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논어(論語)』 「자로(子路)」편에서 공자님께서는 「이름을 바르게 하지 않으면 말이 순조롭지가 않고 말이 순조롭지 않으면 일이 이루어지지 않으며.......(중략) 이름을 붙이면 반드시 말할 수 있어야 하고 말을 한다면 반드시 행할 수 있어야 하며 군자는 그 말에 구차하게 여기는 바가 없을 뿐이다.」 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십이운성법을 포태법, 장생법이라고도 하며 어떤 이들은 불교의 십이인연법과 비슷한 개념이라고도 말하는데(이것은 분명히 잘못된 주장임), 「필야정명호(必也正名乎)」를 말씀하신 공자님의 가르침에 비추었을 때 과연 운성(運星)과 포태(胞胎) 그리고 장생(長生)이 각각 적절한 명칭인지 다시금 생각하면서 이 글에서는 표현의 편의상 ‘포태법’을 위주로 사용합니다.
1. 포태법의 단계별 개념
가) 포(胞)
‘胞’는 물체의 표면을 덮고 있는 얇은 조직을 뜻하는 막(膜; membrane) 또는 태아가 착상하여 앞으로 자라날 자궁(子宮; womb)입니다. 해부학적으로는 여성에게만 있으나 남성이 도를 닦아 일정한 수준에 다다르면 배꼽 주변에 무형의 공간이 자리 잡고 이곳에 내단(內丹)이 생깁니다. 여성수행자는 건강한 자궁의 생리적 기능을 멈추거나 철저하게 그 기능을 도외시할 수 있어야 도태(道胎)를 품는 또 다른 무형의 자궁을 갖추게 됩니다.
‘胞’를 ‘절(絶)’이라고도 말하는 까닭을 설명하기 위하여 앞에서 내단(內丹)을 언급하였습니다. 그냥 단순하게 건명과 곤명을 구별하는 것에 그치지 않고 어떤 이에게는 생명의 첫 터전을 뜻하는 ‘胞’일 것이고 다른 이에게는 먼저 ‘절(絶)’의 단계를 거쳐야 하는 ‘胞’이지요. 그 시간적 간극은 개인별, 사안별로 다릅니다. 열 두 단계의 처음에 해당하는 ‘胞’의 개념을 이렇게 이해하면 다른 구구절절한 설명에 머리 아파할 것 없습니다.
胞는 희망을 품고 있는 단계입니다. 어떤 이에게는 먼저 ‘끊어짐(絶)’의 고통이 오겠지요. 새로운 사업이나 삶을 설계하고자 하나 씨앗이 자궁에 들어가지 않았으므로 구체적인 형태는커녕 아직은 기(氣)가 무형의 상(象), 기미조차 이루지 못한 상태입니다. 그러므로 이 시기에는 무엇을 어떻게 해야 할지 선뜻 판단이 서지 않아서 이랬다저랬다 변화가 심하여 자칫 남들의 감언이설에 속아 넘어가기가 쉽습니다. 기신(己身)에 해당하는 世궁에 胞가 놓였는데 그 世궁의 환경(居, 受, 承)이 좋지 않으면 씨앗을 품을 수 없거나 어려운 자궁에 해당하므로 열매라고 하는 덕(德)을 누리기가 어렵습니다. 그래서 혈연뿐만 아니라 다른 이들과의 인연이 박(薄)하여, 『명심보감(明心寶鑑)』의 「순명(順命)」편에서 말하고 있는바 ‘모든 일에는 이미 분수가 정해져 있는데, 덧없는 인생이 공연히 스스로 바쁘기만 하다(萬事分已定 浮生空自忙)’의 말씀처럼 살아갑니다. 금전적으로 말하면 수입은 없는데 지출만 계속 되는 상황이지요.
나) 태(胎)
중국에서 가장 오래된 유의어(類義語) 사전 『이아(爾雅)』에 의하면 「‘태’는 ‘시’다(胎,始也)」 라고 해서 초(初),재(哉),수(首),기(基),조(肇),조(祖),원(元),숙(俶),낙(落),권여(権輿) 등과 같은 뜻이라고 하였고 『장자(莊子)』의 「지북유편(知北遊)」편에서는 구멍이 아홉 개인 것들은 태에서 생겨나고 여덟 개인 것들은 알에서 생겨난다고 했습니다(九竅者胎生, 八竅者卵生). 현대의 생물학에서는 인간의 경우 수정 후 첫 8주까지의 태아를 ‘embryo(胚芽; 배아)’라고 하지만 『설문해자(說文解字)』에서는 「胎,婦孕三月也」라 하고 『회남자(淮南子)』의 「정신(精神)」편에서는 「三月而胎」라고 해서 모두 임신 3개월을 가리키고 있습니다.
이제 막 씨앗을 품은 이 시기에는 계획했던 일을 추진하되 결코 무리하여 ‘낙태(落胎)’해서는 안 됩니다. 몇 번씩 다시 확인하고 힘을 갈무리하면서 행동할지라도 여전히 나가는 것만 늘어날 뿐 들어오는 것은 없습니다. 그러므로 이때엔 마치 태아에게 특별히 길할 것도, 흉할 것도 없는 것 그 자체만으로도 좋듯이, 매사에 부드러운 기운을 유지하면 됩니다.
世궁에 태(胎)가 놓였으면 마치 태아가 어미에게 절대적으로 의지하듯이 명주는 의뢰심, 의타심이 많을 것이고, 산모에게 가해지는 정신적, 육체적 충격에 태아가 낙태하는 것처럼 매사에 추진력이 약할 수밖에 없습니다. 추진력이 약하다는 것은 그만큼 자신감이 없는 것이어서 대인관계에서 신뢰도가 높지 않으며 혈연 역시 서로 믿지 못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형체를 지닌 것들이 형체가 없는 것에서 생겨나는(有倫生於无形; 장자) 것을 조화(造化)라고 합니다. 불교 『화엄경(華嚴經)』의 「십지품(十地品)」에서는 「여래의 대선도는 미묘해서 알기가 어렵도다(如來大仙道 微妙難可知)」라고 하여 불도가 마치 선도(仙道)인 듯이 말씀하셨지요. 그러나 이때의 ‘여래대선도’는 십지(十地)수행이 선(仙)의 이치와 같다는 뜻이고, 선(仙)의 이치라는 것은 무에서 유를 만들어 내는 조화(造化)를 가리키는 것이므로 곧 포(胞)하고 태(胎)하는 과정입니다. 아이를 밴 여성이 낙태하면 육체적, 정신적 충격이 상당할 것이고 수행자가 도태를 상실하면 그 업보가 말할 수 없을 만큼 지대합니다. 조화(造化)의 보람이 헛되지 않도록 삼가 조심해야 하는 때가 바로 십이운성에서의 포태의 시기입니다.
다) 양(養)
사람의 임신기간 약 280일은 소(牛)의 284일과 비슷합니다. 주역의 곤(坤)괘가 동물로서는 소를, 사람에게서는 배(腹)의 상(象)을 나타내므로 곤(坤)괘의 상과 효의 변화, 그리고 괘기(卦氣)와 괘덕(卦德)을 통해 포태법에서의 양(養)을 좀 더 뚜렷하게 이해할 수 있습니다. 물론 자궁 속 양수에 태아가 있는 모습인 수뢰둔(水雷屯)괘와 불룩한 산모의 배에 해당하는 지산겸(地山謙)괘, 그리고 보양(保養)과 태교(胎敎)를 뜻하는 산뢰이(山雷頤)괘 또한 십이운성에서의 ‘양(養)’의 때를 나타내고 있습니다.
구체적으로 어떻게 하는 것이 양(養)일까요? 『예기(禮記)』와 『대학(大學)』에서 「未有學養子而後嫁者也」 라고 하여 아이 기르는 것을 배우고 시집가는 사람은 여태껏 없었다는 말씀처럼 특별히 어려운 일이 아니며 다만 『맹자(孟子)』 「진심하(盡心下)」편의 「마음을 기르는 것은 욕심을 적게 하는 것보다 더 좋은 것은 없다(養心莫善於寡欲)」라는 말씀처럼 그 마음이 지나치지 않으면 됩니다. 물론 방심해서도 안 되므로 맹자께서 말씀하신, 언제나 잊지도 말고 조장하지도 말아야 하고(勿忘勿助)」, 자신에게 함부로 하거나 자신을 버리지(自暴自棄) 않아야 합니다.
불교 『능엄경』의 십주(十住) 수행에서는 도태(道胎)를 기르고 봉양하는 것에 대하여 말씀하였는바, 이 과정에는 이미 아이를 배어서 사람의 모습에 비추어 아무런 결함이 없으며 마치 용이 구슬을 기르고 닭이 알을 품는 것과 같은 방편구족주(方便具足住), 용모와 심상(心相)이 치우치거나 의지함이 없는 정심주(正心住), 덕(德; 어떤 결과를 얻을 수 있는 힘)을 갖춘 불퇴주(不退住) 그리고 비록 실체는 다 갖추었으나 아직은 완전하지 못해 동자라고 일컫는 동진주(童眞住)가 속해 있습니다. 수행자가 도태를 따뜻이 기르는 것이나 여성이 아이를 열 달 동안 지니며 보호하는 것이 십이포태법에서의 양(養)과 다를 수가 없지요. 소우주가 대우주이고 대천지가 소천지이니까요. 다만 그 쓰임새가 하늘과 땅, 인간에게 각각 원방각(圓方角)으로 나타나서 원은 인신사해(寅申巳亥), 방은 진술축미(辰戌丑未), 각은 자오묘유(子午卯酉)를 품고 삼합(三合)해서 하나의 오행이 되어 국(局)을 만들고 현상계를 순환하는 것이 십이운성이요 십이포태법입니다.
이제 곧 아이가 태어날 것을 기다리듯이 양(養)의 막바지에 이르면 하고자 하는 일이 마침내 그 체계가 서면서 기댓값이 높아집니다. 비록 힘을 들여 노력하는 것에 비하면 아직 결실이 미미하여 적자인생, 적자사업일지라도 꾸준히 성장하고 있으니 흉한 것은 아닙니다. 앞서 말했지만 이 시기에는 자신의 뜻과 관계없이 매사에 무리를 하지 않을 것이며 世궁에 양(養)이 놓이면 다른 집안에 양자(養子)로 들어가 대(代)를 잇기도 하므로 나를 낳아 주신 친부모님과의 인연이 깊지 않다고 해석합니다.
라) 생(生)
이 시기를 장생(長生)이라고도 하는바 십이장생법이라는 표현이 여기에서 비롯되었습니다. 아이가 태어나는 것만큼 집안에 더 경사로운 일이 있을까요. 어머니의 젖을 빠는, 얼굴 빨간 갓난 아이(赤子)는 냄새마저 향기로운 황금똥을 싸고, 아이가 있는 방은 마치 한낮처럼 밝습니다. 주역에서 그 상(象)을 찾으면 우레가 물속에서 나온 뇌수해(雷水解)괘와, 무언가를 덜어낸다는 뜻의 산택손(山澤損)괘가 대표적입니다. 서괘전의 순서로 볼 때 解괘는 40번째, 損괘는 41번째가 되는바, 주역 상경 30개의 괘가 천문과 지리를 논한 것에 비하여 하경은 인사(人事)에 관한 말씀이고, 하경 첫째 괘에 해당하는 택산함괘(31번째 괘)를 포함하여 10을 채우면 解괘가 된다는 것, 택산함괘를 제외하고 10을 채우면 損괘가 된다는 것의 함의(含意)는 실로 놀랍습니다.
뇌수해(雷水解)괘에서는 「서남이 이로우니 갈 곳이 없다(利西南하니 无所往)」 라고 하였는바 여기에서 ‘갈 곳이 없다’는 것은 이제 해결할 일이 없어서 딱히 가야할 곳이 없다는 뜻이고, 이어서 「갈 곳이 있으면 빨리 하면 길하다(有攸往이어든 夙하면 吉하리라)」라고 하셨으니 혹시라도 해결할 일이 생기면 일이 더 불거지기 전에 빨리 가서 화근을 제거하라는 말씀입니다. 포태법의 ‘生’을 괘사에서의 말씀을 갖고서 해석하면, 매우 길한 운성(運星)이지만 아직은 갓난아기에 불과하므로 조금이라도 흉한 조짐이 있으면 바로 해결해야 합니다. 어떤 것이 흉한 조짐일까요? 땅(坤) 또는 물(坎)을 하괘로 삼고 여덟 개의 괘를 상괘로 삼아 선천팔괘 순서로 올리면 각각 천지비, 택지취, 화지진, 뇌지예, 풍지관, 수지비, 산지박, 중지곤, 천수송, 택수곤, 화수미제, 뇌수해, 풍수환, 중수감, 산수몽, 지수사괘가 됩니다. 여기 열여섯 괘를 모두 설명할 수는 없지만 언뜻 보아도 양기(陽氣)가 거의 다 깎인 산지박, 송사를 뜻하는 천수송, 곤경에 처한 택수곤 등에서 근심거리를 찾을 수 있고 중수감에서 그 험한 상태를, 산수몽에서 아직은 몽매한 처지라는 것을 쉽게 알 수 있습니다. 또한 비록 새 생명의 탄생이 경이로운 일이지만 불가의 가르침처럼 중생의 삶 자체가 고해(苦海)인 것을 천지비괘와 풍수환괘가 알려줍니다. 그러므로 포태법상의 ‘生’에 처했을 때, 뇌수해와 산택손을 위주로 하고 나머지 흉한 조짐의 괘를 포함하여 괘상과 효상을 살펴, 잘못되거나 위험한 일을 발견하면 곧바로 회(悔)하여 흉을 피하고 길(吉)로 나아가야 합니다. 반면에 인색하게 머뭇거리면 아무리 좋은 ‘生’일지라도 마침내 길함은 사라지고 흉함으로 돌아섭니다.
추진하는 일을 갖고서 ‘生’을 말하면 아이가 태어났듯이 ‘흑자(黑字)’가 태어나서 드디어 손익분기점을 넘게 됩니다. 비단 영업하는 상인뿐만 아니라 인생의 모든 영역에서 길하므로 부(富)와 귀(貴)를 누리고 집안은 행복이 가득하지요.
‘여래의 대선도(大仙道)’처럼 한 치의 오차 없이 도수(度數)를 맞추고 철저한 계행(戒行)으로써 무언가를 만들어 내는 조화(造化)의 단계가 십이운성에서 포(胞)와 태(胎)라면, 양(養)과 생(生)은 아이를 밴 여성의 모성(母性)이 필요한 단계이며 더 나아가 중생에게 가피를 내리시는 불보살의 사무량심(四無量心)이 없으면 결코 하고자 하는 바의 실체를 이룰 수 없는 갈림길에 해당합니다. 어렵게 무(無)에서 유(有)를 창조하였음에도 그 有는 象에 불과하므로 양(養)과 생(生)에 와서야 구체적인 형체를 갖추어 세상에 드러납니다. 도태가 성숙하여 양신(陽神) 또는 의생신(意生身)이 수행자의 정수리, 니환(泥丸)을 통하여 몸 밖으로 나오기 전에 겪는 여섯 가지의 현상과 마경(魔境)을 범인(凡人)들은 상상조차 할 수 없습니다. 어머니의 몸에서 아이가 출생하는 것 역시 태아에게는 엄청난 고통의 과정이니, 십이운성에서의 생과 양은 이처럼 고진감래의 소산입니다. 다시금 말하지만 양(養)과 생(生)은 구체적인 형체(形體)를 갖추고 현상(現像)하는 것을 뜻합니다. 형체(形體)는 조화(造化)의 다음 단계이니 조화(造化)가 없으면 형체(形體)가 없고, 혹시라도 선법(仙法)의 창조력이 미미하면 불법(佛法) 여래장이 갖고 있는 수연지덕(隨緣之德)의 공행(功行)을 기대하지 말아야 합니다. 이런 뜻에서 포(胞)와 태(胎)에 처하면 선법(仙法)으로써 용사하고 양(養)과 생(生)에 놓이면 불법(佛法)으로써 용사합니다.
마) 욕(浴)
글자 그대로 몸을 씻는 것이니 ‘목욕(沐浴)’이라고도 합니다. 아이가 세상에 태어나 우는 것을 어떻게 이해할까요. 허파호흡을 위해 당연한 것이지만 생로병사(生老病死), 애별리고(愛別離苦), 원증회고(怨憎會苦), 구부득고(求不得苦), 오음성고(五陰盛苦)의 여덟 가지 삶의 고통에 맞닥뜨린 회한(悔恨)과 중생상(衆生相)이 빚어낸 소리이기도 합니다. 앞에서 말했던 『능엄경』의 십주(十住) 수행에서는 법왕자주(法王子住)에서 도태(道胎)를 벗고 몸 밖을 나온 그 어떤 존재에게 관정주(灌頂住)라는 수행단계가 기다리고 있습니다. 아직은 불사(佛事)를 온전히 맡길 수 없고 다만 성인(成人)이 된 것을 나타낸 것이라고 말씀 하셨으니 앞으로도 더 많은 수행을 필요로 합니다. 어머니에게서 갓 태어난 아이 역시 마찬가지로 몸을 씻으면서 세상에서의 첫 일을 경험합니다. 자세히 말할 수도 없고 해서도 안 되지만 관정주에서의 정수리 씻김이 호락호락한 과정이 아니듯이 갓 태어난 아이에게 첫 씻김은 분명코 당황스러운 일입니다.
중국 하(夏)나라의 월령(月令)인 『하소정(夏小正)』 에서는 시월이 되면 검은빛의 새가 ‘浴’을 하는데, 흑조는 까마귀이며, ‘욕’은 (이 새가) 오르내리는 것이라고 했습니다(十月黑鳥浴。黑鳥,烏也。浴謂乍上乍下也). 그러므로 십이포태법에서의 ‘浴’은 이런저런 복잡한 사정과 내용을 갖고서 순탄(順坦)치 못하거나 변화(變化)가 많은 처지에 해당합니다. 그리고 중국 선진(先秦) 시대에 지었다고 추정되는 지리서(地理書)이면서 신화(神話)를 모은 『산해경(山海經)』에서는 「음산에 탁한 浴水가 나온다(陰山,濁浴水出焉)」고 했으니, 포태법에서의 ‘浴’은 색정(色情)으로 흐르거나 도박과 사치를 좋아할 수 있다는 뜻도 갖고 있습니다. 더구나 비단 나 자신만의 문제에 그치지 않고 주변에 경쟁자가 많아 좌절과 실패를 반복하면서 많은 손해를 당하는 경우에 해당하는바, 世궁에 ‘浴’이 오면 목욕살로 인한 주색잡기에 조심해야 합니다. 다만 육친 가운데에서 관성궁이 힘을 갖고 있으면서 연살(도화살)과 ‘浴’이 그곳에 있으면 관직에 나아간다고 해석하니 길과 흉 어느 한 쪽으로 치우쳐 섣불리 판단할 수는 없겠지요.
바) 대(帶)
관대(冠帶)라고도 하는 이 시기는 관혼상제(冠婚喪祭)의 첫째 관문인 ‘관’이니 공식적으로 어른이 되었음을 알리는 성년례(成年禮)이고 ‘대’는 허리에 두르는 띠를 일컫는 말이므로 포태법에서의 ‘帶’는 마치 십대의 아이가 성년이 되기까지 어떠한 어려움이 있더라도 헤쳐 나가며 배우고 익히듯이 모든 일에 과감히 도전하며 자기주장이 강한 때에 해당합니다. 앞에서 살펴 본 ‘浴’이 사교성은 좋지만 유종의 미를 거두기 어려운 것을 뜻한 반면에 이곳 ‘帶’에서는 자존심이 강하여 자칫 대인관계에서 척을 지을 수 있지만 과감한 개혁정신으로 인해 각종 위기를 극복하고 다시 발전할 수 있는 단계입니다. 이 시기의 청년들이 육체에 비하여 정신이 미숙하여 부지런히 교양을 쌓아야 하듯이 십이운성에서의 ‘帶’가 놓인 궁의 육친은 자신의 성질을 잘 다스려야 합니다.
명리에서는 십이운성 각각에 살(殺)을 붙여 설명하고 있지만 기문둔갑에서는 그러한 신살이 대단한 독립적인 지위를 갖고 기문국에 영향을 미친다고 볼 수 없습니다. 오히려 ‘운성’이라는 명칭보다는 ‘포태법’이 구궁에 포국되는 다른 기문요소와 어울리는 표현입니다. 앞에서 말했지만 포와 태는 선법으로써, 양과 생은 불법으로써 각각의 궁에서 용사합니다. 이제 그 다음에 해당하는 욕(浴)과 대(帶)는 유법(儒法)을 갖고서 해당국에 용사한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용사(用事)라는 용(用)이 체(體)를 새로이 지으면 체는 또다시 새로운 용(用)을 일으켜 용사하는 것이 낙서구궁을 도도히 흐르는 기문둔갑의 운과 기(氣)입니다. 포(胞)에서 시작하여 대(帶)의 단계에서 일차적으로 마무리되기까지의 용은 무에서 유를 만드는 조화(造化)와, 그렇게 만들어진 조화의 상(象)을 갖고 모양을 갖춘 형체로서 키운 보양(保養)과, 세상에 출세하여 큰 뜻을 펼치게끔 교양과 덕, 그리고 예의범절을 배우는 공행(功行)이었습니다. 이러한 공행이 가능했던 것은 열 두 개의 운(運)이 도수에 따라 구궁을 순행, 역행하도록 텅 비워진 허무한 시공간이라는 체(體)가 있었기 때문이며, 그 시공간에서 털 끝 만큼의 움직임도 허용하지 않은 절대적 고요함(寂)이라는 체가 있었기 때문이고, 마침내 마치 하늘이 인간에서 명(命)을 부여하듯이 구궁에 도수를 매기는 체가 있었기 때문입니다. 기문둔갑에서의 포태법을 이렇게 접근할 때 우리는 구궁에 부설되는 각각의 운성이 어떻게 용사하고 어떤 후천적인 체를 짓고, 다시 어떻게 선천을 회복하는 지 파악할 수 있습니다. 단순히 명리의 한 영역 또는 술(術)의 방편이 아니라 역학과 도에 기초하면서 정법(正法)의 부름(唱)에 화답(和答)할 때 비로소 구멍 없는 피리와 줄 없는 비파를 울리며 구궁에서 흘러나오는 율려(律呂)의 창화(唱和)를 득음할 것입니다.
사) 관(官, 冠)
‘포태법’이라는 표현에 방점을 두면 이 시기를 冠이라 불러야 할 것 같고, 운(運)과 성(星)을 강조하면 官이 더 어울리는 명칭입니다. 또한 건록(建祿), 임관(臨官)이라고도 하므로 결국 장성해서 머리에 관(冠)을 쓴 성인(成人)이 사회에 진출하고(臨官) 결혼하여 재물을 취하는(建祿) 단계입니다. 어리석은 질문이지만 ‘生’과 비교했을 때 어느 것이 더 길할까요. 生과 冠이 각각 놓여있는 궁의 오행과 그 궁에 있는 지지의 오행, 팔괘 기타 기문둔갑의 다른 요소들을 함께 고려하지 않으면 결코 정답을 내릴 수 없습니다. 애당초 生이 없었으면 당연히 冠에 이르지 못했을 것이니 경사로운 상황으로 따지면 生의 길함이 더 클 것이요, 정신과 육체가 모두 성숙하여 독립적으로 사무를 처리한다는 측면에서는 冠이 더 길격(吉格)입니다. 그러므로 직업, 특히 공직에서는 官이, 재물에 대해서는 生이 더 길하다고 보면서도 官 또한 커다란 흑자를 내면서 사업이 번창하고, 生은 머지않아 커다란 업무를 담당할 것이 약속된 상태이기에 명주가 언제, 어디에서, 무엇을 하는가에 따라 운(運)과 기(氣)를 달리 합니다. 이러한 운기(運氣)는 각각의 운성이 놓여있는 구궁의 기문요소들로써 작괘(作卦)하여 그 괘상과 동효를 살피면 마치 멧돼지의 어금니로 쇠를 자르듯 명쾌하게 알 수 있습니다.
世궁에 生이 놓일 때와 官이 있을 때를 비교할까요? 生은 단순히 한 인간의 탄생만을 뜻하지 않습니다. 이미 ‘없음’에서 ‘있음’으로의 조화력을 갖추었고 온갖 방해와 시험을 치르며 형체를 온전하게 이루어 현상계에 몸을 드러냈으며, 비록 아직은 어리지만 궁극에는 큰일을 도모할 것이 약속된 왕자(王子)의 지위가 운성 生의 뜻입니다. 그러므로 명주는 이미 소년등과(少年登科) 상태입니다. 기신궁에 길한 괘문성장(卦門星將)이 함께 있으면 왕자의 앞날에 좋은 일만 있을 것이니 명문가의 여인에 상응하는 배필을 만나고 부모와 형제 사이는 화목할 것입니다. 生이 왕자(王子)인 반면에 冠 또는 官은 지혜와 덕을 함께 갖춘 신하입니다. 주역의 효로써 비교하면 生은 왕자신분이므로 아직 제5효에 이르지 못하였고 官은 비록 신하이지만 언제나 왕을 독대할 수 있는 중신(重臣), 즉 제4효에 해당합니다. 참고로 제5효는 뒤에 설명할 운성 旺입니다. 제4효에 위치한 운성 官은 왕자의 스승이 될 수도 있지만 위계(位階)는 여전히 아래에 속하지요. 만약 제4효가 초효와 부당하게 상응하는 관계이면 그의 목이 달아날 수도 있습니다. 초효가 음효이면 더욱 더 처신에 유의해야 하므로 포태법에서 官이 世궁에 있으면 특별히 여성관계에 잡음이 생겨서는 안 됩니다. 즉, 여성 또는 음습한 상황에 연루될 가능성이 높은 것이 운성 官입니다.
아) 왕(旺)
운성 왕(旺)은 주역 괘에서의 제5효에 해당하므로 ‘제왕(帝旺)’이라고도 합니다. 지위가 황제에 이르렀으니 그 누구보다 귀한 신분이고, 나라를 소유하였으니 재물 또한 마르지 않습니다. 이런 상황을 평범한 사람에게 적용하면 그의 인생에서 황금기에 해당합니다. 어떤 황금기일까요? 운성 生, 官과 비교하면 알 수 있습니다. 生은 왕자신분이므로 부(富)보다는 귀(貴)에 더 가깝고 官은 중신(重臣)이어서 귀한 신분이지만 왕, 왕자에 미치지 못하지요. 재물이 행여 왕자보다 많을지라도 그것을 온전히 드러내놓고 맘껏 쓰는 것이 쉽지는 않습니다. 까딱 잘못하면 목이 날아가니까요. 내게 있는 물건을 내 마음대로 사용, 수익, 처분할 수 없으면 얼마나 답답하겠습니까. 없는 것만 못하지요. 旺은 帝이므로 당연히 귀(貴)를 주관하지만 부(富)에 더 방점을 둡니다. 즉 운성 ‘生’에 비하여 귀(貴) 측면은 부족하지만 부(富)로써 말하면 훨씬 더 낫습니다. 旺의 귀함이 生의 귀함보다 못한 까닭은 旺이 지나치면 언제든지 항룡(亢龍)이 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임금의 아내가 결코 행복하지 않았음을 우리들이 알고 있듯이 世궁에 旺이 놓이면 그 명주의 아내에겐 불행입니다.
‘포태법’은 기문국 각각의 궁에 놓인 ‘순환 에너지’를 어떻게 사용하느냐가 관건입니다. 다시 한 번 더 정리하면, 포와 태에서는 쉼 없는 창조, 창작행위가 용사이며 양과 생에서는 따뜻한 보살핌이 용사(用事)이고, 욕과 대에서는 갖고 있는 물건이나 맡은 바의 사무가 본래의 쓰임새로 온전하게 기능을 발휘하여야 용사라고 할 수 있습니다. 冠과 旺에서는 이전의 모든 용법(用法)을 써서 용사합니다. 그러나 이른바 식신(識神)이 용사해선 안 되며 혜(慧)를 갖춘 원신(元神)이어야 대사(大事)가 성공합니다. 이에 『장자(莊子)』 「양생주(養生主)」에 나오는 ‘포정(庖丁)’의 말을 소개합니다. ‘포정’이라는 사람은 소를 잡는 백정입니다.
始臣之解牛之時 所見无非牛者
제가 소를 해체하는 일을 처음으로 하였을 때에는 보이는 것은 죄다 소였습니다.
三年之後 未嘗見全牛也
(그런데) 3년이 지나도록 일찍이 소를 온전하게 본 적이 없었습니다.
方今之時, 臣以神遇, 而不以目視
바야흐로 이제 저는 신(神)으로써 (소를) 대할 뿐, 눈으로써 (소를) 바라보지 않습니다.
官知止而神欲行
감각기관에서의 지각이 멈추고 신(神)이 원하는 대로 움직입니다.
依乎天理, 批大郤, 導大窾, 因其固然
자연의 이치에 의거하여 (뼈와 살 사이의) 큰 틈으로 (칼을) 밀어 넣고 큰 구멍으로 (칼을) 이끌어 그것(= 소)의 본래 그러한 모습에 따릅니다.
자) 쇠(衰), 병(病), 사(死), 장(葬)
나머지 네 개의 운성을 함께 설명하는 까닭은 혜(慧)를 증득한 사람이라면 비록 이러한 시기가 도래하여도 전혀 영향을 받지 않기 때문입니다. 믿기 어렵겠지만 이와 같은 혜(慧)가 불교의 유식학(唯識學)에서 말하고 있는 전식득지(轉識得智)입니다. 앞서 ‘포정’의 말에서 보았듯이 알음알이가 사라져 온전히 원신이 움직이는 것이 바로 ‘하는바가 없음에도 하지 않음이 없다(無爲而無不爲)’라는 경지이며, 인연에 따라 그 본래의 덕을 행하는(隨緣之德) ‘여래장’이요, 의상대사의 법성게에서 말한 ‘불수자성수연성(不守自性隨然成)’입니다. 하나 안에 일체가 있고(一中一切多卽一) 일체 안에 하나가 있으니(一卽一切多卽一) 쇠병사장(衰病死葬)을 거치며 분단(分段)되어 윤회하는 일이 없습니다. 물론 보통의 사람이야 이렇게 용사하지는 못하고 오히려 스스로 번뇌와 망상을 짓고, 끝없이 유위(有爲)하고 유작(有作)합니다. 그러면 결국 시들고 병들어 죽어서 땅에 묻힐 수밖에요.
평범한 사람으로서 기력이 쇠하면 무엇을 새로이 추진하겠습니까. 그러나 크게 사고 칠 여력도 없으니 운성이 쇠(衰)에 해당하면 비록 발전은 없을지라도 그저 평범하게 안정은 유지할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世궁에 衰가 놓이면 차분한 성격을 갖고서 전문직에 종사하고 남성, 여성을 불문하고 노련한 생각에 실수를 거의 하지 않는다고 해석합니다.
늙어서의 병(病)은 젊을 때의 병과 본질적으로 다릅니다. 나이가 들수록 몸에 있는 오행의 기운이 쇠잔할 것이지만 그 가운데에서도 특히 수(水)가 많이 부족하여 병을 부릅니다. 물을 뜻하는 감(坎)괘의 상(象)과 덕(德)으로 볼 때, 끊어지지 않는 물처럼 끊어지지 않는 망상으로 뜬구름 잡는 시기가 바로 운성 병(病)에 해당합니다. 신장기능이 떨어지고 귀가 어두운 것이 모두 감괘의 영향이고 매사에 신경질적으로 반응하는 것 또한 물로 상징되는 애탐(愛貪)으로 인한 것입니다. 世궁에 운성 병(病)이 왔으면 글자 그대로 평생 병치레하겠지요. 특히 정신질환이 염려됩니다. 또한 재산을 모으기도 어렵고 설사 어떻게 하여 모은 재산이라도 늘 밖으로 흘러 새버리는 물처럼 분수를 잃고 재산을 탕진할 것이고, 수화풍(水火風) 삼재가 들어올 것이니 일체의 욕심을 버려야 화액을 조금이나마 피할 수 있습니다.
죽음이라는 것, 이것을 대수롭지 않게 여겨야 합니다. 냄새나는 부대에 불과한 육신이니까요. 그러나 운성으로서의 사(死)가 世궁에 놓이면 세상의 인연이 사(死)인 것이니 부모, 형제, 아내와의 인연이 없다고 봐도 지나치지 않습니다. 재산 또한 모두 흩어집니다. 그리고 운성 사(死)에서의 질병은 주로 육체적인 측면이라는 점에서 운성 병(病)에서의 질환과 다릅니다.
운성 장(葬)은 묘(墓), 고(庫), 장(藏)이라고도 합니다. 죽어서 땅 속에 묻히는 것이니 오랜 기간의 휴식이 필요한 때입니다. 땅 속의 넋이 무엇을 할 수 있겠습니까. 그러므로 世궁에 장(葬)이 머물면 가진 것 없는 삶을 살 수밖에요. 당연히 소박하겠지요. 낭비할 것도 없을 것이고 오로지 훗날을 기약하며 쉼 없는 노력만 필요합니다. 앞서 운성 병(病)에서 들어 온 삼재가 바로 이곳에서 나가지만 묘소가 허물어지거나 땅 속에 나무뿌리가 엉키거나 물이 찰 수 있듯이 장(葬)이 들어 온 궁 역시 수화풍의 영향에서 완전히 벗어났다고 말할 수는 없습니다.
2. 십이운성의 포국
십이운성을 기문국에 포국한다는 것은 世가 각각의 궁에서 어떠한 상황인지를 나타내는 과정입니다. 그러므로 世궁에 있는 지반수를 기준으로 하여 명주의 출생을 양둔과 음둔으로 나누어, 시계방향으로 중궁을 제외한 여덟 개의 궁에 포국합니다. 그런데 양둔과 음둔으로 나누어 포국하는 방법에 대하여 기문학계에서는 학설이 일치하지 않습니다.
십이운성을 포국할 때 양국이면 수절어사(水絶於巳)요, 음국이면 수절어오(水絶於午)요....... 식으로 암기할 필요가 없습니다. 그 까닭은 앞에서 십이포태법에서의 양(養)을 설명할 때 이미 말했듯이 십이포태법은 하늘과 땅 그리고 사람이 하나가 되어 낙서구궁이라는 현상계를 순환하는 모습을 표현한 것이며, 이때 하나가 된다는 것은 원(圓)에 해당하는 하늘의 인신사해(寅申巳亥)와 방(方)에 해당하는 땅의 진술축미(辰戌丑未)와 각(角)에 해당하는 사람의 자오묘유(子午卯酉)가 서로 합하여(三合) 새로운 오행의 국(局)을 만드는 과정을 뜻합니다. 소허공과 대허공이 만나 진공(眞空) 속에서 묘유(妙有)가 발현되는 모습이지요. 이제, 모두 알고 계실 삼합오행을 정리하면 아래와 같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