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낙남정맥 9차
일시; 2012.3.4 3:05—13:10
구간; 만날고개..대곡산..무학산..마잿고개..천주산..
북산..신풍고개
참가인원; 봄여름가을겨울산악회원 38명과 함께
마잿고개를 지나서 버스가 잠시 정차를 한다.
사이먼 부부님과 참이슬님이 같이서 하차를 한다.
님들은 일부 구간을 미리 산행을 하고 오늘은 나머지 구간만 이곳에서 출발을 한다고 한다.
마산 시내 산복 도로를 가로 질러 만날고개 주차장에 도착하니 새벽 2시 30분,
평소와 달리 서울에서 출발을 1시간 당기는 바람에 아주 일찍 도착 하였다.
산행 준비를 갖추고 오르막길을 올라 가는데 일행 뒤에 동네 아주머니 한분이 따라온다.
이른 새벽에 만날고개 정상 좌측에 있는 삼림욕장에 운동하러 간다고 한다.
뒤돌아보는 경남대학 건물 너머로 창원과 진해를 잇는 마창대교 야경이
현수교 탑을 따라 늘어진 현수와 교각의 불빛으로 현란하다.
쌀재고개로 가는 수고를 덜고 이곳에서 능선을 따라 출발을 한다.(3:05)
입구에 서있는 이정표에는 무학산 3.6km, 대곡산 1.0km라고 쓰여있다.
시작부터 가파른 능선을 따라 좌우로 자리잡은 묘지 사잇길을 오른다.
등로는 수 많은 사람이 다녀서 인지 먼지가 뽀얗게 일 정도로 많은 사람이 오르내린 흔적이다.
앞선 사람의 등산화만 쳐다 보면서 이어 간다.
한동안 땀을 흘리다가 불숙 나타난 이쁜 소나무가 앞을 가로 막는다.
대곡산 정상을 알리는 표지와 함께 펑퍼짐한 정상에서 증표를 남긴다.(516m, 4:08)
지난번에 대산에서 바라본 대곡산, 무학산 능선은 제법 구분이 되었는데
도착하여 보니 과연 이곳이 대곡산인가 라는 생각이 들 정도로 정상은 밋밋하다.
밋밋한 대곡산 정상
이어지는 등로는 평탄한 길과 다소의 오르막이 적절히 안배된 길로 이어진다.
넓다란 바위를 만나서 우측으로 펼쳐진 조망을 한동안 바라본다.
마산항의 가장 내부 지점과 양덕
그리고수출 자유공단 앞 바다는 너무도 잔잔하여 거울에 반사된 듯 하다.
마산 시가지, 양덕동(수출자유공단), 창원시가지 방향 조망(투투님 사진)
등로는 철쭉 나무가 빼곡한 터널을 지나서 소나무 숲이 고즈녁한 사잇길로 이어진다.
많은 시민들과 등산객이 찾은 탓인지 샛길이 좌우로 수시로 나타났다가 합치곤 한다.
한 차례의 오르막 길을 지나고 나서 평탄한 소로길이 이어진다.
조금 후에 학봉 갈림길에 도착한다(4:45
무학산이 춤추는 학의 모습이라고 하면 학봉은 학의 머리에 해당한다고 한다.
무학산 정상을 600m앞둔 지점이다.
나무 테크가 설치된 길이 이어 지다가
흘러 내리는 토사를 막기 위해 버팀목을 설치 한 넓직한 길을 이어간다.
어둠속이라 조망은 거의 기대하기 어렵고
이따금씩 불어오는 시원한 바람을 맞으면서
우뚝한 곳에 선두의 불빛이 모여있는 정상에 도착한다.(5:05)
무학산 정상 석
넓직한 정상은 우뚝 솟은 태극기가 바람에 날리고
그 아래에는 산불 감시 초소가 마산항을 바라보고 서있다.
안내도에 따르면 정상의 헬기장에서 우측으로 내려서는 나무 계단은
서마지기라고 이름 붙은 안부를 지나 또 다른 봉우리로 이어진다.
높은 저 두척산斗尺山
짙푸른 모습으로 구름위에 솟았네
동남쪽으로 푸른 바다를 누르고
안개구름 종일 어렸어라
옛적 고운 신선
숲 끝에 대를 이루었네
월영대를 소요하노라니
기는 가을 하늘과 더불어 아득하여라
이첨 (1,345년 (고려 충목왕 1)~1405(태종 5). 고려말 조선 초기의 문신
무학산
옛 이름은 풍장산, 두척산이라고 불렀다고 한다.
무학산 정상에 설치 된 "무학산 유래" 안내판.
마산,
어둠속에 비치는 마산 시가지는 참으로 아름답다
내고향 남쪽바다 그파란 물 눈에 보이네…라고 아름답게 노래한 민족 시인 노산 이 은상님은 마산 출신이다.
무학산 자락 아래 노비산에서 마산항을 바라 보면서 지은 노래라고 한다.
노산이라는 호는 무학산 기슭에 자리한 노비산에서 비자를 뺀 것이라고 한다.
산토끼 토끼야 어디를 가느냐…라고 노래한 이 일래 선생,
“선구자” 를 작사한 조 두남, 시인 천상병, 울고넘는 박달재를 작사한 반야월 선생등
문학과 시로서 우리 곁에 가까이 한 분들이 너무도 많다.
마산은 실로 예향藝鄕이다.
그런가 하면 마산은 3.15 부정 선거를 규탄하여 이 나라 민주화의 초석을 세운 곳이자
부마 사태의 시발지로서 한 시대를 마감하게 된 함성이 잠든 곳이다.
마산항과 마창 대교 야경 (투투님 사진 펌)
불어오는 찬 바람에 옷 깃을 세우면서 하산 등로를 찾아 좌우로 기웃 거린다.
어둠속에서 지형으로 감을 잡고 정상에서 좌측으로 내려선다.
진흙 길은 얼어 붙어서 미끄러워 위험 천만이다.
철쭉이 무성한 내리막 길이 한동안 이어 지다가 바람도 잦고 고즈녁 한 소나무 숲으로 바뀐다.
이 숲은 한동안 이어진다.
낮은 봉우리에 도착하여 먼저 도착한 그룹과 잠시 휴식을 한다. (5:35)
정상에는 알루미늄으로 된 기둥이 서있으나 방향을 표시한 표지판은 떨어져 나간 상태이다.
어둠 속이라 판단이 잘 안되지만 짐작으로 오른쪽으로 내려선다.
소나무 숲과 갈참나무 숲이 번갈아 이어지는 내리막길을 따라 내려서다가
중리와 마재고개로 갈래치는 3거리에 도착한다(6:00)
좌측으로 이어지는 중리는
마산시 내서면 소재지의 동리명으로서 경전선 열차가 지나가는 역사驛舍가 있는 동리이다.
구마 고속도로의 마산 쪽 종점이자 남해 고속도로가 교차하는 번잡한 곳이다.
곧 이어서 31번 철탑이 설치된 지점을 지나고(6:15)
잠시 후에 오가는 차량으로 분주한 마잿고개에 내려선다(6:20)
마잿고개는 참으로 요란하다.
경전선 철도가 이 고개를 지나 우측 마산시내로 진입을 하고
옆으로는 호남고속도로가 나란히 통과하며
그 위로는 내서읍에서 마산으로 진입하는 국도가 지난다.
이른 아침에 운동을 하러 나온 동리 사람들, 어딘가 일을 하러 나선 시민들이 하나 둘씩 거리로 나선다.
아침 구간은 어둠속이라 전망을 즐기는 휴식의 거의 없었고
무학산 정상에서는 계속 내리막길이라 다소 수월하여 예정보다 조금 일찍 도착한 셈이다.
길 건너 버스 정류장에 도착하니 선두를 포함한 전원이 휴식을 하면서 반긴다.
남해고속도로, 경전선 철길위 국도변에 새워진 표지석
회성동과 중리 사이에 있는 국도5호선이 통과하는 지역에 있는 고개이름이다.
마재는 아주 오래 전부터 사용되어 온 말인데 그 어원은 마재산(斗尺山)에서 비롯한 것이다.
마재산은 1530년에 편찬된 신증동국여지승람을 비롯하여
1895년에 편찬된 영남읍지에 이르기까지 각종 지리서 및 지도에 두척산 이라는 표기로
전해오는 무학산의 옛 이름이다.
그러나 오늘날 ‘마재‘라는 말은 삼호천 상류 두척마을 뒷골짜기를 ’마잿골이라고 부르고 있다.
1996. 11. 마산시장
--마잿고개 표지석 아래에 새겨진 내용을 옮겨 적었음.--
출발 이후 처음으로 물을 꺼내 한 모금 들이킨다.
껴 입은 옷을 정리하고 가벼운 차림으로 등로를 이어간다.
좌측 숲으로 난 길을 오르면서 기이하게 단장을 한 묘 1기를 지난다.
봉분의 상당 부분을 돌로 덮어서 갑갑하다는 느낌이 든다.
봉분의 모습이 특이 한 묘지
갈 참나무 잎이 무성한 숲길은 중간 지점에서 우측으로 꺽인다.
등로는 직진 방향으로 확연하여 잠시 신경을 쓰지 않으면 실수하기 쉬운 지점이다.
우측으로 내려서서 조그만 언덕 사이로 난 흙 길을 가로 지른다
국립 지리원의 지도에 따르면 마티고개라고 명명되어 있으나 큰 의미는 없어 보인다.
평탄한 숲길을 따라 이어 가다가 완만한 오름길을 지나고
우측으로 꺽이는 갈림길 능선에서 후미 대장이 아침 식사를 하고 가자고 하여 모두들 멈춘다. (7:00)
그사이 산행대장이 후미대장에게 두 사람이 없어 졌으니 확인하라는 연락이 휴대폰으로 온다.
누가 ? 어디서…? 어느길로 갔을까….?
오늘도 경암님이 푸짐한 찌게를 준비해 와서 후미그룹 5명이 따뜻하게 식사를 한다.
도리께님은 된장 스프를 따뜻한 물에 타서 국물 대용으로 식사를 한다.
밀려오는 허기를 떼우고 나서 포레스트님이 건내는 커피까지 한잔 하니 뱃속이 아주 든든하다.
산행을 하지 않을 경우 아침 식사를 7시 이전에 하는 버릇 때문에
그 시간을 넘기면 허기가 밀려와 매우 힘들다.
식사를 마치고 출발을 하는 도중에 산행대장으로부터 두번째 연락이 온다.(7:30)
아마도 선두 그룹이 어느 곳에서 식사를 하던 중 2명이 나타나지 아니하여
걱정이 되어서 확인하고 같이 오라는 내용이다.
걸음 걸이를 느리게 하면서 사라진 2명이 혹시나 뒤 따르지 않을까… 기대를 해 본다.
완만한 내리막길을 내려서서 2차선 아스팔트 도로가 지나는 송정고개에 도착한다.(7:40)
도로는 최근에 동물이동 통로를 설치하였으나
깍아지른 건너편 산 비탈을 따라 이어지는 등로는 경사도가 만만치 않다.
그 사이 없어진(?) 남녀 두 명이 뒤따라 오는 것이 보인다.
동물 이동통로 공사가 진행 중인 송정 고개
능선에 올라서 만나고 보니 투투님과 여성 한 분이다.(7:50)
예상대로 마잿고개를 지나서 첫 갈림길에서 직진을 하였다고 한다.
우리가 기다릴 테니 식사를 하라고 하여도
투투님은 찹살떡과 흰떡으로 요기를 하고 여성 분은 아무것도 먹지 아니하고 그냥 내 달린다.
합류하여 능선을 이어 가면서 선두를 향해 소리를 질러보니
건너편에서 식사를 마친 산행대장과 일행이 반갑게 맞는다.
완만한 내리막길을 내려서서 시멘트 농로를 가로 지른다.(중지고개,8:12)
성황당 터 같은 어수선한 주변에는 폐가구 등으로 인하여 어수선하다.
좌우로 흩어진 임시 축사에는 동물의 인분 냄새가 진동을 한다.
간판에는 내서면 안성리 제골농장이라고 쓰여 있으나 왠 일인지 농가는 눈에 띄지 않는다.
닭은 방목 상태이고 개는 개장에 들어 앉아서 미친듯이 짓는다.
토실 토실한 닭이 이리 저리 뛰노는 모습을 보니 회가 동한다.
시골에서 마음껏 뛰노는 토종닭은 그 맛이 별미 인지라 모두들 아쉬운 표정이다.
중지고개
개 사육장이 끝나는 지점에서 정면의 임도를 버리고 등로는 좌측 비탈로 이어진다.
가뿐 숨을 연신 몰아 쉬면서 작은 능선에 오르니 등로는 우측으로 이어진다.
가파른 능선을 오르면서 모두들 숨가뿐 걸음을 내 딛는다.
조금 후에 일행이 기다리는 정상에 도착하니(425m, 8:35)
저 건너편 정상에서 단체 사진을 찍기 위해 모두들 기다린다고 독촉을 한다.
안부로 내려서니 우측 방향으로 약수터 가는 길이라고 표지목이 서있다.
짧은 오르막길을 지나 장등산 정상에서 기다리던 선두 그룹과 함께 전체 사진을 찍는다. (446m, 9:00)
장등산 정상에서 단체 사진
정면에서 좌측 방향으로 보이는 두 개의 큰 봉우리,
우측은 천주산 정상으로 판단이 되지만 등로는 좌측 봉우리도 이어서 가는지
아니면 천주산 정상 너머로 이어 지는지 판단이 안된다.
가파른 내리막 길을 내려서서 안부에 도착한다.
고갯길 좌우로 커다란 평상이 두 개가 놓였 있는 안성고개에 도착한다. (9:30)
좌측은 안성마을이고 우측은 3.15 의거 성역공원으로 가는 길이다.
넓직한 평상이 놓여있는 안성 고개
오르막길은 한 동안 가뿐 숨 소리만 들릴 뿐, 고문님을 선두로 말 없이 긴 행렬이 이어진다.
능선에 도착하여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털썩 주저 앉아 주酒 님을 돌린다.(9:50)
능선은 좌측의 예곡에서 올라오는 길과 합류한다.
그 사이 건장한 남성 한 명이 발걸음도 가볍게 올라온다.
오늘, 마산, 창원, 진해 구간을 이어가는 86km 산행을 한다고 한다.,
마산시 구산면 남포만에서 무학산, 천주산, 용지봉, 웅산, 진해 합포만으로 이어지는
도상거리 86km구간이라고 한다.
우리와 비슷하게 출발을 해서 정병산, 그리고 진해 장복산까지 이어지는 이 구간은
이 지역 건각들이 자주 산행을 한다고 한다.
마산과 진해만을 끼고 거의 원형에 가까운 아름다운 코스로서
이 지역 사람들로부터 사랑을 받는다고 한다.
술 한잔의 기운인듯, 모두들 힘 차게 능선을 오른다.
억새가 무성한 능선에서 다른 방향에서 올라오는 시민들을 만난다.
맞바람을 맞으면서 능선에서 바라보는 창원시내,
중앙에 일직선으로 뻥 뚫린 도로가 시원스럽다.
이곳은 중공업 단지로 육성된 계획 공단으로 출발을 하였다고 한다.
마산 내항 부근의 방위산업 업체와 중공업, 그리고 LG전자가 자리한 단지는
3개 도시를 합하여 인구 108만 단일 시로 거듭난 것이다.
이곳에서 내려다 보면 마산과 창원은 지형적으로 구분이 잘 안되는, 연결된 도시로 보인다.
안성고개를 지나서 첫 봉우리에서 조망한 창원시내
3개 시가 합치면서 왜 창원시로 이름을 정하였을까…?
조선시대 태종때 의창義昌과 회원會原을 합쳐서 창원이라고 명명하였다고 하였으며
후에 창원도호부가 설치되어 창원, 마산, 진해를 관장하였다고 한다.
근대에는 1974년에 창원기계공단이 조성되었고
1980년에 창원시로, 1983년에는 부산에 있던 경남도청을 이곳으로 이전하였다고 한다.
마산은,
1914년 일제시대때 행정구역 조정을 하면서 일본인들이 주로 거주하는 지역을 중심으로 한
시가지를 마산시로 분리 하고 나머지 지역은 창원군으로 분리 하였다고 한다.
마산의 옛 이름, 합포는 원래 진鎭이 있던 곳으로서 상업 도시라기 보다는 군사적인 진영 터였다.
고려 충렬왕때 일본 점령을 위해 몽고군이 전초기지로 활용하였고
무학산의 이름을 딴 무학소주, 몽고군이 판 우물 몽고정,
그리고 국 간장으로 유명한 몽고간장이 지역을 대표하는 물과 연관된 이름이다.
2010년에 단일 시로 합쳐진 지금은 전체 인구가 약 108만 명 규모이다.
좌측으로 방향을 틀어서 능선을 따라 천주산으로 오른다.
가파른 오르막길 이지만 내려오는 사람이 더 많을 정도로 시민들이 줄을 이어 하산을 한다.
천주산 정상,
툭 터진 정상은 온 사방으로 조망을 선사한다.(10:35)
지나온 마산 방향으로는 구름에 가려서 흐린 날씨 탓에 마산만과 시내 일부만 조망이 되고
무학산은 구름속에 잠겨 있어서 춤추는 학의 모습은 확인 할 수가 없다.
동북 방향은 마산시를 우회하는 신 고속도로를 중심으로 사방으로 도로가 이어지고
그 사이로는 넓은 들판이 평화롭게 펼쳐진 농촌의 모습이다.
예곡리에서 올라오는 임도가 구불구불 힘겹다.
예곡리에서 올라 오는 임도
창원시내 방향은 천주산 아래 구 고속도로를 앞에 두고
드넓은 창원시내가 끝을 가름하기 어려울 정도로 넓다.
창원 시내 좌측 산 줄기를 따라 말 등 같은 산 줄기가 이어지고
그 뒤로는 진해 장복산으로 이어지는 큰 울이 철옹성 같은 모습이다.
공업 단지로 조성된 구 창원 시내는 사방으로 높은 산으로 둘러 쌓인 안온한 분지 같은 모습이다.
정상에는 용지봉龍池峰이라고 쓴 큰 돌과,
그 옆에는 천주산(638.8m)이라고 쓰여진 작은 돌 비석이 나란히 서있다.
평탄한 정상 주변에는 헬기장과 함께 나무로 지은 전망 정자가 세워져 있고
주변은 억새가 무성하다.
전망대는 북면 방향으로 산 허리를 따라 철쭉나무 사이로 아름답게 설치되어 있다.
또다시 후미 그룹이 정상주를 겸한 주님을 맞이한다.
불어오는 세찬 바람 탓인지 안주 보다는 알싸한 소주 한잔이 더 반갑다.
천주산과 정상 용지봉 표지석
잠시 후에 건너편 봉우리에 도착 후 다시 내리막으로 내려선다.
평탄한 능선을 따라 내려 서면서 헬기장을 연 이어서 4개를 지난다.
길고 긴 나무 계단을 따라 내려선다.
겨우내 얼었던 땅이 따스한 기운을 받아 서서히 녹고 있어서 계단 주변의 등로는 온통 진흙이다.
계단이 미끄러워 숲 속으로 들어 갔다가 다시 계단으로 나오기를 반복 한다. .
잠시 후에 4 방향으로 길이 뚜렷한 공터, 만남의 광장에 도착한다(11:15)
만남의 광장
공터 건너편으로 올라서니 넓다란 평상이 놓여있다.
뒤따라오던 고문님 그룹이 또다시 주님을 꺼낸다.
건내는 술잔을 사양하고
그 옆에 세워진 무인 책 도서관을 지나서 경암님과 둘이서 갈길을 채촉한다.
만남의 광장 건너편에 있는 무인 "산림 도서관" 도서관
평탄한 인도를 따라 가다가 암릉 구간을 만난다.
팔각정을 지나고 내리막길이 이어지는 지점에 있는 바위, 천주봉을 만난다.
그러고 보니 천주산은 지나온 용지봉과 이곳 천주봉이 각자의 이름을 가지고 있는 셈이다.
그 옆에 있는 산불 감시소 안을 들여다 보니 비좁은 공간에서 한 분이 잠에 빠져있다.
돌탑, 산불 감시초소가 있는 천주산 천주봉
이곳에서의 전망도 뻬어나다.
가야 할 방향으로는 다음 구간의 마루금이 겹겹이 포개져서 이어진다.
골프장 뒤 능선은 우측 창원시내와 좌측 진영 땅 사이에서 우뚝하여
암록색 능선으로 이루어져 어느 산군山群에 못지 않게 아름답다.
천주봉에서 바라본 가야 할 구간과 다음 구간.
좌측으로는 고속도로와 Motor Way가 완만한 능선과 들판 사이로 시워느 스럽게 뻗어있고
그 너머로 펼쳐진 끝이 안보이는 넓은 평야 가운데는 큰 저수지가 자리하고 있다.
지도를 들여다 보니 주남저수지를 경계로 하여 그 너머로는 김해시이고
저수지 좌측 끝 부분에서는 낙동강이 지척이다.
산골에서 자란 탓에 넓다란 들판만 보면 괜스레 가슴이 울렁 거린다.
김제평야와 김해 평야는 생각만 하여도 가슴이 탁 트인다.
산 넘어 김해 평야와 주남 저수지 방향 조망
급경사 내리막으로 내려선다.
경사로 끝 부분에 여러 기의 묘가 잠들어 있는 공동묘지 사이에
붉은 모자를 쓴 할아버지 한 분이 서 있다.
할아버지, 이곳에서 뭐 하세요 ?
산불 감시하고 있능기라.
저 산꼭대기에도 한 분이 있던데요…
그래, 그 사람은 내보다 높응기라, 그 사람은 시청에서 돈 받고 나는 구청에서 돈 받는 기라.
그런데 그분이 더 젊어 보이던데요
그래도 그 사람이 높응기라…
그래요, 수고 하세요
아암, 잘 댕겨 가이소…….
주름살이 움푹 페인 할아버지는 공동 묘지 사이를 왔가갔다 하면서 즐거운 표정이다.
대나무 숲을 지나 절개지로 내려선다.(11:50)
간이 버스 정류장이 설치된 2차선 아스팔트 도로에는 굴현고개라고 이정표가 세워져 있고
창원 시내 버스 행선지도 같이 표시되어 있다.
굴현은 고개 아래 좌측 마을의 이름이다.
시내 버스가 다니는 굴현고개
도로를 통과하여 절개지를 타고 오른다.
대나무 숲을 지나고 나니 검불과 잡목으로 등로가 복잡하다.
낮은 능선 풀숲 속에는 어마 어마한 관(pipe)이 고개를 숙인 체 세워져 있다
아마도 굴현고개를 지나는 신 국도(Motor way 79번)의 터널이 이 지점을 통과하는 탓에
터널 속 환기 시설로 판단이 된다.
갈참나무 잎이 수북히 깔린 흙 길을 따른다.
등로는 완만하고 동리 뒷산 같은 느낌이다.
잠시 후에 구룡산으로 가는 삼거리에서 우측으로 꺽어서 소답동 방향으로 이어간다.(12:10)
평탄한 능선에서 나무가지에 걸려있는 북산 표지판을 만난다. (293m, 12:15)
펑퍼짐한 동내 뒷산, 북산
국가 산업 공단이 들어선 지금은 그 이름이 많이 퇴색 되었지만,
동국여지승람 산천조山川條에 의하면 이곳 북산은 창원의 진산으로서
첨산檐山이라고 불렀다고 한다.
산 아래 동내 이름은 북동北洞이다.
묘지와 텃밭을 지나서 고속도로와 철길(터널)이 지나는 지하통로를 통과한다.
지형을 보니 우리가 내려서는 길에서 조금 더 동쪽 방향 능선을 타고 내려서면
고속도로를 건너 다음 능선으로 자연스럽게 이어 지게 되어있다.
아마도 도로 공사를 하면서 이곳에 굴다리를 만들어 놓은 탓에 이곳으로
정맥길이 연결된 것으로 판단된다.
남해고속도로와 경전선(터널)이 지나는 굴다리로 내려서는 길
굴다리를 빠져 나오니 도로와 건너편 아파트 사이 비탈에는
손 바닥만한 텃 밭이 이곳 저곳에 걸쳐있다.
건너편 아파트와 가게에서 소답동이라는 동내 이름이 눈에 보인다.
길 옆에서 지켜 서있는 분에게 말을 건내본다.
이곳에서 뭐 하세요 ?
산불 감시한다 아입니까..
아니, 산불을 동내에서 감시해요 ? 지나 오면서 두 사람이나 만났는데요…
요즈음은 산 비탈 동네 어귀, 텃밭에 일하러 나온 할머니, 할아버지가 산불을 잘 냅니다.
비닐봉지, 쓰레기를 태우면서 순식간에 산불로 연결이 된다 아입니까…
듣고 보니 그 말씀도 옳군요.
신풍고개를 갈라면 이 길(도로)을 따라 쭉 가이소.건너편 봉우리에서 다시 내려 가서 만납니다.
봉우리도 낮고 이 길을 다시 만나게 되니 그냥 이길로 가이소….
그래도 그렇지, 다 와서 샛길로 갈수야 없지 않은가?
경암님과 시멘트 도로를 따르다가 고개 마루에서 우측 능선으로 오른다.
잠시 후에 운동 시설이 설치된 정자 옆에서 휴식을 하던 산행대장 일행을 만난다.
이정표 기둥에는 옥산이라고 쓰여있다.(12:45)
잠시 휴식을 하면서 발 아래 소답동을 먼 발치에서 내려다 본다.
아랫 마을 소답동은 아동 문학가 이원수(1911—1981)님과 인연이 깊은 곳이다.
경남 언양에서 태어나 두 살 때 이곳으로 이사를 하였으며 15세가 되던
1926년에 “어린이” 잡지에 투고한 “고향의 봄”이 탄생 한 곳이다.
나의 살던 고향은 꽃피는 산골
복숭아 꽃 살구꽃 아기 진달래….
창원읍에서 자라며 나는 동문 밖에서 좀 떨어져있는 소답리라는 마을의 서당엘 다녔다.
소답리는 작은 마을 이었지만 읍내에서도 볼 수 없는 오래되고 큰 기와집의 부잣집들이 있었다.
큰 고목의 정자나무와 봄이면 뒷산의 진달래와 철쭉꽃이 어우러져 피고,
마을 집 돌담 너머로 보이는 복숭아꽃 살구꽃도 아름다웠다……
마산은 바다와 산이 아름다운 곳이다.
그러나 마산에 비해서 작고 초라한 창원의 성문 밖
개울이며 서당 마을의 꽃들이며 냇가의 수양버들, 남쪽 들판의 푸른 보리, ….
그런 것들이 그립고 거기서 놀던 때가 한없이 즐거웠던 것 같다.
그래서 쓴 동요가 ‘고향의 봄” 이었다.
나는 그 동요를 그때 애독하던 방정환 선생의 잡지 “어린이”에 투고해서
1926년 4월호에 발표되어 은메달을 상으로 받았다….
월간소년 1980년 10월호 이 원수 님의 회고록에서…
고향의 봄 창작 배경이 된 꽃 대궐로 불리는 곳은 김씨 고가古家이다.
소답동의 비교적 높은 위치에 소재한 김씨 고가는 조각가 김 종영 선생(1912—1982)의 생가로서
문화재로 지정 되어있다.
이 고가의 쪽문 옆에는 “이원수 5길’이라는 길 이름이 세워져 있다.
산 비탈을 따라 내려서니 건너편 도로에 버스가 기다리고 있다.
도로 확장 공사로 인하여 주변은 어수선하고
산 마루에 있던 음식점은 철거를 앞둔 상황이라 더욱 스산하다.
건너편 산 자락은 마산에서 빠져 나온 남해 고속도로, 경전선 철길, 지방도로로 인하여
웅웅 거리는 소리와 함께 다소 복잡하다.
길 건너 다음 구간 출발점을 가름하면서 기다리던 버스에 오르니 빗 방울이 점점 굵어진다(13:10)
신풍고개,
주민들은 소답동에서 좌측 용강리로 넘어가는 이 고개를 용강고개라고 부른다고 한다.
창원시가지로 이어지는 도로 확장 공사로 인하여 고개라는 의미가 거의 없다.
오늘 산행은 무학산과 천주산을 오를 때 두번 정도 큰 오름이 있었고
나머지 구간은 평탄하였다는 느낌이다.
큰 도시를 조망 하면서 이어온 길이 다른 구간에 비해서 아주 수월 하였다는 느낌이다.
도리께님이 Smart Phone에 내려받은 지도에서 산행 거리를 확인해 보니 24.7km,
마산, 창원을 지나면서
종착지 고암나루가 멀지 않았음을 느끼면서 가슴이 설렌다.
함께 한 회원님들,
그리고 맛있는 식사와 옛 생각이 나는 목욕탕을 예약 하느라 수고하신 운영진께 감사 드립니다.
|
첫댓글 언제나 멋진 후기글과 자세한 사진 까지
올려 주셔서 다시한번 걷는 느낌 입니다. 감사합니다..^^*
어느새 낙남길이 끝으로 치닫고 있습니다 낙남끝난후 온누리님에 후기글 기다려 졌는데 요번구간에는 넘 늦게 올리셔
혹 먼일이 생기셨나 많이 궁금했습니다 후기글 보면서 지역에 유래와 역사에 대해서 많이 배웁니다...몽고간장 그렇군요..감사히 잘읽고 갑니다~~
온아하시고 자상하신온누리님의 후기는 언제나 잔잔한 감동으로 다가옵니다
대곡산 오름길에 숱한 애기 무덤에서 새벽 울음 소리를 들으셨는지요..ㅎㅎ
무섭다기 보다 슬픈 우리네 50년대 생활의 이야기지요..
그 당시 아기를 낳고 100일이 지나 봐야 살것인지 죽을 것인지 안다고..
그래서 이름도 없이 사라져간 많은 어린 생명의 주검들이 묻힌 언덕이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