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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이좀 길어유!!
시민단체로 등록한'둘레산길잇기' 고문님 이신 샤넹님의
학술발표 전문 입니다.
인문학에 관심 있으신 분들을 위하여 퍼왔습니다.
인문학의 길
충남대학교 불어불문학과 박 찬 인
1. 들어가면서
“너는 이 지구에 왜 왔는가?” “나는 왜 이 지구에 있는가?” 인문학의 근본적 질문이 출발하는 하나의 지점이 바로 여기다. 나는 누구인가? 나는 왜 여기 있는가? 정답은 당연히 없다. 그러니 각자 스스로 정답을 찾아나가야 한다. 하지만 그 답을 찾는 여정이 여간 어려운 게 아니다. 답 찾기가 어렵다고, 질문이 난해하다고 이런 질문과 답 찾기를 하지 않을 수는 없다. 왜냐하면 이러한 본질적인 질문에 대한 답의 모색이 없다면 우리 삶의 목적이나 의미, 가치는 설 자리가 없게 되기 때문이다. 이 고민이 없을 때 우리는 허무와 무의미의 나락으로 떨어진다.
인간 체세포 DNA의 이중나선구조를 제임스 왓슨과 프랜시스 크릭이 밝혀냈다고 해서, W. D. 빌 해밀턴이 진화론적 생물학에 입각하여 유전자지도를 밝혔다고 해서, 우리가 인간을 다 아는 것인가? 혹은 우리는 인간을 다 안다고 말할 수 있는 것인가? 인간이라는 종의 진화에 관한 설명이 아무리 과학적 설득력을 갖는다고 하더라도 여전히 “나는 누구이고 나는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의 답은 될 수가 없다. 반복하지만, 우리가 이런 정답도 없는 질문에 답해야 하는 이유는, 여기에 대한 나름의 답이 없으면 이 세상에 내가 존재하는 이유와 의미를 당당히 말할 수 없고, 내 존재의 정당성과 내 삶의 문법을 세울 수 없기 때문이다. 인간은 무엇보다 자기 존재의 이유를 생각하는 동물이며, 자기 삶의 의미, 가치, 목적을 확보하고자 하는 동물이다. 곧 이것은 인간을 인간이게 하는 가장 기본적인 조건이기도 하다.
인간은 자신의 뜻과 상관없이 태어나, 그저 살다가, 또다시 자기 뜻과 관계없이 죽는 존재인가? 진정 그런 것인가? 우연히 태어나 자기 의지와 다르게 죽는다 치더라도, 여전히 출생과 죽음 사이의 중간과정, ‘살다가’ 부분이 중요하게 남는다. 그렇다. “인간은 태어나서, 살다가, 죽는다.”라는 단순한 생물학적 전기를 거부하는 데서 인문학은 출발한다. 즉 우리의 출생은 우리의 선택사항도 결정사항도 아니지만, 그렇다고 삶에 대한 나의 책임, 당신의 책임, 우리의 책임이 면제되는 것은 아니다. 탄생 이후 우리 삶은 우리가 감당해야 할 사건이다. 여기에서 인간에 대한 인간의 책임이 나오고 인문학적 사유의 첫 번째 과제가 탄생한다. 인간이 잘나서가 아니라 인간이 자기 존재와 삶의 방식에 대해 지고 있는 책임을 생각하고 따지는 것이 인문학의 중요한 출발점이라는 말이다. 그러나 디지털 기기와 사물인터넷이 생산, 소비, 운송의 전 과정에 스며드는 4차 산업혁명 시대가 거론되는 지금, 인문학의 길이란 녹록하지 않아 보인다.
2. 인문학
오늘날의 인문학처럼 극단의 양면을 지니며 왜곡되어 평가되는 분야가 또 있을까. 인문학의 필요성은 시도 때도 없이 회자되고 인문학 강좌는 여기저기서 넘쳐난다. 이른바 인문학의 융성처럼 비친다. 그러나 내부를 조금만 들여다보면 인문학 전공자는 사회에서 입지가 좁아지고, 대학에서 인문학은 이상한 융복합으로 뒤틀리거나 사라지고 있으며, 학문으로서 인문학도 무용한 것으로 인식되고 있다. 적어도 한국사회에서는 그렇다.
본론의 논리적 전개를 위하여 우선 오늘 이야기의 범위를 명확히 해야겠다. 우리가 보통 인문학 하면, 학문으로서의 인문학, 혹은 강단 인문학을 떠올릴 수 있겠다. 학문 갈래로서 인문학은 서구 근대의 산물로서 이른바 문, 사, 철, 즉 문학, 사학, 철학을 중심으로 예술사, 서지학 등 근대 이후 학문 분과를 일컫는다. 그러나 한편으로 넓은 의미에서 말할 때 인문학은 인간에 관한 사유, 그 표현과 실천의 전체집합이기도 하다. 인간에 관한 사유나 그것의 표현 그리고 실천으로서 인문학은 동양이든 서양이든 오랜 역사를 지닌다. 사실, 인문학은 흔히 인간이 인간을 이해하고, 인간을 생각하고, 인간의 길을 모색해온 동서고금의 오랜 사유를 통틀어 말할 때가 많다. 이런 인문학은 어느 학자나 전문연구자만의 것이 아니다. 이런 인문학은 모두의 것이다. 오늘의 이 발표가 지향하며 ‘인문학의 길’을 모색하고자 하는 것은 바로 후자의 인문학이다.
강단 인문학처럼 학문으로서의 인문학을 연구하는 것과 인문․문화적 가치를 사유하고 실천하는 것으로서의 인문학에는 큰 차이가 있다. 강단인문학은 자기 전공 분야의 인문학 갈래를 연구하는 것이 주 과제이다. 거기에서는 ‘인간의 책임’을 생각하는 것이 인문학의 기본 정신이라는 관점을 꼭 가져야 할 필요가 없다. 그런 사고 없이도 강단 인문학은 가능하기 때문이다.
프랑스 계몽주의 철학자 볼테르는 생전에 스스로 마련한 묘비명이 있었다. 그것은, “친구를 사랑하고 적을 미워하며 죽노라”였다고 전해진다. 자신의 삶을 한마디로 요약한 것이었다. 사마천은 ‘사기(史記)’를 왜 쓰게 되었는가를 밝힌 글 ‘보임안서(報任安書)’에서, “사람은 누구나 한 번 죽지만 어떤 죽음은 태산보다 무겁고 어떤 죽음은 새털보다 가볍다.”라고 밝힌다. 사마천이 하고자 하는 말의 의미는 무엇이었을까. 죽음이 다르다는 것은 살아온 삶의 여정이 다르다는 것이다. 그러고 보면 죽음의 차이는 곧 삶의 차이다. 볼테르와 사마천 두 사람 다 ‘어떻게 사는 것이 문제인가?’에 천착한 언급이었다고 본다. 그러고 보면 인문학의 태생 자체가, 인간에 관한 사유와 실천으로서 인문학이 중시해야할 책임 문제와 연결되어 있다고 보아도 좋겠다. 프랑스의 인문학적 전통을 보면 더욱 그렇다.
3. 인문학이 걸어온 길 - 책임의 윤리학
거칠게 근대 인문학을 돌이켜 보자. 16세기 종교전쟁과 코페르니쿠스의 지동설은 천년 이상을 지배하던 신(神) 중심의 세계관을 붕괴시켰다. 이어지는 17세기에 근대 인문학의 삼대 선구자, 근대 인문학의 트로이카, 데카르트, 스피노자, 라이프니츠가 나타난다. 이때 데카르트의 유명한 명제, “나는 생각한다, 고로 존재한다. Cogito ergo sum.(Je pense donc je suis.)”가 등장한다. 데카르트에게 존재의 필요충분조건으로서 ‘생각한다’는 것은 무엇일까? 데카르트에게 생각한다는 것은 바로 회의하는 것, 의문을 갖는 것이었다. 무엇에 대한 의문인가. 바로 나, 너, 세계, 내 삶, 나의 가치, 나의 자리, 내 몸 자리 등에 관한 의문이고 회의이고 사유였던 것이다. 여기에서 근대 인문학을 내포하는 근대성이 나타나는데, 그것은 바로 “신이 세계의 주인이고 역사의 주인이다”라는 중세의 서사를 “세계의 주인은 나(인간)이다. 역사의 주인 또한 나(인간)이다”라는 근대 서사로 바꾸어 놓은 혁명이었다. 빛의 세기라는 18세기 계몽철학의 시대를 거치면서 몽테뉴, 볼테르, 몽테스키외, 디드로, 루소 등 백과전서파가 ‘나’라는 인간으로서 ‘개인’을 확고하게 자리매김 시킨다. 이제 개인으로서 나는 운명의 주체이고, 지식과 판단의 주체인 동시에 자유와 책임의 주체가 되었다. 이러한 ‘개인주의’는 중세부터 이어진 신 중심사회의 굴레에서 벗어나 사람이 자기 운명을 스스로 결정하고 변경할 수 있다는 원점이 되었다.
볼테르에서 에밀 졸라, 아나톨 프랑스, 앙드레 말로, 알베르 카뮈, 장 폴 사르트르 등을 관통하는 프랑스 사상가며 작가들은 한결같이 인문학의 책임 문제를 환기하곤 한다. 그것은 도정일이 말하는 “인문학에 안겨진 사회적 책임”이기도 하다. 그것은 인간에 대한 인간의 책임, 사회에 대한 인간의 책임, 역사에 대한 인간의 책임, 문명에 대한 인간의 책임에 다름 아니다. 궁극적으로 “나는 너에 대해 책임을 지는 존재다”라는 태도는, ‘나’라는 존재, ‘나’라는 주체가 사실은 타자에 대한 책임 속에서 만들어진다는 생각에서 연유한다. 주체라는 것이 발생하는 기원 지점이 ‘나’가 아니라 ‘타자에 대한 책임’인 것이다.
인간에 관한 사유와 실천으로서 인문학은 예술과 문화 등에 대한 무슨 고급 소양이나 교양 같은 것들을 스펙 쌓듯 쌓아가는 것을 능사로 하지 않는다. 인문학은 교양론도 아니고, 목걸이 같은 장식물도 아니다. 실용주의자들이 내모는 것처럼 무용한 백수의 사업도 아니다. 인간에, 사회에, 역사와 문명에 대한 책임의 문제를 부단히 사유하고 그 중요성을 사회에, 사람들에게 부단히 환기시키는 것이 인문학의 책임이다. 다양성, 다수성, 다원성이 존중받는 상생과 공존의 사회에서는 관용의 윤리학과 더불어 책임의 윤리학이 필수적이라 하겠다.
4. 인문학이 가는 길 - 상상력과 현실
인간은 숙명적으로 불안하다. 매 순간 무엇을 할까, 어떻게 살까를 판단하고 결정해야 하기 때문이다. 또한 결정과 선택에 성공의 보장도 없다. 다르게 살 수는 없는 것일까. 그렇지 않을 수도 있는 것 아닌가. 그 불확실성 때문에, 그러므로 더욱 불안하다. 그래서 쿤데라는 필연성과 우연성, 무거움과 가벼움 사이를 진동하는 인간존재의 변주곡을 테레사와 토마스라는 주인공을 통하여 그려냈다. 니체의 ‘영원회귀’가 가리키듯, 단 한번 밖에 없는 인생이, 그 일회성이 반복되는 게 인간 존재인데, 가볍게만 산다는 것은 정말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이라는 것이다. 그렇다면 어떠한 삶을 선택할 것인가. 허무하지 않은 삶, 보람있는 삶은 어디에서 찾을 수 있는가.
그러나 인간에게는 ‘성찰’이라는 특별한 능력이 있다. 성찰이란 뒤돌아보기이다. 잘 왔는지, 옆길로 새지는 않았는지 되돌아보는 것이다. 그런데 그렇게 되돌아보는 것은 미래를 내다보기 위해서이다. 그렇다. 인간의 성찰이란 뒤돌아보기(retrospection)이면서 내다보기(prospection)인 것이다. 이것은 인간의 탁월성이기도 한데, 인간은 지금 여기에 매여 있으면서도 그 운명을 넘어 다른 것을, 여기 ‘너머’의 것을, 지금 ‘너머’의 것을, 보는 특별한 능력을 갖고 있다. 지금을 넘어 과거와 미래를, 여기를 넘어 다른 곳, 다른 세계, 즉 ‘저기’를 보는 것이다. 아니 단순히 보기를 넘어 여기와 저기를 연결시킨다. 이 연결이 바로 인문학적 상상력이다. 심지어 아나톨 프랑스는 “안다는 것은 아무 것도 아니다, 상상하는 것, 이것이 모든 것이다.”라고 갈파했다.
바로 이 상상력, 인문학적 상상력의 발휘야말로 우리 인문학도와 인문학이 나아가야할 길이다. 지난 해 6월 29일, 한국연구재단 출범 7주년을 맞아 “제4차 산업혁명과 미래인재 양성 방안”이라는 주제로 정책토론회가 있었다. 기조강연자 김도연 포스텍 총장은 “국내 연구중심대학들은 ‘가치창출대학’으로 거듭나야한다”고 제시했다. 서판길 울산과학기술원 교수도 “창의적 기술 없이는 생존하기 어려운 4차 혁명 시대에 국가가 추구해야 할 가치는 새로운 가치를 만들어낼 인재를 육성하는 것”이라고 강조했다. 박형주 국가수리과학연구소 소장은 "알파고는 '한국판 스푸트니크'의 기회"라면서 "4차 혁명시대에 필요한 것은 시대의 흐름을 읽고 답을 찾을 수 있는 '생각의 힘'"이라고 역설했다. 김기봉 경기대 교수도 "인류가 앞으로 나아가야 할 방향은 알파고는 할 수 없는 상상력의 영역"이라고 지적하면서 "상상력의 산실은 인문학인 만큼, 인공지능이라는 판도라의 상자를 연 인류에게 남은 희망은 인문학"이라고 덧붙였다. 이 자리의 발표자 토론자 모두가 강조한 것은, “빅데이터, IoT(사물인터넷), 디지털 헬스, 자동운항, 전자화폐 등 4차 산업혁명 시대를 맞아 '인문학적 상상력'으로 위기를 기회로 삼자”는 것이었다.
다 좋은 말이다. 다 일리가 있는 말이다. 분명한 것은, 이날 토론의 최고 키워드는 ‘가치’와 ‘인문학적 상상력’이다. 그렇다면 우선, 여기에서 말하는 새로운 가치의 창출이란 무엇일까. 그것은 이른바 휴머니즘의 요체를 이루는 전통적 인문학의 가치만을 지칭하지는 않을 것이다. 돌아보면 현대의 세계는 엄청난 문명사적 업적에도 불구하고 수많은 문제들에 봉착해 있다. 빈부의 극심한 양극화, 자연파괴와 자원 고갈, 기후변화, 테러, 노령화, 정보나 지식의 조작과 왜곡, 시장경제 만능주의 등을 보면, 현대라는 ‘풍요의 시대’ 이면에는 ‘가치 결핍의 시대’가 숨어서 증식하고 있다. 특히 인간사회는 시장도 아니며 밀림도 아니라는 문제의식은 정당하다. 시장유일주의 원리, 경제제일주의 논리, 시장가치 우선주의가 사회의 지배적 가치이며 운영 원리가 될 때, 사회는 황폐해지고 그 가치전도에서 유발되는 폐해와 고통을 감내해야 할 것이다.
이 가치 결여의 시대를 관통하는 것이, 인문학적 관점에서 볼 때, 인간의 인간성 상실이고 가치의 전도이며 도덕과 윤리의 전복, 사회의 몰가치화이다. 우선은 인문학적 성찰과 해법의 모색을 통하여 전도된 가치를 되찾아야 한다. 시장, 경제성장, 일자리 창출, 산업발전을 포함하여 사회발전 전반을 이끄는 동인은 시장만능주의, 성장제일주의, 일자리 수치놀음, 산업우선주의가 아니라, 그 동인은 오히려 비시장적, 비산업적, 비경제적 가치들이기 때문이다. 이러한 인문학적 가치들이 죽어버릴 때 사회는 발전의 지속적 동력을 잃고 개발과 성장, 발전이 무엇을 위한 것이었는지 망각한다. “나는 어떤 사회에 살고자 하는가?” 혹은 “나는 어떤 사회를 후손에게 물려줄 것인가?”라는 질문과 답의 모색에서 올바른 가치 추구의 길은 열릴 수 있다. 사람에 대한 존중, 곧 인간의 품격과 생명의 존엄이라는 가치는 늘 인문적 가치의 핵심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동시에 “4차 산업혁명 시대에는 전통적인 인간에 대한 가치가 어느 정도 유의미할 것이가?”라는 질문과 해답의 모색도 필요할 것이다. 인공지능과 사물인터넷, 빅데이터 등은 인간의 정체성 문제를 이미 야기하고 있다. 어디까지가 인간이고 어디부터가 기계인지 혼돈되는 상황이 예상보다 빠르게 다가오고 있다. 인간의 정체성에 관한 문제가 대두될 때 인문학적 가치 또한 달라질 수밖에 없을 것이다. 심지어는 그리스 신화에서 이야기되는 ‘테세우스의 배’가 보여주는 패러독스가 재현될 수도 있다. 새로운 가치를 만들어낸다는 일이 말처럼 쉽지 않은 이유가 여기에 있다.
둘째, 인문학적 상상력을 어떻게 키울까. 우리의 현실을 돌아보자. 해방이후 우리나라는 70년 이상 전체주의 교육을 시행해 왔다. 자아와 개성을 소멸시키고 벽돌공장의 벽돌을 찍어내듯, 모든 학생에게 똑같은 걸 암기하게 하고, 암기력에 따라 줄을 세웠다. 생각하고, 회의하고, 번민할 시간을 주지 않았다. 생각을 옮겨 적는 ‘글쓰기’도 배제되었다. 더구나 서로 다른 생각을 가진 사람들이 대화와 토론을 통해서 견해를 주고받고, 다듬어 가면서 합의하고 도출하는 교육은 경험하질 못했다. 갈등극복 훈련이 없었다. 따라서 우리는 누구를 논리적으로 설득하지 못한다. 심지어 그토록 사랑하고, 그렇게 많은 이야기를 나눈 부부간에도 마찬가지일지 모른다.
그러나 불행하게도 인문학은 학생을 줄 세울 수 있는 과목이나 분야가 아니다. 어느 해인가, 수학능력시험문제처럼, 장지연의 ‘시일야방성대곡(是日也放聲大哭)’이 《황성신문》에 실렸느냐 《매일신보》에 실렸느냐 따위를 고르기 하는 것이 인문학이 아니라는 말이다. 인문학은 “왜 하필, 그 날, 왜, 무엇 때문에, 뭘, 통곡하는지, 알아보고 느껴보고 공감하는 일”이어야 한다. 장지연은 누구이며, 어떤 삶을 사는 사람이었기에 자기의 한스러운 울분을 신문에 실으며 나누고자 했던가를 생각하고 반추해야 하는 것이 인문학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대학수학능력시험에서조차 인문학의 본질 즉, 역사와 문학의 본질, 그리고 그것에 관한 사유를 망각한 이런 식의 문항이 출제되는 현실이 먼 과거가 아니라 우리 사회의, 지금 여기의, 현실이다.
박이문이 그립다. 그는 “‘인간다운 삶’의 실현은 물질적 만족 외에 지적․도덕적․예술적 등, 정신적인 가치가 실현되었을 때에만 가능하다. 이러한 가치를 우리는 ‘인문적’이라 부를 수 있으며, 그러한 가치를 담당하는 교육은 ‘인문교육’ 혹은 ‘인문학적 교육’이다. 인간에게 있어서 물질적, 즉 생물학적 가치는 인간적, 즉 정신적 가치에 비추어서만 비로소 그 의미를 발견한다. ‘인문교육’은 그 모든 교육의 근본이어야 한다.”라고 말했다.
5. 인문학이 나아갈 길 - 공감
1, 2, 3차의 산업혁명은 동원된 기술이 증기기관의 기계든, 전기든, 정보통신이든 인간의 풍요를 도와주었다. 인간과 기계의 이른바 ‘윈-윈’작업이었다. 쏟아지는 지식의 양이 나날이 늘었고, 분야별 지식을 세밀하게 습득하는 전문가, 즉 변호사, 의사, 회계사, 세무사 등이 필요했다. 그러나 인공지능과 빅데이타, 사물인터넷, 지능로봇, 3D 프린터, 전자화폐 등으로 쓰나미처럼 몰려오는 4차 산업혁명의 거센 파고 앞에서는 습득하여 암기한 지식 위주의 전문가는 존재가치를 잃게 된다. 쏟아지는 새로운 정보의 양을 감당할 수가 없을 뿐만 아니라 AI의 자체학습을 도저히 따라갈 수 없기 때문이다. 인공지능과 빅데이타는 인간을 대체하고 있다. 일자리는 줄 것이다. 그렇다면 어찌해야 하는가? 4차 산업혁명 시대에 살아남으려면 더 이상 지식 축적자가 아니라 빠르게 변화하는 패러다임에 능동적이고 적극적으로 대처하면서, 역시 빠르게 그 변화를 학습하고 해결 방안을 찾으려는 사람이어야 할 것이다. 그 변화 학습의 속도에서 효율성이 나올 것이다. 4차산업혁명 시대라 할지라도 문제가 발생하면 결국은 사람이 해결해야 하기 때문에 변화를 학습한 자만이 살아남게 된다. 아울러 인공지능이라는 새로운 기계 혹은 기술과 공생관계의 정신을 가져야 한다. 우리 사회는 여기저기서 4차산업혁명의 도래를 이야기는 하지만, “어, 새로운 쓰나미가 옵니다!”, “전대미문의 파고가 들이다친단 말입니다.~!” 하면서 그것에 대응하는 적절한 준비를 하고 있지 못한 것 같다.
케빈 켈리(Kevin Kelly)는 지난 해 레리 페이지(Larry Page)와의 대담에서 AI는 기본적으로 자본이기 때문에 점점 승자독식의 극대화로 나갈 것이라고 예측했다. 그리고 “이제 인간은 인공지능이나 빅데이터가 복제불가능한 것을 발전시켜 나가야 살아남는다.”라고 지적했다. 그가 제시한 대표적인 ‘복제불가능한’ 것은 ‘신뢰’였다. 모든 정보가 초정밀하게 주입되는 인공지능과 대결하려면 따뜻한 감성에 바탕을 둔 믿음의 인간이 필요하다는 것이다. 그 신뢰를 형성하기 위하여 필요한 것은 첫째 도덕적 권위인데, 그것은 인문학적 윤리의식, 책임의식으로 형성되는 것이다. 둘째 학습을 통해 해결방안을 찾을 수 있는 실력을 갖고 있어야 하며, 셋째, 타인과 소통할 줄 아는 공감능력을 가져야 한다고 말한다. 그는 공감능력을 키우기 위해서는 문학작품을 많이 읽는 것이 도움이 될 것이라고 조언한다. 독서를 통하여 인문학적 상상력과 공감능력을 키워 공감지수를 높이라는 것이다.
공감능력을 키우는 문학이란 무엇일까. 그것은 곧 이야기이고 서사이다. 인간은 말을 사용하여 이야기를 만들고 이야기로 소통하는데, 이 일은 인간을 인간이게 하는 창조적 능력이다. 그것은 또한 인간의 가장 오래된 일 가운데 하나다. 이때 “이야기란 인간이 자연세계에 덮어씌운 의미의 그물망이다. 그 그물망이 ‘상징 우주’다. 인간이 자신을 위해 창조해낸 그 상징 우주가 인간에게는 존재의 집이고 그의 고향이며 그의 터전이다. 그 고향을 떠나 인간은 존재하지 않고, 존재할 수 없다.” 여기에서 문학이 인간성장에 필수적일 수밖에 없는 이유가 등장한다. 문학작품을 읽으며 펼치는 상상 속에서 위대함의 감각이 싹트고 윤리적 인간이 길러진다. 시공간이 다른 주인공들을 통하여 이성과 감성을 조화시키는 균형이 배양된다. 공존의 정의와 타인의 고통을 흡수할 줄 아는, 공감능력을 가진, 아름다운 인간이 각종 서사의 독서를 통해 길러진다. 그 중요성 때문에 이야기의 교환은 몇 천 년 전부터 지금도 계속되고 있는 것이다. 상상력의 교환과 교환을 통한 상상력의 증식과 증폭이 계속되는 것이다. 그리고 더 중요한 것은 그러면서 동서고금에서 공감능력을 키웠고 지금도 키우고 있다는 사실이다.
창의력을 통해 창조로 나아갈 수 있는 인간의 상상력, 인문학적 상상력의 가치에 대하여 최인훈 선생의 말씀과 박이문 선생의 시를 옮기며 이 글을 마무리하고자 한다.
“환상 없는 삶은 인간의 삶이라 불릴 수 없다.
환상 있는 곳에 길이 있다.
현실이여, 비켜서라, 환상이 지나간다.
너는 현실에 지나지 않는다.”
악몽
나는 내가
깨어날 수 없는
꿈속에 사로잡혀 있다는 걸 알아
이 얼마나 엄청난 악몽인가
영원한!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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______, 『쓰잘데없이 고귀한 것들의 목록』, 문학동네, 2014
도정일, 최재천, 『대담』,휴머니스트, 20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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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이문, 『박이문 인문학전집 01』~ 『박이문 인문학전집 10』, 미다스북스, 2017
양해림, 『대학생을 위한 서양철학사』, 집문당, 2015
이윤기, 『그리스로마신화1』, 웅진닷컴, 2001
최원석, 『사람의 산 우리 산의 인문학』, 한길사, 2014
최인훈, 『바다의 편지』, 삼인, 20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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______, 『생각의 좌표』, 한겨레출판, 2009
르네 데카르트, 이현복 옮김,『방법서설』, 문예출판사, 199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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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news.chosun.com/site/data/html_dir/2016/11/18/2016111800464.html
http://www.hani.co.kr/arti/opinion/column/337642.html#csidx1b7a6fbf6c18160ba73efeb8e76d1fa
https://penselibre.org/spip.php?article471
http://dicocitations.lemonde.fr/citations/citation-130821.ph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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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아하...인문학의 길이라니....어렵쪄.....요즘 어쩌다 어른에 인문학에 대해서 재밌게 강의해 주시던데...역시..글로보기엔 어려운 학문이쪄...ㅋㅋ
ㅋㅋ 저도 잘모른 분야지만 잘되었다는 평을 들은글이랍니다 ㅎㅎ
시간내셔서 천천히 읽어보시쪄 ㅎㅎ