토라의 목적
이전에 우리는 토라를 세 가지 문서로써 규명했다: 첫 번째, 하나님과 이스라엘 사이의 언약; 두 번째, 이스라엘의 국가적인 헌법; 그리고 세 번째, 하나님, 남편과 이스라엘, 그의 신부사이의 혼인 서약서. 이러한 점들을 기초로, 우리는 토라를 위한 여러 개의 다양한 목적들을 볼 수 있으며, 이러한 것들의 대부분은 새로운 언약(Newer Covenant)에서 가르쳐졌다. 다소의 사울(바울)은 그의 광범위한 랍비적인 훈련과 가르침 때문에 토라의 목적들 관하여 가르치는데 보다 많은 자격을 부여받았다. 다양한 신자들의 회중들을 향한 그의 많은 서신들 안에서, 그는 토라의 부정적인 그리고 긍정적인 목적들을 제시했다.
우리가 이것들을 열거하기 전에, 그러나 한 단어가 사울을 적절하게 어떻게 해석하는 가에 관한 언급되어져야 한다. 이러한 이유는 분명하다. 그는, 아마 다른 어떤 신학자들 보다 더, 유대인 그리고 복음주의 크리스챤 학자들에게 의해서 상당히 오해되어왔고, 비난받아왔다.
어떻게 사울을 이해할것인가?
누군가 사울을 이해하고자 할 때 두 가지 기본적인 해석학적 원칙들을 명심해야한다. 첫 번째는 성서의 조화를 그대로 유지하는 개념이다. 다시 말하면, 성서는 성서와 모순될 수 없다. 예를 들면, 사도행전 21장의 사건들은 사울이 갈라디아서와 로마서를 쓴 후에 일어났다. 21장에서 사울은 분명히 예수아안에서 수 만 명의 다른 유대인 신자들처럼, 모세의 토라를 아주 철저히 지키고 따르는 사람으로서 분명히 묘사되고 있다.
15-26절을 특별히 주목합시다. 다소의 사울의 리더십의 신분과 함께 누군가는 그의 가르침에 반하는 태도로 살지 않았을 것이다. 그런데, 토라가 그들의 삶속에서 위치를 차지하지 않는 다른 신자들을 가르치는 동안 그는 토라에 따라 살지 않았을 것이라는 거다. 이것은 사울을 희망적이지 못하고 성서를 또한 모순되게 하는 것으로 만들었을 것이다.
두 번째 해석학적인 원칙은 상황이다. 순간적인 상황과 모든 책에서의 서신의 상황은 중요하다. 우리가 하나의 예로써 사울의 갈라디아 서신을 봅시다. 갈라디아서의 상황은 구원은 토라에 복종에 달려있다 라고 믿었던 사람들의 관한 것임을 아는 것이 필수 이다. 이러한 이단설 때문에, 사울의 서신은 토라의 그러한 사용에 관한 많은 상당한 부정적인 진술을 포함하는 것은 당연하다. 그러나 그러한 진술들은 서신의 상황에 비추어 모두 해석되어져야만 한다. 갈라디아서에서 사울의 주된 목적은 신자들의 삶에 토라의 적용에 관하여 가르치는 것이 아니라, 그러나 오히려 누군가가 의를 얻거나, 얻을 만한 가치가 있거나, 지키기 위하여 토라에 따라 살지 않아도 좋다는 것을 강조하고 있다. 똑 같은 생각이 또한 로마서에도 적용된다.
불행하게도, 사울의 글들의 많은 해석 가들은 이러한 해석학적인 원칙들을 일관된 방식으로 적용 하지 않았다. 따라서 사울은 정신적인 문제가 있는, 모순적인, 반 유대 적이거나, 또한 “기독교”로 불리는 새로운 종교의 창시자로 그려지고 있다. 그는 위의 것들 중 그 어떤 사람도 아니다. 그는 하나님이 야곱의 자녀들 모두가 함께, 신실하게 메시아의 대속의 죽음과 부활의 복음을 이방인들에게 전해주고, 그들에게 적절하게 메시지를 적용하는데 종사하도록 했던 단지 그러한 종류의 유대인에 불과 하다.
지금 이런 모든 것을 생각하며, 사울의 토라의 목적의 몇 가지 이해의 개요를 시작합시다.
토라는 하나님 앞에서 의를 얻기 위하여 지켜져서는 안 된다.
위에서 진술했듯이, 이것은 갈라디아서의 중심요점이고, 그리고 로마서의 중요한 요점들 중의 하나이다. 로마서 3장 20절은 가르치길, “그러므로 율법의 행위로 (또는 로마서 2-3장의 상황에 따라, 어떤 법률적인 시스템), 그의 앞에 의롭다 하심을 얻을 육체가 없나니.” 사람들은 구원받기 위하여 토라(뿐만 아니라 다른 벌률 시스템)를 지키려고 하고 있다. 그러한 사람들에게 사울이 강조하는 것은, “토라는 쓸모없어!” 왜 쓸모없는가? 왜냐하면 토라는 이미 칭의를 얻고, 구속된 사람들을 위한 생활방식인 것을 의미하고 있기 때문이다.
2. 토라는 인간으로 하여금 자신의 죄를 인식하는 것을 도와준다.
사울의 서신들을 통하여 이러한 관심 안에는 여러 개의 진술들이 있다. 로마서 3장 20절의 나머지 부분은 이러한 것을 설명하기에 충분할 것이다. 사울에 의하면, “토라를 통하여 죄를 알게 된다.” “지식”으로 번역된 헬라어 단어는 “인식”으로 표현되어져야한다. 토라는 사람들에게 죄가 무엇인가를 말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사람이 그들의 죄의 상태를 보는 것은 토라를 통해서이다!(주로 토라의 기능은 아직 구속받지 않은 사람들과 관계된 것이다.)
3. 토라는 하나님의 진노를 가져오게 한다.
로마서 4:15절에 의하면, “왜냐하면 토라는 진노를 가져온다....” 다시 한 번, 이 구절의 상황을 아는 것은 매우 중요하다. 로마서에서 사울의 가르침이 강조하는 것은, 만약 누군가가 토라를 이용하여 하나님 앞에서 칭의를 얻어 내려고 한다면, 그 시도는 실패할 것이다. 그는 그것에 완벽하게 복종 할 수 없다는 것을 단지 알게 될 것이며, 따라서 단지 비난만 받을 것이다. 칭의는 예수아가 그의 대속의 죽음과 이어지는 부활을 통하여 성취했다는 것에 대한 개인적인 신뢰에 근거하여, 하나님으로부터 은총으로써 항상 부여되어왔고 그리고 항상 부여될 것이다. 만약 어떤 이가 토라에 복종하려고 함으로 칭의를 얻으려고 시도한다면, 그때에 그에게 토라는 단지 비난을 하는 것에 불과하다. 토라는 그러한 목적을 위해 계획된 것이 아니다.
4. 토라는 보호자의 기능을 수행한다.
갈라디아서 3:23절 이하에서, 사울은 토라의 역할 을 보호자로서 말하고 있다. 이러한 생각은 많은 설명이 필요하다. 먼저 사울이 갈라디아서 안에서 가지고 있던 생각이 무엇인가를 본 후에, 그리고 개념을 보다 충분히 설명하도록 할 것이다. 우리는 이 단락을 간단히 요약하는 것으로 결론을 내릴 것이다.
사울은 그의 한 부분이었던 고대 그리스-로마 세계로부터 아주 익숙한 실례 위에서 그리고 있다. 부유한 가정들은 종종 자녀들을 그들의 선생님에게 보낼 때 자녀들을 위한 보호자로써 일할 수 있는 누군가를 고용했다. 보호자는 선생이 아니라, 단지 어린아이가 안전하게 선생님에게 도착했다는 것을 확인하는 사람이다. 사울은 어떻게 토라가 보호자로서 기능을 했는가를 설명하기 위하여 갈라디아서 3:22절 이하에서 이런 종류의 언어를 사용하고 있다. 하나님은 어떻게 그러한 사람들을 지킬 것인가?
그가 선택한 한 가지 방법은, 비록 유일한 길은 아니지만, 토라를 통한 것이다. 갈라디아서 3:22 이하에 따르면, 토라는, 헬라어 ,“tutor”, “가정교사”로 번역 되어져야 하는, “패다고그” 로서 기능을 할 수 있다(24절). 이 패다고그의 의무는 어린아이를 학교까지 등하교를 함께하며, 그의 행동을 감독한다...그는 선생은 아니다. (헬라어 패다고고스의 정의는 현대영어 pedagogue의 사용과 다르다). 따라서, 그는 선생님에게 가는 학생의 안전을 책임지는 보디가드 정도였다.
23절에서, 사울은 이러한 보호의 개념을 다소 다른 이미지로 설명하고 있다. 거기에서 그는 일반적으로 “수감되다”로써 번역되어온 단어를 사용하고 있다. 그러나 헬라어 동사 슈그클레이오를 그러한 방식으로 설명함으로, 번역자들은 부지불식간에 토라에 부정적인 그림자를 던졌다, 그래서 토라를 죄수들처럼, 사람들을 사로잡는 것으로 그리게 된 것이다. 그러나 그 단어는 다소 다른 함축적인 의미를 가질 수 있다. 그것은 또한 “차단하다,” “에워싸다,” 또는 긍정적인 의미에서 “봉하다”로 설명되어질 수 있다. 이것에 비추어볼 때, 이 구절은 구속을 의미하기 보다는 오히려 보호를 강조하고 있다. 더욱이, 이 번역은 또한 가정교사의 개념과 잘 어울린다.
따라서, 토라는 한 개인이 태어나고 자라게 되는 환경의 정신적, 도덕적, 그리고 사회적인 안전을 보존하는데 의도가 있다. 그 사람은 하나님의 영이 그들을 선생인, 메시아에게 인도할 때 “아버지에 의해서 정해놓은 날짜 까지”(갈라디아서 4:2) 보호 받았다. 토라가 그것을 어떻게 성취 할 것인가를 정확하게 살펴보도록 하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