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양업 신부님의 묘소에서 내려와 옛 "배론 신학교"를 찾았다.
성인(聖人) 장주기(張周基) 요셉의 상(像)
성 장주기 요셉은 박해를 피해 제천에 있는 배론에서 12년을 살았다.
"메스트로"(Maistre) 신부가 1855년에 배론에 조선 최초의 신학교를 설립할 때,
"장주기" 성인은 기꺼이 그의 집을 신학교에 기증하였다.
이듬해에 "푸르티에"(Pourthic)신부가 신학교를 인수하였고, "장주기"요셉 성인은 그곳의 관리인으로 일했다.
성인은 그 신학교와 천주교 공동체를 위하여 11년 동안을 훌륭히 봉사하였다.
그는 열심히 일했지만, 아무런 보상도 받지 않았다.
"메스트로"(Maistre) 신부와 "푸르티에"(Pourthic)신부의 상.
최근에 복원한 옛 신학당.
뒤로 돌아가면 황사영이 은거했던 토굴이 있다.
토굴 옆에는 옹기굽는 가마가 있어 숨어 지내기에 적합했을듯하다.
안은 두사람 정도가 누울 수 있을 정도의 크기다.
당시의 십자가 일까?
토굴 벽에 있는 십자가.
당시에 사용했을듯한 "남포등"
지금은 개조를 하여 전구를 끼워 놓았다.
황사영은 이곳에서 "백서"를 써서 중국으로 보내려다가 발각된다.
황사영의 백서는 끝부분이 제일 큰 문제가 된다.
청(淸)의 황제인 가경제(嘉慶帝)가 종주권(宗主權)을 행사해
조선이 서양 선교사를 받아들이도록 강요해 줄 것을 요구했다.
또한, 청(淸)의 감독과 보호를 요청하며,
조선을 청(淸)나라의 한 성(省)으로 편입시켜줄 것도 요청했다.
조선 조정을 더욱 놀라게 한 것은 황사영이 외국의 군대를 요청했다는 점이다.
황사영은 백서에서 서구 천주교 국가의 군함 수백 척과 군대 5만-6만명을 조선에 보내서
조선의 천주교 신자가 자유롭게 천주교를 믿을 수 있도록 압력을 넣어야 한다고 했다.
이것이 문제가 되어 그는 순교자가 아니라 역적으로 분류되어 능지처참형을 받는다.
또한 그의 가족도 모두 노비가 되고 만다.
어머니는 거제도 관비로, 부인은 제주도로, 어린 아들은 추자도로 뿔뿔이 흩어지고 만다.
다산 정약용(茶山 丁若鏞, 1762-1836)과 정하상(丁夏祥, 1795-1839)"바오로"는
백서를 매우 부정적으로 평가하였다.
심지어, 파리 외방전교회 소속의 "샤를르 달레"(Claude Charles Dallet, 1829-1878) 신부도
“지나친 상상에서 나온 유치한 계획이며, 저 시대의 몽상(夢想) 중 하나”라고 평가했다.
훗날 학자들 역시 이것은 “명백한 반란”이라고 평가한다.
추자도 해안에 있는 어린아들 황경한을 놓고 갔다는 곳.
"눈물의 십자가"가 있다.
멀리 황경한의 묘가 있는 곳에서도 보인다.
추자도에서 평생을 살은 황경한의 묘.
제주 대정읍 산골짜기에 있는 "정난주 마리아"의 묘.
토굴 앞에 있는 "진복문"안의 건물에는 여러 성인(聖人)들의 그림들을 A,B,C순으로 표현해 놨다.
일행과 보조를 맞추느라 대충 둘러보고 부지런히 일행을 찾아 나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