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촌리의 남쪽에 위치한 자미산(紫微山)에서 동북쪽으로 이어지는 낮은 구릉에 분포되어 있는 9기의 삼국시대 고분이다. 6ㆍ7ㆍ9호는 발굴조사가 이루어졌고 7ㆍ8호분은 인멸되었다. 6호분은 1939년에 일본인 유광교일(有光敎一)에 의해 조사되었는데 5기의 옹관(甕棺)과 함께 몇점의 토기와 유리구슬ㆍ청동환(靑銅環)등이 출토되었다. 이 고분은 조사 당시부터 길이 30m 내외 규모의 거대한 분구가 일본의 전방후원분(前方後圓墳)을 닮았다고 해서 주목되어 왔으나 1997년의 정비복원 작업시 이루어진 기초조사 결과 두 개의 사다리꼴분구가 연결되어 장고형(長鼓形)을 띠고 있고 그 주변에는 도랑이 설치되어 있음이 밝혀졌다.
7호분은 1939년 유광교일(有光敎一)에 의해 조사되어 3기의 옹관과 함께 토기ㆍ유리구슬 등이 출토되었는데 지금은 남아있지 않다. 9호분은 1917~18년 곡정제일(谷井濟一)에 의해 조사되었는데 방대형에 가까운 분구 위쪽에 12기의 옹관이 일부 중첩되어 안치되어 있고 금동관(국보 제295호)과 금동신발을 비롯하여 금반지ㆍ용봉문(龍鳳文)큰칼ㆍ톱ㆍ창ㆍ구슬 등과 많은 토기들이 출토되었다.
1999년 4월 26일부터 8월 26일까지 국립문화재연구소에서 발굴 조사한 결과 1917년 일본인에 의해 발굴된 분정은 11X11m 범위로 최고 깊이 2m까지 발굴조사 하였음이 확인되었고 성토분구 자체의 밑변은 30.5mX27.5m의 방형이고 주구가 형성되어 있었다. 주구는 분구의 고대화ㆍ채토처로서의 기능적 성격이 강했음을 알 수 있다. 또한 옹관의 중층 매납과 원형형토기의 배치상태로 확인한 결과 분구는 한번 이상 수직 확장된 것을 알 수 있다. 특히 1917년 분정 조사시 원통형토기 7개가 확인되었으나 이번 조사시 28개가 출토되어 한일간 고대사 연구의 중요한 단서를 제공하였다.
신촌리고분군은 분구 형태는 원형ㆍ방대형ㆍ사다리꼴ㆍ장고형 등 다양하며 지금까지 1ㆍ2ㆍ3ㆍ4ㆍ5ㆍ6ㆍ9호분이 정비복원 되었는데 최근 복원된 4ㆍ5ㆍ6호분에서는 모두 도랑이 확인되었다. 신촌리 고분들의 분구 규모는 갈아 10.5m(4호분)에서 35m 내외(9호분)에 이르며 내부 매장시설은 대부분 여러개의 옹관으로 구성되어 있을 것으로 추정된다.
신촌리고분군에는 9호분과 같이 5세기 후반으로 추정되는 것이 섞여 있지만 반남고분군(潘南古墳群) 가운데 중간 시기에 해당하는 것으로서 중심연대는 5세기초~중엽 경으로 추정되며 백제(百濟)의 진출 이전부터 자리잡고 있었던 마한(馬韓) 토착 세력자의 무덤으로 추정된다.
1호분 길이 19.4m, 너비 17.2m, 높이 3.2m 방형
2호분 지름 20m, 높이 5m 원형
3호분 지름 17.2m, 높이 3.5m 원형
4호분 길이 10.5m, 너비 7~9m, 높이 2.5m 사다리꼴
5호분 길이 17m, 너비 10~13m, 높이 2.5m 사다리꼴
6호분 길이 31.5m, 너비 13.5~16.5m, 높이 3m 장고형
9호분 길이 34.9m, 너비 30.3m, 높이 5m 방대형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