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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강문학 4호 가을호, 원로초대석
지난봄 이야기
散木 咸東鮮
겨울은 뒤꿈치가 다 닳은 신발을 끌고 치악산雉岳山을 넘어갔는지 머리칼도 안 보이는데 봄기운을 말아 쥐고 논갈이나 하는 밭갈이나 하는 고향 사람들이 38선에서 일어난 일에 한다는 소리가 난세難世야 난세야 난세야 하던 말이 귓전에 남아서 흔들린다 어려선 뭔 소린가 했는데 근 쉰이 된 이 나이에 알게 됐는가 온밤을 새우며 한 방울씩 떨어지는 고장난 수도꼭지의 물처럼 난을 피해 예성강을 떠나오던 날 뱃전을 치던 물소리가 되어 휴전이 된 지 25년이 된 오늘에도 내 가슴에 떨어진다 38선 이남이면서도 휴전 때 미수복지구가 된 고향은 지운地運이 다 간 곳이구나 그렇지 않고서야 이 같은 독난리를 당할 수가 있을까 하는 푸념을 하면서도 이때쯤이 되면 고만고만씩한 애들의 고만고만씩한 웃음판 같기도 한 예성강 물에 비친 고향 산둘레를 건져 본다 그리곤 아무리 고향은 멀리서 생각하는 것이라도 말이다 내 발 밑에 밟혔던 민들레꽃이 자꾸 내 발목을 휘어잡아도 못 가는 것은 그렇지 그건 우리 역사의 아픔 때문이다 우리 역사의 아픔 때문이다
눈 감으면 보이는 어머니
또랑물에 잠긴 달이 뒤돌아볼 때마다 더 빨리 쫓아오는 것처럼 얼결에 떠난 고향이 근 삼십 년이 되었습니다 잠깐 일게다 이 살림 두구 어딜 가겠니 네들이나 휑하니 다녀오너라 마구 내몰다 시피 등을 떠미시며 하시던 말씀이 노을에 불그스름하게 물드는 창가에 초저녁 달빛으로 비칩니다 오늘도 해동갑했으니 또 하루가 가는가 언뜻언뜻 떨어뜨린 기억의 비늘들이 어릴 적 봉숭아 물이 빠져 누렇게 바랜 손가락 사이로 그늘졌다 밝아졌다 그러는 고향 집으로 가게 합니다 신작로에는 옛날처럼 달맞이꽃이 와악 울고 싶도록 피어 있었습니다 길 잃은 고추잠자리가 한 마리 무릎을 접고 앉았다가 이내 별들이 묻어올 만큼 높이 치솟았습니다 그러다가 면사무소 쪽으로 기어가는 길을 따라 자동차가 뿌옇게 먼지를 일으키고 동구 밖으로 사라졌습니다 온 마을 개가 짖는 소리에 대문을 두들겼습니다 안에선 아무런 대답이 없었습니다 손 안 닿은 곳 없고 손 닿은 곳마다 마음대로 안 되는 일이 없으셨던 어머니는 어디로 가셨습니까 눈 감으면 보이는 어머니는 어디에 계십니까
38선의 봄
멸악산맥에서 큰 산줄기가 단숨에 달려오다가 38선 팻말에 걸려 곤두박질하자 넘어진 김에 쉬어 간다고 한쪽 무릎을 세운 치악산이 남과 북으로 나뒹굴고 있다 그 산허리께에 치맛자락 펼치듯 구름이 퍼지면 월남하는 사람들의 걸음 따라 골짜기가 토끼걸음으로 껑충껑충 뛰어내리면 흰 더없이 흰 팔을 드러낸 예성강禮成江이 이제 막 돌아온 봄비 속의 산둘레를 비치고 있다 그 산둘레를 나는 지금도 비 오는 강물 속에서 건져 본다 서너 달 한 이레를 더 지나서 이제 막 돌아온 산둘레를 건져 본다 해방이 되었다고 만세 소리로 들뜨던 산천山川 그 산천에 느닷없이 그어진 38선으로 초목마저 갈라서게 된 분단 그 분단으로도 부족해서 동족상잔 6․25동란을 겪고 휴전이 된 오늘에도 고향엘 못 가는 내 눈가의 굵은 주름살처럼 세월과 함께 슬픈 역사의 이야기가 소나무 숲에서 더 큰 소리 되어 돌아온다 나는 38선 이남에 있는 고향을 바라보다 그러다가 이렇게 단 하나의 길을 걸어왔다 편안한 세월보다 뒤숭숭한 세월에 좋은 운 만나는 법이라는 어른의 말씀대로 여러 사람이 들먹거리는 데를 피하고 남이 가기 싫어하는 길목을 골라 서두를 필요도 기다릴 필요도 없이 나의 길을 걸어왔다 그러노라면 국운 따라 38선의 봄은 돌아올 것이라 믿고 오늘도 내 마음속에 자라고 있는 민들레 밭에 물을 준다
제3 땅굴에서
싸움을 말리는 척 편역을 드는 척하다
주인을 몰아내고 안방 차지한
지난날 강대국의 행적이 남아 있는
휴전선 비무장지대
귀청을 때리던 총성이 산을 으깨고
강물을 끓이던 칼끝이 선 듯한
남북고저南北高低의 땅굴
침묵은 공포를 키운다던가
한 발 한 발을 옮길 때마다
굵은 붓으로 그어 놓은 듯한 저 끝이 어두워지다가
공회당에서
굴비처럼 엮어진 채
북으로 끌려간 형님의 뒷모습이
떨어지는 물방울에 흔들리누나
땅굴에서 기어 나오니 40여 년의 세월이
일 미터 거리의 내 앞에 굴절되는 불안감
햇빛은 손가락에서 모두 빠져나가
주저앉고 싶은 언덕에는
6․25때
저승을 넘나들면서 본 개망초꽃이
상여의 요령 소리로 피어 있구나
형님은 언제나 서른네 살
쌀가마니 탄약상자 부상병이 탄 달구지를 보고
놀란 까치들이
흰 배를 드러내며 날아간다
후퇴하는 인민군 총뿌리에 떠밀리며
서낭당에 절하고 또 절하던 형님은
그 후에 다신 돌아오질 못했다
오늘도 낮달은 머리 위에서 뒹굴고 있지만
빛을 먹은 필름처럼 까맣게 탄 사진을 현상해서
천도재 올린 우리 식구들
절이 멀어질수록 풀벌레 소리로 귀를 막는다
나무껍질이 된 세월은
내 얼굴의 버짐처럼 가렵기만 한지
저수지에 돌팔매질을 해
물수제비 예닐곱 개나 뜨던 여름이 오면
형님은 언제나 거기에 있다
6․25를 기억하는 예성강처럼
언제나 거기에 있다
님은요
이별은 길었지만요
그 이별 이전의 세월은 더 길었다구요
비록 서로 다르게 걸어온 길은
오랜 시간에 걸쳐졌다 해도
정말로 마음을 합치고 나면
모래의 발자국처럼 바람 한 줄기 불어도
파도 한 자락이 들이쳐도
무너진다구요
그래서 시작은 준비할 수 있어도
끝은 대비하기 어렵고
인연이란
시작할 때보다 끝이 날 때라는 말이
더 대견하다구요
이제 마지막이란
늘 마지막 다음에 찾아오는 것이라 믿으니까요
오늘도 기다리는 님은요
시간을 멎게 할 님은요
한 줌의 흙
멀리 살면서 가깝게 살고
가깝게 살면서 멀리 살고 있으니
밥 먹을 때마다 서러워지는 사람 보는 것 같구나
눈 날리는 날
나뭇가지 끝의 마른 잎 또 하나 지니
우리는 어디로 흘러가고 있구나
헤어짐이 또 하나의 만남이듯
손을 잡아야 쓰는데
시작은 끝이 있는 법
이 한 줌의 흙에
꽃이 피고 열매를 맺게
비가 되어 만나야 쓰는데 물이 되어 만나야 쓰는데
남은 것은 그리움과 기다림뿐이다
한 번만이라도 고향에 가야지
밤을 타고 산을 넘는 꿈을 꾸다가
휠체어타고 온
아들을 알아보지 못하는 아버지
병상에서 ‘왜 이제 오느냐’ 하는 어머니
이들은
남과 북을 잇는 고리 구실을 했는데
너무 늦었구나
마른 입을 다시고 물을 마시고
색 바랜 사진을 꺼낸
50년 이산 속의 3박 4일
뜨거운 돌 위에 떨어진 물 한 방울처럼 작아지누나
그래서 부모의 꾸지람을 듣고
형제와 싸우던 옛집 보고 싶었을 거다
된장찌개에
밥 한 끼라도 먹었으면 했을 거다
허지만 이제 더 흘릴 눈물도 남지 않았으니
만남의 기쁨보다
다시는 만나지 못할 거라는 생각에
서로 건강을 당부하지만
두 번의 불효가 가슴 미어지게 하는 거
너무나 아픈 만남이었는지 모른다
잠깐일 거다
부적 허리춤에 넣어 주시던 어머니의 손 놓고
고향을 떠난 지가 50년이 된
나를 보면서
남은 것은 그리움과 기다림뿐이다
월정리역에서
물어 물어서
백 리 길을 구십 리 왔건만
나머지 십 리 길이 천 리 같은 걸
길 떠나 보지 않은 사람은 모를 거다
철원 땅 월정리역에 와서
기차표를 끊지 않는 것은
니가 내 안에 있지 않아서가 아니라
오늘도 니가 나의 하루를 차지하고 있어
기차표를 끊을 수 없다
6월 25일이 무슨 날인지 모르는
들꽃만이 핀
월정리역에서
연백延白*
아버지 상여가 귀야산貴也山 자드락 길을 돌아갈 적에 개망초꽃이 가로막고 한다는 소리가 “감옥 간 상주 올 건데 왜 서둘러 떠나시오” 한다 달포는 지났을까 8⦁15광복으로 식민지를 불 지르고 있는 마을에 38선 그은 지도 한 장 든 형이 달구지 타고 돌아온다 피골이 상접한 몰골은 일본군에 끌려가면 못 돌아온다는 말에 독립운동하다 감옥에 끌려갔다가 살아온 몸값이다 B29비행기 구름이 쉬던 산등성이엔 이내가 걸리고 새들은 38선 말뚝을 넘어가고 오지만 꽃과 나무와 풀은 이미 남과 북으로 갈라섰다 내 고향은 ‘38선 이남’의 변방이 되었다
나는 막내의 기대는 버릇으로 툭하면 넘어졌다 굼뜨게라도 일어서는 법 배운다고 먼저 넘어뜨리는 학교에 들어간다 교실엔 하늘이 가득 고여 1m 높으면 산이요 1m 낮으면 물이다 세계문학전집 펴면 아침 이슬에 젖고 시집 넘기면 노을이 타오른다 하루도 빠짐없이 이젤 메고 풍경 응시하는 세잔*의 눈으로 산과 들을 관찰하고 싱아의 시큼하고 단맛을 안 것은 그때이었는가 아니 그 전이었던 것 같다
연백평야는 내가 읽은 책의 국판菊版과 사륙판46版으로 정지整地된 곡창지대다 이 끝과 저 시작이 보이지 않는 들녘에서 사람들은 봄 햇살의 온기처럼 이성을 감정으로 고인 말로 농사지었다 벼가 자라는 시간 어디쯤과 어머니 서낭당에 돌 쌓던 시간 어디쯤에서 숟가락 휘일 만큼 찰기 있는 쌀이 되었는가 나는 지금도 아침에 연안延安 배천白川 인절미*를 먹는다
내 안의 속앓이와 내 밖의 억눌림으로 성숙한 나이가 되었다 자유를 지킬수록 재도 없이 타 버려야 한다는 것을 안 것은 그 무렵이었던 것 같다 아침마다 우물가의 세숫대야에 북한산 세 봉우리 뜨는 거 보고 집 떠나는 연습을 했다 하루는 그림같이 앉았다가 또 하루는 어린 시절의 물처럼 흐르다가 머무름과 떠남의 경계에서 6⦁25전쟁이 터졌다 끝이 처음에 접해 있어 휴전으로 분단은 고착화되고 나의 역마살은 지금도 바람이다 ‘고도를 기다리며’*
* 황해도의 연백군.
* 불란서의 화가.
* 최남선의『조선상식문답』에 찹쌀이 좋아 인절미 맛이 좋다고 기록되어 있음.
* 사뮈엘 베케트의 희곡작품.
시작노트
-나의 분단시
1
우리시의 특성중 하나는 고향상실과 무관하지 않다. 박철희朴喆熙는 1920년대의 시를 “국권상실‧ 고향상실‧님상실”등 동일성을 상실한 비극적 시기라 한다. 그런데 이 고향상실은 1920년대뿐만 아니라, 일제 강점기 전반에 걸친 실향성이라는 점이다. 정지용鄭芝溶의 시「향수」는 고향의 향수가 국권상실의 조국으로 확대된다. 그리고 이 향수는 일제 강점기에 글을 쓴 “모든 문학가의 운명”(임철규)이었던 것이다. 따라서 이 고향상실은 8‧15광복에 이은 분단, 그리고 6‧25전쟁은 분단을 고착화 시킨다. 그리고 휴전 후에도 현재진행형인 이 전쟁은 분단문학을 태동시킨다.
2
내 고향은 황해도 연백延白군 해월海月면 해월리 해월동(바다울) 664번지다. 연백군은 지리적으로 황해도 동남부에 위치한다. 동쪽은 예성강을 건너 경기도 개풍군과 인접하고, 서쪽은 벽성군, 북쪽은 평산군, 동남쪽은 예성강, 임진강, 한강이 합수하여 강화도와 마주 본다. 그곳은 8·15의 기쁨과 함께 그어진 38선 이남의 가장 북쪽 접경지다.
6․25전쟁은 동족상잔뿐만 아니라 이념의 전쟁, 국제전이기도 하다. 1953년 7월 27일 휴전협정이 조인되었으나 군사경계선은 중동부 전선에선 38선 이북, 서부전선에선 38선 이남으로 너비 4km의 완충지대는 오늘도 남과 북으로 갈라놓았다. 내 고향과 같이 38선 이남이면서 휴전 후 북이 된 미수복 지구는 개성, 배천, 연안, 옹진 등이다. 나의 본적지는 일제 강점기는 황해도, 8·15광복 후는 경기도, 6·25전쟁 후의 가호적은 서울특별시 서대문구 대현동 산 9번지다. 내 본적이 세 번 바뀐 것은 전환기 우리 역사의 아픔이기도 하다.
고향을 떠난 사람이 고향을 그리워하는 마음을 향수라 한다. 이 향수는 타향에 사는 사람이 고향에 돌아가고자 하는 가장 원초적이고 근본적인 욕망이다. 이 향수에 철학의 의미를 부여한 이는 하이데거다. 그는 노발리스의 말을 빌려 “철학은 본래 향수다. 그것은 모든 곳에서 안주하려는 충동이다”라고 한다. 말하자면 철학은 모든 곳을 고향의 집처럼 느끼고 그 안에 안주하려는 충동이라는 점에서 향수라는 것이다. 전체와의 합일을 지향한다는 그 전체를 오늘의 세계라 한다면, 철학은 세계를 고향으로 느끼고 그것과 합일하려는 근본 충동이라는 것이다.
6·25전쟁의 폐허 속에서 서라벌예술대학 문예창작과에 입학한다. 그 문예창작과는 작가 양성을 목표로 창작이론과 실기를 주로 가르쳤다. 교수진은 한국문단을 대표하는 문인들의 집합체였다. 나는 스승 미당未堂 서정주徐廷柱 선생을 만난다.
전국 각지에서 모인 문학의 수재들은 너 나 할 것 없이 개성이 강했다. 그중 다섯 사람이 미당 선생의 지도로 오시회午詩會를 만든다. 다섯의 음을 낮 오午에서 따온 것이다. 우리뿐만 아니라 모든 젊은이들이 6·25전쟁으로 이상과 꿈을 잃고 방황하던 때였다. 우리 동인들은 제1차 세계대전 후 미국의 가치관에 절망하고 파리에 있던 헤밍웨이, 커밍즈, 포크너 등에게 미국의 작가 스타인(1874~1941) 여사가 “당신들은 모두 방황하는 세대의 사람들이다”라고 한다. 이 말을 헤밍웨이가 소설 「해는 다시 떠오른다」의 서문에 인용해 ‘로스트 제너레이션’이란 말을 유행시킨다. 우리 동인들은 6·25전쟁으로 기존의 이상과 가치에 대해 회의를 느끼며 방황하는 세대를 자처하고 명동 거리를 배회하면서 내일의 가치 발견에 고민을 한다.
문예창작과는 전쟁의 폐허 속에서 많은 문인을 배출시킴으로써 우리 문단의 큰 인맥을 만들기 시작한다. 세상에서 문인사관학교로 불린 것은 그런 연유에서다. 이에 대한 밑그림은 초창기부터 야외 백일장, 문학의 밤, 문학특강을 주도한 오시회 및 여러 동인회의 정열, 오기, 패기, 치기, 꿈, 저항 등의 기질과 무관하지 않다. 특기할 일은 등단 추천제를 거부한 일이었다. 6·25 전쟁 후의 가난 속에서 시집을 내거나, 일본처럼 동인지로 등단하기가 어려웠던 시절이었다. 친구와 후배는 하나, 둘 추천을 받고 등단하기 시작한다. 미당은 만날 때마다 “고집 부리지 말고 작품 가져오게” 한다. 나는 동인의 양해를 얻어 현대문학에 「봄비」(1958. 2), 「불여귀」(1959.2), 「학의 노래」(1959. 9)로 천료를 한다.
3
문덕수文德守는 내 초기시집 우후개화, 꽃이 있던 자리에 자연 제재의 시가 많으나, 그 자연은 남다르게 “자연 질서의 추구를 통하여 현실적 삶의 리얼리티를 인식하고, 자연과 현실을 통합하려는 노력을 엿볼 수 있다”고 했다. 나의 시에서 이 향수라는 망향의식이 보이기 시작한 것은 시집 꽃이 있던 자리의 시「고향은 멀리서 생각하는 것」,「그 강은」,「내 출생한 강아」,「소묘」,「예성강 하류」등에서다. 그후 이 망향의식이 분단시로 바뀌기 시작한 것은 시집 눈 감으면 보이는 어머니에서다.
한편 나의 초기시집 우후개화, 꽃이 있던 자리등에서 자연 제재의 시와 막연한 망향의식을 보여주다가 고향에 돌아가지 못하는 감정을 절제하기 위해 감정이나 사상을 객관화하는 이미지즘 시를 가까이하게 된다.
중기의 시집 눈 감으면 보이는 어머니,식민지,산에 홀로 오르는 것은,짧은 세월 긴 이야기등에 수록된「지난 봄 이야기」,「눈 감으면 보이는 어머니」,「38선의 봄」,「제3 땅굴에서」,「형님은 언제나 서른네 살」,은 초기시의 막연한 망향의식이 점차로 분단의식으로 바뀌기 시작한다.
나의 분단시는 분단에 대한 슬픔과 아픔, 어머니와 고향에 대한 그리움과 고독, 우리가 겪고 있는 현실에 대한 분노와 탄식을 직접 토로하지 않고, 우리 역사의 아픔으로 승화시킨다. 이 점이 민중시, 이데올로기 및 정치편향의 분단시와 차별화 되는 것은 그런 이유에서다.
함동선 시는 분단시대의 대표적 담론을 펼치고 있다고 평가받는 민중시 계열의 고은, 신경림, 김지하 등과 는 다른 개성을 지닌다. 민중시 계열의 시인들이 이데올로기를 전면에 내세워서 정치성, 운동성을 띠고 집단 성을 드러내면서 저널리즘의 스포트라이트를 받은 결과, 대중적으로 널리 알려져 있음에 비하여, 함동선의 시적 담론은 매우 내재화되면서 정치성·운동성이 배제된 채, 소리 없이 진행되어 온 것이다.
함동선이 식민지와 분단시대의 민족적 체험의 정서는 분단의 역사적 상황을 과학적으로 이해하거나 해석하 게 하지 않고, 시적 상상력을 부추기면서 지적 성찰의 단계까지 이르게 하는 동인으로서 중요한 시적 모티브 다. 이 비극적 모티브를 동력으로 삼아, 함동선은 느낌과 깊은 생각이 잘 어우러진, 분단시대를 살아가는 한 인간의 슬픔, 고통, 그리움, 그리고 역사의식 등을 한결 같이 형상화해왔던 것이다.
「분단시대와 함동선 시의 자리」에서
이상옥의 이 글은 내 분단시와 우리 시를 이해하는 데 시사하는 바가 크다고 보아진다.
말기 시집 인연설, 밤섬의 숲, 연백의「한줌의 흙」,「님은요」,「남은 것은 그리움과 기다림뿐이다」,「월정리역에서」,연백의 분단의식은 이념적 분단, 정치적 분단, 국토의 분단에서 한 걸은 더 나가 생태계의 풀과 꽃과 나무가 분단되었음을 보여준다. 그리고 자연의 파괴를 고발한다.
이렇듯 나의 시적 담론은 어머니에 대한 그리움, 고향의 향수다. 그 향수는 고향회복에 대한 욕구이고, 이 욕구는 고향상실에 대한 욕구를 통하여 이루어진다. 이 과정을 통해서 그 회복이 가능하다는 것은 모든 시가 갖는 역설적 구조다. 고향상실을 헤아린다는 자체가 귀향을 뜻하기 때문이다.
사뮈엘 베케트의 부조리극『고도를 기다리며』의 주인공 에스트라공과 블라디미르는, ‘고도’를 기다린다. 고도가 누구인지도 모른다. 어제도 기다렸고, 오늘도 기다리고 내일도 기다릴 것이다. 이 ‘고도’는 인간 세계의 어려움을 해결할 수 있는 신 일 수도 있다. 이상향이라 할 수도 있다. 그러나 베케트는 이 ‘고도’에 대해 명확하게 말하지 않았다. 시「연백」에서 ‘고도’의 기다림은, 분단의 극복뿐만 아니라, 남과 북의 자연, 생태계의 통합까지 지향한다. 이를 송용구는 생태주의의 역사의식이라 말한다.
이런 의미에서 ‘고도’를 기다리는 나의 시는, 우리민족의 동질성 회복뿐만 아니라 자연 회복을 위한 씻김굿이기도 하다. 이 점이 한국현대시사를 연구하는데 중요한 단서가 된다고 보아진다.
散木 咸東鮮
황해도 연백 출생
『현대문학』(徐廷柱 추천)으로 등단
서라벌 예술대, 중앙대하교 졸업
경희대학교 국문학과 박사과정 수료(문학박사)
시집『우후개화』,『꽃이 있던 자리』,『눈감으면 보이는 어머니』,
『식민지』,『산에 홀로 오르는 것은』,『짧은 세월 긴 이야기』,
『인연설』
한국현대시인협회 회장, 한국문인협회 부이사장, 국제 펜클럽 부회장 역임
한국현대시인상, 펜문학상, 국민훈장 석류장, 예술문화상(문학부문),
대한민국 문화 예술상(문학부문), 서울시문화상(문학부문), 청마문학상,
현재 중앙대학교 명예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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