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조는 신라 제48대 경문왕과 두번째 부인(헌안왕의 두번째 딸)의 아들로 전하는 태봉왕 궁예의 5대손 이종금이다. 문헌에 의하면 그는 본명이 김정으로 서기 1010년(고려 현종 원년) 거란족이 침입해 왔을때 장사로서 강감찬 장군의 휘하에 들어가 강화성에서 적을 격파하는데 대공을 세워, 서기 1033년(덕종 2) 이씨의 성과 종금이란 이름을 하사받고 광산군에 봉해졌다.
그리하여 후손들은 관향을 광산으로 삼아 세계를 이어왔다.
그후 그의 8대손 순백이 1320년(충숙왕 7) 상왕이 원나라 환자의 참소로 토번에 유배되자, 홀로 상왕을 호종하였으며 1323년(충숙왕 10) 방환하는데 공을 세워 상서좌복야에 이르렀다.
한편 순백의 아우 숙백과 승백이 직제학을 역임하였으며, 이들 3형제가 가문을 크게 중흥 시켰다.
광산이씨는 순백, 숙백, 승백 3형제를 중시조로 하여 상서공파, 한림공파, 제학공파로 크게 갈리어 영남과 호남을 비롯한 평남북 일원에 집중세거 하고 있다.
가문의 대표적인 인물로는 순백의 손자 홍길이 고려에서 예조참판을 역임했고, 증손 일영은 조선조에 와서 병조참판을 지냈다.
한편 세종 때 학자로 이름난 선제는 1419년(세종 1) 문과에 급제하여 집현전 부교리로 춘추관 기사관이 되어 [태종실록] 편찬에 참여했으며, 호조참판으로 정창손, 김종서, 정인지 등과 함께 [고려사]를 개찬한 후 예문과 제학에 올랐다.
특히 그는 슬하에 시원, 주원, 한원, 찬원, 형원 등의 다섯 아들을 두었는데, 시원의 아들 복선은 성종 때 문과에 급제하여 강원도 관찰사를, 형원의 둘째 아들 달선은 장악원정을 지내고 호당에 뽑혔다.
달선의 손자 중호는 명종 때 문과에 급제하여 전라도 관찰사를 거쳐 대제학에 추증되었으며, 그의 아들 발은 일찍이 김근공, 민순의 문하에서 학문을 닦아 1573년(선조 6) 알성문과에 장원으로 급제하여 호당에 뽑혔으며 벼슬은 부제학을 거쳐 대사간에 이르렀고, 북인의 영수로써 조광조의 지치주의를 이념으로 정계의 기강을 바로 잡으려 노력하다가 송강 정철과 유생 양천회의 모함으로 정여립의 모반 사건에 연루시켜 피화되었는데 인조 때 오리 이원익의 상소로 정철과 함께 해원되었다(죄가 풀렸다).
먼저 광산 이씨(光山李氏)의 혈맥은 신라(新羅) 종성(宗姓)인 김알지대공의 후손 신라 48 대왕인 경문왕의 두번째 왕비(헌안왕의 두번째 딸) 아들인 김정(金靖)의 후예로, 송악(松嶽)에서 태봉국(泰封國: 후고구려)을 세웠으나 왕건의 반란으로 쫓겨난 궁예대왕(弓裔大王)의 6세손이신 김정이 관직과 성씨를 하사받은 광산부원군 이종금(李宗金)을 시조(始祖)로 받들고 있다.
문헌에 따르면, 종금(宗金)은 1010년(고려 현종 원년) 거란(契丹)의 40만 대군이 내침하여 송도(松都)와 주읍(州邑)이 허물어지고 왕(王)이 남천(南遷)하는 혼란속에서 강감찬(姜邯贊) 장군의 휘하로 들어가 대소전투(大小戰鬪)에서 혁혁한 전공을 세웠으며, 1018년(현종 9) 3차로 재침해 온 거란의 10만 정예군(精銳軍)을 맞아 휘하의 주군을 이끌고 강화성(江華城)을 굳게 지켜 나라의 귀중한 재화(財貨)를 보전(保全)시킨 공적으로 1032년(덕종 2) 광산부원군(光山府院君)에 봉해지고 이종금(李宗金)이라는 성명(姓名)을 하사(下賜)받아 후손들이 그를 시조로 받들고 전라남도 광산군(光山郡: 현재 광주광역시 광산구) 일원에 세거(世居)하면서 본관(本貫)을 광산(光山)으로 삼게 되었다.
그후 시조 종금의 8세손 각(慤)이 고려조(高麗朝)에서 밀직부사(密直副使)를 지냈고 슬하에 아들 순백(珣白)· 숙백(叔白)· 승백(升白) 3형제를 두었는데, 이들이 모두 현달(顯達)하여 광산이씨(光山李氏)의 3대 인맥(人脈)을 형성하였다.
맏아들 순백(珣白)은 1320년(충숙왕 7) 원(元)나라 환관(宦官) 빠앤투그스(伯顔禿古思)의 참소로 토번(吐蕃)에 귀양가는 충선왕(忠宣王)을 박인간(朴仁幹) 등과 함께 호종(扈從)하였다가 3년만에 돌아와 상서 좌복야(尙書左僕射)에 오르고 충장(忠莊)으로 추시(追諡)되었으며, 그의 아우 숙백(叔白)은 1328년(충숙왕 15) 문과(文科)에 급제하여 한림원 직제학(翰林院直提學)에 올랐고, 막내 승백(升白)도 등과하여 벼슬이 직제학(直提學)에 이르니 이로부터 후손들이 이들 3형제를 중시조(中始祖)로 봉안(奉安)하고 기일세(起一世)하여 세계(世系)를 계승하여 왔다.
광산 이씨의 3대 인맥을 계통별도 살펴보면, 상서공(尙書公) 순백의 아들 기(奇)가 고려때 상호군(上護軍)을 역임했고, 증손 일영(일영: 병조 참판을 역임)의 둘째 아들 필문 이선제(李先齊)가 조선조(朝鮮祖)에 와서 명문(名門)의 기틀을 다졌다. 어려서 양촌(陽村) 권 근(權 近)과 매헌(梅軒) 권 우(權 遇)의 문하에서 학문을 연마한 선제는, 1419년(세종 1) 20세의 나이로 증광문과(增廣文科)에 급제하여 집현전 부교리(集賢殿副校理)로 춘추관(春秋館)의 기사관(記事官)이 되어「태종실록(太宗實錄)」편찬에 참여했고, 형·호·예조의 참의(參議)를 역임한 후 호조 참판(戶曹參判)으로 정조사(正朝使)가 되어 명(明)나라에 다녀와서 정인지(鄭麟趾)와 더불어 「고려사(考慮史)」개찬(改撰)을 관장했다.
특히 필문 이선제는 당시에 문장(文章)과 덕행(德行)이 뛰어나 조선 초기의 찬란한 문화발전의 개화기(開化期)를 연 주역(主役)의한 사람으로 명망이 높았으며, 광주현(光州縣)을 목(牧)으로 승격시키는데 결정적인 역할을 하였고, 슬하에 아들 5형제가 모두 현달(顯達)했으며, 묻혀졌던 이 사실이 후대에 알려져 광주직할시의 남광주에서 조선대 앞의 도로를 필문로라고 칭하여 광주의 충장로, 금남로 그리고 필문로라는 거리명을 만들게 되었다.
선제의 장자(長子) 시원(始元)은 예조 참판(禮曹參判)을 거쳐 홍문관 제학(弘文館提學)을 지냈고 차자(次子) 조원(調元)은 이조 참의(吏曹參議)로 물러나 후학(後學)을 길러 많은 동량지재(棟梁之才)를 배출시켰으며, 3자(三子) 한원(翰元)은 홍문관 교리(弘文館校理)를, 4자 찬원(贊元)은 홍문관의 수찬(修撰)을 역임하여, 부제학(副提學)으로 일본 통신사가 되었던 막내 형원(亨元)과 함께 이름을 떨쳐, 이들 5형제가〈광산이씨 5원화족(光山李氏五元華族)〉으로 일컬어졌다.
그후 양심당(瀁心堂) 시원(始元)의 아들 복선(復善)이 대사헌(大司憲)과 대사간(大司諫)을 역임했고, 성심당(惺心堂) 형원(亨元)의 아들 달선(達善)은 성종(成宗) 때 문과에 급제하여 호당(湖堂)에 뽑혀 사가독서(賜暇讀書)를 했으며, 해박한 경연(經筵)으로 왕(王)으로 부터 사유(師儒)라는 칭호를 받았다.
홍문관 박사(弘文館博士)를 지낸 공인(公仁 : 달선의 맏아들)은 젊은 나이에 요절(夭折)하는 애석(哀惜)함이 있었으나 그의 아들 백호(伯虎)· 중호(仲虎 : 전라감사)· 숙호(叔虎)의 후대에서 가세(家勢)가 크게 번성하여 가문의 융성을 누렸다.
중호는 예학에 매우 조예가 깊은 것으로 연려실 기술에 기록되어 있다.
전라 감사(全羅監司) 중호(仲虎)의 아들 4형제 중 장남 급(汲)은 사마시(司馬試)에 이어 문과에 급제한 뒤 홍문관 교리(校理)와 정읍 현감(井邑縣監) 등을 지냈으나, 1589년(선조 22) 연일정가인 송강 정철의 모함으로 정여립(鄭汝立) 모반(謀叛) 사건에 연루시켜 아우 발(潑)· 길(吉)과 함께 화(禍)를 당했으며 인조 때 오리 이원익에 의해 해원되었다.
일찍이 척암(척菴)은 김근공(金謹恭)과 습정(習靜) 민 순(閔純)의 문하에서 글을 배웠던 발(潑)은, 1573년(선조 6) 알성문과(謁聖文科)에 장원 급제하여 이율곡(이이)의 추천으로 이조 정랑(吏曹正郞)이 되어 정암(靜菴) 조광조(趙光祖)의 지치주의(至治主義)를 이념으로 하는 왕도정치(王道政治)를 제창(提唱)하고 경연(經筵)에 출입하면서 항상 왕도(王道)를 진달(陳達)했으며, 기강(紀綱)을 진작(振作)하고 사정(邪正)을 가르치는 것을 자기 소임으로 여겨 조금도 구차하게 야합하려는 뜻이 없었으므로 우계(牛溪) 성 혼(成 渾)·송강(松江) 정 철(鄭 徹) 등 서인(西人)들의 미움을 사게 되자 시사(時事)에 참여할 수 없을 것을 알고 부제학(副提學)으로서 차자(箚子 : 간단한 서식으로 하는 상소문)을 올리고 향리(鄕里)로 돌아갔다. 발의 아우 길(길)도 선조 때 등과(登科)하여 이조 정랑(吏曹正郞)과 검상(檢詳)·사인(舍人) 등을 역임한 후 응교(應敎)로 있다가 낙향했는데 불행히도 역변(정여립 모반 사건)이 일어나 형(이발)과 함께 국문(鞠問) 도중에 절명했다.
「부계기문( 溪記聞)」에 의하면 발(潑)은 효성이 지극하였다. 그의 어머니가 평소에 병이 많았으며 그는 옷과 띠를 풀지 않았으며 약을 달이는 것도 종들에게 맡기지 않았다고 한다.
다시 인맥을 소급하여 한림공(翰林公) 숙백(淑白)의 계통에서는 그의 아들 순(順)이 1374년(공민 왕23) 문과에 그제하여 헌납(獻納)을 거쳐 풍해 안렴사(豊海按廉使)를 지냈으며, 그의 맏아들 초(椒)는 조선(朝鮮)이 개국한 후 대사성(大司成)을, 차남 매(枚)는 영광 교도(靈光敎導)를 거쳐 참판(參判)으로 역임했다. 회령 판관(會寧判官)을 지낸 림(林)의 아들 형제 중 차남 근생(根生)은 단종(端宗)이 폐위되고 수양대군(首陽大君 : 세조)이 등극하자 이를 개탄하여 경북 고령군 성산면 고곡동(慶北高靈郡星山面高谷洞)으로 은거(隱居)하여 학문에 진력하다가 생(生)을 마치니 그후로 영남파조(嶺南派祖)가 되었다.
근생의 손자 수(樹)의 아들 홍기(弘器)·홍량(弘量)·홍우(弘宇)는 아버지를 일찍 여의고도 효성과 우애가 뛰어나〈영남삼객(嶺南三客)〉으로 불리웠으며, 뒤에 영남 유리(嶺南儒林)의 총의(總意)로 3형제의 고결한 생애를 기리기 위하여 회연서원(檜淵書院)·향현사(鄕賢祠)에 향배(享配)하였다. 일찍이 한강(寒岡) 정 구(鄭 逑)는〈부귀한 집에 사위되기를 원하지 않고 오직 이씨(李氏) 문중에 장가들기를 원한다(不願富貴壻願入李氏門〉고 하여 광산 이씨 집안에 장가들었다는 일화가 유명하다.
임진왜란 때 노구(老軀)를 무릅쓰고 김 면(金沔)과 함께 창의(倡義)하여 전공을 세우고 진천 현감(鎭川縣監)을 지낸 후 형 홍량(弘量)과 함께〈낙강칠현(洛江七賢)〉으로 유림(儒林)의 숭앙(崇仰)을 받았던 홍우(弘宇)의 아들 서(서)는, 정 구(鄭 逑)의 문하에서 수학(修學)하여 특출한 재능을 인정받았으며, 스승의 명을 받아「오선생예설(五先生禮說)」을 편찬하였고, 1605년(선조 38) 사마시(司馬試)에 합격하였으나 광해군(光海君)이 즉위하여 난정이 계속되자 스승을 따라 벼슬의 뜻을 버리고 은거(隱居)하여 학문 연구에 전념하였다.
그후 거처(居處)를 승호(承湖 : 현 경북 달성군 논공면)에 옮기고 동호학당(東湖學堂)을 열어 스스로 호(號)를 야로(野老)라 칭하고 후학으르 기르는데 정성을 다하여 훌륭한 인재를 많이 배출했으며, 1650년(효종 원년)에 생(生)을 마치니 유림(儒林)의 발의(發議)로 덕요선생(德耀先生)이라 사시(私諡)를 짓고, 선조(先祖)가 모셔진 회연서원 향현사에 배향하였다.
그외 숙종(肅宗) 때 부령 부사(副寧府使)와 증산 현령(甑山縣令)을 거쳐 병마절제도위(兵馬節制都尉)를 역임한 두망(斗望)과 서산 현감(瑞山縣監) 태창(泰昌), 영해 부사(寧海府使) 징하(徵夏), 예조 좌랑(禮曹佐郞) 중빈(重彬) 등이 유명했고, 규일(奎一)은 철종(哲宗) 때 무과에 급제하고 이원 현감(利原縣監) 겸 북청진관 병마절제도위를 역임하여, 고종(高宗) 때 선전관(宣傳官)을 지내고 통정대부(通政大夫)에 가자(加資)된 필현(弼鉉)과 함께 명문(名門) 광산 이씨의 전통을 지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