졸라 (프랑스 소설가·문학평론가)
[Zola, Emile-Edouard-Charles-Antoine, 에밀 졸라]
루공마카르, 자연주의, 나나, 제르미날, 나는고발한다, 클로드의고백, 세도시, 뤼카스, 제2제정, 걸작, 대지, 테레즈라캥, 4복음서, 프랑스소설가·문학평론가, 드레퓌스사건, 프랑스의소설가, 이탈리아계프랑스인, 1902년죽음, 1840년태어남
1840. 4. 2 프랑스 파리~1902. 9. 28 파리.
프랑스의 소설가·비평가.
졸라 /졸라, Edouard Manet가 1868년에 ...
자연주의 문학운동의 창시자이다. 〈제2제정 시대 어느 집안의 자연적·사회적 역사〉라는 부제가 붙은, 20권의 연작소설로 이루어진 그의 〈루공 마카르 Rougon-Macquart〉 총서에는 고급 창녀의 인생을 다룬 〈나나 Nana〉(1880)와 광산촌 노동자의 비참한 생활상을 폭로한 〈제르미날 Germinal〉(1885)이 수록되어 있다. 그는 드레퓌스 사건 때 유명한 평론 〈나는 고발한다 J'accuse〉를 발표하여 알프레드 드레퓌스를 옹호한 것으로도 유명하다.
초기생애
졸라는 이탈리아인 아버지 프란체스코 졸라와 프랑스인 어머니 에밀리 오베르 사이에서 외아들로 태어났다(1862년 프랑스 시민으로 귀화함). 그의 아버지는 대대로 성직자와 군인을 배출한 베네치아의 한 가문 출신으로, 장차 공병장교가 되겠다는 희망을 품고 이탈리아 포병대에서 복무했지만, 나폴레옹 1세가 몰락한 후 오스트리아 정권의 압제를 더이상 견딜 수 없게 되자 조국을 떠나 프랑스에 정착하여 토목기사로 일하기 시작했다. 그는 상당한 정력과 통찰력을 가진 사람이었다. 아돌프 티에르 총리의 알선으로 프랑스 남부의 엑상프로방스(에밀 졸라의 소설에 나오는 '플라상')까지 물을 끌어들이기 위한 운하건설공사를 맡는 행운을 잡게 되어 일가족은 1842년에 엑상프로방스로 이사했으나, 5년 뒤에 그는 갑자기 세상을 떠났다. 아버지의 갑작스러운 죽음으로 졸라와 그의 어머니는 어려운 상황에 놓이게 되었다. 미망인이 된 에밀리 졸라는 남편한테 물려받은 운하 이권을 관리하기 위해 1857년 파리로 돌아갔고, 그의 아들도 이듬해 파리로 가서 어머니와 만났다. 그는 생루이 고등학교에서 학업을 마쳤는데, 몇몇 뛰어난 작가들과 마찬가지로 1859년 대학입학자격시험에서 낙방했다. 그후 2년 동안 그는 일자리를 얻지 못한 채 궁핍하게 지냈다. 이 미래의 소설가가 단벌 바지를 전당포에 맡기는 바람에 온종일 이불을 뒤집어쓰고 침대에서 지냈다는 이야기, 다락방 창문으로 날아든 참새를 잡아 먹고 살았다는 이야기 등은 과장된 것이지만, 이 2년은 어려운 시기였다. 그러나 이 시기는 가난한 사람들의 생활을 몸소 체험할 수 있는 기회였으며 이 체험은 그가 나중에 소설가로 입신하는 데 크게 도움이 되었다. 그는 마침내 운송회사의 사무원 자리를 얻었지만, 이 일은 전혀 마음에 들지 않았다. 그의 형편이 나아지기 시작한 것은 1862년 3월에 루이 크리스토프 프랑수아 아셰트가 경영하는 출판사 영업부로 직장을 옮기면서부터였다.
졸라는 다른 많은 소설가들과 마찬가지로 시에서 먼저 자신의 글솜씨를 시험했다. 그는 인간의 진화와 사랑에 관한 2편의 서사시를 썼는데, 이것은 나중에 그의 소설이 취하게 될 형식을 예고해주는 것이었다. 그가 아셰트에게 2번째 서사시를 보여주자, 아셰트는 출판을 거절했지만 시보다는 단편소설이 더 잘 팔린다고 충고하면서 급료를 2배로 올려주었다. 졸라는 그의 충고를 받아들였다. 그가 처음으로 세상에 내놓은 책은 1864년에 출판된 〈니농에게 주는 이야기 Contes à Ninon〉라는 단편집이었다. 이 책에 이어 1865년에는 잔인하고 지저분한 자전적 장편소설 〈클로드의 고백 La Confession de Claude〉이 나왔는데, 이 작품은 경찰의 주목을 받았다. 경찰은 법적 절차를 밟지는 않았지만, 아셰트가 졸라에게 문학을 포기하든가 직장을 그만두든가 양자택일할 것을 요구했다고 한다. 졸라는 그때 이미 자유기고가로 활동하여 봉급 외의 수입을 얻고 있었기 때문에, 1866년 1월에 출판사를 그만두었다.
소설가로서 거둔 성공
그가 자신의 과학적 이론을 처음으로 실천에 옮긴 소름끼치는 장편소설 〈테레즈 라캥 Thérèse Raquin〉은 1867년에 나왔고, 뒤이어 1868년에는 역시 과학적 소설을 실험한 〈마들렌 페라 Madeleine Férat〉가 나왔다. 1870년 5월 31일에 졸라는 가브리엘 엘레오노르 알렉산드린 멜레와 결혼했다. 어머니와 아내를 부양해야 했기 때문에 프랑스-프로이센 전쟁이 일어났을 때 징집을 면제받았고, 전쟁이 끝날 때까지 파리를 떠나 있었다. 또한 1870년에 졸라는 야심만만한 계획의 일부인 장편소설 2편을 사실상 완성했다. 그는 이 2편을 쓰기 시작하기 전에 이미 〈루공 마카르〉 총서 전체를 구상해놓았다고 주장했지만, 이 주장은 정확하지 않다. 원래는 10권의 소설을 쓸 계획이었으며, 쓰는 동안 그 수가 20권으로 늘어났던 것이다. 총서의 제1권인 〈루공 집안의 운명 La Fortune des Rougon〉은 1871년에 출판되었고, 그후 5년 동안 5권이 더 나왔다. 이 6편의 소설은 물의를 일으키지 않고 그런 대로 잘 팔렸지만, 1877년에 알코올 중독을 연구한 〈목로주점 L'Assommoir〉이 나오자 당장 베스트셀러 작가 대열에 올라섰고 프랑스에서 가장 유명한 작가가 되었다. 이때부터 그의 성공은 보장되었고, 그후에 나온 소설 가운데 몇 편은 〈목로주점〉보다 많이 팔렸다. 그가 나머지 13편을 완성하는 데에는 다시 16년의 세월이 걸렸다. 이 소설들에 뒤이어 3권으로 된 〈세 도시 Les Trois Villes〉 연작과 4권으로 된 〈4복음서 Les Quatre Éangiles〉 연작이 나왔다.
작가로서 졸라는 여러 가지 점에서 시대의 전형적인 산물이었다. 이것은 그가 19세기 후반 프랑스에서 유행한 철학인 과학적 결정론을 무비판적으로 받아들이고 과학을 쉽사리 믿은 데에서 가장 뚜렷이 드러난다. 그는 자연주의가 프랑스의 생활이 낳은 프랑스 고유의 것이라고 주장하면서, 자연주의의 창시자로 18세기 작가인 드니 디드로와 16세기 수필가인 미셸 드 몽테뉴를 들었다. 졸라에게 좀더 직접적인 영향을 미친 사람들도 있었다. 19세기 프랑스의 철학자인 이폴리트 텐은 유전과 환경에 대한 견해로 졸라에게 영향을 미쳤고, 19세기의 잊혀진 과학자 프로스페르 뤼카스는 유전에 대한 논문의 저자로서 졸라의 〈루공 마카르〉 총서에 나오는 파스칼 루공 박사라는 인물의 모델이 된 것으로 여겨진다. 졸라는 자신의 방법론이 주로 19세기 프랑스의 생리학자인 클로드 베르나르의 〈실험 의학 입문 Introduction à l'étude de la médecine expérimentale〉(1865)에 바탕을 두었다고 주장했지만, 사실 그는 1878년까지 이 책을 읽지도 않았다. 그는 〈실험소설론 Le Roman expérimental〉(1880)에서 소설가는 상상 속에서 창조해낸 등장인물에 대해 실험이나 임상실험과 같은 일을 할 수 있으며, 이것은 불행과 범죄의 근원인 인간의 허약함과 사악함에 대해 귀중한 실제적 정보를 제공해준다고 진지하게 주장했다. 그는 유전이 인간의 본성을 결정한다고 믿었다. 허약함과 사악함은 한 사람의 신체조직이 갖고 있는 '기질적 기능장애'의 결과이며, 이 장애는 그의 모든 자손에게 어김없이 유전된다. 그가 창조한 파스칼 루공 박사처럼 가족들 가운데 누군가가 그 유전병을 모면했다 해도, 그것은 요행일 뿐이다. 일단 이것을 이해하면 의약과 교육의 공동노력을 통해 유전적인 허약함을 근절할 수 있고, 따라서 인간의 본성은 완전해질 수 있다고 그는 생각했다.
어떤 점에서 졸라의 〈루공 마카르〉 총서는 나폴레옹 3세를 왕좌에 앉힌 쿠데타부터 스당 전투(1870. 9. 1)와 그 전투에서 패배한 직후에 이르기까지 프랑스인의 생활을 기록한 보고서이다. 졸라는 총서에 결속성을 부여하기 위해 두 가족(난폭한 루공 일가와 허약한 마카르 일가)을 이용했다. 그 과정에서 그는 제2제정 시대의 주요한 측면들을 모두 연구했다. 졸라는 제2제정을 이용하여 그가 '소우주'라고 일컫는 것을 창조했다. 그의 목적은 죄악, 특히 가톨릭에서 말하는 7가지 대죄에 빠져 있는 타락한 인간성을 보여주는 것이었다. 제2제정을 진화의 한 단계에 있는 인간 조건을 상징하는 표상으로 다룬 이 총서는 정교한 상징체계에 의존해 있으며, 주요한 그리스도교 교리들이 자연주의 용어로 바뀌어 있다. '기질적 기능장애'란 원죄에 해당하는 자연주의 용어이며, 두 가족의 조상인 탕트 디드는 현대판 이브이고, 죄는 금단의 사과를 먹음으로써 이 세계에 들어오는 것이 아니라 금지된 술잔에 담긴 술을 마심으로써, 또는 알코올 중독을 통하여 이 세계에 들어온다. '구원'은 구세주인 파스칼 루공 박사와 그의 질녀 사이의 '자유로운 결합'(이것은 졸라가 세탁부 잔 로즈로와 가진 밀통과 이 밀통이 불러일으킨 희망을 암시함)에서 태어난 아이의 형태로 오게 된다. 그러므로 그가 쓴 3편의 연작이 인간 역사의 3단계(과거·현재·미래)를 상징한다는 사실을 깨닫는 것은 매우 중요하다. 졸라가 미처 완성하지 못한 미래의 연작 〈4복음서〉에서 과학의 유익한 영향을 보여주려고 애썼을 때, 그의 영감이 거의 완전히 실패한 것은 의미심장한 일이다.
논객
졸라는 평생 동안 줄곧 논쟁을 벌인 인물이었다. 그는 일반 대중에게 혐오의 대상이었던 젊은 인상파 화가들을 열렬히 찬양하고 지지했다. 1867년에 그는 화가 에두아르 마네의 비평적 전기를 발표하여 당시 화가의 생활이 '다른 사람들이 상점에서 후추를 팔 듯 화실에서 그림을 그리는 평화로운 부르주아의 생활'이라고 주장함으로써 대중과 융화하려고 애썼다. 어릴 적 친구인 폴 세잔과의 관계는 그리 좋지 못했다. 1886년 이 우정은 갑자기 끝났는데, 졸라의 〈걸작 L'Oeuvre〉에 나오는 비극적 주인공 클로드 랑티에를 세잔이 다소 오해하여 자신을 풍자한 인물이라고 여겼기 때문이다. 졸라는 문학 논쟁을 계속하기 위해 최선을 다했다. 그것은 그가 원래 논쟁을 즐겼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논쟁이 그의 책을 선전하는 훌륭한 판촉 수단이라는 것을 타고난 날카로운 감각으로 깨달았기 때문이기도 하다. 젊은시절에 그는 자신의 자연주의 이론을 선전하는 수단으로 문학 잡지를 이용했다. 그의 작품이 발표될 때마다 보수적인 대중은 외설문학이라고 비난했다. 1887년에는 좀더 심각한 공격이 그에게 퍼부어졌다. 그의 작품 가운데 가장 잔인하고 노골적인 소설 가운데 하나인 〈대지 La Terre〉가 출판되자, 그보다 젊은 세대에 속하는 5명의 작가들은 〈피가로 Le Figaro〉지에 〈대지에 반대하는 5인의 선언문〉이라는 제목의 글을 실어 그를 맹렬히 공격했다. 1888년은 다른 종류의 격변이 일어난 해였다. 이해에 졸라는 그보다 30세나 어린 잔 로즈로와 내연의 관계를 맺었다. 졸라의 큰 슬픔 가운데 하나는 아내가 아이를 낳지 못한다는 것이었다. 그의 정부는 1889년에 딸을 낳았고, 1891년에는 아들을 낳았다. 졸라의 아내는 처음에는 몹시 괴로워했지만 결국 그러한 상황을 받아들였고, 남편이 죽은 뒤에는 아이들을 법적으로 인정했다. 졸라는 이 밀통에서 남자로서는 지속적인 행복을 얻었지만, 소설가로서는 종말을 맞았다. 로즈로와 관계를 맺은 뒤부터 그의 작품은 활력을 잃기 시작했던 것이다.
한 유대계 프랑스인 육군 장교가 반역 혐의로 재판을 받은 이른바 '드레퓌스 사건'은 그후 12년에 걸쳐 당시의 정치사·사회사에 깊은 흔적을 남긴 논쟁을 일으켰다. 졸라가 이 사건에 개입한 것은 그의 생애에서 가장 유명한 대목이다. 재판의 초기 단계에서 그는 이미 드레퓌스가 결백하다는 올바른 판단을 내렸다. 1898년 1월 13일에 그는 〈여명 L'Aurore〉이라는 신문에 '나는 고발한다'라는 문장으로 시작하는 공개장 형식의 글을 발표하여 프랑스군 참모본부를 맹렬히 비난했다. 그는 명예훼손죄로 기소되어 유죄판결을 받았으나 항소했고, 4월 2일에 프랑스 최고재판소는 그에 대한 유죄판결을 기각했다. 7월 18일 베르사유에서 재심이 열렸지만, 졸라는 평결을 기다리지 않고 변호사와 친구들의 충고에 따라 영국으로 도망쳤다. 졸라는 11개월 동안 영국에 머물면서, 헨리 비즈텔리의 보살핌을 받으며 〈4복음서〉의 일부인 〈풍요 Fécondité〉·(1899)를 썼다. 헨리 비즈텔리는 졸라의 소설들을 영어로 번역했다는 이유로 1889년 투옥된 적이 있는 사람이었다. 그는 드레퓌스 재판이 재개될 예정이었고 원래의 평결이 뒤집힐 가능성도 있다는 소식을 듣고, 이듬해 6월 프랑스로 귀국했다. 1902년 9월 28일 졸라 부부는 여느 때처럼 센 강변 메당에 있는 별장에서 여름을 지내고 파리로 돌아왔다. 그날 밤 그들은 침실 창문을 닫은 채 난로를 피우고 잠이 들었다. 난로 굴뚝에 결함이 있었기 때문인지 아니면 굴뚝을 청소하지 않았기 때문인지는 모르지만, 밤 사이 일산화탄소가 그들 부부를 덮쳤다(정적들에 의한 '사고'를 위장한 암살일지 모른다고 여기는 사람도 있었지만, 이 의혹은 끝내 입증되지 않았음). 구조대가 도착했을 때 졸라는 이미 죽어 있었지만, 그의 아내는 며칠 뒤에 회복되었다. 그의 장례는 국장으로 거행되었고, 그의 유해는 프랑스 위인들의 안식처인 팡테옹에 안치되었다. 그는 19번이나 아카데미 프랑세즈에 입후보했지만, 외설 작가라는 평판 때문에 끝내 회원이 되지 못했다.
평가와 사후의 명성
졸라는 제2제정에 대해 노골적인 적개심을 보였고, 이것이 비평가들로 하여금 그의 좌익 성향을 강조하도록 조장했다. 오늘날에도 일부에서는 그를 정치적 의미에서 '혁명적' 소설가로 여기고 있다. 이에 자극을 받은 한 비평가는 졸라의 정치적 견해가 실제로는 온건 사회주의를 지향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그동안 지나치게 많은 주목을 받아온 반면 그가 창조한 상징과 신화의 사용은 지나치게 무시되어왔다고 단언했다. 사실 졸라의 소설들이 기록 문학의 수준에만 머물러 있고 주로 정치적 선전이라고 생각하는 것은 잘못일 것이다. 겉으로 보기에 과학적 결정론은 상상력이 풍부한 작가에게 가장 풍부한 영감을 주는 철학이 아니다. 그러나 과학적 결정론이 가진 한계에도 불구하고, 세상 만물은 과학적으로 결정되며 인간은 견고한 세계 속에서 미래에 대한 높은 희망을 품고 움직이고 있다는 졸라의 믿음은 그에게 방대한 작업을 완수할 힘을 주는 주관적 효과를 갖고 있었던 것이 분명하다. 그러나 그에게 풍부한 영감을 준 가장 효과적인 원천은 과학 그 자체만은 아니었다. 오랫동안 비평가들이 졸라의 '음울한 시'라고 부른 것은 18세기의 계몽철학과 19세기초의 낭만주의까지 거슬러 올라가는 철학이 낳은 복합적 산물이었다. 결국 졸라를 유럽에서 가장 위대한 소설가 중 한 사람으로 만든 것은 그의 시적 환상 때문이다. 그의 대표적인 작품들에 통렬하고도 환상적인 성격을 부여하는 것은 겉보기에만 번드레한 제국이 아니라 그보다는 서서히 파괴되어 불꽃과 연기와 재가 되는 불운한 세계에 대한 묘사라고 할 수 있다.
프랑스 문학가 에밀 졸라의 생애 드라마
에밀 졸라의 생애 (The Life Of Emile Zola)
감독 윌리암 디터리
출연 폴 무니, 게일 손더그라드
개봉 1937 미국, 116분
19세기 프랑스의 문호 에밀 졸라에 대해 다룬 전기영화로, 제 10회 아카데미 작품상 수상작이다.
꽤 훌륭하게 평가받고 있는 영화이지만, 문학과 역사에 대해 잘 알지 못하는 나로서는 지금껏 기피하고 있던 영화였다.
영화가 지나치게 문학적이거나 역사적인 성향이 강할 줄로만 알았지만, 전혀 그렇지 않다.
이 영화는 에밀 졸라의 '작가'로서의 삶보다는 '인종차별'이라는 이유로 프랑스의 역사적인 사건 '드레퓌스 사건'의 희생양이 되버린 대위 '드레퓌스'의 석방을 위해 끝없이 투쟁하고, 정의를 구현시키기 위한 에밀 졸라의 노력에 대해 다룬 감동적인 휴먼드라마이다.
영화의 전반부에서는 가난했던 에밀 졸라의 작가로서의 성장과정을 다루고 있지만, 영화의 대부분은 '드레퓌스 사건 진상규명'에 대한 에밀 졸라의 끝없는 투쟁에 초점을 맞추고 있다.
에밀 졸라 역을 맡은 '폴무니' 라는 배우의 열연과 함께 조연배우들의 연기도 괜찮은 편이다. 특히, '작가'의 전기영화인 만큼 다소 문학적일까봐 걱정을 하였지만, 정의를 향한 에밀졸라의 열정, 무죄 입증을 위해 끝없이 투쟁하는 드레퓌스와 아내의 모습 등등이 딱딱하지 않고 정감이 넘치게 잘 연출이 되었다.
특히, 졸라의 무덤을 찾는 드레퓌스의 마지막 장면은 보는 이들로 하여금 눈시울을 적시는 명장면이다.
영화의 주인공 '에밀 졸라'는 진실과 정의를 사랑하는 이상주의적인 사회주의자이다.
에밀 졸라는 친구인 화가 지망생 '폴'과 함께 단칸방에서 함께 지내고 있으며 '파리'라는 대도시에 하루 하루 희망을 안고 살아가는 작가지망생이다.
비록, 둘은 방값도 제대로 못내는 신세이지만, 대도시 '파리'에서의 희망과 꿈을 간직하며 서로의 길을 걸어가고 있는 중이다.
어느날, 에밀 졸라는 길을 가다 우연히 다리 밑의 부랑자들을 보게 되는데..
그는 파리의 어두운 면을 보고, 대도시의 어두운 면을 책을 써서 고발하기로 마음먹는다.
그래서 쓴 책이 바로 '나나'라는 책이다.
'나나'라는 책으로 주인공 에밀 졸라는 순식간에 '부'와 '명성'을 얻게되지만..
당시 지배층에게는 대도시의 어두운 면을 그린 에밀 졸라의 책들은 환영 받을리가 없을터..
하지만, 정의를 사랑했던 에밀 졸라는 그들의 압력에 굴하지 않고, 계속 책을 써내려간다..
"졸라씨, 당신이 쓴 책은 언제나 말썽이군..
제 2제국을 비난했고, 제 3공화국도 비난했군..
'제르미날'은 수년간 광부들을 들끓게 한 책이지..
'나나'는 더럽고 잔인하고.."
"하지만, 그것이 우리의 현실입니다. "
"이런 책들은 국가의 불신을 야기한다네..
더이상 이런 책은 쓰지말게.. "
"자신이나 걱정하시죠..
무슨 일이 있더라도, 제가 글쓰는 것을 막을 수는 없을 겁니다. "
에밀 졸라의 작가로서의 면모 뿐만 아니라, 정의를 사랑하는 이상주의자로서의 모습을 밀도있게 다룬 부분이다.
훈훈한 감동을 느낄 수 있는 대사들..
---<수십 년후>------
그 후 수십년이 지난 후..
졸라는 그동안 써온 수많은 걸작들로 '부'와 '명예'를 안고 살아가고 있다.
하지만, '부'와 '명예'를 거머쥔 그에게는 더이상 '정의'를 향한 이상주의자적 모습은 볼 수가 없었는데..어느날, 수년간 단칸방에서 동고동락을 함께 하던 친구 '폴'을 만나게 되는데..
"폴.. 무슨 일인가? 말해보게.. 우린 오랜 친구잖나? "
"넌 이제 부자야...
세계적으로 아주 유명한 사람이지..
다락방에서 같이 시작한 그 시절보다 정말 출세했지..
그때는 위선자들의 책을 태우고, 진실된 우리를 따뜻하게 하자고 했었지..
나도 이따금 유혹에 빠진다네..
친구..그렇게 되면 진실이 없어지지..
재능에도 기름이 끼게되면 끝장인거라네.."
"폴.. 떠나지말고, 나와 함께 해주게나..
무서울 것이 없던 과거의 나를.. 그 시절의 나를.. 기억나게 해줄 사람이 필요하네.."
폴은 부와 명예에 찌들려 진실과 정의를 갈망하고 투쟁하던 예전의 열정을 일어버린 졸라의 모습을 보고, 수년간 동고동락을 함께했던 절친한 벗으로서 졸라에게 진심어린 충고를 해준다.
한편..
프랑스군 포병대위 드레퓌스는 파리 주재 독일대사관에 정보를 팔았다는 혐의를 받고 종신형을 선고받지만 발견된 서류의 필적이 드레퓌스의 필적과 비슷하다는 것 이외에는 별다른 증거는 없다.
결국, 군부의 위상을 지키기에 급급했던 정치가들과 군인들은 드레퓌스를 '유태인'이라는 이유로 드레퓌스 대위를 스파이로 지목한다.
끌려가는 남편의 모습을 보며 말을 잇지 못하는 아내의 모습..
"용기를 내세요..
무슨 수를 써서라도, 당신의 무죄를 증명하겠어요.."
"나는 무죄야..
그들이 나에게 무슨 짓을 할지라도, 난 끝까지 살아남아 증명하겠어.."
죄를 인정할 수도 있었지만, 드레퓌스는 끝까지 무죄를 주장하며, 투쟁하기에 나서고..
아내 또한 백방으로 '드레퓌스 사건'에 대한 진상규명에 나서는데..
결국, 남편의 무죄를 증명하기 위해 드레퓌스의 아내는 졸라를 찾아가서 '글'로서 대중들에게 남편의 무죄를 대중들에게 알려줄 것을 부탁하는데..
"졸라씨, 프랑스에서 당신의 말은 힘을 가지고 있잖아요..
언제나 진실을 수호한 분이시구요."
"저는 도울 수 없습니다.
전.. 이제 평범한 시민에 불과합니다..
저도 살만큼 살았습니다. 싸울만큼 싸웠구요.."
"죄송합니다. 제가 잘못 찾아온 것 같습니다.
매일 지옥같은 나날을 보낼 제 남편을 생각했습니다.."
졸라에게는 더이상 '정의'와 '진실'을 추구하던 옛 시절의 모습은 찾아 볼 수가 없는 상태..
졸라는'부','명예' 와 '정의','진실' 사이에서 갈등하지만.. 친구 '폴'의 모습을 떠올리며 마침내 결정한다..
다시한번, 예전의 풋풋했던 시절로 돌아가기로..
자신의 부와 명예를 팽개치고 '정의'와 '진실'을 위해 다시 한번 끝까지 투쟁하기로 마음먹게 되는데..
졸라는 많은 이들의 앞에서 드레퓌스의 무죄를 주장하는 연설을 행하고, 한 사람의 인생을 망친 '정부'와 '군대'를 비난하는 연설까지 하게되는데..
졸라는 드레퓌스에게 유죄판결을 내린 군부의 의혹을 신랄하게 공박하는 논설을 대통령에게 보내는 공개장형식으로 1898년 1월 13일 오롤지에 '나는 고발한다'의 제목으로 발표한다.
"군대는 프랑스의 시민들입니다.
드레퓌스도 그 군대의 일원입니다.
드레퓌스 사건은 참모부 전체의 잘못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그들은 드레퓌스의 사건을 은폐했습니다..
진실은 밝혀져야 합니다..
그 무엇도 그것을 막지는 못합니다.."
그러나..
졸라의 뜻에 동참하는 시민들도 많았지만, 그 반대의 입장도 셀 수 없이 많았다.
이를 계기로 사회여론이 비등하여 프랑스 전체가 ‘정의·진실·인권옹호’를 부르짖는 드레퓌스파 또는 재심파와 ‘군의 명예와 국가 질서’를 내세우는 반드레퓌스파 또는 반재심파로 분열되기까지하고..
결국, 졸라는 드레퓌스의 편을 들어준 일로 재판까지 받게되는데..
졸라의 편은 재판에서 '드레퓌스'의 무죄를 거듭 주장하지만..
판사는 드레퓌스 사건에는 관심이 없고, 졸라의 처벌 유무에만 관심이 있다.
심지어는 졸라의 변호인의 말마져 묵살해버리고 마는데..
사태는 점점 졸라에게 불리한 쪽으로 기울어져간다..
지금껏 증인석에 선 군인들은 배심원들에게 자신들이 유리하도록 증거를 조작하고, 하고 싶은 말은 다하는데..
왜 진실을 밝히기 위해 질문하는 우리들에게는 그렇게할 기회조차 주지 않는군요..
정의를 모독하는 것은 참을 수 없습니다..
저는 재판장에서 일어나는 편애를 참을 수가 없습니다..
군인들은 할말을 다할 수 있는데..
왜 졸라가 적은 신문기사는 안된다는 겁니까?
그렇게 편파적으로 편결을 내려도 되는겁니까? "
마침내 졸라가 입을 열기시작하고..
법정에서 자신을 보고 있는 수많은 시민들과 군인들을 향해 연설을 시작한다..
개인적으로 이 영화에서 가장 감동적인 장면으로 꼽는 부분이다.
서로 얼굴도 모르는 한 사람의 인생과 정의 실현을 위해 끝없이 투쟁하는 졸라의 모습은 보는 이들로 하여금 눈시울을 뜨겁게 한다..
"여러분..몇달전 참모부에서는 총리가 갈채를 받으며 군대의 위상을 여러분들께 맡기겠다고 말했습니다.
다르게 표현하면, 여러분들은 저를 죄인으로 몰도록, 지시를 받았다는 겁니다.
그가 한 말이 명령을 내린 것이나 마찬가지입니다.
저는 그것을 밝히려는 겁니다.
저는 말보다는 글쓰는 것을 잘하는 사람입니다..
하지만, 오늘까지 살아오면서..
저는 오로지 '진실'을 밝히기위해 살아왔습니다.
그래서 저는 이 싸움에 참가하게 되었습니다..
주위에서는 미친 짓이라고.. 불가능하다며 저를 말렸습니다.
제가 질 것이 뻔하다며 저를 말리셨지요..
하지만 그게 무슨 상관일까요?
개인이 무시 당한다면 말이죠..
정의가 실현된겁니까?
저는 제가 원해서 이자리에 서게 되었습니다.
저 혼자서, 여러분을 재판장으로 정한 것이지요..
다른 의도는 없습니다..
제가 어떻게 되든 저는 상관없습니다.
저는 여러분들을 믿습니다..
국가에서는 여러분들에게 판결권을 줬습니다.
저는 여러분들을 잘 압니다..
여러분들은 제가 사랑하는 파리의 심장이자, 지성입니다!
여러분들이 가족과 함께 있는 모습.. 공장과 가게에서 일하는 모습이 상상이 갑니다..
모두 직장과 가정이 있는 정의로운 사람들이지요..
여러분들은 무죄인 사람이 수감되어 고생하는 것이 나와 무슨 상관이고..
' 한 사람의 고생과 희생이 국가를 들먹일 정도로 중요한 것인가? ' 라고 생각하지 않으실겁니다..
여러분.. 모두.. 저를 보십시요..
제 모습이 배신자의 모습입니까?
저는 평범한 작가일 뿐입니다..평생 글쓰기에 전념한 사람입니다..
저는 제 자신을 변호하기 위해 이 자리에 선 것이 아닙니다..
40여년간 저의 작가인생..
프랑스의 정신을 전파하기위해 제가 지금껏 쓴 모든 작품들을 걸고 맹세하겠습니다..
드레퓌스는 무죄입니다..
맹새코.. 그는 무죄입니다.. "
하지만, 결국, 졸라는 패소하게 되고..
'징역 1년형과 벌금 3천프랑' 이라는 처벌을 받게되지만..
"에밀.. 어서 프랑스를 떠나게나..
자네를 체포할 수 없는 곳으로 떠나게.."
"나보고 범죄자인 양 도망을 가란 말인가?
나는 절대로 그런 비겁한 짓을 할순 없네.. "
"그렇겠지.. 감옥에 가는 것이 낫겠지..
전세계의 동정을 받겠지..
하지만, 에밀..제발.. 한번만 다시생각해보게..
감옥에서는 아무것도 할 수 없지않나?
자네를 필요로 하는 사람들도 생각해야지.. "
고민끝에 졸라는 경찰들을 피해 런던으로 피신을 하고..
런던에서도 졸라의 정의를 위한 투쟁은 계속된다..
'글'로서 대중들의 마음을 선동하는 에밀 졸라의 모습..
' 진실은 밝혀질 것이다..
졸라의 기사를 읽으시오. '
결국.. 수십년간의 투쟁 끝에 다시 재판을 받게 된 드레퓌스..
눈물을 흘리며 말을 잇지 못하는데..
드레퓌스는 재판끝에 군에 복귀하고 승진까지 하게된다..
하지만.. 졸라에겐, 아직도 할 일이 너무나도 많다..
전세계인들에게 '정의'와 '진실'이 무엇인지를 알려 주어야하고, 자신의 이념을 널리 전파해야하는 것이다..
자신의 '부'와 '명예'를 포기해가며, 남을 위해 헌신적으로 일하는 졸라의 모습을 잘 보여주는 부분이다..
"여보.. 휴식을 취하셔야 해요..
내일, 드레퓌스 행사가 있잖아요.."
"드레퓌스가 내일 복귀하는구나..
드레퓌스사건은 내 인생에 큰 전환점이 되었지..
전에는 나의 일이 끝나서 쉴 수 있을 줄 알았어..
내가 게을러진 것이었지..
하지만.. 갑자기 드레퓌스 사건이 터지고..
나는 진정한 내 삶을 되찾은거야..
지금 이순간, 나는 아이디어가 넘쳐나..
지금 이 책도 최고의 걸작이 될거야..
붕괴된 국가가 희망을 되찾는다는 이야기지..
믿지 못하는군.. 기다려봐..
내가 할일이 얼마나 많은데..
이 사회에 정의를 실현시켜야되.. "
드레퓌스의 복귀식..
그러나.. 수십년간 자신을 위해 싸워준 졸라의 죽음을 통보받게되는 드레퓌스..
비록, 전혀 친분도, 얼굴 조차 모르는 사람이지만..
졸라의 죽음으로 가장 슬픈 사람은 바로 드레퓌스였다..
감동적인 부분..
졸라의 무덤을 찾은 드레퓌스의 모습..
수십년간 늘 마음속에 함께했던.. '졸라'를 떠나보내는 그의 마음은 그 누구보다도 슬프다..
끝내 드레퓌스의 눈가에 눈물이 고이고..
"오늘 슬퍼하지말고..
평생 이어질 그의 정신을 기억합시다.
그리고, 횃불처럼 그 정신을 전파합시다..
오늘 자유를 만끽하는 여러분들은 졸라의 정신을 이어받아,
자유를 향해 싸운 사람들을 잊지 맙시다..
자유를 피와 고통으로 얻은 자들의 희생을 잊지말고..
그들에게 영원히 고마움을 표시합시다..
우리 모두 인간이 됩시다..
졸라만큼, 인간을 사랑한 사람은 없었습니다..
그의 정신은 위대했습니다..
그는 부유한 노년을 지내고 있었지요..
명예, 재산, 행복..
이 모든 것들을 떨쳐버리고, 그는 우리를 위해 일어났습니다..
그리고, 정의를 위해 평생을 바쳤습니다.. "
이 영화는 프랑스의 문학가 에밀 졸라의 삶을 그린 전기영화로, 에밀 졸라의 작가로서의 삶 보다는 드레퓌스 사건에 대한 진상규명과 정의실현을 위한 그의 노력과 투쟁을 주제로 하였다..
비록 70여년이 흐른 영화이지만, 우리에게 큰 감동으로 다가오는 영화이다..
자신과는 아무런 상관이 없는 한 사람의 인생을 위해, 정의로운 국가를 위해 '부'와 '명예'를 포기해버리고, 평생을 바친다는 것은 분명 대단한 용기일 것이다..
비록, 나는 '에밀 졸라'에 관해서는 별로 아는 것이 없는 사람이지만, 영화만큼은 누구든지 '에밀 졸라'라는 인물에 관심을 갖게 하도록, 잘만든 영화임은 분명한 듯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