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늑대는 야심한 밤에 역사를 만든다 다혜, 널 훔치고 싶다. 아니 나는 오늘밤에 우리들의 역사를 꼭 만들 테다. 우리는 부지런히 걸었다. 택시정류장 쪽은 한산한 편이었다. 나는 다혜에게 눈치채지 않게 시계를 들여다보았다. 다혜가 굳이 집으로 가겠다고 한다면 말리기 어려운 시간이었다. 하나님. 밤이 늦었습니다. 오늘 밤만이라도 내게 묶어 놓아 주십시오. 갑자기 발목이 삐어도 좋고 복통을 일으켜도 좋습니다. 한 방에서 잠 잘 수 있게만 해 주신다면 다혜를 내 것으로 만들겠습니다. 다혜는 부지런히 걸었다. 내가 조금 늦춘다고 해서 상황이 바뀔 만한 촉박한 시간은 아니었다. "다혜." 나는 조금 크게 불렀다. 다혜는 뒤돌아섰다. 그 순간에 나는 할말을 잊어버렸다. 아니 그녀의 큰 눈망울을 보는 순간 가슴 속에 있던 말을 할 수가 없었다. '널 몽땅 갖고 싶다.' 나는 이렇게 속으로만 말했다. 다혜는 다시 걷기 시작했다. "다혜. 저 아줌마가 아까 그 아줌마 아냐. 얘기 좀 걸어볼까?" 나는 어떻게 하든 시간을 끌어 볼 속셈이었다. "괜히 그랬다가...... ." "고맙다는 인사를 받고 싶어서가 아니라 저 아줌마 자신이 너무나 의아해하는 문제를 풀어주고 싶어서 그래." "세상은 조금씩 모르면서 사는 게 현명한거야." 다혜는 이렇게 말하고 빙그레 웃었다. 통상 내가 사용하던 말을 흉내냈기 때문이다. "인생은 짧은 거예요, 다혜씨." "사람 산다는 게 다 그런 거예요, 총찬씨." 우리는 이런 식의 말싸움을 하며 걸었다. 돈을 잃었던 여자와의 거리가 상당히 가까워졌다. "난 보통 사람과 달라. 신문에 은행강도 사건이 날 때마다, 은행에서 털린 액수가 천만 원 정도이고 사람을 다치게 하지 않은이상 잡히지 않기를 빌어. 돈이 억수로 많은 은행이니까 그까짓 것이야 푼돈으로 결손처리를 하면 될 것이고......형편무인지경인 한 놈쯤은 잘 살 수 있고...... ." "솔직히 말한다면 찬이가 은행을 기가 막히게 털고 싶은 거 아냐?" "이크 들켰네." 나는 이렇게 대답했고 다혜는 깔깔거리며 웃었다. 정말 나는 다혜 말처럼 은행을 털고 싶었다. 외국 영화에 나오는 그런 은행갱과는 수법이 다른 기가 막힌 방법으로 말이다. "아주머니, 돈을 찾게 돼서 다행입니다. 큰일 날 뻔하셨어요." 잰걸음으로 걷넌 여자가 나를 힐끔 쳐다보고 핸드백을 꼬옥 쥐고 씨익 웃었다. "그러게 말예요." 경계의 빛이 뚜렸했다. "어디까지 가시죠?" "다 왔어요. 집이 가까워요." 그녀는 나를 경계하기 위해 거짓말을 하고 있었다. "어서 가. 늦었단 말야." 다혜가 나를 끌었다. 다혜다운 행동이었다. 내가 그녀에게 충격을 주는 게 싫었던 모양이었다. "자아, 그럼 안녕히 가세요." 우리는 그녀를 앞질러 택시를 탔다. "어디 갈 거야?" 택시에 타자마자 내가 물었다. 다혜는 말없이 시트에 깊숙이 기댔다. "명동으로 가자. 한판 신나게 흔들어서 응어리를 풀어 볼래? 정신위생학적으로" "꼬시네." 다혜는 싫지 않은 듯이 대답했고 운전사는 스물스물 웃었다. 명동거리는 썰물 때의 바닷가 같았다. 명동 중심에서부터 사람들이 바깥으로 빠져나가기 위해 초저녁 때보다 더 복작거렸다. "일단 이 보따리나 좀 맡겨 놓고 따지자." 나는 보따리를 아는 가게에 맡겨 놓고 홀가분한 기분으로 나왔다. 자정이 가까워졌다. 번화했던 조금 전까지의 명동거리는 말끔히 과거를 잊은 것 같았다. 가로등 불빛마저 군데군데 이가 빠져서 더 을씨년스러워 보였다. 과연 통행금지라는 것이 무섭긴 무서운 모양이었다. 그 숱한 사람들이 모두 어디로 가 버렸단 도망가 버렸을까? 아니면 숨어 버렸을까? 아니 어쩌면 그 빼앗긴 4시간이 억울해서악착같이 찾아먹기 위해 눈에 띄지 않게 숨어있는지도 모른다. 우리들의 하루에서 4시간씩을 압류해 버린 저 비극의 그림자. 나는 이 4시간 동안에 다혜를 내 것으로 만들어야 하는 것이다. 현명한 사내들은 이 통행금지를 얼마나 잘 이용하는지 모른다. 그리고 현숙한 여자들은 이 4시간 동안에 자주 그럴 듯한 핑곗거리를 만들 수 있는 것이다. 우리 나라의 사랑의 역사는 어쩌면 저 통행금지라는 중매쟁이 때문에 수월해진 건 아닐까? 우리들이 골목길로 들어서자 여관 간판이 갈지 않았는지도 모르겠다. "저놈의 형광등은 왜 갈아치우지 않는거야? 우리를 유혹하려고 그러는 것인지도 몰라." 다혜는 내 말에 아무 대꾸도 하지 않고 시계를 보았다. "지금 엉큼한 생각하고 있는 건 아니겠지." 다혜는 항상 눈치가 빠른 여자였다. "엉큼하다니...... ." 나는 이렇게 부정해 놓고 다혜가 만만찮은 여자라는 게 싫었다. 그까짓 정조가 뭐가 대단하다고. 인생은 짧은 거예요, 다혜씨. 어차피 죽어 버리면 한줌의 흙인 거예요.살아 있는 동안 모든 건 해치워야 해요. 노세 노세 젊어서 노세. 늘어지면 못 노나니...... "버릴래?" 마음이 약해진 나는 다혜에게 선택권을 주었다. 다른 여자라면 내가 이처럼 허약해질 리가 없었다. 무슨 짓을 하더라도 역사를 만들어 버릴 것이다. 그러나 다혜에게만은 차마 그렇게 할 수가 없었다. "쉬고 싶지만...... . 늑대와 단둘이 쉬느니 차라리 피곤하고 싶어." "그건 피차 마찬가지다. 나도 여수 같은 여자한테 홀리고 싶진 않아." 얼떨결에 이렇게 말을 받았다. 다혜는 큰 눈을 더 동그랗게 뜨고 반격을 할 태세였다. "그러나 난 여수 같은 여자를 좋아해." 내가 재빨리 말을 바꾸었다. 다혜가 피식 웃었다. 그 여우 같은 여자라는 소리가 기분 나쁜 것만은 아니라는 걸 그녀도 알고 우리 어머니 표현대로라면 여우 같은 여자는 모두 예쁜 여자를 지칭하는 것이기 때문이었다. "그럼 가자. 우리들의 체중을 아낌없이 줄여 보자." 내가 앞장 서서 고고홀의 간판이 보이는 쪽으로 갔다. "뭘 하러 일찍 들어가려고 그래? 좀 더 걷지." 다혜가 느릿느릿 걸으며 대꾸했다. 시간은 조금 여유가 있었다. 자정이 임박한 명동거리는 정말 우리 두 사람에겐 기분 좋은 거리였다. 무섭게 득시글거리던 명동이 이렇게 한산할 수 있을까? 두 바퀴쯤 명동의 골목을 돌았다. 분침과 시침은 거의 자정 근처로 가 있었다. "들어갑시다. 더 돌아다니다가는 파출소로 끌려가서 현금을 압류당하고 욕지거리를 퍼먹고 정강이나 따귀를 무상으로 빌려주게 됩니다." "그래요 늑대씨. 나는 유상으로라도 정강이나 따귀를 빌려 주긴 싫은데요." "역시 우린 천생의 연분이네요." "늑대와 여우는 비슷한 거니까요." "썩 잘 어울리는 한 쌍이지요." "쉿!" 다혜가 손가락을 입에 대고 조용히 하라고 했다. 멀찍이에서 방범대원 두 명이 걸어오고 있었다. 다혜는 얼른 시계를 들여다보았다. "아직 5분 정도는 남았어." 다혜가 안심이 된다는 듯이 말했다. "다혜는 자신이 차고 있는 시계를 너무 "비교적...... ." "이럴 때 우리들의 시계는 아무런 쓸모가 없어. 방범대원의 시계 맘대로인 거야." "내 시계는 아침에 라디오에 맞춘 거야." "우린 방범대원의 시계를 존중해야 돼. 현명한 사람은 그 정도는 알아야지." "통행금지는 정확히 자정부터야. 우린 악착같이 남은 시간을 돌아다닐 권리가 있어." "그건 다혜 마음 속으로 정한 의무지 권리가 아냐." "어쨌든 우리는 법을 지키고 있는 정당한 보행자야." 다혜가 야무지게 말하고 또박거리며 걸었다. 방범대원이 가까이 왔다. 그들은 우리를 들여다보았다. 나는 그 순간에 방범대원의 시계가 고급품이기를 바랐다. 우리도 시계를 보았다. 방범대원은 씨익 웃고 지나갔다. 우리도 씨익 웃었다. 정확히 통금까지는 3분이 남아 있었다. 그들의 시계도 그랬던 것 같았다. "찬이가 왕국을 세우면 통금 같은 건 없어지겠지?" 다혜가 잰걸음을 걸으며 물었다. "아무렴. 통행금지는 사내들에게 핑곗거리만 주는 거야. 그리고 도둑놈에게 묵시적 활동시간을 준 것이 돼 버렸어. 처녀를 훔친 경험을 가진 사내들은 반대하겠지만...... . 아니 어쩌면 처녀를 빼앗긴 여자들도 반대할지 모르지만." "경험 많은 사내하고 다니니까 배우는 게 많네" "날 너무 그렇게 취급하지 마. 나도 한때는 너무 순진해서 여인숙이란 데가 여자들만 자는 곳이라고 생각한 적도 있었어. 그리고 나도 사내지만 세상의 모든 사내들이 모두 늑대 같은 놈들이라고 생각했었고 모든 여자는 마치 천사가 되려다 만 것처럼 착각해 본 적도 있었어. 그러나 난 철이 들면서 사람이 어우러져 사는 게 참 별게 아니라는 걸 알았지. 늑대와 여우가 얼크러져 사는 것과 다를 게 없다는 걸 배웠어. 그래서 난 보통 늑대가 되지 않겠다고 맹세했어. 늑대 가운데 가장 탁월한 늑대, 왕초 늑대가 되고 싶었어. 그런데 알고 보니 나보다 잘난 늑대가 너무나 많아. 이런 통행금지 따윈 우습게 아는 늑대를 볼 때마다 나는 초라하게도 한 마리의 작은 새가 되고 싶어. 형편없는 늑대라는 걸 분통 터지게 시인하게 돼. 약이 올라 미치겠어. 나는 도깨비가 가지고 다닌다는 요술방망이나 요술 램프, 열려라 참깨 하면 열리는 그런 동굴을 갖고 싶어. 아냐. 그렇지 않아도 좋아. 무협지에 나오는 도사만큼만 장풍실력이 있었으면 좋겠어. 난 우리 어머니가 나를 판사 되라고 비는 마음을 알 것 같애. 나는 나보다 잘난 놈은 사그리 쓸어 버리고 싶어. 내가 최고이고 싶어. 여자는 모두 그냥 살아 있고 사내들만 어느 날 갑자기 몰살하고 나만 살아 있을 수만 있으면 좋겠어. 그렇게라도 난 왕초이고 싶어. 제기랄, 얘기해 놓고 보니까 내가 쪼다일세." "알긴 아는구나." 다혜가 내 발작증세 같은 황당한 소리를 우리가 호텔 쪽으로 방향을 바꾸자 멀리서 호루루기 소리가 외마디처럼 들려 왔다. 시계를 보았다. 자정이 깜박 넘은 시간이었다. "찬이는 춤을 잘 춘다고 생각해?" "준수한 편이지." 표를 끊고 들어서면서 나는 아련히 내 춤솜씨가 어째서 준수한 편이라고 자찬하는지를 생각했다. 처음 대학교에 들어갔을 때부터 나는 서울 놈들을 무조건 미워하는 편이었다. 나보다 잘나 보이는 놈들이었기 때문이기도 했고 내가 촌놈이라는 자격지심 때문이었다. 신입생 환영회가 열렸다. 호화스러운 무대 위에 텔레비전에서나 보았던 가수와 악대가 얼크러졌다. 하나같이 혀꼬부라진 노래들만 불러댔다. 계집애들도 남학생들과 어울려 그놈의 엉덩짝을 뱅글거리며 돌렸고 출렁거리는 가슴으로 디스코를 추었다. 내가 그때처럼 촌놈이란 것에 약이 올라 주눅이 든 적이 없었다. 나는 구경을 하다말고 밖으로 나와서 소주 두 병과 쥐포를 사들고 잔디밭으로 갔다. 서울을 싹 불질러 버려야 돼. 로마의 황제 네로를 우리는 존경해야 돼. 저런 싸가지 없는 것들이 사는 서울을 왜 여태 그냥 둔거야. 하나님은 사기꾼야. 불바다를 약속해 놓고 여태 뭐 하는 거야. 소주 두 병을 홀짝거리며 다 마시고 난 강당으로 들어섰다. 서울 놈들에게 져선 안 돼. 절대 안 돼. 내가 어떤 놈이라는 걸 보여 줘야 돼. 제까짓 것들이 춤을 추면 얼마나 잘 추고 노래를 부르면 얼마나 잘 부른다는 거야. 내가 누군 줄 알아? 성은 장가(張哥)이고 이름은 총찬이야. 꼽추춤, 병신춤에다 각설이타령과 육자배기를 뽑아 놓으면 제까짓 것들이 기죽지 않고 배겨. 나는 무대 위로 뛰어올라갔다. 사회자가 느닷없이 뛰어올라온 나를 제지하고 나섰다. 나는 사회자를 불러 귀를 잠깐 빌어 속삭였다. "나한테 까불면 배때지에서 빨랫줄 나와. 끽소리 말고 시작해." 아주 들릴까말까한 작은 속삭임이었다. "각설이 타령!" 나는 소리를 버럭 질렀다. 악대가 전주곡을 넣는 사이에 나는 춤을 추었다. 학생들이 까르륵거리며 웃었다. 나는 목청을 뽑아 각설이 타령을 읊기 시작했다. 학생들이 박자를 맞추며 박수를 쳤다. 봐라, 이 자식들아. 나는 정신없이 흔들어 댔다. 학생들이 뛰어나와 템포가 빨라진 각설이 타령의 곡조에 맞춰 디스코를 추었다. 사회자가 내게 와서 나지막한 소리로 그만둬 달라고 사정했다. 나는 그런 사회자의 턱을 갈겼다. 사회자가 벌렁 뒤로 나자빠지자 악대의 음악이 일시에 멈췄다. "이런 우라질 새끼들 풍악을 울리란 말야!" 이것들이 날 촌놈으로 봐." "야 이 거적 같은 새끼들아. 그 서양 깽깽이를 울리란 말야! 내 말 안 들려?" 나를 노려보고 있는 악대를 향해 돌진한 나는 닥치는 대로 마이크롤 휘둘렀다. 녀석들은 악대를 팽개치고 도망갔다. 사회자도, 가수도, 앞줄에 앉아 있는 신사복 차림의 어른들도 모두 도망가 버렸다. "야 이 서울 놈들아! 몽땅 덤벼라. 머리통을 까부셔 버릴 테니까." 나는 악을 쓰며 마이크를 휘둘렀다. 조금 후에 좌석에서 도망가지 않은 패거리들이 콩나물 대가리처럼 일어났다. 첫눈에도 썩 독기가 있어 보이는 패들이었다. 나는 가슴이 철렁 내려앉는 걸 알았다. 저렇게 말 한마디 없이 걸어서 깡치가 센 놈들은 아닌 성싶었다. '저 놈들이 말로만 듣던 진짜 서울 깡패들이구나.' 나는 그때 그런 생각을 했다. 싸울 때 웃통 벗어들고 소리 치는 놈은 무서워할 필요가 없지만 저렇게 소리 없이 달려드는 놈들은 보통내기가 아니라는 걸 나는 알고 있었다. 그 패들은 내 멱살을 옭아쥐고 밖으로 끌고나갔다. 그 뒷얘기는 여기서 차마 할 수가 없다. 나도 자존심만은 악착같이 살아서 꿈틀거리는 놈이니까. 아무튼 인간은 서로 사랑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나를 건드린 녀석들처럼 묵사발이 되는 수밖에 없는 것이다. 그때의 장면을 소상하게 보았겠지요. 그리고 낄낄거리며 웃었죠. 기분이 얼마나 좋으셨습니까? 박수를 치며 좋아했겠죠. 하나님. 제발 우리 사람끼리 사랑하게 내버려 두세요. 나는 그때부터 그놈의 서양춤과 서양노래를 배우느라 용돈과 시간과 육체를 마구 써먹었다. 그렇게 해서 얻은 것이 반쯤 서울 놈 흉내를 낼 수 있게 된 것이다. 고고홀의 조명은 지옥과 천당의 불꽃이 얼크러진 것처럼 마구 흔들리고 있었고 음악은 귀청이 따가울 정도로 시끄러웠다. 다혜는 불빛 속에서 요염하게 보였다. 앞가슴 단추가 금방 떨어질 것같이 팽팽한 육체에 작은 지진이 일어나고 있었다. 내 하나님, 기필코 이 여자를 오늘 밤 해치우고 싶습니다. 꼭 훔치겠습니다. 현란한 불꽃놀이였다. 그리고 고막이 얼얼하도록 따가운 곡조들이 살갗마저 흔들리게 할 것 같은 분위기였다. 고고홀 실내를 쩌렁쩌렁 울리게 하고 난 음률은 술상과 술병과 의자까지도 흔들어 놓을 것 같았다. 빈 자리가 없어서 우리들처럼 합석한 사람들도 많았다. 조명 때문에 흔들고 있는 사람들은 모두 잘 생긴 사람들뿐이었다. 특히 하얀 원피스차림의 여자들은 금방 하강한 천사들 같았다. 천계(天界)의 신선들이 어우러졌다고 하는 표현이 적당할 것 같았다. 숨이 가빠지지 않고 못 배기는 곳, 아무라도 들어서기만 하면 선남선녀가 되는 곳. "여기 와 보면 하나님이 실패한 것 가운데 하나가 태양이라는 걸 알게 돼. 인간은 어둠 속에서 가장 아름다운 거야." 다혜의 귀청 가까이에 대고 소리질렀다. 소리지르지 않고는 서로 의사소통을 할 수 없는 곳이었다. "늑대는 야심한 밤에 역사를 만들지." 땀을 닦으며 다혜도 큰 소리로 대답했다. 나는 그녀에게 늑대라는 소리를 들을 때마다 기분이 좋았다. 그것은 마치 귀여운 여자가 자기는 도둑이야'라고 새벽녘에 지껄이는 것과 같은 느낌이었다. 성숙한 여자는 늑대를 좋아하고 미숙한 여자는 늑대를 경멸하는 것이었다. 여자의 귀 가까이에 입김을 불어넣어 주고 싶은 사내라면 마땅히 고고홀에 가야 한다. "밤새 흔들 자신 있어?" "나는 흔들러 온 게 아냐. 마음도 몸도 유연해지고 싶어서 온 거야." "오랫만에 다혜가 진실만을 얘기했군. 절대 공감할게. 좋은 아이디어가 떠올랐다. 그동안 고민하던 거였는데.... 내가 왕국을 세우면 감옥을 없앨 거야. 죄지은 놈들을 모두 끌어다가 초호화판 고고파티를 열어 줄 거야. 먹고 마시고 놀고 흔드는 데 진저리를 칠 때까지 계속해서." "그렇게 꼴찌들만 사는 나라에 무슨 죄인이 생겨?" "너무 살기가 좋아서 생기는 죄니까 우려할 건 없어. 일테면 예배당 가는 길에 넘어져 다치면 목사를 고발한다거나 담배를 많이 고소한다거나, 농사가 너무 잘 되어서 몇 년 간 농사일을 하지 않아서 생긴 비만증 때문에 농수산부를 걸어 고소한다거나...... 아니면 너무 예쁜 여자 때문에 생긴 마음의 산란증 때문에 그 예쁜 여자를 고발한다거나 하는 죄 말야." "내가 졌다." 다혜는 짤막하게 대답하고 템포가 빨라진 음악에 맞춰 몸을 신나게 흔들었다. 여자가 흔들릴 때마다 더욱 아름다워지는것이 분명했다. 여자들에게 저 아기 도시락(유방)이 없다면 어떻게 될까? 양장점과 미장원과 목욕탕과 화장품을 만드는 회사와 요술헝겊 같은 여자 속옷 만드는 회사, 보석, 장신구, 뾰족구두, 거울, 손수건, 칫솔, 유행이라는 단어...... 모든게 필요 없을 것이다. 아니 어쩌면 여자들은 코뚜레를 하고 밭갈이를 하고 있을지도 모른다. 아무튼 여자는 하나님을 믿어서 손해 날 게 없다. "쟤들은 왜 저렇게 흔들고 싶어할까. 흔들지 않으면 누가 잡아가나?" 다혜 자신은 모처럼 들렀지만 다른 사람들은 매일 저렇게 흔드는 게 아니냐는 것 같았다. "선생님 말씀 잘 듣고 공부 잘 하고 나면 할 짓이 없잖아." "요새 선생님 말씀 안 듣고 공부 못하는 얘가 어디 있어?" "하긴 그렇지." "그렇지만 저렇게 밥만 먹고 밤새 흔들어서 어쩌자는 걸까?" 있는 거겠지 머. 원자탄, 수소폭탄, 공해, 폭력, 지진, 빙하시대...... 모두 한 방이면 우린 끝장이야. 우린 윗사람들이 젊었을 땐 그렇게 급하진 않았지만 지금 우리는 급해. 언제 어디서 한방 맞을지 모르거든. 그러니까 살아 있는 동안 모든 걸 해치워야 해. 빨리빨리 후딱후딱 살아야 돼. 이제 생명보험은 하나님한테 들어야 돼. 좌우간 급해." "그래서 저렇게 정신없이 흔드는 거란 말야." "그렇다니까. 코 큰 애들이 미쳤다고 전속력을 놓고 내달리고 홀딱 벗고 지랄들 하는 줄 알아?" "히힛!" 다혜가 괴성을 지르며 빠른 몸짓을 했다. 받은 땀방울은 그녀의 이마에 보석을 달아주었다. 큰 소리로 얘기를 하고 나자 목이 말랐다. 방앗간 기술자가 평소에도 목청이 큰 이유를 알 것 같았다. 우리는 서로 목마르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나는 그녀를 마시고 싶었고 그녀는 맥주를 마시고 싶었을 것이다. 우리는 그럴수록 더 몸을 흔들었다. "곰뱅이춤이나 꼽추춤 한번 보여 주지 그래?" 여자는 분위기에 약한 법이었다. 흥겨워진 다혜가 나를 충동질했다. 인간은 언제고 주인공이고 싶어하는 동물인 것이다. 나는 음악이 바뀌자마자 기묘한 동작으로 내 신체를 병신처럼 만들었다. 곱사등이에 중앙으로 나갔다. 내 기묘한 동작선과 율동, 그리고 표정과 모둠뛰기하는 동작을 바라본 사람들은 하나둘씩 자리를 비켜 주었다. 나는 무대 중앙에 섰다. 다혜가 재빨리 웃옷을 벗어 내 등허리에 찔러 넣어 주었다. 조명이 밝아지며 나를 따라왔다. 다혜가 탱고리듬을 따라 내 주위를 돌기 시작했다. 나는 사정없이 흔들었다. 아프리카 토인들의 춤사위에서부터 코 큰 애들의 날렵한 춤사위까지도 섞어 만든 내 독특한 모둠뛰기 춤이었다. 머리와 어깨와 팔다리가 제각기 흩어져 놀았고 뱃속 깊숙이에서 뱉어 나오는 괴성까지 질렀다. 원숭이 떼거리가 꽥꽥거리는 건 아무것도 아니었다. 사람들은 우리 두 사람만 무대에 남겨 놓고 모두 제 자리로 돌아갔다. 열정의 춤은 끝났다. 박수 소리와 휘파람 소리가 진동했다. 나는 다혜를 번쩍 안아 가볍게 입맞추고 무대에서 내려왔다. 다혜는 그 순간에 입술을 빼앗겼는지조차 모르는 것 같았다. 자리로 돌아와 앉자 우리 두 사람이 밤새워 마실 만큼의 술병이 들어왔다. 부잣집 자식들도 이웃을 사랑할 줄은 알았다. 다혜의 얼굴이 약간 험상궂은 표정으로 바뀌었다. 입술이 도둑맞았다는 걸 안 것 같았다. "비겁해." 매몰찬 한마디였다. "난 정당해." "...... ." "그렇게 억울하면 파출소에 신고하면 되잖아. 여기 아주 파렴치한 입술 도둑놈이 있다고. 그러나 순경 아저씨는 나를 처벌하진 않을 거야. 현명한 순경 아저씨라면 다혜의 입술에 철조망을 쳐 주겠지. 입술에 지뢰를 묻어 놓든가." "정말...... 도둑...... 노에다 미음(바) 같으니라구...... ." "도둑놈. 조오치. 난 다혜에게만은 도둑놈이고 싶어. 아주 철저한 도둑놈, 다혜 거라면 하나도 남김없이 훔쳐올 수 있는 실력을 갖고 싶어." "취했군." 다혜는 모든 것을 내 취기로 돌려 버리려고 했다. "술에 취한 게 아니라 다혜한테 취한 거야. 달려들 땐 그 사내의 진정 같은 걸 이해할 줄 알아야 돼." 다혜는 꼿꼿이 앉은 채로 거푸 맥주만 마셨다. 나도 다혜처럼 말없이 맥주잔만 거푸 비웠다. "더 있을 거니? 나가자." 내가 먼저 침묵을 깨뜨렸다. 다혜가 빙그레 웃었다. "아깐 미안했어. 그러나 비겁한 건 사실였잖아?" "남의 입술을 훔치는데 누가 훔치겠다고 선전포고하겠어. 그런 사내는 거지한테 돈을 줘도 되느냐고 묻는 사내와 같은 거지." "지금 통행금지 시간인데 어딜 나간닥고 그래?" "지루하고 답답하잖아." "까짓것 나가보는 거야. 이왕이면 우리들의 빼앗긴 4시간을 악착같이 찾아먹는 거야. 어떻게 생겼는지도 봐 둘 필요도 있고. 안 걸리기만 하면 벌금만큼 돈을 버는 거고." 호텔과 연결된 비상구를 열고 밖으로 나오자 찬바람이 골목길로 쏴아 밀려오고 있었다. 뒹구는 휴지들과 고장난 형광등 불빛밖에 움직이는 게 없었다. "명동에는 숨을 곳이 많아. 도시 계획이 잘못된 게 이럴 땐 고맙지." 내가 성큼성큼 앞장 서자 다혜가 주춤거리며 따라왔다. "팔짱을 꼭 껴. 귀신이 나오기 전에는 결코 혼자 도망가지는 않을 테니까, 염려 마." "귀신이 나오면 튀겠다는 거야?" "그건 그때 가 봐서." 큰길로 조금만 올라가면 파출소가 있기 때문에 우회전 해서 골목길로 돌아가야만 했다. 골목길도 끝까지 보였다. 아무도 얼씬거리는 게 없었다. 우리가 길을 건너 골목길로 꺽어 돌자 앞골목에서 발자국 소리가 들렸다. 다혜가 숨소리를 죽이고 나를 더 힘주어 잡았다. "방범대원인가 봐." "우리는 도둑이 아니니까 방범대원을 무서워할 필요가 없어." "피이! 아까는 방범대원 시계까지 조심해야 한다고 해 놓구선." "어쨌든 수고하시는 그들을 피곤하게 하거나 놀라게 할 필요까지 없겠지." 우리는 건물 계단 옆에 바짝 붙었다. 아무리 생각해도 우리는 건물의 벽처럼 "난 이럴 때마다 투명인간이고 싶어." "쉿!" 다혜가 내 입을 막았다. 방범대원 두 명이 걸어오고 있었다. 우리는 숨을 죽이고 벽에 붙어 있었다. 방범대원은 우리 앞을 그냥 지나쳐 갔다. "수고하시는 저 아저씨들에게 복을 내려 주소서." 다혜가 속삭이는 소리로 이런 기도를 했다. "다음 골목에서 또 만나면 그런 소리 않게 되겠지." 우리는 골목으로 골목으로만 우회했다. 명동 골목은 언제 보아도 친근감이 가는 곳이었다. 파출소를 끼고 우회하여 다시 큰길까지 돌아 나왔을 때 우리는 다시 숨을 수밖에 없었다. 이번에는 순경아저씨였다. 고생 좀 시키지 말라고 해야겠어. 밤에 감기 걸리면 어쩌려고 자지도 못하고 돌아다니게해. 다혜가 여유있는 목소리로 이렇게 말했다. 순경은 천천히 걸어서 우리들 곁을 스쳐 지나갔다. 다헤가 말없이 순경의 뒤통수에다 대고 절을 했다. 나는 그런 다혜를 끌어안았다. "소리 지르면 들켜. 벌금 내고 재판 받고!" 낮은 목소리였지만 위엄있게 한마디를 했다. 다혜는 내 가슴에 안긴 채 어이가 없다는 듯이 웃었다. "앞으로 결코 저녁 일곱 시 이후에 단둘이 있진 않을 거야." 다혜가 몸을 빼내며 말했다. "나는 그놈의 통금을 자꾸 어길 거야." 무사히 빠져 나왔지만 큰 길에서 성모병원을 다 지나갈 때까지는 숨을 만한 곳이 없었다. "날 따라와, 빨리." 나는 다혜의 손을 잡고 빠른 걸음으로 걸었다. 성모병원 울타리에 바짝 붙어 좌우를 살핀 뒤에 다혜를 먼저 넘어가게 했다. 우리는 여유있게 성모병원과 명동 성당의 울타리를 타고 걸었다. "누구요?" 수위실에서 목청 굵은 소리가 튀어나왔다. "바람 쏘이러 나왔어요. 하루 이틀도 아니고 지겨워서 원...... ." 내가 능청스럽게 대꾸했다. "입원실요?" "예, 삼백 삼 호요. 환자도 환자지만 " 수위는 우리를 위 아래로 훑어보고 졸린 듯 하품을 했다. "어서 올라가쇼들. 감기 들면 정말 입원하게 될지도 모르니까요. 신혼이신 모양인데...... 안됐습니다." 수위의 상상력을 나는 존경하고 있었다. 다혜가 어깨를 들썩거리며 키득거렸다. 쪽문으로 들어가 지하실 쪽 계단에서 막아 놓은 출입금지판을 치우고 내려갔다. 지하실에는 응급실이 있었다. "여기서부턴 다혜가 나를 인도해 봐." 일단 병원으로 들어왔기 때문에 다헤에겐 안도감이 생긴 것 같았다. 병원 일이라면 자신이 있을 것 같았다. "난 아직 간호원이 아냐. 간호학과 졸업생일 뿐이지." "나를 훔치려 드는 짓 빼곤 뭐든지." "정말 내가 훔치면 안 되겠니?" "난 순결하고 싶어. 그것만은 도둑맞고 싶지 않아. 날 그렇게 봤다가는 다시 못 만나게 될 거야." "도둑맞지 않고 훔치지 않고 서로 주고받을 수도 있잖니?" "언어의 유희지. 그 얘기는 더 하지 마. 부탁야. 이 이상 더 하지마. 알았어?" "...... ." 나는 고개를 끄덕거렸다. 하나님. 뭐 뾰족한 수가 없겠습니까? 여자 마음이 후딱 돌아서 버리는 알약 같은 거나 부적, 굿, 최면술 따위라도 말입니다. 하나님, 사내 나이 스물 두 살이라면 얼마나 마음과 몸이 급한지 알 거 아닙니까. 하나님. 나도 알 만큼은 아는 사내인데 도대체 여자의 마음을 알 수가 없습니다. 여자들은 정말 마음과 몸이 급하지 않은 겁니까? 웬만하면 알려주세요. 혹시 하나님도 여자 마음은 모르는 거 아닙니까? "어딜 가려고 그러는 거야?" 삼일로 육교를 건너며 다혜가 불안한 듯이 물었다. "성모병원 시체 안치실." "영안실엔 왜?" "무사하고 편케 밤샘하자면 최적의 장소니까. 다혜도 도둑맞지 않을 장소지." "하필 영안실엔....." "시체는 한 줌의 흙일 뿐야." 다혜는 고개를 갸우뚱거렸다. 그리고 갑자기 손뼉을 쳤다. "아하! 노름하러 가는 거지? 그렇지?" 다혜는 내 속셈을 알아챈 것이었다. "노름이란 표현을 쓰지 마. 돈이 많아서 주체할 수 없는 사람의 짐을 조금 덜어주러 가는 거니까." 용돈이 궁해지면 내가 더러 돈을 마련하러 가는 곳 가운데 하나가 종합병원 시체 안치실이란 얘기를 언젠가 다혜에게 한 적이 있었다. "다혜. 같은 일이라도 이렇게 생각해 봐. 세계는 한 가족이다. 우리의 이웃이 죽어서 그 가족들이 슬퍼하는데 우리가 이 근처까지 와서 그냥 갈 수는 없잖아. 경건한 마음으로 주는 거라고 생각해." "저러다가...... 내가 죽어도 저럴까?" "지금 죽으면 너무 슬퍼서 따라 죽을 거고 나하고 결혼한 후에 죽으면 더 슬퍼서 따라 죽을 거고...... ." "공갈치는 데 세금도 붙지 않으니까 철판깔고 하는 게 남 보기도 좋지." "그러지 마. 나도 순정은 있다구. 마누라가 죽었을 대 슬피 울다가 화장실에 들어가 새장가 갈 것이 좋아서 혼자 키득거리며 웃을 놈은 아니라구." "조금만 따." "물론이지. 그들도 같은 인류인걸." 나는 시체실의 그 우악스런 철제 서랍 속에 누워 있는 시신 위에 노자를 놓고 나오는 사내였다. 물론 그의 짠지 같은 생전의, 어쨌든 문상객들이 돈푼이나 있는 사람들이었으면 좋겠다. 날이 밝으면 공민학교 애들의 학용품과 동화책을 사 줄 만큼만 딸 수 있게 말이다. 화투판이라면 어디든 좋았다. 화투가 서너 판만 돌면 나는 화투의 패를 모조리 읽을 수 있기 때문에 내 마음 먹기에 따라서 그 판을 흔들어 놓을 수 있었다. 다혜는 알고 있었다. 내가 계룡산에 들어가서 화투공부를 제대로 했다는 사실을. 그때 화투뿐 아니라 소매치기와 1백 장 묶음의 새 돈을 세면서 감쪽같이 두 장쯤 감출 수 있다는 것을...... . "딴 돈 가지고 허튼 데 쓰진 않겠지." 다혜가 육교의 계단에 서서 내게 손가락을 내밀었다. 나는 손가락으로 약속을 해 주었다. 하나님 조금만 따겠습니다. 홍길동 아저씨와 임꺽정 아저씨가 설마 지옥에 가 있지는 않겠죠? "쉬잇! 저기...... ." 다혜가 영안실 쪽 길을 가리켰다. 방범대원이 걸어오고 있었다. "눈 감아. 그리고 내 손을 살짝 잡고 따라와. 더듬거려야 돼. 눈먼 안마사를 생각해야 돼." "봉사, 안마사...... . 흐흣." 다혜가 눈을 감고 더듬거리기 시작했다. 방범대원이 우리를 발견한 것 같았다. 다혜는 조금 심하게 더듬었다. "금방 눈 먼 봉사 같애. 조금 능숙하게 해." 내가 속삭이듯 말했다. 더듬던 다혜의 동작이 조금 좋아졌다. "그냥 지나갈까?" 다혜가 걱정스러운 듯이 물었다. "눈 먼 사람들에게가지 통행금지가 적용될 필요는 없잖아. 낮이나 밤이나 같은 걸 머. 통행금지란 눈 뜨고 돌아다니는 사람에게나 필요한 거니까." "양심적인 판사 하나가 가련하게 썩고 있네." "알아 줘서 고마워." 방범대원이 가까이 왔다. 나는 꾸벅 절을했다. "방범대원 아저씨야, 미스 서." 내가 다혜의 귀청 가까이에 큰 소리로 말했다. 다혜가 꾸벅 절을 했다. 방범대원이 다혜의 얼굴을 바짝 들여다보고 고개를 약간 흔들었다. "못 보던 얜데." "털보네 집에 새로 온 아가씨예요." 내가 재빨리 대답했다. "꼰대 보고 우리 배고파 죽겠다고 해라." "아저씨가 직접 얘기하세요. 잘못 했다간 우리만 미움 받아요." "한번 간다고 그래." "예, 수고하세요." 우리는 돌아서서 걸었다. 방범대원이 뒤통수에다 대고 물었다. "오늘도 쪽바리였냐?" "누가 아니랍니까? 그 새끼들 죄다 옴 걸렸나 봐요. 긁어주지 않으면 자빠져 자질 않아요." 방범대원의 웃음소리가 묘하게 들렸다. 다혜가 눈을 뜨고 키득거렸다. 시체 안치실 문을 열고 들어서던 다혜가 나를 흘끔 쳐다보고 한쪽 눈을 찡긋해 보였다. "고양이라도 한 마리 울었으면 좋겠다." "으스스한 소리 하기 없기." 다혜가 장난스럽게 내 옆구리를 쳤다. 시체 안치실로 들어섰다. 아무도 우리를 눈여겨보지 않았다. 그들은 슬퍼하고 있거나 졸고 있지 않으면 화투판에 신경을 쓰고 있었다. 술상을 벌여 놓고 망자에 대한 얘기를 하는 사람들조차 졸음기가 있었다. 오직 두 눈 똑바로 뜨고 있는 것은 노름패거리밖에 없었다. 향내가 콧속을 매캐하게 했다. 담배 네 개가 놓여 있었고 꽃바구니가 유독 큰 자리의 사진은 밝게 웃고 있는 사진이었다. 망자 자신이 죽었다는 사실에 만족하고 있는 것이나 아닌지 모르겠다. 그렇지 않으면 망자가 살아있을 때 딱 한번 저 사진을 찍을 때만 웃었는지도 모르겠다. "분향이나 하고 신세를 지지 그래." 자리에 아무렇게나 걸터앉은 다혜에게 이렇게 말했다. "누구한테 해?" "제일 젊어 보이는 사진 앞에. 저 웃는 사진이 제일 젊은 것 같잖아." "그러다가 감춰 놓은 애인으로 오해받아 머리끄덩이 잡히게." "누가 알아. 상속이라도 조금 떼어 받을지?" 보았다. 이왕이면 판돈이 큰 곳을 골라 잡을 셈이었다. 한 방에서 밤생을 하자면 어느 쪽 문상객이든지 가릴 필요가 없었다. 죽은 자를 옆에 두고 살아 있다는 걸 자축하기 위해서 약간의 금전적 손실을 초래하는 건 기분 좋은 것이었다. "난방도 잘 됐것다, 향내도 좋것다. 숙식 일체 무료것다, 한숨 자 둬." "설마 뒷돈 대달라고 깨우진 않겠지?" "내가 저 철제 서랍 속에 들어가는 한이 있더라도 그런 불상사는 일어나지 않을거야." "누가 알아? 그 도사들이 여기에도 있을지." "벌써 손 놀리는 거 봐 뒀어. 여기는 전부 아마추어들뿐야." "물론이지." 나는 흔쾌히 대답하고 일어섰다. 다혜는 목도리를 베개삼아 누웠다. 갑자기 어머니 생각이 났다. 딱지치기나 구슬치기를 해서 잃고 오면 우리 어머니는 화를 냈지만 신주머니 가득 따가지고 오면 등을 토닥거리며 즐거워했다. 그래서 나는 무슨 짓을 하든지 딱지나 구슬을 따오기만 했다. 실력으로 안 되면 망치라도 들고 나가서 꼬마의 머리통을 후려쳐서라도 따가지고 왔다. 내 사전에 잃는다는 건 없어. 아암, 없고말고. 나는 무조건 따야 돼. 오늘 밤도 마찬가지야. 만약 잃게 된다면 그들의 호주머니 속에 내 손가락이 들어가는 불상사가 생겨도 할 수 없어. 하나님, 눈 좀 감아 주십쇼. 이 넓은 놈의 세상에 볼 것도 많은데 하필 이런 시체 안치실을 보진 않겠죠. 이 시간에 얼마나 구경할 게 많습니까. 촬영해 두었다가 볼만한 것들이 얼마나 많겠습니까. 내가 약간의 현금을 챙긴다고 해서 하나님이 손해 날 건 없지요. 부동산 투기에 목숨을 바친 저 기라성 같은 졸부들을 좀 보십시오. 선량한 서민들의 목줄을 10년쯤 졸라 버린 졸부들은 그냥 두면서 이까짓 노름판에서 약간의 현금을 챙긴다고 눈을 흡뜨고, 치부책에 죄명을 기록하고, 사후의 심판대에서 보자고 이를 갈아서야 쓰겠습니까. 하나님, 나를 섭섭하게 하지 말고 아가리가 큰 도둑놈들이나 좀 두 눈 똑바로 뜨고 어느 해 여름방학이었다. 나는 어머니의 간섭을 피해서 연고가 닿는 암자로 갔다. 그 암자에는 나 말고도 고시공부를 하러 온 사람이 다섯 명이나 더 있었다. 암자에는 귀 어두운 보살 한 사람을 빼곤 모두 큰 뜻을 품고 들어온 사람들밖에 없었다. 그러나 나는 며칠 되지 않아서 우리 여섯 사람이 모두 고시공부를 하러 둘어온 것이 아니라는 걸 알았다. 그들은 나보다 서너 살씩 위였다. 그 가운데 맏형 노릇을 하는 동주(東注) 형님은 소매치기 두목이었고 둘째형 노릇하는 성근(聖根)이 형님은 전문적인 노름꾼이었다. 나머지 형님들도 역시 오토바이 전문털이의 사람이었다. 나는 어린 나이였지만 그들을 존경했고 그래서 그들의 귀여움을 받았다. 그들 역시 내가 고시공부하러 온 학생이 아니라는 걸 쉽게 알아차렸고 그들과 어울릴 수 있는 소양이 있다는 걸 인정해 주었다. 동주 형님은 새벽부터 칼쓰는 연습과 호주머니 뒤지는 연습을 했고 성근이 형님은 꼭두새벽부터 화투장을 쥐고 갖가지 묘기를 연습하곤 했다. 차라리 그들은 경건해 보였다. 그들은 또 화투라는 낱말이나 소매치기, 금고털이 따위의 낱말은 쓰지 않았다. 대신 화도(화투의 도)라거나 빌림굿(남의 호주머니 속에 있는 걸 빌린다는 뜻)이라거나 하는 말을 썼다. 형님들은 내게서 호신술을 배웠고 나는 화도나 빌림굿을 배웠다. 그들은 기술자를 만드는 데도 엄숙한 규율이 있었다. 새벽 네 시에 일어나서 무릎 꿇고 앉지 않으면 절대로 기술을 가르쳐 주지 않았다. 내가 형님들에게 배운 바로는 그것은 노름이라거나 소매치기라고 결코 할 수가 없었다. 정말 도를 깨우치려는 신선과 같은 생활이었다. "신선되기가 어려운 게 아니다. 신선에는 하늘에만 사는 천선, 심산 유곡이나 동굴 속에 사는 지선, 세상에 살다가 죽은 다음에 신선이 되는 시해선(尸解仙)이 있다. 그 중에서도 선탈(蟬脫)이 있지. 이것은 옷을 입고 있는 그대로 끈 하나 단추 하나 풀지 않는 것이다. 또는 감옥에 잡혀가거나 호송 도중이거나간에 수갑이나 포승줄을 조금도 건드리지 않고 몸을 빼내어 사라지는 걸 말한다. 물론 득선하는 길은 길고도 험난하지만, 하면 되는 것이다." 동주 형님은 가부좌를 틀고 앉아서 미동도 하지 않고 이렇게 말을 시작했다. 나는 가슴이 콩닥거리며 뛰기 시작했다. 선탈할 수 있는 경지, 그런 신선이 될 수 있는 길이 있다는 걸 처음 들었던 것이다. 나는 정말 신선이 되고 싶었다. 가슴 속이 찌르르 감전되는 것 같았다. "득선은 아무나 되는 게 아니다. 첫째, 도골(道骨)로 태어나야 한다. 도골을 타고 난 사람은 국가에 등용되지도 못하고 시험이나 진급이나에 항상 실패하는 사람, 즉 재주나 사람이 대개 도골이다." 나는 속으로 박수를 쳤다. 만약 그런 경우가 도골이라면 나는 분명히 도골인 것이다. 가슴이 부르르 떨렸다. 첫번째 관문을 통과했다는 충격이었다. "둘째는 수덕(修德)이다. 모름지기 덕을 쌓아 공덕으로 인격을 형성해야 한다. 세째는 지성무욕(至誠無慾)으로 뜻이 굳세고 참을성이 많아야 하며 정성이 지극하고 사리사욕이 없어야 한다. 네째는 박식(博識)해야 한다. 사통팔달할 지식을 익혀 막히는 게 없어야 한다. 다섯째는 우사(遇師)라 해서 반드시 스승을 만나야 한다. 신선에 관한 기록은 보통 읽어서 해득하기 어려워 명산대천을 찾아 다니다가 되는 것이다." 나는 노트에다 필기를 하면서 동주 형님의 말 한마디 한마디를 흘려 보내지 않았다. 이렇게 내가 진통하는 걸 보니 나는 드디어 득선하는 길을 찾은 것인지도 모르겠다. "가장 중요한 것은 득선을 위한 수련이다. 첫째는 보정(保精)으로 심성의 단련이며 둘째는 인기(引氣)로 여러 가지 호흡법이며 복이(服餌)는 여러가지 선약을 복용하는 것이다." 심성단련을 하면 정신과 육체가 자유롭게 분리되어 행동할 수 있고 보정을 잘 하려면 깨소금, 설탕, 꿀, 커피, 쇠고기 등 맛이 진한 걸 먹어서는 안 된다고 했다. 또한 신선은 가슴이나 배로 호흡하는 게 아니라 수련을 통해 발꿈치로 숨을 쉬어야 한다고 그리고 꼭두새벽에 일어나 심성단련을 하는 이유는 복일기법을 익히기 위해서 그런다는 것이었다. 복일기법이란 이른 아침에 해가 뜨기 전에 동쪽을 향하고 앉아서 눈을 감고 주먹을 힘껏 쥐고는 해 뜨기를 조용히 기다린 뒤에, 해가 뜨면 아래 윗니를 아홉 번 부딪치는데, 햇빛이 다리 끝까지 비추게 되면 그 동안에 마흔 다섯 번의 심호흡을 하고 침을 아홉 번 삼키며, 이를 다시 아홉 번 부딪친다고 했다. "이건 선약이다. 명심해서 복용해라." 동주 형님이 준 환약은 복령(茯笭) 가루와 생밤가루, 송엽가루 등 몇 가지를 섞어 아홉번씩 찌고 말리고 또 찌고 말린 거라고 말했다. 그 외에도 형님들에게서 배운 신선이 되는, 나는 얼마나 열성으로 실천하고 수련을 했는지 모른다. 그때의 열정에 사로잡힌 수련은 지금 생각해도 후회가 되지 않는다. 그만큼 득도한다는 건 오묘한 매력이 있었다. 나는 가끔 밖에 나가서 형님들한테 배운 실력을 연습해 보곤 했다. 더러는 형님들이 지켜보는 자리에서 실력발휘를 해 보이곤했다. "넌 대성할 싹수가 있는 놈이다." "넌 역시 도골야. 넌 득도할 수 있어." "우리 시대에 가장 탁월한 놈이다." 형님들은 아랫동네의 주막집에 가서 동네 청년들에게 보인 화도나 산 너머 절에 가서 유흥객들에게 보인 빌림굿을 보고 그런 칭찬을 아끼지 않았다. "화도나 빌림굿을 하는 건 득도의 수단으로 아니어야 한다." 내가 암자에서 어머니에게 붙잡혀 내려올 때 형님들이 한 말이었다. 정말 그때 나는 암자에서 내려갈 생각을 하지 않았다. 학교도 때려치우고 형님들과 함께 득선의 경지에 빠질 각오였었다. 우리 어머니. 존경하지 않고 못 배길 어머니의 극성이 아니었던들...... . 나는 형님들 말처럼 벌써 대성했을 텐데. 물론 요즘도 가끔 써먹는 수가 없잖아 있었다. 득선의 경지는 아니지만 약이 오를 때면 가끔씩 써먹곤 했다. 도깨비 사장에 가서 바가지를 쓰고 돌아설 때라든지, 영화가 선전한 것보다 지나치게 엉터리였다든지 하면 장사꾼 호주머니와 극장의 기도 아저씨 호주머니에서 본전을 찾았다. 은행에 갔다가 불친절한 아가씨를 만나기나 하면 그냥 나오기 싫었다. 1천 원권 1백 장 묶음을 내줄 때 나는 아가씨가 보는 앞에서 돈을 꼭 세어 본다. "아가씨 두 장이 모자라는데요." 그러면 불친절한 아가씨는 은행을 뭘로 보느냐는 듯이 불쾌한 표정으로 돈을 낚아채어 두 번이나 세 번씩을 세고 더 고개를 세게 흔들고 만다. 결국 그 아가씨는 내게 두 장을 더 주게 된다. "고맙습니다, 아가씨. 친절하게 해 주셔서." 나는 돌아서서 나온다. 그리고 소매 속에 곱게 네 번 접어 넣은 두 장을 팔랑거리며 웃는다. 그래서 사람은 언제나 친절할 필요가 있는거다 스팀 박스가 있는 마룻바닥 옆에는 꽤 큰 판이 벌어져 있었다. 섯다판이어서 큰 재미를 보기 전에 적당히 일어서지 않으면 눈치채이기 쉬울 것 같았다. 도리짓고땡이거나 고스톱 판이라면 전혀 눈치채지 않고 챙겨 넣을 수 있겠지만 그런 판은 판돈이 적은 게 흠이었다. 나는 옆에 끼여서 담배도 권하고 술잔도 권하며 얼굴을 익히기 시작했다. 그들이 내 무료함을 알아 줄 때까지 그것을 계속할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그들이 단일팀인지 아니면 적당하게 섞인 팀인지도 알아낼 필요가 있었다. 단일팀이라면 끼여들기가 쉽지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 "형씨도 심심할 텐데 끼여 보지 그럽니까." 몇 잔째 받더니 내게 말을 걸었다. "일루 끼쇼. 어차피 귀신하고 한 방에서 새울 바에야 산 사람끼리 뭉칩시다." 술이 거나해진 턱이 뾰족한 사내가 술잔을 내 코끝에 내밀며 말했다. "글쎄요, 심심하긴 한데...... . 밑천도 작고...... ." "아따. 젊은 사람이...... . 따면 될 거 아뇨." 너 잘 걸렸다. 아암, 잘 걸리고말고. 나는 뚱보 옆에 끼여 들었다. 서너 판 돌리기 전에 화투장을 알 수 있을 것 같았다. 이 친구들은 손톱으로 표를 내도 모를 것 같았다. 프로가 한 사람쯤 끼여 있다면 다른 방법을 쓸 수밖에 없지만, 전혀 그럴 필요가 없을 것 같았다. 작은 판은 잃어 주어야 한다. 그리고 처음에는 잃어 주고 후반전에 챙겨야 한다. 또 딸 때는 소리 없이 따고 잃을 때는 소리내며 잃어야 하며 언제나 좌중에게 눈치 채이지 않게 고액권 같은 걸 챙겨 넣어야 한다. 더러는 어리숙하게 족보를 잃어버려서 병신 소리도 들어야 한다. 뿐만 아니라 돈 앓은 사람에게 약간의 현금을 무상으로 주는 아량도 가져야만 한다. 그래서 잃은 자의 적개심이나 눈초리를 피해 두는 것이 돈을 챙기는 데 편한 것이다. 나는 이 몇 가지 원칙을 철저히 지켜 나갔다. 새벽녘에 나는 내가 시작할 때의 계산만큼 소리 없이 챙겨졌다는 걸 알았다. 다혜에게 손가락으로 동그라미를 그려 보였다. "빨리 가서 삼촌 모셔와. 엄마가 장례 절차 때문에 상의할 게 있대. 옆 골목에 가면 삼일 여관이라고 있어. 2백 6호야. 당숙하고 아저씨들도 빨리 오라고 해." 다혜가 내 어깨를 잡고 이렇게 말했다. 나는 주저하는 표정을 지었다. "빨리 갔다 오쇼." 뚱보가 거들어 주었다. 나는 기지개를 켜며 일어섰다. 바깥 바람은 차가웠다. 날이 뿌옇게 밝아오고 있었다. 우리는 팔짱을 끼고 보무도 당당하게 걸었다. "다혜가 행복할 만큼 땄어." "어련할라구. 나 해장국 먹고 싶어." "아마 해장국 백 그릇 값은 될 거야." "히야! 반타작해야겠는데." "안 돼. 이건 약속대로 학용품 살 거야." "...... ." 다혜는 내 팔을 더욱 꼭 꼈다. 그녀의 젖무덤이 팔꿈치에 물씬하게 닿았다. 그러나나는 초조해하지 않을 작정이었다. 다혜는 내 것이 될 테니까. 우리는 신호등을 무시하고 길을 건너갔다. 해장국집 앞까지 우리는 뛰었다. 해장국이여. 그대에게 신의 가호 있으시라. |
첫댓글 회원님
그동안 일일 4편의 현대소설과 무협소설을 총 8편을 게재했으나
댓글이 없는 소설게제는 무의미 하다는 것을 알고
소설게재를 줄여 그동안 나갔던 것입니다.
낼모레면 80줄 소일거리로 즐기다 보니
김홍신의 소설 게재를 끝으로
게제활동을 접을까도 고심중 입니다.
이번소설을 게제여부를 참으로 고심했습니다.
사랑하는 울님들께 부탁이 있습니다.
좋은 소설도 보시고,기왕에 카페에 들어 오셨으면
소설만 보시고 슬그머니 나가시지 마시고
<댓글방>에 들려 눈도장 찍으시고
댓글도 부탁드립니다.
타이핑이 싫으면 다른 사람 댓글 복사해서
댓글창에 붙이면 됩니다. ㅎㅎㅎㅎ고향설
즐감 하고 갑니다
비밀글 해당 댓글은 작성자와 운영자만 볼 수 있습니다.23.11.02 16:11
항상 감사 드립니다. 오늘도 재미있게 앍고 갑니다.
감사합니다.
감사합니다
항상 감사 드립니다. 오늘도 재미있게 앍고 갑니다.
재미있게 보고 있습니다
또 다시;봐도 재미지네요 감사합니다.
잘 보고 있습니다