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설여래흥현경 제2권
3. 여래를 뵙고 한량없는 곳에 이른다는 것(1)
“불자여, 무엇을 모든 보살들이 여래를 뵙고 한량없는 곳에 이른다고 하는가?
보살이 만일 여래를 친근히 한다면, 곧 도(道)로 돌아갈 것이다.
왜냐하면 보는 바가 없는 것이 여래를 뵙는 것이고, 여래를 뵙는 것이 곧 하나의 법신(法身)이 되는 것이기 때문이다.
[첫 번째 문에 들어가는 것]
하나의 법신으로서, 만일 한결같이 자비로운 마음으로 한 사람에게 향한다면 곧 두루 모든 중생에게 미쳐서 장양(長養)하는 것이 많을 것이니, 이는 허공계와 같다.
허공계는 감싸안지 않는 것이 없고 들어가지 못하는 곳이 없으며, 혹 모든 유색(有色)ㆍ무색(無色)ㆍ유형(有形)ㆍ무형(無形)ㆍ유처(有處)ㆍ무처(無處)에 이르되 또한 이르는 곳이 없다.
그리고 온 곳 또한 없으므로 몸이 없으며, 몸이 없으므로 두루하지 않는 곳이 없다.
부처님의 몸도 이와 같으시다.
두루 모든 중생의 무리에 들어가시고 모든 법과 일체 불토에 두루하지 않는 곳이 없으시되, 또한 가시는 곳도 없고 오신 곳도 없으시다. 왜냐하면 몸이 없으시기 때문이니,
여래의 몸이란 중생을 개화시키시려 하신 까닭에 나타내신 몸일 뿐이기 때문이다.
불자여, 이것이 보살이 제일(第一)의 문에 들어가는 것이니,
돌아가 출현하는 데로 나아가면 여래라고 한다.
[두 번째 들어가는 문]
또 불자여, 비유하면 허공과 같이 색(色)도 없고 볼 것도 없다.
형체 있는 것도 없어서 볼 수 없으나, 또한 그로 인해서 분별하여 알 수 있다.
중생이 그 속에 널리 가득하여도 핍박하지 않되 허공 또한 상념(想念)이 없다.
이와 같이 만일 여래의 몸을 본다면 두루 세간을 비추어 세상을 구제하고 인하여 죄와 복을 분별할 것이나,
여래께서는 오시지도 않으셨고 가시는 곳도 없으시며 장애 받으시는 일도 없으시고 또한 얻을 수도 없다.
왜냐하면 대성(大聖)의 광명이 80가지의 전도(顚倒)된 것들을 모두 없애 버렸기 때문이다.
이것이 두 번째 들어가는 문이다.”
그리고 게송을 읊으셨다.
뜻을 일으켜 뛰어난 곳으로 달리시어
위광의 불길 다하도록
중생의 더하고 덜한
모든 인연 보시고
허공이 형체도 빛깔도 없듯이
여래 또한 그러하시어
하나의 평등하신 법신으로
중생 구제하시어 벗어나게 하시네.
최승(最勝)께서 마침 출현하시어
모든 어리석은 중생 교화하시니
점차 도리를 관찰하고
흥성하여 불도(佛道) 만나리.
매우 넓고 크신 도덕(道德)으로
삼천세계 밝게 비추시어
생사의 고난에서 벗어나게 하시나
마음에 상념 없으시네.
짝할 무리 없으신 인존(人尊)께서
더하고 덜함 나타내 보이시니
스스로 자신을 가르친다면
연각(緣覺) 체득할 수 있으리.
모든 중생이
인중성(人中聖)을 친근히 할 줄 아는 것은
비유하면 대범지(大梵志)가
스스로 청명한 궁전에 있는 것 같네.
[세 번째 들어가는 문]
“또 불자여, 태양의 광명이 염부제를 비추면 중생들이 입는 은혜가 한량없으므로 그들이 우러러보며 살아가니 그 광채가 무량하다.
비유하면 흐르는 물이 산천(山川)에서 나와 온갖 곡식과 의복의 재료를 기르는 것과 같다.
만일 구석지고 어두운 곳이 있으면 또한 그 빛에 의지하고, 꿈틀대는 벌레나 소나 말이나 노새나 나귀 또한 이 빛에 연유한다.
말하고자 하는 것은 다음과 같다. 계곡의 수목과 모든 약초들도 모두 이 빛을 인하여 다투지 않고 잘 자라고 공중을 날아다니는 중생들도 모두 이 빛에 의지하며, 강이나 연못이나 샘에서 흐르는 물도 이 빛에 의지하여 연꽃을 피운다.
군국(郡國)의 현읍(縣邑)과 주역(州域)의 대방(大邦)이 모두 그 밝음을 얻어 전전(展轉)하여 온갖 형색(形色)을 보며, 산과 들과 풀밭 사이로 다닌다.
육지에 사는 사람들과 물 속에 사는 중생들도 모두 그 빛을 우러르며 각각 생활의 업을 짓고 일으키는 것이 있으며, 곧 능히 구경에 이른다.
왜냐하면 태양의 광명과 궁전이 한량없이 비추어 중생들에게 이익을 주기 때문이다.
도의 공덕도 태양과 같아 중생이 여래의 몸을 뵙고 그 음성을 듣는다면, 한정없이 무수히 많은 방편의 인연에 의지하여 안정을 얻을 것이며 악(惡)을 돌이켜 선(善)으로 나아갈 것이다.
공덕의 법은 어리석음을 없애고 사리에 어두운 일들을 없애어, 도의 지혜[道慧]를 융성시켜 우뚝하게 빛나게 한다.
커다란 자애심으로 중생을 두루 보호하고 불쌍히 여기는 마음으로 백성들을 구제하여 벗어나게 하며,
모든 법으로 돌아가서 37품도(品道)의 힘을 길러서 성취하게 한다.
믿음의 씨앗을 심어 청정하게 하기를 마치 더러운 물이 맑아지는 것같이 하며,
보는 것이 허망하지 않아 보응(報應)을 잃지 않게 하고
유색(有色)과 무색(無色)의 생기고 없어지는 일을 모두 보되, 해(害)를 입는 일이 없게 한다.
도혜(道慧)의 광명은 모든 중생으로 하여금 덕의 근본[德本]을 잃지 않게 하고, 대중의 으뜸이 되게 한다.
보살 대사는 마치 연꽃과 같아 권화(勸化)하고 보시(布施)하는 모든 행의 인연의 방편으로 최상이 된다.
왜냐하면 성인의 도량(道場)은 끝이 없고 여래께서 떨치시는 한량없는 지혜 광명의 무한히 성스러운 도량 역시 이와 같기 때문이다.
이것이 세 번째 들어가는 문이다.”
그리고 게송을 읊으셨다.
비유하면 마치 태양의 궁전이
염부제를 모두 비추어
허공에서 빛을 내려
어둠 없애고 장애 없애는 것 같고,
본래 없어 처소(處所) 없으나
땅을 인하여 연꽃 피기에
많은 사람들 온갖 토지에
의지하는 것 같으니
거룩하신 태양께서도 이와 같으시어
중생이 모든 우러르고
모든 천과 세상 사람들
덕의 근본 잘 닦고
무극(無極)을 항복시켜
법광명에 이르니
인중성(人中聖) 뵙고서
인(因)하여 삼승(三乘) 이루네.
[네 번째 들어가는 문]
“또 불자여, 비유하면 저 하나의 태양 궁전과 같다.
그것은 대석제수미산왕(大石帝須彌山王)을 비추고 다음에 다시 모든 나머지 큰 산들을 비춘다.
그리고 나서 흑산(黑山)을 비추고 마침내 높은 언덕과 낮은 언덕과 땅바닥에 이르러 이 염부제 사람들이 거처하는 곳을 비춘다.
그러나 이처럼 광명이 땅을 따라 비추지만 그 태양 궁전의 광명은 보산왕(寶山王)을 먼저 비추어야겠다는 생각이 없으며, 또 태양이 빛을 비추는 데는 평등하여 차별이 없다.
이는 그 토지가 처소의 높고 낮음이 있을 뿐이니, 태양 광명에는 차별이 없어 선후(先後)를 생각하지 않는다.
여래께서도 이와 같으시니, 한량없고 충정(忠正)한 법계의 우뚝한 도량을 평등히 다니시면서 손상되지 않은 광명을 비추시되, 이 지혜의 광명으로 두루 비추신다.
앞에서 대제석산수미산왕(大帝石山須彌山王)이 먼저 빛을 받는다고 한 것은, 모든 대정사(大正士)들에게 나아가 법 광명을 나타내 보이심으로써 개화시키고 제도하시는 일을 말한다.
그런 다음에 성문과 연각이 좋아하는 지혜를 보여주심으로써 중생이 뜻을 내어 덕의 근본을 건립하게 하시고,
그런 후에 착하지 못한 무리들을 교화시켜 점차 모든 백성들을 가르치신다.
이리하여 오랫동안 사견(邪見)에 처하여 있던 무리들이 모두 여래의 광명을 받으며,
이미 광명을 받고 나면 미래에 여래 태양의 지혜 광명을 만나게 될 것이라고 수결(受決)을 얻을 것이다.
그리하여 그들로 하여금 생각이 없게 하시고 모든 덕의 근본을 이루게 하시며, 그들이 원하는 대로 지혜의 빛을 체득하게 하실 것이다.
이것이 네 번째 들어가는 문이다.”
그리고 게송을 읊으셨다.
이 태양빛과 같아
모든 형체 있는 것 여의지 않으며
모든 천중(天衆)에 이르기까지
또한 모두 의지하도다.
비유하면 마치 모든 강하(江河)가
온갖 사람에게 이익 주듯이
안주광(安住光)도 이와 같기에
중생 모두 우러러 받들도다.
독실한 믿음 여읜 사람만이
태양 같은 부처님 광명 볼 수 없을 뿐
어느 곳을 부처님께서 차별하시리.
이들 역시 은혜 입고 있거늘
만일 부처님 명호 듣는다면
뛰어난 광명 만날 것이며
이로 말미암아 점차 나아가
불도(佛道) 이루게 되리라.
[다섯 번째 들어가는 문]
“또 불자여, 마치 태양 궁전에서 타고난 장님이 빛나는 광채를 보지 못하는 것과 같으니,
비록 눈이 없어 낮과 밤을 알지 못하나 그 광명으로 인하여 생활해 나가고 먹을 것을 얻을 수 있다.
이와 같이 중생이 본래의 청정함을 잃었기에 부처님을 뵙고도 무극도광(無極道光)을 믿지 않으니, 이를 타고난 장님이라고 한다.
비록 여래의 지혜 광명을 보지 못하는 것이 설사 이와 같아도 이들에게는 계속 대성(大聖)의 태양빛이 비친다.
이와 같은 부류에게 미묘하게 넓은 광명이 신통스럽게 빛나 그 몸을 비추는 것은 서응(瑞應)을 일으키기 위한 것이니, 장차 미래에 애욕과 번뇌의 행을 없애게 될 것이다.
이것이 다섯 번째 들어가는 곳이다.”
그리고 게송을 읊으셨다.
마치 태양이 천하를 비추어도
타고난 장님은 볼 수 없어
비록 밤낮을 분별 못하나
그 찬란한 빛 계속 받듯이
중생 역시 본래의 청정함 잃어
여래의 지혜 믿지 않더라도
부처님의 자비로우신 은혜 광대하시기에
계속 그 빛 받아 제도받게 되리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