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숙이는 내가 담임했던 여고 2학년5반 반장이었다. 그 학생은 키도 훤출하니 크고 늠름해서 , 상담이라도 할라치면 내가 올려다 봐야 했다. 그리고 교련이 있던 그시절 전교 학도호국단 기수이기도 했다. 거기다, 그 학생은 담임인 나보다 더 지도력이나 결단력이 있어서, 오히려 내가 크게 도움받곤 했던 학생이다. 나는 그런 그학생들에게 결과적으로 큰 상처를 안겨준 아주 못된 선생이다.
잠시 추억으로 , 1975년, 내가 재직하던 그 여고에서, 여름방학에 담임 인솔하에 학급 여행이나 캠핑을 갈 수 있도 허락해 주었다. 그런데 막상 전교에서 캠핑을 신청한 학급은 나뿐이었다. 그 시절엔 캠핑이 일반화 되지 않던 시절이었으니 그러리라...나는 전부터 나는 캠핑을 워낙 좋아해서 교회에서도 학생회 지도교사를 맡아 중고등학생 몇십명을 인솔하여 수양회를 인도한 경험도 있었다. 그러니 나만 학급을 이끌고 캠핑을 가도록 허락을 받았다. 충청남도 서천의 비인면 동백정으로 ....
(동백정 그곳은 서해안에서도 드물게 풍경이 좋고 물이 맑은 곳이었다. 동백정이란 점자가 있는 조그만 섬이, 육지와 모래사장으로 연결되어 있어서, 남쪽으로도 깨끗한 모래사장이 펼쳐져있고, 북쪽으로도 깨끝한 모래사장이, 모두 아주 완만해서, 안전한 곳일 뿐만 아니라, 모래사장도 보통의 서해안과는 달리 뻘이 없어 깨끗했고, 동백정이 있는 작은 섬 쪽으로도 풍경이 일품인 곳이었다.
그런데, 지금은 없어지고 화력발전소가 들어섰으니, 다시는 가도 볼 수 없는 곳, 아니 가봤자 발전소와 황량한 방조제만 있곳으로 변해버렸다.)
그런데 그 시절엔 캠핑이란 건 쉽게 감행할 수있는게 아니었다. 개인적으론 준비와 경제적인 문제도 있겠지만, 그 시절 아무래도 치안이 지금 같지 않았으니, 여고생들 만으로 구성된 단체를 다른 대책 없이 보낸다는 것은 너무나 위험하다는 것을 뒤늦게 교장은 깨달은 모양이었다.
그런데 교장이 그제사 불안함을 깨달았던지 출발하는 바로 그날 아침에야, 갑자기 캠핑을 취소한다고 했다., 학생들은 거의다 모여 출발준비가되어 부풀어 있는데, . . .
뒤늦게 학생들의 출발을 못하게, 다른 선생님들 몇 분을 시켜서 평택역을 봉쇄하고 나선 거였다.
나는 매우 난감했다. 그 시절이라면 지방 여고에서, 학생들 전부가 학생들 끼리만 생전 처음 바닷가 해수욕장에 가보는 것이었을 테, 그러니 얼마나 들뜨고 밤잠 설쳐가며 준비하고 날이 밝기만 기다렸을까. . . .
각종짐과 옷이며 수영복이니 놀이기구 , 또 취사 준비니 식재료니 준비해 가지고 왔을 텐데 . . . . 얼마나 복잡했을까. . . .
나는 어쩔줄 몰라했는데, 그때 반장 경숙이 그 학생의 대처 능력은 단연 최상이었다. 신속한 결단력과 단호한 행동으로 학생들을 뿔뿔이 해산시켰다. 암호를 주고.. 150m쯤 떨어진 시외버스 터미널로가서 개별적으로 버스를 타고, 평택 다음역인 성환역에 집합해 기차를 타도록 !
.....그렇게 해서 2학년5반은 감히 그시절에 캠핑을 감행했던 거지요. 거의 40여명의 여고생이 겁도없이 !
서천에서 기차에서 내려 시골 버스도 타고 복잡하게 , 우여곡절이 있었지만 , 무사히 도착한 바닷가, . . . . 그런데 그곳엔 너무나 아름다운 풍경이 학생들을 기다리고 있었던 거지요. 학생들은 너나 없이 환호성을 지르며 바닷가로 뛰어 갔습니다.
도착한 학생들은 미리 예약해 놓은 바닷가에 바로 인접한 민박집, 그마당이나 다름없는 바닷가 모래사장에서 캠핑을 시작했지요. 우선 몇개의 텐트를 치고 . . . . 신나는 캠핑이 시작되었다.
너무 좋아서인지, 반장의 통솔력이 뛰어나서인지, 출발부터 겪었던 황당한 소동탓인지 학생들은 말도 잘들었고, 담임의 간섭이 필요없을 정도로 단합되었고, 모든게 잘돌아 갔습니다. 준비도 취사도 . . . 식사도 뒷처리도 . . . .그렇게 잘 단합되고, 간섭없이 잘돌아가는 학급이나 단체를 그후로도 경험한 적이 없습니다.
가장 경험에 남는 이상적인 학급이었습니다.
저녁후에는 모래사장에 둘러 앉아 낭만의 오락시간 . . .
조그맣게 모닥불 피워놓고 둘러 앉자 자동으로 합창이 . . .
[조개껍질 묶어 그녀의 목에걸고 . . . . . ]
[산들바람 불고 달빛찬란한 무릉도원 강가에....]
[얼어붙은 달 그림자 물결위에 차고 . . . ]
[모닥불 피워놓고 마주앉아서 . . .]
그당시 불리던 캠프송을 누가 지정하지 않아도 한 학생이 첫마디만 띠면 자동으로 합창으로 돌아가고, 박자도 잘맞고 뭐든지 자동으로 돌아가는 . . . . .그리곤 이어지는 3박자 4박자 게임에선 걸린 학생의 노래나 장기자랑을 . . .
폰이나, 게임기, 컴퓨터가 없던 시절이라, 여학생들은 오히려 더 단합되어 잘놀았다. 박자를 맞춰가며 율동도 섞어가며, .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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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그 학생들은 가을엔 , 내가 학년주임이였던터라, 교장과 함께 내가 답사하고 계획한 코스대로 설악산으로 수학여행까지...함께갔지요. 그래서 전체 일정 조율 및 인솔문제 등으로 내가 바쁘니까, 학급 인솔은 거의 반장이 . . . .담임 역할을 !. . .
그리고 그해 11월도 거의 다 간 22일 나는 결혼을 했다. 학교에서 가까운 교회에서 (유신시절아던 그시절 허례허식을 배격한다며 예식장이나 호텔등에서 결혼 하는 것은 금지되있었음)
그때 학생들은 모두 참석해 그 넓은 교회당을 채워주고 합창으로 축가를 불러주었다. 그토록 추억이 많은 학생들이었다.
그리고 나는 그 다음해, 학교의 명령에 불복하고 학생들을 인솔해 캠핑을 간 죄로 담임을 못맡았다. 그 때는 교감과 극심한 불화를 겪을 수밖에 . . .
그래서, 또 그 다음해 그러니까, 그애들이 졸업하는해 나는 서울로 전근했다, 아니 서울에서 새로 교사 생활 시작 했다.
새롭게 순위고사를 춰서 . . . . 그 동안의 교사로서의 경력을 포기하고 서울에서 . .새로 시작하는 거였지요..
...그리고 고단한 서울 생활. . . 그리고 . . . . . 몇 년후 억척스런 아내 덕에, 그당시 사람들의 꿈이던 불식집에서 어느정도 안정을 찾을 즈음, 그애들이 나를 찾아왔다.
나의 주소도, 근무하는 학교도 모르고, 폰도 없어서 학생들끼리도 연락하기가 어렵던 그시절 어떻게 연락해서. .. 그학생들이 . . .
3학년 때 담임도 아닌 . ., 2학년 때 담임인 나를 찾아 왔을까 ..... 기특한 것들. . . .
30명 가까이나 되는 . . . . ., 한창 예쁠 나이인 아가씨들이 (20대 대학생이거나 직장인인 아가씨들이었다.) .....나도 너무나 반가웠는데 . . . 반가웠는데 . . .. .
그런데 . . .아내가 싫어했다. 내색까지 해가며. 나는 난감했다. 그러나 어쩔 수 없었다. 그 당시 . . .아니, 항시 나는 아내에게 곰짝도 못하였기에 . . . .
그애들에게 식사한 한끼도 대접 못하고 돌려보냈다.
나 또한 초등 3년때의 나의 담임처럼 되고 말았다. (註 초3 이름없이 밫도 없이 참고)
그 학생들이나 나나, 가장 즐거웠고 추억도 많은 시절이었기에, 언제나 미안하고, 죄책감을 느끼며 후회하는 여고 2학년5반 그 반장과 학생들. . . . 아마도 그 학생들, 지금 쯤, 갓 경로우대 카드를 받았을 법한. 58년 개띠, 초로의 씨니어가 되었겠지. . . . . . . . . . .,
첫댓글 조대표도 내가 언제나 미안하고 죄책감을 느끼는 분이다. 내가 너무나 많이 보살핌을 받았는데....
못난 내 인생... 나는 언제나 미안하고 후회할 삶만 살고있으니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