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재왕보살경 하권
3. 지 자재(2)
“자재왕아, 무엇을 보살마하살이 진실을 아는 지혜[諦智]라 하는가?
성문을 구하는 자는 진실한 법을 구하여 성문의 해탈을 증득하지만,
보살은 이 진실한 법을 얻어도 해탈을 증득하지는 않는데, 이것을 자재라 한다.
벽지불을 구하는 자는 진실한 법으로 벽지불의 해탈을 구하지만,
보살은 이 진실한 법을 얻어도 해탈을 증득하지는 않는데, 이것을 자재라 한다.
진실을 아는 지혜란, 괴롭다[苦]는 진실을 아는 것으로서 괴로움이 허망하다는 것을 알고 보는 것이다.
무엇을 괴로움을 보고 안다 하는가?
허망하여 실재하지 않으나 때에 따라 경험하기 때문에 괴로움이 되며, 거꾸로 알기 때문에 있는 것이다.
괴로움은 나지도 않고 일어나지도 않는다는 것을 보살이 안다면 이것을 괴롭다는 진실한 도리를 보고 안다고 한다.
무엇을 괴로움의 원인[集]을 끊는다 하는가?
괴로움의 원인에 따라서 모든 법을 끊는다.
무엇이 괴로움의 원인이 되는가?
원인에 차별이 없기 때문에 끊는 것도 그러하다. 괴로움의 원인을 어디서부터 온 곳도 없고 어디로 갈 곳도 없기 때문에 끊는 것이니, 이것을 모든 법의 성품이라 한다.
여기에는 실재하는 법이 없어서 생겨나자마자 이미 끊어지게 되는데 애욕의 번뇌를 따르기 때문에 괴로움의 원인이 있게 된다.
그러므로 애욕의 번뇌를 끊는다면 괴로움의 원인을 끊는다고 한다.
무엇을 괴로움이 멸(滅)한 진실한 가르침이라 하는가?
필경에 괴로움과 괴로움의 원인이 소멸하나 아무 법도 파괴될 것이 없기 때문에 이것을 괴로움이 소멸했다고 한다.
모든 인연의 모양이 멸하기 때문에 일체 법도 이와 같이 멸하는 모양이니 이 가운데 나지도 않고 멸하지도 않는 것을,
괴로움이 멸한 진실한 가르침이라 한다.
무엇을 괴로움을 끊는 방법[道]에 대한 진실한 가르침이라 하는가?
착한 법ㆍ착하지 못한 법ㆍ번뇌 있는 법ㆍ번뇌 없는 법ㆍ작위 있는 법ㆍ작위 없는 법 등 그 어떤 법으로든 일체법을 구할래야 구할 수 없으니,
이것을 도의 진실한 가르침이라 한다.
이 도는 평등하여 어떤 법도 분별하지 않기 때문이며,
이 도는 적멸하여 모든 번뇌의 뜨거움을 떠났기 때문이며,
이 도는 안락하여 모든 근심과 번뇌를 떠났기 때문이며,
이 도는 번뇌를 다 소멸해 아무 번뇌도 없기 때문이다.
얻은 바가 있는 자는 이 도를 행할 수 없고 바르게 선정을 행하는 자라야 쉽게 닦고 행할 수 있기 때문이다.
이 도는 모든 부처님께서 버리지 않으시며, 이 도는 모든 모양을 끊어 아무 모양도 없기 때문이다.
이와 같은 도이기 때문에 상대적인 곳에 떨어지지 않으니,
이것을 도의 진실한 가르침이라 한다.
보살이 이런 법문을 통해 네 가지 진실한 가르침을 안다면, 그는 진실을 아는 지혜를 얻은 이라 한다.
만일 보살이 먼저 4제(諦)로 성문ㆍ벽지불을 구하는 자를 위해서 이 승(乘)을 설하는 가운데 아무것도 탐하지 않는다면,
진실을 아는 지혜가 자재하다 한다.
그리고 자재왕아, 보살이 성문승을 알면서도 거기에 머물지 않으며, 벽지불승을 알면서도 거기에 머물지 않으며, 불승을 알면서도 거기에 머물지 않으면,
이것을 진실을 아는 지혜가 자재하다 한다.
또한 자재왕아, 하나의 마음으로 일체 중생의 마음을 알며, 하나의 심성으로 일체중생의 심성을 알고 마음과 지혜에 두 가지 행을 짓지 않는다면,
이것을 지혜가 자재하다 한다.
지혜의 자재란 또한 이런 것이다.
과거의 세상이 걸림이 없음을 보고 알아 마음이 과거 세상에 이르지 않으며,
미래의 세상이 걸림이 없음을 보고 알아 마음이 미래의 세상에 이르지 않으며,
현재의 세상이 걸림이 없음을 보고 알아 마음이 현재의 세상에 이르지 않아서 과거ㆍ현재ㆍ미래의 세상에 희론을 내지 않는 것이다.
지혜의 자재란 또한 이런 것이다.
함이 있는 법은 다 멸하는 줄을 알지만 모든 선근(善根)을 다하지는 않으며,
법은 생겨나는 일이 없음을 알지만 생함 없는 그것으로 법을 포섭하며 괴로움의 원인과 중생을 포섭하니 이것을 지혜가 자재하다 한다.
또한 일체 법이 필경 멸한 모양임을 타인을 통해 아는 것이 아니며,
이 지혜의 힘으로 스스로 중생을 교화하는 것을 멸하지 않으니
이것을 지혜가 자재하다 한다.
[의식적인 행동]
자재왕아, 보살이 여기에서 지혜의 자재한 힘을 얻어 자재하고자 한다면, 지혜의 행동[智行]을 따라야지 의식적인 행동[意行]을 따라서는 안 된다.
무엇을 의식적인 행동이라 하는가?
의(意)에서 나온 업은 모두 의식적인 행동이며,
식(識)에서 나온 업은 모두 의식적인 행동이며,
마음[心]에서 나온 업은 모두 의식적인 행동이며,
마음을 집착하여 갖가지 선근을 일으키는 것은 다 의식적인 행동이다.
견해에 떨어져 보시를 하거나 모양에 떨어져 계를 지니거나, 나를 의지하여 인욕을 하면 모두 의식적인 행동이다.
‘나는 보살이다’ 하면 의식적인 행동이며,
‘나는 깨닫겠다는 마음을 냈다’ 하면 또한 의식적인 행동이며,
‘나는 부처의 종자를 끊지 않았으며, 법의 종자를 끊지 않았으며, 승려의 종자를 끊지 않았다’ 하면 또한 의식적인 행동이며,
‘나는 중생을 이롭게 하려고 발심했다’ 하면 또한 의식적인 행동이다.
‘나는 제도 받지 못한 자를 제도하며, 해탈하지 못한 자를 해탈케 하며, 편안치 못한 자를 편안케 하며, 멸도에 들지 못한 자를 멸도에 들게 해야 된다’고 하면 다 의식적인 행동이며,
‘나는 보시하는 주인이며, 나는 계를 지니며, 나는 인욕을 행하며, 나는 정진을 행하며, 나는 선정을 행하며, 나는 지혜를 행한다’ 하면 다 의식인 행동이다.
‘나는 사랑을 행하는 자며, 불쌍히 여김을 행하는 자며, 기쁨을 행하는 자며, 버림을 행하는 자’라 하면 다 의식적인 행동이며,
‘나는 욕심을 줄여 만족할 줄 알며, 여읨을 행하는 자며, 잡되지 않음을 행하는 자며, 두타를 행하는 자며, 고요한 자며, 미세한 행을 닦는 자’라는 식으로 분별하면 다 의식인 행동이다.
‘나는 공(空)을 행하는 자며, 나는 모양 없음을 행하는 자며, 나는 조작 없음을 행하는 자’라는 식으로 분별하면 다 의식적인 행동이다.
‘나는 진리를 말하는 자며, 사실을 말하는 자며, 말과 같이 행동하는 자’라 하면 다 의식적인 행동이다.
‘나는 모든 마군의 업을 능가하고, 네 가지 마군을 여의었으며, 나는 일체의 견해를 끊고 확실한 앎을 얻었다’는 식으로 분별하면 다 의식적인 행동이다.
‘나는 아뇩다라삼먁삼보리를 얻어 설법을 하고 중생을 제도하며 남음이 없는 열반에 당하여 완전한 열반에 들 것이다’라는 식으로 분별하면 다 의식적인 행동이다.
[지혜 업]
자재왕아, 무엇을 보살의 지혜 업[智業]이라 하는가?
심의식(心意識) 없이 그대로 행하는 것을 지혜의 업이라 하니, 보살은 항상 지혜의 업을 짓고 의식적인 업을 일으키지 않는다.
무엇을 보살의 지혜 업이라 하는가?
보살의 지혜 업에는 두 가지가 있다.
무엇이 둘인가?
첫째는 중생을 성취해주는 것이고,
둘째는 바른 법을 받아 지니는 것이다.
무엇을 중생을 성취시킨다 하는가?
보살이 아는 대로 중생을 성취시키는 것이다.
무엇을 바른 법을 받아 지닌다 하는가?
어떤 법도 받지 않으면 이것을 바른 법을 받아 지닌다고 한다.
만일 색(色)을 받아 지니면 바른 법을 받아 지니는 것이 아니며 수(受)ㆍ상(想)ㆍ행(行)ㆍ식(識)을 받아 지니면 바른 법을 받아 지니는 것이 아니다.
모든 감관[入]이나 모든 성품을 받아 지니면 바른 법을 받아 지니는 것이 아니다.
착한 법과 착하지 않은 법을 받으면 바른 법을 받아 지니는 것이 아니며,
죄와 죄아님과 유루와 무루, 유위와 무위, 세간 법과 세간을 벗어난 법을 받으면 바른 법을 받아 지니는 것이 아니다.
보시하는 모양을 받으면 바른 법을 받아 지니는 것이 아니며,
계ㆍ인욕ㆍ정진ㆍ성정ㆍ지혜를 받으면 바른 법을 받아 지니는 것이 아니다.
왜냐 하면 연(緣)을 취하는 것은 다 법이 아니며, 착함이 아니며, 바른 법을 받아 지니는 것이 아니다. 왜냐 하면 여래께서 얻으신 이 법은 모양도 없고 걸림도 없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연이라는 모양을 취한다면 바른 법을 받아 지니는 것이 아니게 된다.
이와 같이 보살의 업 속에 지혜를 ‘지혜 업’이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