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무동주차장 |
09 : 12 |
세석산장(점심) |
12 : 45 |
첫나들이폭포 |
09 : 41 |
거림 갈림길 |
13 : 44 |
가내소폭포 |
10 : 02 |
음양수 |
14 : 00 |
오층폭포 |
10 : 16 |
석문 |
14 : 32 |
지리주능선 |
12 : 20 |
삼신봉(1284m) |
16 : 30 |
영신봉(1651m) |
12 : 35 |
청학동 |
17 : 30 |
<처음 하듯이>
우리가 인생을 살면서 습관적으로 살기 쉽습니다.
어떤 일을 하거나 사람을 만나거나 할 때에도
처음 대하듯이 하기가 어렵지요.
우리가 가보지 않은 곳을 처음 구경해보면 신기합니다.
그래서 자세히 봅니다.
인생도 그렇게 해보세요.
신기한 마음으로 인생에 임해보세요.
어떤 일이든 새로운 마음을 내서
정성을 다해서 처음 하듯이.
- 법륜스님의《즉문즉설(3) 행복하기 행복전하기》중에서 -
<백무동에서 낙남에 다가서다>
누군가 올 여름을 진단한다.
신종 플루가 극성을 부린 해.
긴 장마로 바캉스를 잊은 해!
그리고 쌍용자동차와 같은 극심한 노사분규가 시끄러웠던 해.
거기에 반짝 치켜든 경기 회복 운운 하지만 청년 실업 대란.
또 하나는 나라의 큰 어른 두 분이 가셨고,
답답했던 남북이 조금은 대화의 조짐이 보이기도 한다.
그런데 세계적 독감 바이러스가 주위 학교들이 휴교를 하고,
오늘 아침은 현관에서 전교생 등굣길에 일일이 개별 체온 측정까지 한다.
지구에 재앙이 오는가!
북극의 빙하와 킬리만자로의 빙설도 다 녹는다는데, 우린 그래도 덥고 긴 여름을 보내려 지리로 간다.
<첫 나들이 폭포>
<한신계곡>
지리산 종주라면 늘 주능선을 따라 산행하는 것을 말한다.
흔히들 성삼재에서 천왕봉 또는 화엄사에서 대원사 그리고 서북능선과 웅석봉을 포함한 태극종주...
그러나 이 능선을 가로질러 달리는 낙남정맥은 삼신봉을 지나며 지리의 모두를 보여준다.
그 지리의 속살을 찾아 우린 백무동으로 떠난다.
백무동의 어원은 몇 가지가 있지만 가장 설득력 있는 것은 지리산 산신을 부를 때 사용했던 백모(白母)에서 기인한다.
늙은 어머니란 뜻의 노고, 거룩한 어머니란 뜻의 성모, 하얀 어머니란 뜻의 백모에서 하나의 대상을 각기 다르게 표현한 것으로 학계는 주장한다.
<마고할미상>
지리산은 신라시대 이래로 조선시대까지 오악(五嶽)으로 여겨져 제사와 숭배의 대상이었던 산으로 보다 구체적인 형상물로 표현되어졌던 것이 지리산 천왕봉 바로 아래에 있었던 성모상(聖母像)이었다고 한다.
현재 이 성모상이 어떤 경로를 통해 옮겨졌는지 확인할 수 없으나 현재 산청군 천왕사라는 절에 옮겨져 있다고 한다.
지리산의 산신은 노고(老姑), 성모(聖母), 백모(白母)로 불렸으며, 마고는 지리산에서 불린 여신은 아니나 우리 민족의 공통된 여신인데 이를 함양군은 지리산 조망공원에 건립해 관광객들에게 볼거리를 제공하기 위해 제작했다고 한다.
늙고 영험한 시어머니나 거룩한 어머니나 하얀 어머니는 영험한 대지의 여신으로 풍요와 자손의 번영을 상징하는 의미를 신화는 담고 있다.
현재 마천면 백무동의 어원은 백모(白母·하얀 어머니)에서 유래됐다고 향토사학자들은 주장하고 있다.
<한신계곡>
<한신계곡 만가> 한신계곡과 한신지계곡은 많은 폭포와 긴 계곡 그리고 자연이 고즈넉이 숨쉬는 지리의 보고다. 세석과 장터목을 향해 달리는 두 계곡은 지리의 능선을 가로지르는 지름길이고 영남과 전라가 만나는 옛 장터다. 백무동을 따라 한신에 접어드니 아침 한기를 느낀다. 기상예보는 오늘도 폭염을 알린다. 낮 최고 29도, 아침 최저 19도. 무려 10도의 일교차가 지리 한신계곡의 서늘함으로 시작한다. 깊고 넓은 계곡, 한 여름에도 한기를 느끼게 하는 계곡, 계곡의 물이 차고 험하며 굽이치는 곳이 많아 한심하기 때문에, 한국 전쟁 당시 명 지휘관이었던 한신 장군의 빨치산 토벌 일화가 전해지기 때문이라는 설이 전하는 한신계곡.
<가내소 폭포>
<두 번 째 가내소 폭포>
<오층폭포>
<한신계곡을 힘겹게 올라오면 지리 주 능선이 반긴다>
<촛대봉 가는 길>
이경수 어른이 전하는 한신계곡의 유래는 이 계곡을 이루고 있는 한신당의 최상단부인 세석고원 산마루에 앉아 있는 우람한 한 바위로 인하여 생겼다고 한다. 거대한 너럭바위 형태를 하고 있는 그 바위의 이름이 한싱이 바위라고 하며, 예전 세석고원에 살았던 비결장이들이 붙인 이름이라고 한다. 세석에는 조선시대 이후로 한국전쟁 직전까지도 지리산 청학동설을 신봉하는 비결장이들이 살았다고 한다. 그들은 세석 세 곳에 청학연못, 음양수 부근의 제단터 등의 흔적을 남겨 두었다. 지금도 찾는 기도객들이 있는 듯 타다 남은 촛농의 흔적이 있는 한싱이바우 역시 비결장이들의 기도터 내지는 제단터였음을 추정할 수 있다. 그들은 한싱이바우의 지척에 영신봉을 이루고 있는 거대한 바위를 두고 운짱바우라고 불렀다. 그런데 어르신이 호명하는 바위들의 발음을 가만히 들어보고 그 바위에 관한 자료를 참고하면 한싱이와 운짱은 경상도 사투리 억양이며 정확한 발음은 한신과 운장이다. 즉 한신바위와 운장바위가 맞는 것이다. 여기서 한신과 운장은 중국 삼국시대의 명장들이었던 한신과 관우를 일컫는다. 비결장이들이 토사구팽의 고사로 유명한 중국 초나라의 장수이자 초한지의 등장인물인 한신과 삼국지의 주인공인 관우의 이름을 빌려온 것이다. 그런데 고대 중국 장수이름을 빌려온 데는 그럴만한 이유가 있었다. 세석고원에 비결장이들이 집중적으로 모여든 시기는 진주민란(1862)과 을미사변(1895) 직후라고 한다. 그들은 조선 말엽의 뒤숭숭한 시국의 불안을 피해 남부여대하여 세석고원을 난세의 길지라고 알려진 지리산청학동이라고 믿고 찾아 들었던 것이다. 이후 청학동을 찾아서 지리산으로 입산하는 민중들의 행렬은 근세 일제 강점기까지도 이어지면서 하나의 사회문제로 대두되었다. 그래서 그들의 현실도피 현상을 자제하는 다음과 같은 기사가 일간지에 등장하기도 했다. 청학동을 찾아다니는 제군들아! 사람은 정신을 먼저 미신으로부터 타파하여야 될 것이다. 청학동은 진실로 미신의 한 주요물이 되었다. 거금 300 여 년 전 한 도인의 비서(秘書)를 보건데 청학동은 지리산 남록에 있는데, 장차 삼제갈 팔한신(三諸葛 八韓信)이 날것이요, 그 동리를 복거한지 십리이내에 차마(車馬)가 영문(盈門)이라 하였고, 그 후 금강산 유점사에 있는 한 도승이 지리산을 답사하고 세무청학동(世無靑鶴洞)이라 하였다. 도인은 있다하고 도승은 없다하니 청학동은 진실로 전무후무한 혹세무민의 산물이다. 선영구토(先塋舊土)를 다 버리고 세탁가업(世倬家業)을 빙자하여 그야말로 당대 발복자인 청학동을 찾아 천리를 멀다 않고 내왕하는 인사들아, 참으로 가석가애(可惜可哀)한 제군이다. 내일의 일은 예상하기 어렵지만 과거사를 전람하면 알 것이다. 수 십 년 전으로부터 청학동을 찾으려고 지리산 남록에 거주하는 수 천 명의 경과를 보건데 10년 이내의 차마영문은 고사하고 반년 이내에 남에게 압박만 많이 받는다고 한다. 현금 세소간에 청학동이라는 곳은 지리산 남록에 있는 세석평지 혹은 잔돌평지라고 하는데는 평원광록이 주위 40리나 되고, 자좌 우향(정북에서 정남방향)으로 되어 미신에 혹한자의 눈으로는 한번 혹할 만도 하다. 그러나 사람의 생활을 지배하는 데는 곡물과 물산이 많고 또 교통이 편리하여야 한다. 세석평지라는 곳은 산고풍다(山高風多)하여 3하(三夏)를 지내도 목엽이 잘 피지 아니하고 인가의 거리가 사방 삼 십리에 격재하여 밥을 먹고 옷을 입는 자로는 도저히 생활을 유지할 수 없는 곳이다. 제군아! 청학동을 찾아 제갈, 한신 같은 자손을 바라는 것보다 청학동을 찾는 그 경비로 현대에 상당한 교육을 가르쳐 제갈, 한신 같은 사람들이 성공하면 그 사람이 있는 곳이 곧 청학동인가 하노라. (대정 14년 5월 24일, 시대일보, 진주 기자-시대일보:일제강점기 1924년 최남선이 창간한 일간신문-대정 14년(1939년)
<한신바위 모습>
<영신봉과 운장바위 그리고 한신바위> 허무맹랑한 한 도인의 비결서 만을 믿고서 지리산을 찾아드는 우매한 백성들의 우매한 행위를 향해 민중의 새로운 사회가 산 속에서는 결코 이루어질 수 없는 일이라고 일갈하는 기사이다. 비결장이들이 세석고원을 청학동이라고 믿고 찾아든 이유와 한신바위와 한신계곡의 연관성을 유추할 수 있는 자료이다. 비결서에 기록된 삼제갈 팔한신의 에언을 따라 지리산 세석고원으로 찾아 둥지를 튼 그들에게 세석을 지키는 수문장 같은 영신봉을 한나라 관우의자를 따서 운장바위라 하고, 그 맞은 편에 버티고 선 바위를 한의 무장인 초나라 제왕 한신의 이름을 따서 한신바위라 이름 짓고 숭배의 대상으로 삼았던 것이다. 아직도 관우를 기리는 사당인 관우묘가 몇 군데 전하는데 서울 남산의 와룡당과 동묘 그리고 충북 영동에 있는 관왕묘가 있다. 하동군지에 따르면 지리산 자락 하동 읍내에도 일제 강점기까지만 해도 관우를 모시는 관성묘가 있었다고 한다. 세석고원에 거주했던 비결장이들에 대한 이야기는 산 아래 거림 지역이나 백무동의 지역민들 중 그들을 기억하는 사람들과 후손들에게서 전해지는데 옛날 선비들 산행기에도 찾아볼 수 있다. 그들은 주로 세석의 음양수 부근과 청학연못 주변에 모여 살면서 음양수 부근을 적석동(積石洞), 청학연못 부근을 미금동(美禽洞)이라 불렀다. 그리고 세석고원의 주변 골짜기들인 삼밭골(작은 샛골), 대성골, 수곡골, 도장골, 덕평봉 등에도 거주하는 비결장이들의 가수 수가 일제 강점기 때만 해도 100여 호에 달했다고 한다. 비결장이들이 세석을 청학동이라 믿고 찾아 든 직접적인 이유는 잦은 병란과 현세의 빈곤 등을 피하는 것이었으나 이 모든 이유들은 그들의 궁극적인 목적인 후손의 번영을 위해서였다. 당시 청학동은 대물림 받은 가난과 또는 자신의 실패로 인해서 쇠락한 가문을 일으킬 희망이 자기 당대에서는 전혀 가망이 없었기에 다음 대(미래)에서는 꼭 한 번만이라도 가문의 영광을 맛보고 싶어 했던 이상향의 대상이었던 것이다. 비결장이들은 당시의 일반적인 교육이 아닌 청학동 교육으로써 자신들의 꿈을 실현할 수 있다고 믿었을 것이다. 청학동 교육이란 나름대로 붙인 것은 비결서에 제시하고 있는 표본적인 인물들을 본받도록 하는 교육을 말한다. 자녀들로 하여금 삼제갈 팔한신 즉 제갈공명과 한신장군 같은 중국의 위대한 인물들을 본받고 나아가서는 신봉하도록 하면서 가문의 영광이라는 꿈을 키웠던 것이다. 그리고 한신바위는 그들의 이러한 종교적인 꿈과 신념을 시시때때로 확고히 하고 기억하게 만드는 훌륭한 도구가 되었을 것이다. 위 내용은 시대일보와 비결서 그리고 한국민족연구소, 하동군지, 지리산 산행기와 제보자, 지역민들이 전한 역사이다. <가객이 쓴 지리산의 지명 탐구에서 발췌>
<영신봉에서 시작되는 낙남정맥>
<지리 주 능선을 바라보는 산꾼의 허허로움>
<낙남정맥으로 발걸음을 옮기는 산꾼의 모습>
<반야봉 서쪽 능선을 배경으로 산꾼의 환호가 정겹다>
<산꾼들의 환호>
<명선봉, 토끼봉 그리고 반야봉과 노고단이 파노라마 처럼 펼쳐진 지리 주 능선>
<촛대봉 지나 천왕봉 쪽 능선>
<지리와 야생화>
<영신봉에 서서 지리의 모두를 보다> 영신봉! 해발 1651미터. 서로는 멀리 커다란 반야봉이 보이고 구름에 가린 노고단이 윤곽이 확실하다. 능선따라 칠선봉과 덕평봉이 줄을 잇고, 바로 벽소령이 꺼진다. 곧바로 명선봉이 너울대고 토끼봉이 기지개 켠다. 동으로는 세석평전 너머 촛대봉이 우뚝하고, 바로 연하봉 넘어 장터목과 제석봉이 줄을 잇는다. 이윽고 천왕봉 1915미터의 고봉이 위세를 떨치고 써리봉이 마감한다. 25.5km에 이르는 주능선을 바라보는 신이 내린 영신봉의 조망이 황홀하다.
<구절초와 촛대봉>
<촛대봉과 세석평전>
<가야할 남부능선>
<음양수>
<영신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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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촛대봉>
<지리 주능선>
<남부능선과 삼신봉>
영신봉은 또한 낙남정맥의 시작점이다.
남부능선을 지나 멀리 삼신봉을 지나고 영남의 젖줄 낙동강의 남쪽을 따라 김해 다대포로 연결된 긴 산줄기의 첫 시작점이다.
산길은 흐르고 흘러 영남과 전라를 나누고, 마을과 지형은 언어와 문화를 달리한다.
청학동의 꿈이 서린 삼신봉의 풍수지리와 서럽고 힘들었던 민중의 애환이 가득한 세석평전과 거림 그리고 남부능선.
내리쬐는 햇살에 긴 능선을 따라 내딛는 발걸음이 무겁다.
하지만 산꾼에게 이런 산줄기를 걸을 수 있는 기회를 주심에 깊이 감사한다.
한국의 대단한 산길들을 하나하나 매듭지어 나가는 귀연산길에 지리산 산신령님의 무한하심과 화합하는 산행 그리고 순탄한 장도를 기원한다.
<석문을 지나는 산꾼의 뒷 모습>
<삼신봉이 다가오고>
<지나온 능선>
<확연히 조망되는 지리 주능선의 파노라마>
<삼신봉>
<지나온 능선>
<삼신봉에서 남부능선 종주를 마치고>
<가야할 다음 낙남 구간>
- 지리산이여! 더도 말고 덜도 말고 귀연의 낙남 행로를 안전하고 즐겁게 수놓을 수 있도록 은혜 베푸소서...-
첫댓글 드디어 낙남의 첫발을 내딛으셨군요. 완주시까지 안산, 즐산을 기원합니다. 상세한 역사와 이야기를 곁들인 산행기 아주 즐겁고 유익하게 읽었습니다. 가까운 시일안에 발 맞출 수 있기를...
관심과 성원에 감사드립니다..예전 대충에서 했던 낙남 구간들이 떠오릅니다.
낙남의 첫 출발이 매우 순조로웠습니다....날씨도 좋았고, 계절도 좋고, 모든 느낌들이 좋으네요~...
남해를 따라 서에서 동으로 달리는 낙남길..언제나처럼 네비가 되어 길 안내 부탁해요..
시작이 좋으면 끝도 좋다고 합니다...첫 구간 많은 분들의 협조와 노력으로 아름답게 잘 마무리 되었습니다.김해평야가 보이는 그날까지 귀연님들
음양수에서 커다란 배낭을 맨 초롱님 모습이 너무 멋저부러요...그래서인가 얼굴빛이 반짝거려 약 오르더이다..ㅎㅎ
다시 시작하는 정맥길에 첫발을 디디게 해준 귀연에 감사했습니다
바쁘시지만 낙남길 함께해요..먼길이고 많이 쉬어 힘들었을텐데 완주하셔서 기분 좋았어요.
2009년 9월 6일의 삽화
늠름한 모습 그리고 씩씩하게 삼신봉을 향해 달리는 꼬모님이 무척 젊어 보였어요..홧팅입니다..
지리산 명칭의 유래롸 역사 재미있네요.
역시 큰 배낭에 천천히 걷는 모습이 딱 어울립니다..기 너무 받으면 넘칠텐데...우짜노..ㅋㅋ
시작이 좋으니 귀연의 복인것 같습니다..정맥길이 끝나는 그날까지 좋은 날만 되리라 믿습니다..
한남대장으로 이젠 귀연의 큰 리더가 되었네요..낙남의 길에 큰 주춧돌이 되기를 바랍니다..
쉰 번도 넘게 맞이한 가을이지만, 준비없이 마주친 세석평전의 가을은 청순한 구절초 만큼 신선하고 새로웠습니다.
부상 후 가장 멀리 걸었는데 완주해서 좋으네요..늘 걱정 많이 하시는데 그래도 귀연의 발길이 늠름합니다...항상 고맙습니다.
소리없이 흐르는 깊은 물처럼... 빈 가지 사이를 채워주는 고요한 바람처럼... 무심한 척 세심하게 돌봐주심에 늘 감사할 뿐입니다...
청산님의 열정에는 항상 감동입니다. 감사드립니다.
이젠 비박까지...정말 지구가 작다는 소리를 허여사보고 할 것 같네요...영신봉의 그 멋진 조망과 아침 여명을 다 가졌으니 한 동안은 무병장수하겠네요..정말 멋진 지리 남부능선 종주였습니다...
힘들었지만 좋은 시간이었습니다. 하늘 맑은 날 영신봉과 삼신봉의 조망은 감동이었습니다. 항상 넘치는 열정 진짜 부럽고요... 한신계곡에대한 유래와 좋은 정보 감솨합니다.
한신계곡 오를 땐 씩씩하더니 남부능선은 좀 힘들어하시더군요...그래도 많이 회복된 모습이어서 보기 좋았습니다..늘 듬직한 산우였는데 차츰 산행 늘려 오래도록 함께해요...사진 기다려집니다..
정맥길의 묘미를 아직 몰라 동참을 못하네요 산 더 열심히 타고 참 맛을 알면 동참하렵니다 함께하시는 모든분들 내내 건강하고 즐거운 정맥길 되소서^^*
고맙습니다...지리에서 시작한 낙남이 낙동강에 빠질 무렵 함께 하길 기대합니다..
함께 하지 몿해서 아쉬웠는대....산행기를 보며 아쉬움을 떨쳐보내요... 산행기 감사드립니다
고맙습니다..2구간 함께할 인연을 놓쳤네요. 다음 산행에서 만나요..
아름답습니다. 그리고 정맥을 하는 분들이 너무 젊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