 / 나라의 주권도 회복하지 못했으니/ 충성도 못하고 효도도 못한 몸이니 죽은들 어이 눈을 감으랴'했다. 형장에서 일본 승려가 와서 명복을 빈다고 불경을 낭송하자 '충의 넋은 천당에 가게 되어 있다. 설사 지옥에 떨어진다 하더라도 원수놈의 손을 빌어 천당가기를 바라겠느냐'하며 큰 소리로 내치고 조용히 형장의 이슬로 사라졌다.(이 때가 1908년 10월 23일이며 52세의 나이였다.) 공의 아들들도 아버지의 유지를 받들어 숙부인 성산을 따라 만주로 건너가 항일에 몸바쳤으니 일본 고등경찰요사(高等警擦要史)에 '그 권속들은 모두 국외로 이주하고 그 자손들은 불령(不逞)운동에 종사하다'라고 기록되어 있다.
1962년 3월 1일 건국공로훈장이 서훈되고 대구달성공원에 순국기념비가 있고 금오산에 유허비(遺墟碑)가 있다. 또한 청량리에서 동대문까지의 길을 기념코져 왕산로(旺山路)라 명명된 것도 매우 뜻 깊은 사실이다.
# 향량(香娘)
열녀(烈女) 향랑(香娘)은 숙종(肅宗)때 사람으로 구미 상형곡(上荊谷)에서 박자신(朴自申)의 딸로 태어났다.
어릴 때부터 행실이 바르고 정숙하여 이웃 사내들과 놀지 않았으며 일찍이 어머니를 여의고 계모 밑에서 자랐다. 성질이 못된 계모는 향랑을 몹시도 학대했으나 향랑은 조금도 성내지 않고 계모에게 효성을 다하고 순종하였다.
17세때 같은 마을에 사는 임천순(林天順)의 아들 칠봉(七奉)에게 시집을 갔다. 향랑보다 3살 아래인 칠봉(七奉)은 성질이 악하고 망측하여 향랑을 원수처럼 여겼다. 향랑은 나이가 어려 그러려니하고 참고 견디었으나 칠봉(七奉)은 마찬가지였다. 막대기로 전신을 두둘겨 패고 머리카락을 쥐고 내동댕이 치는 날이 날마다 계속되었다. 시부모(媤父母)가 말려도 막무가내라 참다 못하여 친정으로 돌아갔으나 계모 또한 박대하니 친정아버지가 할 수 없어 숙부의 집으로 보냈다. 향랑은 숙부의 집에서 평안히 나날을 보냈으나 숙부도 얼마가지 않아 재가할 것을 권유하였으나 향랑이 일부종사(一夫從事)를 고집하자 숙부도 박대하면서 뜻을 꺽으려 하자 하는 수 없이 마음을 고쳐먹고 시집으로 돌아갔다.
이에 칠봉(七奉)은 더욱 더 거칠어져 보리타작하듯이 두둘겨 패니 보다 못한 시부도 재가를 권하였다. 향랑이 부당함을 고하며 토옥(土屋)이라도 지어 주면 그 속에서 생을 마칠 것을 허락 해주기를 간청하니 시부도 괜히 집안을 어지럽게 하지말라 하며 거절했다.
그해 가을 향랑은 아무도 자기를 받아주지 않으니 이부종사(二夫從事)는 할 수 없다고 죽기를 결심하였다. 죽어서도 흔적을 남기지 않기 위해 강물에 투신(投身)키로 작정을 하여 오태동 야은(冶隱)선생의 지주비가 있는 곳으로 갔다. 마침 12세의 나무하는 소녀를 만나 사는 곳을 물으니 이웃마을이었다. 향랑이 말하기를 '내 너를 만나 다행이구나, 네가 만약 남자였다면 내 원통한 사연을 말할 수 없고 너 또한 큰 처녀라면 반드시 나의 죽음을 막을 것이나 너는 어리니 내 죽음을 막지 못하고 총명하니 내 말을 내 아버지에게 전할 수 있게 되었구나. 내 죽음이 명백치 못하면 친정부모님과 시부님은 내가 잠적하여 다른 곳으로 시집갔으리라 의심하겠거늘 너를 만나 나의 죽음을 증명할 수 있게 되었으니 천만다행이다' 향랑은
그 소녀에게 어릴 때 계모에게 학대받은 얘기와 시집살이 3년동안 겪은 설움을 낱낱이 들려주었다.
이윽고 향랑은 다루머리와 치마를 벗어 신발과 함께 싸서 소녀에게 주며 일렀다. '이것을 우리 부모에게 갖다 드리고 내 죽음이 명백함을 증명토록 해다오. 부모보다 먼저 죽는 것이 죄가 되거늘 죽어서도 다시 부모 볼 면목이 있겠느냐. 나의 시신은 반드시 나오지 않으리라. 수중에서 부모를 뵈옵고 엉크러진 애원을 풀어야겠다' 향랑은 오랫동안 통곡하다가 울음을 그치고 노래 한 곡조를 불렀다. 곧 산유화 노래였다. 향랑이 곧 물에 뛰어들 기세를 보이자 소녀는 무서워 도망가려 했다. 향랑은 다시 소녀를 끌고와 말했다.
'두려울 게 없다. 내 너에게 산유화 노래를 가르쳐 줄테니 외어 두었다가 날마다 이곳에 나무하러 오거든 노래를 불러다오. 산유화 노래를 들으면 내 혼백이 온 줄 알리라. 그리고 푸른 물결이 솟구치는 곳이 있거든 내 넋이 그 속에서 노니는 줄 알거라'말을 마치고 물에 뛰어들려 하던 향랑은 '죽기를 결심하고도 물을 보니 두려운 마음이 생기니 가련하구나. 내 차라리 물을 아니 보리라'하곤 적삼을 벗어 얼굴을 싸고 물속으로 뛰어들었다.
향랑의 죽음을 본 소녀는 혼비백산하여 마을로 달려 갔다. 향랑의 아버지에게 죽음을 알렸다. 향랑의 아버지는 곧 못으로 달려가 시체를 찾았으나 허사였고 14일이 지나도록 시체가 떠오르지 않다가 보름째 되는 날 적삼으로 얼굴을 가린 향랑의 시체가 물위로 떠올랐다.
이러한 사실을 선산부사(善山府使) 조구상(趙龜詳)은 숙종(肅宗) 29년(1703) 5월 향랑전(香娘傳)을 짓고 그림으로 그리는 한편 조정에 상소하여 1704년에 숙종이 정려(旌閭)토록 명령하였다. 선산부사(善山府使) 조구상(趙龜詳)은 원한을 품고 죽은 향랑의 넋을 달래기 위하여 제문(祭文)을 지어 무덤에 제사를 지냈다.
이러한 사실은 조선조 후기의 실학자로 '청장관전서'의 저자인 이덕무의 향랑시(香娘詩) 병서(幷序)의 다음과 같은 기록(記錄)에서도 증명이 된다. 향랑의 묘소는 상형곡에 있다고 하나 봉분조차 찾을 길 없고 동강난 묘비만 서 있다. 묘비가 동강난 사실은 일제때 마을 못을 만들면서 석수장이가 축대를 쌓으려고 깨트렸기 때문이다. 이에 마을 사람들이 크게 노하여 다시 세우고 해마다 3월 삼진날 제사를 지냈으며 최근에는 마을사람들이 그녀의 마음을 위로하기 위해 묘와 묘비를 새롭게 정돈하였다.
당시 나무하는 소녀에게 가르쳐 주었던 산유화의 가사는 다음과 같다.
'하늘은 어이하여 높고도 길며/ 땅은 어이하여 넓고도 먼가./ 천지가 비록 크다하나/ 이 한몸 의탁할 곳 없구나./ 차라리 이못에 투신하여/ 고기 뱃속에 장사지내리'
# 하위지(河緯地)
본관은 진양(晋陽)이고, 자는 천장(天章) 또는 중장(中章), 호는 단계(丹溪)이다. 조선 태종 12년(1412) 선산읍 이문리에서 태어났다.
어릴때부터 형제가 문 밖을 나오지 않고 독서에만 열중하니 이웃 사람이 그 얼굴을 보지 못하였다고 한다. 세종 20년(1438) 문과에 장원 급제하여 벼슬길에 올라 집현전(集賢殿)에서 세종을 도와 많은 공적을 이룩하였다.
문종 때는 병으로 고향에 돌아와서 더욱 학문에 열중할 때, 김종서(金宗瑞), 황보인(皇甫仁) 등의 명신들이 수양대군에게 참살을 당했다는 소식을 듣고 벼슬에 나갈 뜻이 없었다. 수양대군이 어린 단종을 내쫓고 왕이 되어 선생을 예조참판으로 불렀으나, 뜻을 굽히지 않고 나가지 않으니 왕의 독촉이
심한지라, 부득이 단종 복위를 계획하고자 벼슬에 나가 녹봉(지금의 월급)을 별실에 저장하여 두고(세조의 주는 녹을 먹지 않는다는 뜻) 단종 복위를 계획하였으나, 김질의 고변으로 인하여 선생을 비롯한 박팽년, 성삼문, 이개, 유성원, 유응부와 더불어 한날 참형을 당하니, 태연자약한 임종의 태도는 보는 이로 하여금 숙연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의 연루로 선생의 형 강지, 동생 세지, 소지, 아들 연, 박도 참사를 당할 때 역시 조용한 태도로 충신 집안의 장함을 여러 사람에게 역력히 보였다.
그의 범상치 않은 생애는 탄생할 때부터 특이 하였으니 그의 집 앞 시냇물이 출생하는 날부터 사흘 동안 붉게 물들었으므로 이 개천과 그의 호를 "단계(丹溪)"라 부르게 되었다.
지금 선산읍 서쪽 단계천에 단계교가 놓여 있고 거기에 오리쯤 서쪽에 단계선생의 묘소(선산읍 죽장리 고방산)가 있으며, 비봉산 아래 선생의 유허비각이 있다.
의를 위하여 목숨을 버린 선생의 교훈은 민족 역사상 영원한 귀감이 될 것이다.
숙종 때에 나라에서 그의 충성심에 감동하여 벼슬을 다시 내렸고, 영조 34년(1758) 이조 판서를 증하고 충렬(忠烈)의 시호를 내림과 함께 장릉 충신단 숙모전에 배향하고 사림이 충절과 덕행을 추모하여 서산(西山) 및 월암(月岩)서원을 세웠다.
'청구영언'과 '화원악보'에 그의 시조 2수가 전해지고 있다.
'객산풍편(客散風扁)하고 풍철(風撤)코 월락(月落)할제
주옹(酒甕)을 다시 열고 싯귀(時句)를 흣부르니
아마도 소인(小人) 득의처(得意處)는 이뿐인가 하노라.
'전원(田園)'에 남은 흥(興)을 전나귀에 모두 싣고
계산(溪山) 닉은 길로 흥치며 돌아 와서
아이야 금서(琴書)를 다스려라 남은 해를 보내리라'
<참고문헌 : 이조실록, 퇴계 이황의 채언록, 삼인록>
# 최현(崔晛)
최현의 자는 계승(季昇), 호는 인재(齋)이며 전주 최씨이다. 좌찬성 심의 아들로, 해평면 해평리에서 명종 18년(1563)에 태어났다. 임진왜란으로 우리의 고장이 폐허가 되어 많은 역사적 유물이 전란으로 없어지므로 이를 걱정하여 심혈을 기울여 지리 및 역사, 인물, 정치, 경제, 문화 등 각 영역에 걸쳐 소상하게 나타낸 일선지(一善志)를 지었고, 나라를 위하여 헌신하면서 학문을 좋아하고 후학을 가르치는데 게을리하지 않았다.
어릴 때부터 재질이 뛰어나고 문장과 덕망이 높아 이름을 떨쳤다.
한강 정구, 학봉 김성일의 문하에서 공부하였고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선생은 나라를 구하는 방책을 글로 써서 선조께 올렸으며 스스로 의병에 가담하여 적과 싸우기도 하였다.
생원 시험에 합격한 후 문과에 급제하여 한림에 들어가 광해군(光海君)의 서울을 옮기자는 주장을 적극 반대하여 그 계획을 중지시켰으며, 한편 충청도 일원의 민심을 알기 위하여 명을 받고 돌아보고는 세금이 공평하지 못하고 백성의 부담이 많아 살기 어려운 것을 임금께 아뢰어 이를 시정하기도 하였다.
인조 2년에 이괄이 반란을 일으키어 사태가 심상치 않은지라 급히 입궐하라는 명을 받고 어전에 나아가니, 왕이 "경은 지략이 뛰어나서 군무에 종사한 적이 있으니 독전어사로 출전하라. 그리고, 이 칼을 줄테니 부원수 이하 명령에 따르지 않는 자는 처벌하라"고 하였다. 어명을 받고 북으로 가서 전세를 살펴보니 이괄이 평안도의 장정을 이끌고 당당한 기세로 계속 남진하고 있었으며 원수 장만은 전세가 불리하여 남으로 후퇴하고 있는지라, 이 이상 더 후퇴하면 조정과 민심이 걷잡을 수 없을 만큼 동요될 것이며 임진강을 저항없이 건너게 하면 사기에 치명적인 결과를 가져오게 될 것이라 하고 싸움을 지휘하여 이괄의 난을 평정하는데 많은 공을 세웠다.
후에, 이 전란의 과정을 상세히 기록한 전투 보고서와, 지방 관원과 군관들의 거취와 전투행위 등을 기록한 정장사근만행적을 발표하였다. 인조는 전후 논공행상을 이에 의존하였고, 선생은 진무일등공신으로 참여하게 되었다. 그 후, 대사간이 되었다.
64세 때 8월에 강원도 관찰사 순찰사 병마절도사로 부임하여 많은 민폐를 시정하고 선정을 베풀었으며 북방의 호족이 평산까지 쳐들어 왔을 때, 선생은 직접 관군을 이끌고 북한강까지 가서 이를 지키게하고 정예 군사를 뽑아 동해안으로 보내 해변을 지키게 한 후 창의격문을 작성하여 각처에 발송함으로서 영서지방 각처에서 큰 반응을 일으켜 의병이 조직되었다.
횡성현에 거주하는 이거인의 모반에 관련되었다는 모함을 받아 죄인이 되어 서울로 호송되어 금부로 투옥되었다가 회녕(會寧)으로 유배된 후 왕명으로 풀려났다.
인조 15년(1637) 12월에 청병이 대거 침입해 오니 왕이 남한산성으로 어가를 옮기어 적과 대치할 때 의병을 일으켜 의병대장이 되어 조령산성까지 진격하였으나 강화의 소식을 듣고 치욕을 개탄하는 상주문을 올리고 고향에 돌아와 학구에 전념하여 동국통감, 일선지 등의 책을 썼다. 국한문으로 되어 있는 선생의 작품 용사음과 명월음은 학계에 비상한 관심을 모으고 있다. "용사음"은 임진왜란을 소재로한 3·4조의 가사로 당시의 전황과 사회상을 묘사했으며 "명월음"은 당시 흉흉한 인심을 풍자한 가사이다.
인조(仁祖) 18년(1640) 78세를 일기로 마침내 세상을 하직하니 조정에서는 순국보조공신 예조판서 완성군이란 가자와 정간이란 시호를 내렸다. 숭산서원에 배향되어 있으며, 문집이 있다.
<참고문헌 : 조선명인전, 번암 채제공이 지은 신도비명, 선산군지, 인재집>
# 정붕(鄭鵬)
본관은 해주, 현감 철견(鐵堅)의 아들로 자는 운정(雲程), 호는 신당(新堂)이다.
세조 12년(1466)에 태어나서 한훤당 김굉필 문하에서 수학하였다. 성종 16년(1485)에 진사에 오르고 성종 24년(1493) 문과에 급제하여 여러 벼슬을 지내고 홍문관 교리로 있을 때인 연산군 4년(1498) 무오사화(戊午士禍)가 일어나자 이에 항언하였다. 갑자사화 때 영덕으로 유배 당하기도 했다.
중종반정(中宗反正) 후에 다시 교리(校理)로 복직되었으나 병을 핑계하여 고향으로 내려와 많은 제자들을 가르치는데 전념하였다. 성리학을 깊이 연구하여 그의 도학은 세상에 널리 이름을 떨쳤다. 청송 부사로 있을 때 넓은 기량과 청렴한 성품은 청백리로서 저명하며, 선정을 베풀어 크게 존경을 받기도 하였다.
어느날 오랜 친구인 좌의정 성희안으로부터 편지가 왔는데 "청송 고을에는 웅당 잣과 꿀이 많을 터이니 조금만 나누어 보내달라"는 내용이었다. 편지를 보고 난 선생은 태연한 자세로 즉석에서 답장을 보내기를 "잣은 높은 산 위에 있고 꿀은 백성 집 벌통 속에 있으니 내가 어찌 이것을 구할 수 있으리요?"라 하였다. 답장을 받아본 성희안은 자기의 잘못을 깊이 뉘우치고 부끄럽고 후회하는 마음을 금치 못하면서 사과하였다고 한다. 이 사실은 고금의 탐관오리에서 일침을 주는 동시에 관가에 벼슬하는 이로 하여금 길이 사표가 되고 귀감이 될 것이다.
하루는 '내가 문묘(성균관 대성전)의 위패를 절로 옮기는 꿈을 꾸었다'하면서 해괴한 일이라고 탄식을 하였다. 다음 날 연산이 성균관을 왕의 놀이터로 만들고 위패를 사찰로 옮겨 버렸다. 사람들은 모두 선생의 이 선견지명(先見之明)에 탄복하였다.
퇴계 이황 선생께서도 " 학문의 정수를 알려면 마땅히 신당의 안상도(安上圖)를 보라 하였고, 또 선산은 길선생의 절의가 있고 정신당의 도의가 있다"고 하였다. 문집이 남아 있으며, 금오서원에 배향하고 후학이 높은 유덕을 기리고 있다.
<참고문헌 : 이조실록, 선산군지, 국조인물록, 전고대방, 조선명인전, 신당집>
장택상(張澤相)
인동인(仁同人), 호는 창랑(滄浪), 삼중대광(三重大匡)신호위(神虎衛)상장군(上將軍) 금용(金用)의 후손이며 관찰사 승원의 자로 1893년 오태동에서 태어났다.
항일과 반공을 위해 신명을 바친 건국의 공로자이다.
건국 후 2, 3, 4, 5대 국회의원에 당선되었고 초대 외무부장관을 거쳐 국회부의장, 국무총리를 역임하였으며 영남이 배출한 역사적인 인물이다.
국무총리 재임시는 비위공무원의 횡포와 부정을 근절한 업적은 길이 남을 것이다. 1960년 3월 23일 당시 이대통령에게 하야(下野) 촉구성명(促求聲明)을 하였다.
"본인에게는 금도 없고 은도 없으니 각하의 정진 선물로 아래의 성명을 드리나이다.
각하는 오는 3월 26일 85회 생신을 기해 하야 하시고 옛날의 국부로 돌아가시기 요망합니다.
마산에서 일어난 한국 소년 남녀의 피흘린 사고(事故)는 영광있는 각하의 역사에 큰 오점이니 주변에 의집하고 있는 간신배의 감언에만 속지 마시고 정계로부터 은퇴함이 구일(舊日)의 명예가 유지됩니다"라고 하였다.
그 후 1969년 8월 1일 향년(享年) 77세로 별세하니 8월 7일 국민장으로 국립묘지에 안장하였다.
묘비가 있으니 이은상(李殷相)이 비문(碑文)을 짓고 손재형(孫在馨)이 글씨를 썼다.
# 장지연(張志淵)
인동인(仁同人)으로 초휘(初諱)는 지윤(志尹)이며 호(號)는 위암(韋庵)(또는 숭양산인(崇陽山人)이다.
소매당(訴梅堂) 영의 후손이며 운소(雲沼) 용상(龍相)의 자(子)로 고종(高宗) 31년(1894) 식년 진사시(式年進士試)에 입격(入格)하였고, 후에 내부주사(內部主事)를 역임하였으며 뒤에 통정대부(通政大夫)에 승서하였으나 불취(不就)하고, 광무(光武) 4년(1900) 황성신문사(皇城新聞社)의 주필(主筆)을 거쳐 광무 5년(1901) 동사(同社)의 대표가 된 후 을사보호조약(乙巳保護條約)이 체결되자 1905년 11월 20일 황성신문에 '시일야 방성대곡(是日也放聲大哭)'이라는 사설을 써 일제의 흉계를 통박하고 그 사실을 전국민에게 알려 의분심(義憤心)을 갖게 한 우국지사(憂志士)이다.
그 후 1906년 대한자강회(大韓自强會)를 발기(發起)하고, 동년(同年)에 휘문의숙장(徽文義塾長)을 역임, 1908년 해참위(海參威)로 망명(亡命), 그 곳에서 발행되는 해조신문(海朝新聞)의 주필로 활약하다가 익년에 귀국하여 진주(晋州)에서 경남일보(慶南日報)를 발간하여 주필을 역임하였다.
1910년 한일합방 후 경남일보가 폐간되자 시부(詩賦)와 음주(飮酒)로 세월을 보내다가 1921년 10월 2일 58세를 일기로 마산에서 타계(他界)하였다.
1962년 대한민국 건국공로훈장 단장(單章)이 추서되었다.
선생은 상주(尙州) 동곽리(東郭里)에서 태어나 14세때 오태동으로 이거(移居)하고 20세때 상모동으로 이거하여 20년간을 거주하다가 1906년 서울 제동(齊洞)으로 이거하였다. 또한 선생의 부친 묘소가 상모동 효자봉(孝子峰)에 있다.
# 이우(李瑀)
사임당의 넷째 아들이요, 율곡의 아우인 우(瑀)의 자는 계헌(季獻), 호는 옥산(玉山)이다.
26세에 생원시험에 합격하여 비안현감, 괴산, 고부 두 고을의 군수를 역임하고 벼슬은 군자감정으로 그쳤으며 학문과 예술로 이름이 높았고 덕망으로 모든 사람의 칭송을 받았다.
비안에 갔을때 관리와 백성들이 그를 경모하고 추대함으로 7년이나 더 머물러 있었다. 20세에 아버지 원수(元秀) 공이 세상을 떠난 뒤 무덤 앞에 여막을 짓고 살며 효성을 다 하였다. 서모가 있어 무척 악한 편이었지만, 형 율곡과 함께 모든 일에 화목을 유지할 수 있도록 정성을 다하며 또 형 율곡이 별세한 후에도 형의 유족을 진심으로 보살핀 기사를 보면 어질고 온유함을 짐작할 수 있다.
송우암(宋尤菴)이 지은 묘갈문에 율곡이 해주(海州)석담(石潭)에 집을 짓고 틈만 있으면 반드시 술상을 차려 아우 우를 시켜 거문고를 타게 하고 또 시도 지으며 즐기면서 이르되
'나를 진정 아는 사람은 내 아우 우 뿐이다.'고 했다.
괴산(傀山) 군수로 있을 때 임진왜란을 만나 장정을 모집하여 왜적과 항전하여 큰 전과를 세웠으나 공로는 향리와 병졸에게 돌리고 적의 동정을 살펴 백성이 농사를 짓게 하여 온 고을이 기근을 면하게 하니 조정에서는 선무원종훈의 표창을 내렸다.
그러나 그 같은 모든 것은 옥산의 생애 중 한 토막 일화에 지나지 아니하고 실상 그의 재능은 '거문고, 글씨, 시, 그림의 네가지를 모두 잘하므로 세상 사람들이 사절이라 했다. 옥산은 참으로 천재적 예술가였으며 거문고에 있어서는 그 소리가 맑고 웅장하여 듣는 이들의 마음을 평화롭게 하였으며 외재 이단하의 「옥산전」에 거문고 금보는 옛 곡조라도 타는 것은 모두 공이 선정한 것이라 한 것으로써도 거문고의 대가이었음을 알 수 있다.
글씨는 공의 장인이요 스승일 뿐만 아니라 우리 역사상 초성이라 하여 초서에 제 일인자의 칭호를 듣던 고산 황기로 선생이 일찍 공의 초서 쓰는 법을 칭찬하여 말하기를 '곱게 쓰기는 나만 못하되 웅건하기는 나보다 낫다'(이서가 지은 서화첩 발문)한 것을 보아 그의 글씨가 과연 얼마만한 위치에 있었는지를 짐작할 수 있을 것이다.
우암 송시열도 「옥산시고서」에 '옥산의 글씨는 정묘하고 웅장하여 용과 뱀이 날아 올라 가는것 같아 그 글씨를 얻은 자는 값진 보석보다 더 귀중히 여기는 것이다'라고 말하여 이미 옛부터 그의 글씨가 높이 평가되어 온 것을 알 수 있다.
뿐만 아니라 글씨 쓰는 재주가 얼마나 정교했던지 깨알 하나에다가 거북귀자를 능히 썼고 또 팥을 두쪽 쪼개어 그 한쪽 바닥에 오언절구 20자를 능히 쓰되 점과 획이 반듯하고 글씨의 체법을 조금도 잃지 않았다고 한다.
시에 대해서는 자신도 그다지 정진하지 않았고 또 세상에서도 그리 높이 인정하지 않았다. 그나마 거의 문적을 잃어 버려 시를 평할 자료를 갖지 못하니 유감이나 송우암 「옥산시고」 서문에 '부스러기 금이요 조각 보옥이라 작을수록 더욱 더 기이하다'하였다. 그러나 그의 시는 그림이나 글씨에 비하여 높은 경지에까지 이른 것으로 평할 수는 없는 것이 사실이다.
평소에 거문고, 글씨, 그림에 많은 힘을 기울였기 때문에 시나 학문 방면에는 손색이 있을 수밖에 없었다. 율곡도 평소에 말하되 '내 아우로 하여금 학문에 종사하게 했던들 내가 따르지 못했을 것이다'고 했다. 이 말은 그의 재질을 칭찬한 것으로 시나 학문에는 전공하지 않았던 것을 증명한 것이 되기도 한다.
그림은 어머니 사임당의 영향을 받아 그만큼 정묘한 경지에 도달했다는 것을 의미하는 단적인 표현이라고 할 수 있겠다.
7남매 중에도 누님 매창(梅窓)과 더불어 어머님 사임당의 예술적인 전통을 이어받은 분이다. 그와 동시 고산 황기로의 무남독녀에게 장가들어 그 장인의 지도를 받았으므로 황고산의 전통을 이어받았다 하여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처의 고향인 선산에서 살았고 장인의 모든 유업을 상속받아 낙동강변 고산 밑 매학정의 주인이 되었고 죽어서도 선산읍 북산리 웅봉 아래 묻혔고 부인 황씨와 합장하였다. 그리고 옥산 후손이 대대로 계승하여 황고산의 제사까지 지내게 되었다. 사림에서는 그의 높은 덕을 추모하여 무등서원에 향사하고 있으며, 그의 필적은 목각판 5장(전후면 목각판 10폭 병풍용)이 금오서원에 보관되어 있다.
여기에 그의 時와 글씨를 소개하여 둔다.
감천에서 비를 만나 고산에 이르러 짓다.
낙동강 나룻가에 날리는 빗발
어깨 위에 비뿌려 옷 적시더니
늦은 녘에 눈이 되어 바람에 불려
고산에 많은 나무 모두 매화 뿐일세
<참고문헌 : 우암 송시열이 지은 옥산 묘갈문>
이맹전(李孟專)
벽진인(碧珍人), 자(字)는 백순(伯純), 호(號)는 경은(耕隱)이다.
벽진장군(碧珍將軍) 총언을 시조로 하고, 지밀직사(知密直事) 견간의 후손이며 도원수 희경(都元帥 希慶)의 손으로 증병조판서 심지(審之)의 자로 형곡 댓샘(죽천 또는 죽정)에서 태어났으며, 선대(先代)는 성주 초전 호장곡이 세거지(世居地)다.
세종9년(1427) 문과에 급제하여 한림(翰林)이 되었다가 사간원 좌정언, 지제교, 소격서 령을 거쳐 거창현감으로 나가 선정을 베푸니 주민의 칭송이 자자하였다.
장차 단종에게 화가 미칠 것을 예견한 공은 벼슬을 초개마냥 버리고 그의 장인인 직제학 김성미(一善人)가 사는 선산 망장촌에서 기거하며 청맹과니에다 귀까지 멀어 보지도 듣지도 못한다하여 문을 닫고 30년을 하루같이 폐인으로 자처하며 손님도 사절하면서도 의관을 정제하고 영월쪽으로 배좌(拜坐)하였고 북쪽인 한양쪽으로는 향(向)하지도 앉지도 않았다.
매월 삭망(朔望)에는 영월(寧越)을 바라보며 향배(向拜)하였으니 집안 사람들이 물으면 신병을 위해 기도한다고 하였다.
이렇게 한가족도 핑계인줄 몰랐으니 당국에서야 어찌 알랴! 참으로 조용히 몸을 간직하며 의를 다한 분이다.
옛글에 비분강개하여 죽기는 쉽지만 조용히 의리(義理)를 다하여 살기는 어렵다(糠慨殺身易 從客就義難)했으니 30의 성상을 한결같이 이렇게 지내기는 초인이 아니고서는 어려운 것이다.
강호(江湖) 김숙자(金叔滋)의 아들 점필재 김종직이 가끔 찾아 배알하면 문을 닫고 마음속 깊은 이야기를 하였다.
훗날 점필재가 이존록(彛尊錄)에 참뜻을 기록하여 세상에서 알게 되었다. 부인 김씨와 해로하여 90세에 세상을 뜨니 집안에 한끼의 양식도 없었다.
공(公)이 저술한 잡서(雜書)가 있었으나 병화(兵火)로 소진(燒盡)하고 없다.
조려, 원호, 김시습, 성담수, 남효온과 함께 생육신(生六臣)의 한 분이며 묘는 해평 재궁동에 있다. 퇴계, 서애를 비롯해 많은 선현들이 사적을 저술하였고 유림(儒林)에서는 선산 월암서원, 함안 서산서원, 영천 용계서원에서 향사하며 정조(正朝, 1781)에 이르러 자헌대부 이조판서, 양관 대제학에 증직되었고 정간으로 시호(諡號)가 내려졌다.
대산 이상정의 찬갈(撰碣)이 있고, 형곡동 시립도서관 공원 내에 경은선생유허비각(耕隱先生遺墟碑閣)이 옛이야기를 전해주고 있다.
# 유승단(兪升旦)
고려(高麗) 고종(高宗)때 문신이며 대학자(大學者)이다. 초명(初名)은 원순(元淳)이며 본관(本貫)은 인동(仁同)이다.
고려 명종때 문과에 급제하여 시학을 지냈고 희종(熙宗)때 남경(南京, 지금의 서울)의 사록참군사(司錄參軍事)가 되었으나 강종이 강화로 쫓겨나자 벼슬길이 막혔다가 고종이 즉위하자 수궁서승이 되고, 이어 사전(師傳)으로 있다가 고종 10년(1223) 예부시랑(禮部侍郞), 우간의대부(右諫議大夫)를 거쳐 고종14년(1227)에 수찬관으로서 명종실록 편찬에 참여하고 이듬해 추밀원부사. 우산기상시가 되었다.
고종 19년(1232) 참지정사로 있을 때 당시의 권신(權臣) 최우(崔瑀)가 서울을 개성에서 강화도로 옮기려는 것을 반대했으나 뜻을 이루지 못하였다.
즉 고종 18년(1231) 당시 몽고병이 우리 나라의 북변을 침범하더니 개성 부근까지 진출했다가 돌아갔는데 또 다시 대군의 침입이 있으리라는 소식이 전해지자, 1232년 최우는 강화 천도를 반대하는 공의 의견을 듣지 않고 강화도로 천도를 정하고는 수레 100여대로 자기의 가재를 강화로 옮기더니 드디어 왕으로 하여금 천도를 단행케 하였다.
경사에 조예가 깊었고 한림별곡(翰林別曲)이 원순의 글이라 일컬을 정도로 문장에 뛰어났다.
동국여지승람(東國與地勝覽)에 이르기를 원순은 사람됨이 침착하고 말이 적어 겸손하며 많이 배우고 아는 것이 많으며 더욱이 고문에 능해서 세상에서 일컫기를 원순의 글이라고 했다.
고종이 어렸을 때 그에게 배웠는데 왕이 된 후로는 몹시 사랑해서 드디어 사전(師傳)를 삼았고, 원순의 이름이 고려 태조의 어휘를 범했다하여 자를 대신 썼다고 하였다.
또한 이규보(李奎報)가 지은 제문(祭文)에
'아! 슬프다. 문장과 덕행이 고금에 제일이니 마치 하늘 높은 것을 장하다고 찬하는 것
같아서 여기에 감히 아뢰어 말하지 못하겠노라.
임금께서 옛날에 잠저에 계실 때 공은 실상 스승이 되었는데 풍운이 서로 만나 지난 날의 둔난(屯難)하고 기험(奇險)한 것을 씻어 버리고 말고삐를 놓고 빨리 달려가 정승자리에 올랐도다. 귀감이 공에게 있어 임금께서 의지하려 하셨는데, 나라의 기둥이 갑자기 넘어지니 누가 슬프지 아니 하리오. 부귀가 급히 오는 것을 내가 본래 두려워 하였거늘, 이 때문에 그런 것일까, 어찌 홀연히 돌아가시나이까? 집에 부인이 없으니 누가 내차에서 울 것이며, 백도(伯道)같은 아들이 없으니 누가 제사를 받드리오. 아! 슬프다. 생각하건데 옛날 승선과(僧選科)를 보일 때에 공이 이것을 주관하여 나를 장원으로 발탁하였으니 이로써 영화가 이미 넘쳤으며 나를 아들같이 길렀으니 은혜가 또 한량 없도다' 하였다.
공의 시가 몇 수 전하고 있어 그 중 한 수를 적어보면 다음과 같다.
동편 언덕에 세상 티끌 하나없고, 서편 산기슭엔 돌길이 좁구나.
연못에서 고기들이 즐겁게 춤추고, 뜰앞에 길들인 새는 아니 날아가네.
버들은 봄날 푸른 장막을 치고, 꽃은 한낮에 붉은 옷을 자랑하는 듯 내가 시를 쓰는 곳에, 수풀과 샘물이 나를 붙잡고 놓아주지 않는구나.
공(公)의 시호(諡號)는 문안(文安)이고, 인동 황상동 어운산(御雲山)에 묘소가 있다고 전한다.
# 심회(沈澮)
조선 태종때 영의정 심온(沈溫 1375~1418)은 왕명을 받고 명나라에 사은사로 파견되었다. 당시 좌의정(左議政) 박서(朴壻)가 임금님께 고하기를 "명나라에 간 심온은 태종을 비난하는 사건에 관련되어 장차 왕위를 노리고 있다"고 모함하니 이 사실을 안 심온의 딸 소헌왕후(세종대왕의 비)가 압록강까지 몰래 사람을 보내어 아버지 심온에게 귀국하지 말라고 만류하였다.
그러나 심온은 "나는 일편단심 나라와 임금님을 위하여 충성을 다하였을뿐 조금도 사사로운 마음을 가져 본 적이 없다. 정의를 위해서는 죽음도 두려워하지 않는다"하고 돌아오다가 마침내 압록강에서 체포되고 장단으로 귀양을 가서 사약을 받고 죽으니 나이 44세였다.
이에 연루된 심온의 아들 심회(1418~1493)도 나이 불과 세 살밖에 안 되는 아기였으나 위험하게 되자 유모가 데리고 피신하였다. 마침내 선산 땅 망장리(고아면 대망리)에 다다라, 해도 저물고 몸도 피곤하여 삼밭에서 아기를 업고 하루 밤을 지내게 되었다..
그 때 이 마을에 살고 있던 주부(主簿) 강거민(康居敏)이라는 사람이 부인 전씨와 함께 똑같이 꿈을 꾸니 앞들 삼밭에서 용이 하늘로 올라 가는지라 이상히 여겨 초롱불을 들고 그곳에 가 보니 한 아녀자가 아이를 안고 있는지라 아들이 없는 강씨 내외의 기쁨은 이루 말할 수 없었다. 집으로 데리고 온 그들은 친자식과 같이 공부도 가르치며 애지중지 키웠다. 어느덧 10년의 세월이 흘러 심회의 나이 15세(세종15년 1433)가 되던 해에 아버지 심온의 청렴결백함이 천하에 밝혀지게 되었다.
조정에서는 전국 각지에 수소문하여 심회를 찾게 되자 한양으로 되돌아간 그는 과거에 급제하고 세조 13년(1467) 영의정(領議政)이 되었다.
성종 3년(1472)때 강거민 내외의 부고를 차례로 받자, 심회는 "나를 낳아주신 분도 부모요. 나를 길러주신 분도 부모와 다름이 없다"하며 슬픔을 금치 못하고 모든 관직을 버리고 선산으로 내려와 강씨 내외분의 묘소(예강리)에서 6년간 시묘살이를 하였으니 그 곳이 바로 거류암(居留岩)이다.
<참고문헌 : 일선지, 청송심씨 문헌록, 신천강씨 문헌록>
# 박희광(朴喜光)
1910년 한일합방이라는 치욕을 당하여 우국지사(憂國志士)들은 국외로 망명하여 중국, 만주, 노국 등지에 10여개의 군사단체가 조직되어 신출귀몰(神出鬼沒)한 전술로 관동군의 진로를 봉쇄하고 저지했으니 이 때 18세의 나이로 특공대에 투신하여 혁혁한 공적을 남긴 선생의 본관은 밀양(密陽)이며 당시의 별명은 상만(相萬)이니 경주부윤 수홍공(慶州府尹 守弘公)의 10세손 윤하공의 다섯째 아들로 태어나시니 1901년 2월15일이었다.
8세때 남부여재(男負女載)하여 이민길에 나선 부친을 따라 만주로 들어가 16세에 봉천성 남성자학교를 졸업하고 우국충정(憂國哀情)을 이기지 못해 오동진(吳東鎭) 선생의 휘하 통의부(統義府)에 자진 입대하여 6개월간 군사훈련을 받고 임시정부의 지령으로 만철연선(滿鐵沿線)과 한만국경지대(韓滿國境地帶)에 잠복하게 되었다.
당시 일본은 한국인의 집단촌과 독립단체를 와해(瓦解)시키려고 친일 주구를 앞세워 재만조선인회(在滿朝鮮人會)를 조직하여 그 산하에 보민단(保民團) 일민단(日民團)같은 매국단체를 만들어 독립투사를 밀고하고 이간질을 일삼았다. 이때 김광추(金光秋)를 대장으로 하고 김병현(金炳賢)과 박희광(朴喜光) 두 대원으로 조직된 3인조 특공대는 친일단체 악질 대표들을 암살하려고 배치되었으니 그들의 리스트에는 정갑주(鄭甲周)와 최창규(崔昌圭)의 이름이 들어있었다. 정갑주는 여순조선인회 서기로 있으면서 여순(旅順)고등계(高等係)첩자(諜者)로 악명 높은 반역자였다.
1924년 6월 1일 밤에 정갑주의 대문에 사형선고문을 붙이고 들어가 가족과 같이 환담하고 있던 정갑주를 함께 몰살시켰다. 최창규는 이용구와 같이 한일합방에 앞장섰던 자로서 재만조선인회 회장이란 미명 아래 보민단을 조직하여 일본의 밀정으로 온갖 만행을 저질은 악질이었다. 6월 7일 정오에는 최창규의 집을 찾아 잠입했으니 그때 최의 장모와 처 그리고 비서는 현장에서 사살되었으나 최는 2층 책상 밑에 숨어 간신히 목숨을 유지했다는 후문도 있다.
그 뒤 원흉 이등박문의 수양녀로 매국의 요화였던 배정자(裵貞子)를 대련(大連)에서 암살할려다 실패하고 일진회 회장 이용구를 암살하려다 실패 또 1924년 7월 22일에는 일본영사관에 폭탄을 투척했으나 불발로 실패하고 그날 저녁 일본 고급요정 금정관에 침입하여 군자금으로 당시 거액이었던 삼백원을 달취해 나오다가 잠복해 있던 일본경찰과 대치하여 총격전이 벌어져 김광추 대장은 현장에서 장렬히 순국하고 김병련과 박희광 두 선생은 체포되어 관동청 지방법원에서 일심에 사형, 이심에 무기징역 언도를 받아 여순형무소에서 복역중 일본천황(裕仁) 즉위 때와 황태자 출생 때 감형되어 1943년에 43세로 출옥하니 20년의 옥고로 청춘은 간 데 없고 남은 것은 주위(日本)의 매서운 눈초리 뿐이었다.
선생은 뜻을 굽히지 않고 대운에서 동지 이성갑과 유하도와 같이 상해임시정부로 가려했으나 이미 중국대륙은 거의 일본의 마수에 들어간지라 경계가 삼엄하고 길이 막혀 고향인 구미 연곡동에 돌아와 44세의 만혼으로 부인 문화유씨(文化柳氏)를 맞아 가정을 꾸렸으나 생활은 궁핍하기 그지 없었다.
1945년 해방을 맞아 임정요인(臨政要人)들이 속속 귀국하여 죽첨장(竹添莊)으로 백범 김구(白凡 金九)선생을 찾아 뵙고 그간의 경과를 보고했으니 위로금으로 2천원을 주시면서 정부수립시까지 기다리라 하였으나 1949년 백범선생도 비명에 서거하시니 아무도 찾아주는 이 없었고 너도 나도 애국자였다고 나서던 때였으나 선생만은 묵묵히 옥중에서 익힌 재봉기술로 원평동 어느 집 처마 밑에서 양복수선을 생업으로 살았으나 찌드는 생활고와 엄습해 오는 심신의 괴로움을 달랠 길 없어 처가가 있는 왜관으로 이주하여 살면서 한때 천주교에 귀의하여 왜관성당에서 "시메온"이란 이름으로 영세까지 받았으나 불운은 계속되어 슬하에 5남매를 두고 상배(喪配)의 쓰라림을 맛보아야 했다.
그러던 중 만시지탄(晩時之歎)은 있으나 당시의 관동성 지방법원 재판기록이 게재된 1924년 9월 1일자 동아일보 기사가 대구지국에서 발견되어 선생의 행적이 입증되어 주위의 권고로 정부에 서훈신청을 했더니 1968년 3월 1일 건국훈장 국민장을 받게 되어 선생의 노후에 다소나마 위로가 되었다. 1970년 1월 20일 71세를 일기로 서울 원호병원에서 타계(他界)하시니 동성동 국립묘지 애국자묘원에 안장되었다.
1972년 당시 선산군내의 뜻 있는 유지들의 발기로 선생의 기념사업을 추진함에 박정희대통령께서 동상건립비(銅像建立費)로 백만원을 하사하셨으며 또한 "애국지사박희광선생지상"이라는 친필휘호까지 내려 주셨으나 사정이 여의치 못하여 진척이 되지 못한 지라 뜻있는 분들의 애태움으로 10여 성상이 흐르다가 선생을 추모하는 각계 여러분들의 간곡한 부탁이 있어 1983년 9월 5일 구미문화원에서 추진위원회를 구성, 문화원사업으로 착수하여 1984년 8월15월 기공식을 가지고 12월 28일 성대한 제막식을 가지게 되었다. 동상은 금오산 도립공원에 건립되어 있다.
오늘에 사는 우리와 우리의 후세에게 충국애족의 정신을 귀감으로 삼고 나라 위해 몸바친 순국선렬과 함께 선생의 위업이 전승(傳承)되기를 축원(祝願)하는 바이다.
# 박운(朴雲)
본관은 밀양, 자는 택지(澤之), 호는 용암(龍巖), 이름은 운(雲)이다. 성종 24년(1493) 해평 고리실(괴곡)에서 태어나서 송당 박영(松堂 朴英)에게 학문과 덕행을 닦아 중종 14년에 진사에 올랐으나 당시 사화가 잦을 때이므로 벼슬길에 나가지 말라는 아버지의 엄명에 따라 오직 학문에만 전념하여 자양심학론, 격몽편, 경행록, 삼후전, 위생방 등 많은 저서를 남겼다.
또한 효행이 특출하여 40년간 어머님을 모심에 있어 능양(能養)과 승지(承志)를 다해 극진히 봉양하였으며 항상 곁에 모시어 손수 시중을 들고 즐겁게 해 드리기 위해 온갖 정성을 다바쳤다. 천수를 다해 어머님마저 돌아가시니 그 애절해 함이 하늘에 사무쳤으며 3년 동안 묘 옆에 떼집을 짓고 나물죽만으로 시묘(侍墓)의 정성을 다하였다. 또한 임종 직전까지도 부모님에 대한 은혜를 잊지 못해 조석으로 사당에 참배를 드리며 "부모님의 마음을 위하고 은혜를 항상 잊지 않은 것이 자식의 도리이며 곧 효도"라고 한 공자의 말씀을 몸소 실천한 것이다.
학문을 닦고 후생을 교도하던 곳을 명경당(明鏡堂)이라 하며 또한 낙동강변 "용소" 옆에 용수암을 짓고 스스로 호를 용암이라 하여 항상 성현의 가르침을 앞세워 덕으로 이웃을 교화하니 덕망이 날로 높아 갔다. 만년에는 이회재, 이퇴계, 김진락당(金眞樂堂)과 학문을 서로 강론하였으며 명조 17년(1562) 70세를 일기로 세상을 떠나니 나라에서는 효자 정려를 내려 그의 효행을 길이 표창하였다.
해평면 괴곡리 입구에 세워져 있는 비석 전면의 글씨 "효자 성균진사 박운지여"란 글씨는 이조 선조때 명필 한석봉(韓石峰)의 친필이라고 한다. 인조 24년(1646) 해평 낙봉서원(落峰書院)에 배향하였고 문집(文集)이 있다.
<참고문헌 : 교남지, 선산군지, 퇴계 이황이 지은 묘갈명>
박영(朴英)
본관은 밀양. 이조 참판 수종(壽宗)의 아들로, 자는 자실(子實), 호는 송당(松堂)이다. 양녕(讓寧)대군의 외손으로 성종2년(1471) 서울에서 출생하였다.
낙향하여 선산읍 신기리(송당)에서 여생을 보냈다.
22세에 무과에 급제하여 선전관을 거쳐 의주 목사 경상좌도 병사
병조참판 겸 중추 부사에 이르렀으나 항시 말하기를 "말을 달리고
칼을 쓰는 것은 한 남자의 용맹에 불과하니 사람이 학문을 배우지 않으면
어찌 군자라 하리오?"하더니 연산이 손수 그 아버지(성종)가 기르시던
사슴을 활로 쏘는 것을 보고 "장차 이 나라가 어지럽겠구나"
하고 탄식하며 벼슬을 버리고 선조의 고향인 선산으로 돌아와 정붕 선생께
대학(大學) 강의를 받고 비봉산 아래 미봉사라는 절에서 오랜 세월 문을
굳게 닫고 공부에만 열중하였다.
대학을 읽은 횟수가 점차 늘어 대학의 참뜻인 "격물치지"(사물의 이치를 연구하여
그 참뜻을 깨닫는다는 뜻)를 알 무렵 신당 선생이 찾아 왔다.
신당 : "그동안 만 번을 읽었지?"
송당 : "모레면 끝날 듯 합니다"
신당 : "지난 가을, 내가 저 냉산(冷山)을 가르키며 저 산 바깥에 무엇이 있겠느냐고 물었을 때
자네는 아무런 대답도 못하지 않았는가?"
"이제 그 만큼 공부를 하였으니 짐작이 있을 것이니 다시 한번 대답해 보게.
저산 밖에는 무엇이 있겠나?"
송당 : "산 밖엔 다시 산이 있을 것입니다"
신당 선생이 크게 칭찬하고 손을 잡으며,"자네 글 읽은 공을알겠다고 하였다."고 하였다.
이것이 유명한 '냉산문답'이다.
또, "이제 어떤 공부를 원하는가"라는
질문에 선생은 "의학을 공부해야 하겠다"고 했다. 시골에는
훌륭한 의원이 없으므로 귀중한 생명을 잃게 되는 사람이 많으며, 의원이
있다 해도 이름있는 양반 집에만 드나들게 되고 가난한 백성은 부모에게
약 한 첩을 못쓰고 생죽음을 당하게 되어, 불우한 사람들을 돕기로 했다는
뜻을 말씀드리자, 신당선생은 선생의 높은 뜻에 탄복하였다고 한다.
그 후, 성리학과 의서를 공부하여 불쌍한 생명을 구한자 그 수를 헤아릴 수가 없었다 하며,
후세 사람들이 선생의 높은 덕을 기리어 "대학동자"라 부르고 있다.
70세로 일생을 마치니 나라에서 이조판서를 추증하고,문목이라는 시호를 내렸다.
금오서원에 향사하고 있으며, 선생이 공부하던 곳에 송당(松堂-선산읍 신기리 낙동강변)이란
정자와 미수 허목(眉수 許穆)이 지은 신도비가 있다.
# 문영(文英)
본관은 남평이고, 이름은 영(英), 자는 자화(子華), 호는 해은(海隱)으로 고려 공민왕 17년(1368)에 단성(丹城)에서 태어나서 형과 함께 목은 이색 선생의 문하에서 공부하여 태조 2년(1393) 문과에 급제하여 홍문관 교리로 벼슬길에 올랐다.
조선 태종때 일선부사(一善府使)로 부임하니 처가(妻家) 또한 같은 고을인지라 해평 월호동(반포)에 자리를 잡고 화려한 벼슬보다 민생을 위한 산업발전에 힘을 기울이는데 보람을 가지고 할아버지 "문익점" 선생의 거룩한 뜻을 높이 받들어 베짜는 기계를 만들기에 전념하였다. 오랜 연구 끝에 "조기산"(베틀산-금산동 뒷산)의 모양과 "공상다리"(오상동 국도에 놓인 다리)의 모양을 따서 만든 베틀로 "문영베"를 짜는데 성공하였으니, 지금도 그 산을 "베틀산"이라 하고 그 곳에 있는 굴을 "포기굴"이라 하며 그 곳 다리 이름을 "공상다리"라 부르고 있다.
그 후, 세종의 부름을 받아 홍문관 직제학(弘文館 直提學)에 이르고 62세에 세상을 떠나니, 나라에서는 "자헌대부 이조판서"로 추증하고 양민(襄敏)이라는 시호를 내리고 유림에서는 봉강 서원에 모시어 빛나는 유덕을 기리고 있다.
<참고문헌 : 국사대사전>
# 노경임(盧景任)
본관은 안강. 자는 홍중(弘仲). 호는 경암(敬庵)으로 선조 2년(1569) 선산 독동리에서 송암(松菴) 노수함(盧守咸)의 여섯째 아들로 태어났다.
어려서부터 남달리 재질이 영특하여 아버지 송암선생이 병환으로 돌아가시며 "이 아기가 장차 커서 큰 인물이 될 것이니 지금 죽은들 무슨 여한이 있으리요" 하고 임종했다한다. 아버지를 여윈 때 겨우 5세였다.
여헌 장현광, 서애 유성룡 선생의 문하에서 학문과 덕행을 닦아 22세(1591) 때 문과에 급제하였으나, 이듬해 1592년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의병을 모아 충청도와 상주에서 적병을 막아 많은 공을 세웠다.
상감의 어명을 받고 강원도 순무어사(巡撫御使)가 되어 떠날때 오직 나라와 겨레를 위하는 일편단심으로 당면한 문제 열까지를 들어 올리면서 "민심은 날로 이탈되어 가고 국가 근본이 이미 흔들리고 있으니 쇠하는 것을 일으키고 어지러운 것을 바로 잡는 길은 오직 바른 정사에 있으니 전하의 한마음 결정하는데 있다."고 했다.
당시에 수백 명의 백성이 왜적의 포로가 되어 끌려 가다가 배를 빌려 도주하여 삼척(三陟) 항구에 정박하였다. 삼척부사 홍인걸이 공명에 눈이 어두워 왜적이라고 빙자하고 배 세척을 침몰시키고 수백 명의 백성을 몰살하였다. 조정에서는 왜적을 섬멸한 공을 세운줄 알고 상을 주기로 한 것을 선생이 진상을 조사하여 조정에 보고하고 홍인걸을 처벌한 후 백성들의 원통함을 풀어주고 민심을 바로 잡아주었다.
그 후, 홍문관 수찬을 역임하고 영상 이원익이 하사도(下四道) 체찰사(體察使)로 있을 때 선생을 불러 종사관으로 삼아 매사의 처결을 위임하니 신중을 기하여 합당하게 처리하였다. 공은 선생을 크게 신임하고 크고 작은 일을 물어서 처리하였다고 한다.
부교리(副校理)를 거쳐 사간원 헌납 예천, 공주, 풍기, 영해 등 여러 고을에 수령을 지내면서 선정을 베풀어 명관이라는 칭송이 있었다. 성주목사로 있을 때 광해군이 왕위에 오르니 정치가 어지러워 벼슬에 뜻이 없었다. 정인홍이 세도를 잡으니 양심있는 선비는 설곳이 없다 하고 고향으로 돌아와 낙동강변에 영귀정(永歸亭)이란 정자를 지어 그곳에서 더욱 학문에 열중하다가 52세(1620)로 세상을 떠나니 조정에서는 호성원종공으로 통정대부 승정원 도승지를 추증하였다. 송산서원에 향사하여 그 유덕을 추모하고 있으며 문집(文集)이 있다.
<참고문헌 : 학사 김웅조가 지은 비문, 선산군지, 경암문집 연보, 경상순영록>
김취성(金就成)
본관은 선산. 화의군(和義君) 기의 후손이다.
자는 성지(成之), 호는 진락당(眞藥堂) 또는 서산(西山)으로 성종 23년(1492) 3월에 고아면 문성리에서 태어났다. 재질이 뛰어나고 부모에 대한 효성이 지극하였다. 학문과 덕행이 높아 그의 스승인 송당 박영도 "그대의 재주와 학문이 결코 옛 명현들에 뒤지지 않는다"고 칭찬하였다.
마을 뒷산에 서산재를 지어 네 아우를 비롯하여 많은 후학을 가르쳐 크게 성취시켰다. 언제나 닭이 울면 일어나 의관을 갖추고 서재로 물러나와 책상을 대하여 꼿꼿이 앉아 글을 강론하고 의심나는 부분은 분명하게 설명을 해 주며 밤이 늦도록 잠자리에 들지 않고 정자(程子), 주자(朱子)학에 맞도록 힘써 도학을 밝히고 학문에도 깊은 조예가 있었다. 영상 김안국, 회재 이언적이 여러 차례 나라에 천거하니 조정에서 벼슬을 내리며 불렀으나, 벼슬을 받지 아니하고 뜻을 지켰다. 임천에서 옛 성현을 추모하면서 더욱 학문에 열중하였다.
불우한 사람과 병든 사람을 불쌍히 여기고 의학 공부에 열중하여 귀천을 가리지 않고 돌보았다. 자기의 부족함을 보완하고자 초야에 묻혀 제자를 가르치다가, 명종 5년(1550)에 일생을 마쳤다. 선생의 높은 학문과 덕행은 이웃과 고을을 교화하였으니 낙봉서원(洛峰書院)과 서산사(西山祠)에 모시고 있으며 문집이 있다.
<참고문헌 : 유교연원록, 일선지, 진락당집>
김취문(金就文)
본관은 선산이며 화의군(和義君) 기(起)의 후손이다. 진락당(眞樂堂)의 아우로 중종 원년(1506) 고아읍 문성리에서 태어났다. 이름은 취문(就文), 자는 문지(文之), 호는 구암(久庵)이다. 진락당 선생과 함께 송당 선생에게 수업하였으며 중종 32년(1537) 문과에 올랐다.
그 후, 강원감사, 부제학 등 여러 관직을 지내는 동안 청렴하고 근검한 관리의 모범을 보여 상감으로부터 많은 상을 받고 모든 관리들의 귀감이 되었다. 청송부사로 있을 때, 퇴계선생이 그 외아들 준에게 편지를 보내 말하기를 "청송부사(靑松府使)는 내가 공경하고 두려워하는 친구이니 너는 조심성 있게 가서 인사를 드리고 길이 비록 험하나 넓은 바다와 어진이를 볼 수 있을 것이니 어찌 좋은 일이 아니겠나?"라고 했다.
조정에 있을 때, 윤원형(尹元衡)을 물리치라는 상소를 올려 그를 신랄하게 비판하였다. 만년에는 고향에 내려와 대월재(對越齎)를 짓고 여러 후학을 가르치다가 62세로 조용히 전수를 다하니 상감께서 크게 슬퍼하시고 친히 제문을 지어 신하를 내려 보내 제사를 지내게 하시고 자헌대부, 이조판서, 홍문관 대제학, 성균관사를 추증하고 문간이라는 시호를 내리셨다.
후생이 높은 덕을 추모하여 선산 낙봉서원(洛峰書院), 서산 세덕사(世德祠)에 배향하고 있으며 문집이 남아있다.
<참고문헌 : 국조인물고, 유교연원록, 구암집>
# 김주(金澍)
본관은 일선(一善), 순춘공의 후손이며 백암선생의 동생으로 이름은 주(澍)요 호는 농암(籠岩)이다.
고려 공양왕때 벼슬이 예의판서(禮儀判書)로서 홍무 임신(洪武壬申 1392년)에 하절사(賀節使)로 중국에 가서 임무를 마치고 돌아오다가 압록강에 이르러 조선 건국 소식을 듣고
통곡하면서 부인 유씨에서 서신을 보내여 결별하기를, "충신은 두 임금을 섬기지 않으니 내가 강을 건너면 몸둘 곳이 없노라.
내 부인이 잉태중임을 아노니 만약 아들을 낳으면 이름을 양수(揚燧)라하고, 딸을 낳으면 명덕(命德)이라 하라.
그리고, 입었던 관복과 신을 보내니 후일 부인이 돌아 가거든 합장하여 우리 부부의 묘로하고 묘 앞에 비문과 묘갈(墓碣)을 쓰지 말것이며 나의 일을 후세에 알리지 말고 내가 서신 보낸 날을 기일로 하라"하였다.
드디어 중국으로 다시 돌아가 명나라 황제에게 조선을 정벌하고 고려를 다시 건국할 것을 주청하니 명제가 말하기를 "국가의 혁명은 하늘에 있으니 한사람의 충절로써 회복할 수 없다."하고 허락하지 아니하였다.
선생은 신하의 의로 다시 고국으로 돌아갈 수 없어 중국에 있을 것을 청하니 그 충절을 가상이 여겨 중국에서 예부상서의 벼슬을 내렸다. 선생은 벼슬을 사양하고 형초(荊楚, 중국지명)에서 고려를 사모하며 충절을 지키니 상서록(尙書綠)을 주어 여생을 마치도록 하였다. 당시에 만약 강을 건넜다면 부귀영화가 기다리고 있었을 것을 해와 달 같은 충절은 고국을 등지고 처자를 헌신짝같이 버리며 나라 망한 한을 품은 채 형초에 숨어 살았다.
이역만리에서 일생을 보내고도 조금도 원망하지 않았으니 진실로 의리에 따라 임금을 섬기는 도리를 다한 충의의 일생이였다고 하겠다. 후손이 마지막 서신 보낸 12월 22일을 제삿날로 정하여 제사를 지내고 있다.
고려 두문동 72현(杜門洞 七十二賢)의 한 분이며 조선 정조 20년(1796)에 시호를 충정이라 내리고 친히 제문을 지어 신하를 보내 치제를 하였다. 부조묘인 내격묘와 제청인 충렬당(忠烈堂)과 신도비가 도개면 궁기리에 있으며 안동 고죽서원(孤竹書院), 선산 월암서원(月巖書院), 곡성 동진사(東津祠)에서 충절을 추모하고 있다.
<참고문헌 : 쌍절기, 일선지>
김종직(金宗直)
본관은 선산(一善), 강호선생의 다섯째 아들로 자는 계온(季溫)이며, 호는 점필재()이다.
세종13년(1431)에 출생하였으며, 15세에 이미 시문에 능하여, 많은 문장을 지었으며, 20세가 못되어 문장으로 이름을 크게 떨쳤다.
단종 원년(1453) 진사에 오르고 세조 5년(1459년) 문과에 올라 벼슬길에 나가니 당대에 학문으로 뛰어난 어세겸(魚世謙)이 선생의 시문을 보고 감탄하며 말하되 "나로 하여금 말 고삐를 잡고 따라 다니라 하여도 마땅히 달게 받겠다고 하였다" 고 한다. 성종께서 즉위하시고 경연(經筵)을 열어서 특히 학문하는 선비를 선출하니 선생이 첫째로 선출되었다.
함양군수로 있을 때 오직 배움을 권장하고 영재를 기르며 백성들이 평안하고 서로 화합하니 치정(治政)이 국내에서 으뜸이었다. 특별히 발탁하여 승문원 참교로 임명하셨다.
그후 얼마 안되어서 고향인 선산부사로 부임했다가 모친상을 당하여 상례의 모든 절차를 주자가례(朱子家禮)에 따랐으며 삼년을 묘 옆에 띠집을 지어 지내면서 슬퍼함이 지나치니 모든 사람이 그의 효성에 감복하였다.
금산지(金山池) 위에 서당을 지어 그 곁에 연꽃을 심고 집의 호를 경렴(景濂)이라 하니 주렴계(周濂溪-中國사람)를 경모한다는 뜻이다. 매일 그 집에서 시문을 읊고 제자를 가르치며 세상 일에 뜻이 없었으나 다시 홍문관 응교로 부르시니 병이라 칭탁하고 사양하였으나 임금님께서 허락하시지 않으므로 부득이 벼슬길에 나가니 임금님의 총애가 지극하여 특별히 도승지를 제수하니 선생이 감당하기 어려움으로 사양하였으나 임금님이 말씀하시기를 "경의 문장과 경륜은 족히 감당할 것이니 사양치 말라."하시고 곧 이조참판 동지경연사로 제수하시고 금대(金帶)한 벌을 하사하여 대우를 달리하였다. 그 후, 공조참판을 거쳐 형조판서, 홍문관 대제학을 겸직하였다.
성종 20년(1489)에 병으로 관직을 사양하여 지중추로 벼슬을 옮기고, 밀양으로 돌아오니 임금님이 특별히 벼슬을 바꾸지 말라하시고 녹을 주었으나, 받지않았다. 모든 사람들이 나라에서 주는 녹을 받으라 권하여도 불응하고 세 번이나 글을 올리며 사양하니 임금님이 허락하시지 않으시고 친히 비답문을 지어서 어사품을 내리셨다. 가세가 빈한함을 듣고 본도에 하명하여 쌀 70석을 하사하고 의원을 보내어 약을 하사하였다.
성종 23년 1492년 8월 19일에 62세로 돌아가니 부고를 듣고 조정에서는 2일간 정사를 보지 않았고 문간이라는 시호를 내렸다.
후에, 영의정을 추증하고 시호를 문충(文忠)이라 고쳤다. 학문과 덕행이 만인의 사표로서, 문하에서 도학 문장가가 많이 배출되었으니 김굉필, 정여창, 김일손, 유호인, 조위, 남효온, 홍유손은 대표적인 인물이다. 고려 유신 정포은, 길야은, 김강호의 학통과 동방 성리학을 계승하였다. 일찍 단종의 폐위와 변사를 슬퍼하고 세조의 불의를 풍자하는 글을 지어 후일 참혹한 화를 당한 원인이 되었으니 이것이 이른 바, "조의제문(吊義帝文)"이다. 연산군 4년(1498)에 "조의제문"이 발각되어 부관참시(剖棺斬屍)를 당하였으며 문하생 33인이 참혹한 화를 당하였으니 이를 일컬어 무오사화(戊午士禍)라 한다. 또한, 선생이 저술한 글을 세상에 전하지 못하게 불에 태워 없앴으나, 선생의 생질 강중진이 화를 당하면서 10여권의 책을 숨겨두어 후세에 전하고 있다.
선생이 저술한 청구풍아(靑丘風雅), 대동문수(大東文粹), 여지승람(與地勝覽)을 세상에 전하고자 문인들이 문집과 이존록을 모아 간행하고자 하니 나라에서 이를 알고 임금의 명으로 간행하였다.
선생은 부(父) 김강호에게 수학하였으며 강호는 야은에게 수학하고 야은은 정포은에게서 수학하였으니 도학 연원을 받아 선생의 학문은 크게 창달하였다. 선산 금오서원을 비롯한 여러 서원에서 배향하고 있으며, 고령군 쌍림면 합가리에 선생을 모시는 부조묘(不朝廟)가 있다.
<참고문헌 : 성종실록, 승정원일기, 유교연원록, 조선유학사, 점필재집>
# 김숙자(金叔滋)
본관은 선산(一善) 순충공 선궁(宣弓)의 후손, 자는 자배(子培), 호는 강호(江湖)이다.
고려 공양왕 원년(1389)에 선산 영봉리(迎鳳里)에서 출생하였다. 선생은 어려서부터 용모가 단정하고 총명함이 뛰어나 나이 12세에 야은 길재선생, 별동 윤상(尹祥)선생에게 수학하여 몸 가짐의 도리와 공부하는 방법을 알고 15세에 향학(鄕學)에서 공부하며 친우와 더불어 함께 노는 일이 없었다. 언제나 종일토록 책을 벗삼아 모든 서적을 일일이 탐독하여 진리를 탐구하고 실천에 옮기며 오직 배움이 부족함을 걱정하였다.
세종 1년(1419) 문과에 오른 후 사관에 수선(首選)되자 이를 시기하는 사람이 많음으로 벼슬을 버리고 고향에 돌아와 부모를 봉양하는데 극진하였으며, 제자를 가르치는데 전력을 다하였다. 1431년에 양친 상을 거듭 당하니 좋은 음식을 멀리하고 빈소에서 죽만 마셨다. 장사 후에 묘 옆에 떼집을 지어 3년을 지내면서 상복을 벗지 않고 한번도 집에 돌아가지 않았다고 한다.
세종 21년(1439) 기미년(己未年)에 세종대왕께서 정사를 밝히고 도덕과 행실이 올바른 신하를 선발하여 사유록(師儒錄)을 비치하니 선생이 가장 으뜸으로 천거되었다.
그 후 벼슬에 나가 김해·고령·개령 현감·선산· 성주 교수· 성균 사예(成均司藝)를 역임하면서 여러 고을을 다스림에 청백하였으며 토지와 백성을 사랑함도 학문을 배우는 길이라고 하며 오로지 백성을 위하여 좋지 못한 풍속을 혁신하고 미풍양속에 힘써 매년 봄, 여름 마을을 돌아보고 종자가 없는 사람에게 종자를 빌려 주고, 양식이 없는 사람은 환곡으로 도와 주었다. 또 부지런한 자는 칭찬하고 태만한 자는 꾸짖고 흉년을 당하면 창고를 열어 굶주린 백성이 없도록 고루 구휼하고 노인과 병들고 불우한 백성을 일일이 조사하여 도와 주었다. 뿐만 아니라, 가난하여 혼례를 치루지 못한 사람에게는 혼수를 장만하여 혼례를 치르도록 주선해 주니 풍속이 점점 순화되어 도적이 자취를 감추니 인근 고을까지 그 혜택을 입어 고을의 백성들이 선생의 높은 덕을 사모하여 송덕비(頌德碑)를 세워 칭송하였다.
세조 원년(1455) 선산에서 밀양으로 이거하여 이듬해 1456년 3월 2일에 일생을 마쳤다. 헌종 10년(1844) 자헌대부 겸 이조판서, 양관 대제학에 추증되고, 시호를 문강(도덕박문왈 문 연원유통왈 강)이라 하였으며, 선산 낙봉서원, 거창 일원정에 향사하고 있으며 경남 거창군 남상면 한산리에 부조묘와 제청인 추원당(追遠堂)이 있다.
<참고문헌 : 유교연원록, 조선유학사, 국조인물고>
김선궁(金宣弓)
신라가 쇠약해지자 고려 태조가 일어나서 삼국 통일의 대업을 이룩할 때 탁월한 재질과 뛰어난 지략으로 약관(弱冠) 15세의 나이에 고려 태조를 도와 개국 공신(開國功臣)이 되고 마침내 일선(一善)김씨의 시조(始祖)가 되었다.
『고려사』에 의하면, 처음 공이 숭선(崇善-선산의 옛이름)고을 관리가 되어 명성이 높았다. 고려 태조가 본부(本府)에 와서 공을 불러보고 기이하게 여기어 자기의 활(御弓)을 줌으로 이름을 선궁(宣弓)이라 고쳤다.
공은 사사로운 일보다 국가를 앞세워 당시 관아를 지을 터가 마땅치 않아 이리저리 옮겨다니는 것을 보고 자기가 사는 집을 관아 부지로 국가에 바쳤다.
왕건 태조가 팔공산 동수에서 견훤에게 크게 패(敗)한 후 이곳 선산의 냉산에 숭신산성(崇信山城)을 쌓고 싸워 크게 이긴 후, 어검평야(고아 앞들)에서 신검의 후백제 군대와 마지막 결전을 벌여 대승하므로 통일 성업을 완수하는데 크게 공을 세웠다.
그 후 고을 사람들이 공의 덕과 의를 칭송하여 진민사(鎭民祠-비봉산 아래)라 불리는 사당을 지어 제사를 지냈다. 벼슬은 고려 개국 벽상공신 문하시중 선주백을 지냈고, 고려 정종 원년(946)에 시호를 순충(順忠)이라 하였다. 문무를 겸전하고 충절을 다한 위인으로 출장입상(出將入相)하여 어린 나이로 태조를 도와 오백년 왕업의 초석을 이루는데 충성을 다하였다.
선산읍 완전리에 유허비와 해평면 금오리 미석산에 묘소와 재사 및 신도비각이 있다.
<참고문헌 : 고려사(高麗史), 동국여지승람(東國與地勝覽), 성씨대전(姓氏大典)>
# 길재(吉再)
해평 길씨로서 중정대부(中正大夫) 지금주사(知錦州事) 원진(元進)의
아들로 지정(至正) 13년 (1353)에 고아 봉한리(鳳漢里)에서 출생하였다.
이름은 재(再), 자는 재부(再父), 호는 야은(冶隱) 또는 금오산인(金烏山人)이라고
한다.
선생은 어려서 체격이 청수하고 천성이 영민하였다. 아버지께서
보성대판(寶城大判)이 되어, 어머니 김씨도 함께 임지로 가게 되었는데,
녹(祿)이 박하여 밥 먹기 어려우므로, 선생을 외가에 맡기고 떠났다.
선생은 8세에 어머니를 이별하고 시냇가에 놀다가 우연히 가재를 한
마리 잡아서 노래하되, "가재야 가재야 너도 어미를 잃었느냐?
내 또한 어미를 잃었노라. 하며 놓아 주고 눈물을 흘리니 보는 이로
하여금 그 애처로움을 보고 눈물 흘리게 하였다고 한다. 이웃 할머니가
그 광경을 보고, 소식을 외조부 김희적(金希迪)에게 전하니, 외조부
내외가 함께 슬피울고 고을 사람이 모두 기특히 여기었다고 한다.
# 고응척(高應陟)
본관은 안동, 몽담(夢聃)의 아들, 자는 숙명(叔明), 호는 두곡(杜谷)이다. 중종 26년(1531)에 해평면 문량리에서 태어났다.
어릴 때부터 재주가 뛰어나 주위 사람들을 놀라게 했으며 12세에 후계 김범(後溪 金範)의 문하에 가서 중용을 배우고자 하니, 중용은 어린이가 배우는 글이 아니라 하므로 울면서 집으로 돌아와 스스로 공부하며 한글로 교훈시(敎訓時) 70여 수를 지으니 모든 사람이 신기하게 여겨 신동이라 하며 장차 큰 문장이 되리라 하였다.
여기 한글 시조 한 수를 소개하면, "오륜(五倫)을 생각하니 일가중에 셋이로다.이 셋(부자, 장유, 부부)을 모르면 둘(군신, 붕우)을 어찌 아랴. 어째서 이제 선비는 사근(가까운 일을 버리고) 초원(먼 것을 취하는 뜻) 하나뇨"
어린 나이로 진사 시험에 합격한 후 명종 4년(1549) 문과에 올라 각 고을의 현감과 강원 경상도 도사를 거쳐 성균관 사성에 이르렀으나, 벼슬에는 크게 관심이 없고 많은 글과 시를 쓰고 후배 교육에 전념하였다.
선조 24년 (1591)에는 임진왜란을 예고하여 나라에 상소를 올려 국방을 튼튼히 할 것을 강조하였으나, 태평성대에 군비를 함이 옳지 않다 하고 그의 뜻을 알아 주지 않았다. 또한 조정에 벼슬하는 사람들이 나라 사랑에 앞서 개인의 영욕에만 눈이 어두워 당파 싸움만 일삼으니 이를 몹시 안타깝게 여겨 "임금과 신하가 모두 한마음 한뜻으로 뭉쳐야 한다"고 글을 올리니 상감이 크게 칭찬하고 성균관 사성의 벼슬을 주었다.
선생은 정치보다 우리나라의 시문학과 역학(易學)에 남긴 업적이 크며 대학 개정장(大學 改正章), 안자서(顔子書), 인지편(人智編), 전인보감(銓人寶鑑), 신감집(神鑑集), 비은발휘(費隱發揮)와 시문(詩文) 등을 편찬하여 후세에 전하고 있다. 병석에 있을 때 아들이 약을 드리니, 받지 않고 "내 천수를 다하고 돌아가려 하니 무슨 유감이 있으랴"하고 돌아가니 선생의 나이 75세였다. 후생이 높은 덕을 추모하여 낙봉서원에 향사하고 있다.
<참고문헌 : 선산군지, 인재 최현이 지은 행장, 전고대방, 한국인명대사전, 두곡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